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합본, 양장)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지음, 윤형식 옮김 / 이학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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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우리는 철학적 문제를 고려할 때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①질문 ②논변(들) ③답변 ④함축(들) 이중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꼽으라면 답변이 될 것이다. 적어도 답변은 다른 요인들에 비추어서만 유의미해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탈레스의 〈모든 것은 물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탈레스가 '변화'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루어주는 원천인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탈레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 물었다. 실체(근저에 놓여 있는 것)는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요소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②탈레스는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간접적 답변을 제시하였다. 즉 우어슈토프(물)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후 실체 문제와 변화 문제는 그리스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21-3)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항상 변화 속에 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①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 그러나 ②변화는 불변의 법칙(로고스)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③이 법칙은 대립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④그러나 이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집은 그와 같은 변화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당분간, 즉 수년 이상 건설적 힘이 파괴적 힘보다 더 우세하고, 이 상황이 지속되는 한 집은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힘들 간의 균형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어느 날 파괴적 힘이 우세해지면, 집은 무너질 것이다. 중력과 부식의 힘이 반대되는 힘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즉 모든 변화하는 사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이것들을 지탱하는 기본 원리는 힘들 간의 상호작용이며, 이 힘들 간의 균형은 법칙, 즉 로고스에 따라서 변화한다. 근저에 놓여 있는 실체는 우어슈토프가 아니라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는 통일성이다."(32-3)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것도 변화 속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상정하였다. 이성은 변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감각기관은 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형적인 그리스인인 파르메니데스는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성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이 옳고,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를 기만한다." "달리 말해 이성은 실재가 정지해 있으며 통일성이라고 인식한다. 감각기관은 우리에게 변화 속에 있고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실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 구분 혹은 이원론은 플라톤과 같은 여러 그리스철학자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감각기관에 현상하는 모든 것이 실재를 결여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감각기관과 감각 가능한 대상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일원론'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36-8)


"3세대 그리스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고도 하고 변화는 불가능하다고도 주장하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와 맞서야 했다. 달리 말해 이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중재적 철학자들로 불린다. 엠페도클레스는 불, 공기, 물, 흙이라는 4원소(혹은 불변적인 우어슈토프)와 두 가지 힘, 즉 나누는 힘(미움)과 묶어주는 힘(사랑)을 상정하였다." "4원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불변적이다. 결코 이 넷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 없다(양적으로 불변). 4원소는 항상 그것들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유한다(질적으로 불변). 그러나 이 4원소의 상이한 분량들이 (묶어주는 힘의 도움을 받아) 합쳐지는 것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엠페도클레스는 변화와 변화가 불가능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변화하는 것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사물〉이고, 불변적인 것은 4원소의 양과 속성이다."(40-1)


#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유했으며, 다만 원소들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바로 그 단순성 때문에 천재적이다. 오직 단 한 가지 유형의 우어슈토프만이, 즉 더 이상 분리가 불가능한 작은 입자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데, 이것들의 운동은 전적으로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데모크리토스가 우주 전체를 그 다채로움과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수의 아주 작은 물질 입자들이 빈 공간 속을 돌아다니고 모든 위치 변화가 충돌에 의해서 결정되는 하나의 거대한 〈당구 게임〉으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빈 공간, 즉 비非존재는 존재, 즉 원자들의 운동의 전체 조건이다. 이것은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들과의 명백한 단절이다. 이 원자들은 물리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었다(그리스어: 아토모스atomos[나눌 수 없는]). 원자는 연장延長, 형태, 무게 등과 같은 물리적 개념들로 서술될 수 있는 양적 속성들이며, 색깔, 맛, 냄새, 고통 등과 같은 질적 속성들이 아니다."(44-5)


"초기 그리스철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이다. 이들의 기본 사상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 혹은 수학적 관계들을 바탕으로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은 수학을 통해 〈빗장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구조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실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논변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사물들은 사라지지만 수학적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 지식은 그 대상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다.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나온다." "비록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을 정당하게 합리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수학이 이성을 통해서, 그러나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플로티노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합리주의적인 신비주의자들이었다."(49-51)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자들이 제기한 첫 번째 물음은 자연, 즉 퓌시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략 기원전 600년에서 450년까지의 그리스철학 제1기를 〈자연철학적 시기〉라 부른다. 그런데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싹튼 시기와 같은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즈음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잘못 논증된 자연철학적 사변에서 지식에 대한 회의적 비판과 지식 이론으로의 변화가, 〈존재론ontology('존재의 이론', 그리스어: 토온to on[onto] = '있는 것/~인 것', 로고스logos = '이론')〉에서 〈인식론epistemology('지식 이론', 그리스어: 에피스테메episteme = '지식[앎]')〉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인식론적 반응 외에 우리로 하여금 이 시기를 인간 중심적 시기라고 부르게끔 하는, 인간을 향한 또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즉 이제야말로 윤리적-정치적 물음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인간은 이제 사유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로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54-7)


"소피스트들은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후기 소피스트가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론(〈확실한 지식은 없다〉)에, 윤리적-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보편타당한 도덕성이나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례로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①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무언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③앎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이러한 세 가지 극단적 언명은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논증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사유의 일부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을 순전히 설득의 방법으로만 활용하는 입장을 채택했을 수 있다. 더 이상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합리적 토론과 합리적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남는 것은 오로지 설득의 기술뿐이다."(60-3)


"소크라테스에게 덕(아레테)은 어떤 면에서 앎(에피스테메)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호한 개념들─정의, 용기, 덕, 좋은 삶 같은 개념들─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앎을 추구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덕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과학이나 형식과학을 통해서는 그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는 목표나 가치를 포함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좋은 것(그리스어: 토 아가톤to agathon)에 대한 통찰도, 규범과 가치에 대한 통찰 내지는 규범적 통찰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앎이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앎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통찰이어야 하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말하는 정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75-6)


제3장 플라톤 / 이데아론과 이상 국가


"플라톤의 이원론[이데아론]은 대체로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세계 구분과 일치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존재론적 구분이 보편적인 윤리적-정치적 규범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좋음─윤리적-정치적 규범들─은 이데아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데아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불변적이다." "이것은 또한 좋음은 하나의 이데아로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든 말든, 그것에 대해 알든 모르든 언제나 변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플라톤은 이로써 도덕성과 정치가 다양한 인간의 의견과 관습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데아론은 윤리적-정치적 규범과 가치에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토대를 확보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99-100)


"우리는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론)과 감각 세계를 경험하는 것(실천) 사이의 지속적 상호작용(변증법)의 형태로서 '인식의 과정'을 갖는다. 이것이 우리가 좋음의 이데아와 이 [감각 세계의] 삶에서 좋은 것, 이들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개선해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은─영원한 이데아와 관련하여─보편적이면서 동시에─우리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구체적이 된다. 철학은 지식인 동시에 교육이다. 이 교육과정은 위로는 이데아(빛)를 향하고 아래로는 지각 가능한 사물들(그림자들의 세계)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오로지 진리를 위한 진리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런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을 우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부분적으로 이데아에 대한 통찰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상황에 대한 통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획득된다. 이데아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성취한 사람은 이 통찰을 가지고 세계를 계몽하기 위해 다시 이 삶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102)


