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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ㅣ 역사도서관 교양 19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차용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8월
평점 :
머리말
"교황이라는 칭호 자체는 정작 그 소유자의 위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지만, 그가 신의 대리자라는 주장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12세기 이후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매년 발행되는 『교황청 연감』에도 '베네딕토 16세,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천명되어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보다는 더 고귀한' 존재라는 말로써 교황의 위상을 자리매김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 덕택에 교황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의 교황은 매고 푸는 권한의 소유자 혹은 베드로와 같은 천국의 문지기라기보다는 윤리와 신앙의 재판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교리적으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 직분을 수행하고 하느님을 대리하는 통치자'이며, 이것이 교황 본연의 임무이다. 이는 불변의 원칙으로 남아 있다."(6-7)
제1부 교황권의 모습
"'거룩한 아버지' 혹은 '교황 성하'. 도대체 무슨 뜻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모든 교황은 공식적인 직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거룩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직은 이 직책의 수행자를 더 선한 존재로 만들며, 교황 자신도 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세속 왕권은 좋은 사람도 나쁘게 만든다. 중세의 교회법 학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떤 학자는 교황이 거룩함을 전달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보았고, 또 다른 학자는 교황권은 사도 베드로의 공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개인적으로 거룩함이 없거나 심지어 윤리적인 결점이 있더라도 베드로의 공덕이 이를 만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사교황(papa angelicus)이라는 말이 있듯이, 교황이 개인적으로 천사와 같은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맡은 일에서 연유하는 거룩함과 살아온 삶 자체의 거룩함, 이 둘을 동시에 겸비하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목표였다."(33-5)
"교황과 관련된 의식은, 교황직의 거룩함이 임종과 더불어 종식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의 시신 앞에서 교황 궁무처장이 교황의 본명을 부르면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알비노, 아직도 잠을 자느냐?〉(Albino, dormisne?) 여기서 알비노는 1978년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의 세속 이름 알비노 루치아노를 말한다. 결국 교황에 대한 경의는 교황의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라 교황직의 거룩함에 대해서 표해지는 것이기에, 공경에서 불경(不敬)으로의 태도 변화는 너무나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교황궁과 교황의 시신은 역사적으로도 약탈자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에 '망치 소리가 사라지면, 교황의 직무와 연관된 거룩함도 조용히 종식될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어떤 인간도 교황처럼 높이 공경받지는 않지만, 교황처럼 죽음과 더불어 깊이 추락하는 경우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교황은 사라지지만, 교회는 존속한다."(39-41)
"교황권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다. 신의 독생자는 벳새다 출신의 어부 시몬 베드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인류의 영적 구원을 주관하는 로마 주교로 임명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를 말이다." "교부(教父) 키푸리아누스는 『마태오의 복음서』가 전하는 말이 단지 베드로에게만 전달된 것으로 보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매고 푸는 권한이 모든 사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사도들은 이 권능을 주교들에게 다시 양도했다고 적고 있다. 즉, 구원의 확신은 단지 로마의 주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교들에게 있었다. 결국 베드로는 '동등자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에 불과한 사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교단 지상주의' 이념은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 주장에 항상 장애물이 되어왔다. 그때마다 로마 교황권은 정교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옹호되어 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인정받아 온 교황의 수위권을 무기로 주교단 지상주의에 대응했다."(56-8)
"주교단 지상주의보다 한층 더 강하게, 또 다른 관점이 교황이 주장한 '완전한 최고 권력'에 맞섰다. 바로 공의회주의였다. 처음 1,000년 간 여덟 번의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4세기와 5세기에 거행되었던 처음 네 번의 공의회는 초현실적인 권위를 누렸다. 개최 장소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옛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렸다. 이는 그것이 처음에는 로마의 황제가, 후대에는 동로마의 황제가 소집한 국가적인 모임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교리 문제를 논의했으며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도직에 근거해서 스스로의 책임 아래 회의에 임했다. 황제가 인준한 공의회 결정 사항은 제국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후대에 와서 결정 사항의 효력이 발생하는 데 교황의 관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서기 1000년 이전에 개최된 모든 세계 공의회도 마치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축성된 것'처럼 '포장'되었다."(61-2)
제2부 교황들의 역사
서기 1000년까지
