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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2 : 전쟁의 서막 1770~1780 -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ㅣ 미국인 이야기 2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평점 :
1장 표류
"노스 행정부는 1770년 초 그래프턴 정부에 뒤이어 들어섰는데, 출범 후 곧 식민지의 분쟁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톤젠드 관세를 철폐하여 갈등의 소지를 제거했고, 영국 의회를 잘 유도해 뉴욕 식민지를 괴롭혀왔던 통화법도 수정하도록 했다. 뉴욕은 이제 채권을 발행해 공적 채무를 지불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사실 그 뒤 3년 내내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임 내각과 마찬가지로 노스 내각도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내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노스는 식민지 사태가 그저 조용히만 흘러간다면 그냥 흐르는 대로 놓아둬도 좋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도 영국 의회가 마음대로 식민지인을 이끌고 가겠다는 낡은 주장을 포기한다면 그런 표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선언법이 여전히 법령집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에 대한 관세도 여전히 법으로 남아 있었다."(16-7)
"버지니아는 영국과의 갈등 초창기에, 특히 인지세법 위기 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인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인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자 평소의 생업으로 되돌아갔다. 매사추세츠의 양키들도 맹렬하게 자유를 수호했지만 역시 평온을 바라고 있었다." "1773년 5월, 영국 의회는 정치적 휴지기를 13개 식민지 전역에서 종식하는 조치를 취했다. 의회는 1773년에 차세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어려움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었다. 이 법은 이 회사에 식민지에서 차를 거래하는 독점권을 부여했고, 차에 3펜스 관세를 유지했다. 이 법의 두 가지 사안은 격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 두 조항은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에서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통지였다. 정치의 '휴지기'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영국 의회는 지고한 권리를 다시 한 번 주장하고 나섰다. 아메리카의 저항운동은 이제 표류 기간을 끝내고 명확한 방향성을 찾았다."(27, 34)
2장 결의
"1771~1772년 동안 아메리카인은 차를 마셨고, 그 차의 대부분이 합법적으로 수입되었으며, 파운드당 3펜스의 관세를 물었다. 밀수가 여전히 용납됐고 상당량의 차가 네덜란드에서 불법으로 수입됐으나, 세관을 통해 들어오는 영국 차도 합법적으로 조용히 수입됐다. 그러나 차세법이 통과되고 나서 1년 사이에, 관세가 예전과 동일했는데도 반대운동이 되살아나서 그 유명한 차 사건이 보스턴 항구에서 발생했다. 2년 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제 차를 수입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낙인이 찍혔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이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즉 문제 해결을 강요하는 것이었고,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서 과세권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주장한 셈이었다. 식민지인이 볼 때, 차세법은 식민지인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영국인의 음모가 되살아난 것이었다. 영국 정부의 의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마당에 관세를 계속 납부한다면, 그것은 노예화 작업에 협력하는 행위가 될 것이었다."(37-8)
# 보스턴 차 사건(1773. 12. 16)에 대한 영국 의회의 대응(소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nce Acts')
1. 보스턴 항구 법안 : 보스턴 항구는 국왕이 재개항을 명령할 때까지 폐쇄되며, 국왕은 동인도회사가 차 손실에 대해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재개항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
2. 매사추세츠 규제법 : 국왕의 특허장으로 일부 자율을 허락받았던 매사추세츠 정부를 왕실 직영 정부로 전환한다.
3. 정의의 불편부당한 시행법 : 식민지에서 중죄를 저지른 영국 관리는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로 보내 재판을 받는다.
4. 또 다른 숙영법 : 기존 법은 민간 당국에게 막사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제는 개인 집에서도 숙영할 수 있도록 했다.
5. 퀘벡 법 : 퀘벡의 경계를 오대호 남부와 오하이호 강까지로 확장하고 프랑스계 주민들의 가톨릭 신앙을 인정했다.
