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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4월
평점 :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
신자유주의 내전의 특징은 첫째, 이 전쟁은 과두 정치 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사회적 권리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외국인에게서 모든 종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하고 망명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민족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법적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보수주의가 도덕 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할 때, 이 전쟁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이다. 둘째, 이 전쟁에서 각각의 전략은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각 국가나 지역의 특수한 전략들이 범세계적인 단일 전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셋째, 이 전쟁은 패권주의 강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글로벌 질서’와 블록화한 국가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이 아니다. 두 정치체제 간, 두 경제 시스템 간의 대립도 아니다. 이 전쟁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13)
글로벌 자본의 기치 아래 자본의 이익을 방어하고자 나선 각 국가들은 온갖 수단과 정동을 동원하여 평등과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외부 또는 내부의 적, 성가신 소수자들, 지배적인 정체성이나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집단들에 대한 적대로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글로벌 질서에 대한 반대는 그 질서의 주요 수혜자들에게 포획된다. 이 주장은 가족, 전통, 종교라는 보수적 가치의 장려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글로벌화한 엘리트에 대한 고발은 문화적 정체성의 해체라는 환상의 거대 서사에 덮여버린다. 이 ‘경제적 국민주의’의 목적은 자유 교역을 피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자국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국제 경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국가 주권에 힘을 실어주는 데 있다. 트럼프 개인을 넘어선 트럼프주의가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시장 질서 수호, 반민주주의 체제, 경영과 소비에만 국한된 ‘자유’ 개념, 서구의 문화적 가치 지배에 대한 긍정 등을 공유한다. 14)
신자유주의는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애초부터 정치적 기획자(Entrepreneurs politiques)인 이론가와 저술가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명료한 법과 원칙의 틀 속에서 경쟁에 기초한 자유 사회, 사법(私法)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공동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현했다. 또한, 이는 도덕, 전통, 종교에 기초하여 사회의 전면적인 개조 전략에 복무하는 주권국가에 의해 보호된다. 달리 말해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대체로 ‘집산주의적(collectiviste)’이라고 간주된 정치적 기획들에 대항한 전략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목표는 사회에 일련의 표준적인 기능을 부과하는 데 있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자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전략적, 갈등적 특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출현 조건과 지속성,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할 수 있다. 17)
1장 칠레, 최초의 신자유주의 반혁명
칠레 헌법은 1818년에 제정된 이래 쿠데타 전까지 1833년과 1925년, 고작 두 차례 개정되었다. 마지막 개정 이후 반세기가 지난 뒤인 1980년 9월 11일(쿠데타가 일어난 지 7년째 되는 날), 국민투표로 1925년 헌법을 대신할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현재까지 유효하다. 하이메 구스만이 독재 정권에서 임명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제헌 위원회와 함께 새로운 헌법안을 작성했다. 군사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실존적으로 주어진 의지에 의해 정초되고 국가의 존재 의의가 명시된 헌법만이 유효하다. 이를 1973년 칠레에 적용하면, 법률(loi)에 구속되지 않는 권력(legibus solutus)일 뿐만 아니라 법(droit)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권력(jure solutus)으로서 구성된 군사평의회는 신헌법을 제정할 자격을 얻는다. 시행령 제128호에 의해 인민의 제헌 권력이 군사정권으로 이양됐다. 25)
# 프랑스어의 loi가 공공기관에서 제정한 규칙과 표준, 즉 법률을 의미한다면, droit는 모든 규칙과 규범을 포괄한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권리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근본 원칙이 있으니, 바로 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이다. 이 원칙은 19세기에 고안되고 20세기 코포라티즘(corporatisme)에 의해 전용된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유래되었다. 이 교리는 개인들을 통합하여 사회집단을 구성하는 자연적 공동체들 사이의 위계를 강조한다. 