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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지음 / 책세상 / 2005년 6월
평점 :
제1부 니체 철학 입문
"1960년대부터 본격화한 학적 연구는 체계적·역사적 방식으로 니체를 읽는다. 체계적 방식은 니체의 글을 그 창작 시기를 염두에 두어, 특정 사유와 다른 사유들 간의 시기상·내용상의 연관 관계를 살핀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씌어지기 훨씬 전에 이미 《즐거운 학문》에서 그것을 위한 수많은 예비 절차가 행해지며, 그 결정체는 신의 죽음이 고지되는 유명한 125번 잠언이다. 여기서 신의 죽음을 말하는 '미친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라는 형상의 전(前)단계 역할을 한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1881년에 이미 니체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원회귀 사유를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사유는 니체 후기 사유의 대표 개념인 힘에의 의지와 서로 완성해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힘에의 의지 개념에 의해 위버멘쉬 개념도 이론적·실제적 보증을 받는다. 그리고 위버멘쉬 개념은 허무주의 극복과 가치의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사유의 결합체만이 니체 철학을 '긍정의 철학'으로 만든다."(82)
"역사적 연구 방식은 니체와 사유를 교환한 동시대인들, 그 시대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유가들, 그가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칭찬해 마지않은 사유가들, 니체 스스로는 숨기고 있지만 그가 영향을 받은 사유가들, 그리고 니체가 영향을 미친 사유가들과 니체 자신과의 연관 관계를 고려한다." "체계적·역사적 연구는 전승된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비판가의 모습과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이론가의 모습을 니체에게서 부각시킨다. 비판가Kritiker와 이론가Theoretiker로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말하는 철학자로 제시된다. 이 철학은 생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과 정당화 프로그램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성하는 것으로 규명하고, 생성적 성격을 지닌 모든 것의 필연성과 유의미성을 도출해내어, 그것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을 철학적으로 보증하고 싶어 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니체 철학의 정수이며, 허무주의 극복 후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긍정 양식 중에서 최고의 양식이다."(84-6)
제2부 니체 철학의 과제와 방법론
"니체에게 해석이란 해석자의 인식 의지가 세계와 상호 작용 하면서 자신의 의미 세계를 구성해내고 창조해내는 작업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인지적 활동은 해석이다. 철학적 활동 역시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해석 활동이다. 니체는 이런 해석 활동이 철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해석이고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인 한, 철학은 수학 이론처럼 객관적으로 타당한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해낼 수 없다. 또 참과 거짓을 객관적으로 확정해내는 작업도 할 수 없다. 니체는 의미 세계를 조직하고 창조하는 이런 해석 활동 일반을 예술Kunst이라고 부른다. 이 예술 개념은 예술가의 활동이나 이 활동에 의한 예술 작품의 산출이라는 협의적 제한을 넘어서서 학적-논리적 영역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서, 예술을 인지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고차적 예술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도 그것이 해석인 한에서 이런 인지적 예술 활동의 일환이며, 철학자는 〈예술가-철학자Künstler-Philosoph〉인 것이다."(106)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건설하는 첫 단계는 전통적인 철학적 자명성 및 철학적 세계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때 니체가 사용하는 방법론은 심리-계보적 방법론이다. 계보적 방법론은 탐구 대상의 발생Entstehung 조건이나 유래 및 출처Herkunft를 밝혀내면서 탐구 대상을 해명한다. 이때 어떤 최종적인 결론에 대한 추측이나 목적론적 가정은 배제한다. 따라서 탐구 대상의 유래와 출처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기원Ursprung일 수는 없다. 니체는 그 출처를 개인적이고도 집합적인 존재인 인간의 심리에서 찾아낸다. 그러므로 심리-계보적 방법론은 일종의 심리 분석의 형태로 진행되게 된다. 이 방법론에 의해 니체는 서양 사유의 자명성을 형성했던 토대가 형이상학적-도덕적-목적론적 해석의 결합체라는 것을 밝혀낸다. 니체는 서양 철학의 제 영역들이 한마디로 도덕 가치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120-1)
"니체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형이상학의 기본 특징은 무엇보다도 이분법적 세계 해명이다. 이분법적 형이상학의 세계 해명은, 세계를 존재(혹은 존재의 세계)와 생성(혹은 생성의 세계)으로 이분하여 그것들의 본질적-가치적 배타 관계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전자에 존재적·인식적·가치적인 우위를 부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생성은 한갓 가상으로 평가절하된다." "이 이분법에서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식과 탐구, 학문과 삶의 토대 역할을 해왔으며, 이 존재에 대한 믿음이 바로 생성 및 생성 세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니체에게 실제 세계를 가상으로 폄하하는 가상 아닌 세계, 즉 그 자체의 세계 또는 존재의 세계란 한갓 허구일 뿐이다. 니체의 생성의 철학은 '그-자체' 일반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상'이라는 개념의 시민권을 거부하는 '생성에 대한 진정한 철학'이고 싶어 한다. 존재는 이제 다른 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124-5)
