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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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독일 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철학사에서 의미와 연관을 추구하는 사람, 철학사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유럽 철학사를 하나의 통일로서 고찰해야만 한다." "요컨대 독일 철학의 고유한 역사를 박제화하는 것은 사유의 세계 공화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시 연관들을 보지 못하게끔 하거니와, 그렇게 만들어진 독일 철학의 역사는 분명히 오직 세계 수학의 비자립적 부분으로서만 존재하는 독일 수학의 역사와 비슷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독일 철학자들에게만, 또는 최소한 그들 모두에게만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확실히 18세기의 독일 철학 거의 전부는 계몽(Auflärung)의 결정적 이념을 수용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계몽은 철저히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독일 철학'이란 다름 아닌 정신적으로 수준 높은 동일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독일 국민과 독일 국민국가와의 욕구에 힘입은 인위적인 구성물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떠오른다."912-5)


"그렇지만 구술 문화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존재하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결실 있는 모든 직접적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며, 이런 점은 다수의 그러한 상호 작용에 대해 또한 문자성(文字性)의 발생 이후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더욱이 국민이 일차적 동일성 요소로 떠오름에 따라 의도적으로 강화된 언어 장벽이 국민국가의 시기에 철학적인 국민 문화를 산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개연적이다. 따라서 독일의 계몽철학이 분명히 유럽의 계몽철학과 공동의 특징을 지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독일어 사용을 넘어서 그것을 이웃 나라의 그것과 구별해주는 특수한 형태화를 획득했다는 작업가설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이런 점은 독일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종교적 신앙 고백, 즉 독일 정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게 주조해낸 루터교 출신인 만큼 더욱더 개연적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 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7-9)


2 영혼에서 신의 탄생: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독일어로 철학함의 시작.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중세 사유의 완성과 돌파


"(독일의) 고유한 철학적 사상을 민중어로 처음으로 분명히 표현한 것은 도미니크회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였다. 내 생각에는 이 이유 및 또 다른 두 가지 이유에서 그를 최초의 독일 철학자로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다. 그의 이념들 가운데 많은 것은 첫째, 이미 동시대인들이 감지했을 만큼 그리스도교 주류와 당혹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게 다른, 훗날 독일 전통의 종교철학적 사상을 선취하고 있다." "둘째, 비록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독일 관념론의 발전에 본질적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청년 헤겔은 에크하르트를 자신의 종교철학 강의에서 인용했으며, 에크하르트는 이미 1864년 요제프 바흐의 책에서 〈독일적 사변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에크하르트가 민중어의 이용을 명시적으로 정당화한, 아마도 후기 저술인 〈신적 위로의 책〉은 이론적으로 더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오로지 민중어로만 우리는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36-8)


"독일의 철학적 어휘 창조를 넘어 에크하르트 철학에서 내용적으로 혁신적인 것은 무엇인가?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에크하르트 철학은 이성주의적 근본 기획을 직접적인 신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신앙을 정당화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견해는 중세 초기에 전적으로 널리 퍼졌다. 물론 에크하르트의 도미니크회 형제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래적인 신앙 조항은 이성을 벗어난다고 가르쳤다. 그의 견해는 곧바로 가톨릭교회의 공인 교리가 되어 교회의 권력 요구를 뒷받침했으며, 그에 의해 교회는 자기의 교의에 대한 이성적 근거짓기를 더 이상 지시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 반대해 에크하르트는 빛이 비추어진 사람들은 조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직 믿을 뿐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강조한다." "직접적인 신 관계에 대한 관심을 에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적인 유럽 도처에서, 아니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신비주의자들과 공유한다."(38-9)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역시 이성으로부터 논증하며,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성적으로 근거지을 수 없는 삼위일체(Trinität)와 성육신(Inkarnation, 육화)이라는 특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교의들이 문제되는 곳에서도 이성적 신학을 추진한다." "매혹적인 것은 쿠자누스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상에 대한 비판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에서 수행한다는 점이다. 근대 과학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의 '세속화'가 아니라 고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맞서 특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에 빚지고 있다. 에크하르트의 윤리적 혁명도 이와 유사한데, 그것은 근세에 강화된다. 물론 새로운 과학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만약 다른 천체들에도 이성적 존재자가 존재한다면, 근대의 독자는 성육신을 위한 논증이 그에 기초한 인간 본성의 특수한 지위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50-2)


"(《신앙에서의 평화에 대하여》 같은) 쿠자누스의 저술에서 새로운 것은 그것이 훨씬 더 많은 수의 종교 옹호자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묘사되는 대화는 〈지성의 하늘에서〉, 더 나아가 로고스와 베드로 그리고 바울의 지도 아래 이루어진다. 이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이미 전제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전의 종교 간 대화들과는 눈에 띄게 다르다. 그러나 로고스는 모두에 의해 전제된 이성이다. 이성과 그 전제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니콜라우스는 수많은 민족 신앙을 넘어서 있는 하나의 철학적 종교를 근거짓고자 한다. 종교의 통일성은 의식(儀式)의 다수성과 양립할 수 있다. 성사(聖事)들은 분명히 평가 절하된다. 정당성은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신앙에만 달려 있는데, 그 신앙은 물론 행위에서 그 표현을 발견해야만 한다. 여기서 니콜라우스는 종교 개혁의 결정적 문제를 선취한다." "18세기 후반에 성립한 헤겔의 관념론은 쿠자누스의 그것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전개한다."(56)


