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머니 - 화폐 이데올로기·역사·정치 전환 시리즈 1
제프리 잉햄 지음, 방현철.변제호 옮김 / 이콘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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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화폐란 무엇인가?


1장 화폐의 수수께끼 _018


우리는 화폐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환율, 국가와 개인의 부채수준을 쉼 없이 모니터링하면서 혹시나 화폐가 불안정해질까 노심초사한다. 중앙은행은 대중들로부터 화폐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번번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경험과 달리 주류 경제학 이론은 역설적으로 화폐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수리적 경제모델에서 화폐는 ‘중립적neutral’이거나 수동적인 구성요소일 뿐이다. 화폐는 ‘변수variable’가 아닌 ‘상수constant’이며, 적극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생산과 교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원료, 에너지, 노동, 기술같은 ‘실물적’ 생산요소에서 나온다고 보는데, 화폐는 이러한 가치를 측정하고 가치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실물적real' 분석이라 한다.) 18-9)


이와 달리 '화폐적monetary' 분석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현실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팽배한 화폐관을 따르고 있다(Hodgson, 2015). 여기서는 화폐를 화폐자본, 즉 독립적으로 역동성을 가진 경제력으로 본다. 화폐 그 자체는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그러나 투자, 생산, 소비에 필요한 화폐가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바퀴는 돌아갈 수 없고 생산을 해도 소비될 수 없었을 것이다(Smithin, 1918). 고전학파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실물경제는 실제로 화폐가 상품의 교환을 위한 매개물 역할만을 담당하는 순수한 교환경제거나 비현실적인 시장경제 모델에 불과하다. 즉, 상품-화폐-상품C-M-C의 흐름을 가정한 것이다. 여기서 화폐는 개개인이 상품에서 얻는 만족을 의미하는 효용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현실 세계’에서 화폐는 생산에 필요한 자본과 임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의 결정체다. 즉, 화폐(자본)-상품-화폐(이익)의 흐름M-C-M을 상정해야 한다. 14-5)


2장 양립 불가능: 상품이론과 신용이론 _038


19세기 후반까지 화폐의 중립성과 실물경제 개념을 기반으로 한 상품교환이론은 정설로 자리 잡았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정치경제학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71)》에서 화폐의 존재는 “어떤 가치법칙의 작동도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했다(Ingham, 2004, 19). 또한 화폐는 화폐가 없었을 때 우리가 했던 일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이 이론에서 가치는 생산요소의 효용이나 기여에서 나오는 것이지 화폐의 사용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화폐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실물적 가치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뿐이다. 실물적 가치는 실물적 생산요소들이 상대적 기여나 효용을 나타내는 비율에 따라 상호 교환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자본’은 기계, 토지, 건물, 유형자산 등이 생산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착안된 개념이다. 근대 주류 경제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을 계속적 이윤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생산요소들의 ‘저량stock’이라고 보았다. 25)


고전학파의 정통 화폐이론과 결별한 케인스가 쓴 《화폐론(1930)》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채무, 가격 그리고 일반 구매력을 표시하는 계산화폐는 화폐이론에서 으뜸 개념이다”. 케인스는 화폐와 교환 매개물을 구분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왔다. 계산화폐는 실제 채무를 청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money proper’의 범위를 확정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계산화폐와 같은 단위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채무를 청산할 수 있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현장에서 교환 편의를 위해 매개물로 쓰이는 것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무리 화폐와 비슷하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물물교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용어의 본래 의미상으로, 화폐단위와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즉, 케인스는 화폐는 교환 가능한 상품이 아니라 화폐의 ‘서술description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명목주의적 화폐관을 제시한 것이다. 30)


