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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평점 :
서론
1장 태초 이후의 세계(대략 45억 년~대략 700만 년)
# 태초에 벌어진 주요한 생명 탄생/소멸 과정
1. 약 30억 년 전(또는 그 이전) ~ 23억 년 전 무렵 산소대폭발(GOE)로 복합 생명체 등장을 위한 조건 형성
2. 약 5억 7천만 년 전에 시작된(화석 기록에 따르면) 복합 다세포 생물 출현(대표적으로 삼엽충)
3. 약 4억 4400만 년 전(오르도비스기Ordovices期) 갑작스러운 냉각으로 한 차례 멸종 파동
4. 약 2억 5200만 년 전(페름기-삼첩기三疊紀, 트라이아스기) 거대한 화산폭발로 대멸종
5.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소행성 또는 행성 충돌(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거대한 화산 분출과 함께)로 공룡 멸종
"대규모 변화를 초래한 가장 파멸적인 사건조차도 우리가 현대 지구촌 생태계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칙술루브 충돌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열대우림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충돌 이전에 열대림의 나무들은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서 빛이 숲의 바닥에 닿았다. 충돌 이후에는 나무들이 좀 더 밀집해서 자랐다. 아마도 대형 초식동물들이 멸종한 결과였을 것이다. 햇빛도 더 차단되고, 박테리아와의 상호작용 덕분에 공기 중에서 질소를 얻는 콩과식물도 번성할 수 있었다. 충돌로 인해 생긴 강하회降下灰는 지구 생태계에 풍화가 쉬운 인광燐鑛을 보태주었다. 그것은 다시 토양의 비옥도와 숲의 생산성을 자극하는 데 필요했다. 이는 또한 침엽수 및 양치식물과 대비되는 꽃식물의 상대적 이점을 높여주었다. 이에 따라 생물 다양성의 급증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고, 오늘날 탄소 순환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광대한 우림 지대를 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67)
"대략 2억 5천만 년 전에 시작된 초대륙의 해체와 여러 대륙의 형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지도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후 조건 변화는 대략 560만 년 전의 '메시나기Messina期 염분 위기'를 초래했다. 그 결과로 지중해 물의 증발에 의한 건조가 일어나고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 사이에 동식물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30만 년 후 대서양의 물이 지브롤터해협을 통해 들어오고 지중해 해분海盆이 급속하게 물로 채워질 때까지 지속됐다. 이 사건이 '잔클레Zancle 홍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대륙의 균열 및 충돌, 그리고 큰 대양 해분의 변화가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탄화수소 광상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 세계 27개 핵심 지역에 무리지어 있는 877개의 거대 유전 및 가스전(매장량이 5억 배럴 이상인 곳들이다)의 거의 전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인위적 요인에 의한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공해는 모두 수억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71)
"지질상의 행운이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비슷한 여러 다른 일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1억 4500만 년 전에서 6500만 년 전 사이의 백악기白堊紀 동안에 세계는 지금에 비해 훨씬 온난했고 해수면도 훨씬 높았다. 수많은 죽은 해양 미생물들이 퇴적층을 이루고 그것이 결국 유층油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다른 결과들도 낳았다. 미국 남부에서는 세계가 추워지고 해수면이 내려가면서 멸종된 플랑크톤과 기타 해양 생물들로부터 거대한 백악층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매우 비옥한 땅뙈기들로 이어졌다. 특히 비가 내려 영양분이 적은 탄산염 광물을 용해시킨 뒤에 말이다. 비옥하고 검은 흙으로 인해 블랙벨트Black Belt로 알려진 미국 동남부 주들의 활 모양의 지역은 집약 작물, 특히 면화 생산에 이상적임이 입증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아프리카인들의 집중 주거지가 되었다."(73)
2장 인류의 기원(대략 700만 년~서기전 12000년 무렵)
"인류의 확산과 정착은 무엇보다도 생태적으로 온화한 지역을 찾아내는 일에 의해 좌우됐다. 이는 따뜻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에서부터 사바나 초원과 해산물이 풍부한 해안 지역까지 여러 종류의 주거지를 포함했다. 물론 아주 탁 트인 환경은 고의적으로 회피한 듯하다. 특히 매력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가 지중해 해안과 요르단 열곡裂谷 주변 사이의 좁다란 삼림지대였다. 물의 공급이 안정적이고 비교적 쉽게 야생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유라시아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네안데르탈인도 같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무덤과 유골 및 치아 잔편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역시 그곳에 살았던 현생인류와 피를 섞었다는 흔적도 있다. 생존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었음은 다음 사례가 입증한다. 대략 7만 3천 년 전, 매우 건조하고 빙하로 뒤덮여 힘겨운 시기여서 레반트의 주민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원인은 아마도 지금의 인도네시아 토바산의 거대한 분출이었을 것이다."(86-7)
"1만 9천 년 전 무렵의 해빙은 새로운 일련의 환경 변화를 초래했다. 북아메리카 일대의 빙상이 녹기 시작해 대홍수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급의 홍수였으며, 그 경로는 지각의 뒤틀림과 기울어짐에 의해 정해졌다. 그 과정에서 땅의 고도를 수백 미터씩 변동시켰다. 수천 년 만에 북반구의 빙상과 빙하가 물러나자 그 결과로 막대한 양의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해수면이 크게 올라갔다. 평균 80미터나 되었다. 육상 및 해양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었으며,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방출돼 대기로 들어갔다." "환경 및 기후 조건의 뚜렷한 호전이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는 물론이고 중·남아메리카 전역에 성공적으로 이주하고 영구 정착했다는 훨씬 많은 증거들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집단들이 남쪽을 향해 나아갔던 한 가지 요인은 빙하시대 이후의 온난화가 남반구 지역에서 시작돼 그 지역이 더 쾌적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95-7)