자연적인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현대 정치에 대항하여, 개인의 의지에서 시작해 사회 내 자연스러운 집단으로 여겨지는 가족, 동업조합, 지역, 교회, 군대, 나아가 국가와 같은 일련의 조직들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칠레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은 보충성의 원칙을 사회를 마비시키는 국가주의를 끝장내고 경제적 자유, 사적 소유, 시장을 지탱하는 근본인 개인의 자유를 방어하는 원칙으로 재해석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 기본 서비스가 민영화되고, 기본권(보건, 교육, 주택, 연금 등)이 사적 영역으로 이양되며,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27)
칠레 신자유주의의 특성 중 신자유주의의 근본 논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구축은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국가를 약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의 규율 권력을 창조하고 보강하는 국가기관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국가는 결코 ‘약한 국가’가 아니라 ‘행동주의적이고 유능한 국가’이다. 둘째,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시장 법칙에 의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셋째, 경제의 ‘탈정치화’와 사법(私法)의 헌법화가 함께 진행된다. 이러한 결합은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에 대한 하이에크의 영향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호세 피녜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호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정치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여기에서 “정치를 폐위시키자”라는 하이에크의 슬로건이 곧바로 연상된다. 30)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항상 ‘대중 민주주의’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박탈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치적 실천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다양한 수단들에 대한 테스트와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민주주의 혐오를 이론과 통치의 차원에서 면밀히 들여다보면, 경제 질서 수호를 위해 공공연하게 정당화되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독트린은 인민주권 논리가 통제되지 않을 때 ‘총체적 국가’의 위험이 도사린다고 보고 이에 대한 제도적 제한의 이론을 자처한다. 신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총체적 국가는 자신이 의존하는 이익집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영역으로 개입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에는 총체적 국가로 나아갈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 결과나 인민들의 결집이 시장의 법칙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여겨지면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전쟁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된다. 35)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 개념을 단지 최상의 지도자 선출 과정으로 보며, 인민주권의 도그마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해로운 의회 주권’ 실현을 배제한다. 지금까지 계속 언급한 인민주권은 실제로는 다수파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행사하게 되는데, 이들은 다수파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 품행 규칙을 무시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 주권은 법의 주권을 희생하고 수립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이에크가 선호한 엄격히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주장되는 가치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 실제적 성과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독단을 막고, 지도자 선택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개인적 자유’의 보호를 가능하게 해준다. 하이에크에게 ‘인민이 자유롭다’는 말은 ‘개인의 자유 개념을 하나의 인간 집단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심각한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 36-7)
3장 강한 국가 예찬
강한 국가의 일반적인 목표는 무엇보다 정치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선 부정(negative)의 임무들이 도출된다. 사회국가를 해체하고, 사회적 이익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시장의 효과적인 기능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억제해야 한다. 국가와 경제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긍정(positive)의 임무도 있다.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보장하고 일탈을 제재하는 국가의 기능으로, 뤼스토프가 말한 ‘시장 경찰’의 임무이다. 이러한 개입주의는 특히 시장의 법적 규범화를 의미한다. 하이에크는 “효과적인 시장은 오점 없는 작동을 위해 적절한 규범적 틀을 필요로 한다”라고 역설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는 카를 슈미트의 표현에 따르면 ‘강도’의 차이다. 강한 국가의 한계는 인위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에 대한 적의 위협에 따라 비례적으로 결정된다. 44)
이렇게 현실 민주주의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이에크는 ‘디마키(Demarchy)’라는 말로 정치 시스템을 정의하고자 했다. 하이에크는 공적 행동의 제한 원칙에 기초한 이 개념이 ‘지속적인 남용으로 오염된’ 민주주의 개념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디마키’는 원칙적으로 오로지 일반 규칙만을 따르며 일시적인 다수파의 독단에 휘둘리지 않는다. 디마키는 특정 집단에 ‘특혜’를 주거나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모든 조처를 금지한다. 이소노미아(isonomia)는 단순히 ‘법 앞의 평등’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법에 의한 평등’이다. 즉,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의 평등, 특히 평의회나 의회에서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런데 이를 ‘법 앞의 평등’으로 재해석하는 건 자발적으로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이에크는 인민의 요구에 굴복한 정부로부터 시장의 자유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수단을 박탈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설명한다. 48-9)