상품이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명목가치(계산화폐)는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의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Keynes, 1930, 3). 화폐가치가 의도적으로 부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대론은 화폐가치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첫번째는 화폐가 교환 매개물로 사용되기 위해 내재가치를 가져야만 한다는 억측에서 발생한 것이다. 멩거가 지적한 쓸모없는 원판과 종이의 문제처럼 말이다. 두번째는 화폐가 실물경제에서 물질적 요소에 의해 생산된,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측정하고 대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쓸모없는 원판과 종이는 명목적이지만 미래의 가치를 지닌 것이며, 명목적이면서 미래의 신용을 가진 자와 재화의 소유자가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가치인 가격이 형성된다. 즉, ‘구매력’은 화폐에 ‘내재된’ 것이 아니며, ‘상품과 신용을 교환하는 판매와 구매가 이루어지는’ 사회 및 경제적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31)


국정이론은 상품교환이론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국가는 명목적 계산단위를 창출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권위자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화폐가 변동하는 다수의 교환비율을 가진 상품과 구별될 수 있었다. 둘째, 국가를 등장시키자 화폐의 수용성은 높이 신뢰할 만한 근거를 가질 수 있었다. 국가가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화폐를 창출하고 세금으로 화폐를 환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던 멩거의 동어반복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화폐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발행자가 자신에 대한 채무를 상환하는 데 그 화폐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발행자의 그러한 약속을 통해 비인격적 신뢰와 잊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형성되면서, 신뢰의 부담은 거래당사자로부터 발행자로 이전된다. 37)


결국 화폐이론들의 양립 불가능성은 그 이론들이 암묵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상이한 사회이론과 사회‘상’에서 나온 것이다. 스미스의 해석을 따르는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회질서가 개인들의 사익추구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유사한 사회관을 가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국가의 화폐 독점을 대신하여 합리적 개인이 가장 안정된 화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무수한 자유경쟁 화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교환가치의 급변동으로 화폐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이 확산되면서 그의 가설은 심판대에 올랐고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화폐 거래를 신용-채무관계로 파악하는 신용이론은 화폐에 대한 신뢰가 사회질서를 공고하게 하는 관습과 믿음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본다. 반면, 국정이론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 ‘레비아탄Leviathan’의 강제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나게 한다. 39)


3장 화폐 및 화폐제도에 대한 사회이론 _072


전형적인 화폐거래의 세 가지 형태인 후불, 선불payment in advance 그리고 ‘맞돈’거래payment on the spot는 모두 채무계약이다. 즉각적으로 현금을 지불하는 맞돈거래조차 초단기의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다(Hicks, 1989, 41). 화폐거래의 본질적 요소는 무엇과의 교환으로 다른 것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구매나 차입으로 발생한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다. 이단의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는 누구나 화폐를 발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이 문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Minsky, 2008 [1986]). 그는 화폐는 ‘신용’, 즉 채무증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나 신용을 발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화폐로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더라면 더 정확했을 것이다. 모든 화폐는 신용이지만, 모든 신용이 화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폐시스템과 화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는 신용을 화폐, 즉 보편적 수용성을 가진 최종적인 지급수단으로 변모시킨다. 42)


화폐를 사회적 표상으로 보면, 화폐는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의 가치를 매기는 데 화폐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재화를 구입하고 보다 많은 화폐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합법적인 가치의 저장소인 화폐에 집착하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실물경제에서 물건의 유용성으로부터 가치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회학에서 경제적 가치는 화폐에 투영된 객관적인 사회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가치가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다. 화폐는 양도 가능한 신뢰다. 극도로 불확실한 현실 세계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정당성에 근거한 자기충족적이고 장기적인 신뢰는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신뢰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방인도 복잡다단한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바로 국가의 임무였다. 요약하면, 화폐는 결국 화폐가 만들어진 그 사회시스템의 생명력viability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45-6)