3 종교 개혁에 의한 철학적 상황의 변화: 파라켈수스의 새로운 자연철학과 야코프 뵈메의 신에게서의 아님


"이미 16세기에 한편으로는 종교 개혁에 의해 고무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교의로부터 벗어나 루터교로부터 핍박받는 성령주의적·정신주의적 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성서가 아니라 정신(Geist, 영)이 결정적 원리로 여겨졌다." "이런 사유 방향에서 특히 매혹적인 것은 파라켈수스의 종교적 표상이다. 파라켈수스는 아무런 거처도 지니지 않는 성령 안에 있는 교회를 믿으며, 어떠한 강제적 개종도 〈악마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거부하고,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도 포함해 모든 아이의 구원을 가르쳤다." "정치적 이념에서 파라켈수스는 신분들의 폭넓은 평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적 개입을 그리스도교적 이상으로서 옹호한다. 귀족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는 언제나 다만 황제로부터 빌려온 것일 뿐이다. 모두는 노동할 의무를 지닌다. 노동 없는 소유권은 도둑질이다. 그는 사형을 거부한다. 그리고 오로지 방어 전쟁만을 도덕적으로 허락할 수 있다."(64-8)


"근세의 신기원적인 최초의 독일 철학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는 야코프 뵈메에게 돌아가야 한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은 회의주의적 에세이스트 미셸 드 몽테뉴에 의해 그리고 17세기 전반에는 형이상학과 과학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 데카르트에 의해 광채를 발한다. 영국에서는 정치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근대 경험과학의 방법적 기초를 발전시킨다. 베이컨과 동시대인이자 정신적으로 가장 활기찼던 슐레지엔 출신의 뵈메는 반면 구두장이였다. 그는 결코 공부를 한 적이 없고 따라서 라틴어를 쓸 수 없었지만, 신비적 비전을 체험하고서는 자기의 전통적인 루터교적 성서 신앙을 신과 자연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전개에 관한 철학적 설명을 통해 좀더 깊이 근거짓고자 했다." "이 소박한 사상가는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엄청나게 표현력 강하고 창조적인 언어로 자연에 대한 자신의 열광 및 종교적 두려움과 희망을 난삽한 동시에 웅대한 현실 이미지로 표현했다."(68-9)


"고통과 악은 어디로부터 세계로 오는가?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고전적 대답은 결여론이다. 즉 나쁜 것 또는 악은 존재에서의 결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그것들도 신 안에서 그 근거를 지녀야만 한다. 뵈메는 신 자신 안에 부정적 원리를 갖다 대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마지막 저작에서 추상적 방식으로 '예(Jah)'와 '아님(Nein)'으로 언급하는) 긍정적 원리와 부정적 원리의 공동 작용으로부터 외적 세계에서의 신의 현현, 즉 오로지 신적 본질의 전개일 뿐이고 다른 두 원리를 결합하는 자신의 세 번째 원리를 이루는 신의 현현을 파악하고자 한다. 결정적인 것은 대립이 없으면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이다." "빛 속에서 '있음(ein Ichts)'인 신은 지옥에서 '없음(ein Nichts)'이며, 따라서 현재하지 않는다." "'예'와 '아님'의 재합일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며, 뵈메는 그 자신의 통찰을 그리스도의 정신에 돌린다."(71-3)


4 신에게는 오로지 최선의 것만이 충분히 좋다: 라이프니츠의 스콜라철학과 새로운 과학의 종합


"17세기에 철학을 이성주의적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요인에는 한편으론 똑같은 정도로 권위적인 진리 요구를 지닌 서로 배타적인 다수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존재하므로 바로 그 점이 단순히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 심급에 대한 추구를 요구한다는 경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적으로 끝내야 하는 종교적 시민전쟁이 불러일으킨 물리적·도덕적 악이 속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왜 독일에서 종교의 이성적 근거짓기를 향한 노력이 특히 중요했는지를, 아니 왜 그것이 종교적 활기를 지니고 추구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제국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와 달리 종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따라서 그 국가들은 철학을 덜 필요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국은 주권을 획득한 이웃 나라들의 특징을 이룬 저 정치적 통일을 최종적으로 달성하지 못했으며, 이 점은 1648년 이후로 명확했다. 그러나 괴물과 유사한 형성물은 특별한 손질을 필요로 하며, 라이프니츠의 극단적 이성주의는 그러한 치료제였다."(76)


"영국의 경험주의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러한 이성주의는 신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가정에 뿌리박고 있으며─비록 헤르더 이후에는 신과 자연과학이 아니라 정신과학 법칙의 연관이 관심의 중심에 놓여 있을지라도─독일 문화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추측하건대 전-과학적인 종교적 신앙의 억제, 그것도 좀더 복잡한 신 개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억제는 독일 정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기여였다." "과학이 빈틈을 드러내는 곳에서 종교가 자기 자리를 지닌다는 단순한 이념은 라이프니츠에게서 오로지 자연 법칙에 대한 형이상학적-신학적 근거짓기만이 자연 법칙 자체로부터 그것의 조야한 사실성을 박탈할 수 있다는 좀더 복잡한 이념에 의해 대체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서 신의 창조력을 모방한다. 신은 과학의 각각의 모든 새로운 승리가 위태롭게 하는 미봉책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과학의 기초이며, 과학을 촉진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이다."(84-5)


"크리스티안 볼프는 1721년 할레에서 중국인들의 실천철학에 관한 축사 때 그들의 도덕, 즉 바로 신학적으로 정초되지 않은 도덕에 대한 자신의 경탄을 표명했다. 이러한 격찬은 17~18세기에 널리 퍼진 중국 애호에 상응했다. 동시에 축사는 도덕이 종교 없이도 존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표현했다. 그의 신학적 동료인 요한 요아힘 랑게는 격분했다. 랑게와 그 밖의 다른 신학자들이 추진한 고발에는 볼프가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결정론자라는 것도 역할을 했다." "여러 해에 걸쳐 이뤄진 신학적-철학적 논쟁은 독일에서 철학이 신학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기여했으며, 또한 랑게가 프랑케 재단과 더불어 종교 개혁 이래 독일의 가장 독창적인 종교적 운동이었던 경건주의의 대표자였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분명 윤리학을 신학 없이 근거지을 수 있다는,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볼프의 견해를 공유하지만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결정론에 대한 반항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칸트도 경건주의적으로 교육을 받았다."(100-1)


