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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 : 자연의 승리 11
"제국이 승리의 의례를 거행하는 바로 그 순간 본질적으로는 거대한 자기기만의 행위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자연이라는 야생의 힘을 길들였다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피비린내 나는 동물 사냥을 무대 위에 올렸다. 우리는 로마인 스스로는 이해하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눈금의 척도로, 미시적 차원에서부터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곧 인간의 야심에 대한 자연의 승리였다. 로마의 운명은 황제들과 야만인들, 원로들과 장군들, 병사들과 노예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나 또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과 태양 주기의 영향도 컸다. 이제야 우리는 생태 환경의 변화라는 거대한 드라마에 로마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배역을 맡고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과학적 도구를 갖게 되었다." "진화의 깊은 힘은 찰나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의 운명》은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문명이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허망한 꿈을 꾸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17-8)
1장 | 환경과 제국 19
"로마의 성취를 평가하고 고대 제국주의의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의 삶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삶은 느리고 유기적이었으며, 무너지기 쉽고 제한적이었다. 시간은 인간의 발과 동물의 발굽이 만드는 둔중한 리듬에 따라 흘러갔다. 수로는 제국의 진정한 순환 시스템이었으나, 폭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닫히는 추운 계절에는 모든 마을이 섬으로 변했다. 에너지는 당연히 부족했다. 힘은 인간과 동물의 근육에서 나왔으며, 연료는 통나무와 덤불이었다. 육지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삶이었다." "생존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제때 내리는 비에 좌우되었다. 대다수에게 먹을 것은 곡물뿐이었다.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시옵고〉는 진지한 청원이었다. 죽음은 늘 곁에 있었다. 이런저런 전염병들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평균 수명은 20대, 20대 중반 정도였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제약들은 중력과 같이 현실적이었고, 로마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규정하는 운동 법칙이었다."(24)
# 시기별 로마의 기후
1. 로마 기후최적기 : 약 기원전 200~기원후 150
2. 로마 과도기 : 약 기원후 150~450
3. 고대 후기 소빙하기 : 약 기원후 450~700
"기후 변화는 항상 외부에 원인이 있는 요소였고, 게임의 다른 모든 규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와일드카드였다. 외부적 요소에 의해 삶의 인구통계학적, 농업적 토대가 재편성되었다. 사회와 국가의 훨씬 정교해진 구조를 기후 변화가 좌우했다. 고대인들이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를 두려워하며 숭배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속적 군주의 권력도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였다. 자연은 어둠을 틈타 기습하는 군대처럼 인간 사회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장치를 가동했다. 그것은 바로 감염병이었다.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생물학적 변화가 물리적 기후 변화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물론 기후 변화와 감염병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연관되어 서로 겹쳐서 일어나지만 동일한 현상은 아니다. 다만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로마의 질병은 제국의 원활한 연결성에서 비롯되었다. 감염병들은 로마의 연결성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 전광석화처럼 퍼져나갔다."(37, 40-1)
"환경과 사회 질서 사이의 관계는 결코 말끔하거나 직선적이지 않았다. 가장 험난한 도전에 마주했을 때조차, 로마인들이 역경에 대처한 수준은 놀라웠다. 스트레스를 흡수하고 적응하는 능력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그러나 로마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야기가 하나부터 열까지 환경과 관련된 드라마임을 일깨워준다. 제국이 번영을 누렸던 2세기의 황금시대, 로마 세계 너머 저 멀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가 유입되어 팬데믹이 돌고 난 뒤 제국의 위대한 타협의 파탄, 3세기 무렵 기후와 전염병이라는 재앙의 협공 속에서 제국의 붕괴, 새로운 유형의 황제에 의한 제국의 부활, 4세기에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민중운동 발발, 고대 후기에 일어난 동양 사회의 부흥, 부보닉 페스트라는 핵폭탄, 은밀히 시작된 새로운 빙하기, 로마 제국으로 인식되던 실체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면서 성전jihad에 임하는 이슬람 군대에 의해 재빨리 정복되는 과정들 모두가 그러하다."(45, 48)