"1만 2900년 전 무렵에 일어난 새로운 기후 충격은 장기간에 걸친 온난화 과정을 갑작스럽게 역전시켰다.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로 알려진 이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연하게도 동물상 및 식물상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이번에도 사냥과 기후의 압박, 또는 그 둘의 결합이 원인이었다." "레반트에서는 보다 엄혹한 여건에 대한 대응으로 상주 또는 반상주 주민이 사는 작은 정착지들이 건설됐다. 그런 변화는 자원과 기술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을 테지만, 식량 부족과 압박이 심해지는 시기에 다른 집단들을 상대로 안전과 방어의 필요에 대한 공동의 해법 구실도 했을 것이다. 정주생활은 또한 야생 곡물이 나는 땅을 보호하고 가장 좋은 장소가 남들에게 탈취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종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1860년대에 프랑스의 고생물학자 폴 제르베가 이 시기에 대해 처음으로 전신세全新世(홀로세)라는 이름을 붙였다."(98-101)
3장 인간과 생태의 상호작용(서기전 12000년 무렵~서기전 3500년 무렵)
"전신세는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훨씬 좋은 기후 조건의 시작을 의미했다. 우선 대략 1만 년 전 무렵부터 변화가 일어나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 기후 패턴의 시기가 시작돼 충격의 횟수와 빈도가 줄었다. 물론 대륙 사이 및 대륙 내부에서 지역에 따라 큰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온은 상승했고, 강우량도 늘었다. 결정적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 또한 마지막 극대빙기에 비해 급증했다. 그때는 농도가 너무 낮아 광합성이 제한적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초목을 식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지속성,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했다. 한 영향력 있는 연구 보고에서 말했듯이 전신세 이전에 농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작 이후 완전히 그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학자들은 또한 사냥과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대형 동물의 수가 즐어든 것이 보다 고정된 곳에 있는 식량의 원천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고 주장한다."(107, 110)
"곡물을 갈고 가공하기 위한 더 무거운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은 인간 신체에 더 큰 부담을 주어, 농작물 경작이 더욱 확산되면서 골관절염 환자 증가로 이어졌다. 또 곡물 탄수화물의 당분은 치아 법랑질을 손상시켜 충치 발생률 증가로 이어졌다. 치아 건강의 악화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아마도 다산과 그로 인한 호르몬 분비의 불규칙성, 임신 중의 면역력, 임신 중 및 그 이후의 타액 성분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6000년 무렵의 황소 이용(처음에는 탈곡에 이용했다)은 중요했다. 시간과 에너지가 늘어난 셈이어서 인간 노동력에 대한 압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식량 소비를 크게 늘리는 바탕을 제공하는 데 이바지했던 것이다. 대형 동물을 농업에 이용한 것은 수레와 쟁기 같은 혁신을 자극했고, 그것이 생산을 더욱 늘리는 데 이바지해 더 많은 땅을 빨리 경작할 수 있게 해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이로 인해 사회 불평등(성 불평등을 포함한)의 씨앗이 뿌려졌다."(116)
"인구 밀도 상승에는 반대 급부가 있었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더 큰 생물학적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세균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배설물 오염과 열악한 위생시설 같은 것들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와 기생충이 확산되기 쉬운 상황도 마찬가지다. 저장된 식량 자원은 설치류를 불러들였다. 그것은 동물원성 질병(즉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질병)의 중요한 매개자였다. 소, 염소, 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인구 증가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구 재생산이 질병으로 인한 유병과 사망의 감소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염병균이 번성하는 공동체에는 희망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들은 흔히 단기적으로 맹위를 떨치지만 반복적인 발병은 결국 주민들을 '질병 유경험자'로 만들고 잦은 노출 덕분에 부분적인 면역이 생기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기후 조건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수 있게 하거나 인구 규모가 외부 이주를 필요로 할 때 장기적인 이점을 제공했다."(117)
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서기전 3500년 무렵~서기전 2500년 무렵)
"영구 정착지 건설에는 개인 소유에 대한 관념의 형성이 필요했다. 동산 및 부동산, 땅과 거기서 나는 자원에 대한 접근권 및 통제권 같은 것들이다. 고대와 현대 세계의 사회적 위계의 발전과 존재는 흔히 도시라는 무대와 관련이 있고, 무엇보다도 재산 소유권(경지든 작물이든 가축이든 물건이든)과 관련이 있었다. 그 적절성은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높아졌다. 부의 축적과 양도는 사회 지배층을 형성할 수 있게 했고, 이에 따라 정치 구조와 의사 결정을 규정지었다. 부의 불균형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도시화된 주민이라는 표시였다." "일부 학자들은 높은 지위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역할이 도시가 더 크고 더 효율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토지 소유권을 장악하고 가축을 소유하고 생산을 통제한 지배 계층은 자기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장려책을 제공함과 아울러 강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도시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정치 구조를 좌우했다."(135-7)
"환경과 천재지변은 특히 '교화의 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일 수도 있고 그저 심심해서일 수도 있지만 일탈과 명백한 존경심 결여에 대한 벌을 내렸다. 눈에 띄는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 사실은 기상 조건의 변화(가뭄이 가장 중요하지만 홍수나 폭풍우도 마찬가지다)에 취약한 지역들에서 '교화의 신들'에 바탕을 둔 우주론 체계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 신들은 그런 사건들을, 벌을 주고 자기네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교훈을 주는 데 사용했다. 화를 잘 내고 인간에게 재앙을 잘 내리는 신들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문학 및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문학과 종교 행위에서 나타나듯이 여기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파괴와 처벌이 아니었고, 좀 더 추상적이고 평화적이었다. 한 학자는 초기 중국인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신들과 다투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도 〈생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다툴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39-40)