5 독일의 윤리 혁명: 임마누엘 칸트


"칸트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의무를 지는 상황에 도달할 수 있으며, 오로지 그것만이 그에게 존엄을 부여한다고 개념화한다." "자연 내에서의 신의 현전은 회의적으로 유보하면서 신에 대한 관계를 내적인 것, 즉 윤리 법칙에서 근거짓고자 하는 이념─칸트의 정언명법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과 기능적 등가물이다─은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경건주의의 철학적 표현이다. 독일 정신사에서 칸트의 특수한 지위를 이루는 것은 그가 계몽과 그것에 본래적으로 적대적 의도를 지닌 경건주의 사이의 균형, 즉 그것의 완전한 표현이 바로 그 자신의 인격적이고 지적인 통합성인 그러한 균형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종교성을 라이프니츠처럼 모든 학문적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소원에 대해서도 열어 놓았으며, 역으로 계몽주의적 노력에 대해서도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에게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윤리적인, 아니 바로 종교적인 추진력을 부여했다."(109-10)


"칸트의 천재적 착상은 그가 인과율에 대해 교조적 형이상학도 흄의 회의적 경험주의도 충족시킬 수 없는 타당성을 확증해주는 동시에 인간적 자유의 가능성도 보존한다는 점에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과성과 그와 비슷한 다른 범주들이, 아니 더 나아가 바로 공간과 시간이 우리로부터 유래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현실에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범주들 없이는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범주들은 선험적으로 타당하다. 세계의 통일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통일에 근거한다. 우리는 현상계에서 모든 변화의 원인을 추구해야 하지만 예지적 현실, 즉 우리의 도식화한 범주들에 의해 형식화되지 않은 본래적 현실에 자유로부터의 인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제하지 말아야만 한다(자유의 형이상학). 우리는 역설적으로 바로 우리가 현상들에 인과성을 규정함으로써 자유롭다. 왜냐하면 인과성은 우리의 자발적인 정립이기 때문이다."(111-2)


"한 가지 점에서 칸트는 데카르트와 근본적으로 관계를 끊는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에게 우리의 의식 흐름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게 주어져 있다. 그에 반해 칸트에게는 우리 의식의 시간성 자체가 다만 그 자체에서 우리인 것의 주관적 변형일 뿐이다. 시간성은 현상적 자아에 속하지 분명히 무시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예지적 자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공허한 점에 의하거나 우리의 실천 이성을 통하는 것 외에는 예지적 자아에 이르는 접근 통로를 지니지 않았다. 이 두 가지에서 독일 관념론은 시작될 것이다." "달리 말해 선험적 종합 인식의 실존과 그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하나의, 아니 아마도 바로 그 결정적 문제이며 그에 대한 몰두가 독일 철학을 영국 철학과 구별해주는 본질 징표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견지될 수 있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선험적으로 종합적인 것으로 간주한 그 판단들 모두의 공통된 징표를 제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113-5)


"칸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규정하는 실천 이성이 실질적 윤리학이 아니라 오직 형식적 윤리학만을 근거지을 수 있다는 것에로 이어진다." "도덕 준칙[정언명법]이 허락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 그것의 보편화 가능성은 칸트가 특정한 행위를 단지 정언적으로만이 아니라 예외 없이 금지하는 결과를 가진다. 거짓말은 그것이 죄 없는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가능성일 때에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숙주의는 실질적 선의 위계질서의 결여로부터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일단 예외를 허용하면 모든 것에 대해 쉽게 생겨나는 정당화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이는 선구자[아우구스티누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플라톤의 윤리학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순된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독일 문화를 각인했다. 너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속에도 존재하는 인간성을 결코 한갓된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목적으로서 사용하라는 요구는 순수한 형식주의를 넘어선다."(128-9)


"더 나아가 칸트는 모든 저항권을 거부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일단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규범에 대한 예외를 정당화할 수 없는 그의 원칙적 무능력의 결과다. 왜냐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가 무정부를 피하고자 한다면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는, 일단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규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칸트의 학설은 그의 루터교적 표현인데 그것은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과 연관해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칸트의 학설은 양날의 검이다. 혁명을 거부하는 만큼 그는 또한 그 혁명이 성공적일 때에는 반혁명도 배척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분석은 혁명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공감에 의해 고무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혁명 정부를 존중해야만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참인 것은 존 로크의 그것과 같이 적극적인 동시에 적절한 저항론이 앵글로아메리카 세계와 달리 독일에 대해서는 그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135)


6 종교적 과제로서 정신과학: 레싱, 하만, 헤르더, 실러, 초기 낭만주의와 빌헬름 폰 훔볼트


"역사철학의 역사에서 본래적인 발전 단면은 18세기에, 잠바티스타 비코도 여전히 따르고 있던 고대의 순환 모델이 진보 이념에 의해 교체될 때 이루어진다. 비코와 헤르더가 비슷한 관심을 공유하고 양자가 특히 인간 문화의 전前-이성적 단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헤르더의 역사철학은 볼테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보를 긍정한다." "그러나 볼테르와 달리 그리고 비코와는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헤르더는 개별적인 시기들이 그 자체로서 파악해야 하는 각각의 상이한 논리를 지닌다는 점을 고수한다." "헤르더에게 상대주의를 귀속시키거나 심지어 국가사회주의자들처럼 그를 반보편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선구자로 찬미하는 것은 잘못이다. 헤르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가능하고 많은 경우 이후의 것들과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덕과 악덕은 종종 서로 뒤얽혀 있다."(150-1)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게 종교란 형이상학으로나 도덕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취미〉다. 따라서 종교는 낡은 교의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도 다시 다가갈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신학은,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 아마도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단절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계몽과 경건주의에 그 뿌리를 지닌다. 이제 전통의 권위 대신 주관적 진지함과 근대적 합리성 표준이 학문적 신학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이후의 신학적 저술에서도 그가 모든 교조적 동기들로부터 분리하는 근대적 해석학에 계속해서 충실히 머문다. 우리는 나중의 교의들을 성서에 넣어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8세기가 일차적으로 헬레니즘 철학을 연구했던 데 반해 이제는 고전 그리스 철학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그 전환은 결국 독일 관념론이 플라톤주의를 가장 독창적으로 다시 체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58-9)