채권자와 화폐적 부를 보유한 자는 인플레이션에 따른 자신의 부와 채권의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 화폐공급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요구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가치가 고정된 금속본위제 형태의 ‘경화hard money’, 정부지출에 대한 엄격한 통제 그리고 높은 이자율을 선호했다. 반면, 생산자와 소비자는 채무자인 경우가 많아 ‘유연’하고 느슨한 화폐통제를 선호했다. 인플레이션은 그들이 부담하는 채무의 실질가치를 낮추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방식의 통제를 선호했던 것이다. 여기서 화폐를 창출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진 자는 채무를 회피할 힘을 가지게 된다. 중세 지주나 국채 매수자 같은 채권자들은 국가지출은 수입에 의해 조달되어야 하며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화폐조작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화폐는 경제, 사회 및 정치적 권력 사이의 다툼의 대상이었으며, 그 투쟁의 결과로 화폐의 창출방법 및 규모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불확실하기 마련이다. 52)


2부 자본주의와 화폐


4장 자본주의 화폐의 진화 _104


현대 자본주의에서 화폐창출은 국가, 채권자와 납세자가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를 가지게 된 기념비적 동맹에서 유래한 재정준칙fiscal norms에 따라 이루어진다. 국가는 이제 자본가와 납세자 모두에게 의존하고 있다. 국가가 지속적인 차입을 위해서는 이자지급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조세수입이 있어야만 했다. 18세기에 효율적인 관료적 징세체계는 영국의 ‘힘의 근원sinews of power’이었다(Brewer, 1989). 하지만 세금은 인기가 없었다. 채권자들은 국가의 채무불이행이나 국가의 과다지출로 유발된 인플레이션에 따른 투자가치의 하락을 걱정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이러한 요구들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은행권과 금속통화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금속주화만 사용하는 것은 국가지출과 경제확장을 제약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지만, 귀금속 본위가 없었다면 그 화폐에 대한 청구권인 은행권에 대한 신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3-4)


20세기 초반에 이르자, 환어음과 지폐를 금으로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점점 뚜렷해졌다. 실제로 금속본위제는 지폐가 태환을 위해 제시되지 않은 채로 계속 유통되어야만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국제적 차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국제 무역거래에서는 런던의 상인은행merchant bank이 발행한 신용 성격의 환어음과 지폐를 가지고 지불이 이루어졌다(de Cecco, 1974).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국제적 팽창에 따라 급증한 지불수요를 따라잡기에 충분한 금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더욱이 금본위제가 가진 화폐공급을 제한하는 ‘황금족쇄golden fetters’를 정부가 그대로 유지했다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혼란과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된 정부지출 확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Eichengreen, 1995). 케인스의 시각에서 이 같은 금본위제라는 ‘야만적 유산’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했을 것이다(Keynes, 1971 [1923]. 172). 65)


케인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정부지출이 만들어낸 ‘유효수요’가 생산, 고용 및 소비의 선순환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면서 화폐의 효능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영국과 미국의 화폐창출과 통제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첫째, 경제 전체를 마치 하나의 기업을 대하듯 관리하는 기법이 발전했다. 케인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정부가 원재료, 노동비용 그리고 무엇보다 화폐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정부는 단편적인 위기대응에서 벗어나 보다 선제적인 경제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으로 복지와 고용을 보장하는 정부지출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정치적, 경제적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많은 인구가 전투원이나 폭격대상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면서, 20세기 초반 머뭇거리며 추진되었던 사회민주주의 정책들이 강한 추동력을 얻게 된 것이다. 67)