"통제를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도시 주위에 성벽을 쌓는 것이었다. 초기 도시 성벽은 적어도 일부 경우에는 환경적 요인(특히 물과 홍수)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건설됐다는 주장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방어용 요새 구실을 하는 기능을 떠맡았지만 말이다. 최근 지적된 바 있듯이 우르크 같은 곳의 도시 성벽 규모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군사적 요구에 비해서도 훨씬 컸다. 그래서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건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집트에도 그 자연스러운 짝이 있다. 이곳에서는 군사력에 대한 투자와 지출이 왕의 위신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주장(서로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은 성벽이 노동력 공급을 일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곡물 공급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존재하도록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도시 자체의 장기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142-3)
5장 분수에 넘치는 삶의 위험성(서기전 2500년 무렵~서기전 2200년 무렵)
"기후 자료는 〈아카드의 저주〉로 알려진 '증발 사건' 가설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홍해 북부의 퇴적물은 북대서양진동(NAO)이나 태양의 변동성과 관련된(아마도 그 둘 모두와 관련된) 서기전 2200년 무렵의 환경 변화를 보여준다. 오만 앞바다의 화석화된 산호는 모래폭풍이 불었던 오래 끈 겨울철을 보여준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난 듯한 흉작과 연결돼 있었다." "이 순간은 심지어 메갈라야기Mehalaya期의 시작으로 명명되었다. 산소 원자동위원소의 변화가 특히 계절풍 강우의 감소를 드러낸 인도 동북부의 한 동굴이 있는 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국제층서위원회(ICS)에 따르면 서기전 2200년 무렵의 기후 변화는 대가뭄을 촉발했고, 그것이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문명 붕괴를 일으켰다.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인더스강 유역, 창장 유역 같은 곳들이다. 따라서 서기전 2200년은 지질학사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이었다."(157-8)
"그러나 기후 패턴 변화는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일어나며, 고고학 자료는 결정적이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사실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은 나람신이 이끈 군사·행정 개혁이 아카드를 성공적인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카드의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붕괴의 원흉이라기보다는 제국 중앙의 강화를 지휘한 사람이었다. 재난을 아람신의 탓으로 돌린 것과 〈아카드의 저주〉를 구상한 동기는 환경의 압박과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대해서보다는 왕권의 본질과 무엇보다도 지배자와 신들의 관계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 후대 수메르인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후대에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들에게 불경스러우면 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람신은 니푸르의 에쿠르 신전에서 신을 모독했으며 스스로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신들은 자애로울 수 있지만, 그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겼다."(165)
"기근과 질병은 거대한 자연재해에 비해 더 흔하기도 하고 더 파괴적이기도 하며, 대개 인간의 오판이 빚은 결과다(현대의 믿음과는 반대다). 아카드 제국의 경우 문제는 상당 부분 확장하고 앗아가는 제국 영역의 현실과 끊임없는 중앙집권화가 정치적 분열과 균열, 심각한 공급 문제로 이어진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위태로운 균형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근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란과 사회적 격동이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점은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상당한 기후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느냐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 지배층, 사제, 관료, 노동자가 적응(특히 커지는 환경 압박에 대해)을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선택과 조치가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느냐다. 결론적으로 기후가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렸다기보다는 아카드 제국이 스스로 무너져 새로운 도시국가 무리 속으로 쪼개져 들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167-8)
6장 첫 연결의 시대(서기전 2200년 무렵~서기전 800년 무렵)
"흥미롭게도 역사가들은 흔히 제국, 왕국, 국가의 붕괴나 쇠락에서는 기후의 역할에 대한 논의에 곧바로 뛰어들면서도 통합, 팽창, 개화의 패턴에서는 그것을 주저한다.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위기 이후의 긴 기간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는 놀라울 것이 없다. 대규모 영구 정착지가 있는 주요 지역은 환경적·생태적으로 인구를 부양하기에 적합한 곳이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성장을 용이하게 하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취약하지 않은 환경은 또한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역으로 왜 다른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 중국의 일부 지역, 남아메리카 서북 변경 등이 서기전 2200년 이후 1천 년 동안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 동남아시아와 서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말라리아가 인구 규모를 늘리는 데서 제동 장치 역할을 했다. 다른 곳에서 매우 중요했던 종자, 곡물, 식품을 얻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184-5)
"대규모 화산 분출 같은 일회성 사건들이 극적이고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게 보아 진짜 문제는 홍수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장기간의 가뭄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인구 하중荷重이었다. 계속해서 흉년이 들 때 먹여야 할 입이 많으면 문제가 된다." "물론 약점은 주로 개개 도시의 규모에 있었다. 궁핍할 때 가장 취약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도시 정착지는 또한 잠재적 위기의 핵심이었다. 불만에 차고 굶주리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봉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또는 얼마 전에 편입된 민족들이 봉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특히 군사적으로 정복된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변경에 위치한 지역은 멀리 떨어진 중앙의 지배에 의해 잃을 것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과 해법을 제시하는 독자 세력이 가장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186-7)