"초기 교황 시대를 거친 후, 서기 800년 성탄절에 레오 3세(795~816)가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황 이념의 정치적 외연을 더욱 확장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이 유럽의 미래에 지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 운영에서 교황권의 미약한 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로마가 권위 있는 역할을 수행하길 원했으나, 로마는 이를 실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샤를마뉴는 전 제국에 통일된 전례를 원했고, 이를 위해 하드리아노 1세(772~95)에게 로마의 성사집(Sakramentar)을 요청했으나, 그가 받은 것은 낡은 책 한 권으로, 프랑크 제국 내에서만 이용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로마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려고 했지만, 정작 계속해서 통일적인 지침을 내린 것은 프랑크족의 왕이었다. 결국 811년의 유언장에서 샤를마뉴는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제국의 다른 대교구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샤를마뉴를 제위에 올린 교황 레오 3세도 어쩔 수 없이 이를 감내해야만 했다."(123-4)
"니콜라오 1세(858~67)는 당대 교황 중에서 재임 기간 동안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한 유일한 교황이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교황도 니콜라오처럼 수많은 판결을 통해서 교회법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오토 카르텔리에리의 평가에 의하면, 물론 반세기의 시차가 있었지만 그는 '샤를마뉴의 진정한 대적자(對敵者)'였다. 그의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어도, 주장하는 바가 명확했고 이를 관철하려는 의지도 확고했다. 로마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유죄 선고를 받은 자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은 로마에 항소할 수 있으며, 교황이 결의 사항을 인준한 공의회만이 인정된다. 모든 속인은 죄인이며, 최고의 속인인 황제조차도 교황의 재치권에 복속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그가 주장한 바였다." "왕은 최고의 세속 군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장 미천한 신하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신분으로 교회재판소에 굴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 사례는 후세까지 계속해서 기억되었다."(124-7)
# 중(中)프랑크 왕국의 왕 프리슬란트가 본처인 티트베르가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후처인 발트라다가 낳은 자식들을 적자로 인정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니콜라오는 티트베르가만을 유일한 정부인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황 니콜라오 1세의 재임 기간에 급상승한 교황의 위상은 10세기와 11세기 초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가 예측할 수 없는 '잉태의' 시대였기에, 교황의 많은 권리들이 부지불식간에 확보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에 법적 인준을 받게 된다. 991년의 시노드에서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괴물'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던 요한 12세는 962년 독일의 왕을 로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 전통은 이후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교황들은 주교구를 설립하고 이를 교황청 직속 교구로 만들었으며, 지역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교황청에 직속되는 면속(免屬) 수도원들도 생겨났다.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시성(諡聖)에 대해서도 로마는 명확히 규정했고, 그 결과 993년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울리히(923~73)의 시성식은 교황이 주재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 모든 권리들이 한마디로 엉성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이후의 교회법 제정과 더불어 로마의 재치권 속으로 들어온다."(127, 129)
교황, 세계 통치를 꿈꾸다
"독일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 따르면,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종교를 단순히 권력 행사의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정치의 대가'(Meister der Politik)로 분류되곤 하지만 최근에는 '종교적 천재'(religiöser Genie)로 평가받기도 한다. 신학자 이븐 콩가르는 그레고리오의 신념을 이렇게 기술한다. 〈신에 복종하는 것은 교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의 유명한 「교황령」 27개 항목에 그의 세계관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 항목들은 모두 선언조의 문구로 구성되었는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로마 교황만이 합법적으로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라는 항목이다." "특히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라는 등의 항목과 관련해서, 가톨릭을 신봉했던 절대군주들조차도 그레고리오의 이러한 숭배 의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레고리의 이름을 성무 일과서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139-40)
# 1077년 하인리히 4세와 카노사의 굴욕을 연출한 당사자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제 교회(Papstkirche)로 나아가는 길을 다져놓았다. 그 결과 교황이 구원의 조건과 교회에서 옳은 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지배권을 추구하려면 교황에게는 후원자와 조직이 필요했으나,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혁명가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서서히 구축하기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전략가가 필요했다. 개혁적 성향의 교황권은 그레고리오의 두 대 후임 교황인 우르바노스 2세(1088~99)와 더불어 시작된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그는 신앙을 수호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클뤼니 대수도원 공동체의 원장이었다." "우르바노 2세는 어떤 교황보다도 아우구스티노참사수도회(Augustinerchorherren)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적으로 교회 정책을 전개하기 위해서 참사회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조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선언(1095)이었다."(147-9)
"우르바노의 행정 조직은 안정적이었다. 임기 시작 직후인 1089년에 교황의 궁정 국가를 의미하는 '로마 교황청'(römischer Kurie)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문서성(文書省)의 업무가 자리를 잡았고, 재정 담당 부서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재무 및 수납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관료화, 뇌물 수수, 강탈과 같은 문제들도 대두되었다." "교황이 제정한 법령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산더미 같은' 교황 교령과 서한에 대해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계로 표현하면,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81)의 재임 기간인 22년 동안 작성된 문서가 1200년까지 작성된 서한과 문서의 5분의 1에 달한다. 12세기에만 약 1,000개 정도의 교령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1,000년 동안 제정된 전체 교령의 수와 비슷하다. 