완전고용과 사회복지 추구를 위해서 정부는 두 가지 화폐적 요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자율과 환율이다. 이자율은 투자와 고용수준에 영향을 미치고, 환율은 수입원자재와 수출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고용으로 그 효과가 이어진다. 자본의 국제이동에 대한 통제는 국가 사이의 이자율과 인플레이션 전망의 변화와 차이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통화에 대한 투기거래를 금지하는 것이다. 자본통제로 인해 외환의 매수는 국제무역에서 교환 및 지불을 목적으로만 허용된다. 케인스의 말마따나 ‘중개물에 불과한’ 화폐가 되는 것이다(Keynes, 1971 [1923], 124). 국가는 전쟁 중에 은행으로부터 빼앗은 화폐통제력을 조금 더 가지고 있으면서 민간화폐와의 힘의 균형을 자기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재개되면 반드시 세계적 자본가인 은행과 기업이 힘을 되찾게 될 것이므로, 이는 지속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68-9)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1950년대 평화시대의 완전고용에 대한 ‘상대적 만족감’은 ‘상대적 박탈감’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이 처했던 과거의 빈곤이 중단된 것에 만족하기보다 자신들을 다른 계급과 비교하며 더 나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대량소비 자본주의가 재개됨에 따라 노동자 계급이 ‘풍요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영국의 전통적 사회질서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할부구매가 도입되고 소비자 대출에 대한 제한이 철폐되자 ‘과시적 소비’에 기반한 새로운 신분질서가 나타났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과점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임금인상 요구를 기꺼이 수용하고 소비자에게 높은 가격을 부과함으로써 비용증가분을 쉽게 전가할 수 있었다. 임금-물가의 악순환이 작동된 것이다. 기업들과 노동자들 모두 자신들의 가격을 올렸고, 그것은 은행시스템의 대출로 창출된 화폐로 조달되었다. 71)


1970년대 국내 인플레이션 위기는 전후 서구 자본주의 경제에서 케인스학파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서 또 다른 정치적 협약이 무너진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브래튼 우즈 체제의 붕괴였다. 전후 세계 경제의 성장이 가속화되자, 자본이동과 외환거래를 통제하는 것이 점차 힘들어졌다. 수입품에 대한 외화지불을 허가하기 위해 무역송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대조하는 작업은 너무 수고스러웠다. 또한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은행이 동시에 세력을 다시 확대하면서 자본이동에 대한 모니터링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이동의 최대 원천과 브래튼우즈체제의 최대 위협은 바로 그것들을 존재하게 했던 달러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흘러 들어갔던 곳에 엄청난 달러가 쌓이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국외달러의 존재로 인해 브래튼우즈체제에 필적할 만한 비공식적인 평행적 화폐시장과 자본시장이 형성되었다. 72)


화폐창출과 관리에 있어서 힘의 균형이 국가에서 민간자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급격한 변화도 있었다. 국제통화시장에서 국제무역과 투기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외환매매가 다시 한번 환율을 결정하게 되었다. 국가가 자기 채무의 자금조달을 위해 외국자본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얻게 되는 이익은 환율과 이자율에 대한 통제를 잃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그 결과, 케인스가 예상한 대로 국내정책과 사회정책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환율이나 금리를 조정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트릴레마’의 난제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 세 가지를 모두 동시에 달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① 고정 또는 안정적 국내통화의 환율, ② 국내 금리통제에 대한 중앙은행의 자율성 그리고 ③ 외환시장 자유화, 즉 국제자본이동의 자유화다. 변동환율제도floating exchange rate에서는 금리와 환율을 모두 통제할 수 없고, 그중 어느 하나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72-3)


5장 현대화폐Ⅰ: 국가, 중앙은행 그리고 은행시스템 _141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화폐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벤치마크금리를 조정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이 통상 2-4% 정도의 목표수준에서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 화폐공급 수준은 많은 지지를 받은 ‘새로운 거시경제 합의’모델에 따라 계산될 수 있다. 여기서 화폐는 실물경제를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중립적 도구일 뿐이다. 실물경제는 고용, 이자율, 인플레이션 등의 변수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변수들은 경제균형의 성립에 기여한 정도가 객관적으로 반영된 어떤 ‘자연적’ 수준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이 모델은 낮은 수준에서 안정된 인플레이션과 병존할 수 있는 실업률 수준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하지 않는 실업률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 NAIRU’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면, 이 모델은 적정 화폐공급량은 경제과학에 의해 객관적으로 산출될 수 있으므로 정치무대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81-2)