4장 정치 헌법과 시장의 입헌주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종종 주권이라는 개념 자체에 강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주권자를 법 위에 두는 고전 전통과 달리 하이에크는 인민 다수 혹은 그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에게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시장의 근본법'에 손을 댈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사용한 표현은 ‘의회 주권’에 명백하게 맞서는 ‘법 주권’이다. 이 표현은 ‘지배(règne)’의 의미가 ‘절대적 지배권(empire)’ 혹은 ‘주권(souvenraineté)’으로 미끄러지면서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동일시되었다. 헌법은 만들어지지만 법(droit)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 법은 상법과 형법을 포함하는 사법(私法)이다. 개인이 타인의 목표와의 비교나 결합 없이도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이 법은 집단적 의지보다 우위에 있다. 경제 영역에서의 개인의 권리는 더 이상 추상적인 참조 대상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며 법의 영역 밖으로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이 권리들은 실정법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헌법화'되어야 한다. 57)
이 헌법은 실질적인 법률로 기능하기 위해 법률이 갖추어야 할 것을 형식적으로 정의하지만, ‘법의 내용을 고안하는 임무’는 입법자와 사법관 들에게 맡긴다. 핵심은 사법 규범으로서의 법률이 헌법에 선재(先在)한다는 것이다. 이 헌법은 “품행 규칙 체계의 선재를 전제로 하며, 그 체계에 지속적으로 집행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를 제공”할 뿐이다. 또한 헌법은 제헌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법률은 입법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법률은 ‘수용된 정의 개념’에서 비롯되어 ‘장기간 사용된’ 규범들로서 입법자에 의해 인정받고 승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 분립은 오직 입법자만이 법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입법자는 법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한다. 적어도 ‘법률(loi)’이 입법 당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법(droit)을 뜻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모든 이론적 구축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헌법적 법률은 헌법에 속하지 않는다. 61)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리프먼의 주장을 전용하여 사회주의와 파시즘 두 체제의 유사성을 자유주의 옹호 주장의 핵심으로 삼았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는 자유의 반대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은 이전 시대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바로 그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라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사회 조직 원칙으로서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한 측면이라면, 그 과정에서 국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게 다른 한 측면이다. 하이에크는 계획과 경쟁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계획’이라는 개념이 ‘더 나은 운명을 가질 수 있었던 훌륭한 개념’이라면서 그것이 사회주의자 적들에게 넘어가버린 것을 한탄한다. 하이에크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사회주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경쟁의 계획’으로 정의한다. 71)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사회적 정책의 발전을 무력화하는 제도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노동자 조직의 힘을 약화하고, 사회보험과 관련된 국가의 독점을 최대한 축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이 자본가들의 소유권을 박탈하려는 혁명적 목표를 포기한 후, 그보다는 덜 야심 차지만 자유경제에 여전히 위험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소득의 평등을 목적으로 한 ‘소득 재분배’가 그것이다. 초기 사회보험의 목적은 극빈층 혹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들’의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최초의 의도가 점차 변질되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평등 정책을 은폐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다. 이는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경쟁적 기업들이 제안하는 서비스를 개인이 구입하는 보험 시스템”으로 대체하게 할 주관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76-8)
6장 사회 진화의 신자유주의적 전략