"이분법적 형이상학이 범하는 최대의 오류를 니체는 '도구와 규준의 혼동' 혹은 '과도한 순진함'에서 찾는다. 이 오류는 니체가 인간 이성의 소박한 오류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성이 자신과 자신의 인식 범주들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해서 그것들을 실재에 대한 규준으로 믿어버리는 독단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이러한 이성의 독단성에 의해 서양 형이상학의 전 역사가 규정되고 있다고 이해하며, 이것을 형이상학 비판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표상하고-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해석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의 인식은 관점적 해석이고, 관점적 해석은 삶에 유용한 오류일 뿐이다." "니체는 이 점을 다음처럼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말하기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반대편에 서서 말한다. '사유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허구여야만 한다.' 사유는 실재를 잡을 수 없다.〉"(131-3)
"일반적으로 이론적 허무주의는 진리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부정을, 윤리적 허무주의는 행위의 가치와 규범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니체는 프랑스 문화 비판으로부터 허무주의 개념을 전수받아, '최고 가치의 탈가치'에 의해 초래되는 의미 상실의 경험 상황, 의미에 대한 물음이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허무주의 상황으로 규정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주제'로 허무주의를 도입한 것은 1882년 가을부터다. 이때 씌어진 유고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허무주의 주제를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집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특히 정적 암살 행위들이 신문 지상이나 사실주의 문학에 등장하면서 허무주의 개념이 테러리즘과 동의어로 인식되어, 그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고 의미의 축소화 과정을 밟았던 시대적 상황과 맥을 같이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주저로 기획했던 《힘에의 의지》에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시도'라는 부제를 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195-6)
"니체의 '유럽 허무주의에 대한 철학'에서 허무주의 주제는 '기존 가치의 탈가치', '유럽 허무주의의 역사', '새로운 가치의 설정'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는 인식 이론, 형이상학, 미학을 비롯한 학문 일반 및 도덕, 정치, 경제 영역에서의 진리 상실과 신적 권위의 상실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서는 유럽의 역사가 플라톤적-그리스도교적 가치의 몰락 과정, 신 개념의 의미 상실 과정, 그리스도교 도덕의 무력화 과정으로 그려진다. 즉 유럽 역사가 허무주의 과정으로 재조명된다. 이 허무주의 과정은 힘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세계 해명 원칙과 위버멘쉬의 등장, 그리고 위버멘쉬에 의한 '새로운 가치 설정'으로 극복되어 새로운 유럽의 미래가 예견된다. 이렇듯 허무주의 주제의 세 부분은 서로 불가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서의 허무주의 주제는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와 위버멘쉬 개념군 안에서 움직인다."(197)
"완전한 허무주의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이자, 동시에 허무주의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허무주의 형식이다. 그래서 인간을 부정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에의 의지를 긍정에의 의지로, 그것도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의 의지로 전환시키는 허무주의 형식이다. 허무주의가 단지 과거의 것에 작별을 고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게 하는 계기도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니체는 인간에게 근본적 부정과 근본적 긍정 사이에서, 절대적 퇴락의 가능성과 허무주의 극복 가능성 사이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니체는 허무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을 오로지 인간 의식의 전환 여부에서 찾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의 설정자이며 창조자로, 해석 주체로 긍정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관점적 인식 상황이 단순한 허무적 위험으로서의 데카당스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적극적 기회의 역할을 하는지가 결정된다."(210-3)
"인간의 변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치의 설정자이자 창조자로, 해석 주체로 긍정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긍정은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힘과 삶을 위한 전략에 의해 수행되는 관점적 평가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곧 자신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오류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음에 대한 긍정이다. 더불어 해석의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의미 있고 필연적이며 정당한 해석이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동시에 이 의미 필연성이 실재 자체와 일치되거나 실재 자체의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해석 주체로 인정하면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는 인간에게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긍정하게 된다. 이는 곧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 긍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이성 사용에 결코 절대적 요구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해석 주체로 긍정하는 이 주체는 니체에게서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명칭으로 불린다."(214-5)
