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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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구세계와 신세계의 융합(1500년 무렵~1700년 무렵)


"'구세계'가 '신세계'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생태계를 바꾸고 인간의 정착 형태를 변화시킨 자원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소비하는 과정이었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추출하고 식품, 광물, 자재, 상품을 돈을 지불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수송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배치한 결과다. 그것은 다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는 세계 제국(유럽에 중심을 둔)의 창설이었다. 그것은 상품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것이었다. 지리적 경계를 확장해 더 많은 천연자원(광물의 형태든 농작물의 형태든)을 차지하고 개발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구하기 쉽고 가격까지 떨어지니 그 자체로서 좋은 점이 있었다. 접근성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이바지하고 유럽 주민들의 '근면혁명'에 매우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주민들은 갈수록 많은 양의 상품을 갈수록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어서 가처분 재산이 늘고 소유권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는 순환을 가져왔다."(472-3)


"생물 혁명의 충격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일부 역사가들은 여기에 일종의 '생태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착 생물군이 새로운 습관, 생활방식, 요구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의 도래로 인해,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가축으로 인해 자리를 빼앗기고 변형됐다. 그 가축들의 〈식습관, 짓밟는 발굽, 배설물,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잡초성 초목의 씨앗들〉이 식민화된 지역의 〈토양과 식물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유럽인들은 '큰 가방 생물상'을 가지고 왔다. 재배 농작물과 가축(그것들이 퍼져 토종 동식물과 함께 자랐다)에 더해 잡초, 씨앗, 해충 역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병원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 유럽인들은 토착민들이 그들의 신앙 체계 때문에 신에 의해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현지 주민들에게 강경한 종교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개별 선교 사제들에게 신도를 보살필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원을 호소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480-2)


"'신세계'의 생태적 이점은 초기 대서양 횡단 무역의 핵심 요인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설탕이었고, 이어 담배가 뒤를 따랐다. 담배는 거의 기적적인 약효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정착과 식민화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양자는 새로운 환경의 개발,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심고 기르고 거두고 땅의 과실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확보 가능성이었다. 이는 특히 환금작물에 중요했다. 노동집약적이고 연중 계속되는 과정이었다. 유럽에서 새로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설탕 생산의 분명한 해법은 강제노동과 노예 사용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인 정착자들은 질병과 기타 요인에 의한 인구 재난의 첫 번째 파도가 닥치기 전에도 노동력을 늘리는 일에 집착했다. 여기에 중요했던 것이 '농장 복합체'의 개발이었다. 이런 곳들의 경제적·생태적 이용에서는 서아프리카 노예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487-9)


16장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다(1650년 무렵~1750년 무렵)


"당시의 마음가짐은 고전기 세계의 관념과 영향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그 진정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온화한 땅은 온화한 사람을 낳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다." "몽테스키외는 1784년 〈법의 정신〉에서 그 견해를 비틀어 사람들은 〈추운 기후에서 더 활발〉하고 〈더 자신감을〉 드러내며, 더 〈용감〉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더 잘 인식한다고 썼다.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다." "이런 단호한 언설은 북유럽의 추운 날씨가 어떻게 유럽의 세계 제국들을 건설했는가에 대한 정당화와 설명을 찾아내려는 노력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인종에 대한 관념과 유럽인들이 먼 나라, 먼 대륙의 다른 민족과 문화를 지배할 권리에 대한 관념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더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입법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몽테스키외는 말했다."(504-5)


"열대열 말라리아는 노예무역과 연관된 독립적인 여러 경로로 들어와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에 자리를 잡았다." "말라리아의 확산은 세 개의 변수에 의존한다. 즉 기생충 자체, 모기, 기후다. 모기 가운데 몇몇 종은 다른 어떤 척추동물보다 인간에게서 피를 빨기를 좋아한다. 기후 자체는 모기 서식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모기는 번식하고 살아남고 확산되는 데 충분한 물과 충분히 더운 온도를 필요로 한다. 1681년과 1683~1684년, 그리고 다시 1686~1688년에 대규모의 엘니뇨 현상이 일어났다. 이 상관관계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기상 이변이 열대열 말라리아가 문턱을 넘어 북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의문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 정착자들에게 아프리카 인력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었다. 구매자들은 노예를 아무 곳에서나 사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의 출신을(그래서 이 병에 저항력을 갖춘) 선호했다."(510-2)