"1774년 9월 5일 대륙회의가 처음 개최됐을 때, 대부분의 아메리카인은 영국 의회가 13개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이런 입장은 지난 10년 동안 줄기차게 선언됐고, 인지세법 위기가 끝나기 전 이미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 때만 해도 영국 의회가 대영제국의 일부인 식민지의 사안에 대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권리마저도 일부 논객의 노골적인 저항을 받았다." "토머스 제퍼슨에 따르면 영국이 행한 '임의적 조치' 중 최악은 영국과 아메리카 내의 모든 땅을 국왕이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봉건적 토지 보유권이 도입됐고, 그에 부수된 온갖 강탈이 시작됐다. 아메리카에서는 이 제도가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제퍼슨은 〈왕은 인민의 봉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즉, 왕은 법률의 구속을 받으며 계약의 당사자로서 계약이 정한 한계와 규정 내에서 통치한다는 것이다."(59-62)
"10월 14일, 대륙회의는 권리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이제 식민지의 권리가 자연법, 영국 헌법, 식민지 특허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세 가지 권리의 원천은 타협의 산물이었으나, 선언 자체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이 선언문이 주장한 권리들은 거의 10년 동안 아메리카의 대의로 주장되어온 것이었다. 이 선언은 식민지가 스스로 과세하고 입법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한동안 그들의 이해관계, 특히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들을 분열시킬 뻔했으나 결국 대륙협회를 성사시켰다. 협회는 아메리카인들을 함께 묶는 가치를 표현했고, 자치권을 보호하려는 욕망에는 정체론을 초월하는 도덕적 관심사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륙회의가 검소, 절약, 근면을 권장하며 사치와 낭비를 비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어휘는 식민지 창건 이래 아메리카에 존재해온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나왔다."(81, 84-5)
3장 전쟁
"보스턴에 있던 게이지 장군은 무력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영국의 권위를 보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압 작전에 투입될 충분한 병력이 그의 수중에 없었다. 그를 가장 심란하게 만든 것은 아메리카인의 저항과 적개심이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1774년 9월 그가 찰스타운의 화약과 케임브리지의 대포를 압수하려고 했을 때 식민지인의 반응은 너무나 격렬했다. 그 소문이 뉴잉글랜드에 퍼지자 멀리 있던 코네티컷의 민병대까지 보스턴으로 몰려들었다. 집결한 대원들의 수는 약 4000명이었으며 그들의 태도는 싸움을 불사했다. 이 사건이 지나가자, 게이지는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와 군수품을 사들이는 예산이 배정돼 착착 집행되고 있었다. 대륙회의는 산회하면서 지역 민병대를 소집할 권한을 안전 위원회에 부여했는데, 위원회는 게이지가 500명 이상의 정규군을 보스턴 밖으로 내보낼 경우 즉각 민병대를 소집할 예정이었다."(111-2)
"1775년 4월 14일 식민지 담당 장관인 다트머스가 보낸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영국 내각의 입장을 요약한 다음, 명시적인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질책하는 어조로 보아 뭔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게이지는 다트머스의 편지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지역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작업이 아니라, 콩코드와 우스터에서의 무기와 탄약 압수를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렉싱턴 전투와 콩코드 전투는 앞으로 영국군이 직면하게 될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군대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민중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전쟁은 18세기의 다른 많은 전쟁을 닮기도 했다. 전통적인 군대들이 전략에 따라 서로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인이 계속 동원된다는 점과 통상적인 전투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민중의 열정과 도덕적 강인함은 프랑스 혁명 전에 치러진 어떤 18세기 전쟁에서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114-6, 126-7)
4장 절반의 전쟁
"5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2차 대륙회의가 개최됐다. 대륙회의 참석자들은 이제 군인이 필요하고 콩코드 노상에서 전투가 발생한 이상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타협을 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을 할 것인지, 즉 전쟁의 목적에 대해서는 일치된 합의가 없었다." "대륙회의는 1년 뒤에나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회의는 독립이냐 타협이냐를 명확하게 결정내리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주권 국가의 대표 기관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는 한 달 전 고충의 시정과 평화와 화합의 회복을 탄원하는 서신을 국왕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식민지에는 무장을 하라고 지시했다. 5월 27일에는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대륙회의는 대륙군을 통제할 규칙과 규정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은 위원회의 위원장을 임명했다. 6월 15일에는 '아메리카의 자유를 위해 모병됐거나 모병될 모든 대륙군'의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임했다."(138-9, 142-3)