바르바라 스티글러는 1937년 신자유주의 역사상 기념비적인 저서 『좋은 사회』를 집필한 미국의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을 신자유주의 이념의 모태로 본다. 리프먼의 진화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에서 자발하는 과정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법적, 정치적 개입주의를 채택한다. 그가 보기에 ‘문화적 지체’는 정신 구조나 사고방식이 기술과 생산 조직에 비해 훨씬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새로움 앞에서 개인은 과거의 사고방식에 따라 반응한다. 이로 인해 폐쇄적인 공동체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다양한 형태의 집산주의가 바로 그 결과다. 그렇다면 인구의 상당수가 겪는 이 부적응을 어떻게 할 것이며, 새로운 틀에 어떻게 인류를 재적응시킬 것인가? 리프먼에 따르면 대혁명에 걸맞게 사회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재적응을 위한 매우 폭넓은 차원의 개입이 요구되는데, 그것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대중에겐 이를 수행할 지적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82-3)
신자유주의는 리프먼이 주장한 사회적, 경제적 현대화에 대한 명령으로 요약될 수 없으며, '복고주의적 유토피아'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 가운데 빌헬름 뢰프케가 내세운 전통적 가치의 복원은 질서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정신적, 종교적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 위기는 사회 재통합이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사회정책’과 병행되지 않는 한 어떤 ‘경제정책’으로도 해소가 불가능하다. 현재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이기 때문에 사회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들을 관통하는 고민은 ‘자연적’ 공동체(가족, 이웃, 마을)를 복구하고 개인들에게 안정적인 도덕적 기준을 보장해주는 정치를 통해 사회 해체의 영향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뢰프케에게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현대성과 세계적 경쟁에 대한 적응이라는 리프먼식 신자유주의와 반대로, 집산주의에 대한 효과적 방벽으로서 유기적 공동체에 개인을 재통합시키는 전략적 대안이었다. 83-4)
뢰프케와 달리, 하이에크에게 과거의 작은 공동체들로 회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전통의 기초 위에서’ 규범 체계가 진화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전체 질서 형성에 기여할 때, 즉 규범 체계를 강화할 때만 혁신은 허락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게 전통과 종교를 위해 정치적으로 싸우는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배신이 아니며, 사회의 조용한 진화를 보호하는 일이다. 그가 보기에 복지국가의 필연적 결과인 사회적 평등주의와 도덕적 방임을 도입하고자 하는 합리주의적, 구성주의적 위협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패는 종교다. 하이에크가 이념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는 그 전쟁에서 이기려면 문명의 진화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유토피아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영혼에서 사회주의라는 악마를 몰아낼 만큼 충분히 강력하기만 하다면, 그 유토피아의 본질이 종교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89-91)
7장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가짜 대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세우고자 한 국제 경제 질서는 특수 이익을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 집단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약탈을 자행하는, ‘총체적 국가’에 의한 경제의 정치화를 종식하는 것이었다. 뢰프케는 ‘경제적 국민주의’가 정치적 지배(imperium)와 경제적 경영(dominium)을 혼동한다고 비판하면서 이상적인 ‘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이 두 영역, 즉 국경으로 둘러싸인 국가와 국경 없는 경제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카를 슈미트는 1950년 출판한 『대지의 노모스』에서 19세기에 세계가 도미니움(dominium)의 영역과 일치하는 국경 없는 글로벌 경제와, 임페리움(imperium)의 영역에 한정된 국민국가의 주권, 둘로 분리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강대국에 의해 지배되는 여러 지역에서 주권의 ‘실체가 비워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슈미트의 열광적인 독자 뢰프케는 이러한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의 엄격한 분리야말로 세계 자유주의 경제 질서 실현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96)
신자유주의적 국제 경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싸움에서 유럽 문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주제를 둘러싸고 신자유주의자들은 금세 의견이 갈렸으며, 두 편으로 나뉘었다. (뢰프케 같은) ‘보편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은 유럽 통합에 반대했으며, ‘입헌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은 반대로 유럽 통합을 ‘경제 헌법’을 제정할 기회로 보았다. 1963년 하이에크는 도르트문트 상공회의소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일반 입법을 담당하는 의회(télothètes)와 사법의 공동 규칙을 담당하는 의회(nomothètes)로 구성된 양원제 구상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영감을 받은 폰 데어 그뢰벤은 유럽 조약이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고 각국 정부의 보호주의적 혹은 분배주의적 정책을 금지하는 초국적 헌법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 정부의 행위와 국가의 공법(公法)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사법(私法)이라는 일반 규칙에 종속시키기를 꿈꿨던 하이에크의 ‘법치주의’는 ‘유럽의 조약들’ 속에서 실현되었다. 98-9)
