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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10월
평점 :
들어가며: 살아남고 진화하기 위해서
처음 동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쟁적 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의사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동물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 발달에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를 조종하는 기술, 속이는 기술의 향상이 동물계의 진화적 적응력을 설명해주는 근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감정은 보람차거나 고통스럽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혐오스럽다고 느낄 때 아주 큰 역할을 수행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성향은 연산능력 같은 인지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18)
# 자기가축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도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19)
1 생각에 대한 생각
우리에게는 '마음이론' 능력이 있어서 지구에서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타인과 협력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마음이론이 중대하게 작용한다. 이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언어는 중요한 능력이지만 듣는 이가 우리가 하는 말을 모른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능력은 또한 우리 존재의 정수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추론할 능력이 없다면 사랑도 그림책에서 오려낸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이론,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는 확신이 들 때 증오는 더 뜨겁게 불타오른다. 모든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를 통해서 더 크게 자라난다. 감정은 우리의 가슴에, 육감에, 손끝에 있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에 있으며 대개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나의 추측과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3-4)
사람 아기의 경우에는 백이면 백이 아주 초기에, 같은 월령에, 그리고 말을 배우거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전인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을 사용하는 능력에 번쩍 불이 붙는다. 한쪽 팔과 집게손가락을 뻗는 이 단순한 동작은 생후 9개월이면 시작되고, 사라진 장난감이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아름다운 새를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는 능력(침팬지는 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협력적 의사소통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능력인데, 침팬지의 마음이론 별자리에는 이 능력이 없다. 사람 아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습득한다. 25)
사람 아기의 특별한 점은 우리가 몸짓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틀림없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동작이든 가능했다. 토마셀로는 사람 엄마와 아기를 대상으로 아기의 엄마에게 컵에 블록을 하나 넣으라고 했다. 아기들은 엄마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히 자기를 도와주려는 행동이라고 추측하고 블록이 담긴 컵을 선택했다. 같은 놀이를 개와 했을 때, 개도 똑같이 행동했다. 사람 아기와 똑같이 내가 그들을 도와주려 한다고 이해했으며, 어떤 새로운 동작이든 선의로 받아들였다. 개와 사람 아기 모두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낼 때 더 주의를 집중하는 듯했다. 심지어 둘 다 목소리의 방향까지 이용할 줄 알았다. 사람 아기는 첫돌 무렵이면 목소리의 방향을 인식하고, 낱말이 특정 물건과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부 개가 새로운 낱말이 주어졌을 때 시행착오 없이 바로 그 의미를 유추해내는 이유일 수도 있다. 29)
2 다정함의 힘
내 지도교수인 리처드 랭엄은 개와 닮은 러시아 여우에 관한 내 이야기에서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찾아냈다. 원래는 겁 많고 호전적이던 어떤 여우 개체군을 오로지 사람에게 친화적인 태도 하나를 기준으로 선택 번식시켰는데, 단 몇 세대 만에 다른 형질에도 우발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인지기능의 변화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펄럭이는 귀나 동그랗게 말린 꼬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를 읽어내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사람 아기가 가진 마음이론 능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협력적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읽어내는 개가 이 기술을 새끼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능력도 얼룩무늬 털처럼 후대에 유전되는 형질일까? 지금까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실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직접 시베리아로 가서 여우를 대상으로 테스트해보라는 랭엄의 제안에 설득되었다. 38-9)