그런데 플라톤은 반민주적이지 않은가? 그는 모든 권력을 전문가들에게 넘기고 인민은 위로부터 통치를 받도록 한다. 이 말은 옳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 속의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첨언해야만 한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어떤 개념적 그리고 방법론적 전제들에 근거하여 실재의 특정 부분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좋음〉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 관한, 사회와 인간의 삶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목적들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해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의 의견보다 '민주주의'가 상위에 있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21)


"플라톤의 예술관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아론과 연관된 또 하나의 논지가 존재한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이데아들은 참된 실재를 대표한다. 감각 지각의 세계의 사물들은 어느 정도 이데아들의 반영물이다." "그래서 (감각 지각 세계의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의 등급은 이차적이거나 심지어는 삼차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아주 높게 등급이 매겨질 수 없다. 복사한다는 생각, 즉 모방은 플라톤의 예술관에 근본적인 것이다.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복사물이며, 예술 작품은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복사물이다. 그러나 이데아들은 또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이상이며,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 작품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이데아들을 복사하는 시도를 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학을 전제하는 이상, 이 요구는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모방(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이론은 (이상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에 대한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127-8)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 자연 질서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플라톤은 이성이 요구하는 바에 입각해서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게 정치란 현실을 이상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가는 과제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하는 국가형태들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이성이란 현존하는 것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수단이다. 즉 플라톤은 현존 질서를 초월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으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은 당시 도시국가의 정치 상황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보다 현실적이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차이점에 주목하느라고 둘이 가진 많은 공통점을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주는 연결 요소는 아리스토텥레스가 플라톤에게 반대하면서 논증적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그는 플라톤에게 반대 논증을 제시하면서 플라톤을 합리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134-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는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개별 사물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부수적인 것의 추상을 통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다다르는 것이다.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정의定義로 포착된다. 예를 들어 종으로서의 말에 대한 정의가 그렇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의 획득을 감각 경험으로부터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를 향한 추상 과정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주장하다시피) 독립적 존재를 갖는 것은 바로 개별 사물들, 즉 실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은 (자신의 인식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속성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믿는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이행하고 난 후, 우리는 이 인식을 다른 참된 명제를 얻도록 해주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에 이용할 수 있다."(140)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은 현실태actuality와 잠재태potentiality의 구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나무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 (현실적으로) 단지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 내에 나무가 될 자연적 능력들(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씨앗이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능력들이 실현된다. 바로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변화란 잠재력들의 현실화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개념과 연관된 문제 많은 비존재non-being 개념을 회피한다. 변화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란 무로부터ex nihilo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발전과 창조적 솜씨에 기초한 변화는 현존하는 능력의 실현을 포함한다. 가능한 것은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재하는 것이란 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화'를 추구하는 무엇이다."(148-9)


# 잠재태 없이 실재하는 유일한 예외는 순수 현실태 =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는 (각각 테오리아theoria, 프락시스praxis 그리고 포이에시스poiesis에 상응하게) 이론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그리고 포이에시스적인[시적인] 학문을 구분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지식(에피스테메)과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 그리고 예술[기술] 혹은 기술적 능력(테크네techne)과 연관되어 있다. 이론적 학문의 목적은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다. 세 개의 이론적 학문 분야는 바로 자연철학과 수학 그리고 형이상학이다. 자연철학은 지각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사물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수학은 불변적이고 양화量化 가능한 속성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적 형상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획득한 윤리적 능력을 통해 지혜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리적 능력(프로네시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할 때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암묵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156-7)


"포이에시스적인 학문 분야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학문들은 창조적(포에틱)이다. 이 생산은 예술적 창조를 통해 일어나는데, 그런 이유로 시학과 수사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술적 생산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염두에 두고 있다. 끝으로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을 그 자체로는 독자적인 학문 분야가 아니지만 모든 학문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연장[도구](그리스어: 오르가논organon)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연구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가 언어의 내적 구조로 간주한 것, 즉 논리적으로 올바른 연역들(증명들)을 발견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을 통해 우리는 일련의 참이고 확실한 명제들로부터 동등하게 참이고 확실한 다른 명제들로 나아가는 것이다. 논리학은 이러한 이행을 확보해준다."(158-9)


"예술이 복제(혹은 모방)라는 근본적 생각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이론을 재해석한 이후로는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모방으로 (그리고 인식으로)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개별 사물들 내에 존재한다. 그래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플라톤의 경우보다 (형상과 관련하여)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제하는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가 플라톤의 경우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를 이끌고 덕성스러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통찰에 대해 보다 민주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해서 (인식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도덕적 기능도 갖는다. 예술은 정화, 즉 깨끗하게 씻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가장 깊게는 카타르시스, 즉 정화하기와 깨끗하게 씻어내기이다."(178-9)


제5장 후기 고대 철학


"우리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저 인민의 정치적 무력함이 지성적 차원에서는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멀리하고 단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간의 차이가 얼마나 크든 간에 그리고 이 두 학파 내에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했든 간에 우리는 단순화하자면 여러 면에서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이 두 철학이 집중했던 것은 바로 어떻게 개인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단 하나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답은 서로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도시국가와 연결된 〈공동체 속의 인간〉이라는 고대 그리스적 개념은 그 지반을 잃었다. 이제 한쪽에는 특수한 개인이, 다른 한쪽에는 제국이, 한쪽에는 개인의 덕성과 행복이, 다른 한쪽에는 어느 곳의 누구에게든 타당한 보편법의 개념이 등장한다."(186-7)


"쾌락(그리스어: 헤도네hedoné)을 최상의 (유일한) 좋음으로 보는 이론을 〈쾌락주의hedonism〉라고 부른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주의가 신중함과 숙고로 각성된 쾌락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을 순간적인 감각적 욕망으로 보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우정이나 문학적 활동과 같이 보다 정제되고 확실한 형태의 안녕을 강조했다. 우리가 사적인 행복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보다 확실하고 정제된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동시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치적 활동에 반대하였다. 정치적 활동은 근심만 많이 만들어낼 뿐 확실한 쾌락은 거의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직 쾌락만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이때 쾌락은 반드시 개인의 쾌락이다. 국가와 사회는 오직 개인의 쾌락을 증진시키고 개인의 고통을 예방할 때에만 좋은 것이다. 법과 관습은 개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190-1)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진정으로 어떠한 외부의 재화에도 의존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덕은 이성에 따라서,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행복의 유일한 조건은 덕성스런 삶을 사는 것이고 덕은 앎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입장을 전적으로 일관되게 견지했다. 덕성스럽게 사는 것은 인간에게 유일한 선이다." "사람들의 외적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의 역경에 처하든 외부적으로 성공해서 명예와 인정을 얻든, 부자든 가난하든, 혹은 주인이든 노예든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구분은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구분이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외부 세계와 관련하여 금욕주의적 도덕을 설파했고 성품의 내적 강화를 위한 교육을 주장했다. 운명의 장난에 직면하여 인간은 스토아적 평정심을, 즉 초연함[그리스어: 아파테이아apatheia]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192-4)