"빌헬름 폰 훔볼트의 언어 유형론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본래적으로 철학적인 것, 즉 언어학에 고유한 가치를 보장하고 가령 방언들에 대한 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은 언어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확실히 훔볼트는 사유에 대한 언어의 영향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어떠한 언어 외적인 입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훔볼트의 테제를 나중의 언어상대주의자들의 그것과 구별해주는 것은 그가 언어 자체를 정신의─무의식적인─작품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는 각각의 모든 언어의 근저에 보편적 언어 능력이 놓여 있으며, 이것이─비록 상이한 언어에서 서로 상응하는 단어의 개념 내용이 언어의 전체론적 본성을 근거로 할 때 결코 동일하지 않다 할지라도─원리적으로 상호적인 이해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각각의 모든 언어는 유한하게 많은 요소로부터 그것들의 계속적인 형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 특히 문학과 철학이 그 언어를 확대한다."(162)


7 체계에 대한 동경: 독일 관념론


"독일 국민의 형성에서 중심적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루터다. 루터 이래로 축복과 진지함에 대한 관심이 독일인의 본질 징표라는 것이다. 피히테는 정당하게도 독일에서는 자율성 추구가 종교적 뿌리를 지니는 까닭에 종교와 철학의 대립이 덜 부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본다.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이 이성에 의해 새롭게 정향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피히테가 '세계 지배'를 약속하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정신에 대해서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방식으로 실재적인 독일 국민과 융합한다. 왜냐하면 피히테는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프랑스인에게 저항할 용의를 갖추게끔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히테를 21세기의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피히테가 자신의 잠재적 해방 전사들에게 그들의 행위로부터 구원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약속한다면 그는 라이프니츠와 칸트가 그 앞에서 멈칫했던 한계를 넘어서 있다."(174-5)


"셸링은 1802년의 《철학 일반에 대한 자연철학의 관계에 대하여》에서 자연의 윤리적 기능화를 물리친다. 셸링에 따르면 자연을 자기 목적으로서 고찰하는 것은 신을 단지 요청으로 간주할 뿐인 칸트와 피히테의 인간중심주의보다 더 종교적이다." "자연 속에 바로 자연과학이 단지 경험적으로만 열거하는 저 근본 형식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절실한 관심은 포기될 수 없다. 이 물음은 대답하기 어렵지만 정당하며, 아니 관념론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으로부터는 만약 자연이 단적인 사실이 아니라 이성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피할 수 없다. 셸링의 목표는 현실의 근본 구조를 실재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양극적 대립의 전개로서 해석하는 것인데, 이 대립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자연과 정신의 대립에서 표현되며, 그 이후 각각의 분과 내부에서 더욱더 분화된다. 그리하여 오로지 그렇게 해서만 원리들을 파악할 수 있다. 〈체계 내의 이 위치는 그것들에 대해 존재하는 유일한 설명이다.〉"(181-2)


"1800년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는 정신의 근본 구조를 〈자기의식의 전진하는 역사로서〉 질서 연관 내로 가져오고자 하는데, 거기서 셸링은 〈자연과 이지적인 것과의 평행론〉에 주목한다. 피히테에 대한 특별히 중요한 내용적 보완은 셸링이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이후에 또한 예술의 철학도 다룬다는 점이다." "셸링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를 다른 모든 인간들로부터 분리하고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이 완전하게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 의미가 무한한 사물들을 언표하거나 서술하도록 강요하는〉 하나의 힘 아래 서 있다. 모순들로부터 출발해 예술가는 무한한 조화를 얻기 위해 애쓴다. 예술과 학문은 동일한 과제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물론 후자에 대해서는 끝없는 것으로 머문다. 그에 반해 예술은 학문이 비로소 도달해야 할 그곳에 이미 존재한다. 오로지 예술만이 철학이 서술할 수 없는 것, 요컨대 생산에서의 무의식적인 것을 증거하며, 자연과 역사의 근저에 놓여 있는 통일을 열어 보인다."(182-3)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은 장엄하면서도 모호한 언어로 헤겔의 프로그램, 특히 〈참된 것은 전체다〉라는 그의 전체론과 셸링의 동일성 이론으로부터 이반의 시작을 묘사한다.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라는 것이다.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절대지에까지 이르는 의식 형식의 만화경을 펼치는데, 거기서 성숙한 체계의 범주들로 하자면 주관 정신으로부터 객관 정신을 거쳐 절대 정신으로, 그러므로 철학적 심리학으로부터 사회론을 거쳐 종교철학에로 움직여간다. 세계상의 본질을, 가령 그리스적 윤리와 칸트적 도덕철학의 본질을 몇 번의 필치로 파악해내는 그의 능력은 압도적이다." "저작의 목표는 두 관점의, 즉 주관과 객관의 그러나 또한 나와 우리의 일치다. 왜냐하면 《정신현상학》은 상호 주관성이라는 주제에 《엔치클로페디》보다 많은 공간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지배와 예속' 장은 마르크스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는 이후의 발전을 너무도 지속적으로 각인했다."(191-2)


