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5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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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프롤로그


"유목은 목축의 특수한 형태이다. 목축은 가축을 사육하여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농경과 마찬가지로 '식량생산경제'에 속한다. 다만 농경은 식물을 순화시키고 목축은 동물을 순화시켜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경제생활이 수렵→목축→농경이라는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은 이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계절적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하고,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목의 특징은 이미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간파한 바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나 성채를 갖지 않고〉, 〈가축과 함께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며〉, 〈모두 말 위에서 활을 쏠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는 유목민이 농경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이동생활, 목축경제, 기마술을 지적한 것이다."(15)


1) 고대 유목 국가


"스키타이Scythai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목민 집단으로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었다.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 왕 에사르핫돈(재위 기원전 680~669년)과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고 본다." "서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도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고, 겁먹은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키타이 왕 마디에스에게 직접 선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했다. 스키타이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 왕국의 공격을 받아 패한 뒤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다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26)


"스키타이가 역사상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한 집단이라면, 흉노는 유라시아 동부 초원에서 처음으로 유목국가를 세운 이들이다. '흉노'라는 이름은 기원전 318년 전국 시대의 5개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스키타이에 비해 3세기 반 정도 늦은 셈이다." "융戎, 적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 위주의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측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목민, 즉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전국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나는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종족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농경생활을 하며 '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를 자처했던 중원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의 생활과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동호, 임호, 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의 범주에 속하는 집단이었다."(34-5)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그 주민들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중국 측 문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흉노가 발흥하여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고 한 제국이 이에 대응하여 외교·군사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였다." "흉노의 서역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그러나 흉노에게 복속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일종의 세금을 수취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서』 「서역전」에는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는 일축왕은 동복도위를 두어 서역을 통령토록 했는데, 항상 언기, 위수, 위려 사이의 지역에 거주했으며,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를 취하고 물자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복도위는 현재 카라샤르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타림 분지 연변의 도시들에게서 '부세'를 거두었다. 이러한 '부세'는 각 도시가 갖고 있던 경제력, 즉 호구의 규모에 비례했을 것이다. 한나라도 서역을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뒤 수행했던 중요한 일이 바로 호구 조사였다."(48-9)


"흉노는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뒤 격렬한 내분에 휩싸였다. 우현왕이었던 악연구제가 선우위를 계승한 직후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좌익 귀족들을 탄압하자, 좌익 귀족들은 호한이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흉노의 내분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그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함으로써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몽골 초원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호한야는 기원전 5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 한의 황제에게 스스로 신하를 칭했다. 호한야는 입조와 칭신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질자를 들이고 공물을 헌납함으로써 중국의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한과 흉노의 관계도 '화친관계'가 아니라 '조공관계'로 바뀌었다." "흉노는 한에 대해 명분에 불과한 정치적 복속을 표방하는 대신 막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아냈고, 이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탈→위기→물자 지급이라는 종래의 방식보다는 훨씬 나았다."(54-5)


"기원후 48년 흉노는 또다시 내부의 격변을 겪으며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니, 이를 기원전 50년 전후의 분열과 구별하여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부른다. 2차 분열의 원인은 1차 분열과 마찬가지로 선우위를 놓고 벌어진 계승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흉노는 후한 양국은 과거 화친이나 조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중요한 특징은 ① 흉노인들이 한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 ② 칭신하고 공물과 질자를 보내는 것은 같으나 한 조정으로부터 사흉노중랑장이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그의 감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흉노중랑장은 후일 12명으로 늘었지만, 흉노 내부의 행정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흉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 제국 내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기보다는, 그 보호 아래 하나의 국가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 본국의 습속을 유지하며 한나라에 복속하던〉 후한의 '속국'이라 할 수 있다."(56-7)


2) 투르크 민족의 활동


"돌궐突厥(튀르크Türk)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를 분할하여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무한 카간은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 자신은 외튀켄에 자리잡고, 동방과 서방은 가까운 일족에게 통치를 맡겼다. 타스파르 카간도 이러한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시에 좌우현왕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통치자의 칭호도 모두 '카간'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돌궐의 이러한 지배 방식은 '분국分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여 마침내 제국이 분열되기에 이른다. 지배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76-7)