"영국군은 여러 면에서 그 시대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싸우도록 조직된 전형적인 18세기 유럽 군대였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18세기에, 전쟁은 왕조 국가의 전유물이었고 제한된 목적을 위해 소규모로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병사들은 명예도 모르고 훈련시키기도 어려우며 유지하는 데 고비용인 가난한 계급에서 뽑아왔기 때문에, 군 지휘관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군대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일로 고심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군사적 행동을 가능한 한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통상적으로 군사 작전은 좋은 날씨에만 수행됐고, 겨울철 전쟁은 드물었다." "지휘관들은 날이 좋아도 승리를 악착같이 추구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패배해 그 뒤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전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도 않았다. 전면전과 그 결과물인 전면 승리라는 개념은 훨씬 후대에 발명됐다."(168-70)
"조지 워싱턴은 유럽의 군사 교리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비전문가로 구성된 군대의 태생적 약점을 드러냈다. 병사와 장교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와 유대 관계는 전문적인 군대의 목적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민병대는 그 군대의 성격상 언제나 신뢰하기 어려운 군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임시 근무를 하러 나온 민간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자신의 군대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유럽 사상을 고집하지 않았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일을 꾸려나가는 능력도 있었다. 1775년 케임브리지에서 또는 전쟁 기간 내내 그는 전통적인 군대를 양성하려고 노력했지만 때로는 전통적인 군사 원칙에서 벗어나서 임기응변할 줄도 알았다. 그는 겨울에도 전투를 벌였고 비정규군인 민병대를 적절히 활용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원칙과 국민에게 호소할 줄도 알았다. 그는 전쟁을 그가 속한 계급의 소수 장교들과 사회 밑바닥의 찌꺼기 인생들만 가지고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173-4)
5장 독립
"1775년 봄 독립을 지지하는 대표들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독립 선언을 지지하는 자는 더욱 없었다. 다수의 대표는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들이 화해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름에 진행된 회의에는 뭔가 '변덕스러운 경향'이 있었다. 회의는 평화를 애걸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준비했고 화해를 탄원하면서 아메리카의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또한 영국군에게는 죽음을 경고하면서 국왕에게는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무더운 여름의 몇 주 동안에 벌어진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사람들이 벙커힐에서 죽었고, 아메리카인이 죽어갈 때마다 온건파 세력은 그만큼 떨어져 나갔다. 죽음과 고통은 뉴잉글랜드에 국한된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전투 소식은 널리 퍼졌고, 중부와 남부 식민지의 병사들이 보스턴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타협의 정신 또한 떠나갔다."(196-8)
"아메리카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영국 의회 내의 많은 의원은 확실히 일치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내각의 지도를 따라 그해가 다 가기 직전인 1775년 12월 22일 아메리카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식민지와의 모든 거래를 중지시키는 법으로써 아메리카의 배와 화물을 영국 해군의 만만한 사냥감으로 만들었다. 법에서는 〈식민지와 거래하는 모든 배는 명백한 적의 선박 또는 물건으로 간주되어 국고에 몰수되고, 모든 해사법원과 기타 법원에서 그런 식으로 간주되고 판단되어 몰수될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여기에 대륙회의가 지난 7월에 승인한 탄원서 접수를 영국이 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더 많은 병력이 아메리카로 건너오는 중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대륙회의가 금지법을 접수한 1776년 2월에 이르러, 화해의 가능성은 가뭇없이 멀어졌다. 그렇지만 대륙회의는 독립 선언을 여전히 자제했다. 회의는 아메리카인이 영국과의 영원한 결별을 선호한다는 확증을 기다렸다."(199-200)
"페인이 《상식》에서 펼친 주장 중 일부는 지난 12년 동안 소책자 저자들이 줄기차게 해온 말이었다. 즉 식민지를 노예화하려는 음모가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인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기존의 영국-아메리카 제도의 구조가 곧 음모라는 것이었다. 군주제 또는 영국의 정체가 곧 음모이기 때문에 이제 아메리카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독립을 선언해야만 했다. 독립 선언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었고, 페인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역사 속 단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새롭게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현재와 비슷한 상황은 노아 시대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을 사람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는 아메리카의 과거에서 내려오는 기독교 천년주의 유산에 대한 호소였다. 페인은 동시에 치유 방안도 제시했다. 그것은 아메리카 혁명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뚜렷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확신이었다."(206)