"긴밀한 연결은 갑자기 해법의 일부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뒤집힐 수 있다. 상호의존은 취약성이 쉽게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고 통제를 벗어난 듯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붕괴의 단일한 주요 원인을 규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염의 원리다. 관계망의 한 부분의 문제(흉작 때문이든 지진 피해 때문이든 혈족 사이의 내분 때문이든)는 장애와 혼란, 심지어 관계망 전체의 체계 와해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 고도의 장거리 교역망 또한 상호의존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계망이 붕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회 구조, 국가, 제국이 흔들리고 심지어 붕괴할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지역과 역사의 여러 시기에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그 한 사례는 수백 년 후 서유럽의 로마 제국 멸망이다. 대단치 않은 압박이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역사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암흑시대'가 되었다. 20세기 말 소련 진영도 거의 하룻밤 사이에 해체됐다."(187, 190)
7장 자연과 신에 대한 관심(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환경 악화, 자원 과소비, 지속 불가능한 인구 유지 부담의 위험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일례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가장 이른 점토판인 고古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은 서기전 17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생태 경계를 그 한계 너머로 밀고 나아가는 데서 오는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인구 과잉은 엔릴 신을 짜증나게 했다. 그는 〈그들이 내는 소움을 들어야〉 했고, 곧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했다. 불평이 지속되자 신들은 그 문제를 직접 처리하기로 하고 사람들 대다수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어느 정도 평화와 정숙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극심한 가뭄을 내려보냈고 그것이 기근을 초래했다. 그 밖에도 과도한 소음과 과도한 사람 수에 대한 다른 '해법'들도 있었다. 일반 질병과 전염병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극적인 시도는 대홍수였다. 고고학 증거로 입증됐고, 아마도 후대의 이집트 기록의 바탕이 되고 성서에도 나오는 사건이었다."(195-6)
"수백 년(혹은 수천 년)에 걸쳐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농업이나 건축이나 정치 구조나 경제 등에서 연속성도 있었다. 그런 연속성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에 있다. 각 사회는 개별 신에 대한 숭배, 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조언과 경고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개입하려고(특히 기후 및 그 변덕과 관련해서) 노력하는 데서는 접근법이 매우 비슷했다. 천문 일지는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상 현상을 식별한 뒤 그것을 이해하려는 틀을 만들기 위해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 해석하는 일은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선지자와 사제들이 담당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들의 변덕과 의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징후와 조짐을 설명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황제 요堯 역시 〈천문 담당관에게 일출과 일몰, 항성과 행성을 관찰하고 366일 태양태음력을 만들며 윤달을 계산〉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202, 207)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3세기까지 황허강과 창장 유역, 지중해 동부, 레반트, 갠지스강 유역의 철학, 종교, 행동이 정립되고 재정립된 정도와 그 파장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추축시대Achsenzeir'로 묘사했다." "다른 학자들도 이 시대를 '문화적 결정화結晶化'의 시대, '초월시대'였다고 주장했다. 〈물러나서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 묘사된 새로운 능력이 특징이었다." "중요한 것은 문헌의 급증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보존·전파·복제였다. 목록, 설화, 경전과 기타 기록물들이 정보 뭉치를 형성해, 그것을 배우고 토론하고 추가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도시화와 풍요의 수준이 높아진 일이었던 듯하다. 물질적 보상이 자기수양과 이타심이라는 변화를 자극했다. 이는 서기전 6세기 무렵 꽃을 피운 여러 신앙 체계를 통틀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동아시아의 공자와 노자 등의 가르침이 그랬다."(226-7)
8장 스텝 변경과 제국들의 형성(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서기 1200년 무렵, 말을 다루고 조련하고 기르는 기술이 갈수록 정교해지면서 식용으로의 의존도와 경제적 이용이 모두 증대했던 듯하다." "말 사육이 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몽골까지 뻗어 있는 개방된 스텝 지역이 특히 건조했던 시기에 시작되고 극적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돼왔다. 그들은 목축을 통한 생계유지와 음식, 단백질, 우유의 공급원이자 노동력 보충을 위해 말에 의존한 것은 기후조건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목초지가 필요해졌다. 정착 형태도 반半정주적인 것에서 보다 분산 수준이 높은 형태로 크게 바뀌고 이동의 빈도도 높아졌다. 동위원소 자료는 반추동물이 정착지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풀을 뜯은 것과 달리, 말은 스텝을 가로질러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음을 시사한다. 이런 변화들은 사상, 신앙, 의례의 확산과 상품 및 기술의 교류를 촉진해 장거리 접촉망을 형성하는 데 중요했다."(238-9)