"아랍 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유라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661년 새로운 세습적 칼리프 체제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고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긴 뒤부터였다." "738년 후라산의 신임 태수로 임명된 나스르 빈 사야르는 종래 정복 일변도의 진출 방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정책을 표방했다. 서투르키스탄 지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력적 강제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고 개종자에게는 세금 혜택을 주었다. 바로 그때 후라산에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세력이 이븐 무슬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나스르 빈 사야르가 사망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많은 서투르키스탄 주민들이 그와 연합함으로써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아랍 세력이 서투르키스탄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가는 사이, 때마침 당 제국은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92-3)


"751년 여름 당과 아랍의 군대가 탈라스 강가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당군의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아랍군은 751년 7월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다. 닷새간 대치하던 중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룩 유목민들이 배반하여 아랍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겨로가 당군은 좌우로 협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755~63년)이 터지면서 당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이슬람 세력이 서방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 유목민들이 북방을 차지하며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어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94-5)


"안사의 난은 당 현종 시대에 화북 변경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출신 안녹산과 사사명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745년 돌궐 제국이 붕괴하자 그 영내에 있던 수많은 소그드인들이 안녹산 휘하에 편입되었고, 이들이 그 뒤 반란의 주된 군사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위구르의 지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당의 황제와 장군들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지만 그들의 약탈을 멈추지는 못했다. 762년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은 위구르에게 또 한 번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4000명의 기병이 남하하여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했다. 당나라가 이처럼 극도로 무력해진 상황에서도 위구르는 당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변방에 시장을 열어서 말과 비단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만 했다. 이는 중국을 영토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화친이나 교역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100-1)


"위구르 제국 시대에 몽골 초원에는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현상들, 특히 정주문명의 요소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성곽도시의 출현이 좋은 예이다." "위구르인들의 성곽도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3대 뵈귀 카간이 세운 오르두발릭(오늘날 카라발가순)이다. 이곳은 중국, 중앙아시아, 서부 유라시아 초원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돌궐·위구르·몽골이 모두 이곳에 제국의 중심을 두었다." "오르두발릭의 모습은 821년경 그곳을 방문한 아랍인 타밈 이븐 바흐르가 남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위구르의 카간이 제공한 역참을 이용하여 초원을 횡단할 수 있었다. 성벽에는 거대한 철문 12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 안에는 많은 시장들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위구르 시대에 이러한 대형 성곽도시의 출현은 돌궐 제국 이래 독자적인 문자의 창제와 사용, 보편 종교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히 유목사회의 '문명화'라고 부를 만하다."(102-3)


3) 정복왕조와 몽골 제국


"'카라 키타이Qara Kitai'는 여진의 공격으로 거란 제국이 망한 뒤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거란인 및 그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역사상 '서요西遼'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125년 거란 제국 멸망 후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인들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1137년부터 서투르키스탄을 경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서부 카라한 왕조가 있었지만 이미 쇠약해져 신흥세력 셀주크에 복속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의 군주 산자르는 서부 카라한의 마흐무드와 연합하여 1141년 가을 카트완 평원에서 카라 키타이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전투는 셀주크의 참패로 끝났고, 야율대석은 그길로 사마르칸드에 입성했다. 카라 키타이는 카라한 왕조, 천산 위구르 왕국 등을 부용국으로 삼고 샤흐나(샤우캄)이라는 관리를 보내서 감독했다. 이 왕국은 13세기 초 칭기스 칸에게 쫓겨 망명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권력을 빼앗길 때까지 반세기 이상 존속했다."(122-3)


"9세기 중반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하고 다수의 위구르 유목민들이 초원을 떠나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정작 키르기즈인들은 초원에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살던 예니세이 강 유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자 새로운 주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을 비롯한 몽골계 집단들은 다양한 시차를 두고 풍부한 초원을 찾아 이주해 들어왔다. 이 몽골계 집단들은 당대의 한문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이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에서 칭기스 칸이 출현했고, 그 후 그곳의 유목민들은 모두 스스로를 '몽골'이라 불렀다. 『몽골비사』와 『집사』에도 이들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흥미로운 설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126-7)


