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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9월
평점 :
1장 · 기본 조리법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학자들은 목탄 같은 가연성 물체에 불을 붙이면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물질이 방출되면서 타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즉, 목탄에는 다량의 플로지스톤이 함유되어 있어서 한번 불을 붙이면 오랫동안 탈 수 있으며, 플로지스톤이 완전히 고갈되거나 주변의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연소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물체가 탈 때 플로지스톤이 방출된다면 연소가 끝난 후에는 무게가 가벼워져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금속이 불에 타면 타기 전보다 무거워진다. 라부아지에는 정반대의 설명을 제시했다. 연소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기가 물체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에 탄 물체가 무거워지는 것은 연소 과정 중에 공기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아니라 ‘연료와 결합하여 연소를 일으키는 기체’임을 깨닫고, 이것을 “산소oxygen”로 명명했다. 21-3)
2장 · 가장 작은 조각
돌턴은 이슬비가 내리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가 많은 지역: 옮긴이)로 종종 산책하러 나갔는데, 습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이런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이 축축한 공기 속에 습기가 더 흡수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 돌턴을 원자론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돌턴의 실험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용기 안에 욱여넣은 공기의 양에 상관없이, 흡수되는 수증기의 양이 항상 일정했던 것이다. 마치 공기와 수증기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즉,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개의 공기 원자나 두 개의 수증기 원자는 서로 상호작용을 교환하지만, 공기 원자와 수증기 원자는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가 물에 녹는 정도를 좌우하는 요인이 “원자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즉, 무거운 원자가 가벼운 원자보다 물에 잘 녹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을 증명하려면 원자들 사이의 상대적인 무게를 알아야 한다. 29-30)
19세기 초에는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두 종류의 기체가 알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탄화산소carbonic oxide(무색의 독성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탄산carbonic acid(조지프 블랙이 발견한 ‘고정공기.’ 실험실에서 수많은 쥐들이 과학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이 기체를 마시고 질식했음)이었다. 돌턴은 고정된 양의 탄소와 결합하여 위의 두 기체를 만드는 산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써, 탄산에 함유된 산소가 탄화산소에 함유된 산소보다 두 배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의 원자 이론을 적용하면 탄화산소는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며(현대식 용어로는 일산화탄소이다), 탄산은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이다(현대식 용어로는 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돌턴은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얻은 탄소와 산소의 질량 비율은 약 1.30:1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알려진 1.33:1과 거의 비슷하다. 31)
3장 · 원자의 구성성분
당시 과학계는 음극선의 정체를 놓고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쪽 진영은 음극선이 라디오파나 빛, 또는 X-선 같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진영은 이온ion처럼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실험데이터에 기초하여 일련의 계산을 수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음극선의 질량을 전하로 나눈 값이 수소이온을 전하로 나눈 값보다 약 1,000배쯤 작게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음극선의 전하량이 수소이온의 전하량보다 훨씬 크거나 (2) 음극선의 질량이 수소이온의 질량보다 훨씬(아마도 수천 배 이상) 작다는 뜻이다. 1897년 10월 톰슨은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양전하의 바닷속에 동심원을 따라 미립자가 배열되어 있는” 원자모형atomic model을 최초로 제시했다. “음극선의 구성 입자이자, 음전하를 띠고 있으면서 모든 원자에 들어 있는 엄청나게 가벼운 입자”는 오늘날 ‘전자electron’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44-6)
지난 10년 동안 방사선에 대하여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부 원자는 왜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원자로 변신하는가? 그리고 방사선에 담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더퍼드의 계산에 의하면 방사성 붕괴가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가장 격렬한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보다 무려 수백만 배나 강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원자의 내부 어딘가에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핵의 발견을 훨씬 뛰어넘어 아원자세계의 그림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원자핵은 원자보다 수만 배 작으면서 원자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가벼운 전자구름이 선회하고 있다. 원자를 축구장 크기만큼 확대하면 원자핵은 센터서클 중앙에 놓인 작은 구슬쯤 되고, 전자는 관중석 어딘가에서 열심히 돌고 있을 것이다. 48, 51)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태생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가속운동을 하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는 전자기파(빛)를 방출한다. 원운동(궤도운동)도 엄연한 가속운동이므로,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전자기파를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을 것이고, 에너지가 작아지면 궤도반지름도 작아진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전자는 나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원자핵에 가까워지다가 결국은 원자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의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문제는 닐스 보어Niels Bohr가 “양자quantu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보어는 전자가 특정한 궤도만 돌 수 있으며,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할 때마다 광양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원자모형에 의하면 전자는 원형 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궤도만 돌 수 있기 때문에, 원자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51-2)