"그리스-헬레니즘의Greco-Hellenistic 스토아학파─제논(기원전 약 326-264), 클레안테스(기원전 331-233), 크뤼시포스(기원전 약 278-204)─에게서 우리는 일종의 〈중간 계층〉의 심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금욕적 은둔만이 아니라 의무와 품성 형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스토아학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자연법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스토아철학은 점차 사회 상층부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의무와 품성 형성 및 보편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학설은 로마의 상층계급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이들은 마침내 스토아철학을 일종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하층계급적인 퀴니코스학파의 세계 체념적 특징들은 억압되고, 의무와 강하고 책임감 있는 품성의 도야에 기초하여 국가를 뒷받침하는 도덕이 강조되었다. [스토아학파가] 처음에 주장한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은 이제 그 흔적만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내적이고 사적인 것과 외적이고 공적인 것 간의 구분이다."(196)


"로마의 스토아학파─키케로(기원전 106-43),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54), 에픽테토스(기원후 약 50-13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기원후 121-180)─는 인간을 보편적 국가와 보편법하의 한 개인으로 간주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우주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한 사람의 이성도 보편적 이성의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의 법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영원한 법[법칙]의 일부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칙적으로 영원한 법과 일치하는 사회의 법률과 그렇지 않은 법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한 법률들과, 보편적인 자연법과 일치함으로써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존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주장하는 법률들을 구분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은 그 모든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세계 이성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이다. 이 점이 사법적司法的, 정치적 법률은 보편적 자연법에 근거한다는 자연법 이론의 핵심 요점이다."(197-9)


"각 시기별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불행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공통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인생철학 학설들 중 어느 것도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것이 고대가 끝나갈 무렵 많은 지지를 얻은 결론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낸 이 인생철학 학설들은 그것들이 약속했던 것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확보할 것인가?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초자연적 수단, 즉 종교를 통해서였다. 고대 말이 되면서 종교적 갈망은 커져만 갔다. 신플라톤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종교적 갈망에 부응하고자 했다. 신플라톤주의의 학설은 개인을 보다 광대한 우주론적 그림 안에 위치시키고 악을 결여로, 비非존재로 묘사했다. 또한 육체(물질)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즉 비존재로, 그리고 영혼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인의 영혼이 세계영혼과의 총괄적 합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영혼을 그 유한한 껍데기(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205-6)


제6장 중세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새로운 기독교적 개념들, 즉 만물의 중심인 인간, 직선적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무에서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 개념을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 개념들은 고대의 철학과 융합된다. 신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창조한 이상, 그리고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고 구원을 받을 운명인 인간이 바로 창조의 귀감인 이상, 모든 것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내적 존재는 조용한 이성 활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상이한 감정과 의지의 다양한 충동이 서로 다투는 전쟁터이다. 이 내적 존재는 비합리적 충동들의 놀이터, 죄악과 죄과와 구원에 대한 갈구가 난무하는 놀이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내적 삶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은총과 〈초인간적〉 조력을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가 전적으로 신의 예정된 구원 계획에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했다."(243-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악마의 투쟁을 각 사람의 내부 투쟁으로 해석했던 것처럼 똑같은 투쟁을 역사적 차원에서는 하느님의 나라(키비타스 데이civitas Dei)와 지상의 나라(키비타스 테레나civitas terrena) 간의 대립에서 찾았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명확히 정치 이론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정치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특정 정치 체계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나라를 우연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성이 타락했기(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에 인간의 악을 다스리려면 강한 지상의 나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상의 나라는 선과 악의 역사적 투쟁이 지속되는 한, 즉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부터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는 꼭 있어야 할 필요악이다."(244-5)


"〈보편자 문제〉는 보편적 개념들, 즉 보편적인 것[보편자普遍者universals]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어떤 존재 형식을 갖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벌어진 중세의 논쟁과 연관된다." "보편자 문제에서 견해 차이는 보편자의 존재 수준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갖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보편자가 실재real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재론자realist〉(혹은 〈개념conceptual 실재론자〉)로 불린다.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name(라틴어: 노미나nomina)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명론자nominalist〉로 불린다." "초기의 중세철학에서는 실재론이 지배적이었다. 중세 중반(1250년)에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보편자는 신의 생각 속에(인테 레스), 개별 대상들 안에(인 레부스) 그리고 인간의 생각 속에 추상으로서(포스트 레스) 존재한다는 온건한 실재론을 만난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이르면 유명론이 세를 얻는데, 예를 들면 오컴의 윌리엄과 마르틴 루터가 대표적이었다."(260, 264)


"신학적으로 보편자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전통이 보여주듯이 기독교 유명론자들은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신앙과 계시의 독특함을 강조했다. 유명론자들은 신의 말씀과 신앙을 통해 계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다면 신의 육화肉化의 핵심적 의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실재론자들은 견해가 달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이성의 도움을 얻어 신(시원적 원천)에게 다가갈 것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정신 속의 개념들이 실재에 조응할 경우만이다. 이것은 보편자 문제에 대해 소위 실재론적 입장으로 전개되었던 종류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전제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원죄설과 성체성사의 신비와 삼위일체설과 대속설代贖說을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였는데, 이것들은 개념실재론의 견지에서 볼 때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265-6)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신학적 종합을 이룩해냈다.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토마스주의Thomism적 종합의 특징은 '조화시키기'이다. 신과 세계를 조화시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보편자 문제와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실재론을 수용하였다. 개념들은 존재하는데 오직 대상들 내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지식은 감각인상들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는 추상을 통해 대상들 속의 보편적 원리들(보편자들)을 인식한다. 이것은 아퀴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이성을 통해 많은 우주의 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우주가 고차원의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통찰도 이에 포함된다(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달리 말해 이성과 계시(신앙)는 합일된다." "그러므로 토마스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관하여 이성이 의지보다 우선한다는 일종의 주지주의主知主義intellectualism를 표방한다."(268-9, 280)