"(카리브해의 농장복합체에서) 유럽으로 수입되는 설탕의 양이 늘면서 당연히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설탕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18세기의 한 파리 사람은 이렇게 썼다. 〈중산층 가정에서 손님에게 커피를 내놓지 않는 경우는 없다. 가게 주인이든 요리사든 하녀든 아침에 커피와 우유를 곁들여 식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수도의 공공 시장과 특정 거리 및 골목에서는 여자들이 대중에게 자기네가 카페오레(우유커피)라 부르는 것을 판다고 내세운다.〉 이런 상호작용들은 단지 삶의 질 개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교환, 혁신, 협력에도 중요했다. 예를 들어 찻집과 커피점이 증권거래소의 발전, 보험산업의 발전, 정치적 토론의 발전과 계몽시대(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인 파종하고 수확하고 채굴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쇄매체의 보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517-20)


17장 소빙기(1550년 무렵~1800년 무렵)


"일부 평가에 따르면 16세기 말부터 17세기 말까지의 100여 년은 역사상 알려진 것 가운데 유일하게 북반구와 남반구가 동시에 온도가 떨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소빙기는 역사가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이것이 아주 놀랍지는 않다. 이 시기는 심각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생태적 변화의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1640년대에는 이후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어느 시기보다 세계에서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소빙기라는 개념이 문화와 행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편이자 군사적 대결의 결과를 좌우하는 질병 변천의 맥락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우선 온도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정한 기간에 떨어진 것은 전혀 아니며, 틀림없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것도 아니다.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가 밝혔듯이 증거는 소빙기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는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538, 541-2)


"기온 하강이 동향, 유행, 심지어 개별적 사건들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조심스러운 판단이 필요하다. 지리적·시간적으로 상당한 편차가 있는 오랜 기간의 기후 변화를 평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시기에는 통상적인 기후 패턴에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는 증거가 있다. 대표적으로 1590년대, 1680년대, 1810년대 등이다. 이 시기에는 화산 활동, 특히 강한 엘니뇨 현상, 또는 그 두 가지가 상승 작용해 여러 지역에서 기온이 떨어졌다." "그러나 세계의 기후 재편의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 불안정하고 이례적인 기후 조건이 재난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기존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숱한 식량 부족 사례에서 문제는 스스로 위험에 노출될 정도로 확대된 도시에서 기인했다. 다만 그 위험 자체는 안전한 곳(그리고 먹을 것)을 찾으려는 시골 주민들의 시도에 의해 악화됐다."(544, 559-60)


"명나라의 멸망은 흔히 일반적으로는 궂은 날씨, 특수하게는 기후 변화와 연결돼왔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1640년에 흉작과 함께 메뚜기 떼의 습격, 식량 부족, 천정부지의 물가, 질병 발생이 겹쳤다. 그리고 이후 3년(1641~1644) 동안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덮쳤다." "그러나 명 왕조의 붕괴에는 1644년까지 형성 중이었던 기후 위기보다 훨씬 깊숙이 뻗어 있고 훨씬 오래 영향이 지속된 뿌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명은 산적한 문제에 적응하거나 이를 처리하지 못하고 죽음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다." "반면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과 베네룩스는 중국에 그렇게 파멸적이었음이 입증된 아주 비슷한 기후 조건을 유행병, 기근, 지배층의 전복이라는 파멸적인 문제 없이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 성공의 비밀은 평범한 데 있었다. 관리와 행정가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가져올 과제들을 예측해 미리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후는 악화 요인일 뿐,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568, 572-3)


18장 대분기와 소분기(1600년 무렵~1800년 무렵)


"감자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기상 충격과 기후 변화로 인해 제기된 위험을 그 작물이 완화했기 때문이다." "안데스에서 수천 년 동안 재배된 감자는 서서히 받아들여져 1600년 무렵 에스파냐,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불리한 기상 조건의 위험을 완화함으로써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식량 부족을 줄이고 열량 섭취를 늘리며 건강과 기대수명을 개선한 것이다. 또한 감자는 고밀도의 인구를 지탱할 수 있게 했고, 17~18세기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규모를 더욱 키우는 동력이 되었다. 감자는 예를 들어 이 기간 인구 규모 증가의 25퍼센트 정도를 책임진 것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도시화의 가속에서는 더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즉 도시가 상거래를 발전시키고 수요를 활성화시키며 혁신을 자극하는 데에 일차적인 역할을 담당한(그리고 지금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591-4)