"12세기 중반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은 '울루스ulus'라 불리는 집단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울루스라는 말은 원래 '사람', '백성'을 뜻하지만, '부족', '나라'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 대표적인 울루스로는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몽골 등이 있었다." "울루스라는 사회조직은 '오복oboq'이라는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는 울루스 안에는 칭기스 칸이 속한 보르지긴을 위시하여 바룰라스, 우루우트, 망구트 등 많은 오복들이 존재했다. 이 오복은 동일한 '뼈(yasun)'를 갖는 부계 친족집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일한 혈족 집단이 아니라 어떤 한 가문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었다. 사실 12세기 유목민 사회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분화가 확인된다. 정치적 종속 관계에 따라 '노얀noyan'이라는 지배층, '카라추qarachu'라는 평민, '보골boghol'이라는 예속 집단이 존재했다. 울루스는 최종적으로 '칸khan'의 지배를 받았다."(128-9)


"1260년경 쿠빌라이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 제국의 지배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는 하나의 통일제국이 4개의 지역 정권, 즉 '칸국khanate'으로 분열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 방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올바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 즉 '대몽골 올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는 칭기스 칸 일족들이 보유하는 다수의 울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이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14세기 중후반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울루스 상호 간의 역관계가 변화하면서 몇몇 대형 울루스들이 사실상 제국을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 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 제국이 4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142)


"따라서 쿠빌라이가 집권과 함께 중국적인 왕조인 '원元'을 창건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 물론 그는 제국의 수도를 당시 '키타이'라 불리던 내몽골·북중국으로 옮기고 중국식 연호와 제도를 채택했다. 1271년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자를 택하여 국호로 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곧 독립된 왕조의 탄생을 말해주는 증거는 아니다. 비록 한문 자료에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4세기 전·중반의 비문들을 보면 〈대원이라 불리는 대몽골 울루스〉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원'이 몽골 제국의 한자식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대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 카안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142-3)


4) 계승국가의 시대


"티무르는 1360년부터 시작된 투글룩 테무르 칸의 침공과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는 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güregen)'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1405년 중국 명조 원정길에서 사망할 때까지 유라시아 각지를 누빈 희대의 정복자였다." "당시는 몽골 제국과 칭기스 일족의 카리스마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대였다. 그의 끊임없는 원정도 실은 권력의 합법성이 취약한 그가 차가다이 부족민들의 내부적 불만과 반발을 밖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수행하는 '성전', 그리고 대몽골 울루스의 재건이라는 명분과 목표를 내세워 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170-1)


"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에는 중앙유라시아에서 대규모 민족 집단들이 출현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14세기 말~15세기 초 주치 울루스가 약화되어 분열하자 아불 하이르 칸이 울루스의 좌익에 속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즈벡 울루스'이다." "한편, 아불 하이르의 강력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치의 후손들 가운데 기레이와 자니 벡이 유목민들을 이끌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톈산 북방의 모굴리스탄 초원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들은 우즈벡 울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카자흐Qazaq'라 불렸다." "키르기즈는 고대 이래로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 살면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15세기 전반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러시아 역사학자 바르톨드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즈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6-7)


"1487년 칸으로 즉위한 다얀 칸(바투 뭉케)은 약화된 동몽골을 통합하여 일으켜 세운 뒤 모두 6개의 만호(tümen)로 나누어 자식들에게 분봉했다. 그 뒤 몽골을 지배한 칭기스 일족은 모두 다얀 칸의 6만호를 지배했던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칭기스 일족의 역사에서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얀'이라는 명칭은 대원大元을 음역한 것이므로 몽골 제국(대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선언도 내포하고 있다."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온 몽골인들을 모두 6만호로 재편하여, 좌익에 차하르·우량카이·할하의 3만호를, 우익에 투메드·오르도스·윙시에부의 3만호를 배치했다. 그는 이 6만호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유목하는 지역적 범위를 정하고, 각 만호를 지배하는 칸에는 자기 아들들을 임명하여 세습하게 했다. 다얀 칸과 그의 후계자 보디 알락은 차하르부의 수령이자 좌우익 전체를 지배하는 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6만호 체제는 이후 몽골 유목민의 정치적 구성의 골간이 되었다."(182-3)


