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념론 철학
니콜라이 하르트만 지음, 이강조 옮김 / 서광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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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부 피히테, 셸링, 낭만주의


서론


"독일관념론 사상가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최후의 명백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 포괄적이며 엄밀하게 통일적인 철학 체계의 창출이다. 모든 사상가들 앞에 저 〈미래의 형이상학〉의 이상이 떠올랐고, 칸트의 강력한 사유의 노력이 처음으로 그 서설을 제공했다. 그들은 칸트가 그의 후기의 두 비판에서 이 형이상학을 이미 개설적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을 전연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설은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체계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철학의 이념을 충족시키면서 성립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체계가 가능하고 또 인간 이성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일체의 운동은 젊은이처럼 강력하고, 창조를 기뻐하는 철학적 낙천주의의 특징을 띠고 있다. 일체의 회의는 단지 통과해야 하는 단계의 의미, 검사 및 숙고의 법정이라는 의미, 그리고 여러 문제들을 보다 깊이 내면화하고 철저하게 처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을 의미를 가질 뿐이다."(24)


"이러한 철학적 전개에서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무엇보다도 철학적 영역에서 시도했고, 무한자와 비합리적인 것으로 향하는 그들의 동경의 정신을 관념론적 사변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유사한 내용이 횔더린에게도 일정 부분 적용된다." "비판적-체계적 사유의 구조 속에서는 낭만주의적, 범신론적 그리고 신비적인 요소가 우선은 여전히 이물(異物)처럼 작용하지만, 이것이 저 사유를 처음에는 천천히 안으로부터 밖으로 완성시켜서 그 직선적 궤도로부터 밀어제친다." "칸트로부터 합리주의적이라는 기분이 드는 관념론이 여기서부터 겪게 되는 만곡(彎曲)은 가장 실증적으로는 윤리학, 미학, 그리고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합리주의는 느지막하게 쇼펜하우어 및 셸링의 후기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만연한다. 반면에 사상적 동기의 풍부함에 있어서 낭만주의적 창작 및 생활의 덕을 입고 있는 헤겔은 최후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 충실하고 있다."(27-8)


1장 칸트학도와 반칸트학도


"라인홀트는 〈비판〉을 체계로 변형하려는 요구를 가진 최초의 인물로서 등장한다. 비판은 이론적 부분에서는 경험으로부터, 실천적 부분에서는 도덕법칙, 즉 어떤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비판에서는 통일적인 전제, 즉 일체의 것이 도출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원리가 결여해 있다." "동시대인들은 칸트의 철학을 라인홀트의 철학에 비추어서 보았다. 그리하여 두 이론 간의 구별이 우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라인홀트가 전체적으로 보아 칸트철학의 의도를 긴밀하게 고수하면 할수록, 그만큼 바로 요소 철학의 일련의 특유한 특징들이 매우 성과 있는 방식으로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정말로 진실로 남아 있다. 이 특징들은 다음의 것이다. ①형식과 질료 이론의 관철, ②물자체의 필연성과 인식 불가능성의 정립, ③체계의 출발점으로서의 원칙의 통일성, ④조건들의 연속적인 제시로서의 도출 방법, ⑤실천적 능력에 의한 이론적 능력의 피제약성."(34, 41)


"마이몬에게도 물자체가 우선 장애가 되는 주요점이다. 그는 이 개념의 해명을 애초부터 회의적으로, 즉 바로 비판 자체의 그 정의들로부터 얻으려고 한다." "마이몬은 최초로 관념론적 관점을 진지하게 다룬다. 라인홀트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유할 수도 없다. 우리가 물자체에게 덧붙이는 모든 징표─단지 촉발 원인의 징표일지라도─는 의식 속에 정립되어 있고, 따라서 사실상 물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어떤 구조물에 귀속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의식의 바깥에 있는 물자체는 징표를 갖지 않은 대상일 것이고, 어떠한 사유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유는 징표에 의한 규정 작용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물이 아닌 것〉일 것이다. 마이몬은 그것을 수학의 허수에 비유한다. 이에 반해서 비판적으로 이해된 물자체는 유리수와 똑같이 실재하는 무리수─이 무리수가 근사치의 무한 계열의 한계치를 형성하기 때문에─에 비유된다."(49)


"그러나 마이몬은 자기의 고유한 입장을 가장 엄격하게 순수 이성 비판의 입장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이 구별은 출발점 안에, 즉 사실의 문제 안에 놓여 있다. 칸트와 함께 그는 경험의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학문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이론(異論)을 제기한다. 이 점에서 그는 흄과 일치한다. 수학만이 선천적 종합판단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경험적 회의주의〉라 부른다. 경험적 회의주의는 슐체의 회의주의처럼 비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을 전제하고 있고, 비판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의 절차만이 모든 경험은 불완전한 인식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경험적 회의주의〉는 결코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경험적 사실 인식은 결코 〈온전한 의식〉이 아니다. 그러한 어떤 온전한 의식에게는 사실을 산출해 낸 선천적 형식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속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회의론은 근본적으로 순수한 선천주의이다."(54-5)


"야코비에게 칸트의 체계는 순수한 주관주의를 의미한다. 칸트가 경험론적-관념론적 이해를 거부하게 되는 객관주의적 전환은 야코비에게는 관점상의 탈선으로 간주된다." "야코비가 보기에 우리가 칸트와 함께 물자체를 존립시킨다면, 비판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비판의 전체의 구상은 자발성과 수용성의 이원성에 기초해 있고, 수용성은 주관 바깥의 현존재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자체 없이는 비판의 관점은 획득될 수 없고, 그러나 물자체와 더불어서는 비판의 관점은 주장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야코비에게는 비판적 관점의 유지 불가능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는 비판의 결과로부터 역(逆)의 귀결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관념론과 물자체는 통일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포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관념론은 많은 가능한 관점 중의 하나일 뿐이고, 물자체는 모든 인식의 필연적 상관자이다. 따라서 물자체는 고수되어야 하고 관념론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실재론적 관점이 일어난다."(62-3)


"야코비는 자기의 신앙 이론을 매우 엄밀하게 칸트의 이론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칸트 역시 물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서 승인하고 있고, 신앙에게 지식을 초월하는 우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 신앙은 다만 실천적 확신을 갖고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 신앙은 그 대상의 실재적 본성 속에서가 아니라, 단적으로 신앙하는 주관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신앙은 역시 인식 조건의 전체 계열과 똑같이 정확하게 주관적이다. 표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은 신앙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에 반하여 야코비에 의하면 신앙은 실재적 대상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비주관적인 것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천적 확신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 확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대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 신앙을 통해서 제약되어 있다." "야코비에게 〈이성〉(Vernunft)은 곧 초감성적인 것의 〈지각〉(Vernehmen)을 의미한다. 이성은 칸트가 부인했던 능력, 즉 지적 지관을 소유하고 있다."(64-5)


"바르딜리는 칸트가 일관성 있게 주관의 자체 존재 이외에 어떠한 다른 자체 존재도 승인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확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때 칸트의 철학은 주관으로부터의 객관의 연역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객관을 이와 같이 〈숙고하여 이끌어 내는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피히테의 시도는 바르딜리의 마음에는 길 잃은 형이상학을 위협하는 본보기로서 떠오른다. 이 시도를 거스르는 것은 야코비가 의지했던 상식의 자연스런 요구라기보다 바로 논리학의 엄격한 학문적 요구이다." "바르딜리는 야코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에서 비판철학에 일격을 가한다. 지각의 본성이 아니라, 순수 사유의 본성이 객관의 실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응하여 바르딜리의 실재론 역시 야코비의 실재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르딜리의 실재론은 〈순수한〉(즉 선천적인) 또는 〈합리적〉 실재론이다. 그는 논리적인 것의 실재성을 모든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공동의 존재 토대라고 주장한다."(68-9)