"인간은 자신의 경험 상황의 무의미함과 그 경험 상황의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을 경험한다. 영원회귀 사유는 이런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 영원히 반복되고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이것으로부터 도망칠 가능성이 전혀 없으리라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영원회귀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은 이 사유가 자신의 이론적 적절성을 증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사유의 〈비이론적〉인 면, 즉 이 사유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사유는 인간을 기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이 사유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단하게 한다. 이 기능을 가리켜 니체는 〈약한 자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강한 자도 결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약자와 강자를 구별하는 목적이 약자의 제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약자일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강자로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영원회귀 사유의 목표인 허무적 상황의 극복 가능성이 주어진다."(221-3)
제3부 새로운 세계 해석의 건설: 생기존재론
"생성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생성의 세계=힘에의 의지=생기Geschehen라는 기본 공식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세계의 기본 사태를 곧 힘에의 의지이며 생기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니체의 입장을 마그라이터가 제안한 〈생기존재론〉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다." "이렇듯 니체의 생성에 대한 설명은 (전통적 의미로는) 반형이상학적이지만, 여전히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니체의 이런 프로그램은 근대의 경험철학에서 행해진 반형이상학적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니체에게는 카르납과 달리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가상 문제〉는 아니며,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단순한 〈삶의 느낌에 대한 표현〉일 수 없다." "'생성의 의미는 모든 순간에 충족되고 도달되고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그의 의도에 따라 니체는 생성을 오로지 생성적 성격에 의해서만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 긍정할 수 있는, 즉 〈생성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을 모색한다."(293, 296)
"생성 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유 단초는 바로 '생성은 살아 있는 존재Sein'라는 것이다." "존재는 살아 있는 것이고 생성의 과정에 있다. 이는 니체가 이해하는 전통 형이상학의 도식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를 새로운 공식, 즉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고,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로 대체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와 대립되는 것은 이제 '생성'이 아니라 '생성하지 않음'이고,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생성'은 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존재'다. 니체 철학은 이렇듯 '전도된 플라톤주의'다. 전도된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존재와 생성의 일치에서, 존재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성의 과정에 있을 수 있는지는 바로 생기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이 개념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제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힘에의 의지인 한에서 되어간다'라는 윈리로 구체화된다."(310-2)
"힘에의 의지를 니체는 추동하는 온갖 힘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추진하는 힘은 힘에의 의지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외의 심리적이거나 역동적이거나 심리적인 힘은 없다〉라는 니체의 단언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의지의 힘의 실제 영역은 무기적인 세계에서부터 인간의 지각과 지성 영역을 거쳐 물리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전 존재 영역을 포괄한다. 이렇게 해서 힘에의 의지는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성'으로 니체에 의해 상정된다. 