"『평화의 수호자』(1324)의 저자인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1275/80-1342)는 교황에 적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마르실리우스는 사회가 자족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회는 어떠한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경우 신앙과 이성은, 성聖과 속俗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사회는 교회와는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적 진리와 합리주의적(세속적) 진리에 대한 토마스주의적 조화를 거부했고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즉 이성은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신앙은 계시에 (즉 성서에) 토대하며, 따라서 내세에 적용될 뿐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실리우스는 종교(기독교)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신론은 18세기 프랑스의 산물이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종교를 〈내면화〉함으로써,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97-8)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주의적 인간론을 계승한 루터의 신학은 흥미로운 주의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다(주의주의voluntarism는 〈의지〉를 뜻하는 라틴어 볼룬타스voluntas에서 유래하였다). 신이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사이에 선을 그었다면 신은 이것을 자주적 의지의 행위로 행한 것이다. 옳음과 선이 옳고 선한 까닭은 신이 어떠한 도덕적 규준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것들을 그러하도록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신은 이 선을 달리 그을 수도 있었다(신의 전능함). 신은 신이기에 그의 의지는 어떠한 규칙이나 잣대의 규정을 받지 않는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오히려 신의 의지가 모든 사물의 잣대인 것이다." "또한 주의주의는 기독교 윤리를 신의 결단주의적 의지에 정초시킨다. 이로써 신은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은 절대적 존엄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루터에게 세계와 도덕적 규준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것들은 원칙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것일 수 있었다."(303-4)


"많은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라틴명: 아비켄나, 980-1037)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후기 그리스 형이상학(신플라톤주의)의 개념들을 원용하여 이슬람의 진리를 정식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븐 시나의 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의 물질관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신이 무無로부터 물질을 창조하였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한 빛으로부터의 유출이 물질을 채우기는 하였으나 물질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초기 이슬람 철학 내에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 출발점이 되었다.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이 알 가잘리(1058-1111)는 여러 저작에서 이븐 시나의 신플라톤주의를 공격하였다. 그의 핵심 요지는 철학자들의 신은 코란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이 코란과 충돌할 경우에는 철학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같은 시기 기독교 세계에서도 유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318-9)


"알 가잘리의 도전에 응전한 것은 이븐 루시드(라틴명: 아베로에스, 1126-1198)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이븐 루시드주의[아베로에스주의Avrooism]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스콜라철학의 주요 특징을 이루었다. 알 가잘리와의 논쟁에서 이븐 루시드는 철학적 결론과 코란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명백한 모순들을 설명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이븐 루시드는 서양철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해석 원칙 하나를 도입한다. 그는 코란 속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코란 구절의 문자적 해석이 이성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 가잘리와 이븐 루시드의 논쟁에 대한 이 간략한 서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근본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철학과 기독교 철학 둘 다에 존재하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도전이다."(319-20)


제7장 자연과학의 발흥


"르네상스의 방법 논쟁에서는 탐구를 사실상 중세 스콜라철학을 지배했던 (그러나 그리스철학을 지배했던 것은 아닌) 연역법적 과학의 이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순전히 논리적 연역으로는 (논리적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미 전제들 속에 내포되어 있다. 연역적 답들은 확실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찾는 이들에게는 별무소득인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에 추구되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지식이었다. 연역법의 약점은 그것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득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이 인식론적 갈등에 참여한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과학적 이상으로서의 연역법을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가설과 연역적 추론과 관찰의 역동적인 결합에 놓여 있었다. 이 새로운 조합이 바로 바로 가설연역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이다."(331)


"체계적 관찰과 수학적 모델에 기초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태양중심설은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생활 경험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인식의 위기를 초래했다." "우리는 과학적 경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론들이 인간의 생활 경험의 변형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의 자기 인식이 과학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인식의 변화는 그 의미가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추락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즉 새로운 세계관은 천구는 특별하며 인간이 거주하는 우주의 부분에 비해 질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믿음의 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우주를 탐구하면서 성취한 진보 덕분에 새로운 긍정적 자기상을 구축할 잠재력이 있었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세속적이고 과학에 근거한, 진보에 대한 믿음의 뿌리이다."(342-3)


"갈릴레이는 과학 지식은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결코 충돌할 수 없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신은 성서와 자연이라는 책에 자신을 계시한다. 신은 두 가지 책 모두의 저자author이다. 그리고 신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 그래서 성서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조화시키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 갈릴레이의 생각이었다. 이 견해는 교회의 계몽된 구성원들도 수용하였다. 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조절과 조화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갈릴레이에 따르면 과학 이론들은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도구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해석은 자연과학에 맞게 조절되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선다. 가톨릭교회로서는 당연히 이 견해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 물음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것이 초래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352)


"[주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는 〈아래로 던져져 있는 것〉, 즉 〈아래에[근저에] 놓여 있는 것〉을 뜻하는 수브-옉툼sub-jectum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에 인간은 진정한 sub-ject가 아니었다.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stance[실체를 뜻하는 영어 substance는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sub-stans에서 유래했다])은 사물일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주체subject가 되고 다양한 사물들이 대상들이 된 것은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즉 인간은 이제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jectum으로서) 대체로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주체의 인식 대상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사물은 대상들로 파악되었다)." "관념적으로 보건대 인간은 더 이상 합리적 공동체, 즉 폴리스와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가정, 즉 오이코스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 즉 조온 폴리티콘이 아니었다. 인간은 기술적 지식과 함께 객체[대상]들의 우주에서 지배권을 쥔 주체가 되었다."(375-7)


제8장 르네상스와 레알폴리틱 / 마키아벨리와 홉스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정치 이론들과는 구분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거의 한계를 모른다. 그런데 물자는 희소하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한다. 국가는 다른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 기초한다. 법을 지탱하는 권력이 없으면 무질서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인민의 안전을 보장할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점을 주어진 사실로 전제할 뿐,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분석은 행하지 않는다." "좋은 나라는 서로 다른 이기적 이해관계들 간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안정된 나라이다. 나쁜 나라는 이기적 이해관계들이 적나라하게 갈등하는 나라이다." "정치의 목적은 고대 그리스나 중세에서처럼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함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도덕과 종교를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은 그 수단이다."(382-3)


"대부분의 그리스철학자와 기독교 신학자는 도둑질이나 살인과 같은 특정 행위(수단)가 그것이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치 않고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목적과 수단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주된 관심사는 순전히 정치적인 게임이었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몰역사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시대의 정치 상황을 공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정치 상황에 통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로마사논고』 참조). 따라서 우리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정치학을 대부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방법은 우리의 개념으로 보자면 〈몰역사적〉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의 시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역사적으로 사유한 것이다."(386-7)


"홉스는 여러 면에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정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불변적이고 초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개별적 사실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반화를 하는, 마키아벨리가 했던 것과 같은 단지 기술적記述的인 방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홉스는 새로운 과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자연과학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동시에 홉스는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그보다 앞선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변화하는 표피적 사건들을 해명해줄 근본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기초를 찾고자 했다. 르네상스 후기의 철학자로서 홉스는 이 기초를 인간에게서 찾고자 했다. 인간이 바로 수브-옉툼, 즉 토대이며, 이로부터 사회가 설명되어야 한다."(394-5)


