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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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르네상스의 탄생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형성해온 힘의 해방을 단 하나의 원인을 들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르네상스를 특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인물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재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 재발견을 둘러싼 이야기는 우리가 근대적 삶과 사상의 근원에 대한 문화적 전환을 가리키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르네상스(renaissance)', 즉 고대의 재생(再生, rebirth)'과 진실로 잘 들어맞는다. 물론, 한 편의 시가 그 자체로서 모든 지적, 도덕적, 사회적 전환을 가져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작품도 그럴 수는 없다. 하물며 수세기 동안이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공공연히 자유롭게 입에 올릴 수도 없던 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특정한 한 권의 고대 서적이 갑자기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옴으로써 분명히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19)


1 책 사냥꾼 


"가족과 친족관계, 길드와 조합. 이것들이 1417년 당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구성요소였다. 당시 사회는 독자성과 자립심을 거의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누구에게나 자명하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령과 복종의 연결 고리 안에서 결정되었다. 이 연결 고리를 끊고 나오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농사꾼은 오직 쟁기질 하는 법만 알면 족했고 방직공은 베 짜는 법, 수도사는 기도하는 법만 알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런 타고난 운명보다 형편이 다소 호전되거나 악화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포조가 살던 사회는 드문 기술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상당한 범위로 그 능력에 대한 보상도 해주었다. 그러나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개성이나 다재다능함, 또는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귀하게 대접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 심지어 교회는 호기심을 치명적인 악으로 단죄했다. 호기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영원한 지옥살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25-6)


"이 낯선 이방인(포조)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원이었지만, 그는 사제도 신학자도 종교재판관도 아니었고, 기도서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조의 목표물은 수도원이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필사본이었다. 이런 필사본의 상당수는 곰팡내가 풀풀 나고 벌레가 갉아먹은 상태였으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독자도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약 필사본의 양피지가 여전히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현물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표면의 글씨를 칼로 긁어내고 활석 가루로 문질러 광택을 내면, 다시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포조는 양피지 판매업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렇게 오래된 필사본의 글자를 긁어내는 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그 오래된 양피지 위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고 싶어했고, 설령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고 내용이 어렵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10세기, 혹은 그 이전에 작성한 족히 400~500년은 된 필사본에 관심이 많았다."(27-8)


2 발견의 순간 


"포조는 수도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진실하며 학식이 높은 훌륭한 수도사들을 몇 명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포조가 보기에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수도원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힘든 자들을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약골,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자식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상인은 아둔하거나 무기력한 자식을 그곳에 내다버렸고, 농부는 자기 힘으로 먹일 수 없는 남아도는 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곳을 이용했다." "영적 수련을 위해서 세워진 수도원 회칙에 따른 힘겨운 생활 역시 밭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힘든 노동과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찬송가 영창을 위해서 일어나 앉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이다. 포조에게는 수도사가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몽땅 위선으로만 생각되었다."(49-51)


"사실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수도원 도서관도 고대 로마 제국의 도서관이나 당시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존재했던 도서관에 비하면 형편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의 오랜 세월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책이나마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고 불린 궁극의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를 하던 작업 공간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수도원에 자리가 생기는 대로 작업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필사 목적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고 건축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중한 책을 수집하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훌륭한 수도원마다 깨끗한 유리창이 갖춰진 방을 준비하고 많게는 30명의 수도사가 한꺼번에 같이 앉아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책 사냥꾼들이 그들의 빼어난 유혹기술을 가장 집중적으로 발휘해야 할 사람은 스크립토리움의 책임자인 수도원 도서관 사서였다."(53)


"포조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포조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도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용된 한두 줄의 토막글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어두어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조는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문장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곧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포조가 그 책을 풀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66)


3 루크레티우스를 찾아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이미 수세기 전부터 발생한 사상을 널리 퍼트리려고 한 추종자의 작품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구세주인 에피쿠로스는 에게 해에 있는 사모스 섬에서 기원전 342년 말미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 출신의 가난한 선생으로 식민지 개척자로 그곳에 오게 되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유수한 조상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출신이 한미한 에피쿠로스는 분명 그들과 같은 주장을 펼칠 수는 없었다."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은 하나의 눈부신 아이디어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지금껏 존재해온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이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가리켜 더 이상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원자(atom)'라고 불렀다."(93-4)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물체는 해와 달인데, 인간이나 물가의 날벌레, 모래알과 마찬가지로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에는 상위 범주도 없으며 원자 간의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체(天體)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진공(void)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움직임도 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천체는 단순히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며, 원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서, 천체를 구성하는 원자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원리를 따른다.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95-6)