"1760년대와 1770년대에 대서양에서 이례적으로 빈번하고 격렬했던 일련의 폭풍우는 교역망을 조정하고 정치적 동맹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했다." "미국 남부와 카리브해 지역의 환경적·경제적 취약성이 식민지들의 상업적·정치적 기회이자 영국에는 약점이라는 인식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는 사실상 자메이카와 여타 영국 식민지들을 잘라내 물자 부족과 고통을 야기했다." "반면에 카리브해의 프랑스 섬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상인들은 협약을 맺고 미래의 계약을 예약하고 창고를 상품으로 꽉꽉 채웠다. 프랑스와 나중에 에스파냐가 1770년대 후반 독립파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는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요인은 분명했다. 대서양 서부와 카리브해에서의 상업적 유대를 더욱 긴밀히 통합함으로써 모두가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599-601)


"프랑스 혁명은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많은 지역에 불을 질렀다. 반항은 밖에서도 있었다. 1791년 생도맹그, 즉 아이티의 혁명 같은 것이다. 이 혁명 이후 독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도력과 아이티 주민들의 결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황열병이 프랑스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를 궤멸시킨 덕분이었다." "프랑스의 혼란은 영국에 몇 가지 활력소를 제공했다. 혁명의 폭력과 뒤이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격변은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에 이미 일반적으로 영국, 더 구체적으로 런던을 사방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만들었다. 재능, 자본, 연줄이 베네룩스, 독일, 그리고 물론 바로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한 역사가가 우아하게 말했듯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벌처럼 꽃가루를 가져와서 새로운 꽃을 피우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공업의 이륙을 싹트게 했다. 그것이 정치, 사상, 기후 변동의 큰 변화가 일으킨 전례 없는 결과였다."(612-3)


19장 공업, 수탈, 자연계(1800년 무렵~1870년 무렵)


"1815년 4월의 탐보라산 화산 분출은 과거 1만 년 사이에 가장 큰 규모였다." "1820년의 한 보고는 1815년 이래 기상의 '이상' 상태라는 것에 대해 주장했는데, 그 결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산됐다. 기후 요인이 정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듯하다." "기후가 콜레라 유행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식생활, 하수 처리, 위생은 더욱 중요한 요인이었다. 콜레라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질병, 빈곤, 제한된 취업 전망은 모두 유럽에서 이민의 물결을 내보내는 동력 역할을 했다." "남·북아메리카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새로운 노동력 공급원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념, 지식, 문화, 유전자, 제도, 언어를 가지고 와서 급격한 사회경제적·정치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것은 유럽의 변화 역시 자극했다. 대량의 이탈 사태는 노동력의 크기를 줄였고, 이에 따라 임금을 끌어올리고 혁신·기계화·공업화에 더 큰 보상을 제공했다."(626-7)


"자원 수탈의 바탕에 있는 것은 자연에 관한, 땅에 관한, 환경을 어떤 방식이든 자기네가 원하고 최선이라고 믿는 대로 개조할 권리에 관한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자연계는 길들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천재성, 근면, 새로운 도구가 이제 생태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낫고 더 빠르게 모습과 용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 의해 불이 지펴졌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활동을 긍정적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고, 일부는 대신에 지속 가능성과 환경에 가해진 장기적인 충격에 대해 우려했다. 산림 파괴와 관개농업 증가가 토양의 건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현실은 삼림 파괴가 19세기와 그 이후에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로 계속됐다는 것이다. 185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대략 1억 5200만 헥타르의 세계 열대림이 초지로 전환됐다. 그 3분의 2 가까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다. 모두 식민지 팽창의 핵심 지역들이다."(634-8)


"세계의 어떤 지역은 별 혜택을 얻지 받지 못했다. 뒤쳐지거나, 물리적 기반시설(도로, 학교, 병원, 철도 같은) 측면에서도, 비물리적인 투자(제도, 교육, 지역의 능력 배양 등)에서도 별다르게 얻지 못했다. 명목상 식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들(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들 같은)은 전형적인 피착취 위성국 노릇을 했다. 원료를 수출하고 국내 소비품은 수입에 의존했다. 세계 경제의 변화는 인도와 남아시아에 일희일비를 가져왔다. 인도는 1810년에서 1860년 사이에 국내 직물 시장의 상당 부분을 영국에 빼앗겼다. 가격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기간에 곡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풍부하고 값싼 음식으로 흥청거렸지만, 인도에서는 1875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사이에 1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굶주려 죽었다." "이윤 추구, 환경의 지속 불가능한 이용,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일 경우의 자연의 복수가 결합돼 일어난 결과들이었다."(646, 650)