4장 · 원자핵 분해하기
당구 게임에서는 한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폴로늄에서 자연적으로 방출된 알파입자가 베릴륨의 핵을 때리면 투과력이 높은 방사선이 방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렌과 프레데리크가 관측했던 감마선이다. 이 감마선이 다량의 수소 원자를 포함한 파라핀 왁스를 때리면 수소 원자의 핵, 즉 양성자가 빠른 속도로 방출된다. 놀라운 것은 파라핀 속의 양성자(수소 원자핵)가 감마선과 충돌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양성자가 이렌 퀴리의 실험에서 측정된 값만큼 빠르게 가속되려면 양성자를 때린 감마선은 약 5,000만 eV(또는 50MeV)의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폴로늄에서 방출된 감마선의 에너지는 아무리 커도 5.3MeV를 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보다 10배나 큰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베릴륨 원자핵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63)
채드윅은 베릴륨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중성자로 간주하면 에너지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감마선은 질량이 없기 때문에, 파라핀 왁스에서 무거운 양성자가 튀어나오도록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은 탁구공을 던져서 볼링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중성자는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양성자를 중성자로 때리는 것은 볼링공을 또 다른 볼링공으로 때리는 것과 비슷하다.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데 필요한 감마선의 에너지는 50MeV나 되지만, 중성자라면 4.5MeV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값은 베릴륨 핵에 흡수된 알파입자의 에너지 5.3MeV보다 작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집합이었다. 원자핵 안에서 베타붕괴beta decay로 알려진 붕괴 현상이 일어나면 중성자가 양전하를 띤 양성자로 변하면서 음전하를 띤 전자를 외부로 방출한다. 이로써 중성자는 양성자, 전자와 함께 원자핵을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64-5)
5장 · 열핵 오븐
수소 원자핵(양성자)에 알파입자를 발사하면 대부분이 튕겨 나오지만, 알파입자와 수소 원자핵 사이의 거리가 1천×1조분의 1m 이내로 가까워지면 갑자기 두 입자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였다. “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이 힘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전기력을 이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원자핵을 에워싸고 있는 “밀어내는 전기장”은 성을 에워싼 가파른 성벽과 비슷하다. 양성자가 이런 성에 침투하려면 성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점프해야 한다. 일단 벽을 넘기만 하면 강력이 작용하여 외부에서 침투한 양성자를 원자핵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일은 양성자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으며, 속도가 그 정도로 빨라지려면 온도가 수천만 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자연적으로 초고온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 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 69-70)
가모프는 우라늄핵에서 방출되는 알파입자에 파동역학을 적용하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아도 원자핵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모프는 알파입자가 핵을 탈출하기 전에 성벽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처럼 생긴 알파입자는 누군가가 별도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성벽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입자를 파동으로 간주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물통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듯이, 알파입자의 파동이 성벽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알파입자는 성벽 밖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0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동함수가 붕괴되었을 때, 알파입자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처럼 우라늄 원자핵의 바깥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이것을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 한다: 옮긴이). 가모프의 양자핵이론은 알파입자가 우라늄핵에서 탈출하는 비결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했다. 74-5)
후테르만스와 엣킨슨 두 사람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입자가 장벽을 통과하여 원자핵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밖에 있던 입자가 원자핵 안으로 침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모프의 이론을 태양 중심부와 비슷한 온도에 적용해 보니, 정말로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 중심부에서 양성자가 양자터널을 통해 ‘전기적 척력’이라는 벽을 뚫고 원자핵 안으로 진입한다면, 낮은 온도에서도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에딩턴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에 있는 양성자는 성벽 꼭대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핵 주변을 에워싼 장벽은 높을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태양 중심부의 양성자들이 장벽의 얇은 부분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면, 굳이 장벽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아도 양자터널효과에 의해 원자핵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다. 마침내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에딩턴이 계산했던 중심부의 온도(약 4,000만 ℃)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75-6)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에딩턴은 태양 중심부의 온도를 4,000만 ℃로 추정했는데, 이 온도에서는 양성자-양성자 연쇄반응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태양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야 한다. 에딩턴이 계산한 4,000만 ℃는 태양의 성분이 지구와 거의 같다는 가정하에 얻은 값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 영국의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은 태양과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며, 무거운 원소는 소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의 73%가 수소이고 25%가 헬륨이라는 가정하에 에딩턴의 계산을 다시 해보면, 태양 중심부의 온도는 1,900만 ℃까지 떨어진다. 베테가 이 온도에서 양성자 -양성자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계산해 보니, 실제 관측된 태양에너지와 거의 비슷한 값이 얻어졌다. 이로써 태양이 열을 방출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태양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수소를 원료로 삼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헬륨을 만들어왔다. 79)