4 시간의 이빨 


"팔레스타인에서 온 구세주[예수]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학파가 던진 조롱과 그에 대한 특정한 이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인이 에피쿠로스 사상 전체를 완전히 사장시키게 만드는 배경을 제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이교도였지만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며, 그들의 사상은 승리한 기독교에 궁극적으로 영합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神性)이라는 개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의 기도나 제의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보기에 기독교인은 우물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개구리 떼 같았다. 그들은 소리 높여 개골개골 울어댄다. 〈세계는 우리를 위해서 창조되었다!〉"(124-5)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교도(pagan)'라는 단어를 오래된 다신교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유피테르, 미네르바, 마르스를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을 이교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교도'라는 단어는 4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어원적으로는 '농민(peasant)'과 관계가 있다. 이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촌스러운 무지에 대한 조롱이었으나 그 방향이 결정적으로 뒤집혔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논객들은 에피쿠로스와 그 신봉자들에 대항하여 조롱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 경우에 이교 신들의 희화화는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신에게 희생 제의를 바치는 신앙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모든 고대 신화를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상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재정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에피쿠로스는 멍청이에 먹보,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로마인 수제자 루크레티우스의 운명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127, 129)


"락탄티우스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그는 단지 기독교인이 인간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막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신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그러니까 신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설명처럼 신성한 쾌락의 굴레 안에만 머물며 인간의 운명에는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락탄티우스는 313년에 쓴 유명한 글을 통해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마치 탕아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시는 바로 신의 분노였다. 그리고 신께서는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랑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다─지엄하고 가차 없는 폭력으로 부단히 인간을 벌하기를 원하셨다. 쾌락의 추구에 대한 혐오와 신의 정당한 분노의 현현. 이로써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조종이 울렸다."(130)


"5~6세기의 기독교인은 여러 가지로 울 일이 많았다. 도시들은 붕괴했고, 벌판은 죽어가는 군인들의 피로 물들었으며, 강도질과 강간이 횡행했다. 마치 이전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처럼 인간이 몇 세대 동안이나 이렇게 끔찍한 행동으로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이 필요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사태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깊고 근본적인 답을 제시했다. 이 모든 재앙은 한 개인이나 기관의 이런저런 흠 때문이 아니었다. 이 모두는 인간이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패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끔찍한 재앙을 받아 마땅했다. 엄청난 양의 끝없는 고통은 그들이 치러야 할 당연한 몫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류가 고통을 적극적으로 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이 정의롭고 확고하게 요구하는 진노의 대가를 제대로 지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33-4)


5 탄생과 재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고대 문헌을 찾는 일을 페트라르카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다른 어떤 보물찾기보다 우위에 두면서 거의 관능적인 절박함과 쾌락을 동반한 일로까지 새롭게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그였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현재라는 시대를 한없이 혐오했다. 그는 자신이 거칠고 무지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곧 사라지고 말 하찮고 추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언사는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와 명성을 드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고 더불어 과거에 대한 그의 집착이 가진 문화적인 중요성도 점점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페트라르카의 집착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관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력한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른바 '인문학(studia humanitatis)', 즉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이들 언어로 된 문헌의 습득을 강조하고 수사학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150-1)


"초기의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기원을 이루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음을 느꼈고, 여기에 자부심과 함께 경이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운동의 일정 부분은 지금껏 살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틀린 것을 맞는 척 가장하지 말고 고대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첫 걸음이었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그 비극적인 손실을 애도하고 나자, 죽음의 저편에 누워 있는 것들로 가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즉 부활을 꿈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부활'은 모든 선량한 기독교인─성직자였으며 진실로 독실한 기독교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한─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이었다. 다만 이 경우에 부활은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이루어졌으며, 부활의 대상 역시 근본적으로 문화적이며 세속적인 것이었다."(151-2)


"요새화된 탑과 벽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등이 세워진 비좁은 피렌체 도심에는 공화국의 정치적 심장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시뇨리아 광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일명, 베키오 궁)가 있었다. 살루타티에게 그곳은 도시국가 피렌체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였다. 피렌체가 다른 국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고, 교황령에도 속하지 않으며, 왕이나 독재자, 혹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시민인 그들 자신으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독립적인 도시국가라는 사실이야말로 살루타티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피렌체의 지배자인 시민을 대신해서 쓴 편지나 공문, 의정서, 성명서 등은 모두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서 실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널리 읽히고 배포되었다. 살루타티는 과거의 부활이 골동품 애호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페트라르카와 공유했다. 살루타티의 글은 고대 수사학이 아직 살아 있으며 그것이 효과적으로 정치적인 감정과 오래된 꿈을 다시 일깨웠음을 보여주었다."(156-7)