은행시스템은 복잡한 채무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참여 은행 중 하나라도 파산하는 경우에는 대차대조표의 양호한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은행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된다. 금융위기의 여파에 직면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위험에 처했지만, 지급능력을 보유한 은행에 대해 최종대부자에서 더 나아가 ‘최종딜러dealer of last resort’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Mehrling, 2011).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모든 화폐시장과 증권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자산들을 떠안았다. 이는 국채시장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거의 모든 금융시장에서 모든 민간기업을 구제한 것이었다. 중앙은행은 위기대응을 위해 대출을 통해 공적기능을 수행한 것이지만, 이는 현행 화폐금융 시스템에서 민간소유의 자본주의 은행에 대한 구제를 동반한 것이기도 했다. 연방준비제도의 조치는 대부분의 미국 금융자본에 대해 시장규율의 적용을 면제하는 것이므로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83)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시행된 양적 완화가 일반적인 통화정책과 다른 점은 오직 그 규모가 컸다는 점뿐이다. 화폐창출 방법은 기존 절차를 그대로 준수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돈을 찍어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양적완화는 (정부) 재무부, 중앙은행과 은행시스템의 세 기관들이 각자의 자산을 가지고 상호작용한 것으로서 간접적이긴 하나 전통적인 화폐창출 방법이었다. 재무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은행 및 금융시스템에 국채를 발행, 매도했다. 나중에 이 국채는 중앙은행이 다시 매입했는데, 여기서 중앙은행은 키보드 작동을 통해 전자적으로 생성한 화폐를 지급했다. 이러한 중앙은행의 국채매입의 대가는 은행의 지급준비금에 추가되었고, 이는 은행의 화폐수요 증가로 초래될 수 있는 금리상승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이다. 은행들은 새로운 화폐에 접근할 기회를 가졌고, 중앙은행으로부터 아주 낮은 금리로 차입할 수 있게 되면서 예금확보를 위해 금리를 높일 필요가 없어졌다. 84)


유로존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화폐창출은 두 개의 삼각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첫번째는 한 나라의 재무부, 중앙은행과 규제를 받는 은행 프랜차이즈 사이에 제도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이러한 제도에는 헌법에서 규정한 관계, 관례와 회계규칙이 포함된다. 이들은 자신의 차입자들이 자신에게 지고 있는 채무의 형태로 화폐를 생산한다. 이러한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협약은 정부가 주권을 활용해 자신의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 화폐를 발행해 조달(부채의 화폐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화폐창출 과정에서 민간자본은 국가의 화폐주권과 타협하면서 계속 주도권과 수익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메커니즘과 관례는 두번째 삼각관계에서 주요 라이벌 사이의 오랜 투쟁과 묵시적 합의를 거쳐 형성되었다. 그 삼각관계는 지출을 하는 국가, 그 국가가 발행한 국채를 매입하는 채권자 그리고 정부지출과 국채 이자지급을 위한 수입의 징수대상인 납세자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90)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된 투쟁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큰 특징이 되었다. 한편으로 국가 채권자는 국채매입으로 이익을 거두긴 하지만, 동시에 국가부채가 늘어날수록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높여 그들의 투자위험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 채권자는 정부부채의 급격한 감소가 투자기회의 안전성과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1990년대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부채를 상환할 계획을 내비치자, 연방준비제도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안전한 투자기회의 감소를 우려하는 금융시장을 달래야만 했다. 정부가 부채상환을 위해 세금을 올린다면 유권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특히 더 큰 이해관계가 걸린 부유한 채권자 계급의 극심한 반발을 겪게 될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금융시스템의 긴급구제로 급증한 정부채무를 제한하기 위해 증세보다는 사회복지 지출과 공공서비스를 ‘감축austerity’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90-1)