2장 | 가장 행복했던 시대 51
"166년 갈레노스가 로마에 온 지 4년째 되던 해에 동쪽으로부터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도시로 침입해 왔다. 역작 《의학의 방법》에서 갈레노스는 이 병에 걸린 청년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치료한 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약했던 기침이 점점 격렬해지고, 환자는 후두부에 생긴 궤양에서 짙은 색의 딱지를 뱉어냈다. 곧 그 병의 명백한 징후가 나타났다. 환자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색 발진으로 뒤덮였다. 갈레노스는 그 병을 완화하는 처방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키운 소의 젖, 아르메니아의 흙, 소년의 소변 같은 목록들은 절망적일 뿐이었다. 그가 겪은 대규모 사망 사건은 인류 역사 최초의 팬데믹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 파탄에 이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폴로 신이 새롭고 암울한 벌을 내리는 것이라 여겼으나, 과학자 갈레노스에게 그 병은 단지 '대역병'이었다. 이 시기는 기번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번영한 시기'라고 규정했던 때이다."(56)
"교역과 기술의 발달은 로마인들에게 인구 위기를 앞지르게 했다. 그래도 로마인들이 현대에서 당연히 여기는 성장 속도를 파격적으로 높이려는 시도를 했던 흔적은 없다. 급격한 도약은 단지 과학이 경제적 생산성을 끌어올렸을 때, 그리고 석탄과 같은 화석 에너지원이 대규모로 활용되었을 때만 일어났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전근대 경제의 기본 역할을 초월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게 불명예는 아니다. 로마는 때 이르게 진보했으나 동시에 철저히 산업화 전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로마 경제를 상상할 때 최저 생계의 황량하고 평탄한 선을 이어가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야 성장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던 전근대 경제를 떠올리면 안 된다. 문명을 경험하는 것은 흥망성쇠, 통합과 해체의 결과로 일어나는 물결과 마주하는 일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문명은 이러한 파도 중에서 아마도 가장 폭넓고 강력한 것이었으며, 끊임없이 상승하는 근대성의 물마루보다 앞선 것이었다."(79)
"로마 기후최적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강우량이 많았고 더 넓은 지역에 비가 내렸다. 농업에서 최악의 위험성이 줄어든 것이다. 전체 로마 제국의 세계 어디에나 있는 관개 기술 유적이 증명하듯이, 물 관리는 내내 농부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중요한 문제였다. 가장 위험한 조짐은 한 해의 강우량이 식물의 생육 가능 임계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보리의 경우는 약 200~250밀리미터, 밀의 경우는 약 300밀리미터였다. 어떤 해에는 농사를 완전히 망칠 위험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피터 간시는 그리스의 일부 지역에서 밀농사를 망칠 확률은 4년에 한 번, 보리농사의 경우는 20년에 한 번이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화, 통합, 그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여러 형태의 전략들이 지중해 전 지역에 토착화되었다. 그러나 로미 기후 최적기 동안에는 정기적으로 비가 내렸으므로, 날씨로 인한 식량 위기의 위험을 줄여주는 강력한 동맹군 역할을 해주었다."(105)
"서기 120년대에 아프리카를 압박한 광범위한 가뭄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그 지역을 괴롭힌 기후의 건조화라는 위기의 맥락에서 일어난 최초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화 역시 제국의 황금시대가 결코 흔들림 없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요긴한 증거다. 지중해 지역이 급격하게 기후가 변동하는 곳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마 기후최적기는 기껏해야 지나치게 예측 불가능한 연간 기후의 변동성이 완화된 시기였을 뿐이다. 적어도 현지 지역 사이에서 전파되는 대규모의 급성 전염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본국에서의 불안정한 왕권 다툼, 그리고 국경선을 따라 벌어지는 지정학적 마찰은 로마 제국의 고질적 특징이었다." "회복 탄력성은 한 사회가 충격을 흡수하고 손상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자금을 축적하는 능력을 재는 척도이다. 가뭄이라고 해서 모두 기아를 유발하는 게 아니며, 전염병이 항상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러하다."(108-9)