"포조가 처음 니콜리를 만난 1390년대 후반만 해도 두 사람의 고대 도서 수집욕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이 둘은 처음부터 신앙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후대의 것보다 고대의 것이 더 우수하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페트라르카와 같은 놀라운 문학적 야심이나 독창성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다. 살루타티의 인문주의에 불을 지폈던 열렬한 애국심과 자유에 대한 열망도 시들해졌다. 대신에 그들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정신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가치들에 훨씬 더 못 미치는 것이면서 동시에 조금 더 이루기 힘들고 고된 것이었다. 그들을 지배한 것은 고대의 모방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그 모방의 정확성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다. 살루타티가 키운 두 젊은이는 새로운 것을 경멸했으며 오래된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일만을 꿈꿨다. 정신적으로 편협하고 황폐한 이런 꿈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꿈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165)


6 거짓말 공작소에서 


"15세기 초에 포조가 로마에서 일할 당시, 해결을 구하며 교황청으로 날아드는 편지는 매주 거의 2,000통에 달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어느 법정의 사무량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이었고, 이와 같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인재가 필요했다. 신학자, 변호사, 공증인, 서기, 비서 등의 특화된 인물들이 로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청원서는 적합한 서식에 따라서 작성되고 제출되어야 했으며, 의사록도 세심하게 작성, 보관되어야 했다. 모든 결정과 판결도 기록된 뒤 필사되어 보관되었다. 칙령, 특허장, 인가증 등 교황청에서 내리는 일련의 교서들은 모두 필사한 뒤 봉인하여 보관했으며 이들을 축약한 문서를 따로 준비하여 배포했다. 로마 주교는 그 지위에 어울리는 거대한 규모의 내무조직을 갖추고, 로마 주교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와 예법상 법도에 맞게 궁정인, 고문, 서기, 하인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행단을 거느렸다. 포조가 입문하여 발돋움하고자 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172-3)


"교황청은 그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식인 계급을 탄생시켰다. 이 지식인들은 사회적 기반이 약했으며 모순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들은 고용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헌신했고, 고용주의 후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형편에 냉소적이었고 자신들의 처지를 불행하게 생각했다. 냉소주의와 탐욕, 위선이 판을 치고, 전 인류에게 도덕적으로 살라고 설교하지만 정작 본인은 비뚤어진 웃전의 비위를 맞추면서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궁에서 유리한 지위를 얻고자 경쟁을 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건전한 희망과 품위를 갖춘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포조에 따르면, 교황청 사무국에 있는 모든 사제와 수도사들은 전부 위선자였다. 그곳에서는 종교가 이루고자 하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약 교황청 사무국에서 혹시라도 특별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마주친다면 주의할지어다. 그자는 가장 악질에 속하는 위선자이다."(184, 187)


7 여우 잡는 함정 


"콘스탄츠 공의회(1414)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교회의 균열을 끝내는 것이었지만, 다른 두 개의 주요한 안건도 있었다. 하나는 교황의 통치를 개혁하는 문제로서 이 또한 요한네스 23세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이단 탄압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궁지에 몰린 여우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실상 이단 문제는 코사(요한네스 23세)가 손에 쥔 거의 유일한 전략적 무기였다." "체코 출신 성직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는 몇 년간 교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보헤미아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후스는 위험한 사상을 계속 유포시켰으며, 그 위험한 사상은 널리 퍼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교회조직 전체로부터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이 위험한 보헤미아인은 한편으로는 교회 내부에 있는 코사의 적들이 코사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주요 원칙을 누구보다도 명확한 어조로 밝히고 있었다. 부패로 지탄받는 교황에게 불복종하고 그를 폐위시켜라."(208-9)


"코사가 정말 후스에 대한 종교재판이 공의회의 주의를 분산시켜서 교회 분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저지하거나 정적들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공식적으로 코사에게 통보된 고발장에는 총 70개의 혐의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공의회는 고발장의 내용을 그중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16개 항목으로 압축했다. 성직 매매, 남색, 강간, 근친상간, 고문, 그리고 살인. 또한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선대 교황을 독살했다는 죄로, 그의 주치의를 포함한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발당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가 고대부터 죄악시된 에피쿠로스 사상을 추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고발한 자들에 따르면, 교황은 믿을 만한 인사들 앞에서 줄곧 내세니 부활이니 하는 것은 다 거짓이며,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몸이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사멸한다고 완고히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1415년 5월 29일, 교황은 공식적으로 퇴위되었다."(212, 214-5)