"권력은 통합되거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홉스에게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한 것이다. 이 통일성의 거소居所가 국왕인지 의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홉스의 이론에는 오직 하나의 왕만 존재해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없다. 홉스로서는 법과 질서를 강제하는 이가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절대왕정에 대한 옹호는 빈약하다. 게다가 홉스에게 근본적인 것은 왕이 아니라 개인이다. 이기적이고 고립된 개인들 간의 투쟁이 국가와 왕정의 토대이다. 국가와 왕정은 개인의 자기 보존을 확보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홉스는 사회적인 모든 것이 국가, 더 나아가 개인의 자기 보존 욕구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개인들은 근본적으로 비사회적이며, 그런 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실로 부차적인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한 자기 이익에 기초한 계약을 통해 창출된 인위적 산물이다."(402-5)


"국가는 개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주의liberalism가 관용을 지지하는 정치 이론을 의미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이 경우 자유주의의 근원은 예를 들어 로크에게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 = 〈자유〉[liberalism은 libertas에서 유래]). 그러나 우리가 자유주의를 심리적 태도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 계약 그리고 국가라는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정의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용어 사용은 우리가 개인, 계약, 국가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자유주의(자유주의자liberalist)와, 관용과 법적 자유를 옹호하는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로서의 리버럴리티(리버럴한 사람liberal)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에 따른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라 불릴 수 있지만 〈리버럴한 사람〉은 아닌 반면, 로크는 자유주의자이자 리버럴한 사람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은 리버럴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408-9)


제9장 의심과 믿음 / 중심에 선 인간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인 동시에 낡은 것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일소하고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철학은 끝없는 논란의 연속이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연역적인 수학적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연역 체계'를 자신의 과학적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철학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철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같은 연역 체계가 되려면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참'인 전제들(공리들)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연역 체계에서 전제들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우면 결론들(정리들)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수학과 일부 연역적인 학문 분야들로부터 차용해 온 과학적 이상은 어떻게 하면 이 연역적인 철학 체계를 위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전제들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끌었다."(414)


"이 지점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懷疑'가 들어오는 지점이다. 방법적 회의는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찾기 위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명제를 걸러내는 수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연역 체계의 전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방법적 회의의 목적은 이성적으로 정당하게 의심할 수 있는 것 혹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방법적 회의는 연역적 철학 체계의 전제가 될 수 없는 모든 진술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방법적 회의는 확실한 전제들을 갖는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 주체는 바로 혼자 생각하는 개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의문에 대한 해답, 즉 회의를 종료시키는 확실성이 생각하는 개인의 확실성이라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의의 확고한 종료인 이 결과는 일정하게 이미 데카르트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속에 녹아들어 있다."(415-6)


"19세기에 그 절정에 도달한 새로운 역사의식은 명백히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에 의해서 미리 준비되었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가 창조한 것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때 비코가 생각한 일차적 대상은 사회와 역사이지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와 법령도 역시 그 대상이다. 사람이 창출한 것은 신이 창출한 것, 즉 자연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자연은 사람이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신만이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관찰자의 시각에서만 자연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신처럼 그 내부로부터 자연을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우리가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들뿐이다. 즉 인간이 그것들의 창조자임을 인식할 때뿐이다. 따라서 비코에게 있어 구성된 것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간의 구분은 중요한 인식론적 함의를 갖는다."(430-2)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비코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비코는 우리가 공통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안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의도와 욕망과 이유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플라톤의 아테네나 키케로의 로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통찰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감정이입 내지 판타지아를 통해서만 그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코는 연역적이지도 않고 귀납적이지도 않은 (가설연역적이지도 않은) 통찰 내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확정하려고 노력한다. 비코가 제공한 새로운 방법적 원리들, 즉 비코의 새로운 과학[시엔차 누오바Scienza nuova]은 문헌학과 사회학과 역사 연구의 종합이다."(434-6)


제10장 체계로서의 합리주의


"스피노자는 시스템, 즉 체계를 세우는 데 뛰어난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합리주의적 체계 수립가로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연역 추론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 능력을 극히 신뢰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사적 연결 지점들을 언급하자면, 도덕 이론과 관련해서는 스토아철학과 유사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자연론과 관련해서는 범신론과, 종교 사상과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성서 비판과,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관용에 대한 근대적 요구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합리적 직관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또한 데카르트처럼 수학을 과학의 이상으로 여기면서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연역주의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공리를 찾는 데 주로 몰두한 반면, 스피노자는 공리들로부터 출발하면서 추론에, 체계에 역점을 둔다."(444-5, 450)


"『윤리학』 첫 페이지에서 우리는 기본 개념인 실체substance에 대한 정의를 발견한다.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 즉 그것의 개념은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다른 어떤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체의 정의상 모든 한계 설정이 배제되기 때문에 실체는 하나이자 무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체는 세계에 하나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이다." "또한 다른 어떠한 것도 실체의 원인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어떤 것은 실체에 대한 완전한 개념 규정 속에 포함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실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연장延長 혹은 사유로 나타난다. 실체는 무한히 많은 현현顯現 방식을 갖지만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현현한다." "연장과 사유는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두 가지 독립적인 기본 요소가 아니다(레스 코기탄스[영혼]과 레스 엑스텐사[물질]).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일 뿐이다."(450-4)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다. 개별 인간은 실체의 한 양상이다. 스피노자에게 우리 자신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체의 측면들로, 실체의 양상들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보다 평범한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관계들과 연관들도 이해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협소하고 사소한 인연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괄적인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실재에 의해 내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구원을 주는 진리는 우리가 총체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다 큰 연관 관계 속에서 올바른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다."(456-7)


제11장 로크 / 계몽과 평등


"로크는 회의를 옹호했지만, 그가 옹호한 회의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오류 불가능한 지식을 얻기 전의 일시적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의심하고 검증하는 태도로서의 회의였다. 인식 과정은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끄는 과정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연과학에서처럼 우리가 가진 지식을 점차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발흥은 로크에게 합리주의자들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태도와 이상적 인식에 대한 생각을 갖도록 했다." "지식 비판을 행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인식론은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는 도약대였던 반면, 로크와 경험주의자들에게 지식 비판이 갖는 치료적이고 지식을 촉진하는 힘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목적이었다. (로크가 보기에) 오로지 개념들만을 통해서 얻는 통찰은 한계가 있고 문제의 여지가 많다. 적절한 지식 획득은 경험과학에서 검증과 점진적 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466-8)


"우리는 어떤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로크는 이렇게 답한다. 〈정신mind은 어디서 그 모든 이성과 지식의 재료들materials을 가지고 오는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한 단어로 답하겠다. 바로 '경험EXPERIENCE'이다.〉" "그렇다면 경험이란 무엇인가? 로크는 외적 지각으로서의 경험(감각)과 우리 자신의 정신적 작용과 조건에 대한 내적 지각으로서의 경험(반성)을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인상들(관념들)이다. 대체로 로크는 이 기본 경험들이 수동적으로 획득된다고 생각했다. 수동적으로 획득된 이 단순관념들simple ideas은 적극적으로 정신에 의해 상이한 방식으로 가공된다. 이렇게 해서 아주 다양한 우리의 복합관념들complex ideas이 생겨난다." "즉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지각과 반성을 통한 단순관념들로부터 비롯되지만, 정신은 이 재료를 적극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지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지식은 단순관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470-2)