"로마인들에게 전염병의 위협을 완화하거나 손실을 줄여서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고대의 약품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롭기만 했다. 기본적인 간호라는 게 아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조금도 유익하지 않은 것이었다. 온탕이나 냉탕에 입수하라는 처방이나 환자에게서 무지막지하게 피를 뽑아내는 처치는 사망자 수를 늘리기만 할 뿐이었다. 평민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마법에 의존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세 후반에 발달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리 같은 처방이 로마에도 있었던 게 확실하지만, 대중은 질병에 대해 종교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지배적이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대규모 사망을 피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희생으로 전염병을 간주하여, 아폴로 신의 액막이 조각상을 세우는 정도로 대응했다. 로마 제국에는 공공보건의 기초조차 없었다. 폭발적 사망률이 처음으로 지역에 국한된 재앙을 넘어서게 되자, 제국은 전례 없는 충격으로 휘청거렸다."(115-6)
3장 | 아폴로의 복수 127
"로마 제국은 서기 160년대에 신종 감염병의 진화와 마주쳤다.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역병은 성장이 과도할 경우에 예측할 수 있는 역효과는 아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을 맬서스 학파의 주장처럼 자원의 근본적 역량보다 인구 팽창이 앞서서 일어난 붕괴의 희생양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이 순전한 우연도 아니었다. 제국에 내재하는 '생태적' 조건으로 인해 이런 사건이 잘 일어날 만한 주사위의 눈금이 나온 것이다. 로마 세계에서 질병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제국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서식자에게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밀집된 도시 거주자, 지형의 끊임없는 변화, 제국 내부와 외부로 강력하게 연결된 교역망, 그 모든 것이 특정한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생태계 형성에 기여했다." "궁극적으로 아폴로 신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는 종교적 두려움이 있었다. 아폴로 신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제국 자체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32-4)
"본질적으로 로마 문명은 전염병이 잠재하는 지형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농업이 확장되면서 문명이 모기에게 유리한 서식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삼림벌채로 인해 물웅덩이가 생겼고, 울창한 숲이 들판으로 변하면서 모기들이 쉽게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폰티네 습지를 가로질러 건설한 아피아 가도와 같은 로마의 도로들은, 〈(말라리아를 전파하는) 학질모기가 선호하는 새로운 번식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의 정원들과 상수도로 인해서도 모기와 인간은 엄청 가까워졌다. 〈누구든지 대중을 위한 물과 목욕탕에서, 수영장에서, 운하에서, 도시의 집들에서, 정원에서, 교외의 빌라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을 세밀하게 계산해 보면,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아치, 깎인 산과 평평해진 계곡을 여행하게 되면, 그는 세상에 더는 놀랄 게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편리한 환경을 건설한 탓에 로마 제국은 모기의 번식을 실험하는 장이 되었다."(167)
"로마 제국은 '사람이 사는 세계를 향한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스의 연설가 디오는 로마령 알렉산드리아가 〈말하자면, 전 세계와 멀리 있는 나라들 사이의 접합점이다. 마치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는 도시 속 시장〉 같다고 했다." "아프리카 해변에 바짝 붙어서 우기의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상인들은 보이지 않는 교류의 중개상이었다. 인도양 체제의 진정한 생물학적 의의는 '유라시아의 문명화된 질병 집단들'을 융합시킨 것이 아니라, 장애물 없이 신종 전염병을 통과시킬 수 있는 통로를 형성했다는 데 있었다. 중앙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척추동물과 다양한 미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인간에게 유해할 정도로 득실거리는 병원균의 요람이기도 한, 진화 실험의 위험한 생산지였고, 지금도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질병사의 드라마는 병원체의 진화와 인간의 연결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데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그 두 가지 힘이 특별히 중대한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졌다."(185-7)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종교적이었다. 역병은 언제나 무기력하거나 원초적인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안토니누스 페스트는 깊은 종교적 두려움을 건드렸다. 시간의 안개 속에서, 아폴로 신은 역병과 연관되어 있었다. 호머의 서사시에서 아폴로 신은 전염병의 화살을 쏘아 보낸 궁수이기도 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돌았다. 머리카락이 긴 아폴로 신을 모시는 셀레우키아의 사원에서 역병을 일으키는 증기가 배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된 신의 분노를 달래려는 절박한 시도의 흔적들이 제국의 전역에서 발견되는 것도 역병의 규모를 말해주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촉발한 아폴로 신에 대한 폭발적 신앙은 고대의 금석문에 남아 있는 다른 기록들과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액막이용 주문이 새겨진 비문은 역병 자체보다는 두려움의 증거이지만,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얼마나 넓은 범위로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지표를 제공해준다."(191, 194)