"〈체계 없는 철학함은 학문적인 것일 수 없다.〉 헤겔은 학문의 내적 건축술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갖고자 한다. 그는 종합적-선험적 판단이 아니라 개념의 선험적 체계에 관심을 지닌다. 근본적으로 《엔치클로페디》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눈앞에 떠올랐던 이데아의 우주를 조탁해낸 것이다." "개념은 우리가 현실에 덮어씌우는 어떤 것이 아니다. 비록 개념이 경험으로부터의 추상에 의해 획득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실재 자체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지성과 이성이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 사상'이라는 표현이 포함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 객관적(또는 절대적) 관념론은 개념경험주의가 견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근본적 개념은 스스로를 선험적인 구성 과정에 빚지고 있다는 통찰과, 우리의 개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개념 때문에 현실의 맥박에 다가선다는 실재론적 확신과의 결합이다. 그것은 단연코 세계가 신적 사상들의 표현이라는 종교적 신앙과 일치한다."(194-5)


8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대한 반란: 쇼펜하우어의 인도 세계 발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대안적 세계관을 좀더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서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그 세계관이 불교의 핵심과 일치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이래로 서구 지식인들은 아시아의 세계관을 지혜의 탁월한 원천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우파니샤드 및 불교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칸트에게서 자신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천을 보았다. 그의 철학은 분명히 칸트에 대해 반작용하며, 그는 사물-자체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소망을 공유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강력하게 칸트의 주관주의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그에 따르면 주관주의야말로 현상적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지배하는 결정론을 최종 심급에서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현실의 최종 근거는 인식 불가능한 사물-자체가 아니라 내관으로부터 확신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다."(218-22)


"객관적 관념론적인 근본 사상을 기묘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쇼펜하우어는 물론 현실을 그가 '이념들'이라고 부르는 의지의 객관화의 연속적 단계로서─즉 비유기체적인 것으로부터 유기체를 거쳐 인간적 개별성에까지 이르는 단계로서─해석한다." "예술 향유와 도덕적 행위 그리고 윤리학의 정점인 금욕은 그에 따르면 거기서 의지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세 가지 형식이다. 정신이 세계의 원리로서 절대 이념에로 귀환하는 헤겔의 체계와 달리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한 반란으로 끝나는데, 그 반란은 '의지'라는 표현이 때에  따라서 동음이의어적으로 도덕적 세계 질서와 관계됨으로써 단지 임시방편적으로만 은폐된다. 게다가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순수하게 기술적이다. 그것은 어떤 힘이 이기주의를 초월하는가 하는 물음을 추적하며, 그것을 동정심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왜 이타주의적 태도가 도덕적인가 하는 것은 근거지어지지 않는다."(223-4)


9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반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카를 마르크스


"종교적 이념의 근저에 신적인 계시가 놓여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 정신의 꿈〉, 〈인류의 어린이 같은 본질〉이다. 종교를 원시적 발전 단계로 추방하는 것은 같은 시기 프랑스의 콩트에게서 발견되며 모든 세속화 이론의 근저에 놓여 있는데, 물론 그러한 이론에 대해서는 종교가 경이로운 저항력을 보였다. 포이어바흐의 이론에서 특수한 것은 헤겔의 의식철학과 그의 사변적 명제 이론에 그 배경이 있다는 점인데, 그에 따르면 주체·주어는 결코 술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포이어바흐에게 종교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좀더 정확하게는 다른 본질로서 자기의 본질에 대한 태도다. 종교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정신의 특성을 대상화하며, 그 특성을 외적인 힘에서 특히 가치로 충만한 것으로서 경험한다. 〈무한자의 의식은 의식의 무한성에 관한 의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사는 인간 정신의 진화에 대한 중심적인 지표일 것이다."(234-5)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발견으로서 이해되는 그의 비판의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포이어바흐를 그리스도교의 적대자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우리는 이 칭호를 니체를 위해 남겨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포이어바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사랑이다. 이 명제는 그리스도교의 최고의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사랑을 신앙이 아니라 이성과 결합해 그것을 자기 자신을 통해 근거짓는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삶의 척도다. 그러나 그 역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 그리스도 자신인 그리스도교도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위선이 곧이어 그에 뒤따르는 반자연성을 위한 완곡어법으로서 초자연성을 논박한다. 그는 삶 자체에서 종교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후자는 비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은 다만 그가 윤리학을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라는 명제로 환원하고자 하는 소박성뿐이다."(238)


"역사의 공산주의적 최종 상태에 대한 예측은 경쟁 없는 경제가 정체한다는 경험과 모순된다. 그 예측은 빈곤의 극복을 세계사적으로 처음 전망케 해준 산업혁명에 의해 생산력이 해방된 것에 대한 매혹에 토대한다. 그러나 이것이 왜 사적 소유의 철폐와 함께 가야 하는지는 결코 근거지어지지 않는다. 자유를 오로지 공동체 속에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이 공동체가 강제되지 않을 뿐이다." "과학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요구는 그 이론이 자본주의의 붕괴에 관한 자기의 예언에 관해 침묵하기 위해 단지 (환경 파괴와 같은) 현실적 과정조차 거의 설명할 수 없었던 만큼 더욱더 우스꽝스럽다. 마르크스가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규범적 권력분립론을 다듬어내길 거부한 것은 그 사회에서도 모든 지배가 남겨질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권력 남용을 위한 처방전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특유한 변증법이 지배한다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254-5)