6장 · 별
초신성이 폭발하면 은하에 있는 모든 별(수천억 개)을 합한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초신성은 적색거성赤色巨星, red giant이나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처럼 특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별이 아니라, “마지막 진화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폭발하는 별”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별은 폭발해야 비로소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옮긴이). 별의 에너지원은 수소이므로, 세월이 흘러 중심부가 모두 헬륨으로 바뀌면 같은 방법으로는 더 이상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별이 이 단계에 이르면 팽창력의 근원인 열이 공급되지 않아서 자체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엄청난 중력에너지에 의해 중심부가 대책 없이 뜨거워지다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을 일으킨다 ― 이것이 바로 초신성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호일은 관련 계산을 수행한 끝에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는 별의 내부 온도는 원리적으로 40억 ℃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91-2)
별의 온도와 밀도가 적절하면 헬륨끼리 충돌하는 횟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탄소-12로 자랄 수 있는 베릴륨-8의 개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즉, 베릴륨-8의 생성과 붕괴가 적정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 (개개의 핵의 수명이 엄청나게 짧다 해도)매 순간 일정한 개수의 베릴륨-8 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별의 내부에서 탄소-12가 생성되기만 하면, 곧바로 다른 헬륨핵과 충돌하여 산소-16이 만들어진다. 이것 자체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산소는 우주의 중요한 구성성분이다), 반응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생명체의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탄소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우주에는 호일 같은 탄소기반 생명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탄소가 모두 소모되는 것을 막아주는 다른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순간만을 학수고대해 왔던 호일은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답을 떠올렸다. “탄소-12가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려면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92-3)
호일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 호일은 실험결과를 같다 ―“탄소-12 원자핵이 놓일 수 있는 들뜬상태 중에 베릴륨-8과 헬륨핵이 충돌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에너지와 같은 에너지준위가 존재한다면 탄소-12의 생성 속도가 아주 빨라져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소-16으로 바뀌어도 우주에는 충분히 많는 탄소-12가 남을 수 있다.” 분석하다가 자칫하면 우주에 생명체가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고 깊은 경외감에 빠졌다. 생명의 기반인 탄소-12 외에 산소-16에도 이와 비슷한 에너지준위(7.19MeV)가 존재한다면, 별의 내부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탄소-12는 순식간에 산소로 변했을 것이다.[ 5 ] 그런데 산소-16 핵의 특성을 분석해 보니, 천만다행으로 그 값은 7.19MeV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7.12MeV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릴륨-8이 두 개의 헬륨핵으로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면, 별이 헬륨을 너무 빠르게 소모하여 탄소를 비롯한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것이다. 93-5)
# 원자핵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 주변을 선회하는 전자처럼 몇 개의 특정한 에너지를 갖는 상태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에너지준위energy level’라 한다.
7장 · 궁극의 우주요리사
현재 우리의 우주는 물질(기체,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지배하고 있지만, 탄생 직후 몇 분 동안 우주를 지배한 것은 물질이 아닌 빛이었다. 이 시기의 우주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물질입자(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격동하는 광자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거품에 불과했다. 이 “태초의 빛”은 처음 몇 분 동안 광자 한 개가 원자핵을 산산이 분해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원자핵이 형성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하여 중수소핵이 되었다 해도, 순식간에 고에너지 광자에게 얻어맞아 분해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분 동안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고,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온도는 빠르게 식어갔다. 약 3분이 지난 후에는 우주 오븐의 온도가 수십억 도까지 내려가서 광자는 더 이상 중수소핵을 분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바로 이때부터 중수소의 양이 급증하면서 우주 조리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17-8)