"포조는 콘스탄츠에 일정 기간 더 머물렀지만, 후스가 공의회가 열리는 회의장 앞으로 불려나왔을 때에도 여전히 콘스탄츠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토록 염원했고 그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나타난 회의장에서 이 종교개혁가는 조롱만 당했다. 그가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고함소리와 함께 저지당하고 말았다.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대성당에서 열린 엄숙한 의식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공식적으로 성직을 박탈당했다. 이단으로 판명된 후스의 머리에는 높이가 약 45센티미터에 달하는 원형 종이 왕관이 씌워졌다. 왕관 위에는 영혼을 잡은 채 갈가리 찢고 있는 세 마리의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후스는 머리에 이 왕관을 쓰고 몸에는 쇠사슬을 찬 채로 대성당에서 끌려나와 자신이 쓴 책이 화염에 뒤덮여 있는 장작더미 앞을 지나쳐 마찬가지로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졌다. 유물이 남지 않도록 형을 집행한 담당자들은 불에 시커멓게 변한 후스의 뼈까지 산산조각 낸 뒤에 라인 강에 뿌렸다."(216)


"포조처럼 빈틈없고 매우 숙련된 관료로서 이제 나이도 거의 마흔에 달한 자라면 뭔가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든든한 수단을 강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포조는 그런 종류의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성 갈렌 수도원에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이번에는 동행인 하나 없이 콘스탄츠를 떠났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숭고한 작품을 찾아내서 그 끔찍한 감옥에서 꺼내 다시 세상 빛을 보게 해주어야겠다는 포조의 열망은 이런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더 강렬해지기만 한 것 같았다." "포조가 치유사로서의 마법 같은 능력을 다시금 발휘한 것은 1417년 1월, 이번에는 아마도 풀다 수도원에서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선반 위에 놓인 한 권의 장편시를 꺼내 들었다. 포조는 예전에 본 퀸틸리아누스의 글이나 성 히에로니무스가 집대성한 연대기에서 그 시의 저자의 이름을 읽은 적이 있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바로 그 시의 제목이었다."(226-8)


8 사물의 길 


"루크레티우스가 생각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거나 혹은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정말이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신이라는 존재의 행복이 우리가 웅얼거리는 몇 마디 말이나 반듯한 행동거지에 달려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실 이런 신성모독도 따지고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신들은 인간이 던지는 모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혹은 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신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 "이교도 문헌에서 마주치게 된 이런 위험한 생각들은 그 자체가 막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후대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공감한 일부 독자들처럼 포조 자신도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빼어난 고대의 시인은 그저 이교도 신앙이 얼마나 공허하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에 대한 희생 제의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직관적으로 깨달았음을 보여줄 뿐이라고."(231-2)


"그러나 무신론─보다 엄밀하게는 신의 무관심─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점이 아니었다. 정작 가장 주요한 쟁점이자 대단히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였다. 이 논쟁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수많은 이들─마키아벨리, 브루노, 갈릴레오 등─을 매료시켜서 기묘한 일련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했다. 일찍이 이것은 포조의 발견의 결과로서 그 사상이 되살아난 바로 그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탐구된 바 있었다." "그 주장들 중 일부는 여전히 생경하고, 다른 일부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 덕분에 가능해진 과학적 발전의 결과를 향유하는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항의를 받기도 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하다. 포조의 동시대인들도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그 시 자체는 깜짝 놀랄 만큼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루크레티우스가 시에서 주장한 내용의 대부분은 도통 내용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불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232-3)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도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 영혼도 육신만큼이나 물질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 이 모두를 깨닫게 된다고 해도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야말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거나 신을 두려워하거나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희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서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248-9)


"이성의 수련은 전문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성직자를 시작으로 하여 거짓 환상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내뱉는 거짓말을 뿌리치고 사물의 본질을 똑바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모든 관조의 노력들─모든 과학, 도덕적 고찰, 삶을 가치 있게 만들려는 시도들─은 사물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씨앗인 원자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해서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이 세상에는 원자와 진공,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말이다(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차가운 공허함만 느껴질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철학의 기원은 경이롭게 생각하는 마음이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로 바뀌어, 지식에 의해서 경이로워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설명에서는 이 과정이 뭔가 역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의 가장 깊은 경이로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249)