"로크의 자연 상태는 무정부적 전쟁 상태가 아니라, 개인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생활 형태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적으로, 즉 그 자체로 모두 평등하다." "나아가 이 평등과 자유는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의 신체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성취한 것, 즉 우리 노동의 결과인 재산에 대해서도 처분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들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정치적으로 질서 잡힌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연 상태보다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크에게 국가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분명 국가는 무엇보다 윤리적 과제를 갖는다는 고대와 중세의 통상적인 견해, 즉 국가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해야 하며,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윤리적-정치적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견해와는 반대된다."(480-1)


제12장 경험주의와 인식비판


"로크는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관념들, 감각 인상들)와 우리의 감각과는 독립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구분하였다. 우리는 오직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만 이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알 수 있다. 버클리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원인으로서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지각 불가능한 대상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구분은 형이상학적 구성물을 가지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각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에세esse[존재]는 페르키피percipi[지각됨]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지각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 조건하에서 지각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부정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지각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96, 501)


"버클리는 존재가 지각에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원칙은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생각했다. 지각 개념은 반드시 주체(영혼)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반드시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것이 참이다. 에세[존재]가 지각함perceiving과 같은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간의 의식, 즉 주체가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버클리에 따르면 또한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의식도 존재한다. 즉 지각 가능한 모든 것을 항상 지각하고 있는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신이다. 그래서 신은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는 페르키피와 같다." "신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지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즉 관념들 중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가, 질서 잡힌 다양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버클리의 신 존재 증명)."(501-2)


"흄은 오직 두 종류의 인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경험, 즉 궁극적으로 감각 지각에 근거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주의적 해석에 따르자면 수학과 논리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들 간의 관계에 관한, 관습적으로 고안된 규칙들에 근거한 인식이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인식을 초월하는 지식은 가질 수 없다." "흄은 그가 〈인상impressions〉이라 부르는 것과 〈관념ideas〉을 구분한다. 인상은 강렬하고 생생한 지각으로서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감각 지각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증오나 기쁨 같은 직저적인 심리적 경험들도 역시 인상이다. 따라서 인상은 외적 지각과 내적 지각을 모두 포괄한다. 흄은 이러한 직접적 감각 지각, 즉 인상에 근거한 정신적 이미지들이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흄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실체 개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버클리와는 반대로) 신 개념을 포함하여 정신적 실체 개념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인과성 개념도 비판한다."(507-9)


"흄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는 그러한 가능한 필연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경험주의적 의미에서 지식이 아닌 구성 요소를 포함하는 인과성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사건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미래에도 똑같은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흄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도덕규범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원리들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나 이성적 직관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과관계에 대해 아는 것은 경험(감각 지각)에 기초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흄은 인식론적으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결과가 성취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했지만, 경험과학에서의 점진적이고 자기 수정적인 진보의 가치는 힘주어 강조했다."(514-8)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경험주의자들은 직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합리주의자들이─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자들─자기들끼리 의견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적 직관을 통해 참된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리주의의 비판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주의적 주장은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인가? 이 주장은 어떤 종류의 경험에 근거할 수 있는가? 경험주의적 주장이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경험적 진리에 관한 주장이자 의미 있는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 간의 구분에 관한 주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경험주의적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이 수용하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 즉 분석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 중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주의적 주장이 간접적으로 경험주의적 주장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529)


제13장 계몽주의 / 이성과 진보


"계몽주의 시대는 확장하는 중간 계층 내의 진보적 낙관주의와 새롭게 각성된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세속화된 메시아주의에서는 이성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도움으로 실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밝히고 물질적 진보를 성취할 것이었다. 인간은 점차 근거 없는 권위와 신학적 후견을 벗어나 자율적이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주적이고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상이 해방되었다. 무신론은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곧 기대했던 진보를 실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이 이성(과학)이 크나큰 물질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분명 옳은 듯 보였지만 그들의 이성 개념은 너무나 모호했다. 그 개념은 논리적, 경험적 그리고 철학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었고 서술적 통찰과 규범적 통찰을 담고 있었지만, 이 진보를 실현하는 데 닥칠 정치적 난점들은 고려하지 않았다."(537)


"계몽사상가들의 이성에 대한 도취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극단적 형태를 띠면 피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을 공격하면서 그것들을 부정의 형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즉 감정의 함양과 회의적인 비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은 당시의 낙관주의를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루소는 계몽철학에 대한 이 순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계몽철학자들이 다소 일방적인 이성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면 루소는 감정의 함양을 내세웠다. 계몽철학자들이 개인과 자기 이익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면 루소는 공동체와 '일반의사'를 찬양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진보를 찬미할 때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악은 전통과 특권에 의해 조장된 무지와 불관용에서 기원하며 그 구제책은 계몽이라고 생각한 반면─이성과 과학이 승리하면 문명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선도 그 모습을 드러낼 것─루소는 문명으로부터 악이 기원한다고 생각했다."(557-8)


"국가가 계약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개인주의적 이론들과 보조를 맞추어 루소 역시 자연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사회계약으로 끝을 맺는 논증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루소에게 핵심은 그저 자연 상태와 국가에 의해 형태가 부여된 사회라는 두 개의 뚜렷이 구분되는 개념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형되는 것, 즉 계약에 의한 사회의 형성이라는 문제도 아니었다. 루소의 사유 실험은 사회와 인간의 점진적 발전을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발전의 궁극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이다." "플라톤을 따라서 루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완전히 발전된 인간은 '사회-속의-시민'으로서 내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상위 중간 계층이 주창하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보수적 반동을 대표한다. 보수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반대로─밀접한 공동체적 유대를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다."(561-2)


"자유주의 전통은 비록 사회의 유기체적 측면을 종종 간과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노골적인 권력의 악용으로부터 정치적 과정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양식들을 발전시켜야 하는 의의를 제공하였다.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관은 대체로 제도적 문제들을 무시하였다." "일반의사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표현 가능한지가 불분명할 경우 우리는 독단적인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일반의사라고 내세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는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 이론은 비합리적이고 낭만적인 공동체 숭배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루소의 사상이 제도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의사 이론이 한편으로는 (로베스피에르나 마오쩌둥식의) 연속 혁명─인민의 자발적 의사가 통치를 이끌어야 한다─에 복무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버크의 경우처럼) 안정된 민족국가─인민의 의사는 연면한 전통에 의해 창출된다─에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564-5)


제14장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공리)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을 근본적인 규범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엘베시우스를 따랐다. 벤담의 사상에서 새로운 것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일관되게 이 원칙을 법률 개혁의 지침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 가장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지를 계산하는 체제를 개발하였다는 점에 있다." "쾌락의 계산보다는 고통의 계산을 말하는 것이 아마도 더 타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의 행위 내지 재화의 긍정적 서열을 매기는 것보다는 일정한 근본적인 결핍들을 회피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공리 개념은 쾌락 개념과 같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쾌락 개념은 개인의 경험과 관련되는 반면, 공리 개념은 바람직한 결과와 관련된다. 따라서 공리의 철학, 즉 공리주의는 우선적으로 결과주의 윤리학이다."(578-9)