빅뱅 후 처음 1초 동안 원시 불덩이 속 입자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고에너지 입자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 상대방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는 사건과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사건이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났다. 즉, 초창기의 우주는 평등한 세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주가 식어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세한 질량 차이 때문에(중성자 › 양성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양성자가 무거운 중성자로 변하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양성자 → 중성자 변환은 중성자 → 양성자 변환보다 드물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우주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보다 많아졌다. 처음 1초가 지났을 무렵,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기에는 우주의 온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중성자의 수가 동결되었는데, 이때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은 약 6:1이었다. 이제 핵융합이 일어날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려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다. 118)
그러나 이 시간 동안 홀로 고립된 중성자는 안정한 입자가 아니어서 평균 15분 만에 양성자와 전자, 그리고 반뉴트리노로 붕괴된다. 그 결과 빅뱅 후 2분이 지났을 때 중성자의 일부가 스스로 양성자로 변환되어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1까지 벌어졌고, 바로 이런 상태에서 핵융합 용광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후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중성자는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진 헬륨-4로 융합되었다. 그렇다면 양성자는 얼마나 남았을까? 처음에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 1이었으므로, 만일 양성자 14개와 중성자 2개에서 출발했다면 헬륨 1개가 만들어지고 양성자 12개가 남을 것이다. 즉, 헬륨핵과 양성자의 비율은 1: 12이다. 그런데 헬륨은 양성자보다 4배 무거우므로, 질량 비율로 따지면 헬륨 : 양성자 = 4 : 12가 된다. 다시 말해서,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25%의 헬륨과 75%의 수소(융합에 참여하지 않은 양성자)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관측된 원소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18-9)
8장 · 양성자 조리법
1960년대에 자신의 이론에 ‘팔정도八正道, Eightfold Way(열반에 이르는 8가지 수행법)’라는 이름을 붙인 겔만은 몇 년 전부터 영감 어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생물을 과科와 종種 등으로 분류하는 생물학자처럼, 겔만은 이미 알려진 강입자를 스핀 = 0인 중간자와 스핀 = 1/2인 바리온으로 나누고, 더 깊은 곳에서 각 입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같으면서 전하가 다른 ‘쌍’처럼 보였고, 둘 다 스핀이 1/2이므로 바리온에 속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으로 전하가 +, 0, -인 파이온(π- 중간자)이 있고, 스핀 = 0이면서 두 가지 전하(+, -)로 존재하는 중간자 케이온이 있다. 겔만은 입자분류게임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목록의 깊은 저변에 심오한 대칭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겔만은 몇 년 전부터 “강입자가 더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발견한 대칭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130, 132)
겔만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소설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읽다가 “머스터 마크에게 세 개의 쿼크를!Three quarks for Muster Mark!”이라는 문장에 눈길이 꽂혀, 그 감지되지 않은 입자를 '쿼크quark'라고 명명했다. 겔만은 쿼크가 ‘위up’와 ‘아래down’, 그리고 ‘야릇한strange’이라는 세 종류로 존재하면 강입자의 대칭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단, 위쿼크up quark의 전하는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의 전하는 –1/3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쿼크(그리고 이들의 반입자)를 잘 조합하면, 실험실에서 발견된 모든 강입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파이온이나 케이온 같은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antiquark가 결합한 입자이고, 바리온은 세 개의 쿼크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성자와 중성자이다. 양성자는 2개의 위쿼크와 1개의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고(uud),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쿼크와 한 개의 위쿼크로 이루어져 있다(udd). 133)
1973년, CERN의 초대형 거품상자 가가멜Gargamelle이 드디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 양성자 안에 있는 “점 같은 물체”에 튕겨서 빠르게 날아가는 뉴트리노가 포착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입자는 겔만과 츠바이크의 예측대로 분수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다. 쿼크를 직접 봤다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입자가속기를 동원해도 강입자 감옥에서 쿼크를 해방시키기 못했으며, 쿼크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곤 강입자와 부딪힌 후 튕겨 나온 입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쿼크는 강입자 내부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강입자 안에서 쿼크를 결합시키는 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흔히 강력强力, strong force으로 알려진 이 힘은 항상 인력引力으로 작용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힘 중에서 가장 강하다.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단단히 묶어 놓는 강한 핵력은 그보다 훨씬 강한 강력의 메아리였다(사실 '강력'과 '강한 핵력'은 같은 뜻이다). 136)
# 지금까지 알려진 쿼크는 모두 6가지이다. 위쿼크up quark와 맵시쿼크charm quark, 그리고 꼭대기쿼크top quark의 전하는 (전자의 전하를 –1이라고 했을 때)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 바닥쿼크bottom quark의 전하는 –1/3이다.
1973년에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그로스David Gross와 프랭크 윌첵Frank Wilczek, 그리고 데이비드 폴리처David Politzer는 강력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입자가 아주 강한 에너지로 충돌하면, 강력의 바이스vise(죔쇠) 역할을 하는 부분이 느슨해진다는 사실을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알아낸 것이다. 이는 곧 에너지가 아주 크면 강력의 세기가 약해져서 강입자가 “자유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루어진 과열된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쿼크-글루온 플라즈마quark-gluon plasma’라 한다. 과열된 쿼크-글루온 플라즈마 속에서는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쿼크와 글루온이 강입자의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쿼크-글루온 플라즈마가 존재할 정도로 극단적 환경이 조성되었던 시기는 “빅뱅 후 100만분의 1초 이내” 뿐이었다. 약 100만분의 1초가 지난 후에는 우주가 충분히 식어서 쿼크와 글루온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41)
9장 · 입자란 진정 무엇인가?