9 귀환 


"포조는 새로 선출된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 대한 봉사에 여러모로 매우 만족했다. 니콜라우스 5세의 속명은 톰마소 다 사르차나로서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교양 있는 인문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페트라르카, 살루타티 등 여러 인문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고전에 대한 학식과 심미안에 기초한 교육으로 탄생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니콜라우스 5세의 재위기간(1447~1455)은 매우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교황의 비서로서 포조가 처음에 꿈꿨던 것만큼 그렇게 완벽하게 목가적인 평온한 시기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 동안, 포조는 트라브존 출신의 조르조와 터무니없는 실랑이 끝에 비명과 주먹질로까지 이어진 소동을 겪었다. 또한 포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달라는 자신의 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교황이 자신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적 로렌초 발라를 교황의 비서로 지명했을 때 틀림없이 당황했을 것이다."(268-9)


"1453년 4월, 피렌체의 총리 카를로 마르수피니가 죽었다. 마르수피니는 뛰어난 인문주의자였으며 임종 시에도 『일리아드』를 라틴어로 번역하던 중이었다. 당시 총리직은 더 이상 피렌체 권력의 중심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도시를 장악함으로써 총리의 정치적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고전 수사학에 대한 통달이 공화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것처럼 보였던 살루타티의 시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포조의 옛 동료이자 뛰어난 재능의 역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맡았던 두 차례의 임기를 포함한 지난 세월 동안, 피렌체의 총리직은 여전히 그런 뛰어난 인문주의자들을 위한 자리로 남아 있었다." "포조는 피렌체의 총리로 5년간 봉직했다. 아마도 포조는 총리가 해야 할 소소한 업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그는 보다 상징적인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다. 약속대로 그는 저술활동에 헌신하여 여러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했다."(269-70)


10 일탈 


"시적 힘과 더불어 명료하게 기술된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무신론을 정의하는 일련의 단죄목록이 담긴 실질적인 교과서라고 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종교재판관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 이 사상이 일으킨 파장은 그 시가 가진 시적 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들로부터 초조한 반응을 끌어냈다. 그런 반응의 하나를 대표하는 인물로 15세기 중반의 위대한 피렌체인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다. 일찍이 20대 시절, 피치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아 시의 저자를 〈우리의 위대한 루크레티우스〉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학술적인 논평까지 썼다. 그러나 훗날, 다시 이성을 찾은─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 돌아온─피치노는 자신이 쓴 논평을 태워 없애버렸다. 자신이 〈루크레티아니〉라고 부른 루크레티우스 추종자들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공격했고, 삶의 대부분을 플라톤 철학을 응용하여 기독교를 위한 독창적인 철학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바쳤다."(277)


"사실 루크레티우스를 금지한 교회 당국 내에도 인문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으며, 결국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549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금서목록에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추기경 마르첼로 체르비니의 요청으로 금서목록에 오르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가톨릭 지식인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담긴 생각을 우화라는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에라스무스 역시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제목의 대화체 형식의 글에서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히도니우스의 입을 통해서 〈경건한 기독교인보다 더 에피쿠로스주의적인 사람은 없다〉라고 언급했다. 금식하고 죄를 회개하며 죄지은 육신을 벌주며 사는 기독교인이야말로 쾌락주의자로 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들이야말로 옳은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옳게 사는 자보다 더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284-5)


"에라스무스의 이런 역설이 교묘한 속임수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에라스무스의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대표작 『유토피아』(1516)에는 에피쿠로스주의와의 연결점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토피아의 거주민들은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전부 또는 그 대부분〉이 쾌락의 추구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좋은 유토피아 사회와 부패하고 사악한 영국 사회(게으른 귀족들이 소작농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의 핵심에는 바로 에피쿠로스주의의 중심 원칙이 있음을 이 작품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모어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등장하는 베누스에 대한 멋진 찬가를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이 쾌락의 원칙은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재생산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쾌락의 추구라는 이 원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게 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모어는 잘 알고 있었다."(285-7)


"그러나 유토피아는 영혼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없어질 것이라고 믿거나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무관심하며 오직 신 자신에게만 신경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소수의 계몽된 엘리트만 모인 철학자의 정원에서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 곤란할 것이다. 설령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의 힘이 존재한다고 해도 모어는 인간의 본성은 그런 두려움 없이는 결국 무력과 거짓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야 만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모어의 믿음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열렬한 가톨릭 신앙의 영향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군주론』의 저자 역시, 법과 관습은 두려움이 동반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90-1)