10 보편주의 도덕에 대한 반란: 프리드리히 니체


"좋은 철학은 본질적으로 표현의 풍부함 그 이상이다. 그러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역시 표현적인 과제를 가진다. 그리고 니체 반열에 올라선 철학적 표현 무용가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인간 영혼과 문화의 심원함에 대한 민감화 및 정신의 위협과 니체가 자기 자신에게서 풍부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도덕적 최고 성취의 의문스러움에 대한 지식은 긍정적인 의식사적 변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호언장담하는 무자비함, 스스로 강해지고자 했던 그의 강함은 주로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강함에 대한 그의 찬가는 오히려 그와 반대였던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가 성취한 것은 이념적 세계 속에 쓰여 있는 사실들, 즉 미학적 민감성과 심리학적 명민함 그리고 문헌학적-역사학적 지식이 논리적 지성과 일관된 형이상학에 대한 감수성을 동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유용하기보다는 해롭다는 사실, 위대한 덕과 몇 가지 약점의 결합은 종종 모든 악덕이 뒤섞인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258-60)


"니체, 즉 객관적 도덕에 대한 믿음을 지니지 않는 이 모럴리스트의 역설은 그가 지속적으로 그 장르와 처음에는 그 자신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저 도덕적 민감성을 해친다는 데 존립한다." "얼마나 많은 허영심(〈인간적 '사물 자체'〉)이, 얼마나 많은 탁월함에 대한 소원과 열등함에 대한 두려움이 이른바 덕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지, 얼마나 많은 숨어 있는 비천함이 모든 일상 대화의 근저에 놓여 있는지 그 어느 누구도 이 도덕적 엄숙주의자만큼 깊이 감지하지 못했기에 가장 엄격한 고해 문답보다 그를 읽을 것이 더 요구된다. 왜냐하면 평등주의자, 다시 말하면 보편주의에 대한 니체의 투쟁이 숙명적인 만큼이나 그의 근대의 형식주의가 가치들과 덕들에서 전통의 풍부함을 종종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기 니체마저도 보통의 무신론자와 실증주의자보다 더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종교가 교육하는 도덕적 차별성에 대한 그의 진지함이다."(265-6)


"형이상학에 대한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형이상학적인 시대와 더불어 또한 지속적인, 즉 스스로 살아남는 제도들을 창조하는 추동력도 사라졌다는 것을 단연코 인정한다. 자신의 시대는 그 본질이 불안정함, 아니 야만인 것의 비교와 가속화의 시대로서 표현된다. 삶은 오로지 자신의 동기와 관련한 그러나 또한 인정된 모범들의 그것과 관련한 자기기만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종교는 결코 단지 위선만이 아니라 긴장되고 성공적인 자기기만에 의거한다. 니체가 그 이상주의적 삶의 형식에 대해 많은 재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은 이 세계를 흥분 없이 고찰하며 그에 의해 마음의 안정에 도달한다─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에 대한 칭찬은 의지가 지성의 후견자라는 테제와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의 유산이다. 쇼펜하우어로부터 니체는 물론 현실이 그 본질에 따라 정신에 적대적이라면 자유로운 정신이 현실을 인식한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속한다."(267)


"근대 문화의 표면 밑에서 제어된 악의와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들의 마그마가 끓어오르는 것을 어느 누구도 니체처럼 그렇게 뚜렷하게 듣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단순한 관찰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늦어도 《즐거운 학문》에서는 스스로 불을 내뿜기 시작하며, 그러함으로써 스스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숙명을 가속화한다. 언젠가 니체는 인간적 자기기만과 그리스도교의 퇴락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겨워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새로운 가치표들을 세워놓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위한 논증은 그 자신의 인식 이론에 따르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문학적인 작품을 저술해야만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는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가능한 모든 인물─이들 가운데 몇몇은 비유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새로운 윤리학을 고지하는 자를 서술한다. 문제되는 것은 이것이 니체의 너무도 키치적인 책이라는 것이다."(277-8)


11 도전으로서 정밀과학과 분석철학의 부상: 프레게, 빈학파와 베를린 학파, 비트겐슈타인


"오늘날에는 이미 오래전에 극복한 분석철학의 최초의 형태는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였다. (첫 번째 것은 현상주의에 대한 공감을 지녔고, 두 번째 것은 좀더 실재론적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논리실증주의의 목표는 물리학에서 그 모범을 지니는 통일과학이다. 형이상학의 진술은 가령 거짓인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거기서 다루는 것은 의미 없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구문론에 반해서 형성된 사이비 명제이다. 하나의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 단어를 지닌 명제를 검증하기 위한 방법이 알려져 있어야만 하며, 아니 결국 그와 같은 종류의 명제는 프로토콜 명제로 환원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형이상하적 신 개념의 타당성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까닭에 '신'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판단들은 분석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음악이나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감정의 표현이다─형이상학자는 〈음악적 능력이 없는 음악가〉라는 것이다."(291, 300)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이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어떠한 명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은 사상들을 다만 분명하게 밝힐 뿐이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심리학을 포함해) 자연과학의 총체다. 윤리학의 명제들은 존재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명제들의 무의미한 본성을 인정한다. 세계를 올바로 보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을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간 다음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고찰, 즉 형식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지만 거기서 더 이상 결코 칸트의 경험의 유추를 전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고찰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신이 더 이상 세계 속에 현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계의 실존이라는 단적인 사실 속에는 무언가 신비적인 것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 관해 이론화하는 것은 전망 없는 일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306)


"결정적인 것은 플라톤적이고 데카르트적인 의미 이론과의 단절을 나타내는 언어놀이 개념이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사건, 즉 삶의 형식의 부분이다. 요컨대 요소적인 대상들에 대한 자율적 관련 대신 '길들임'이 행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언어 획득은 일정한 활동과 얽혀 있으며, 역사적으로 생성된 모든 언어는 서로 다른 추상성을 지니는 수준을 포함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결정적인 것은 언어 획득에 대해 정신적 연관에 대한 마음의 지배, 즉 그 경우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생각함'이 선행한다는 이념의 거부이다." "그의 언어놀이 개념의 상대주의적 귀결은 곧바로 사회과학으로부터 학문 이론에 이르는 많은 분과에서 끌어내졌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하는 새로운 철학 개념이다. 철학의 성과는 〈지성이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쳐서 감염된 종기들〉이며, 자기의 목표는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보여주는〉 거라는 것이다."(309-10)