"물론 정주 사회와 유목 사회의 관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상호의존성이었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산물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소비자들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이런 필요는 단일하지 않았고, 그것 자체도 현지의 요구와 취향과 기후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우유와 채소는 중앙아시아에 비해 서아시아 일대에서 식료품으로 더 중요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고기 소비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의 패턴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목축민들은 식료, 자재, 상품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사치품과 사회 위계 및 부족 지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유용한 핵심 요소가 되는 물건의 원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지위를 과신하는 데 사용하고, 자기 가족이나 친족 집단, 더 넓게 관계망을 상대로 사여했다. 초지는 집단의 공동 소유였지만, 동물은 개인의 소유였다. 그 결과로 위신은 가축의 구성이나 규모를 통해서 과시할 수 있었다."(243-4)
"인도는 일찍이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가 '제국이 없는 곳'으로 묘사한 지역이다. 특정 시기의 분명하지만 단명한 예외가 있기는 했다. 서기전 3세기 아쇼카 대제 치하 또는 500년 후 굽타 왕조 치하 같은 경우다. 그러나 대체로 말해서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 그렇게 중요했던, 그리고 말 사육과 정치적 경쟁에 의해 가속화된 합병, 팽창, 중앙집권화의 동력원은 인도아대륙에서는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생태적 요인이 여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변동이 심한 기후 패턴에 따른 강의 불안정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강들은 자주 토사가 쌓이고, 수심이 깊은 수로가 막히며, 강의 삼각주가 예측할 수 없게 형성된다. 메콩강과 이라외다강은 하구에서 매년 50미터씩 육지를 넘어 확장된다. 자바섬과 솔로강은 라인강의 여섯 배나 되는 퇴적물을 나른다. 이 때문에 도시 생활은 위태로웠다. 동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도시 정착지들은 자주 붕괴하고 버려졌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말이다."(251)
9장 로마의 온난기(서기전 300년 무렵~서기 500년 무렵)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성취를 사회, 경제, 군사, 문화의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상이한 언어가 사용되고, 다양한 종교가 신봉되며, 다양한 관습이 받아들여지는 느슨한 정체성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로마와 그 시민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에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들에 비해 더 잘 조직되고 곤경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들은 남들에 비해 우호적인 상황을 잘 이용했다. 기회를 잡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뛰어났다. 요컨대 로마는 그 모든 경쟁자들과 잠재적 경쟁자들을 압도했기에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운이 좋았다. 우선 지중해가 다른 주요 바다나 수계에 비해 고요하고 건너는 데 덜 위험했다는 사실은 전체 연안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돈이 덜 들고 덜 위험했다는 애기다. 더욱이 연결망이 확장되거나 추가될 기회가 제공돼 교역이 증가하고 지적 지평이 넓어지며 공통의 문화적 가치가 확산됐다."(271-2)
"기후 조건도 로마가 이웃, 한 칸 건넌 이웃, 더 먼 이웃들과 대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이례적으로 좋았다. 여기에는 서기전 2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습도가 높았던 긴 기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그리스 및 페니키아 식민지의 확대, 그리고 로마 및 카르타고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이 시기는 '로마 온난기'(또는 '로마 기후 최적기')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는 350여 년 동안 지속됐다. 정확히 로마가 지중해, 유럽,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안에서 최강자로 떠올랐던 시기다. 이 시기는 지난 4천 년 중에서 단연 가장 습한 시기(꽃가루 및 바다와 호수 생물에서 나온 유기물 증거로 알 수 있다)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4천 년의 지중해 역사에서 단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그것은 다시 인구 증가, 정복을 위한 인력, 안정성을 개선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자들이 자기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했다."(272)
"이 시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제국의 시대였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제국은 흔히 이웃하는 세력권들이 서로 경쟁하고 모방하고 위협받는 상황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팽창 과정이 일반적으로 기후 조건이 유리한 시기에,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긴 안정기에 일어난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제국 출현을 기후 때문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정치체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과 물류상의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각 제국은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반응에 직면했다.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단일 문자 체계와 제한된 언어의 다양성이 화합과 제국 핵심의 강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로마 영토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많은 언어가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사용됐다. 로마의 경우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 더욱 인상적이었다."(275)
"로마는 하나의 유용한 사례 연구를 제공한다. 모든 제국, 국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성공이(그리고 도시화도) 막대한 환경 훼손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상품, 사람, 관념이 중심부로 몰려들면서 천연자원에 부담이 가해졌다. 그것들을 원거리에서 가져다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소비자와 산업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추산은 쉽지 않으나 수십만 명에 이르는 로마 같은 대도시의 주민들에게 난방과 음식과 물자 등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데는 분명히 실제상으로나 물류상으로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벽돌, 주화, 기와, 유리 제품, 철제 도구〉는 장작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다. 로마 전성기의 에너지 생산 규모는 그렇게 컸기 때문에 그린란드의 얼음에 들어 있는 납 미립자가 공업혁명 시작 이전의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많았다. 모든 제국은 생태발자국을 남긴다. 로마의 그것은 엄청났다."(277, 281)