이것에 의해 니체의 초기부터의 기본 구상인 '살아 있는 존재'의 내용이 구체화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이 변화와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힘이며, 그것도 지배를 원하고, 더 많이 원하며,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의 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지의 힘은 바로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전통 형이상학의 정식을 뒤집은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정식은 이제야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된다."(331)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라고 부른다.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의 의지를 세계의 〈본질essence〉로 명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본질' 혹은 '본성'이라는 철학 용어는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니체에게서는 기피되는 용어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가 여전히 전통 형이상학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는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이 용어를 힘에의 의지에 대해 사용한다. 힘에의 의지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이런 보편적 성격을 갖는 힘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자존하는 것도 아니고, 실체적 존재도 아니며, 형이상학적 유類도 아니다. 오히려 힘에의 의지는 관계를 맺으면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의지 작용이다. 즉, 관계적 존재다." "더불어 이런 힘에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생기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내재하는 〈내적 생기innerliches Geschehen〉이기도 하다."(333-4)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자연 전체의 현재적인 기체〉, 모든 개별적인 사물에 〈근원적인 창조력〉이다. 즉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인 의지는 곧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서의 의지를 그는 〈사물 자체〉로 인정한다. 〈모든 표상은, 모든 대상은 그 어떤 종류이든 간에 현상이다. 사물 그 자체만이 유일하게 의지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힘Kraft 개념에 포함시키던 기존의 표상 방식에서 벗어나 힘을 본성상 의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곧 힘의 형이상학이 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작은 문〉이면서도 동시에 그 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모든 사물의 좀더 내적인 본성〉이라고 여긴다. 의지는 사물 그 자체인 동시에 현상(더 정확히는 표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유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가장 직접적이고도 가장 명료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346)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일원론을 지향한다." "이런 실재를 니체는 한갓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실재성의 〈창백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칸트의 물 자체와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성적 인간의 내적인 규정 근거였으며, 쇼펜하우어에게는 모든 존재자의 일차적이면서도 근원적인 것이었던 의지는, 니체에게는 모든 역동적인 관계들의 일차적인 원천이 된다.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의 〈힘의 급작스러운 분출이나 폭발〉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에게 의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고 잃어버리는 의지들이며, 이미 다른 의지들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의지의 이런 '내용'과 '목적'을 없애버리게 되면 의지의 성격 역시 없애버리게 되며, 내용과 목적이 사라진 의지는 그야말로 〈한갓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게 된다."(346-8)
"힘에의 의지는 힘 소비의 극대 경제의 원칙을 따른다. 의지는 항상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의지들 간의 긴장 관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니체는 이런 힘 소비의 극대 경제 원칙이 '매 순간' 적용된다고, 즉 '예외 없이' 그리고 '중단 없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즉 '당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상 더 많은 힘을 원하는 힘에의 의지는 '모든 순간' 자신의 힘의 극대화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작용 방식의 '지속'은, '매 순간'의 당위는 어디서 보장받을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 때문에 니체는 힘 소비의 극대 경제 원칙과 영원회귀 사유를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같은 것의 영원회귀'는 곧 '같은 것의 같은 것으로의 영원회귀'를 의미하게 된다. 즉 '힘에의 의지'가 '힘에의 의지라는 자신의 본성으로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의지의 힘은 항상 자신의 본성으로 되돌아오고, 매 순간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다."(362-3)