디랙은 패러데이의 전자기장과 아인슈타인의 광자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양자장quantum field”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객체를 만들어냈다. 여러 면에서 양자장은 패러데이의 고전 전자기장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달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흔들면 빛의 형태로 장을 가로지르는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양자장과 고전 전자기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고전 전자기장에서는 파동을 임의의 크기로 만들 수 있지만, 양자장에서는 파동의 최소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이보다 작은 파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작은 ‘덩어리’의 단위로 존재한다. 전자기장에서는 0개나 1개, 2개, 또는 1,000조 개의 광자가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지만, ‘1/2개의 광자’나 ‘10/3개의 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항상 광자의 정수배로 존재하는 것이다. 좀 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전자기장은 양자화되어 있다quantized.” 151-2)
그러나 디랙의 이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했다. 광자가 전자기장에 생긴 잔물결이라면, 다른 물질입자는 어떻게 되는가? 전자와 양성자는 광자와 근본부터 다른 입자인가? 물론 이들도 파동-입자 이중성을 갖고 있지만 만들어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수시로 탄생했다가 소멸되는 광자와 달리, 전자와 양성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았다. 1920년대의 양자역학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부합되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움직이고 있는 두 관측자가 얻은 양자역학의 법칙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양자역학이 아직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마침내 디랙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후보를 찾아냈다. 이 방정식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가 팽이처럼 자전하면서 갖게 된 특성까지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었다(이 특성을 스핀spin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방정식은 “스핀이 위를 향하는 전자”와 “스핀이 아래로 향하는 전자”라는 두 개의 해를 갖고 있었다. 152-3)
# 전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입자는 1/2의 스핀을 갖고 있으며 위( +1/2)와 아래(–1/2), 두 가지 값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머릿속에는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유도한 방정식에 무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방정식에는 총 4개의 해가 존재했는데, 처음 2개는 스핀이 업up(↑)인 전자와 다운down(↓)인 전자에 해당하여 별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두 개는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를 가진 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입자에 대응되어 디랙의 심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렵게 유도한 방정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디랙은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타진한 후, 물리학의 역사를 바꿀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에너지 상태로 떨어지는 전자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음에너지 상태가 이미 다른 전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전자는 전하의 부호가 일상적인 전자와 반대여야 한다. “양전하를 띤 전자”라는 뜻이다. 음에너지 상태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디랙은 1931년에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날렸다 ―“자연에는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54-5)
디랙은 순수한 사고思考만으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예견했다. 그리고 1932년 실제로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발견됐다.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물질의 거울에 비친 상象인 ‘반물질antimatter’의 세계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물질입자마다 “모든 물리적 특성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디랙이 예견했던 “양전하를 띤 전자”는 오늘날 ‘양전자positron’, 또는 ‘반전자antielectron’라고 불린다(임의의 입자와 모든 것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입자를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옮긴이). 반물질이 발견되면서 “물질은 영원하다”는 믿음도 허물어졌다.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될 정도의 강한 에너지로 두 입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물질입자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입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운수 사납게 자신의 반입자 짝을 만나면, 강렬한 섬광(복사)을 방출하면서 무無로 사라진다. 156)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입자들은 각기 자신만의 양자장에 대응된다. 광자는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에 생긴 잔물결이고, 전자와 양전자는 ‘전자장electron field’에 생긴 잔물결이며, 위쿼크는 ‘위쿼크장up quark field’라는 양자장에 생긴 잔물결이다. 강입자충돌기LHC에서 두 개의 양성자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일련의 양자장에 ‘자연의 종’이 울리면서 잔물결의 홍수가 양자 교향곡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실험자는 감지기에 도달한 잔물결로부터 교향곡의 악보를 재구성하여 악기의 종류를 알아내는 식이다. 우리는 이 잔물결을 입자로 해석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양자장의 동요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입자가 아닌 양자장이다. 보이지 않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유체 같은 물질이 가장 작은 원자에서 가장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질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화학원소도, 원자도, 전자도, 쿼크도 아닌 양자장이다. 156-7)
10장 · 최후의 구성성분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양전하를 띤 양성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양성자와 중성자를 합쳐서 핵자nucleon라 한다: 옮긴이).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위쿼크와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의 구성성분은 전자와 위쿼크, 그리고 아래쿼크라는 세 가지 입자로 귀결된다. 물론 구성성분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물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구조는 구성요소와 함께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중 전자와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는 강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힘은 양자장(전자기장과 글루온장)을 통해 매개되며, 이 양자장에 불연속의 에너지 덩어리를 투입하면 양자화된 작은 파문(또는 입자라고도 함)이 생기는데, 전자기력의 경우에는 이것을 광자라 하고, 강력의 경우에는 글루온이라 한다. 168)