2장 피히테


# 구상력(構想力) : 칸트 철학에서는 감성과 오성(悟性)을 매개로 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을 이른다.


"피히테의 철학적 근본 관심은 라인홀트와 매우 유사하다. 그 역시 철저히 윤리적-종교적 측면으로부터 칸트철학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피히테는 처음부터 칸트철학의 전체에, 그리고 기술되지 않은 보다 더 내면적인 이 철학의 핵심에 관계한다." "피히테는 라인홀트가 이미 그랬던 것처럼 결정론을, 비록 이 결정론이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할지라도, 적대적인 어떤 것,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라인홀트보다 본성상 더 힘 있고 무리하게 그의 사상을 전환시켜 다음과 같은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바로 이 이론적 필연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고, 이론적 필연성이 최종적인 단안이라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도덕적 존재의 자유가 최초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주어지는 과제는 자연적인 것과 결정된 것의 세계가 어떻게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이해되는가를 지적하는 일이다."(80-1)


"이론적 자아는 비자립적이다. 이론적 자아에게는 비아(이론적 자아의 대상)가 영원히 대립한다. 이론적 자아는, 순수한 관념론이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비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아의 독립성 때문에 자기 자신도 지양하게 될 것이다." "의식의 고유한 이론적 본질은 결코 의식을 이 이원성 너머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 이 본질은 이원성, 즉 비아에 결부되어 있다. 단순히 이론적이기만 한 관점이 물자체를 극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아는 동시에 행위 하고 있다. 행위는 대상에 대한 역의 관계를 의미한다. 자아는 행위 속에서 창조하면서 또 형태를 만들면서 비아에 간섭하게 되고, 자기의 상(像), 즉 자기의 정신의 목적에 따라서 비아를 변형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아에 대한 자기의 우월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자아는 사실상 산출적이다. 비아의 자아와의 동등한 권리는 여기서 중지되고, 이것과 더불어 이원성이 종말을 고한다."(89)


"행위 함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고, 직관될 뿐이다. 행위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그것의 대립으로부터 비로소 뒤늦게 파악된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아의 본질은 비아의 본질 속에서 비로소 인식된다. 직관은 아직도 인식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철학자 자신의 직관을 피히테는 이제 〈지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지적 직관은 행위에 대한 직접적 의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직관은 분명히 모든 경험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물자체는, 엄밀히 생각하면 사유할 수도 없는 〈순전히 비이성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물자체들은 여기서는 그 어떤 인식의 대상으로서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지식학은 이것들에 대한 어떠한 장소도 갖고 있지 않다. 지식학에서의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감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식학에서의 지적 직관의 오용(誤用)에 관한 우려 역시 쓸데없는 일로 되어 버린다."(94)


# 직관(直觀) :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자아는 행위가 관계하는 대상이 없다면, 자신을 행위 하는 것으로서 발견할 수 없다. 자아의 존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에게 동시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바깥에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정립은 그러나 분명히 자아의 정립에 대한 하나의 반정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반정립적 조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반정립은 자아의 정립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며, 그 자체에 의해서 요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면, 정립과 반정립을 종합으로 결합시키는 보다 높은 통일의 관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립된 것들의 통일의 점〉은 임의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 오히려 다만 이 통일의 점을 현존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일, 즉 통일의 점이 〈대립된 것들의 의식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변증법적〉 절차는, 피히테에게는 아직 발생 중에 있고, 불안정하며, 자기의 본래적 위기를 때때로 위반하기도 한다."(97-8)


"자아의 본질은 모든 자아가 대자적─비아를 규정하는 자로서 자신을 정립하는─이라는 점에 있다. 절대적 자아의 본질인 근원적 활동성은 따라서 자아로부터 원심적으로 무한 속으로 진행하여 자신을 의미도 계획도 없이 상실해 버리는 곳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근원적 활동성은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 속으로 반성될 때만 자아에 대해서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장애와 저지의 근거는 반성의 측면에서 보면 자아 자체의 본질로부터 요구되는 반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지는 활동성을 절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활동성은 무제한적인 것이고, 또 모든 방해를 다시 넘어서고 일체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천적 태도에 대해서는 특징이 된다. 그러나 방해를 넘어서는 이러한 무제한적인 이행은 오로지 노력해야 하는 일일 뿐이고, 창조, 실현 또는 달성되는 일은 아니다. 무한자는 활동자의 속성이 아니고 활동성의 목표이자 이념이다."(116)


"역사철학은 피히테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윤리적 관점 아래에 서 있다. 역사철학은 역사학처럼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그것이 가장 작고 덧없는 사회이건 또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사회이건 다같이─의 생동적인 작용 및 노력에 대한 불가결의 윤리적 방향 설정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현존재는 자유를 실현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인류의 발전에 어떻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상승, 보다 높은 발전, 진보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가치 실질은 가장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가치 실질, 즉 이성의 가치 실질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전체의 발전은 무죄의 상태와 더불어 시작하여 죄지은 상태에 이르고, 이 죄의 상태를 결국에는 극복하여 자각적 이성의 나라에서 끝나는 그러한 과정이다. 따라서 진보의 계기는 바로 도덕법칙의 척도와의 연관에서 결코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반립적인 것이다."(164-5)


"피히테가 자기의 모든 본질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고 느끼는 시대는 〈계몽〉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개별 정신을 담지하는, 그리고 기초에 깔려 있는 위대한 이념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 시대는 전일(全一)의 이성의 생명을 인간의 생활 속에서 보지 못했다." "개별자는 눈앞에 있는 것, 즉 개별자를 감금하는 가장 협소한 범위의 관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만을 본다. 그의 최고의 것은 자기 보존이고, 자기 행복이며, 사리(私利)이다." "피히테는 계몽주의에서 그가 생명과 노력을 다 바친 윤리적 이념의 위엄이 위태롭게 됨을 보았다. 그는 여기서 그 특유한 가치가 모든 윤리적 노력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전체의 내용을 의미한 바로 그러한 자유의 의미가 오래되어 있음을 보았다.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위대한 것과 원대한 것을 옹호한 그는 계몽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편협하고 소규모의 것이 사물의 척도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세계를 축소시키는 사상과의 화해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167-8)


3장 셸링


"피히테의 체계는 자유의 이념을 위한 투쟁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이 투쟁은 가차 없고 난폭한 투쟁이었다. 자유에 대립된 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필연성은 자유에 대립한다. 필연성은 모든 자연적인 것의 내적인 속박이다. 그러므로 피히테는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것을 자유의 창조적 작용 속에서 지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존재는 자연 속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평가 절하는 비자연적이다." "그렇기에 피히테를 넘어서는 셸링의 제일보는 자연철학에로 이르게 된다. 셸링이 자연철학을 완성하고자 할 때, 그는 자연과 정신의 평행적인 구조에 대해서 여지를 갖고 있는 보다 넓은 새로운 기초에 의해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이 기초를 동일철학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셸링은 이 사상을 거대한 규모로 완성함으로써 헤겔이 그 후의 모든 역사적 체계 가운데서 가장 정연하고 가장 포괄적인 체계를 구축하게 된 토대를 창조하였다."(183-4)


"그러나 헤겔이 지칠 줄 모르는 작업으로 자기의 대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동안에, 셸링은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서 파악한다. 셸링은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낭만주의에 가장 근접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문제들의 세계가 그에게 밀어닥치고, 또 해결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예술철학만이 이러한 자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비로운 것에로의 경향도 이 자극으로부터 나온다. 셸링은 이러한 경향의 뿌리를 일체의 철학적 사유의 제1근본 원리 속에서 발견한다. 자연철학은 그에게서 종교철학으로 변한다.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은 그에게는 신성(神性)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동일성의 체계를 선언했던 이성의 저 전체의 합리적 철학은 참된 원근거(源根據)에 이르지 못하였고, 계시 철학만이 긍정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신앙과 지식의 모든 외견상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계시철학으로써 그는 헤겔의 이성 체계에 대립한다."(184-5)


"셸링의 자연철학은 통일성 철학의 순수한 전형이다. 이 철학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상은 동일성의 사상이다. 즉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우리 속의 정신과 우리 바깥의 자연과의 본질의 동일성이다. 자연은 외부에 의하여 경계 지어진 것도 아니고, 정신은 내부에 의하여 한계 지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의 외부에도 동일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내부에도 동일한 자연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연의 영역 내부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통일성의 철학이다. 그리하여 유기적 자연과 무기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리를 갖고 있는 분리된 두 자연이 아니다. 셸링은 무기적 구조물의 기계론적 이론도, 유기체의 기계론적 이론도 배척한다. 그는 전체 자연을 구별 없이 유기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간주한다." "셸링은 당시의 과학적 성과들에서 취한 이념의 다양성을 자기의 목적론적 근본 사상의 통일성 속에서 포괄하고, 자연 현상의 상이한 유형들을 하나의 근원적 원리의 전상(展相)으로 파악하고자 한다."(195-6)