"군대는 역병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연대기 기록을 보면, 서기 172년 무렵에 군대는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기에는 노예와 검투사들을 긴급 징병하고, 이례적으로 노상강도세를 추가 징수했다고 적혀 있다." "역병이 돌고 있을 때, 제국의 은광 산업이 갑자기 붕괴하여 단기적인 통화 위기가 촉발되었다. 파르티아 원정에 나서면서 군대의 이동과 전쟁 무기의 비용으로 제국의 재정 시스템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러나 역병은 그것을 치명적인 위험 수준까지 몰아넣었다. 그 반동으로 160년대 후반부터 170년대 전반에 걸쳐서 통화와 사회기반 시설의 재정이 휘청거렸다." "높은 사망률 충격에서 비롯된 고임금이라는 혜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상업의 위축과 기술자본이 적어지면서 생산성이 줄어든 경제적 손실 탓에 보통의 노동자들이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소작인들이 지불해야 하는 경작지 임대료는 하향 조정되어 수십 년 동안 새로운 평형상태를 유지했다."(212-5)
4장 | 세계의 노년기 225
"역경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노년기'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냈다. 사상의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이 정교화한 은유였다. 위기의 와중에 엉뚱하게도 신의 본성에 대한 공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황제들은 위기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이 (다신교의) 신들을 제대로 숭배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지구가 노년기로 접어들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러한 반론을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은 수사학자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핵심을 잘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로마령 아프리카의 활력 넘치는 문명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뒤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카르타고 사람인 키프리아누스는 〈세상이 점점 늙어가면서 과거에 세상을 지탱하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으며, 한때 그 속에 깃들었던 힘과 활력이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세계는 무덤을 향해 다가가는 창백한 노인이었다."(247-9)
"인간의 목격담에 신빙성이 있음을 자연의 기록보관소들이 증명해준다. 로마 기후최적기 동안 미소 짓던 나날들이 2세기 후반에는 신속하게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급하게 걸린 것은 아니었다. 로마 기후최적기는 조용히 사라졌고, 그 뒤를 이은 것은 후기 로마 과도기였다. 뚜렷한 해답이 없는 분열과 급격한 변화의 시기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변화는 전지구적 규모였다. 태양의 변동성이 외부 강제력의 주된 메커니즘이었다. 로마인들 머리 위에서 태양은 점점 약해져갔다. 베릴륨 동위원소 기록을 보면, 서기 240년대에는 일조량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서기 240년대에는 지중해 지역의 남쪽 끝부분에서 심각한 가뭄이 있었음이 관찰된다. 키프리아누스가 살던 북아프리카도 가뭄으로 시들어갔다. 기독교 주교이기도 했던 그는 고통스러운 가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회에서 기독교를 방어하려고 애썼다. 전반적 위기는 사실상 복음을 전파하기에 적기였다."(249-50)
세베루스 왕조와 그 이후의 황제들은 폭이 좁기는 해도 일종의 평형을 이루었으나, 지정학적 충격과 환경으로부터의 충격이 연속되자 새로운 질서는 위협을 받았다. 불운에 대한 완충 작용이 가장 필요할 때, 나일강이 그들을 매정하게 저버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기 244년에는 강물의 수위가 올라가지 않았다. 서기 245년 혹은 246년에는 다시 미미한 수량으로 범람했다. 240년대에 일어난 연이은 가뭄만으로도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제국의 시스템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자연은 로마인들에게 또 다른 불행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구 기후 체계가 돌발적으로 격변하면 생소한 감염병의 발발이 이어지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새로운 팬데믹의 전면적 폭력은 궁극적으로 제국의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다. 로마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환희에 찬 기념식을 치르고 나서 불과 몇 년 뒤 제국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을지 완전히 불투명해지고 말았다."