아마도 법률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상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대부분의 교황들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150-1)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초창기의 법률적 지식에 정통했던 '세계 통치를 꿈꾸던 교황'(Herrschaftspapst)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베드로의 대리자(Vicarius Beati Petri)라는 칭호 대신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칭호를 사용한 교황이었다. 그에게 베드로는 자신의 '직무상의 동료'(Amtskollege)였으며, 두 사람 모두 신의 대리권을 행사한다. 최후 심판의 날에 결산을 하는 사람은 세계 심판자가 아닌 바로 교황이다." "그는 또한 법률 정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간 공포된 수많은 교령(敎令)들이 무질서의 극치에 달했던 상황에서, 인노첸시오는 법적으로 중요한 교령을 모은 교령집을 간행하고 이를 공식 책자로 배포했다. 교황청은 철저하게 경영 원리에 근거해 조직되어 갔다. 교회 사업과 수납 제도가 정립되면서, 일을 처리하는 대가로 '선물'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선물은 용인되기도 했다."(151, 154-5)
"1198년 이후 독일은 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에서 배출한 두 명의 왕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어느 왕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교황이 심판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교령들을 반포한다. 논지는 다음과 같다. 교황이 독일의 왕을 황제로 등극시키고, 황제권이 본질적으로 독일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교황은 독일의 왕 선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후보자가 그로부터 '사도적 축복'(die apostolische Gunst)을 받는다. 선출 자체는 나중에 선제후(選帝侯, Kurfürsten)로 발전하는 '주요 선거인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가 선거인단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두 가문 사이에서 심판관 역할을 수행했고, 마침내 제3자였던 풀리아(Apulia) 지역 태생의 소년인 프리드리히 2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157-60)
#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반포하여 선제후들이 선출한 인물만이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게 하였다.
"가문의 조상들 중에서 배출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보니파시오라 칭했던 새 교황에게는 교황권과 자기 가문의 물질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했다.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이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후대에 이른바 경험법칙(Faustregel)으로 불렸던 것이 당시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은 부유해지려면 교황을 배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메디치, 바르베리니, 델라 로베레, 카라파, 보르게제 가문 등이 모두 그러했다. 물론 이 규칙이 늘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인노첸시오 3세가 대표적이었고,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더 확실하게 입증했다." "이 교황은 1300년에 성년을 선포하고 특별 성년대사(聖年大赦)를 반포하면서, 매고 푸는 권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보니파시오는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성년을 100년 주기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성년의 주기는 50년에서 30년, 마지막으로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172-3)
"약간의 전초전이 있은 뒤에 1296년부터 로마 교황권과 프랑스 왕권의 관계는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프랑스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십일조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보니파시오는 교령을 통해서 이 과세의 시행을 금지토록 했으나, 필리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세에 아마도 가장 유명했을 교령은 격렬한 성명전(聲明戰) 속에서 등장한다. 교령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가 여기서 등장하는데, 이는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이론적 글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신앙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의 교회만이 있으며, 이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고백하고 믿는다.〉 하지만 이 문서의 절정은 다음의 문장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고, 말하고, 확신하고, 천명한다.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으려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175-7)
"1303년 9월 7일, 보니파시오 8세를 겨냥한 아나니 암살 계획은 교황권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제 교황은 프랑스에 종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1309년). 로마 교회와 보편 교회를 동시에 상징하는 교황이 반드시 로마에 자신의 거처를 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교황은 프랑스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전에도 교황들이 로마에서 자주 출타했기 때문에, 교황과 교황청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라는 인식이 싹터 있었다. 수사에서 태어난 위대한 법학자 헨리쿠스(1271년 사망)─일명 호스티엔시스─는 '교황이 있는 곳이 로마'(Ubi papa, ibi Roma)라는 격언을 만들어내었다. 교황권을 아비뇽에 영구 정착시키려는 구상이 진행되자, 로마법과 교회법에 통달한 발두스 데 우발디스(1400년 사망)는 '교황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 예루살렘, 시온이며, 모든 사람의 고향'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180)