"힘에의 의지의 이런 성격은 매 순간 힘의 최고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생성의 전 과정에서 하나의 힘의 극대점이나 힘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생성의 전 과정이 매 순간 힘의 극대화를 경험한다. 더 나아가 힘의 균형 상태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힘의 균형 상태라는 것은 힘들 간의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종의 정지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매 순간 힘의 극대화를 꾀하고 실현시키는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어긋난다." "영원회귀에서의 영원성은 무시간성이나, 시간적 과정의 멈추지 않음, 혹은 헤겔적 의미의 '끔찍한 무한성', 피안에 대한 믿음에 각인된 종교적 영원성과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절대적인 생기 필연성이 확보되는 개개의 순간의 영원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각 순간들이 그것들의 영원회귀를 원할 정도로 필연적이고 가치가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순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순간들이 힘에의 의지의 생기 사건이기 때문이다."(364, 376)
제4부 해석적 지식과 해석적 진리: 관점주의 인식론
"니체는 관점성Die Perspektivität을 생/삶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곧 더 많은 힘을 더기 위한, 즉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의지 작용의 조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필연적 관점주의'는 해석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식의 해명이기도 하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작용을 해석 행위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존재자 내부의 유기적 과정은 힘을 얻어 성장을 원하는 의지에 의해 수행된다. 이런 수행 방식이 곧 해석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관점을 설정하는 힘의 보편성은 곧 해석의 보편성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은 힘에의 의지가 활동하는 장이다. 신체-주체의 힘에의 의지는 신체-주체를 단순한 인식 주체가 아닌 해석 주체로 만든다. 해석 주체의 인식 과정은 곧 생기 현상으로서의 해석 작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석 주체의 해석 과정에서의 특정한 관점을 규정하는 규제적 원리가 힘에의 의지고, 이 점은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관점을 설정하는 힘'으로 명명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428-30)
# 니체 철학에서는 언제나 힘에의 의지의 수행=생기=해석 행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신체 개념은 인간에 대한 이원적 해석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 신체는 이원화할 수 없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명칭이며, '큰 이성die groβe Vernunft', '나Ich', '자기 자신das Selbst'은 신체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니체가 신체 개념을 매개로 하여 극복하고 싶어 하는 인간에 대한 이원적 해석이란, 인간을 정신/이성/영혼과 이에 대립되는 육체라는 두 가지 단위로 설명하는 해석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순수한 이성의 동일성으로 결정되는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인 '나'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없다." "니체는 육체 중심이든, 이성 중심이든 간에 인간을 두 단위로 분리하여 설명하는 모든 해석을 형이상학적 인간관으로 규정하며, 인간에 대한 오해라고 단정 짓는다. 인간은 이런 구분에 의해 이원화될 수 없는 총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영혼/정신 부분과 육체 그리고 의지들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체인 것이다."(435-7)
"신체는 창조 주체다. 여기서 창조는 '가치 평가 작용' 혹은 '의미 창조 작용'을 말한다. 신체는 자신의 자기 극복적인 삶을 위해, 위버멘쉬적 삶의 유지를 위해 평가 작용을 한다. 따라서 어떤 것의 가치와 의미는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의 평가 작용에 의해 비로소 부여된다. 이 가치 평가와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신체의 목적을 위한 것이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은 전적으로 신체 의존적이다.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은 그 자체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체의 자기 극복적인 삶의 유지를 척도로 선과 악의 내용이 결정된다. 신체는 이런 평가 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성해간다. 평가 작용은 신체의 삶의 실천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 평가된 의미와 가치는 결코 고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평가 작용에 의해 유지되지만, 이 평가 작용에 의해 상승되고 변화된 삶은 또 다른 평가 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442)
"해석은 관점적 평가다. 니체에게서 관점성은 모든 삶의 근본 조건이며, 인간 인식의 근본 조건이기도 하다. 인식은 관점성에 의존하며, 인식은 단적으로 관점적이다. 관점적 인식은 가치를 평가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해석은 주체의 능동적인 가치 평가 행위이며, 가치 각인적 성격을 갖는다. 이 점은 해석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해석으로서의 인식은 주체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 행위인 것이다. 대상 인식에서 규준이 되는 물음은 이제 〈이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무엇인가?〉이며, 인식 행위의 결과는 따라서 주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질적인 의미-해석이다. 의미-해석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에 대한 획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체가 자신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미 창조 작용의 결과다. 하지만 이 행위는 언제나 특정한 목적하에서 이루어진다. 그 목적은 삶의 유지다. 그것도 항상 성장하는 형태의 삶의 유지다."(458-9)