그러나 미시세계에는 아직 논하지 않는 또 하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희한한 힘―그것은 바로 약력weak force이다. 약력이 특별한 이유는 한 종류의 입자를 다른 종류의 입자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하전입자와 전자기장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QED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이론과 실험의 오차가 100억분의 1을 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이론의 핵심에는 “국소게이지대칭local gauge symmetry”이라는 아름다운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줄리언 슈윙거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 원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전자기력, 강력, 약력 등 근본적인 힘은 자연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대칭으로부터 나타난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칭이란, 주어진 물리계(기체 상자, 또는 태양계, 혹은 우주 전체)에 어떤 조작을 가했는데 그 후에도 물리계가 변하지 않을 때, 그 물리계에는 대칭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168-70)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대칭이 존재하는 곳에 그에 해당하는 보존량(변하지 않는 양)이 존재한다. 회전대칭이 존재하는 경우,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은 각운동량(계가 갖고 있는 회전능력)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수많은 실험이 실행되었는데, 운동량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의 운동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으며, 계의 각 요소에 재분포되는 것만 가능하다. 에너지와 운동량이 보존되는 이유도 대칭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시간변환에 대하여 대칭이기 때문이고(즉, 시간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간변환대칭이라 한다), 운동량이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다(즉, 공간 전체를 임의의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병진대칭이라 한다). 그러나 대칭이 낳은 결과 중에는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힘 자체가 바로 대칭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170)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역설적 상황에 직면했다. 약력입자(약력을 매개하는 입자. W입자와 Z입자)는 큰 질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력은 매우 강하면서 먼 곳까지 작용하는 장거리힘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입자가 무거우면 이론에서 무한대가 속출하고, 약력의 형태를 결정해 준 보석 같은 대칭까지 붕괴된다. 약력의 양자장 이론이 폐기될 위험에 처했다. 잠깐… 혹시 대칭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약력을 매개하는 입자는 기본적으로 질량이 없지만, 무언가로부터 질량을 획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힉스장Higgs field’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힉스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자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은 스핀 = 1/2인 전자에 대응되는 물질장物質場, matter field이거나, 스핀 = 1인 광자에 대응되는 역장이었다. 그러나 힉스장에 대응되는 입자의 스핀은 0이라는 특이한 값을 갖고 있다. 175)
이뿐만이 아니다. 힉스장은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0이 아닌 값을 가져야 한다. 전자기장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다. 광자가 알뜰하게 제거된 공간에서는 전자기장에 잔주름이 전혀 생기지 않으므로, 양자적 불확정성에 의해 나타나는 약간의 요동을 제외하면 전자기장의 값은 모든 곳에서 0이다. 그러나 힉스장에서 모든 입자를 제거해도 장의 값은 0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즉, 모든 우주공간은 균일한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 있다. 우주가 처음 탄생하던 순간에 힉스장의 값은 0이었고 세 개의 약력입자 W+, W-, Z0는 질량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SU(2)라는 대칭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주 탄생 후 1조분의 1초가 지났을 때 힉스장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0이 아닌 값을 갖게 되었고, 모든 공간은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약력입자는 갑자기 질량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 존재했던 완벽한 대칭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으면서 “강한 장거리힘”이었던 약력이 “약한 단거리힘”으로 바뀐 것이다. 175)
우주 탄생 직후에는(탄생의 순간부터 1조분의 1초까지. 이토록 짧은 시간에는 ‘직후’라는 표현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더 좋은 단어가 없다: 옮긴이) 전자와 쿼크를 비롯하여 모든 물질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걸쭉해진” 힉스장 때문에 입자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들이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교환하면서 없던 질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힉스장이 전자나 쿼크에 끈끈한 액체처럼 들러붙어서 속도를 늦추고 질량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광자나 글루온 같은 입자는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힉스장 속에서도 질량이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힉스장은 약력입자뿐만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입자에게도 질량을 부여한다. 힉스장이 없으면 전자 같은 입자가 광속으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원자가 형성될 수 없고,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 힘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힉스장이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할 수 없다. 175)
# 힉스장은 전자와 쿼크 같은 기본 물질입자에만 질량을 부여한다. 그러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갖고 있는 질량의 대부분은 쿼크의 질량이 아니라 쿼크를 결합시키는 글루온장의 에너지이다. 즉,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힉스장이 아닌 강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11장 · 만물의 조리법
만물의 창조 작업은 빅뱅 후 100만분의 1초가 지났을 때 거의 마무리되었다. 처음 100만분의 1초 동안 우주는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00만분의 1초가 지난 시점에는 플라즈마에서 양성자와 반양성자 쌍이 만들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서 대량 멸종이 시작되었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무無로 소멸되고, 이 과정에서 생성된 무지막지한 복사에너지가 모든 물질을 쓸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예상대로 진행되었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주에는 텅 빈 공간과 그 안을 외롭게 날아다니는 몇 개의 광자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와중에 입자의 100억분의 1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어쨌거나 입자가 반입자보다 100억분의 1쯤 많았기에, 이 자투리 입자들이 진화하여 지금의 은하와 별, 행성, 인간, 그리고 사과파이가 되었다. 187)
# ‘사하로프 조건Sakharov conditions’(우주 초기에 물질이 생성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1. 쿼크가 반쿼크보다 많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2.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은 불완전해야 한다.