"이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동질적 통일성에서 차별의 다양성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다양성은 동일성 자체로부터는 유래할 수 없고, 이 동일성에 대립하여 동시에 이 동일성과 함께 현존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열의 계기로부터만 유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계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자연 현상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이 공통적인 것은 명백히 분리하는 원리이고, 관통하는 이원성이며, 대립의 법칙이다. 셸링은 이것을 (자석과도 같은) 양극성의 원리라 부른다. 이 점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대립의 쌍들의 항쟁이, 마치 진실로 〈전쟁〉이 만물의 〈아버지요, 왕〉으로 표현되듯이, 운동을 일으키는 자, 차이 나게 하는 자, 그리고 형성자이다─에 접근한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이 이미 존재자 일반의 전 영역을 통하여 그 모든 단계들을 결합하고 있다. 이 대립의 일치는 초월적인 것이요, 그것의 본질상 모든 인간적 사유를 벗어나 있다."(197)


"피히테의 의식에 관한 이론은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구성된다. 그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셸링은 제3의 구분지인 심미적 의식을 끼워 넣음으로써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인식의 철학 및 행위의 철학과 함께 예술의 철학이 등장한다. 이렇게 의식의 세계를 풍부하게 한 것은 셸링의 예술가적 천성 속에 뿌리박고 있기도 하고, 또 낭만주의 사회 속에서 획득한 이념과 자극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산출력과 주관의 산출력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창조적 정신이다. 자연은 대상의 실재적 세계를, 예술은 관념적 세계를 창조한다. 양자는 순수하게 생산적이다.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통일적으로 일관된 예술품이요, 정신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시(詩)이다. 그러나 예술품은 바로 소규모의 그와 같은 우주이고, 동일한 정신의 똑같은 계시이며, 단지 의식적으로 창조된 계시일 뿐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의식 속에서만 포괄적 동일성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205-6)


"셸링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세계 진행 속의 여타의 생기 현상과 같은 그런 이론적 대상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법칙성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법칙성으로 동화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자신 속에 인간적 결단의 자유를 포함하고 이 자유를 자연의 생기 현상으로부터 구별한다. 그러나 자연철학이 우주의 생기 현상 속에서 통일적 방향 또는 전개를 이끌어내어야 하는 것처럼, 역사철학은 인류의 생에서 진보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 속에서 실행되는 진보의 보편적 조건은 조건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는 탐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의로서 항상 동시에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의식의 관점에서는 필연성과 자유가 대립되지만, 절대자 속에서는 양자가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은 의식적 정신이 어떠한 지(知)로써도 도달할 수 없고 신앙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영원히 무의식적인 것이다."(214-5)


"예술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모방, 즉 모상들의 모사가 아니라, 신적 이념 그 자체의 상대물이며, 무기력하게 감탄하는 상태에서 자연의 배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넘어서서 자연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자연의 완성이요, 본질 그 자체─이것은 세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혼합되지 않은 채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다─의 순수 직관이다. 예술의 자연과의 편차는 예술의 무력이 아니라 예술의 우월이다. 자연의 산물이 단지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그것을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서─예술이 이 산물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고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이 자연의 산물을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즉 〈그것의 생명의 영원성 속에서〉 현상하게 한다. 예술은 자연이 결코 그러한 것일 수 없는 것, 즉 이념의 참된 현시(現示)이다." "셸링은 낭만주의와 철학적 관념론의 성공적인 종합에서 태어난 새로운 미학의 창조자가 되었고, 헤겔과 쇼펜하우어 및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에 대한 모범이 된다."(219-20)


4장 낭만주의 철학


"낭만주의는 본래 어떠한 신조도 원리도 아니고, 어떠한 목표도 과제도 아니며, 윤곽이 뚜렷한 사상이나 개념으로 구성된 어떤 체계 속에 자리잡을 그러한 것도 아니다. 순수한 낭만주의 그 자체는 결코 철학이 아니다. 창작이 거기에 보다 더 가깝다. 작가가 낭만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변자이다. 셸링이나 슐라이어마허처럼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철학자들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의 단지 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편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전체일 수 없는 것은 사상의 구조가 생활의 어떤 태도 및 세계 이해─이것은 근본적으로 세계 감정이고 또 전체의 감정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다─의 전체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상은 반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세계에서 의도되는 것은 반성되지 않은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사상 진행이 아무리 반성되어 우리에게 자주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반성은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표현의 불완전한 수단일 뿐이다."(265-6)


"낭만주의는 특유한 방식의 생활 기분이다. 여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정서적 기분으로 동화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개념적으로 파악불가능한 것에 대한 의식 속의 황홀경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개인의 유약함의 현상인 것이고, 자기의 눈앞에 떠도는 사실(事實)의 크기에 직면한 의식의 무력함일 뿐이다. 모든 기분의 가치 배후에는, 낭만적 문학이 우리에게 주선해 주는 것처럼, 내용적인 그 어떤 것, 생의 새로운 의미 및 실질, 아니 생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드러난다. 세계의 영원한 수수께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낭만주의자의 본질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고, 또 이 본질 속에서 직접적으로 간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이 이 낭만주의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예술가의 행위는 무한자를 유한자 속에서 분명하게 현상하도록 하는 일이다. 존재는 숨겨져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마법의 지팡이이다."(266-7)


"낭만주의는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 신비와 유사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대립자이다. 천박한 합리주의의 무이념성, 〈상식〉을 통한 세계의 탈정신화에 대립해서 낭만주의는 영감을 받은 상태로, 영감을 부여하면서 등장한다. 낭만주의의 생은 전적으로 이념의 생이다. 여기에 낭만주의가 독일관념론의 철학적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 맺는 지점이 있다. 이 철학적 운동이 사변과 사상적 체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을 낭만주의는 직접적으로 생활에서 찾는다. 오성적인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유용한 것, 실천적인 것은 낭만주의에서는 비현실적인 것,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그 고유한 본질이 보다 깊이 이해되면 될수록 이 본질은 더욱더 탁월한 것으로 생각되고, 더욱더 확정적으로 낭만주의 그 자체는 종교로서 파악된다. 낭만적 정신의 이와 같은 측면은 피히테의 지식학이 내면적으로 개조되던 시기에 그의 사상에서 생동하고 있던 그것이다."(268)


"형이상학에의 경향은 예술가적 창작의 충동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매우 유사하고, 양자는 어딘지 창작자의 영혼 안에서는 하나이다. 창작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일이고, 현실적인 것 너머에서 신성하게 부동(浮動)하는 상태이지만, 철학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상적 포착이고, 파악이며, 간취(看取)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동일한 세계에 관계하고 있고, 동일한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 양자 속에는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지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인간이 존재한다. 이 통일을 자기 자신 속에 실현하는 일은 이 양자가 뿌리박고 있는 그 깊이의 문제일 뿐이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슐레겔이 동경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성취하는 것은 다만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은 진리의 형상(形象)〉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동경을 자신 속에 있는 일종의 종교, 즉 무한성에의 경향으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예술과 철학의 공동 대상이기 때문이다."(283)


"슐레겔에 따르면, 철학의 본질은 직선적인 진보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철학 속의 모든 것은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것이다. 〈중간으로부터의 시작〉이라는 것은 형상(形象)이 아니고, 방법이다. 철학자의 대상은 언제나 전체적인 것이고, 공존하는 것이다. 분리시키는 모든 작업은 여기서는 기술적인 것이다. 대상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파악하는 모든 작업은 대상을 중간에서 파악하는 일이거나─또는 전혀 파악하지 않는 것이다. 연관은 내적 연관이고, 모든 것은 자신 속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순환 철학의 이 개념 속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연관 역시 다만 전체로서 직관된 것이고, 모든 해명이란 것은 전체 속에서 직관된 것의 어설픈 노출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형이상학적 실재론] 속에 헤겔을 회상시키는 그 어떤 것, 적어도 후기의 헤겔적 체계의 의미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다."(285-6)