만약 사람이 개를 선택한 것이 그들의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 때문이었다면, 친화력만을 기준으로 선택된 이 여우들은 내 손짓에 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우들에게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있었다. 강아지들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한 수 위였다. 랭엄의 생각이 옳았다. 이런 유형의 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친화력 좋은 여우들은 우리의 손짓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반면에 보통 여우들은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사회화 훈련을 받았는데도 우리의 손짓에 응한 확률이 겨우 절반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증진되었지만, 반면 인지기능에 관해 예상했던 가설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지기능 같은 사회적 지능은 두려움이 친화력으로 대체될 때 우발적으로 발생한 또 다른 능력이었다. 여우 실험은 우리가 개에게서 관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가축화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40-1)
우리는 또한 개에게서 발견했던 이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단순히 성견이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 상호작용해 생긴 결과물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각기 다른 양육 환경과 각기 다른 월령의 강아지들을 테스트하면서 우리는 심지어 가장 어린 강아지가 손짓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생후 6주에서 생후 9주 사이의 강아지들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기본 손짓은 물론, 전에는 본 적 없는 새로운 손짓과 몸짓 실험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결과가 인상적인 이유는 생후 6주인 강아지는 아직 뇌가 완전히 발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걷기를 배우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은 시각적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섰다. 강아지들은 사람의 목소리 방향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줄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해 먹이를 찾는 능력은 심지어 성견보다 나았다. 즉, 개의 모든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은 강아지 때부터 이미 존재하며, 사람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욱 향상된다. 41)
3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사촌
보노보 집단에서는, 야생에서건 사육소에서건, 수컷 우두머리가 없다. 그 결과 많은 과학자는 암컷이 보노보 무리의 대장이라고 생각했다. 아기 보노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기 침팬지는 모르는 누군가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받아먹지 않으며, 덩치 큰 수컷은 특히 더 경계한다. 따라서 침팬지 무리 구성원들의 서열을 평가할 때는 아기 침팬지의 반응을 고려해봤자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보노보들은 행동과 상호작용 면에서 침팬지들과 달리 타고난 무언가가 있었다. 놀랍게도 아기 보노보가 근처에 앉아 있을 때 보노보 성체 수컷들이 먹이를 외면하고 달아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눈에 띄었다. 서열상 상위에 속하는 보노보 중에는 무리 안에 어미가 있는 아기들도 있었다. 롤라 야 보노보에서 어미 보노보가 키우는 아기 보노보들은 일부 수컷 성체보다 서열이 높았다. 또, 아기 보노보보다 서열이 높은 수컷 성체라도 아기가 주위에 있을 때는 항상 행동을 조심했다. 50)
랭엄은 보노보 집단이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이유를 이들이 서식하는 콩고강 남부가 자원이 풍부하여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연구는 보노보 서식지의 열매와 초본이 풍부함을 시사한다. 보노보 암컷은 서열과 상관없이 모두 일일 필요 열량을 충족할 수 있지만, 침팬지는 서열이 높은 암컷들에게만 매일 충분한 먹이가 보장된다. 보노보 암컷은 암컷 친구를 챙길 여력이 있지만 침팬지 암컷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친화력 좋은 보노보 암컷들은 서로 돕고 살 수 있어 수컷의 공격성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또한 공격성이 가장 낮은 수컷과 짝짓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컷 보노보에게도 친화력은 승리의 전략이었다. 암컷의 승리가 어느 정도로 완전하냐면, 수컷이 암컷을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어머니를 통하는 것일 정도다. 이는 암컷의 다정한 수컷 선호가 다정한 사회의 진화를 야기하는 선택압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51-2)
보노보에게는 자기가축화 징후에 속하는 일부 외형적 특징이 있다. 하지만 보노보가 정말로 자기가축화되었다면 다음의 특성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1. 보노보는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에게 침팬지보다 더 큰 관용을 보여야 하며,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그래야 한다. 2. 보노보에게는 공격성을 방지하는 생리적 기제가 있어야 한다. 3.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더 유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있어야 하며, 이는 관용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생리적 기제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우리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낯선 이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더 끌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훨씬 더 큰 포용력을 지닌 종인 셈이다. 동물 가축화 실험에서 친화력이 상승할 때 가장 초기에 변화를 보이는 것이 세로토닌의 농도다. 이것은 보노보에게 공격성을 방지하고 친화력을 증진시키는 생리적 기제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가축화된 모든 동물에게서 매우 흡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53-4)
4 가축화된 마음