종교개혁, 가톨릭 개혁, 적응 시기의 교황들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증오해 마지않았던 콜론나 가문의 마르티노 5세가 공의회 교황(Konzilspapst)으로 선출되면서 서유럽 교회의 분열은 종식된다. 그 뒤로는 보르자 가문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와 같은 특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페인 사람인 그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예술을 장려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의 부도덕성 역시 이에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던 해에 그와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율리오 2세(1503~13)가 뒤를 이었다. 보르자 일가의 박해를 받던 델라 로베레 집안 사람인 그는 흔히 콘스탄티누스의 옛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피에트로 성당의 공사를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라파엘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율리오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1513~21)는 흔히 루터 교황(Lutherpapst)으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다."(187-8)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고, 가톨릭 교회에 각성의 종소리를 울리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가톨릭적 개혁으로 맞서려는 시도가 다음 세대 교황들의 몫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성 비오 5세(1566~72)는 신중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개혁안들을 실행에 옮겼다(그 결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으로 철저한 금욕주의자이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종교재판관이었던 그에게 신분과 교양이 높았던 인물들은 표적이 되었다. 그는 1517년에 「금서 목록」을 제정했고, 그 결과 수백 명의 인쇄업자들이 독일과 스위스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세속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국가에게도 복종을 강요하면서, '스스로 여왕임을 자처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던 교회의 이러한 조치는 교황이 통치자나 국가원수에게 내린 처벌의 마지막 사례가 되고 말았다."(192-4)
"당시의 교황들 중에서 크게 부각되는 또 한명의 인물은 정열적인 식스토 5세(1585~90)였다." "식스토 5세와 같은 교황이 기념비 건축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스토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9만 명의 거주자들 가운데 5만 명이 살해당한 1527년의 악명 높은 '로마의 약탈'과 여러 차례 창궐한 페스트 뒤, 로마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식스토는 50킬로미터의 거리를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해 물을 끌어들였다." "라테라노 궁전은 토대부터 새롭게 건축되었고, 과거 판테온의 위용을 능가하는 피에트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마무리되었다." "이집트에서 온 오벨리스크를 네로의 정원에서 피에트로 대성당의 광장으로 옮기는 작업 역시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과 5년 사이에 그가 보여준 엄청난 열정과 성공은 초인간적인 힘과 결탁해야만 가능했다. 그는 교황의 모습을 한 파우스트 박사였던 것이다."(192, 204-7)
"식스토 5세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후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모델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식스토 5세 이후, 교황권은 유럽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 휘말려 들어갔고, 로마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절대군주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더욱더 갈등을 빚었다. 절대군주들이 자신들의 지배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종교적 우위권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콘클라베에서도 다른 국가를 가장 덜 자극하는 후보를 선출하곤 했다. 추기경들은 '이 시기에 독실하면서도 경력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을'(슈바이거) 교황으로 추대했다. 비록 비굴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불화가 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속화의 가속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이성종교'(Vernunftreligion)인 계몽주의의 충격도 교황권에 불어닥쳤다. 볼테르(1694~1778)는 교황권이 구시대의 유산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208, 212)
"교황권도 시대정신을 따르려 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예수회를 해산시켰다는 사실이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556년 사망)가 16세기에 설립한 교단인 예수회는 특히 '교황에 대한 복종'(Papstgehorsam)을 서약했고, '교황에 대한 복종'이 '교단에 대한 복종'보다 우선시될 정도였다. 제후들의 궁정 고해 신부이자 조언자로서, 학교와 대학의 교사로서, 종교 문화의 전달자로서 예수회 회원들은 가톨릭 신앙과 로마에 대한 복종심을 헌신적으로 설파했다. 1760년 이래로 이 교단은 스페인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절대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상습적인 질서 파괴자로 인식되고,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 출신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4세(1769~74)는 세속 권력에 위축된 나머지 예수회의 해산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마침내 1773년 7월 21일에 교황의 소칙서(breve)가 반포되면서, 예수회는 해산되었다. 이후에는 어느 교황도 클레멘스라는 교황명을 사용하지 않았다."(216-8)
"'필요성'(Nutzen), 이것은 계몽 절대주의에서 교황권을 포함한 종교 단체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었다. 합리적인 국가 철학을 추종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는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교황 비오 6세(1775~99)가 요제프 2세에게 교회 관련 법령들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1782년 빈을 방문했을 때는 카노사의 역전극이 벌어졌다. 요란한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정작 비오 6세가 얻은 것은 없었다." "교황 비오 7세(1800~23)는 나폴레옹과 정교 조약을 체결(1801)해 유럽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프랑스 교회에 대한 나폴레옹의 통제가 강화되고, 무력적인 유럽 팽창 정책이 가속화되자 교황과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려고 들자, 비오 7세는 파문으로 맞섰다(1809). 이후 납치 감금된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쫓겨나고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218-21)