"노발리스를 횔더린─모든 것에 시작(詩作) 형식을 취한─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극히 명백한 철학적 귀결과 그때그때 나타나는 고도의 개념적 명확성이고, 슐레겔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변의 관념적 높이와 자연철학적 신비가 매우 우세한 점이다." "노발리스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비밀스런 작용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공동성에 의존하는 것이고, 자기 대화이며 내면적인 교신(交信)이다. 이 작용은 영혼의 비밀과 내면적 다원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자아에 〈관념적 자아〉, 즉 〈진정한 내면적인 너〉가 대립힌다. 그리고 〈최고의 정신적 및 감각적 교제가 발생하고, 최고의 정열이 가능하다. 천재는 어쩌면 그와 같은 내면적인 다원의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것이 이제 일종의 자기 계시, 자기 비평, 자기 접촉, 자기 입법적 운동으로 계속해서 특징지어진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의 품위와 의미는 상승한다."(312-5)


"노발리스는 결코 예술가와 예술가 아닌 사람 사이를 그렇게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정신의 지배를 열망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시와 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슐레겔한테서보다도 노발리스한테서 더 강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활동성이란 계기, 즉 창조적인 것이 이 두 사람한테는 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또한 〈학문의 학문〉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러나 노발리스는 예를 들어 슐레겔이 순환철학의 이념 안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완결된 학문적 체계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본래적인 철학체계는 자유와 무한성, 또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온 무체계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에서는 인간 본성 및 도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규정성과 무규정성 사이에서 부동(浮動)하고 있는 동일한 관계임이 틀림없다. 철학의 본질은 따라서 가장 본래적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시(詩), 즉 절대적 창조이다."(327-9)


"철학적 동시대인 중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특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다만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낭만주의자 사회에 속해 있다. 그는 우정으로 슐레겔과 결합한다. 그는 그의 윤리관에 있어서 슐레겔로부터 자속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매우 다른 철학체계들의 특징을 서로 통일─이 통일은 틀림없이 피상적으로 절충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철저히 유기적인 것도 아니다─시킬 줄 안다. 이 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시야의 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면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고, 또 낭만적-보편주의적 도야의 이상이다. . 슐라이어마허는 의식적으로 체계를 추구하였고, 그것을 세목에 있어서 놀랄 만큼 정교하게 수행할 줄 안다." "저 낭만주의자들은 본원적인 이념을 갖고 있다. 다만 체계적인 맥락이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반대로 그도 역시 기획하는 것, 즉 체계를 언제나 똑같이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이념들은 수합된 상태에 있다."(330-1)


"슐라이어마허에게 종교적 의식은 언제나 심미적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러나 신앙을 담지하는 감정이 다르고, 예술적 창조 활동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다르다. 이 다름을 규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감정의 대상에 대한 태도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감정은 자신으로부터 직관해 내지 않고, 형태를 산출하지 않으며, 생산적-대상적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헌신적인 것이다. 종교는 또한 계시의 일이 아니다. 계시 신앙은 이미 신의 계시하는 활동성을 안다. 우리는 사실 그와 같은 활동성에 관해서는 신의 그 밖의 본질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신성화된 전통도, 창조된 세계의 현존재도, 세계 속의 인간의 윤리적 과제라는 사실도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신을 가르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식할 수 없고, 또 신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것이 직접적인 것이건 간접적인 것이건 간에 가상(假象)이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은 결코 신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관한 이론인 것이다."(333-4)


제2부 헤겔


1장 헤겔의 철학 개념


"〈논쟁적(또는 〈형식적〉) 사유〉에서는 판단의 주어는 고정된 지반의 역할, 즉 〈토대〉의 역할을 하고, 이 토대에 내용이 술어의 형식으로 결합된다. 따라서 이러한 술어 속에서는 주어 그 자체는 결코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주어는 개념의 바깥에 머물러 있게 된다. 주어가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그런데 주어는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아니 주어는 본래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개념 그 자체의 의미가 변경되어야 하고, 술어의 외면성은 사라져야 하며, 술어의 다양성은 대상 자체(주어)의 전개되어 가는 본질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상의 이 본질─따라서 모든 비사변적 사유에게는 개념에 대해 영원히 외면적인 것 및 초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바로 그것─은 개념 자체로서, 개념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개념의 진리로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유만이 〈개념 파악적 사유〉이며, 따라서 사태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논쟁적 사유〉의 운명이다."(409)


"〈개념 파악적 사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자기─이 자기는 개념의 생성으로서 나타난다─이기 때문에, 이 자기는 부동의 상태에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정지적인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의 규정을 자신 속에 회수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사태의 본질이 나타난다. 개념의 다른 모습, 즉 개념의 변증법적 모습이란 대상에 대한 개념의 관계이고, 모든 형식적인 것에 대한 피안의, 그리고 반대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판단이나 명제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개념으로 하여금 맨 처음으로 개념의 규정에 좇아서 존재하게 되는 그것으로,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으로 만든다. 요컨대 개념이 파악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구조물이 아니라, 차이성과 대립을 두루 관통하는 형식의 다양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태를 개념이 전개되어 가는 관통 자체로서, 〈운동〉으로서, 즉 생동성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409-10)


"헤겔에서 우리는 인식 불가능한 것을 은폐하거나 논박하는 일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되는 것, 즉 인식되지 않은 것 그 자체를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추구하는 방법, 또 이렇게 추구하는 가운데서 직접 문제를 전개하는 모범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출현하는 어떠한 모순되 회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순 자체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어떠한 형식에서이건, 무조건 타당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이다. 변증법은 바로 이 일을, 즉 모순을 발견하고 또 이 모순을 그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시인하는 이 일을 변증법의 일반적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변증법이 모순성을 또한 다시 극복한다는 것은─적어도 변증법의 경향에 따라서─변증법이 모순성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이성의 개념들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개념이 〈유동적인〉 구성물, 즉 사변적 개념이 되면, 오히려 비합리성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424-5)


"우리가 (헤겔) 논리학의 〈객관적〉 부분에서 처음으로 대자 존재라는 개념을 만나면, 그것의 의미는 외부에 대한 폐쇄성, 즉 단절되어 있음, 자립성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부른 합창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자 존재의 외적 측면일 뿐이다. 이 외적 측면 배후에는 〈대하여〉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또 다른 의미가 꽂혀 있다. 그렇게 되면, 〈대-자-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착하는 존재, 따라서 자기 자신 속으로의 반성을 이미 거친, 그리하여 이제 이 반성을 자신 속에 보존하는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대자 존재는 그것이 완성되면 자기의식이 된다. 이것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대자 존재라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그것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자기를 알면서 자신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안다고 하는 이 대자 존재라는 낱말의 그 의미심장한 뜻에 있어서 자기의식인 것이다."(434-5)


"그런데 우리가 어떤 존재자의 참된 존재론적 성질─따라서 존재자에 있어서 누군가에 대한 그것의 현상 방식만이 아니 그러한 것─을 그것의 〈즉자 존재〉라고 부른다면, 동일한 존재자의 대자 존재 속에는 실은 보다 높은 존재의 단계─이때 이 존재자가 〈즉자적〉이면서, 또한 〈대자적〉인 바로 그러한 것인 한에서─가 놓여 있다. 즉자 존재와 대자 존재의 이 종합을 헤겔은, 〈즉자-대자-존재〉라고 부른다. 헤겔에게 종합은 어떤 존재자 자신의 본질을 관통하는 자각적 통찰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이러한 완전한 의미로는 하나의 자각한 본질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의 최고도의 정신적 형식에 있어서만 발견된다." "즉 모든 존재자는 정신적인 것의 이 최고의 형식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고, 또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로 밀고 나아가며, 그 때문에 세계의 전체 단계 영역에 있어서 보다 낮은 단계가 보다 높은 단계 영역에로 이행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435)