"벤담은 개인[개체]the individual에 대한 강조를 언어철학의 영역에서도 이어간다. 벤담은 의미를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는 낱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지 않는 낱말들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벤담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들의 쾌락과 고통뿐이다. 명예, 조국, 진보 등의 낱말들이 종종 미혹과 조작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벤담의 유명론에는 올바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벤담이 그러한 낱말들은 모두 미혹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이상 실재의 측면들, 즉 사회적 연관 관계들을 은폐할 위험에 빠진 사람은 오히려 벤담 자신이다. 벤담이 모든 개념어를 거부하는 만큼 그는 익명적 권력 구조 같은 사회의 특유하게 사회적인 측면들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벤담의 유명론의 대가는 비합리적이고 해로울 수 있는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맹목과 무력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580-1)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와 경험주의에 의해 각인된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이 이론들의 이전 형태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그는 사회과학의 힘을 빌려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정하려고 시도했고, 정치 이론에 있어서는 자유방임을 거부하고 적극적 입법을 강조하는 사회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밀은 익명의 사회적 힘들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로써 밀은 비非사회적인 인간 원자들과 그 외부의 국가 체계라는 설명 틀을 벗어난다. 사회도 개인 및 국가와 더불어 연구해야 할 영역이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국가가 외적 강제를 행한다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의 순진한 견해를 밀이 거부한 것이다. 사회자유주의자 밀은 국가와 법률을 넘어서는 강제성과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입법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가 최대한의 자유와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585, 590)


제15장 칸트 /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흄의 회의론에 대한 칸트의 거부는 인식론적 시각의 역전逆轉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방법론과 동일하게 칸트는 주체가 대상[객체]object으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써 인식이 생겨난다는 기본적 사고를 뒤집었다. 그는 그 관계를 역전시켜 대상이 주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주체인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의 역전이 바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론과 합리주의적 독단론이라고 보았던 것을 회피함으로써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셈이다. 칸트는 신과 도덕규범같이 감각을 초월하는 대상들에 대한 합리적 직관 대신에 경험의 근본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인식론적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al 지식이라 부른다."(602)


"칸트는 모든 인간은 동일한 원칙적 〈형식들〉을 갖는다고 전제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이 동일한 형식들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형식들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같은, 모든 인식의 일반적 특징들이다. 이것들은 모든 경험적 탐구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로서 경험심리학의 비판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동일한 형식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형식들에 의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확실한 무엇을 안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든 간에 그 경험은 시간, 공간, 인과성 등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이 구조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현재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학에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일정한 근본적 특징들이 존재한다."(605, 608)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주의라고 보았던 것을 거부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의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이 존재하며, 이 통찰은 두 학문, 즉 수학과 자연과학이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는 그가 합리주의적 독단주의라고 보았던 것도 거부했다. 사변적 합리주의(형이상학)는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학문[과학]이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적 직관은, 가령 신에 대한 직관은 단지 가짜 통찰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사변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이 시작된다. 전통적 합리주의는 가짜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칸트처럼 경험의 조건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에 도달하려고, 즉 감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에 도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조건(과 한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612-3)


"흄의 윤리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여러모로 칸트의 인식론적 답변과 유사하다. 칸트는 〈너는 ~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이러한 당위 규범이 가능한가?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 의무이기 때문에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 없다. 경험적인 것은 (칸트에 따르면) 규범적인 것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험적인 것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우리 안에 내재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무조건적인 도덕 명령(〈너는 ~을 해야 한다)〉은 우리 행위의 결과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의 결과를 완벽하게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이 도덕 명령은 우리의 도덕적 의지에 적용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 이론은 결과주의 윤리학[공리주의]이 아니라 도덕적 의지의 윤리학이다."(616-7)


"이제 칸트 철학에는 인과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의 세계와, 우리가 자유롭고 책임 능력을 갖는 도덕성의 세계 간의 긴장, 간단히 말해 필연성과 자유 간의 긴장,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간의 긴장과 관련된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하여 칸트는 매개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이론을 도입했다. 즉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능력이다(이 매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판단력이 목적론과 미학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리는 비록 모든 설명이 사실상 인과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 형식들에 대해 즉각 목적론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마치 목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사고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목적과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자연 발생적인 사유 방식은 두 세계(필연성과 자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636-7)


"미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두 세계를 조화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미학은 두 가지 기본 경험, 즉─위대한 예술이나 자연의 경우처럼─압도적이거나 숭고한 것의 경험과 아름다운 것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식의 판단이 아니라 〈취향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이 취향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취향이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우리가 이 분야에서도 공통된 의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인식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미적 판단은 어떤 면에서 주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하다. 이 점은 우리 모두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예술 작품을 바라본다면 동일한 미적 쾌감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이 공통의 감정이 올바른 판단의 토대이고, 따라서 이 올바른 판단은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이것은 일종의 암묵적 지식이다)."(637-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학은 객관적 토대를 갖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즉 미는 참[眞]과 선과 연관되어 있다. 칸트의 경우 진리와 (정언명령으로 구상된) 도덕성은 구분된다. 따라서 숭고한 것처럼 (그리고 목적론적 사고방식처럼) 아름다운 것이 둘 사이를 (진리와 도덕성 사이를) 매개해야 한다." "칸트의 시대 이후 낭만주의는 특히 창조적 과정에서, 또한 예술의 경험에서도 예술의 주관적 측면을 보다 더 강력하게 강조하는 미학을 발전시켰다. 위대한 창조적 인격체로서 천재가 각광을 받았다. 독특함이 찬양되면서 보편성이 희생되었다. 나아가 모방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전적 강조와는 반대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이 특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독특함에 대한 모든 찬양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예술가와 비평가는 여전히 예술이 인간에게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특함을 통해서 예술가와 청중은 인간의 삶과 그 잠재력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638-40)


제16장 인문학의 대두


"독일 지성사에서 1770년대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로부터 반反합리주의적인 전기 낭만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소위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흄으로부터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회의를 물려받았다. 그는 보편타당한 인간 이성과 영원한 보편 기준을 믿는 견해를 거부했다. 루소가 행한 문화 비판과 행복한 〈자연적 인간〉에 대한 이상화에서 헤르더는 계몽주의의 자기 이해와 진보 낙관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영감을 얻었다." "(헤르더의) 역사주의는 우리가 〈역사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일깨웠다. 역사는 철학과 사상의 틀이자 기본 전제 조건이 되었다. 나아가 역사 서술은 지배적 학문이 되면서 다른 인문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인문학들은 〈역사화〉되었다. 즉 인문학들은 (문학사, 예술사, 종교사, 언어사 등과 같이) 역사적 지향성을 갖는 학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주의가 현실을 보는 일정한 방식이자 동시에 인문학적 연구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646-7)