20장 격동의 시대(1870년 무렵~1920년 무렵)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 시장은 한층 통합되고 운송망은 개선됐으며 정보 공유가 가속화됐다. 면화 이야기가 두고 두고 반복되었다." "1930년대에는 수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말레이반도의 세계에서 가장 울창한 우림이 고무나무로 대체됐다. 특히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해 타이어로 쓸 고무 수요가 더욱 치솟았기 때문이다. 선구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따라오는 보상의 흥분은 분명한 것이었다. 남·북아메리카는 이미 벗겨먹었다. 이제 세계의 다른 지역을 벗겨먹을 차례였다." "자원 수탈은 농작물과 초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주석은 직물 생산, 기계공학, 군용 무기 같은 갖가지 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요 용도는 보존 식품을 담는 깡통이었다. 식품 보존은 시골의 잉여 식료품을 보존하고 그것을 도시로 수송하는 핵심적인 기능이었으며, 따라서 도시화·공업화·세계화에 필수적이었다. 유럽의 주석 생산은 금세 고갈돼 다른 곳에서 공급처를 찾게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동남아시아였다."(651-4)


"인간이 위험하다(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연계에)는 가설은 19세기에 확산됐다. 그런 사고의 논리적 정점을 1960년대에 쓰인 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린 와이트는 유대-기독교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을 덜 배려하게 만드는 세계관을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하고 자연과 별개의 것으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계몽시대 이래의 유럽중심적 관념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동방'의 신앙 체계를 보다 환경 친화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특히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명, 영혼, 자연에 대해 고귀하고 거의 신비적인 태도에 물들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실 종교 전통은 문제도 아니고 문제의 근원도 아니었다. 문제는 탐욕과 개인의 이득이었다. 어느 학자가 지적했듯이 환경(의 급격한 변모)와 식민 지배는 함께 가는 것이었다."(680-1)


"한 저명한 역사가가 말했듯이 19세기의 대륙 간 연결의 심화는 〈질병에 의한 세계 통합〉을 초래했다. 교역로, 이주 통로, 군대의 이동이 세계를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한데 연결하는 〈간균의 공동시장〉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크고 작은 유행병은 치러야 할 대가의 일부였다." "질병의 확산, 정치적 취약성, 경제 파탄에 대한 우려는 국제적 협력을 향한 결집된 요구를 촉발했다. 감염병을 규명하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지난 세기의 가장 유명한 대유행병인 1918~1920년의 '1918년 대유행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 유행병에 대한 시민의 대응이 투표 행태나 독일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대유행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 그리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지방 당국의 1인당 지출이 적었던 곳은 1930년대 초 현저하게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에 투표했다."(690-5)


21장 새로운 이상향 만들기(1920년 무렵~1950년 무렵)


"'자원의 덫resource trap'은 석유, 가스, 광물 자원을 가진 나라들이 권위주의 국가가 되거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 나라들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권리 분배와 평등은 제한적이었다. 상품 가격이 해마다 천양지차로 출렁이는 경향은 또한 수입을 예측할 수 없고 경기 순환이 널뛰기함을 의미한다." "한 가지 문제는 투자가 사회 발전보다는 자원 추출에 중요한 지역과 시설 주변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와 우라늄이 매우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코발트, 주석, 금도 묻혀 있다) 콩고에는 1960년에 여덟 개의 국제공항, 30개의 큰 공항과 100개의 작은 공항이 있었다. 광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에 걸맞은 병원, 학교,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기반시설 건설은 없었다.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최소한의 저항을 받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708-9)