"니체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인식 활동에서 인간은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주관적 관점을 배제한 외재적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또한 해석된 세계는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이고, 주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그런 세계다. 이 세계야말로 바로 주체에게 '상관있는' 세계다. 그러나 이 세계의 상정이 곧 대상으로서의 세계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해석된 세계의 범위는 단지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의 범위일 뿐, 대상으로서의 세계 자체의 범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내 해석의 한계는 나에 의해 경험된 세계의 한계일 뿐이다. 이렇듯 니체는 세계에 대한 관점적 관계 맺음의 불가피함을, 그리고 해석 세계가 인간 경험의 한계이며, 경험의 한계가 바로 인간 자체의 한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니체는 한편으로는 본질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 경험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인 한계 설정을 하는 약화된 인식론적 실재론을 표명하고 있다."(473-5)
"해석은 비록 필연적으로 오류인 가상Schein이긴 하지만, 니체가 인정하는 유일 실재, 즉 힘에의 의지에 의해 '의욕되고 산출된' 가상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인식이다. 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실재의 기능이며, 가상은 실재에 의해 의욕되고 만들어진 가상이다." "'현상'이자 '의욕되고 산출된 가상'인 해석은 이렇게 해서 기존의 참-거짓의 구분을, 기존의 '참-가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해석은 비록 가상적 현상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해석 세계이며, 힘에의 의지라는 실재의 산출물이다. 이런 해석과 대립되는 것은 참된 인식이나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해석과 대립적인 것은 우리의 해석 세계로 들어오지 않는 것,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며, 니체는 이것을 기존의 분류 도식을 벗어나서 '다른 종류의 현상 세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비록 지금은 우리의 해석 세계로 들어오지 않지만, 우리에 의해 형식화되고 해석될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은 세계다."(475-7)
"타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라는 것은 우리의 규약적이고도 가치평가적인 해석적 이해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 공정하지 않은ungerecht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니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정치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 이런 '부조화'야말로 우리를 타자에 대한 공정한 이해gerechtes Verstehen로 이끄는 동인이 된다. 공정치 못함에 대한 인식과 통찰은 우리에게 더욱 섬세한 해석적 이해를 원하는 의지를 갖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해석은 다름 아니라, 각 개별자들의 개별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거나 일반화하지 않은 해석을 말한다." "섬세한 해석을 원하는 의지는 타자에 의해 사실적인 이해나 동의나 합의를 하라는 강제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런 의지를 갖는 해석자를 니체는 공정함이라는 특성을 갖는, 공정한 주체로 상정한다."(531)
제5부 비도덕주의 윤리학
"니체가 보기에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이 추구해온 진리는 바로 도덕적 진리들이며, 그것도 편견으로서의 도덕적 진리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현실적·자연적 삶을 부정하는, 즉 삶의 본능을 부정하는 반자연적 성격을 띤다. 이런 특징은 형이상학의 성립과 전개에서, 그리고 인간의 진리 추구 노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서양의 도덕과 형이상학과의 숙명적 결합은 이미 지적된 '존재와 생성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형성이나 '도덕적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에서뿐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 이렇게 해서 선과 악,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는 존재적으로나 가치적으로 분리되고, 본질적 대립 관계를 형성한다." "이 도덕은 도덕성을 종교적 초월이나 철학적 초월을 통해 존재 세계/저편의 세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 도덕을 인정할 수 없다. 이 이분법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550-1)
"니체는 도덕적 가치 판단에서 '행위'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의 척도로 상정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애에서 발생하며, 그런 한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기적인 행위들이다. 따라서 이기적인 행위와 비이기적인 행위 사이에는 단계와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후에 니체는 이기심 '자체'가 아니라 이기심의 '주체'가 이기심이나 이기적 행위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밝힌다. 이기심은 예컨대 위버멘쉬적 삶을 목적으로 하는 주체의 자기 사랑일 수 있다. 이런 이기심을 갖는 주체는 '고결한 인간'이자 '강자'이며, 그의 이기심은 '건강하며 건전한' 이기심이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선과 악의 차이를 '선 그 자체'와 '악 그 자체'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차이로 환원해버리는 비도덕주의의 입장을 선취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기심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이기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기적 '행위'가 아니라 이기적 '행위자'가 문제인 것이다."(556-7)