우리나 호모 속 다른 사람 종의 식단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50만 년 동안 살았던 모든 사람 종이 불을 다루고 조리한 음식을 먹고 장거리를 달리고 도구를 사용해 동물을 죽이고 도살했을 것이다. 뇌 크기나 신경세포 밀도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사람 종들에게도 우리의 범주에 속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어쩌면 우리와 비견되는 언어능력도 지녔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의 기술 수준이 다른 사람 종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와 나머지 사람 종 사이에 중요한 한 가지 다른 점이 남는다. 약 5만 년보다 조금 더 전 쯤에 우리 종이 사회연결망의 급속한 확장을 경험했다는 점 말이다. 사회연결망은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63)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환 고리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건 무엇이었을까? 인구밀도가 높으면 혁신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희소해진 자원을 놓고 싸워야 하므로 폭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기술이 인간 사회의 욕구를 따라잡는 동안 이 모순에 제동을 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현상이 어째서 우리 종과 비슷한 뇌 크기를 가지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었던 다른 사람 종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플라이스토세 시기에 나타났던 친화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기술혁명에 불을 붙인 불꽃이라고 주장한다. 64)
더러 백색증 같은 색소 이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고른 피부색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 가운데 단 한 부분의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사람과 가축화된 동물의 동공만 연령, 성별과 무관하게 일생에 걸쳐 다양한 색 변화가 나타난다. 우리의 다채로운 홍채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독특하게도 흰색 화포인 공막 위에 홍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막은 색소가 없어 하얗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롯한 모든 다른 영장류는 색소가 공막을 짙게 만들어 홍채와 뒤섞여 보인다. 이 경우 홍채와 공막의 색 대비가 낮아져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또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눈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람 아기는 부모의 의도와 기분과 생각을 처음 인식할 때 부모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빛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생애 초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경험들은 이때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68-9)
우리의 눈은 분명하고 유일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기도 하다. 사람은 피부, 머리, 심지어는 손톱까지 다양한 색을 띤다. 홍채도 초록색, 회색, 파란색, 갈색에 검은색까지 다채로운 색이 있다. 하지만 공막은 모두 똑같이 하얀색이다. 하나의 형질이 이렇게 절대적인 단일성을 보이는 건 아주 이례적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서 하얀 공막이 보이면 사람이라고 혹은 사람 같다고 판단한다. 미키마우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시절에는 그냥 새까만 큰 점으로 그렸던 눈을,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에서 검은 눈동자에 흰자위의 커다란 눈으로 바꾸고 나서였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의 인간성을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눈을 까맣게 칠해버리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는 흰자위만 남은 눈이 거의 필수 요소다. 누군가의 눈동자 색이 살짝만 달라도 우리는 이미 불편해진다. 하얀 눈자위의 귀여운 모과이가 눈이 새빨간 그렘린으로 변했을 때처럼. 70)
5 영원히 어리게
신경능선세포는 모든 척추동물의 배아에 잠깐 나타난다. 이 세포들은 신경관 표피에서 떨어져나와 독립된 세포 집단을 형성하며, 여기에서 뇌와 척수가 형성된다. 신경능선세포는 줄기세포로, 이는 배아가 발생할 때 다양한 유형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신경능선세포는 이동 능력이 있어, 목적에 따라서 전신에 걸쳐 옮겨 다닐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유형의 세포가 될지,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결정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사서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축화의 중심 특성은 두려움과 공격성 감소인데, 신경능선세포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부신수질 발달에 관여한다. 가축화된 동물의 부신은 야생의 친척 종들의 부신보다 작다. 부신이 더 작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는 뜻이다. 신경능선세포는 또한 친화력 선택과 연관된 모든 세포 조직 발달에도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는 이개연골, 피부 색소, 주둥이(또는 얼굴) 뼈와 치아가 포함된다. 77)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직후 뇌의 성장이 멈추지만 우리는 태아기의 뇌 성장 속도가 출생 후 2년까지 유지된다. 출생 후 뇌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특히 정수리 뒷부분에 영향을 주어 머리가 풍선 형태가 된다. 뇌 상단 뒤쪽인 두정부에는 마음이론 신경망이 모이는 두 중심점, 측두두정연접부와 설전부가 있다. 이곳이 아기가 타인의 시선과 제스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다. 이 발달과정에서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우리의 뇌는 성장할 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신경망일수록 신경세포의 개수가 더 많아지고 정보처리도 더 능숙해지면서 신경세포 간의 신호를 전달하는 시냅스의 연결이 간소화된다. 우리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썼듯이 “나약하게 알몸으로 빽빽 울면서” 태어나 몇 해 동안 이 상태로 지낸다. 하지만 사회적 인지능력이 일찍 발현되는 덕분에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다. 80-1)