"소련에서는 많은 억압의 요소가 있었지만 한 가지 일관된 것은 자연계를 길들여야 할 어떤 것으로 대하는 관념이었다. 자연의 변형은 무산계급의 독창성과 근면성의 표현이었다. 자연은 혁명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고 이바지해야 하는 도구를 제공했다. 도시 무산계급의 이익을 위해 도시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화강암, 대리석, 철, 강철은 모두 그들이 사는 곳에서 흔히 지리적으로 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여러 광년 떨어진 곳에서 베고 자르고 파내온 것이었다. 그것을 추출할 때 환경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중앙 통제와 불가능할 만큼 짧은 기간 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물량이 요구되자, 생산 수준에 대한 과장(그것은 비현실적인 결과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악순환을 낳았다)과 공해, 유해 폐기물 처리, 광부 및 건설노동자들(강제노동자든 아니든)의 건강과 관련된 편법이 나타났다. 어떻든 매년 수백만 헥타르의 땅이 다른 용도로 변경됐다."(717-8)


"20세기 중반의 기후 패턴 변화와 지구 온난화 정체停滯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일반적으로 핵 관련 활동의 증가였던 듯하다. 기후 변화를 핵무기 실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1950년대에 이미 나온 이야기다. 방사성-생물학적 위험을 살핀 미국원자력위원회(AEC)와 미국 공군의 한 보고서는 방사성 잔해가 상층부 대기의 이온화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기에 입자 물질이 채워지면 (···) 지구의 날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연구(부분적으로 핵전쟁이 초래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이후의 연구에 의존했다)는 공중 폭발, 특히 대형 수소폭탄(그리고 그 결과로 방출된 미세먼지)이 20세기 중반 이후 일어난 지구 온난화 정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 기획자들의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기후가 새로운 대량살상 무기에 의해 우연히 변화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기후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무기의 개발이 가능한지 여부였다."(736-7)


22장 지구 환경의 재편(20세기 중반)


"1950년대에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기후 통제는 온갖 토론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주제였다. 그러나 기후 통제에 대한 낙관적인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실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비구름 파종은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제상으로도 들어맞았지만, 경제성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를 내리게 하기는 어려웠다(더 나아가 불가능했다). 전략 무기로서든 미국과 기타 지역의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든 말이다. 자금 지원은 계속됐다. 남들이 먼저 기상 변개 기술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 한 이유였다." "이런 우려는 터무니없이 야심찬 지구공학(기후공학) 분야의 현재 및 장래의 연구에 자금을 제공하도록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꼼꼼하게 고려된 것이었다." "1960년대가 되면 여론은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실험에 대해 그저 회의적인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의 영향에 대한 우려와 겹쳐졌다."(744-5, 749, 752)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은 전 세계에 걸쳐 중대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의 빈곤이라는 조건을 안고 좌익의 주장을 홍보하며 각국의 혁명을 부추기는 소련의 망령은 미국 정책 담당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아시아의 농촌 주민은 〈사실상 끝이 없는 마을의 연속 속에서 복닥거리고〉 있다고, 1950년대 초 트루먼 대통령의 대외원조 보좌관 이지도어 루빈은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곳은 〈폭력혁명의 온상〉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안에 세계 수십 개국에 차관, 원조, 전문가가 제공됐다. 2천 명이 넘는 기술 전문가들이 35개 이상의 나라에서 일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업(그 상당수는 농업 생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을 벌인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과잉 인구, 자원 고갈, 굶주림이 정치 불안 및 공산주의자 봉기와 맞물려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업들은 냉전(즉 미국의 국가 안보)이라는 맥락 안에서 틀이 지어졌다."(761-2)


"소련의 사회경제 정책을 추동한 것은 단지 외부 세계와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개혁, 현대화, 적응 실패의 위험성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수십만 명의 새로운 정착자들이 '미개척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 기반시설에 압박을 가하고 사회적 마찰과 생태 재앙을 초래했다. 그것이 소련 역사에서 〈최악의 환경 파괴 사례〉라 불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강들을 관개수로로 개조한 것은 구상이 잘못돼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아랄해(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컸다)의 마른 바닥이 드러난 면적은 2010년 8만 7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바람은 매년 4500만 톤의 짜고 오염된 먼지를 확산시켜 길이 400킬로미터, 폭 40킬로미터의 지역까지 이르기도 하는 먼지 기둥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금 500만 명의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여성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심각한 여성의학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랄해 연안의 개조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770-2)


23장 불안의 증폭(1960년 무렵~1990년 무렵)