12 신칸트주의와 딜타이에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근거짓기 시도 및 후설에서 의식의 해명


"신칸트주의 이전에 이미 빌헬름 딜타이가 '역사 이성 비판', 다시 말하면 정신과학의 정초를, 그것도 실험실 안의 연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삶의 철학적으로 획득한 이해심리학에서 시도했다. 이와 관련한 그의 최초의 주저 《정신과학 입문》(1883)은 (그에게서는 또한 사회과학도 포함하는) 정신과학을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으로부터 경계 긋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는 독일 관념론과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항한 이중전선 전투를 이끌어나가며, 따라서 오늘날 대학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신문 문예란도 장식하는 저 특수하게 정신과학적인 의식, 즉 엄밀한 철학적 논증에 대한 혐오와 수학적 무능력 및 정밀한 자연과학에 대한 적은 이해를 보이는 엄청난 역사학적 박식함의 형성에 기여했다. 이 저작은 고전 이후 철학의 아주 많은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건축술의 발생적 원리가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319)


# 신칸트주의, 특히 바덴학파(빈델반트와 리케르트가 속한)의 주요 주제는 칸트가 비워둔 주제, 즉 자연과학과의 경계를 설정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적 근거짓기이다.


"후설은 칸트와 함께 그리고 헤겔에 반대해 모든 범주적인 것은 감성적 직관 안에 기초해 있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헤겔과 함께 그리고 칸트에 반대해 범주가 대상을 변조한다는 이론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비-범주적 작용에 대한 어떠한 호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자각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설을 칸트 및 헤겔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그에게는 범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낯설다는 점이다. 범주는 그 원천을 직관에서 지닌다. 그 점은 최종적 타당성 기준으로서 명증성에 대한 호소와 마찬가지로 불만족스럽다. 범주적 직관이나 가치 직관의 경우처럼 서로 모순되는 명증성을 끌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결실 풍부한 대화가 성립할 수 있는지 거의 파악할 수 없다. 또한 명증성을 착각하는 현상은 증명에서의 오류 문제보다 더 커다란 문제인데, 왜냐하면 저 착각된 명증성을 현실적인 명증성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어떠한 절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330)


"후설의 마지막 성찰은 초월론적 유아론을 모나드론적 상호 주관성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후설은 의식적으로 라이프니츠로 돌아갔지만, 모나드 각각이 결코 그들 자신의 세계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별적 모나드의 지평은 가령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이나 '생활 세계'에서 작용하는 까닭에 교호적으로 서로에게 열리지 않는 일은 단지 우연적으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후설은 더 나아가 주관성과 상호 주관성의 관계를 두고 씨름한다.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비록 세계 내부적으로 개별적인 주관성이 상호 주관적으로 공유된 생활 세계의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고립이 없다면 근본적인 철학이 가능하지 않을 초월론적 에포케(Epoché, 판단중지)일 것이다. 초월론적 자아는 오직 그에 대해서만 너와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 내부적 자아와 다른 자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초월론적 자아는 자기 내에서 초월론적 상호 주관성을 구성해야 한다."(333-6)


13 독일의 재앙에 철학의 공동 책임은 존재하는가? 하이데거, 겔렌, 슈미트: 결의성과 강력한 제도 그리고 정치의 본질로서 적의 제거


"《존재와 시간》은 어떠한 구체적인 윤리적 내용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 것 자체는 비난이 아니다. 한 철학자가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저작의 음흉한 점은 그것이 양심이나 죄같은 개념을 고쳐 정의함으로써 전통적인 도덕적 의미를 전복시키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결의성이 유일한 관건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제시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셸러와 함께 칸트를 형식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윤리형이상학》은 확실히 하이데거의 반-윤리학만큼이나 형식주의적이지 않다. 비록 《존재와 시간》이 단지 존재론의 역사의 파괴에 착수할 뿐이라 할지라도, 이는 그에 못지않게 윤리학의 파괴를 제공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언어가 프랑스 모럴리스트들에게서 훈련받은 니체의 모범적인 산문보다 훨씬 덜 명확한 까닭에 그리고 또한 '존재' 같은 전통의 표어를 사용하고 근대에 반하는 자신의 격정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까닭에 그는 니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355)


"1949년 처음으로 행한 강연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하이데거는 정당하게도 기술이 무언가 중립적인 것이라는 테제를 비판한다. 기술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에서는 세계 관계의 방식이 현현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것이 그것에게는 부품이고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인 근대 기술을 〈몰아-세움〉이라고 명명한다. 근대 자연과학은 그 은밀한 목적으로서 근대 기술에서 이미 착수되었다. 그리고─우리가 기껏해야 그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만날 수 있는─이러한 기술의 위험은 어느 경우에도 단지 〈어쩌면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기계와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본질의 변화에 존립한다. 그의 퇴락의 역사철학과 연관해 하이데거는 또한 국가사회주의적인 권력 의지에 대해서도 한 자리를 인정했다." "이것은 하나의 업적이지만, 하이데거는 그로 하여금 〈존재론적 본질 진술〉을 넘어서서 도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확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범주를 갖지 못했다."(365-6)


"이 장에서 다루는 세 사람의 국가사회주의 지식인 가운데 카를 슈미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도덕적으로 가장 거부감을 주는 인물이다. 이러한 판단을 가지고서 나는 단지 그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논문 〈지도자는 법을 떠받친다〉에서 1934년의 이른바 룀-반란과 관련해 살인을 정당화한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 이후 후회에 대한 그의 무감각,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감상(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잠재적 피고였지만 당시 로버트 캠프너는 기소를 포기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아니 그의 독창적인 정치 이념이 그 윤리적 핵심과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자신의 가톨릭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자랑을 격분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법학자가 지난 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는 판단을 회피하지 못한다." "슈미트는 다수가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바이마르 시대 일군의 법학자와 법철학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374-5)