6장 현대화폐Ⅱ: 준화폐, 보조화폐, 대체화폐, 대용화폐 그리고 가상화폐 _169


자본주의의 민사적 재산법과 계약법은 금융네트워크에서 구성원들이 상호 간에 지급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한 사적인 차용증서가 계속 사용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화폐는 은행시스템과 중앙은행이 민관합작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해서 사적계약에 의한 채무가 공공화폐로 전환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은행화폐는 발행 당시에는 ‘사적’화폐다. 교과서에서는 종종 이를 ‘내부화폐inside money’라고 부른다. 이를 ‘외부화폐outside money’라고 불리는 국가의 지폐와 주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권화폐 및 규제를 받는 은행시스템의 프랜차이즈화 된 화폐로 이루어진 화폐적 공간 밖에서는, 사적으로 발행된 지불약속이나 차용증서가 금융네트워크에서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업어음’ ‘예금증서’ ‘환어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준화폐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오늘날 자본주의 화폐 및 금융시장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92-3)


지역의 보조화폐는 대개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는 화폐가 제한된 범위의 네트워크에서만 교환 매개물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경제적 거래의 지속과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비국가적 보조화폐는 전간기의 대공황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최초로 광범위하게 출현했다. 1931년에서 1935년까지 미국에서는 지역상점에서 재화구입에 사용할 수 있는 수백 종의 지역통화가 여러 단체에 의해 실험적으로 발행되었다. 대부분은 얼마 안 가서 사용이 중단되었고, 경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지방자치단체인 시 정부들이 발행한 ‘세금 선납증서tax anticipation scrip’는 1940년대 초반까지 일부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시 정부들이 근로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거나, 공공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고 나중에 사람들이 지방세를 납부하는 경우에 달러 대신 받아주기로 했던 것이다(Gatch, 2012). 95)


가상화폐Crypto-Currency는 명시적으로 국가화폐의 대안으로서 만들어졌다. 비트코인이 전통적인 화폐에 비해 우수한 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암호로 짜인 공급의 유한성은 금의 자연적 희소성에 비견된다. 이는 국가의 명목화폐와 은행예금이 무한대로 공급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신용 버블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이 비트코인뿐 아니라 급상승하는 가격과 투기에 편승하여 수없이 만들어진 ‘알트코인’의 타고난 숙명이었다. 둘째, 비트코인은 암호화 방식의 보안 때문에 주류 은행화폐와 전통적인 통화보다 안전하다. 하지만 해킹으로 인한 가상화폐 거래소의 몰락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셋째, 가상화폐는 소유자를 암호화하여 처리하기 때문에 국가가 발행한 현금과 마찬가지로 익명성을 가진다. 전통적인 인터넷 뱅킹에서 예금주의 실명이 기재된 예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다크웹dark web’ 같은 범죄네트워크에서 불법 거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98-9)


정보기술이 어떻게 돈과 사회를 변화시켜 우리를 현대국가의 중앙집권적인 지배로부터 구출할 것인지에 관한 거대담론이 존재한다. 폭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극단에 위치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터넷과 정보기술로 인해 비국가적 화폐가 번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시장’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시장이 없었다면 효용 극대화에 매진하는 개인들은 ‘분리된’ 채 존재했을 것이다(Orléan, 2014a). 다른 한 쪽에서는 같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지역 보조화폐가 모든 공동체로 하여금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대응할 수 있는 재능을 마음껏 펼치도록 함으로써 잠재된 ‘사회적 자본’과 연대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지역의 승리, 국가에 대한 공동체의 승리 그리고 독점 자본에 대한 협동조합의 승리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서는 ‘시장’화폐와 ‘공동체’ 화폐 모두가 한계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


화폐의 시장이론은 안정적 화폐가 무수한 경쟁 화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상화폐의 교환가치 간 경쟁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시장이 해소해야 할 버블과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다. 지역화폐가 공동체의 신뢰와 경제적 활동을 촉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생존력이 높은 주류화폐의 ‘보완재’ 이상이 된다거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근거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견해 모두 화폐를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독립되어 각자의 ‘이상적’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둘 다 화폐를 단지 경제교환에서 발생한 실물가치와 공동체의 결속에 내재된 실물적 사회의 힘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독점적 강제력을 보유하고 국가의 사회적 폭력이 점차 소멸되는 것은 대규모 사회와 지속가능한 화폐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요소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화폐가 단순한 교환 매개물이나 지급수단 이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100-1)