"셸링의 동일철학에서 절대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무차별〉이다. 절대자는 또한 〈절대적 이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차별자가 어떻게 차별지워지며, 또 어떻게 자연의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실 절대적으로 구별 없는 통일성에서 다양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셸링의 사변이 직면한 한계는 또한 플로티노스의 사유도 부딪혔던 한계이고,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적 일원론의 약한 측면이기도 한 동일한 한계이다. 즉 일자 자체는 다수를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만알 다수를 낳을 수 있다면 일자는 이미 다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엄밀한 일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자로부터 다양성이 유래하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셸링은 절대자에 관한 지(知)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사유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지적 직관〉에 마련함으로써 이러한 귀결에 대처하였다."(449)


"여기서 헤겔의 논리학이 시작된다. 모든 세계 이해의 가장 중요한 점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개념 파악적 사유〉가 지적 직관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적 직관이 설정하는 절대자라는 꾸밈없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고, 규정성을 갖지 않은 무정형(無定型)의 실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자한테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기 내 반성〉은 직접적인 것의 자기 투시(透視)이다. 이제 여기서 절대자의 내적 다양성을 볼 수 있게 되거니와, 사상(思想)은 비로소 이 다양성을 차례에 따라 방법적 운동에 있어서 편력(遍歷)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본래적 개념은 결국 이러한 편력의 종말에 가서 비로소 설명되고 깊이 사유된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개념은 본래 이 개념이 〈정립〉되었던 단초에는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파악되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449-52)


"절대자의 술어들의 총체성은 내용상으로 이해하면 세계, 따라서 자연, 그리고 정신의 총체성─〈사태 그 자체〉(이 사태를 가장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사유하는, 그리고 철학하는 이성으로서 우리들 속에서 자기의 〈논리〉를 갖고 있는 그 이성이고, 또 모든 자연 및 정신의 형식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그 이념이며, 변증법적으로 노력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그 사상이기 때문에, 이 학문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의 대립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되어야 한다. 또한 이 학문에 있어서는 객관과 주관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세계와 세계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학문은 모든 즉자 존재자들을 해명한 대자 존재인 것이다." "논리학의 대상은 모든 사물의 단초이고, 대상에 관한 지(知)로서의 논리학 자체는 모든 사물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논리학 고유의 대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은 논리학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결합하며 현실화된다."(455-6)


"칸트는 형이상학에 이르는 통로를 우선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고, 피히테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당위에 기초를 둔 체계를 만들었으며, 셸링은 이 체계를 우주에 확장시켰고, 그리고 헤겔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완성하였다. 헤겔이 이 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철저한 귀결들을 칸트 자신의 명제(정립)로부터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비판의 명제들은 형식상으로는 부정적 명제들이다. 그러나 부정의 의미는 폐기가 아니고,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진이다. 부정이 긍정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의 힘〉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이다. 칸트가 부정을 시인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부정적인 것의 힘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헤겔은 이 힘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한다. 그리고 이때 그의 수중에서 발생하는 것은 바로 칸트가 갈망했던 〈순수 이성의 체계〉, 즉 낡은 형이상학과 그것의 비판을 종합한 새로운 형이상학이다."(467-8)


2장 정신 현상학


"(헤겔에서) 주관은 자기의 객관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도 변화한다는 〈경험을 한다.〉 변화를 추적하는 철학자는 주관의 이 〈경험〉에서 이 경험에 관한 지(知)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 "피히테 역시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표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주시한다〉라고 되풀이한 그 표현은 이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는 이 사정이 역전되어 있다. 그는 결코 연역하지 않는다. 결과라는 거은 선취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식은 전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관이 〈경험하는〉 것, 주관에게 주어진 것에 철저히 의존하고, 그것이 이 소여성에 있어서 어떻게 현시(現示)되는가에 의존한다. 이렇게 그는 사실상으로 주관으로부터서도 객관으로부터서도 그 어떠한 것도 도출하지 않는다. 그는 현상을 단계적으로 발견하는 대로 단순히 이 현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그는 의식의 아래로부터 위로의 현실적인 〈현상론〉(현상학)을 부여할 뿐이다."(515-7)


"헤겔은 결코 시간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내면적 단계를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의 다른 의미로, 즉 시간적인 의미로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학문에 이르는 의식의 교양〉이 매우 확실하게 정신의 역사의 단계들에서 재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학의 서문에서 헤겔이 이 관계에 관하여 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문구를 알고 있다. 그는 여기서 〈특수한 개인들〉과 〈보편적 개인〉 간의 관계─여기서 그는 후자의 이름 아래에서 개인들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있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성 일반은 바로 모든 주관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어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개인〉이 현상학의 본래적 대상이다. 이 보편적 개인은 역사의 기체(基體)─역사 속에서 보편적 개인의 경험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고, 동시에 우리들의 의식의 보편자이다."(535-6)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의식의 두 대립된 형태들〉이 서로 상관적인 관계에 놓인다. 〈하나의 형태는 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대자 존재가, 그리고 다른 형태는 비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타자를 위한 생명 또는 존재가 그 본질이다.〉" "주인이나 노예는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물적, 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계도 갖고 있다. 주인은 자기의 자연적 존재, 즉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것이 그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노예는 자연적 존재를 위하여 자기의식을 포기하였다. 그는 물적인 것을 〈자립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속에서 비자립적으로 되어 버렸다. 그는 그의 자기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주인은 자립적인 존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노예에 관계한다.〉" "주인은 이 물적 존재(物的 存在)를 지배하는 위력이다. 동시에 이 (물적) 존재는 타자를 지배하는 위력이므로, 주인은 이러한 추론에서 이 타자를 자기 아래에 예속시킨다. 물적 존재는 노예의 사슬이다."(553-4)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관계가 바뀌게 되는, 그리하여 예속 상태로부터 노예가 고양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인은 자신과 물적 존재 사이에 있는 노예에 명령하고, 자신을 위해서 노예를 노동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예에게 이 물적 존재의 〈가공(加工)〉을 맡기고, 이 존재의 〈향유〉만은 자기의 것으로 한다. 〈욕망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 달성되고, 동시에 완성되며, 항유함으로써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완성되는 일은 쌍날의 것임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자립성〉에 대한 주인의 태도는 그와 동시에 순전히 수동적인 태도, 따라서 사실은 〈예속〉의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노예의 태도는 능동적인 태도, 따라서 자립성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자신 사이에 노예를 끼워넣는 주인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사물의 비자립성과 결합하고, 사물을 순전히 향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립성의 측면을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맡긴다.〉"(554)


"자기의식은 이렇게 주인의 인격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노예에게는 주인의 대자 존재가 그 본질이다. 노예 자신은 수단이다.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 주인의 행위이다.〉 그러나 노예는 인정하는 의식이고, 주인은 인정받은 의식일 뿐이다. 따라서 주인의 대자 존재는 자기의 본질적인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노예의 〈비본질적 의식〉 속에, 이에 못지않게 자기의 〈비본질적 행위〉 속에 존립한다. 〈따라서 자립적인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이다.〉 이것은 전체적인 관계의 내적 모순이고,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이 전체적 관계 속의 불안정한 요소 및 해체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주인의 지배가 이 지배의 본질이고자 한 그것의 전도된 것〉(즉 예속성)임을 나타낸 것처럼, 〈노예의 신분 역시 이 신분을 완성시킴에 있어서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존재했던 그 내용의 역(逆)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 속으로 도로 밀려든 의식으로서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자립성으로 역전된다.〉"(554-5)


"자기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자기의식은 〈이중화〉되어 있다.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 속의 이중적인 것이다. 이전에는 두 개별자(주인과 노예)에 할당되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 속에 존재한다. 이 이중화는 실은 〈정신의 개념 속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양 측면의 통일성이 결여해 있는 곳에서는 의식은 지리멸렬하고 〈불행한 의식〉이 된다. 이중화의 특징이 되는 것은 가변적 의식과 불변적 의식으로의 양분이다. 전자는 인간이 대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이 피안의 존재인 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차안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가치 없고,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덧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피안의 것에는 인간의 희망과 동경이 해당된다." "의식은 그 자신이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자기의식은 하나의 확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서진 자기 확신〉인 것이다."(558-9)