"슈미트는 특히 주권 개념에 매혹당해 있다. 예외 상태에 관해 결단하는 자는 주권을 가질 것이다." "거의 신학적인 존엄이, 그에 귀속되는 근거지어지지 않고 근거지을 수 없는 결단이 법의 최종적 근거다. 이는 명백히 하이데거의 결의성을 지시한다." "슈미트 논고의 문제는 그가 적에 대한 설명에 특유한 도덕적 숭고함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설명은 평준화하는 중립화의 자유주의적 시대로부터 벗어난다. 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치적인 것을 전통같이 공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향한 경계 설정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다. 슈미트는 권력 투쟁을 실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으로 간주하는 정치가를 정당화하였다." "국가의 절대적 주권과 예외 상태, 독재와 전쟁에 대한 그의 매혹은 단지 독일이 전체주의로 비틀거리며 치달아가는 것에 날개를 달아준 것만이 아니다. 9·11 이후 슈미트의 이념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모국인 미국에서도 〈영감을 불어넣으며〉 작용해왔다."(378-80)


14 서유럽의 규범성에 대한 연방공화국의 적응: 가다머와 두 개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한스 요나스


"예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정신과학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재구성은 《진리와 방법》에 고전적 지위를 보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딜타이 이래로 촉구된 역사학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과제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의 본래 관심은 해석학이 딜타이와 함께 완전히 뒤얽힌 역사학주의의 난문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역사학주의의 역사적 발생을 모사함으로써 가다머는 이 역사학주의 자체를 상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발생과 타당성은 이 운동의 경우에도 항상 구별되어야 한다. 가다머의 지속적인 성취는 단지 해석해야 할 것에 관해 배우고자 할 뿐인 역사학주의적 관점에 대해, 이해란 오직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으로부터 배울 때에만, 즉 우리가 그 속에 원리적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해석해야 할 것에서 아마도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 사태 물음을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테제를 가지고 도전했다는 것이다."(384-5)


"이러한 관점 변화의 긍정적 결과 중 하나는 가다머에 따르면 가령 철학사학이 단순히 고전들에 관해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논증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바람을 지니고 그것들을 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가다머가 동시에 독일 정신과학에 19세기 이래로 세계적 타당성을 마련해준 역사학적 이해의 의도주의적 표준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살피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며 철학적으로 종종 그 결실이 풍부하다─그러나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저자의 의도(mens auctoris)를 넘어서는지에 관해 해명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겐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다머의 책 제목에서 '와(und)'는 '대신에(statt)'를 의미한다. 진리는 방법 없이 생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몇십 년간의 정신과학에 대한 해체주의적 파괴 전체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때 다르게 이해한다〉는 가다머에 의해 고무되어왔다."(385-6)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1936)에서 영화나 사진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에 대해 많은 희망을 걸고 파시즘에서의 정치의 미학화에 대해 미학의 정치화로써 대답하고자 했던 벤야민과 달리 아도르노는 새로운 발전에 대해 희의적이며 예술의 정치적 도구화를 거부한다. 그의 《부정 변증법》(1966)은 그것이 제기하는 물음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한다. 이 저작이 헤겔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비-동일적인 것이라는 구호의 이름으로 현실의 개념적 범주화와 더 나아가 현실과의 화해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보편적 은폐 연관(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에 대한 기능적 등가물)에 대한 지시는 자신의 모순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아도르노 자신도 불가피하게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그의 책을 가치 있는 동시에 더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 자신의 사유 경력 초기에 이러한 철학적 표현 무용에 사로잡힌 사람은 언제고 다시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하는 걸 배우기 어려울 것이다."(392-3)


"이웃 간의 갈등이나 가정 내 갈등을 당사자 자신에게 맡기는 것은 확실히 올바르다. 그러나 도덕적 갈등을 오로지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는 망상적이다. 가령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나 예를 들면 분배 문제의 성과 원리 같은 실질적 원리 없이 어떻게 합의를 달성할 수 있는지 통찰할 수 없는 것이다." "담론 윤리학에는 칸트의 정언명법에 근접하는 어떠한 등가물도 없다. 따라서 담론 윤리학은 자기의 본래적 관심사에 반해 자신의 도덕적 결정을 실제적 기준에서가 아니라 아마도 다수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에 관한 가정에서 얻어냈고, 바로 합의가 최종적인 진리 기준인 까닭에 그러한 것을 더 이상 기회주의로 전혀 느끼지 않는 유형의 사람들을 장려한다." "의식사적으로 담론 윤리학은 기껏해야 객관적 가치 질서의 사상을 자신의 자유 열정에 대한 모욕으로서 이해하는 동시에 국가사회주의의 경험 이후 윤리적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는 시대에 적합할 뿐이다."(395-6)


15 왜 계속해서 독일 철학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가?


"이제 독일 정신의 본질적 특징─이성주의적 종교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독일 관념론을 거쳐 보편적 상대주의에 이르는─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도 독일적인 근본성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그 잔여물에서는 심지어 철학적 체계학에 대한 독일적 감각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그토록 뚜렷하게 가령 미국과 구별해주었던 철학적 형식의 종교성은 사라져버렸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저주받은 12년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이 과거의 정신적 보물을 자기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위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파악은 다만 해석학적 유보를 하면서만, 가령 고전적 사상가들의 기념일에 즈음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연방공화국의 극장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독일 극작가들의 천박화는 자신의 과거에 직면한 이러한 당혹스러움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러한 곤경에 맞설 능력이 없지만, 최소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통해 그것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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