3. 물질 생성 과정이 진행될 때, 우주는 열적평형상태thermal equilibrium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이 좌우대칭이라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가정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계 미국인 실험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의 놀라운 실험결과가 알려지면서 오래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1956년 미국 연방표준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된 우젠슝의 실험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기본 힘 중 하나인 약력이 “오른손잡이 입자right-handed particle”보다 “왼손잡이 입자left-handed particle”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입자에 두 손이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잡이”는 입자의 자전효과와 유사한 양자적 스핀과 관련되어 있다. 약력은 분명히 거울 대칭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 후로 이 현상은 “반전성위배parity viol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여기서 말하는 반전성parity은 ‘좌우대칭성’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옮긴이). 반전성이 위배된 궁극적 이유는 약력이 왼손잡이 전자에게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89-90)
스팔레론은 전자기력과 약력, 그리고 힉스장의 기원을 설명하는 약전자기이론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분명히 스팔레론은 입자가 아니다. 전자나 힉스보손 같은 입자는 기타 줄을 퉁길 때 생성되는 단일 음처럼 평균값 주변을 오락가락하는 단일 양자장의 진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스팔레론은 이보다 훨씬 미묘한 개념으로, 하나의 양자장이 아니라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바로크양식처럼 섞여서 한꺼번에 움직이는 “양자장의 오케스트라”에 해당한다.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집합적으로 움직이면 스팔레론이 생성되고, 스팔레론은 입자를 반입자로 바꾸거나 반입자를 입자로 바꾸는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스팔레론은 물질을 만드는 기계로서, 여기에 약간의 반물질을 투입하면 일상적인 물질입자가 생성된다. 이 기적 같은 능력 덕분에 스팔레론은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 중 입자 -반입자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자,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192)
일본 기후현岐阜縣 히다시飛騨市 근처의 이케노산池野山 지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물 중 하나인 슈퍼 카미오칸데Super-Kamiokande, 슈퍼- K가 열심히 가동 중이다. 슈퍼- K는 세계 최대 규모의 뉴트리노 감지장치로서, 물질의 기원을 밝혀줄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2020년 4월, 슈퍼-K에서 작업 중인 150명의 연구원들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뉴트리노가 깨뜨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앞으로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사실로 판명된다면 물리학계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전하 -패리티 대칭이 오직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약력)을 통해서만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뉴트리노도 대칭을 깰 수 있다면 빅뱅 직후 물질이 생성되는 두 번째 길이 열리는 셈이다.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입자인 뉴트리노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은(슈퍼-K에서 발견된 사실임) 곧 뉴트리노에 질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197-9)
뉴트리노는 분명히 질량을 갖고 있었다. 질량이 너무 작아서 관측이 안 되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뉴트리노의 질량은 0.5eV 이하로서, 전자의 100만분의 1도 안 된다. 왜 그럴까? 뉴트리노는 왜 그토록 작은 질량을 갖게 되었을까? 현재 제일 널리 수용된 답은 “시소 메커니즘see-saw mechanism”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질량이 매우 큰 뉴트리노 3종이 추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기존의 가벼운 뉴트리노 3종(각각 전자뉴트리노, 뮤온뉴트리노, 타우 뉴트리노)과 균형을 되찾는 식이다. 초경량급 뉴트리노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새로 도입한 슈퍼헤비급 뉴트리노는 질량이 정말로 커야 한다. 예상되는 질량은 양성자의 10억∼1,000조 배 사이로서(109∼1015GeV)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입자보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LHC의 최대 출력보다 10만 배 이상 크다. 그러나 초기우주에는 온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입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199)
12장 · 누락된 구성요소
표준모형을 가장 크게 위협한 도전장은 입자물리학이 아닌 천문학 분야에서 날아왔다. 1930년대에 스위스의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는 1,000개가 넘는 은하들로 구성된 코마은하단Coma Cluster의 운동속도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중력으로 은하단의 형태를 유지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츠비키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성단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암흑물질dunkle Materie, dark matter(영)”이라 불렀다. 암흑물질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밀어내는 중력”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이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팽창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이유를 암흑에너지에서 찾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물론 질량도 포함된다)의 95%를 차지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은하를 모두 더해봐야 전체의 5%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방대한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작은 거품일 뿐이다. 209-10)