"중앙유라시아에 등장한 수피 교단들 가운데 낙쉬반디 교단은 서아시아 각지는 물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서북부, 동남아, 인도, 동유럽, 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국제적' 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장로들은 '호자khwaja(和卓)'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그 복수형인 '호자간khwajagan'은 교단의 별칭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아시스 지대의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벡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확보한 그들은 무장한 추종세력들을 배경으로 칸위 계승분쟁에도 간여하여 강력한 세속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마침내 1680년 호자 아팍크는 준가르 군대를 앞세워 카쉬가리아 지배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몽골 제국 이후 확고하게 유지되던 칭기스 일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등장한 '호자' 집단이 정주적 토착 수령인 '벡' 집단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88-9)


"몽골 제국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 특히 사카파 교단이 칭기스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티베트 불교도 침체를 겪으며 몽골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16세기 후반 알탄 칸의 적극 후원에 힘입어 다시 흥륭했다. 다얀 칸의 적통인 차하르부 출신이 아닌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1576년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대표 소남 가초를 초청하여 청해의 차브치알에서 역사적인 회견을 가졌다. 소남 가초가 알탄 칸을 쿠빌라이의 전쟁轉生으로 인정하자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단의 스승들에게 이 칭호를 추존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기 때문에 이 칭호는 '사해와 같이 넓은 지혜를 지닌 스승'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남북 몽골에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몽골의 종교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몽골과 티베트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190-1)


5) 유목국가의 쇠퇴


"17세기 전반 청 제국의 출현은 중국과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 세계 전체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들은 처음에는 몽골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오히려 그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나아가 몽골과 정치·종교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티베트를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서몽골 준가르를 붕괴시킴으로써 톈산 남북의 동투르키스탄까지 정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청 제국의 흥기는 중앙유라시아 여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홍타이지는 '주션'과 '아이신 구룬'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만주'와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포하여 자신의 제국이 대원의 적통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사강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하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홍타이지가 '정권(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194-5)


"1728년 러시아와 청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보완하여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청에 양보했지만, 사절단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르친스크와 캬흐타 등 변경 도시에 시장을 개설하여 상인들이 상대편과 물자를 매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청은 러시아에 교역상의 특권을 허가해준 대신 아무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준가르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갈단은 1690년 이르쿠츠크에 있던 골로빈에게 사신을 보내 할하 침공을 위해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를 중립화시킨 다음 갈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준가르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장차 중앙유라시아의 세계를 중국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점이었다."(198-9)


"1757년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복속시킨 청군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위원魏源은 『성무기聖武記』에서 준가르인의 4할은 천연두로 사망하고 3할은 청군에 살해되었으며 2할은 카자흐로 도망하여, 1할만이 고향에 남았다고 적었다. 건륭제는 아예 '준가르準噶爾'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얼러트額魯特(Ölöt) 혹은 오이라트厄魯特(Oyirat)라는 말로 대체하도록 했다. 청조는 준가르의 붕괴와 함께 그에 복속해 있던 카쉬가리아도 당연히 제국의 일부가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호자'라 불리던 수피 장로들의 지휘하에 토착 무슬림들은 의외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에 건륭제는 1758~60년 본격적인 정복전에 착수했다. 호자 형제는 바닥샨 산지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유목하던 키르기즈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수급이 청군에게 인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청 제국은 톈산 북방과 남방을 모두 장악하여 중앙유라시아 정복을 완료했다."(208-9)


"청 제국은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톈산 남북의 초원과 사막 지대를 정복한 뒤 그곳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는데 이는 '새로운 강역'을 뜻한다. 신강은 내지와는 달리 성省으로 편성되지 않았고, 몽골·티베트·만주 등지와 함께 일종의 특별 군사구역으로 설정되었다. 즉 청은 신강과 같이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관이 아니라 군관을 배치했으며, 이들 외지인과 현지 토착민 사이에 행정적·공간적 거리를 두는 분리 통치의 원칙을 적용했다. 이를 위해 청은 신강을 세 개의 군사구역(준가리아, 천산동로, 천산남로)으로 나누었다." "청조는 현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벡beg(伯克)이라는 토착 지배층을 활용했다. 벡은 과거에는 유목집단의 수령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17세기 들어 그들이 정착하면서 정주 지배층에 대한 명칭으로 바뀌었다. 청이 정복한 이후 과거 여러 직능을 수행하던 관리들의 명칭 뒤에 일률적으로 '벡'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벡 관제를 시행한 것이다."(212-3)


222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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