"의식은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사유하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면서 태도를 취한다. 의식은 〈사유 곁을 지나갈 뿐이고, 기도(祈禱)인 것이다.〉" "〈이 무한한 순수 내면적 느낌도 분명히 그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이 대상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대상은 어떤 낯선 것으로서 등장한다.〉 의식이 다만 기도(祈禱)로서 머무는 한, 어쨌든 의식은 자기의 본질과 동류이다. 그러나 의식의 경향은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의식의 고유한 무능력은 그에게는 유죄와 모독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의식은 자신과 싸우고, 금욕하고, 고행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한다. 그의 태도는 의심을 품은 채 자기 자신을 망보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자신과 그 조그마한 행위에 한정된, 그리고 고심하면서 사유하는 초라한 만큼 불행한〉 위축된 〈인격〉이다." "의식이 자기기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의식은 동시에 그 자체에 있어서 이 자기기만의 지양을 경험하게 된다. 의식은 자신에 되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559-60)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이 되돌려지는 피안이란 것이 의식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의식 자신 속이 있음을 의식이 발견한다면, 의식은 피안 자체를 지양하게 되고, 피안 속에서 다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도달하게 되는 일은 관념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이성의 관점을 증명해 준다. 이때까지의 〈타재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로 전환한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희생한 대가로서 자기를 구원하고 보존하는 일을 중지한 것이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다시 자신 속에 수용한다. 〈자기의식은 자신을 확신하는 이성으로서 세계에 대한 평온을 받아들였고, 세계를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실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있거나, 또는 모든 현실성이 자기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님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의 사유는 직접적으로 그 자신 현실성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관념론이 현실성에 관계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560-1)


3장 논리학


"현상학의 서문에서 예고되었던 내용이 이제야 나타났다. 〈학문의 생성〉의 길이 실현된 것이다. 의식이 자기의 대상과 자기 자신에 있어서 겪어야 했던 긴 경험의 계열이 편력된 것이다. 의식은 그 자신이 자기의식임을, 자기의식은 그 자신의 이성임을, 이성은 그 자신의 정신임을, 그리고 정신은 그 자신이 그 자신에 대한 개념적 파악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현상하는 지(知)〉의 현시(現示)는 〈실재적 지〉에로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실재적 지를 이제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제가 나타남으로써 이 연구는 현상학의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이 착수할 일이다. 그러나 현상은 필연적으로 현상 속에 계시되는(〈현상하는〉) 어떤 존재자의 현상이기 때문에, 즉 모든 외면적인 것은 어떤 내면적인 것의 외적 표현이기 때문에, 논리학은 그 귀결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시 현상학의 내용을 이루었던 바로 그 동일한 형태의 계열, 즉 철학의 체계의 구성 요소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603-4)


"논리학의 대상은 절대자이다. 독일관념론의 근본 사상은 절대자가 이성이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의식이 아니다. 의식은 이차적인 것이다. 이성은 의식 이상의 것이다. 이성은 의식 없이 모든 존재자 속에, 또한 가장 시원적인 것 속에도 존재한다고 이미 셸링이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셸링은 우리가 어떻게 이성 속으로 개념적으로 파악하면서 파고들 수 있으며, 또 시원적인 것으로서의 이성을 이차적인 것으로서의 의식으로써 밝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절대자가 이성이고, 우리의 사고도─적어도 철학적 사고가─이성이라면, 우리가 순수한 사유, 즉 사유의 〈논리〉에로 상승하는 그곳, 곧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절대자가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절대자는 실로 의식은 아니지만, 절대자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의식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식하는 자와 인식된 자는 동시에 실재하는 것으로 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유는 바로 절대자를 그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 된다."(604-5)


"사상과 사실, 개념과 존재자는 동일한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논리학과 〈진리〉로서의 논리학은 동일성의 두 측면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한 측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은 〈자신을 전개하는 순수한 자기의식〉─어떤 타자가 아닌 〈자신〉을 전개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단순히 즉자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자적 존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사실은 동일한 자기의식이요, 동일한 절대자의 동일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관찰이 어느 측면에서 시작하건 그것은 실제로는 상관이 없다. 관찰이 사실로써 시작하건 또는 사상으로써 시작하건, 관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전체에로 귀납된다." "관계의 양 측면은 물론 자신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반대 측면을 갖고 있다. 이것이 왜 사유에 관한 학문이 사상으로서의 사상을 다룰 필요가 없는지 하는 이유이다. 사유에 관한 학문은 순수한 사상〈이다〉라는 사실로서 충분하다."(609)


"범주는 절대자가 자신을 규정하는 술어들이다. 현상학의 서문은 그러한 술어들의 역할을 확실하게 확립하였다. 가능한 판단의 주어로서의 절대자는 술어 없이는, 그리고 술어에 〈앞서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이 어떤 규정들로 윤곽 지어지기 이전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모든 사유는 규정성에 구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술어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주어는 술어에 선행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술어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때 주어가 무엇〈인지〉를 술어가 비로소 말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절대자가 그 술어에로 전개되는 곳에 일체의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절대자는 각 단계에서는 정확하게 그것의 술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이다. 〈단초〉는 공허한 것이고, 실체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즉 〈절대자에 관해서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절대자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그것이 진리 속에 있는 바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타당하다."(617-8)


"헤겔의 논리학에서 범주는 실제로 거대한 유기체의 기관으로 간주된다. 고정된 오성 개념의 경직성에 대립하고, 또 이 오성 개념의 논리적인 타성의 힘과 끊임없이 투쟁하여 생명력을 표현하는 많은 비유들─예컨대 운동, 출현, 이행, 귀환, 자기내 반성, 재귀, 원환, 소멸, 등장, 유동, 그리고 수많은 여타의 것들─은 결코 단순히 비유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유동화(流動化)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정의 내려진 개념들은 실제로는 단지 불충분한 긴급 명령에 불과하다. 거대한 노선의 관통하는 역동성은 다른 개념들을 요구한다." "수많은 방법으로 절대자에 접근해 가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자기의 현실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한 사색, 이 발전 과정에 직면하여 헤겔이 수행하는 시원적 행위는 마지막 항(項) 뿐이다. 즉 역사적 사유가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체계의 형식으로─인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제가 해결되는 형식은 변증법이다."(621, 627)


"〈학문의 단초(端初)는 무엇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는가?〉 모든 체계적인 사상은 맨 먼저 이러한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최초의 사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아직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이 생성되어야 한다. 단초는 순수 무(無)가 아니라, 거기로부터 그 어떤 것이 출발해야 하는 그러한 무이다. 따라서 존재는 역시 이미 단초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초는 양자, 즉 존재와 무를 포함하고, 그리하여 존재와 무의 통일인 것이다─또는 동시에 존재인 비존재이고, 또 동시에 비존재인 존재이다.〉" "〈대립된 것인 존재와 비존재는 따라서 단초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합일된 상태로 있다. 또는 단초는 이 양자의 구별되지 않은 통일이다.〉 거기로부터 단초 속에는 존재와 비존재 그 자체의 모순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구별된 존재와 구별되지 않은 존재의 모순도 놓여 있다는 결과가 생긴다. 단초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680-2)


"그러나 사상(思想)에 요구되는 바는 바로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어떤 적극적인 것으로서 사유하고, 이 동일성의 개념을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만약 우리가 이 양자 속에 어떤 공통된 적극적인 것을 지적할 수 있다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분명히 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존재와 무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양자의 변증법에 있어서이다. 말하자면 변증법적으로는 존재는 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존재는 무로서 증명되었고, 따라서 이 증명 속에서 무로 이행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진리인 것은 존재도 무도 아니고, 존재는 무로, 그리고 무는 존재로─이행하는 것이 아니라─이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으로 양자의 이원성과 대립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의 공통된 것, 즉 이행─물론 초시간적으로 이해된─그리고 연결, 유동, 운동 및 연속체의 한 계기, 따라서 현저히 긍정적인 것이 강조된다."(683-4)