(255, 258)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역사적으로 기본적인 사실이 거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발생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료들 모두가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대규모 역병이 그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병이 휩쓴 지리적 범위는 광대했다. 〈로마의 어느 지역, 어느 도시, 어느 집도, 어디에나 퍼져 있는 이 역병의 공격을 받아 텅 비어버리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에서 언급된다. 역병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 같은 가장 큰 도시들을 덮쳤다. '그리스의 도시들'도 공격했을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폰투스의 네오케사리아나 이집트의 옥시링쿠스 같은 도시들도 타격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도시와 시골을 동시에 돌았다. 그것은 〈도시와 마을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고, 사람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든 파괴했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제국 단위의 사건이었다."(260-2)
"제국의 운명은 260년대에 저조기를 맞이했다. 인구도 바닥을 쳤다. 복구 작업은 훨씬 느려졌다. 키프리아누스 역병과 광범위한 위기로 방향을 잃었다. 평화에 익숙하던 내륙 지역은 잔인하게 침범당했다. 오래 이어져 내려온 사회의 지배계층이 무너졌다. 서로마 제국 전체에서 농촌의 거주지 유형에 균열이 생겼다. 생활이 돌아왔으나 서서히, 더 조심스럽고 다른 리듬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결코 예전과 같아지지 않았다. 가장 건강했던 고대 후기의 도시들조차 이전보다 규모가 더 작아졌고, 복구된 후에도 전체적으로 주요 도시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병사들을 쉽게 모집할 수 있던 옛날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고대 후기의 국정 운영 기술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구 작업은 또 다른 반세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국의 통합과 경제 부흥을 위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균형을 찾은 내부 어딘가에는 각기 제국의 절반을 이루는 동방과 서방을 분열시킬 씨앗이 숨어 있었다."(297-8)
5장 | 운명의 수레바퀴 299
"제국이 겪어온 팬데믹과 요동치는 기후 변동에 비하면 4세기의 기간은 막간의 평화였다. 환경의 역할은 미묘했으나 사소하지는 않았다. 기후는 더 따뜻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새로운 성장이 싹튼 것은 따뜻한 기후의 햇살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마 기후최적기의 나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후는 이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협력자였다." "4세기에 환경의 변화가 일으킨 진정한 충격은 동방에서 감지되었다. 이 시기에 제국의 기후를 좌우하던 대서양 체제로 인해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극심한 건조기후가 도래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대규모 이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 결정적 시기에 유독 국가와 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드라마에 대해서 알고 싶지만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새롭게 주목할 부분은 로마 제국의 사건들에서 갑자기 스텝 지대의 민족들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훈족들이 스텝 지대의 서쪽 경계선에 도착하면서 1세기 이상 고트족이 유지하던 질서를 뒤엎어 버렸다."(305-6)
"제국이 부흥하는 동안 물리적 기후는 온난했으나 변동이 심했다. 이러한 양상은 4세기의 생물학적 역사에 반영되었다. 후기 로마 사회는 팬데믹이 잠잠한 시기에도 여전히 높은 사망률의 압박으로 신음했다. 제국 초기의 질병 생태계는 지속되었다. 제국은 여전히 도시화로 밀집된 상태였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고대 후기의 보건 상태는 암담했다. 로마인들은 여전히 수명이 짧았다." "그러나 길었던 4세기의 특징은 큰 재앙과도 같은 사망 사건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는 철저한 출처를 근거로 한 목록에서, 4세기에는 열네 건의 전염병을, 5세기에는 열여덟 건의 전염병 발병을 확인했다. 총 횟수는 초기 제국에서 인식할 수 있는 건수보다 오히려 더 많다. 그러나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역병의 사망률에 대한 일반적 배경보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정보가 조금 더 많을 뿐이다.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여러 지역으로 연결되는 사망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323-4)