6장 진지전
"영국군은 대양과 해안지대 그리고 대부분의 강을 지배했다. 그들은 수역을 통제했기에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이동할 수 있었고, 원하는 곳에다 쉽게 병력을 집중할 수도 있었다. 반면, 아메리카군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장군들이 보기에는 크게 미흡했다." "〈성공이 매우 의심스러울 때나 적의 손에 붙잡힐 가능성이 있을 때, 용감하게 방어에 나서서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는 병사들을 자극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워싱턴은 진지에 의존하게 됐다. 진지가 전략적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아메리카 병사들에게 진지에서만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은 상비군이 용병부대보다 더 우수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대의가 있었고, 그들에게 명예 의식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전통적인 군대와 비슷한 군대로 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워싱턴의 군대에 드나드는 시민군에게는 자부심과 명예가 몹시 결핍되어 있었기에 그는 진지전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236-9)
"하우는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정치적 차원에 유념했다. 만약 그가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끌어안으려면, 그들을 보호해줘야 했다. 영국에 복종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 때문에 그동안 동요하던 국왕파들이 공개적으로 신분을 드러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하우가 갖고 있는 수단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워싱턴이 사료와 식량을 파괴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에 군수품이 부족했다." "대부분의 점령군이 그러하듯이, 하우 부대는 점령 지역의 주민을 '보호'하면서도 그들을 착취해야 하는 모순적인 입장에 빠졌다. 점령지 주민에게는 애국자로서 이기심 없이 영국군에 보답해야 한다는 감정이 없었다. 하우는 그들의 심정을 잘 알았기에, 도노프에게 탄약고를 지으라고 지시하면서 농부들로부터 물자, 특히 소와 곡식을 징발할 때 영수증을 써주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우의 이러한 지시는 탄력적인 것이어서 쉽게 남용할 수 있었다."(275)
7장 기동전
"영국군의 1777년 전략 중 한 부분을 설계한 존 버고인 장군은 겨울 추위의 런던을 뒤로 하고 5월 6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그날 퀘벡은 완연한 봄 날씨였고, 장군이 도착하면서 낙관적인 봄기운도 함께 돌았다. 언제나 과감했던 버고인은 이제 자신이 바라던 바를 획득했다. 독립된 지휘권을 얻었고 물론 그 권한을 행사할 기회도 잡은 것이었다." "그는 6월 20일 위협과 위선적인 경건함으로 가득한 선언문을 반포해, 아메리카인은 그의 부대를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지옥불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버고인의 어조는 아주 오만했기 때문에 자신과 부대에게 몹시 해로운 메시지를 작성한 꼴이 되었다. 합헌성, 애국심, 기독교를 거론한 허장성세와 인디언을 풀어 공격하겠다는 야만적인 위협은 아메리카인의 분노와 경멸을 자아냈다. 전임 영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식민지인의 반감을 부추기는 데에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299, 302-3)
"1777년 북부 전투에서 존 버고인은 영국군을 이끌고 캐나다에서 남하해 아메리카를 공격했고 이에 맞서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아메리카군을 이끌었다." "9월 19일 배미스 하이츠 1차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프리먼스 팜에서 뒤로 밀리지 않고 진지를 고수했으나, 대체 불가능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총 556명의 영국 정규군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10월 7일 벌어진 배미스 하이츠 2차 전투에서 아메리카군은 증원군과 아놀드의 맹공에 힘입어 영국군을 퇴각시켰다. 10월 12일 게이츠는 버고인의 퇴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 버고인은 도강을 할 수 없자 항복 조건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두 지휘관은 10월 16일 만났고, 다음 날 영국 정규군은 진지에서 나와 무기를 내려놓았다. 영국군은 버지니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이와 더불어 약 5800명의 영국군 장교와 병사, 27문의 대포, 5000점의 무기, 탄약, 기타 각종 군수품도 포획됐다."(311, 314, 319-21)
"워싱턴은 북부군의 성공을 아메리카 혁명의 대의와 연결했다. 자부심, 영웅심, 명예에 대한 호소는 전에도 했다. 그러나 '정의롭고', 영광스럽고, 온 '나라'가 공감하는 혁명의 대의에 그런 고상한 감정을 연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싱턴은 이런 거대한 사상을 병사들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결부하면서 연설을 끝냈다. 〈적은 불명예스러운 말들로 그대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대들은 이런 비난을 참아낼 수 있는가? 그대들의 조국이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겠는가?〉 실패한 혁명은 대역죄로 간주될 것이었다. 오로지 혁명 전쟁의 경우에만 병사들은 '정의로운 대의'라는 고상한 개념과 교수형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는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며 전투에 참여한다. 이 병사들은 공화주의의 세세한 점까지는 잘 몰랐지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명확하게 알았다. 그들은 막강한 영주나 주인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을 말이다."(332-4)
8장 혁명의 불꽃이 유럽의 전쟁으로 번지다