"진리는 양자의 〈무구별성〉(동일성) 속에도, 구별성(비동일성) 속에도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주지하다시피 양자가 합일하여 있는 어떤 제3자, 즉 문자 그대로 실재로 모순되는 것(존재와 무)의 공존일 뿐만 아니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인 그러한 어떤 것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도, 그 비동일성도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진리〉는 〈각자가 직접적으로 그것의 반대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래되고 잘 알려진 〈생성〉이란 개념 속에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생성〉을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의 운동─따라서 비존재의 존재로서의 이행과 존재의 비존재에로의 이행─으로 묘사하였다. 최초의 인물로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이 두 길은 하나이요 동일한 생성은 동시에 발생과 소멸이다. 그것은 두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일자의 소멸은 타자의 발생인 것이다."(684)


"〈정재〉(定在)는 이행동작(移行動作)이 사라지고, 존재의 휴지(休止)가 회복된 새로운 존재 형식이다. 헤겔은 이 걸음걸이를 〈생성의 지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실은 소멸과 보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즉 계기들은 모두 보존되지만,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으로서 변화된 것이고, 여전히 재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다른 규정성에 있어서이다. 이 계기들에서 사라지는 것은 생성 그 자체의 불안정이다. 이러한 사정은 변증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즉 생성은 자기의 계기들(존재와 무)을 지양하면서 역시 자기 자신도 지양한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계기들의 소멸은 생성의 소멸이다. 그러나 생성은 〈버팀이 없는 불휴(不休)〉이기 때문에, 생성은 자기의 소멸 속에서 〈정지한 결과 속으로〉 붕괴된다. 이 결과 속에서도 역시 존재와 무의 대립이 존속하지만, 그러나 발생과 소멸의 역학에 있어서가 아니다. 〈정재는, 그것의 생성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비존재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691)


"유한성과 무한성이 진행 속에서 교대로 나타나는 것은 순환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순환은 하나이고, 유한성과 무한성은 순환 속의 계기들이며, 양자는 순화 속에서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오며, 각자는 타자를 자신 속에 포함하면서 타자를 넘어선다. 이렇게 전체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양자의 특성 자체를─우리가 어떠한 출발점에서 매개 자체를 적용하는가에 따라서─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 양자,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그 자체 진행의 계기들이기 때문에, 양자는 공동으로 유한자이고, 그리고 양자는 똑같이 공동으로 진행과 결과 속에서 부정되기 때문에, 양자의 저 유한성의 부정으로서의 결과는 진실로 무한자라고 불린다.〉" "대체적으로 윤곽 지어 보면, 절대자는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는 절대자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글자 그대로 〈대자적〉이다. 즉자 존재는 그것의 대자 존재에 도달한 것이다."(710-3)


4장 논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체계


"헤겔 철학이 세상에 선사한 풍부한 사상재(思想財)에서 〈객관적 정신〉이란 개념은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풍성한 결과를 생산하게 된 그러한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객관적 정신 개념은 체계의 귀결도, 변증법적 사상 진행의 산물도 아니다. 과연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사변적 학설 개념도 아니고, 소박한 기술적(記述的)인 개념이며, 관점에서 독립해서 언제나 제시되고, 서술되는 어떤 기본 현상에 대한 철학적 정의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직관된 것이고, 완전히 그것 자체에 의존하는 헤겔의 발견이다." "헤겔은 처음부터 정신철학자이다. 초기의 저술들, 즉 현상학, 논리학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정신은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명백히 처음부터 객관적 정신─비록 이 술어는 겨우 조금씩 확고해진다 할지라도─을 의미한다. 즉 정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의식이 아니라, 보편자, 개념, 이념─이 이념이 그 객관적인 실현에 있어서 실재적 세계의 참된 내용인 한에서─이다."(822-4)


"객관적 정신은 우리들 모두가 그 속에 서 있고, 출생, 교육, 그리고 역사적 위기가 우리들을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게 하는 정신적 영역이다." "우리들은 어느 시대의 정신적 방향과 흐름에 관해서, 그 시대의 경향, 이념, 가치에 관해서, 그 도덕, 예술, 또는 학문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것은 그 발생과 소멸, 따라서 그 생명을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시간 속에서 가진다─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인 개체 그 자체─마치 이 현상들이 단순히 개체의 것들인 것처럼─에 결코 돌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구체적으로는 선명하게 각인된 이러저러한 대표물에서 가장 쉽게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표물이 단지 대표물일 뿐임을 알고 있고, 이 대표물 속에서 뚜렷하게 새겨지는 저 정식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이 대표물의 것도 아니고, 또 내용적으로 대표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안다."(824-5)


"객관적 정신은 또한 현재의 생활 속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의 지식〉에 관해서 명백하게 말한다. 개별자는 이 지식에 관여하고, 배우면서 이 지식 속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한다. 그러나 이 지식은 결코 개별자의 지식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에 계속 종사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온전하게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전체적인 것, 관계를 맺는 것, 통일적으로 계속 전개하는 것, 자기의 질서와 법칙을 가진 어떤 형성물이다." "동시에 그것은 실재성에 속하는 모든 것, 즉 성장, 발전, 전성(全盛), 그리고 쇠퇴 등, 시간적 발생을 가지고 있는 철저히 실재적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의 실재성은 개인들의 실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객관적 정신의 생명과 지속이 개인들의 생명 및 질서와는 다른 것인 것과 같다. 객관적 정신은 개인들의 교체 속에서 지속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실재하는 것, 자기 방식의 존재자, 즉 객관적 정신이다."(825-6)


"그러나 객관적 정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객관적 정신이 실로 정신적인 보편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보편적 의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공동체는 의식적인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작품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법, 도덕, 습속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국가 의식, 법의식, 인륜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별적 주관에 있어서일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자기의 의식을 그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들 속에, 즉 주관적 여러 정신 속에 가진다. 그러나 이 의식은 그에게 적합한 의식이 아니다. 객관적 정신은 분명히 보편적, 대우주적 정신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의식은 결코 보편적, 대우주적 의식이 아니다. 헤겔은 이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객관적 정신은 절대적 이념이지만, 그러나 단지 즉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그와 동시에 유한성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현실적인 합리성은 이 유한성에 외면적으로 현상하는 측면을 지닌다.〉"(827-8)


"비록 인간은 맹목적으로 역사 속으로 몰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역사는 맹목적 생기현상(生起現象)이 아니다. 역사는 이미 역사 안에서 〈실체〉로 전제된 어떤 것이 목적에 따라서 행하는 실현인 것이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존재는 어떤 외적인 숙명처럼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내적 방향이고, 역사의 자기 결정이며, 역사 속의 실체적 본질─이것은 동시에 실재적인 것으로서 현시된다─의 자발적인 창조 활동이다. 이 실재적인 것, 시원적인 것, 실체적인 것,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객관적 정신이다." "정신의 위대한 긍정적인 창조물, 즉 법, 국가, 현존하는 도덕에서 사정은 역사에 있어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는 동일한 객관적 정신을 다만 다른 측면으로부터, 즉 객관적 정신의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역사 속의 본래적 시간성을 도외시한다 하더라도, 역사란 결국 자기의 단계들로 구별 지어진 객관적 정신의 전개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833)


"우리는 헤겔의 윤리적인 기본 관점을 현상학으로부터 알고 있다. 이 기본 관점에 의하면 참된 인륜성은 일체의 형식에 있어서 공동 사회 및 공동체의 일이고, 따라서 개인은 인륜성을 다만 공동 사회의 구성 요소로서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륜성은 마치 법 관계라는 외면성으로 몰리는 듯이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법이 인륜적 정감 작용의 제도이고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물은 창조하는 힘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산물이 아니고, 이 창조하는 힘의 고유한 생명이며, 그 정재(定在)의 형식이다. 또는 헤겔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법은 〈자유의 정재〉, 자유의 자기실현, 또는 자유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것, 〈제2의 자연〉,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자유이다." "시원적으로 법은 오히려 〈자기의 정재 속에 있는〉 자유 그 자체이고, 객관적 정신의 실존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이념인 것이다."(845-6)