모든 기본 입자의 질량은 힉스입자의 ‘246GeV’라는 질량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집안에서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처럼, 우주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다이얼을 왼쪽으로 돌리면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입자의 질량이 작아지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커진다. 여기서 질문 하나 ― 우주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여 훗날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하려면 다이얼을 얼마나 정확하게 고정해야 할까? 답: 말도 안 되게, 어마무시하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정말 환상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온 유령이 숨어 있다. 찬반양론으로 갈려 숱한 논쟁을 야기했던 그 유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중우주”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우주가 “각기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여러 개(또는 무한개)의 우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황당한 가설을 받아들이면 힉스장이 기적 같은 값을 갖게 된 것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212, 214)
초대칭supersymmetry은 물리학이 직면한 여러 개의 심오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아주 유별난 개념이다. 기존의 이론에 이 개념을 도입하면 빅뱅 무렵에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던 이유와 암흑물질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초기에 모든 힘들(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이 단 하나의 통일된 힘으로 존재했다는 엄청난 가설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초대칭의 가장 큰 매력은 난폭한 진공에너지로부터 힉스장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힉스장이 지금처럼 적절한 값(원자가 생성될 수 있는 값)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칭은 자연의 기본 구성요소에 부과된 또 하나의 새로운 대칭으로,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초대칭을 통해 연결되는 두 부류는 입자와 반입자가 아니라 페르미온과 보손이다. 즉, 초대칭은 전자와 쿼크, 뉴트리노 같은 물질입자를 광자, 글루온, 힉스입자 같은 힘입자와 연결시키는 대칭이다. 216)
# 초대칭짝에 해당하는 입자를 통틀어서 스파티클sparticle(초대칭입자)이라 한다.
13장 · 우주 만들기
현대물리학은 두 개의 거대한 주춧돌 위에 구축되었다. 미시세계(원자의 입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양자장이론과 거시적 규모에서 우주(은하, 별, 행성 등)의 거동을 서술하는 중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두 이론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지금까지 실행된 그 어떤 실험도 두 이론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없다), 빅뱅의 순간으로 다가가면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자장이론은 중력을 고려하지 않았고, 중력이론은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뱅의 순간에는 우주 전체가 아원자규모로 존재했다. 우주 만물(에너지와 장, 시간과 공간)이 원자보다 훨씬 작은 점 안에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이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중력과 양자역학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물리학으로 서술하려면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양자장이론,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을 하나로 합친 “양자중력이론quantum theory of gravity”이 필요하다. 231)
끈이론은 1970년대에 쿼크를 묶어두는 강력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여 거의 사장된 후 ‘양자중력’이라는 더욱 야심 찬 목표를 내걸고 화려하게 부활한 이론이다. 끈이론은 1984년에 그린과 슈바르츠가 “끈이론에는 수학적 변칙anomaly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면서 하루아침에 이론물리학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끈이론의 핵심은 전자를 비롯한 기본 입자들이 야구공 같은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기본 구성요소는 끈이며, 끈이 진동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입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기타 줄의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 모드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쿼크가 되고, 또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중력자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끈이론은 우주에 초대칭이 존재해야 의미를 갖기 때문에 초대칭 버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다. 234-5)
인플레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이론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광학망원경으로 빅뱅 후 1조×1조×1 조분의 1초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탐색 수단을 빛에서 중력파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시공간이 휘둘리면서 거친 파동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그 여파는 지금도 우주 곳곳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들은 파장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강도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미래형 관측소가 계획대로 완성된다면 우주창조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험실에서 장비를 다루건, 노트에 방정식을 끄적이건, 또는 우주에서 날아온 신호를 분석하건 간에, 모든 과학의 기본은 ‘탐험’이다. 그리고 일단 탐험 길에 올라 새로운 현상과 미스터리를 쫓아가다 보면 출발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것인가? 244-5)
14장 · 이것으로 끝인가?
과연 우리는 무無에서 사과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양자역학과 중력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가 탄생한 순간(중력, 시간, 공간, 양자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실망스러운가?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플랑크 규모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궁극의 이론을 논할 때가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 데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엇이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