"한편 프랑스는 1763년 7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에 복수할 날만 꿈꿔왔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식민지들이 격변에 휩싸였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대영제국이 분열될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했다." "마침 대륙회의는 1775년 초 원조를 받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던 차였다. 부분적으로는 대륙회의의 의원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 같은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대륙회의는 1775년 11월 29일 비밀 교신 위원회를 임명했다. 위원회는 프랑스의 태도에 가장 신경썼다." "마침내 프랑스의 아메리카 비밀 원조가 승인되자, 위대한 재무장관 튀르고만이 지원에 반대하면서 프랑스가 무슨 조치를 취하든 아메리카의 독립은 기정사실이며, 독립국 아메리카는 식민지 시절보다 훨씬 더 영국의 상업적 번영에 기여할 것이란 주장을 폈다. 1776년 5월 2일에 이르러, 루이는 튀르고의 이런 예측을 무시했고 식민지에 100만 리브르어치의 군수물자 지원을 승인했다. 열흘 뒤, 튀르고는 사임했다."(344-8)
"프랑스와 아메리카 양측은 우호와 통상 조약, 그리고 동맹조약을 1778년 2월 체결했다. 상업 조약은 최혜국 대우를 포함했고, 서인도제도의 여러 항구를 개방하며, 프랑스가 아메리카 선박에 무제한으로 항구를 개방하는 조항도 포함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하는 경우에만 발효되는 동맹조약은 두 국가가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특히 8조에 명시된 내용이 중요했다. 〈양국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영국과 휴전이나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한 양국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이 전쟁을 끝내는 공식적 조약에 의해 확실하게 되기 전까지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합의한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영토에 대해서도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 중에 점령된 영토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소유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조약은 5월 4일에 대륙회의의 승인을 받았다. 6월 14일이 되자 프랑스와 영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356-7)
9장 남부에서의 전쟁
"좌절 뒤에는 으레 새로운 희망이 뒤따르는데, 이는 헛된 환상이다. 아메리카인들의 봉기에 직면한 영국은 새로운 희망을 모색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헛된 환상에 가까웠다. 렉싱턴 전투가 발발하기 전, 영국 각료들은 아메리카 문제가 소수 반란자들의 음모로 부추겨진 것이며 대다수의 식민지 주민은 영국 의회와 국왕을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왕을 포함한 많은 이의 이런 확신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군사적 실패를 함께 책임져야 하는 낙담한 관료들에게 그런 확신은 틀림없이 위로가 되었다. 하우 형제는 아메리카 내에서 무수한 국왕파를 찾아낼 것으로 생각했지만, 1776년 트렌턴으로 진군하면서 이런 착각에서 어느 정도 깨어나게 되었다. 윌리엄 하우 경은 특히 남부 식민지에 충성스러운 신민이 무수히 있으며, 북부보다 훨씬 열렬히 국왕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아메리카인에 관한 가장 흔하고 근거 없는 신화의 한 가지 형태였다."(407-8)
"하우의 상관이었던 조지 저메인 경은 48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아메리카 내의 실망스러운 상황을 잘 몰랐으므로, 계속해서 대다수의 아메리카인이 충성스럽다고 믿었다. 1777년 여름, 캐롤라이나의 국왕파들이 잉글랜드에 도착해서 저메인의 귀에 아메리카에 국왕파가 많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흘려 넣었다. 이런 얘기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하우에게 남부로 진군할 것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영국군은 남부 전투의 전초전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항구도시 찰스턴을 공략하여 약 6주간에 걸친 공성전 끝에 1780년 5월 12일, 항복을 받아냈다." "클린턴은 충성을 서약하는 반역자들에게 대영제국 치하에서 누렸던 권리를 회복해줄 것이며, 영국 의회로부터 세금 면제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많은 반역자가 이미 서약을 통한 가석방 제안을 받아들였고, 사유 재산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보장과 대륙회의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영국에 넘겨줄지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서 영국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408, 433)
"찰스턴의 비보를 듣게 된 대륙회의는 영웅이 남부의 전세를 일거에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게이츠에게 남부 군대의 총사령관직을 맡겼다. 그의 과거 군공을 감안하면 그것은 훌륭한 인사였다. 1777년부터 게이츠는 성공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고 새러토가 전투에서 버고인 부대의 항복을 받아낸 바 있다. 그러나 게이츠에 대한 의심은 그의 부임 즉시부터 시작됐다. 부임지에 온 바로 다음 날, 캠던으로 진군 중이던 대륙군에게 열병식을 거행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결국 식민지 남부에서의 세력 확보가 절실했던 영국군은 1780년 8월 16일 벌어진 캠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부의 거점을 확보했다. 게이츠는 그날 저녁 약 96킬로미터 떨어진 샬럿에 도착했고, 19일에는 약 193킬로미터 떨어진 힐즈버러까지 왔다. 그는 힐즈버러에 도착해서는 후방 기지를 지키고 아메리카군을 재건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변명했다. 대다수의 병사는 게이츠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438, 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