우리 종에게 일어난 친화력 선택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우리 종이 보노보처럼 전반적인 포용력만 강화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종은 집단 구성원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익숙함을 토대로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집단 구성원은 자신이 사는 영토 안에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사는 누군가다. 그 나머지는 전부 남이다. 침팬지는 이웃 무리의 침팬지를 보거나 그들에 관해 들은 적이 있더라도 그들과 마주쳤을 때 거의 항상 적대적 반응을 보이며 오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편 보노보는 낯선 보노보에게 훨씬 더 우호적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 우리 집단인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보노보나 침팬지와 달리 집단 구성원을 지리적 가까움이 아닌 더 넓은 범위의 정체성으로 정의한다.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도 나타났는데, 바로 집단 내 타인이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도 우리 집단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82)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집단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끌리도록 태어났지만, 그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사회장'의 영향을 받아 달라진다. 아기에게조차 집단 정체성은 친숙함 이상을 뜻한다. 어떤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지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바뀔 수 있다. 옷차림, 종교, 신체 특성, 정치 성향, 출신지, 응원하는 스포츠팀 등등. 사람은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집단 정체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무엇이 이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인류학자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은 이 가소성이 사회규범의 출현에 결정적 인자라고 주장했다. 사회규범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규칙이다. 사회규범은 각종 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중추가 되며, 사람이 자기가축화된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규범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일가친척 이외의 사람들까지 포용하여 같은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83)
# 사회장social force. 사회심리학의 창시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사회·문화의 복합적인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사회적 행동 또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사회적 합의를 가리킨다.
친화력이 우리 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우리가 더 똑똑해졌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생각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면서 인지능력, 특히 의사소통 및 협력과 관련한 기능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을 길들이는 것은 새나 늑대를 길들이는 것과 같지 않았으며 유인원의 경우와도 달랐다. 신경세포로 빽빽하게 채워져 다양한 인지능력과 더불어, 유례없이 강한 자제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거대한 뇌를 지닌 것은 사람뿐이다. 이 친화력 선택을 거치면서 집단 내 타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가 만들어졌다. 이 범주는 산모가 아기를 분만할 때 범람하는 그 옥시토신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되었다. 옥시토신이 충만하면,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다가오는 낯선 사람에게서 친절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임을 알 수 있다. 행동이 가져올 결과까지 고려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큰 이점이 되었다. 85-6)
6 사람이라고 하기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을 느낄 때 양쪽 집단 모두 어두운 면을 드러내게 된다. 힘이 더 센 쪽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고 공격당한 집단은 보복에 나설 수 있다. 자기가축화는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악의 공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개와 보노보는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을 강화했지만, 두 종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을 발달시켰다. 개는 자기가 사는 사람의 집에 낯선 자가 다가오면 공격적으로 짖어댄다. 보노보 암컷의 경우에는 방어적 모성이나, 암컷 간의 유대로 오히려 보노보 수컷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띠곤 하는데 이는 침팬지 암컷과 비교해보아도 더 공격적이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를 분만할 때 흘러넘치기도 하지만 누군가 자기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솟구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92-3)