대처는 자유무역 보편주의를 유럽의 약탈적 관료주의가 이끄는 ‘인공적인 거대 국가’에 대립시킴으로써 전략적 차원에서 급진적 단절을 시도하였다. 그가 원한 건 대대적인 전환이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민주주의적 논리에 의해 언제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더 이상 관세장벽, 경제계획, 조세를 통한 재분배를 이뤄내는 곳이 아니다. 국가는 새로운 규제 위주의 글로벌리즘과 사회주의화하는 관료주의적 유럽에 대항하는 방벽이 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는 경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부대로, 다자간 의무나 ‘브뤼셀’이 강요하는 유사 국가적 규칙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대처의 표현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국민주의는 수많은 국제기구와 조약들을 따르는 모든 규범에 대항하는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보편주의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대처는 새로운 경쟁주의적 국민주의의 길을 열었으며, 오늘날 많은 정부가 이를 계승하여 유럽연합을 '뒤흔들었다.' 102)
8장 가치 전쟁과 ‘인민’의 분열
전 세계 보수주의 우파들은 '60년대'의 유산을 쓸어버리기 위해 반-문화혁명을 전개했다. 이를 가장 명료한 형태로 구현한 ‘대안 우파(alt-right)’들은 차별에 대항하는 담론을 전유하여 뒤집음으로써 무슬림, 흑인, 페미니스트 등 ‘침입자들’이 다수의 사람들과 전통적 정체성에 가하는 ‘억압’을 고발한다. ‘자연에 대한 반항’과 다름없는 평등 이념에 의해 백인 문명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식의 종말론적 서사가 그 배경을 이룬다. 젠더와 인종의 사회적 구성 이론에 대항하여 이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성별 및 인종 간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기초한 ‘성 현실주의’와 ‘인종 현실주의’를 옹호하며 ‘새로운 반문화’를 주장한다. 웬디 브라운이 말했듯이 “이러한 분노는 인종차별 및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 및 이슬람 혐오를 할 ‘자유’, 그것을 금지하려고 하는 좌파의 ‘독재’를 거부할 ‘자유’의 형태를 취한다.” ‘자유’와 ‘권리’로 재정의된 그들의 혐오적 정체성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합법적 폭력 혹은 정당방위에 호소한다. 107-8)
가족을 중시하는 모습은 평등에 대한 요구에 그들이 보인 일반적인 반응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1960년대 시카고학파의 게리 베커가 발전시킨 인적 자본 이론에서는 훨씬 세속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미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이 이 이론은 아이의 교육에 대한 사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투자를 공공투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한다. 결과적으로 은행 대출이 세금과 공공서비스를 통한 소득 재분배 논리의 대체물로서 나타나게 된다. 1981년 베커가 『가족경제학』에서 전개한 가족에 대한 인적 자본 이론의 적용은 복지국가 해체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반문화 좌파의 고유한 성 해방 요구를 비롯한 여러 요구를 무력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제 가족은 소외와 억압의 장소로 묘사되기는커녕 합리적인 부모가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인적 자본 축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하나의 ‘기업’으로 간주된다. 특히 자본축적의 논리에 따른 여성의 무상 재생산 노동이 이 논리의 핵심을 이룬다. 108-9)
9장 노동 일선에서
신경영(New management)이라 불리는 새로운 관리 방식은 ‘목표와 자기통제에 의한 매니지먼트’를 통해 개인들에게 총체적인 참여를 강요함으로써 경제적 성과를 최대화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이 관리 방식은 하이에크와 미제스뿐 아니라 슘페터에게도 영향을 받은 피터 드러커가 1954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다. 노동을 과학적으로 조직하여 관리자가 정한 규칙을 노동자에게 최대한 세심히 적용하는 게 테일러 모델이라면, 신경영은 노동자의 지성, 창조성, 자율성, 책임감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기실현’에 대한 약속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방식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의 연장선에서, 이처럼 진화한 관리 방식의 목표는 연대의 시스템(협력, 신뢰 등)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이 관리 방식은 개인이 서로를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로 간주하도록 하고, 이른바 ‘전사 되기’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여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강제한다. 120-1)
인적 자본 이론은 기업가 정신의 규범적 모델을 떠받치는, 오로지 경제적인 관점에서 인간 행동을 바라본 것이다. 투자하거나 투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이 각 개인에게 있다면, 즉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이 개개인에게 있다면, 그 개인은 자기 스스로 구축한 ‘자본’으로 정의된다. 그에 따라 교육, 건강, 결혼 등도 투자의 일환이며, 개인은 좋은 투자를 위한 좋은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이론이 정립된 시점과 주요 국제기구(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의해 이 이론이 적용된 현재 사이, 표적이 되는 대상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주요 표적은 1960년대와 달리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 기능하던 복지국가 일반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제 임금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법적 보호 체제가 표적이 된다. 더 넓게는 노동 자체가 지닌 ‘민주주의적 잠재력’이 위협받는다. 노동이 토론과 협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발명하는 중심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122)