"몬순은 아시아의 남쪽 절반을 적시지만, 티벳 고원의 북쪽 땅은 건조한 대륙성 기후였다. 중앙아시아 내륙의 기후는 대서양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위도를 궤도로 부는 폭풍인 서풍에 좌우되었다. 북대서양 진동이 양의 값일 때는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중앙아시아는 건조해진다. 북대서양 진동이 음의 값일 때, 폭풍의 궤도는 적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초원 전역에 비가 쏟아진다. 북대서양 진동이 양의 값이 지배적이던 중세 기후 이상(서기 1000~1350) 기간에 아시아의 내륙 지역은 지독하게 건조했다. 고기후의 대리증거물 가운데 해상도가 가장 높은 것은 티벳 고원의 둘란-울란에서 발견되는 노간주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대륙성 기후와 몬순 기후의 영향이 섞이는 남쪽 끝에 서식한다. 그러나 4세기의 징후들이 포착되었다. 에드 쿡이 증명했듯이 그 무렵은 엄청난 가뭄의 시기였다. 서기 350년에서 370년까지는 지난 2천 년 동안 최악의 가뭄이 지속된 20년이었다."(355-6)
"훈족은 말을 타고 무장한 기후 난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 덕분에 놀랄 만한 속도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4세기에 훈족이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내적 논리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 기후 변동이 하나의 민족이나 혹은 여러 민족의 연합체가 국가를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 분명하다. 오직 기후 하나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고, 대초원족이 위협의 방향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꾼 것도 한 요인이었다. 기후의 작용과 함께 유목민들의 공격적이고 복잡한 연합이 융성했고 새로워졌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4세기 중반에 대초원의 무게 중심이 알타이 지역(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국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기 370년 무렵, 훈족은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서부 초원지대에 이들이 나타난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376년, 훈족을 피해 다뉴브강 일대에서 탈출한 고트족 무리가 망명지를 찾아 로마의 국경선 안으로 들어왔다."(356-8)
"훈족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헝가리 평야로 퇴각한 것은 역사 속에서 그 이유가 가장 궁금한 사건에 속한다. 아틸라는 매우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엄청난 흉포함 아래 교묘한 영리함이 숨어 있었다.〉 침략자들을 격퇴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재앙: 기근과 모종의 질병' 덕분이라는 관점이 있다. 퇴각은 사실상 침략자들과 토착 질병 생태계가 충돌했을 때 예측 가능한 생물학적 결과였다. 제국의 중심부는 세균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이탈리아를 구하고도 찬양받지 못한 구원자는 아마도 말라리아였을 것이다. 모기가 번식하여 치명적인 원생동물을 전파하는 저지대 습지에서, 말들을 놓아먹이는 훈족은 말라리아의 손쉬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훈족의 왕이 자신의 기마부대를 다뉴브강 건너 고지대의 초원으로 후퇴하도록 결정한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 훈족은 대초원으로 돌아갔지만, 중앙행정부에서 뿌리가 뽑힌 제국의 고대 구조는 서방에서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364-5)
6장 | 분노의 포도 착즙기 369
"페르시아와의 적대적 관계가 되살아나면서 제국의 힘이 분열되었다. 540년 봄에는 후스로 1세가 로마 제국을 기습했다. 샤푸르 1세가 3세기 중반의 위기에 감행한 공격 이후 가장 맹렬한 페르시아의 침공이었다." "서기 541년에 페스트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인 펠루시움에서 발생했다 다음 해 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수도에 입성했다. 엄청난 파열이 시작된 분기점이었다. 대역병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다른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23년 동안 그의 통치는 역병의 그늘 속에서 위태롭게 굴러갔다. 제국은 강건한 군대를 전투에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새로운 어둠이 황제에게 드리워졌다. 그 자신이 부보닉 페스트에 걸렸다가 살아났다. 충격적인 반전의 시대였다. 〈나는 신의 뜻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나 장소의 운명을 높이시고, 그러다가 그들을 내던져 파괴한다.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383-4)
"아시아의 고지대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괴물 같은 세균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국의 생태계는 팬데믹을 기다리는 사회적 기반을 구축했다. 실크 교역은 치명적인 꾸러미를 운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불꽃이 번진 마지막 접점은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였다. 536년은 '여름이 없던 해'로 알려져 있다. 이전의 3천 년 동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화산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첫 격변이었다. 540~541년에 다시 화산이 폭발하는 겨울이 왔다. 530년대와 540년대는 후기 홀로세에서 가장 추웠던 수십 년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시절에는 수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혹한에 지구 전역이 시달렸다." "530년대와 540년대의 급격한 추위는 예르시아 페스티스가 결코 생각지 못했던 지리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다. 덥지 않은 여름으로 인해 따뜻한 남쪽 통로로 건너갈 수 있는 문이 열렸을 것이다. 향신료 해안의 평균 기온은 페스트의 주기가 용인할 수 있는 역치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405-8)