"심정의 순수한 내면성으로서의 도덕, 그리고 형식적 법의 객관에 대한 주관성의 반정립으로서의 도덕은 아직도 본래적인 인륜성이 아니다. 인륜성은 최초로 이 형식적 법의 객관과 주관성의 종합이다." "헤겔이 논리학의 변증법적 원리를 그 증거로 끌어 들이는 이 이행(移行)은 인륜성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올바른 심정이 현존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은 심정에 있어서도 현실적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심정도 역시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의 현실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또는 헤겔이 그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인륜적인 것은 주관적 심정이지만, 그러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심정인 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불안정한 심정을 갖고 있는 인간은, 어떤 보편적인 것의 실체적 현실이 인간 속에 그것의 형식을 창조하는 한에서만, 이 실현을 객관 속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륜성의 외면적 형식은 국가라는 초개인적 형식인 것이다."(872-5)


"〈인륜적 현실성〉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공동적, 그리고 계통적으로 조직된 세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인륜적 현실성이 바로 국가이다. 자유는 자의가 아니다. 자유는 실체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인지하는 의욕과 행동인 것이다. 개인의 여러가지 자유는 국가의 제 법칙이다. 〈실제로 각각의 참된 법칙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객관적 정신의 이성 규정, 따라서 자유의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인륜적 현실성은 개인이 그 위에서 자라나고, 또 개인을 도덕적으로 바르게 실제로 맨 먼저 산출해 내는 실재적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자연적 생명이 유(類)의 생명 속에 놓여 있는 상태와 유사하다. 외견상으로는 개인들이 실재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개인들 안에서 보다 더 큰 통일적인 유의 생명이 실현된다. 다만 보편적 실체에게는 대자 존재가 결여해 있을 뿐이다. 정신의 영역에서는 이 대자 존재가 주관의 소유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인에게 이념이 반영(反映)된다."(880-1)


"절대자는 이성이라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기본 명제는 어떠한 영역에서도 역사철학의 영역에서처럼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헤겔의 역사관은 순전히 목적론적 관점이다. 역사는 그 속에서 객관적인 〈세계의 궁극 목적〉이 일체의 생기현상을 지배하는 목적 지향적인 전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궁극 목적은 객관적 정신의 대자 존재, 자기-자신-에로 도달함, 즉 객관적 정신의 자기 파악이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객관적 정신의 자기실현인 것이다. 그 때문에 세계사는 〈이성의 형상(形象)과 업적〉이다." "헤겔의 해석에 따르면 역사 과정이란 부정적인 것의 바로 이 전진하는 소멸이다. 또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이 역사 과정은 자신을 인지하는 정신의 점차 순수해지는 자기 서술이다. 이 속에 놓여 있는 낙천주의는 분명히 인간적-행복주의적 낙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역사는 지복(至福)의 실현이 아니라, 이성의 실현이다. 이것은 모든 가치의 가치이다."(896-9)


"헤겔은 총괄적으로 역사 진보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이 진행의 결과는, 정신이 자신을 객체화하고, 이 자기의 존재를 사유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규정성을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보편자를 파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원리에게 어떤 새로운 규정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민족정신의 실체적 규정성은 변경되어 버린다. 즉 민족정신의 원리가 어떤 다른, 그리고 실로 보다 높은 원리로 상승된 것이다.〉 이행과 상승의 이 형식이 헤겔 역사철학의 핵심 사상이고, 헤겔 자신의 규정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의미 이해의 열쇠인 것이다. 역사 전진은 내면적인 〈변화라는 개념의 필연성〉이요, 변증법의 논리적 진행이 나타내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나타내는 전진인 것이다. 정신이 어느 민족한테서 성숙시키는 열매는 이 열매가 태어난 그 민족의 품안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민족은 저 열매를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이 열매는 그 민족에게는 쓴 음료가 된다.〉"(910-1)


"이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민족─이 민족을 성숙시키기 위한─의 씨앗이 된다. 정신이 할 일은 자기의 본질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단계를 밟아서 완성되는 일이다. 세계정신에 비추어서 헤아려 보면, 제 민족정신이 이 단계들인 것이고, 〈세계정신의 실현을 완성하는 자〉인 것이다." "이렇게 전진함에 있어서 세계정신은 자신에 맞게 세계를 만든다. 세계정신의 관점 아래에서는 세계사는, 현실성으로 되는 실재적인 것이 또한 언제나 그때마다 이성적인 것이 되는 참으로 〈신적인 과정〉인 것이다. 정신은 그 자신을 〈일정한 형태로서〉 산출한다." "세계정신은 말하자면 역사적인 민족들한테서─자기의 무의식 상태인 어둠을 벗어나서 대자 존재에로─암중모색하면서 전진한다. 과정 그 자체가 차츰 가시적으로 되고, 의식적으로 목표를 지향하게 되면서, 어떤 민족정신은 다른 민족정신에게 길을 비켜 준다."(911)


"역사는 역사 속의 정당한 것과 더불어 그 자신 대단히 정당하다. 그리하여 개인 또는 심지어 개별 민족의 운명에 있어서의 비극성도 역시 역사 속에서는 여전히 정당화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고, 사적(私的)인 행위와는 외견상으로 무관계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이 역사의 자기 초월의 수단으로 만들 줄 알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에 세계사이요, 세계의 법정이다." "역사적 지식은 정신적 존재의 한 형식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 지식 자신도 다시 자기의 역사를 가진다. 모든 역사적 지식에는 그것의 시대, 그것의 민족, 그것의 정신적 원리 및 지평의 정신적 친자 관계가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것은─마치 객관적 지식이 자기 자신을 찾아서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처럼─객관적 정신이다. 객관적 정신은 이 발자취가 그 속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모든 오류와 사로(邪路)의 기초에 놓여 있다. 객관적 정신은 또한 역사 법칙의 기초가 되어 있기도 하다. 객관적 정신에게도 역시 역사는 세계의 법정이다."(918)


"신과 인간─이것은 가장 내면적인 변증법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 관계─이 관계는 모순이다─는 모순의 역학의 기저에 놓여 있다. 이 모순의 역학은 종합으로, 〈타자〉의 자기 해소에로, 신 속으로의 귀환에로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진정한 변증법에서 그런 것처럼, 출발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은 자기 자신을 인간 속에서 다시 보존한다. 그것은 신의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이렇게 하여 신은 비로소 대자적으로 된다. 즉 그것은 신이 인간의 인식 속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현실성은 신의 대자 존재 속에 존립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현실적으로 된다. 이렇게 하여 계기들이 서로 바뀐다. 그리고 계기들의 서로에 대한 자립성은 가상(假象)으로서 가면을 벗는다. 〈신은 또한 유한자와 똑같고, 자아는 무한자와 똑같다.〉 이것은 신은 오로지 종교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철학의 엄격한 공식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기 때문이다."(944-5)


"정신, 인간, 즉 신의 힘이 자신에로 도달하고 또 〈대자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종교 그 자체의 정신이요,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 있어서의 종교의 현실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헤겔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독일 신비주의의 핵심 사상에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헤겔은 이 일을 의식적으로 행하고, 그리고 그것의 증거로서 신비주의의 고전적 인물인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신이 나를 보는 눈은 내가 신을 보는 눈이다. 나의 눈과 신의 눈은 하나이다. 의로운 일에 있어서 나는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은 나 안에서 그 무게가 헤아려진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쉽사리 오해되는 일이요, 또 단지 개념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이를테면 일정한 종교의 정신이 아니라, 종교 일반의 정신이다."(945-6)


"헤겔의 체계는 최고의 대상으로서의 종교에서가 아니라, 체계 그 자체인 것, 즉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헤겔에게 철학의 철학은 철학 곁에서가 아니라, 철학 안에서 그것도 어떤 특수한 분과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전개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이 전개가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서 원으로 완결된다는 것, 우리가 절대정신의 정점에서 다시 절대자의 저 시원적(始原的)인 범주─이 범주로써 논리학이 시작되었다─에 도달한다는─이 모든 것은, 이제 투시할 수 있고, 자명하다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결과는 지나온 길 그 자체에서 매우 명확하게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이 원리는 그것이 자기의 본질─세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정신의 본질 속에서 완성된 상태로 재발견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 원리의 명제는 물론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고, 또 그런 명제로 지속한다. 체계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명제를 단지 그 귀결에서─대상의 단계들의 긴 계열을 통하여─미리 지시할 뿐이다."(9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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