이러한 노동의 집단적 차원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으로 노동자의 내면적 통일성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오로지 개인적인 실패만이 존재하고 고통의 사회적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구속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가분한 것으로 드러난다. 마치 경제 전쟁의 동기가 개인 내면의 차원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은 그 전쟁에서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적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경영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도록 강제된다. 이 프로세스는 ‘플래너(planneurs)’가 원거리에서 지시하는 사항들을 이행하기 위해 임금노동자 각 개인이 스스로 행동하고, 조직의 갈등과 딜레마와 역설(더 적은 수단으로 더 많이 잘할 것, 더 창조적이고 순발력 있게 대응할 것, 경쟁하면서 동시에 협력적일 것 등)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신경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123)
10장 반민중적 통치
피통치자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물론 새로운 일이 아니다. 국가 폭력은 국가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러나 국가 폭력은 매번 같은 논리를 따르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부 전쟁의 새로운 합리성은 역설적이다. 조직되지 않은 적, 무력 투쟁 등을 통해 권력을 잡으려고 하지도 않는 적, 설사 원한다고 하더라도 임금노동자의 집단적 힘이 약화된 터라 그럴 능력도 없는 적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쟁의 논리와, 반대자를 사회의 적으로 만들기 위한 논리가 점차 법으로 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공동체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의심받는 구성원, 국가의 잠재력을 파괴하려고 하는 이들, 국가 경쟁력을 약화하는 이들 등 피통치자의 일부를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내부 전쟁은 다분히 수행적이다. 행위가 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강화된 감시와 지속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고, 갈수록 군사화하는 경찰의 표적이 됨으로써 점점 ‘적으로 간주’된다. 128)
대게릴라전 모델은 이제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정치 형식 자체가 되었다. 사목, 규율, 경쟁을 기초로 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모두 결합해도 이러한 권력 형태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적인 주권주의다. 이 폭력은 국가가 전쟁 상대인 정치적 적에게 부여한 실제적인 혹은 상상적인 폭력성에 비례한다. 그 적의 범위는 질서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동원된 수단과 ‘한편’임을 선언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포괄할 정도로 탄력적이다. 활동가, 언론인, 대학교수, 노동조합원 혹은 좌파 정당 들을 적의 공모자로 만들어내는 글과 말이 넘쳐난다. 프랑스의 예에서 보듯이, 이민자 출신 인구에 적대적인 사회 전쟁을 조금만 비판하기라도 하면 ‘이슬람 좌파주의’라는 만능 딱지를 붙이는 식이다. 물론 테러리즘은 통째로 꾸며낸 핑곗거리가 아니며, 불행히도 실재한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정치적 관계에 테러리즘이 전쟁의 합리성을 강요하는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133-4)
11장 신자유주의 전쟁 기계로서의 법
역사적으로 법치국가는 국가 행정부가 법을 오로지 도구적으로만 사용하는 경찰국가에 반대하여 성립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법치국가는 행정부를 그보다 상위의 규범(그중에서도 헌법적 법률) 아래 두는 원칙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법치국가와 경찰국가를 구별 짓는 것은 정치적 체제의 차이라기보다 국가와 법 사이 관계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그것의 권력, 특히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보다 상위의 법에 제한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법치국가의 구성 원칙에 반하여 입법자들이 헌법적 법률과의 양립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제정한 현재의 법률들은 ‘위험’이 질서 관리의 첫째 기준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런 사회를 미레유 델마-마르티는 ‘혐의의 사회’라고 부른다. 이제 '형법'은 예방적, 예언적이 되고, 본래 예방적 성격의 행정법은 처벌과 탄압에 이용된다. 그리하여 행정권이 법에 의해 보장되어야 할 권리보다 우선시되는 권력의 혼동이 야기된다.” 137-8)
“법률의 헌법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법적 시스템과 상고 절차가 도입된 최고재판소의 설치” 등으로 대변되는 사법권의 확대는, 안정적이고 견고한 헌법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지역에서 ‘민주화’ 과정의 정수로 소개되었다. 이 모델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채권과 재산권의 보호를 보장하는 반면, 사회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의 인권에 대해서는 어떤 실질적인 자리도 마련해 놓지 않는다. 이 새로운 입헌주의는 사실상 대의제도를 무시한 채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을 가로막는 방벽으로 기능한다. 허실이 지적했듯이 이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올바름의 규칙을 따르기로 한) 정치, 경제 엘리트와 (행동반경, 합법성, 사회적 권력이 현저히 확대될) 법조인 간의 동맹이 이룬 결실이다. 국가기관 공무원을 순수한 기술자로 표상하는 사법 영역의 자율성은 결국 정치의 탈정치화를 초래하고, 사회적 지위 상승으로 더욱 강화된 법조인들의 계급적 편견을 은폐한다. 140-1)