사회과학자들은 이 경향을 ‘편견’이라고 불러왔는데, 편견의 일반적 정의는 한 집단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설은 모든 사람의 뇌에는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94-5)
자신들이 누리던 자원이나 특권 혹은 어떤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 나왔다면,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정치적 이념 대결이나 혹은 한 사회 내 다른 집단의 상대적 지위가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테일리가 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tion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 참가자들에게 허구로 작성한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미국인을 짐승으로 여긴다”는 제목의 〈보스턴글로브〉 ‘기사’를 제시하자 무슬림에 대한 비인간화 정도가 2배 더 상승했다. 이 기사는 이 내용이 무슬림 주류의 관점임을 시사하고 있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집단과 문화권에서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100)
7 불쾌한 골짜기
로봇 연구가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인체형 로봇이 점점 더 사람의 모습과 흡사해질수록 우리는 로봇에게 더 호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거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말했다. 모리는 이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The uncanny valley’라고 불렀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대형 유인원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불쾌한 골짜기’일 것이다. 그들은 대형 유인원에게 매료되는 동시에 유인원들이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 즉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인 양 난폭한 성욕을 지니고 파괴를 즐기는 기괴한 존재로 기술했다. 사람을 유인원이나 원숭이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비인간화 방식이다. 대형 유인원은 쥐나 돼지나 개 같은 다른 동물과 달리, 불편함과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골짜기’의 범주에 딱 들어맞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4-5)
유럽의 과학자들은 애초부터 잘못 구성한 진화의 사다리에서 대형 유인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인을 최상단에 놓은 그들에게 사람과 대형 유인원이 현저하게 닮았다는 사실은 린네와 다윈의 주장대로 사람과 유인원을 같은 ‘호모’ 속으로 묶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귀결이라는 뜻이었다. 계급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사람과 대형 유인원의 관계를 좀 더 받아들이기 쉽도록 19세기 인류학자들은 이 사다리에 또 하나의 가로장을 끼워 넣었다. 유인원이 사람과 동물의 중간 단계였다면, 흑인은 백인과 유인원의 중간 단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과 상류층 지식인들의 도덕적 딜레마까지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삶과 자유, 행복을 누릴 권리가 만인에게 적용되는 천부인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흑인으로부터는 이 권리를 박탈하려는, 도덕적으로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유인원 비유만 한 처방이 없었던 것이다. 105-6)
심리학자 필립 고프Philip Goff가 “태도와 불평등의 부조화”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이른바 인종차별주의 이후 시대에서 살아가는 인종적 소수 집단은 여전히 고용, 교육, 주택, 소득, 건강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불평등을 겪고 있다. 이런 부조화를 학자들은 전통적 편견(제노사이드로 발전할 수 있는 유형의 편견)이 신종 편견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형태의 인종 편견’을 더 현대적 형태의 편견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에 일치되는 의견”이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교묘하고’ ‘산발적으로 퍼져 있으며’ ‘경로의존적’인 성격을 띤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인종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이 신념화된, ‘상징적’ 혹은 ‘일차원적’ 인종차별, 다른 인종 집단과 접촉을 피함으로써 혐오를 실행하는 형태의 ‘기피적’ 인종차별, ‘암묵적’ 인종차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출범한 학문이 사회심리학이었다. 108-9)
# 현재의 인종 차별의 세 가지 중심 요인 : 편견, 순응 욕구, 권위에 대한 복종
8 지고한 자유
대안우파를 느슨하게 정의하자면, 주류 보수주의를 거부하는 극우 이데올로기 추종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지배 성향'이나 '우파 권위주의 성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는 통념을 신봉한다. 그들은 “사회에는 다른 집단들보다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믿으며 “이상적 사회라면 일부 집단이 상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집단들이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 둘 다 타인 혹은 타 집단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극도의 편협함을 보이지만 두 집단의 이념은 상당히 다르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위협으로 인식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권위에 순응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주도권을 갖기를 원한다. 126)
# 사회지배 성향Social Dominance Orientation·SDO. 사회 체제 내 위계질서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와 낮은 지위 집단에 대한 지배 성향를 나타내는 척도다.