"대규모 기아로 이어질 인구 급증에 직면한 세계의 위협은 지금 당장의 문제였다.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듭 강력해진 이야기였다. 폴 에얼리크와 앤 에얼리크가 〈인구 폭탄〉(1968)에서 싸움은 이미 졌다고 경고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온 인류를 먹일 식량을 확보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수천 만의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고 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지구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망은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에 대한 불안과 자연계의 공업 중심지로의 변화(그것은 흙과 물과 인간을 중독시켰다)에 더해진 것이었다. 과잉 인구는 이제 또 하나의 재앙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그 답을 분명하게 밝혔다. 수전 손택은 1960년대 중반에 이렇게 썼다. 〈백인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 자주적인 문명들을 말살하고 지구의 생태 균형을 뒤엎고 이제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백인이며 백인뿐이다. 그 이데올로기와 그 발명품들이다.〉"(796-7)


"이런 문제들(그리고 공포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의 세계에도 매우 낯익어 보인다. 핵으로 인한 대규모 파괴, 경제 성장 추구로 인한 생태계 손상, 자원의 지속 불가능한 이유, 세계 인구 증가에 따른 기반시설과 식량에 대한 압박, 희망을 높이지만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새로운 착상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협력 강조와 이에 관한 실질적 진전의 결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뿌리 깊은 우려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 역시 추가돼야 한다." "1940년대 말부터 상당한 정력과 자원이 극지極地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 중에서 미국이 600발의 탄도미사일 무기고로 삼기 위해 세운 그린란드 캠프센추리의 과학자들은 얼음 시료를 채취해 여러 가지 발견을 했다. 연구팀은 수천 년, 심지어 수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기후 조건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장기적인 기후 조건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02-4)


"1992년 합의되고 1997년 교토에서 조인된 새 의정서는 각국이 〈서로 다른 수준의 책임〉을 진다는 원칙(즉 먼저 공업화된 부유한 국가들이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는)을 제시했는데, 이런 추가적인 협상들마저 결함 있는 결과를 냈다. 미국은 수정 없는 교토 협정의 비준을 거부했다. 상원은 95 대 0의 표결로 이를 부결시켰다." "기후에 관해 올바른 말을 하면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지만 그에 관한 무언가를 실천하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한 것은 부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빌 클린턴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더 청정한 에너지 보급에서부터 자동차 효율을 개선(그 결과로 배출을 줄이는 것)하기 위해 업계와 협력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러나 의회의 정치적 분할을 감안하면 기후 변화가 문제라는 〈광범위한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말로 바늘구멍만 했다."(829-30)


24장 생태 한계의 끄트머리에서(1990년 무렵~현재)


"냉전의 몰락은 상업적 유대와 경제 성장을 더욱 부추긴 촉매재였다. 소련 붕괴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세계 기후에는 좋은 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곧 풍부한 자원이 정치적 신조와 아무런 상관없이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은 채로 세계 시장에서 판매될 기회를 제공했으며, 서방 기업의 소련에 대한 투자는 효율을 개선하고, 생산을 늘리며, 새로운 회사와 분야와 광산과 송유관에 자금을 대고, 세계 상품 가격에 압박을 가하는 데 한몫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되게 한 추동력을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과 뒤이은 카터 행정부 시기의 최혜국대우 지위 부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변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1990년대 초 중국 지도부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결정이었다." "변화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지표를 하나만 들자면, 1985년 중국에는 민간 자동차가 2만 대로 추산됐지만 지금은 2억 4천만 대 이상이 있다."(834-6)


"가장 중요한 환경 변화는 최근 수십 년 사이 인간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게 된 방식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도시와 도회 지역은 기후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천이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교환 속도를 높이게 되지만, 도시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의 중심이다. 도시 주민은 음식, 물, 연료가 필요하며 그것은 먼 곳에서 가져와야 한다." "운송은 세계 에너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의 약 4분의 1의 원인이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더하다. 미국 전체에서는 배출의 약 29퍼센트,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배출의 약 41퍼센트를 차지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 수치는 2050년까지 70퍼센트로 올라갈 전망이다. 현재의 인구 추세를 감안하면 이는 앞으로 30년 안에 도시에 사는 인구가 25억 명 더 증가한다는 얘기다. 이는 필시 온갖 종류의 자원 수요에, 자연적이고 비자연적인 기반시설에, 탄소와 온실가스와 열기의 배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842-3)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10~2020년은 1880년대에 근대적인 기록 관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따뜻한 10년이었다. 과거에 특히 춥거나 더운 시기를 포함한 시대가 여러 번 있었지만(소빙기, 중세 기후 최적기, 로마 온난기 같은), 이들 경우는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이나 일부 지역, 심지어 한 대륙이나 일부 대륙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난 150년은 전 세계가 거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 지구의 98퍼센트 지역에서 20세기는 지난 2천 년 중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시기였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연한 일도 아니다." "인구 증가, 도시화의 진행, 새로운 생산 및 운송 기술과 함께 더 빈번해진 상거래는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많은 에너지 수요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영향력 있는 작가 데이비드 월리스웰스가 말했듯이 탄소 기반 연료 연소의 약 85퍼센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1989년 이후의 것이다."(854-6)