"콘스탄티노플에서 발생한 첫 번째 페스트는 넉 달 동안 지속되었다. 50~60퍼센트에 달하는 사망률로 인해 사회 질서는 무너졌다. 모든 일이 멈췄다. 소매시장은 문을 닫았고, 기이한 형태의 식량 부족이 뒤따랐다. 〈모든 물자가 풍부한 가운데 도시에는 기근이 돌았다.〉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것처럼 멈춰 섰고, 따라서 식량 공급도 그쳤다. ······ 식량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었다. 두려움이 거리를 뒤덮었다. 〈이름이 적혀 있는 꼬리표를 목이나 팔에 걸지 않고는 아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궁정은 굴복했다. 대신들 무리도 단지 몇몇 하인만 남았을 뿐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페스트에 걸렸다. 그는 운 좋게도 감염에서 살아남은 1/5 중 하나였다. 국가 기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인 경험을 요약하자면, [콘스탄티노플에서] 클리미스를 입은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미스는 제국 질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의복이었다."(419-21)
"누구든 페스트의 마수에서 벗어나면 뉴스거리가 되었다. 사막에 거주하는 무어인, 터키인 그리고 아랍인들은 전 세계적 재앙에서 배제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번진 페스트를 묘사한 시에서는, 로마인들은 병에 걸려 전멸했으나 '원한에 찬 부족들은' 살아남았다고 강조한다. 터키인들은 〈처음부터 그 시기에 감염병이 유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자랑했다. 그리고 역병이 아라비아의 중심부를 그냥 지나간다는 통념이 늘 있었다. 〈메카도 메디나도 근동의 다른 곳에서 발생한 역병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7세기의 유명한 성 캐서린 수도원 원장인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는 신앙이 없는 이들이 거주하는 '건조한 사막' 지역은 '결코 페스트를 경험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무어인들, 터키인들 그리고 아라비아의 중심부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유목 생활을 공유했다. 생태학적 설명은 자명하다. 정주하지 않는 사회 유형이 쥐-벼룩-페스트의 치명적 결합을 막는 방어 기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428-9)
7장 | 심판의 날 453
"역사적 변화는 갑작스럽지도 않고 말끔하지도 않았다. 역병과 빙하기라는 두 재앙은 로마 제국을 한 방에 깨끗이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심지어 씁쓸한 최후의 순간까지 국가의 지렛대를 움켜잡고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정권 역시 붕괴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환경이 파괴되면서 제국은 활기를 잃었다. 결국 해체로 향하는 힘이 우세해졌다. 자선가 요한의 생애 중 몇 년에 걸쳐서,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의 어느 기간에 제국은 한계점을 넘어섰다. 제국의 여러 지역은 충격적인 대규모 사망과 기후 변화에 나름의 리듬으로 반응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지역도 있었고, 오랜 시간 변화의 바람을 견딘 지역도 있었다. 제국의 체제 자체가 생태적, 경제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 광범위하게 연결된 조직망 체제였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의 활기에 의지할 수 있었다. 마치 우뚝 솟은 참나무가 시들어가는 뿌리에서 마지막 영양분을 끌어모으듯이,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외부의 빠른 일격에 쓰러졌다."(479-80)
"갈리아에서는 로마 이후의 세계가 루아르강을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 북쪽에서는 로마의 질서가 빠르게 변형되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의 몇 세대 동안 경제에서 주화가 거의 사라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쪽에서는 여전히 지중해를 중심으로 생활이 흘러갔다. 도시의 구조는 6세기에 들어서도 유지되었다. 비록 새로 지어지지는 않았으나, 빌라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했다. 동방의 무역상과 물건들이 갈리아의 해변을 드나들었다. 6세기 중반에, 역병의 첫 번째 파도가 지중해에서 대서양까지를 휩쓸었다. 로마 도시의 마지막 보루에 속했던 아를 같은 곳이 완전히 사라졌다. 연결망의 마지막 전초기지인 마르세유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존속되었다. 페스트가 반복해서 재발하면서 갈리아의 남쪽은 크게 영향을 받았고, 고립되어 있던 북쪽은 재발은 막을 수 있었다. 프랑크족이 통치하던 북쪽은 중세적 질서가 싹트고 있었다. 잠복해 있던 페스트에 시달리지 않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이 자라기 시작했다."