10장 고대 말의 위기(500년 무렵~600년 무렵)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썼다. 〈홍수, 전염병, 흉작, 또는 그 유사한 원인에 의해 때때로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며, 이에 따라 예술과 사회 제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사라졌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런 재난은 인류에게 종종 닥쳤으며, 다시 일어나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라도 인간 집단은 회복하고 〈마치 처음부터 시작하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훌륭하며, 공정하게 말해서 대체로 옳다. 그러나 어떤 재난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심하며, 때로 그것이 가한 파괴의 규모가 파멸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6세기 전반에 잇단 기후 관련 현상들이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규모의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 치명적이었던 것이 530년대와 540년대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분출이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530년대와 그저 추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시기는 전신세에서 가장 추운 때였다.〉"(308-9)
"학자들은 이 화산 폭발들 및 그와 연관된 기후 충격이 연쇄적인 사건들의 시작이라고 흔히 생각했다. 〈동로마 제국의 변화, 사산 제국의 붕괴, 아시아 스텝과 아라비아반도 바깥으로의 이동, 슬라브계 민족들의 확산, 중국의 정치적 격변〉 같은 사건들이다. 이것들은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변화와도 관련이 있고 또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일어나고 광대한 아라비아 제국을 건설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 활동과 그 영향에 대해, 거대한 일련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혁명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기존의 문제를 악화시키고 당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던 파열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예를 들어 식량 부족은 수확량 감소와 함께 인구 압박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격변기의 수혜자가 더 잘 적응하거나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사회·민족·문화였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311-3)
"이례적으로 추운 날씨는 쥐의 생존과 벼룩 번식에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함에 따라 전염병 발생을 야기했다. 흉작을 메울 필요 때문에 지중해를 건너는 식량 수송이 늘었고, 그렇게 늘어난 접촉은 다시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을 초래한 연결망의 강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햇빛 감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면역 체계와 특히 세균 감염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비타민 D 결핍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요인들이 이제 대규모 전염병이 유행하는 데 완벽한 조건을 조성했다."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주민들에 대한 유전자 연구는 그들이 자가염증성 질환에 민감하게 하는(그 결과 페스트균에 저항력이 강한) 돌연변이를 보여주었다. 재구된 그 유전체는 유스티니아누스 전염병, 1340년대의 흑사병, 그리고 그 후에 계속 나타난 전염병들과 일치했다. 6세기의 발병이 유전체에 새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유행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염에 널리 노출된 결과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318-20)
11장 제국의 전성기(600년 무렵~900년 무렵)
"아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의 나이테와 남·북극의 얼음 시료 증거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626년에 대규모 화산 분출이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남극 자료에 징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 화산이 북반구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북부 그린란드에서 기록된 이 분출의 황산염 변이가 지난 2천 년 동안의 최대치(18세기 말의 라키 화산은 제외하고)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후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다른 곳도 마찬가지다)의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재구에 따르면 한창때에 섭씨 3.4도가 내려갔다." "압력과 위험을 늘려가는 일련의 환경에 직면해 취약함을 드러내는 곳은 정주 사회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이례적으로 추운 시기에는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금세 죽어나간다. 그런 재난은 종종 경기 부진에 기인한 사회적 영향을 촉발했다. 빈곤 증대와 대량 이주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 붕괴는 급속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331-2)
"이런 엄청난 변화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무함마드라는 젊은 상인이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운동 및 추종자들은 전쟁과 질병으로, 경제 위축으로, 그리고 붕괴하는 정주민 국가들과 유목민 연합(전자는 탈진했고, 후자는 끈이 풀어지고 있었다)의 세계 질서에 의해 생채기가 난 세계에 등장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 동반자들은 절묘한 정치적 합의로 메카의 지배층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과거 이교도 사당이었덤 카바가 이 도시의 핵심으로 지정됐다. 이것이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었고, 공통의 정체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 정체성이 제공하는 우산 아래 지역의 서로 다른 모든 민족들이 모일 수 있었다. '후다이비야 화약和約'으로 잘 간직된 이 합의는 메카, 그 주변 지역, 그리고 무함마드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세계사에서도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335-6)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의 나이테 기록, 아랄해의 염도 수준, 북대서양진동이 매우 활발해진 쪽으로 변화했음이 관찰된 것 등으로 판단해볼 때, 800년 무렵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더 춥고 더 습한 조건에서 더 따뜻하고 더 건조한 조건으로의 추세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기한 문제는 오아시스 정착지 수의 감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착지는 이후 수십 년 사이에 거의 70퍼센트가 줄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란 서부와 유프라테스강 범람원에서 도시와 마을, 농경지가 버려진 사실을 보면 분명한 듯하다. 기후 변화에 더해진 것은 토양 염분의 급속한 증가로 인한 생태계 압박이었다." "이 문제는 800년 무렵 부유한 지배층이 자위, 연줄, 정치적 압력을 동원해 토지 소유를 성공적으로 늘려가기 시작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그들은 조세 체계와 수자원 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희생시켜 단기적인 이득을 가져왔다."(351-2)