바티칸의 시대 혹은 교황령의 종말과 새로운 교리
"새로운 교황 비오 9세(1846~78)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컸다. 사람들은 그의 사교성에 매료되어 갔다. '천사'(È un’ angelo)로 불렸던 그는 노쇠하고 병약했던 전임자와는 달리 일주일에 한 번씩 일반 알현을 했고,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사찰을 중단시키고, 사면을 발표하기도 했다. 교황은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통일 자유 이탈리아의 건설을 원했던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대가 날로 커지면서 그것은 교황에게 압박이 되었다. 언론 자유, 세속인의 관료 등용, 성직자 출신의 장관 임용 금지, 시민군의 무장, 이탈리아 동맹의 가입 등등의 문제가 그러했다.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롬바르드 지역에서 1848년 3월에 혁명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교황 군대가 점령군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기대했다. 1850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모든 자유주의적 이념을 배척하고,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모든 제도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는 이제 반동(反動)의 상징이 되었다."(225, 229)
"'위-이시도르'는 이시도르 메르카토르라는 저자가 9세기에 편찬한 교령집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고대와 초대 교회 교황들의 위조된 교황 서한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날조된 일련의 조문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된 것들로,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7월에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을 교의로 결정했다." "보편적 사교직은 교황이 모든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정상적인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무류성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교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다. 즉, 교황의 교리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영원불멸하다.〉"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의 교리들은 교회 구조의 토대를 다지는 과정의 종착점이었다. 마지막에 병적으로 권력 지향적인 인물(비오 9세)의 등장이 화룡점정이었지만, 전통적인 교회관에서 볼 때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 교리는 지속적으로 담금질되어 온 것이었다."(236-9)
새로운 힘의 충전
"교황령이 소멸된 1870년 이래로 교황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바티칸, 라테라노, 카스텔간돌포만을 왕래했고, 대면하기에 너무 어려운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요한 23세(1958~63)는 공장 노동자, 복지시설 거주자, 교도소 재소자 등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사귀고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대부분의 경우 걸어서 이들을 찾아갔기 때문에 '조니 워커'(Johnnie Walk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요한은 1959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구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인 재판도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밝히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모여서 분열을 종식시키려 합니다〉라고 했다. 문호를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개방했다. 이들은 더 이상 교회 밖에 있는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이단, 분파주의자로 분류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로 간주되었다. 요한 23세는 타 종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기도를 함께했던 첫 교황이기도 하다."(259-61)
"알비노 루치아니, 일명 '33일의 교황'(1978년 8월 26일~9월 28일)은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 1세라는 두 개의 교황명을 택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암시했다. 비록 교황명 선택의 이유를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로부터 각각 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고마움으로 돌리고 있지만, 직무 수행에 대한 그의 의도를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요한 23세의 개방성과 자유로움, 바오로 6세의 교리적 엄격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적 유연함은 노회함과 더불어 '미소의' 교황이라 불렸던 그의 개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교황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소문들을 만들어내었다. 크라쿠프(Krakau)의 대주교였던 카롤 보이티아가 교황으로 선출된 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비오라는 교황명을 쓴 세 교황들이 토대를 마련해 놓은 덕이 컸다. 하드리아노 6세(1522~23)를 예외로 한다면,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1378년 이래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첫 번째 교황이었다."(266-7)
"교황 재임 초기에 폴란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운 아버지께서는 폴란드에서 진행된 모든 연설문을 무릎을 꿇고서 작성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대변혁 이후 오늘날에는 그의 열정이 과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신의 크라쿠프 주교좌 성당의 수호성인인 스타니스와프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택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눈에는, 폴란드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 문화 사이의 행복한 융화에 대한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는 물질주의와 서구 사회가 직면한 '욕망과 향락 문화'에 대항하는 '선봉'에 서야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제작된 렌즈는 로마라는 눈에 씌우기에는 너무 강했던 것 같다. 라디오 바티칸은 폴란드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 날카로운 논조의 사설을 방송했고, 동시에 평화, 빈곤, 신앙과 같은 유럽과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피임약을 거부하며, 성직자 독신제를 옹호하는 데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272-3)
불확실한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