(482-3)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것은 단지 쇠퇴가 아니라 붕괴와 재조직이었다. 한때 어디에서나 통용되던 주화가 비잔티움의 전초기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사라져버렸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소박한 생활용품들이 서서히 눈에 띄지 않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치 형태였던 로마의 계층구조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양극단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귀족들의 엄청난 부는 증발했고, 중간층은 재생되지 못했으며, 이제는 번창하지 않은 세상에서 의외로 기독교 교회가 가장 부유한 상속자로 남았다. 완전히 새로운 정착의 논리가 풍경을 지배했다.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야만인들의 약탈에 노출된 비옥한 저지대가 버려졌다. 마을은 언덕 꼭대기로 물러났다. 전쟁, 역병, 그리고 기후 변화가 연합하여 꾸민 음모로 인해 천년의 물질적 진보가 뒤집혔고, 이탈리아를 경제적 혹은 정치적 기량보다 성자들의 뼈가 훨씬 더 중요한 중세 초기의 후미진 곳으로 바꿔놓았다."(485-6)
"인구통계학적 측면에서 인구가 많을수록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인구의 압력은 한정된 시골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가서 자원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구자원이 풍부해지면 거의 언제나 국가는 호황을 누린다. 국가는 일회용 신체들을 공급받으며 지탱한다. 6세기 초까지만 해도 로마 군대는 어렵지 않게 신병을 보충했다. 세습 입대와 자발적 입영만으로도 충분히 인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스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구통계 상의 출혈은 로마의 국정 운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은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다. 제국의 지리적 여건이 요구하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고, 파견할 군대를 소집해도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부터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맞이한 마지막 재앙 사이의 기간에 이러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는 우발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조의 역학이 결정했다."(500-1)
"6세기의 공포는 교회의 조직적 반응을 낳았다. 역병을 막기 위한 예배형식의 탄원, 대규모 공동 의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탄원은 광범위한 종교적 언어인 코이네(표준 그리스어)에서 그저 눈에 띄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종말론적 두려움 속에서 공동체 행사인 대속 의례로 역병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심판은 회개를 요구했다. 역병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고대 후기의 정신에서 탐욕보다 더 무거운 죄는 없었다. 피터 브라운이 증명한 것처럼, 부에 대한 불안은 고대 후기의 기독교에서 도덕적 위기를 끊임없이 생성했다. 세속적 소유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 여기서 역병은 연약한 신경을 공격했다. 에페수스의 요한이 기록한 역병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산문은 탐욕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 개인들을 지목하는 내용으로 길게 채워졌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역병은 물질적인 것을 꽉 쥐고 있는 우리 손아귀의 힘을 빼고자 하는 신의 마지막 끔찍한 시도였다."(511-2)
에필로그 : 인류의 승리? 528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명 중 하나를 만들고 해체하는 일에 환경이 일정 부분을 담당했음을 여러 방식으로 알 수 있다. 로마는 거의 필연적으로 거울이자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의 사례를 사라진 문명에서 얻는 교훈으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로마의 경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로서 중요하다. 돌이킬 수 없게 잃어버린 고대 세계의 마지막 장면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로마인과 자연의 충돌을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드라마의 오프닝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잎이 나오기도 전에 개화한 지구는, 통제하고 있다는 지속적인 망상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 낯설지 않은 느낌일 것이다. 이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자연환경의 막강한 힘을 생각하면, 우리는 로마인들에게 공감하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고대의 인상적 광경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펼쳐질 그 다음 장면에 환호하기 위해 모여 있는 그들에게."(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