12장 중세 온난기(900년 무렵~1250년 무렵)
"역사가 휴버트 램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기후가 눈에 띄게 따뜻했던 서기 1000~1200년 무렵을 '중세 온난 시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후 수정을 거쳐 지금은 학자들이 보통 '중세 기후 이변' 또는 '중세 온난기'로 부르고 있다."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대서양을 건너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로 진출한 것은 또한 극지 빙모의 퇴각(이제 얼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종의 북방 이동, 육상에서의 초목 재배에 적합한 조건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북대서양으로 진출한 것은 지역 교역망 및 지식 연결망뿐만 아니라 장거리 교역 역시 강화하는 더 넓은 활동의 일부였다. 동쪽과 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졌고,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은화가 우선은 노르드인의 땅과 발트해 지역에서, 이어 다른 곳들에서 유통되었다. 이런 활동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어우러져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식용 동물 사냥과 교역도 마찬가지였다."(363, 369-71)
"서기 800년 무렵부터 서태평양 난수역暖水域의 해수면 온도가 갑작스럽게 낮아지고 강우대降雨帶가 북쪽으로 밀쳐졌다. 바누아투, 사모아, 통가, 피지가 있는 다도해의 습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과거 2천년 중 가장 건조한 시기가 되었다. 그보다 거의 1500년 전에 그곳에 정착한 이들 섬의 주민들은 그 이전에는 더 북쪽의 섬들을 탐험하려 하지 않았다. 설령 탐험했더라도 영구적으로 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착의 흔적이 거의(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기상 패턴의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람은 폴리네시아 변경으로 가서 탐험하는 일을 쉽게 만들었다." "방사성탄소 분석은 이주의 물결이 먼저 쿡제도로, 그 후에 동폴리네시아로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하와이, 라파누이, 뉴질랜드 사이의 넓은 구역이다. 여러 섬들이 잇달아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도 식민화됐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데려간 돼지 등의 가축이나,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쥐 등의 동물이다."(373-4)
"사회 및 환경의 변화는 900년 무렵 이후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분명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서 농작물 잉여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군도들 사이, 그리고 섬들과 남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교류가 증가했다. 이는 앤틸리스제도에서와 같은 도기 양식의 큰 변화로 입증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섬들 사이의 교류가 급격하게 증가한 징표로 해석됐으며, 또한 전통적인 신들(그들이 이전에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준 것이 이제는 좋지 않거나 심지어 잔인한 것으로 여겨졌다)에 대한 신뢰 상실에 따른 반응으로도 해석됐다. 그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이 다양한 동식물 종을 카리브해 여러 지역에 들여온 것이다. 그것이 변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이제 현지 주민들은 물고기, 게, 조류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들의 개체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 섬의 삼림이 벌채됐다. 섬에 처음 들어온 동식물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후 변화가 교류와 신앙 체계와 심지어 식습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것이다."(375-6)
"중세 초에 한 무리의 제국들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생겨났다. 그 적절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송宋 왕조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왕조가 등장해 성공을 반복했고, 그들은 서로 모방하고 영향을 미치고 경쟁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무리를 지어 등장해 직간접적으로 서로를 자극했다. 인도 촐라 왕조, 지금이 미얀마의 파간, 캄보디아의 앙코르, 인도네시아 열도의 스리위자야, 지금이 베트남의 다이비엣이 거둔 성공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인도양과 아시아 상당 지역 일대에서 지리적·상업적·문화적 지평이 급속하게 넓어진 것의 일면이었다." "서로 뒤얽힌 인도양 세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고대에도 아시아 여러 지역의 해안과 내륙을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유럽과 연결하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활동의 규모였다. 시야와 야망이 거창한 국가와 왕국의 등장은 규모와 물량 모두에서 눈에 띄는 상업적·문화적 교환의 속도를 과시했다."(384-5, 388)
13장 질병과 신세계의 형성(1250년 무렵~1450년 무렵)
"칭기즈칸의 성공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통제와 협박을 위한 도구로서의 극단적인 폭력의 선택적 사용, 새로운 목표물을 찾아내는 기동력 있는 정찰대의 조직력, 정보 수집에서의 뛰어난 집행력, 새로운 기술과 전술 채택(예를 들어 대포의 사용), 전쟁터에서의 최대한의 혁신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성공의 연료는 1211년에서 1225년 사이의 이례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시기가 제공했던 듯하다. 몽골에서 이 시기는 무려 1110년 이상 만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린 시기였다. 이런 기후 조건은 환경의 수용력을 크게 증가시켜 풀이 더 많이 자라게 하고 가용 초지를 극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가축 떼의 규모를 크게 늘리는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칭기즈칸과 그 추종자 및 계승자들은 전술적으로 뛰어났겠지만, 몽골은 행운을 만난 덕분에 방대한 자원을 이용해 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주 제때에 할 수 있었다."(406-7)