"〈자연이 퇴화된 자들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연이 반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생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의 증대는 그와는 반대로, 병들었고 반자연적인 도덕의 결과인 것이다〉라는 니체의 단언처럼, 반자연성으로부터 도덕의 구제는 니체에게 시급한 과제다. 니체의 프로그램은 도덕이 갖고 있는 반자연적 성격을 없애고, 도덕의 자연적 유용성을 다시 밝혀내고 부여하여, 도덕을 자연화하고자 한다." "니체의 관심은 특정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전적으로 행위 주체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그 자체로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선과 악에 대한 고정 관념을 없애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니체는 도덕의 기원이 도덕 외적=비도덕적=자연적 유용성이며, 도덕 가치도 오로지 이것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정언적 명제를 세우고 싶어 한다. 〈자연명법으로 정언명법을 대체한다〉라는 짤막한 표명은 니체의 이런 관심을 대변해주고 있다."(584-6)
"반자연적 도덕은 무리 본능과 평균 본능과 데카당스 본능의 소유자들의 힘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도덕이다. 그래서 생명력의 퇴화를 가져오고 삶을 부정하는 데카당스 도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차원 높은' 새로운 도덕은 다른 종류의 해석 주체를 상정해야만 한다. 즉 스스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치 평가자, 자기 극복과 자기 지배를 할 수 있는 자, 이런 삶을 영위하고자 의식적-의지적으로 노력하는 자, 즉 강자다. 이런 강자를 니체는 노예와 대립시켜 '귀족적 인간' 혹은 '주인Herr'이라고 부른다." "주인 도덕에서 '좋음gut과 나쁨schlecht'의 대립은 '고귀함vornehm과 경멸적임verächt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노예 도덕에서 '선gut과 악böse'의 대립은 그들에게 '위험하지 않음ungefährlich과 위험함gefähr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도덕 유형은 고도로 혼합된 문화 체계 안에서뿐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 속에서도 공존하고 침투하며 중재되고 있다."(590-1)
"노예 의식을 갖는 개인들 사이에서 타자에 대한 승인은 여론이나 평판 혹은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반면 주인 의식을 갖는 사람들 간의 서로에 대한 승인은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타자에 대한 긍정에서 성립된다.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선과 악의 판단 주체라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 긍정은 자신의 가치 판단과 그것의 행사가 필연적으로 개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런 반성적 자기 제한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있는 강자의 힘이다. 강자의 반성적 자기 제한은 타자의 가치 판단의 개별성과 차이를 인정하게 한다. 타자에게 자신의 가치 판단에 동의하거나 합의하라고 강요하거나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거기서 도출된 타자의 판단을 인정하고 승인한다. 타자 역시 자신처럼 가치 판단의 주체이며, 자신의 창조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한다."(594-5)
제6부 예술생리학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은 내용상으로는 신화적 세계관, 욕망과 본능,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비극적 운명과 고통, 인간 존재의 경악스럽고 부조리하고 잔인한 삶, 죄와 속죄, 자신의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삶에 대한 긍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형식상으로는 비극적 운명의 개인을 구원하는 역할로서 합창과 음악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성=덕=행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 공식이 신화적 환상과 비극적 운명을 의식성으로, 죄와 속죄의 상관성을 기계적 인과론으로, 동정과 일체감과 음악(합창)의 장을 논리적·이성적 토론의 장으로 변질시킨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제 변증론자이며, 그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 때문이 아니라 논리적 비대화로 인해 파멸한다." "니체는 이런 종말의 책임을 소크라테스주의와, 〈소크라테스적 합리주의의 시인〉이자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를 표방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 지운다. 니체의 이런 입장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630-1)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두 예술 충동 중에 아폴론적 예술 충동은 형상과 형태를 만들고 제공하는 충동이자 척도를 설정하고 틀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개별화의 원리'를 사용하여 구분 가능하고 산정 가능하며 인식 가능한 조형 세계를 만들어낸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인간 안에서 무매개적으로 솟구치는 예술 충동으로서, 울타리나 제한이나 형태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여 모든 것과 그리고 세계의 근원적 모습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지향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 두 예술 충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에 있으며,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 활동은 이 두 충동이 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예컨대 음악에서는 디오니소스적 힘이, 조형 예술에서는 아폴론적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이 두 예술 힘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합일의 상태를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찾는다."(632-4)