"지구 온난화를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인 섭씨 1.5도로 묶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쩌면 이미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최근 연구는 현재의 전망치들에 근거해 세계의 평균 온도 상승을 파리협정의 목표대로 묶어둘 수 있는 가능성을 0.1퍼센트로 보았다." "세계 주민의 약 30퍼센트가 현재 이미 연간 20일 이상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후 조건에 노출돼 있다. 온실가스 배출이 극적으로 감소하더라도 2100년에 그것은 50퍼센트 가까이로 올라가고, 배출이 계속 증가할 경우에는 75퍼센트 가까이로 치솟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지역은 대개 값싼 노동력과 느슨한 환경 규제에 이끌려 고소득 국가에서 옮겨온 제조업 때문에 높은 수준의 공해로 고통을 받은 나라들이다. 1970년에서 2017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2조 5천억 톤 가까운 자재가 추출된 것으로 평가됐는데, 고소득국가가 그중 75퍼센트를 사용하고 중저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는 합쳐서 1퍼센트 미만을 사용했다."(869-71)


결론


"화석연료에서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자원과 물질에 대한 압박을 증가시킬 수 있는데, 이는 명목상 탄소중립 기술로 전환한다는 사실에 들떠 쉽게 간과될 수 있다. 따라서 풍력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 옮겨간다는 천명된 의도는 가상하지만, 세계 에너지의 4분의 1을 이런 방식으로 생산하려면 적어도 4억 5천만 톤의 강철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다시 6억 톤 이상의 석탄에 해당하는 화석연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마찬가지로 많은 나라, 주, 도시에서 전기자동차(EV)로 전환하는 것은 충전과 재충전 때문에 전기 수요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전기자동차가 높은 수준의 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사실 합성 차바퀴는 미세플라스틱의 주요 원천이다. 차바퀴와 자동차 제동기 같은 비연소非燃燒 근원에서 나온 700만 톤 가까운 입자들이 매년 방출된다. 실제로 자동차 바퀴는 오늘날 자동차의 배기가스보다도 훨씬 많은 입자 오염을 초래한다."(884)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도전은 여러 가지로 인류 초기의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주위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떠받치는 기후가 우리의 존재를 틀 짓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고, 우리가 자연을 변형시키고 개조하면 모든 장애물과 장벽을 누그러뜨리거나 우회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자신감에는 희생이 따른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땅의 40퍼센트가 지금 지력이 떨어졌다. 현재의 속도대로라면 2050년까지 남아메리카만 한 크기의 지역의 지력이 떨어질 것이다. '생태용량 초과일'(매년 자원 소비가 지구의 재생 능력을 넘어서는 날을 표시하는 추상적인 기준점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지속 가능성 쪽으로 모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은 한 해 중에 계속해서 더 이른 시기로 당겨져, 1990년대에 10월 무렵이던 것이 2022년에는 7월 말이 되었다."(896-7)


"환경 요인(기후 포함)은 인류 이야기에서 행위자(때로 개입을 해서 제국을 멸망시키고 사회 붕괴를 일으키고 불시에 사람들을 붙잡아가는)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펼쳐지는 무대 자체를 제공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를 규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공연장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주인공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만) 생각하기 일쑤다. 무대장치 자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배우는 왔다가 간다. 그러나 극장이 문을 닫거나 무너지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종말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 연료를 태우고 삼림을 벌채하고 지각에서 광물을 떼어내는 사람이 줄어들면 인간의 발자국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공상적인 과거의 지속 가능하고 푸른 낙원으로 한발 더 다가설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역사가는 이에 대해 내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897,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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