푸코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 기술을 기업 형태의 증가와 일반화로 특징지었다. 그는 또한 이 일반화가 사법기관의 역할 증대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기업의 형태가 확산할수록 기업 간 마찰과 분쟁이 잦아질 것이고 법적 중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 사회와 사법(司法) 사회는 ‘동일한 현상의 두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푸코의 지적을 통해 정당 간의 경쟁을 분석하면 이 논리가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정당들의 경합은 기업 형태로서의 정당 간 경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바로 이 ‘기업-정당’ 간의 경쟁 논리가 법적 중재의 필요성을 높인다. 사법권의 정치적 도구화는 경쟁적 이해관계나 악의적 의도에 따른 정치적 전략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기업 형태가 확대된 사회에서 사법부의 전례 없는 우위가 초래한 결과일 뿐이다. 사법(私法)국가는 사회 전체의 사법화(司法化)를 요구한다. 144)
12장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
현재의 일부 신자유주의적 지배 형태가 네오파시스트적 통치 행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가령 헨리 지루는 파시즘 역사 연구자 로버트 팩스턴의 ‘결집된 열정’ 개념을 ‘신자유주의 파시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지도자에 대한 사랑, 하이퍼내셔널리즘, 인종주의적 환상, ‘약한’ 것과 ‘열등한’ 것과 ‘이방의’ 것에 대한 경멸,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 무시, 반대파에 대한 폭력, 과학과 이성에 대한 적대감 등이 그 열정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팩스턴은 ‘트럼프가 파시즘의 몇몇 전형적인 요소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에게서 보이는 ‘금권 독재’ 요소에 더욱 주목한다. 그는 이어 트럼프주의가 파시즘과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트럼프 체제는 유일 정당 체제가 아니며, 반대파를 철저하게 금지하지도 않고, 대중을 위계 조직에 의무로 가입시키거나 그것을 위해 동원하지도 않는다. 직능별 동업조합도 없고, 세속 종교적 의식도, 총체적 국가에 헌신하는 ‘시민 전사’의 이상도 없다. 146-7)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의미론적 과잉은 현재 요구되는 정치적 투쟁과 관련하여 비판적 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복잡하면서 특수한 현상들을 부정확한 일반화 속에 ‘매몰’시켜버림으로써 정치적 무장해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1932년 『파시즘의 교리(La Dottrina Del Fascismo)』에서 조반니 젠틸레와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야말로 파시즘의 진정한 초석을 놓을 터전이라고 선언했다. “파시즘에서 국가는 ‘절대’다. 그 앞에서 개인과 집단 들은 상대적인 자리만을 차지한다.” 이어서 그들은 파시스트 국가를 자유주의에 대립시킨다. “자유주의는 국가를 개인에 복무하게 만드는 반면, 파시스트 국가는 개인적 삶의 진정한 현실이 된다.” 파시스트는 “모든 것은 국가에 있다”라고 생각하며,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전체주의적”이라고 이야기된다. 따라서 모든 시민사회를 흡수하려고 한 파시즘의 ‘총체적 국가’와, 시장 및 기업 모델이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것을 동일시하는 건 피상적인 유비일 뿐이다. 147-8)
나치즘과 신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유한다. 이 용어는 자연에서 생물종이 그러하듯이, 사회를 민족과 인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일반적이고 영속적인 경쟁을 벌이는 곳으로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가장 약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 항상 하나의 선택지가 되는 나치즘은 원칙적으로 ‘사회진화론’이다. 이에 따르면 우월한 인종은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스스로 방어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거나 제거할 의무가 있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사회진화론은 군사 전쟁이나 영토 복속을 추구하지도 않고 열등한 종의 제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그것과 구별된다.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진화는 시장을 수단으로 한 경제적 영역의 경쟁을 통해 작동한다. 여기서 국가는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모든 제도를 조직하고 인민을 준비시킬 책임이 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을 하나로 녹여내어 ‘인민 공동체’로 집결시킬 필요는 없다. 이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149)
헤르만 헬러는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의 특징을 “권위주의적 국가의 사회정책으로부터의 철수(Rückzug aus), 경제의 탈국가화(Entstaatlichung), 정치적-정신적 기능에 대한 독재적 국가화(Staatlichung)” 세 가지로 요약한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헬러가 사용한 표현들(‘철수’, ‘철폐’, ‘탈국가화’ 등)이 정치적-정신적 기능과 관련된 마지막 표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이 박탈과 부정의 어휘들이 헬러가 선택한 ‘자유주의’라는 말에 모든 의미를 부여해주는 동시에 정치적 권위주의를 정당화한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국가의 개입주의는 적극적인 개입주의로서 그 대상에 경제적 분야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의 연구는 적극적인 법적 개입주의라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경제와 법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이며, 신자유주의 내전이 그렇듯 총체적이다. 경쟁 사회의 도래를 꿈꾸는 신자유주의는 사회 전체에 관여한다. 151, 155-6)