"예술가-형이상학은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 역시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고 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인들의) 삶은 다양한 활동의 장이자, 고통과 온갖 종류의 부조리와 잔인함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는 거대한 불협화음의 장이다. 삶의 이런 불협화음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해소할 그 어떤 현세적 해결책도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예술이라는 매개물을 요청하게 된다. 예술을 통해 인간 역시 '형이상학적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위로는 도덕에 기초한 초월 세계의 상정이나 정의로운 미래 제국의 건설에 대한 약속과는 다르다. 이 형이상학적 위로는 합리적-도덕적 사고를 넘어서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예술을 〈반도덕적 예술가 신〉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적 위로는 또한 자의적 낙관주의일 수도 없다. '가상의 가상'을 통한 '가상에 의한' 근원 일자와의 합치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비극이라는 예술 양식에 의해 이행된다."(642-3)
"니체는 1881년 이후 예술가-형이상학 대신에 새로운 철학적 과제를 설정한다. 이제 그에게 인간의 삶과 세계는 형이상학적 위로라는 정당화를 통해서만 긍정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측면들을 필연적으로 갖고 있으며, 그 여러 측면들에는 없어도 좋은 것이나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가능성을, 즉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이런 철학에 필요한 도구로서 니체는 다시 예술을 주목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예술은 해석으로서의 예술이다. 해석으로서의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창조력의 소산이다. 그런 한에서 관점적 평가 행위이며 가상이다. 하지만 이 가상은 형이상학적 위로 수단, 아름다운 환상으로서의 가상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힘에의 의지의 예술 활동은 삶의 어두운 디오니소스적 심연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한다. 이런 긍정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부른다."(647)
"예술생리학 프로그램은 니체의 관점적 세계 경험을 토대로 하며, 예술을 힘에의 의지에 의한 해석으로 규정한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 안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를 창조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이런 창조 활동을 예술 활동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의 활동은 그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예외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세계의 본질이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들의 활동은 모두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거대한 예술 활동의 장이며,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힘에의 의지의 작용에 대한 다른 명칭이 '해석 작용'인 한에서, 세계는 거대한 해석 작용의 장이며, 거대한 해석 작품이다. '스스로 분만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세계'라는 니체의 유명한 단언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이렇듯 초기의 형이상학의 토대였던 근원 일자는 이제 힘에의 의지에 창조의 주체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649-50)
"인간의 미적 체험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선사한 것이며, 세계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니체의 표현대로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의 종적 허영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미학의 제1진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그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인간 외에는.〉" "하지만 니체가 전적으로 주관주의적 입장만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입증된 것'은 일종의 집합적인 생존 조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미 판단이나 미적 가치는 주체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각 개인의 주관성의 영역으로 전적으로 환원될 수만은 없다. 오히려 니체는 미적 체험의 집합적 생존 조건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런 환원에 대해 경고한다. 이것은 현대의 미학 이론이 말하는 객관적 상대주의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6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