# 우파 권위주의 성향Right Wing Authoritarianism·RWA. 천성적으로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정도, 사고와 행동의 순응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는 교육이 그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애슐리 자디나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수감과 사형 집행에서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미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던 사람들은 흑인을 더 비인간화하게 되고 흑인에 대한 징벌 정책을 더 지지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128-9)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이제 병이 무엇인지 알아냈으니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비인간화 백신이 실로 존재하며, 그 백신이 실로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131-2)
# 하스터트 규칙. 공화당 의원 과반수의 동의가 없으면 법안을 표결에 붙이지 않도록 하는 공화당 지도부의 불문율이다.
# 유권자 통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특정 인구 집단 유권자들의 투표를 좌절시키거나 막는 전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교전 중인 국경 지대와 이웃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장기간의 분쟁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다른 집단 간의 접촉이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음식을 같은 방식으로 먹는 이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 안에서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자들은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접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등을 완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이 낮은 상황에서 여러 집단이 함께할 수 있다면 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불안을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키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위협받는다는 느낌이 우리 뇌에서 마음이론 신경망의 활동을 꺼버린다면, 위협 없는 접촉은 이 스위치를 다시 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132-3)
어떤 외부 집단에 대해서 인간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말하는 정도만으로도 그 사람들과 접하거나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따라서 가상의 인물을 만나는 경험으로 사고가 변하는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르완다에서는 텔레비전 연속극 하나가 대학살 이후 종족 간에 굳어진 편견과 갈등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야기는 첨단기술이 아닐뿐더러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외집단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향한 공감을 향상시키는 효과적 방법으로 입증되어왔다. 무엇보다도, 가장 배타적인 사람들이 접촉의 효과를 가장 크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Gordon Hodson은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동성애자, 흑인 재소자, 이민자, 노숙자,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고정관념에 의해 차별받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크게 영향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34-5)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증오에 대해 명쾌한 예측을 제시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외집단을 비인간화할 때, 즉 외집단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말하는 것이 이를 듣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폭력 행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또한 사람을 동물이나 기계에 비유하거나, ‘쓰레기’ ‘기생충’ ‘체액’ ‘오물’ 등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형태의 증오언설이라고 본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언어를 제재하는 강력한 문화적 규범을 조성할 수 있다. 텔레비전, 신문 같은 언론 매체나 사회적 소통 매체에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인간 이하로 말한다면 우리 내부에서부터 경보기를 울려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절대로 증오언설을 표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Giambattista Basile가 썼듯이, “뼈 없는 혀가 척추를 부러뜨리는 법”이다. 142)
9 단짝 친구들
동물에게 친절한 태도가 정말로 타인에 대한 친절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학자들은 사람과 동물을 연관시키는 개념에는 꾸준히 저항해왔다. 그것은 우리 종이 특별하고 동물들과 다르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15개 항목 가운데에는 편견과 비인간화의 가장 주요한 동력이 무엇인지를 묻는 항목도 있었다. 다수는 무지, 닫힌 마음, 매스미디어, 부모의 영향, 문화적 차이를 원인으로 돌렸다. 반면에 동물에 대한 시각은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과 크리스토프 돈트Kristof Dhont는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람 중에서도 우월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사람을 동물과 다르다고 여기는 태도나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민자나 흑인이나 소수 민족 등 사람 외집단을 동물로 비유하는 비인간화에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49-50)
개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다른 사랑만 못하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될지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기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그들은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 오레오와 나눈 우정과 사랑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