"그런데 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몸집의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 주인공이었다. 1580년대 중반, 브루노는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나폴리에 있던 수도원에서 도망쳐나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각지를 계속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런던에 정착했다." "브루노에게 루크레티우스의 우주는 음울한 각성의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우주에 시공간의 한계가 없다는 것, 규모가 아무리 크든 작든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원자야말로 모든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이며 바로 그 원자를 통해서 개체와 무한이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멍들고 두들겨 맞은 성자 예수의 몸에 신성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머나먼 천국에 있는 성부 여호와를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무의미한 짓이었다." "브루노가 귀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을 내는 목소리를 언제든지 틀어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호전적인 바보들에 대항하여 박차고 일어서는 용기였다."(292, 297-8)


"브루노가 지구가 우주의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지지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여전히 교회나 학계 모두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받으며 파문까지 당할 수 있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충격을 더 멀리 끌고 나갔다.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1600년 2월 17일,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 세워진 화형대 앞에 성직을 박탈당한 전 도미니쿠스회 수도사가 머리를 밀고 당나귀 등에 올라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곧 불이 붙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브루노는 산 채로 불탔고, 채 타지 않고 남은 뼛조각도 긁어모아 산산이 가루로 만들었다. 화형의 흔적인 뼛가루와 재는 그렇게 흩어졌다. 이제 그 작은 입자들은 브루노가 믿었던 것처럼 즐겁고 위대한 영원한 물질의 순환 속으로 돌아갈 것이었다."(298, 302)


11 사후세계


"브루노가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가도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하나인 몽테뉴의 『수상록』을 통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마주친 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1580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수상록』은 1603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100여 행에 달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을 직접 인용했다."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악몽을 통해서 도덕성을 강제하려는 태도를 경멸했다. 몽테뉴 역시 자기 자신의 감상의 중요성과 물질계의 증거에 매달렸다. 또한 금욕적인 자학과 육신에 가해지는 폭력을 혐오했으며, 내적 자유와 만족감을 귀하게 여겼다. 몽테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서면서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과 함께 스토아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몽테뉴에게 더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육체적 쾌락을 찬양하도록 이끈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이었다."(304-5)


"몽테뉴는 에피쿠로스적 세계에서 생각하고 쓰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꿈 중 하나를 통째로 버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고요하고 안전한 땅에 서서 다른 이들에게 닥치는 난파의 운명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서 있을 수 있는 안락한 언덕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배에 올라탄 상태였다. 몽테뉴도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명예와 권력, 부를 향한 끝없는 분투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냉소주의에 완전히 공감했다. 또한 그 역시 자신만의 상아탑으로 물러나 책으로 둘러싸인 개인 서재에서 스스로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은둔 생활은 끝없는 동요, 형태의 불안정성, 세상의 다원성, 그리고 그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휩쓸려들게 되는 무작위적인 일탈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307)


"영국에서도 매우 어렵기는 했지만 신을 최초에 원자를 창조한 자로 설정함으로써 원자론과 신앙의 병존이 가능해졌다. 아이작 뉴턴은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의 하나로 여겨지는 자신의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시 제목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원자론자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입자들이 전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한 그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똑같은 본성과 성질을 가진 여러 형체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입자들이 닳아서 없어지거나 조각나 부서지게 되면, 사물의 본성은 바로 이 입자들에 달려 있으니 그 또한 변할 것이다.〉 그러면서 뉴턴은 조심스럽게 신성한 창조주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 어떤 일상적인 힘도 신이 최초에 창조한 원자를 쪼갤 수는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은 드라이든이나 볼테르의 회의주의, 디드로나 흄을 비롯한 많은 계몽시대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실용주의적이며 대단히 파괴적인 불신론을 낳는 데에도 기여했다."(326-7)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제퍼슨은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 특히 무지와 공포가 인간 존재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확신을 품는 데에 도움을 받았다. 사실 제퍼슨은 시의 저자인 루크레티우스가 기대했을 법한 방식이 아니라 16세기 초의 토머스 모어가 꿈꿨을 만한 방식으로 이 고대 유산을 받아들였다. 알다시피 제퍼슨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공적 생활로 인한 격렬한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새로운 공화국의 초석이 되는 중대한 정치적 문서를 작성하는 데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문서의 내용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만든 또 하나의 뜻밖의 전환이었다. 이 문서로 탄생하는 정부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복 추구〉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루크레티우스를 이루던 원자들은 이렇게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그 자취를 남겼다."(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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