여기서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릴 필요가 있다. 정치체제에 국한한 접근법의 문제점은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특정 정치체제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치의 권위주의적 차원의 핵심은, 국가의 구조와 정치를 행하는 인물 및 방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통치자가 사법(私法)의 헌법화를 추진하고 협의의 영역을 제한하기 위해 충분히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주의를 선택하는 것’(권위주의 체제를 선택한다는 의미에서)이 신자유주의의 여러 전략 중 하나에 불과하며, 여타의 전략 가운데 국가 주권의 탈중앙집중화가 포함된다고 해서 (클린턴과 블레어의) ‘제3의 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경험이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목표 달성을 위해 권위주의적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권위주의적이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통일성은 그것의 교리가 아니라 그것이 추동하고 수행하는 ‘내전 전략’에 의해 확립된다. 158-9)
결론 내전에서 혁명으로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내전과의 관계를 스스로 어떻게 문제화하는가? 이는 이중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개별 이해당사자들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권이라는 고전적 담론을 취한다. 미제스는 “자유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집단을 희생시키면서 소수자 집단에 부여된 특혜는 장기적으로 분쟁(내전)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자유주의는 내전을 배제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내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전은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 당사자들 간의 경쟁, 특히 계급투쟁을 가리킨다. 사실 신자유주의 국가를 특수한 이해들보다 상위에 놓기 위해 계급투쟁을 ‘내전’으로 재약호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신자유주의 국가가 ‘시장’이라는 유일한 정의의 수호자로 제시되는 사고방식 속에서 계급투쟁은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내전이 되어버리며, 국가의 기능은 그 내전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161-2)
신자유주의가 적으로 간주한 것들은 ‘계획경제’, ‘집산주의’, ‘노동조합운동’, ‘인민주권’, ‘민주화’ 등으로 불리며, 모두 사회적 필요에 따른 경제 규제와 민주주의적 표현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이에 맞서 현대 신자유주의는 두 분파로 양분된다. 차이를 존중하고 자아실현을 약속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국민 정체성’과 혼동되는 자유를 내세우며 소수자들의 요구 및 법적 성취를 억압하는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 이 전쟁 속에서 매우 다른 두 개념의 자유가 마치 무한한 거울 반사처럼 서로에게 시대적 악의 책임을 돌린다. 현대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공론장 전체를 포화 상태로 만듦으로써 모든 진정한 인민적 대안을 막는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통치하려면 분할하라(divide ut regnes)’라는 카트린 드 메디치의 유명한 격언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162-3)
스스로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는 전략은 서로 다른 다양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의 평등을 실현하면서 ‘대중을 구축’하고자 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이론화한 이 전략은 국가의 주권을 박탈한 세계화한 엘리트들에 대항하여 ‘대중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생각은 대처가 실현했던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미러링으로서 고안되었다. 우파에서 그토록 성공을 거두었던 민족공동체와 주권 국가의 상상계를 자본주의의 지구화와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에 맞서기 위해 ‘재활성화’하자는 것이다. 매우 다른 맥락 속에서, 특히 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포퓰리즘,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를 재현하는 이 ‘좌파 포퓰리즘’은 곧바로 정치와 노조의 구조적 분열, 사회적 운동의 자율적 힘, 결집을 위한 대의의 다양성 등과 충돌했다.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맞서기 위해 인민, 국가, 공화국 등의 위대한 레토릭을 전용했지만,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마법이 되지 못했다. 168)
가치 전쟁에 의한 인민 집단 간의 분열을 막기 위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좌파는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위한 투쟁과 여성, 민족, 인종, 성적 소수자, 세대 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투쟁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지 않아야 한다. 또한 평등이라는 일반적 요구를 중심으로 이 모든 경제적·문화적 투쟁을 접합해내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이는 차이와 특수성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대항하기 위해 요구되는 통일성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 물신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진보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이 ‘유권자’로서 확보하려 한 ‘소수자’ 정체성이든, 반동적 신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 가치를 내세우며 이용하는 ‘다수’의 정체성이든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전략이 있을 뿐이다. 한편에 경제적 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 문화적 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이 있는 것이다. 16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