"동아시아에서 1260년대 이후의 100년 동안에는 평균 기온이 자주 떨어졌다. 1270년대, 1310년대, 1350년대는 엄혹한 기후 조건이었음이 한국, 일본, 중국의 여러 문헌 및 기후 자료들로 입증됐다." "흉년이 들면 수입이 줄고, 그것은 식량 배급과 재난 구제로 인해 더욱 힘겨워졌다. 이는 결국 황제가 귀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떨어뜨렸다." "늘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 불안이 이 시기의 일상적인 특징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영향은 14세기 초에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시대의 시인이자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을 따서 '단테 이상 기후'로 알려지게 된 급속한 기후 변화 국면이다." "이 충격은 북유럽 일대 여러 지역에서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군중을 이루어 프랑스 곳곳에서 광란을 벌였다. 그들은 성채, 왕국 관리, 사제, 나환자를 공격하고 1320년 랑그도크 일대에서 특히 유대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415-7)
"1336년에서 1339년 사이의 극심한 가뭄 현상은 일련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나이테연대학 기록으로 입증된 강우 부족 현상은 초목 면적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는 설치류 개체 수에 대한 압박(먹을 것과 물 공급 부족으로 사망률이 증가했다)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균을 옮기는 벼룩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전염병 전파자는 인간이었다. 몽골이 팽창에 의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가 만들어짐에 따라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촉진되고 교역로를 따라 빠른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연결은 융단이나 옷 같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적합했고, 그것은 벼룩, 진드기, 이가 확산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것이 감염을 촉진했다. 벼룩 등이 달라붙어 있는 사람과 동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식량, 구체적으로는 잡곡의 장거리 이동은 마찬가지로 '꼽사리' 설치류, 그들과 동반하는 기생충, 그리고 세균 자체를 위한 완벽한 조건을 제공했다."(421-3)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득이 있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카드, 수레, 말, 황소, 노새, 배, 헛간, 곡물 창고〉가 더 많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전염병 덤'이었다. 역설적으로 기후의 출렁임, 흉작, 장거리 교역에 대한 의존, 격렬한 전쟁, 질병 환경의 변화가 세 대륙에 걸쳐 공동체들을 초토화시킨 조건들을 낳았지만, 종종 장기적인 성장의 촉매제 역할도 했다." "몽골 제국의 건설,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상업적·문화적 연결의 강화, 매우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난 광범위한 대유행병 이후의 시기는 길고도 완만한 통합의 시기의 서막이었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확립된 정치적 중심지와 그곳들을 한데 묶은 연결망의 지리적 주변부에 있던 국가와 민족들이 팽창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거의 글자 그대로 말이다."(437-9)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1400년 무렵~1500년 무렵)
"흑사병 이후에 여러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이 유럽으로 팽창한 것은 다른 종류의 보상을 제공했다. 대륙 일대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단합이 이루어졌다. 유럽 왕국들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초부터 최소한 1600년까지는 갈등이 50퍼센트 이상 줄었다. 이는 오스만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 종교개혁 및 개신교-가톨릭 공동체의 분열과 시기가 겹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오스만의 군사적 능력과 이슬람교 및 튀르크인의 팽창을 뒷받침할 동력은 교회의 역할과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관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고 추가적인 정복 위협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 따라서 오스만은 역설적으로, 개신교가 이전의 개혁 운동이 실팼던 방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단결을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은 유럽의 종교, 정치,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441-3)
"정복, 팽창, 왕조 교체가 언제나 구심력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격파를 던져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398년 티무르의 잔혹한 델리 약탈이 그랬다. 그것은 인도아대륙 상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던 술탄국 분열의 촉매제 노릇을 했다. 그 붕괴는 도시국가들의 개화를 촉발했고, 이전에 북쪽의 수도로 흘러가던 조세 수입이 이제 지역에서 재분배되면서 지역 간 상호작용의 범위도 확대됐다. 델리의 손실은 구자라트와 오리사의 소득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원 왕조가 멸망한 뒤 몽골인들이 움츠러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기회가 열렸다. 1390년대 한반도에서는 이성계 장군이 권력을 잡은 뒤 대규모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땅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시도가 중심이었다." "1428년 다이비엣의 레 왕조는 〈평오대고平吳大誥〉를 발표해 명나라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고, 여기서 〈이제 우리 다이비엣이 진정으로 문명화된 국가〉이며 독자적인 풍습과 풍광과 민족의 나라라고 선언했다."(457-8)
"유럽인들은 왜 애초에 본향 근처[서아프리카]에 머무는 대신 대서양 건너로 확장하고자 했을까?" "열대 아프리카의 질병 환경에 초점을 맞춰온 역사가들은 유럽인들이 역학적으로 중대한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현지 주민들이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해온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신세계'에서는 생물학적 승산이 그들에게 크게 유리했다." "이는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조직이 매우 발달해 식민화를 고려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말이다. 사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해안에서 쏘는 대포 너머로〉 뚫고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콩고, 베닌, 오요와 기타 왕국들은 습격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었고, 고국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나온 소수의 사람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박에 그다지 위협받지 않았다. 그들의 정착지는 해안의 몇몇 요새에 불과했고, 그들의 상업 활동은 협상에 의존했다."(4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