7장 2008년 금융위기와 화폐의 문제 _188


1970년대 각국 정부가 케인스 처방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자, 총수요는 소비자 대출로 조달되었다. 이를 ‘민영화된 케인스 처방privatized Keynesianism’이라고 부른다(Crouch, 2009). 정부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 시대를 열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이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결국에는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Ingham, 2011). 주기적인 경제불안은 금융자산 시장에서도 계속되었으며, 결국 투기적 ‘버블’은 터져버리고 말았다. 두 가지 의문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첫째, 위기에 기름을 붓는 은행시스템의 화폐창출 능력은 보다 엄격히 통제되거나 나아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둘째, 비선출 중앙은행의 화폐창출 권한은 보다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의문 모두 화폐창출, 통제 그리고 관리가 현대 민주주의 체제 내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103)


양적완화 시행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화폐의 ‘중립성’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양적완화의 목표 중 하나에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5장 참조). 금리인하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 준비금을 늘려주었던 조치는 정부의 채무부담을 완화했지만, 생산을 위한 투자와 고용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양적완화는 의도하지 않게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앙은행이 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재매입하기 위해 창출한 화폐는 국채의 수요를 증대시켜 국채가격을 끌어올리고 말았다. 국채 소지자들은 국채가격 상승으로 재산이 증가했고, 낮은 은행예금 금리를 피해 다른 자산에 투자를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주식시장에서 붐이 발생하고, 주택, 고급 승용차, 와인과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고, 가상화폐 같은 위험자산 시장이 번성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이 기피하는 생산적인 투자지출을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했던 케인스의 주장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07)


베버는 자원의 객관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평가하는 도구로서 화폐는 ‘경제적 생존투쟁’에 관한 규칙을 만드는 사회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사에서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화폐를 인플레이션을 회피할 수 있을 수준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경쟁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동등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국가에 집중된 권력으로 인해 조직화된 노동과 독점자본은 과도한 요구를 했고, 이는 ‘임금과 가격’의 연쇄적 상승을 초래했다. 브래튼우즈체제가 종식된 이후, 국제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에서의 투기는 가격의 급등락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정부의 과도한 지출 조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정부를 침착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 그의 분석을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권한과 부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면죄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본주의 통화시스템이 가진 결점을 치유하기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12-3)


8장 결론 _211


두 종류의 경제분석과 그 각각의 화폐이론 뒤에는 자본주의 지배구조에 관한 뜨거운 격론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으로 주류 경제학은 화폐공급은 경제의 장기적인 생산능력을 초과할 수도, 초과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기술이나 노동 같은 실물 생산요소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므로, 화폐를 푼다고 생산요소의 투입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폐가 이러한 실물요소에 앞서 팽창한다면 반드시 인플레이션이 뒤따를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광의의 케인스 학파와 이단적 전통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화폐를 가지고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화폐를 ‘양적으로’ 투입할 것이 아니라 쓰임새 있게 써야할 것이다. 또 민간기업이 실물경제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력과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정부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늘려야 한다. 115)


화폐를 자연세계나 적어도 사회영역 밖으로 몰아내려는 지칠 줄 모르는 이데올로기적 시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폐가 처음 사용된 이래로 화폐는 생산의 ‘힘’으로서 경제활동을 자극하는 사회적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화폐공급의 급격한 증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지출에 필요한 자금조달의 급격한 증가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변하는 것은 십중팔구 정치적 불안과 정당성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구매력에 대한 신뢰를 짓밟고 만다. 문제의 핵심은 화폐의 창출과 지출이 사회가 필요한 유효수요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지 여부다. 이 유효수요의 수준은 모든 현존 자원을 사용하고 새로운 생산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다. 이를 달성하려면 우선 모델의 예측성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경제이론과 화폐관념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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