"먼저 역사주의는 역사적 현상을 '예외적이며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개성[개체성]은 개인이나 개별적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성[개체성]은 집단과 〈초개체적인 것〉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한 시대나 문화 혹은 민족은 독특하고 특수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주의의 개체화 원칙이다." "둘째로, 역사주의는 역사적 변화와 운동을 크게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정적인 이해는 동적인 이해로 대체된다. 모든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처해진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강조는 서양 사상에서의 결정적인 〈혁명〉으로 해석되었다." "역사주의의 개인화 개념과 역사적 변화에 대한 강조는 계몽주의의 여러 기본 전제와 충돌했다. 예를 들면 보편성과 이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본성은 불변적이라는 생각, 보편타당한 인권 개념 등의 기본 전제들과 충돌한 것이다. 이 점은 역사주의에 일정한 상대주의적 경향성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들어 더욱 뚜렷해졌고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647-8)


"독일의 종교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통상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서 해석학적 순환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텍스트와 같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 부분들에 자국을 남긴다. 따라서 부분들은 전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체는 부분들의 내적 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해석학의 핵심은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개성적이고 독특한 영혼의 내용{〈개성[개체성]〉)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해석학의 지향점은 일차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창조적 정신이다." "헤르더처럼 슐라이어마허도 텍스트와 저자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감정이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문헌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자와 텍스트의 지적 지평 속에 우리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인문학의 목적은 '이해'인 반면, 자연과학의 목적은 '설명'이다."(653-4)


"빌헬름 딜타이는 인문과학의 학문[과학]으로서의 위상에 대해서, 인문과학을 자연과학과 차별화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하였다." "딜타이는 통상 생生철학자로 불리는데, 이것은 삶[생활]이 그의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 범주라는 것을 뜻한다. 모호하고 해명이 불가능하지만 삶은 우리의 경험의 토대이다. 따라서 삶 자체를 명시적이고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딜타이에게 인문과학은 해석학적 전회를 뜻했다. 해석학적 학문으로서 인문과학의 중심은 언어적 표현들의 해석에 놓여 있는데, 이 언어적 표현들은 본래의 체험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삶 자체가 텍스트와 예술 작품들로 객체화된 것이다. 달리 말해 인문과학의 탐구 대상은 문화와 사회 속에서 객체화된 정신의 형식들, 즉 도덕, 법, 국가, 종교,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이다. 따라서 딜타이가 말하는 인문과학[정신과학]은 오늘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한다."(659-60)


"그리하여 인문과학에서 이해는 본래의 체험을 재생하고 추체험하는 연구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추체험이 가령 어떤 르네상스 예술가의 본래 체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딜타이는 표현의 원천인 주체와 그 표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주체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상정했다. 이 유사성은 궁극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불변적인 공통의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한다." "비코처럼 딜타이도 인문과학의 가능성의 제1조건은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딜타이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간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은 정신이 창조한 것만을 이해한다.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정신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산출된 실재를 포괄한다. 인간이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각인을 새긴 모든 것은 정신과학의 대상을 이룬다.〉"(660-1)


제17장 헤겔 / 역사와 변증법


"칸트는 자신이 불변적인 선험적 전제 조건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직관 형식과 인과성을 포함한 범주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주체에게 내재되어 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의 스펙트럼은 보다 넓으며, 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크게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한 단계 속의 하나의 문화에 존재하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의 다른 단계들 속의 다른 문화들에서도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창출'되었고, 따라서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것을 추구했던 반면, 헤겔은 변화 가능한 상이한 세계관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헤겔에게 있어 구성적인 것[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그 자체로 구성되는 것이며, 이 구성적인 것의 구성이 바로 역사이다. 이로써 역사는 일련의 과거의 사건들과는 다른, 상이한 기본적 이해 형식들의 자기 발전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과정으로 이해된다."(672-3)


"계몽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적 지식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적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그러나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좌파 헤겔주의자들이 말하는 해방의 뜻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초개인적 차원인 전통과 사회로부터의 개인 해방이 아니라 보다 이성적인 사회를 향한 일보로서 사회적 비합리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보다 적절한 사유의 틀을 만들기 위하여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데올로기들)을 거부하는 비판적 성찰(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방적 성찰에 대한 헤겔적 시각에 따르면 역사는 고립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다. 역사는 인류가 가장 적절한 사유의 틀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나가는 성찰의 과정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모든 선험적 전제 조건(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검증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고 회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는 더욱더 적절한 자기 인식으로 이끈다."(677-8)


"지양하다[극복하다]aufheben라는 말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떤 입장의 결함들을 '폐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결함이 아닌 측면들을 '보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입장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결함이 있는 입장의 변증법적 지양은 그 입장의 부정적 폐기가 아니라 보다 고차적인 다른 입장 안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뜻하는 헤겔의 용어가 바로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재 입장의 결함을 찾아서 보다 큰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화될 수 있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우리를 보다 참된 선험적 전제 조건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즉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변증법적 지양의 일부이다." "실제에 있어 변증법적 지양의 목적은 이전의 입장들보더 더 광범위하고 더 완벽한 입장을 성취하는 것이다."(682)


"헤겔이 보기에 개인주의는 원자론적이고 탈역사적이며 자족적인 개인을 가지고 작업하고, 집단주의는 살아 있는 인간과는 분리된 채 독립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국가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과 국가는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윤리적sittlich〉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자기실현을 성취하는데, 헤겔에게 이 윤리적 공동체는 바로 국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유기적 일부분이 될 수 있으려면 먼저 가족과 다른 사회집단 같은 보다 작은 집단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어떤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성장해 나오는 것이다. 이로써 헤겔에 있어 〈국가〉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주는 구체적 유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유대 관계 덕분에 국가는 윤리적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이 유대 관계는 헤겔에 따르면 쾌락과 이윤에 대한 개인적인 계산을 토대로 한 어떠한 합의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이다."(688)


제18장 맑스 / 생산력과 계급투쟁


"맑스는 인간이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수용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소외가 아니었다. 이 종교적 소외는 단지 자본주의사회의 일반적 소외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노동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살기 위해서 일하고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노동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양측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변증법적 관계가 된다." "동시에 자본가와 프롤레터리아트 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노동의 생산물 간에 극단적 분할이 발생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들의 생산물의 주인이 아니다." "여기서 맑스가 이 굴욕적 상황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경제체제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굴욕적 상황은 노동자의 경제적 궁핍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가 굴욕적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709-10)


"인간은 외적인 힘들─사물화事物化reification와 노동 압박─에 예속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로 실현할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창조했으나 더 이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힘들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동기계처럼 작동해야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이 사물화된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작동하는 이 〈변형된〉 자연 앞에서도 무력함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들을 〈사물〉로 바라본다. 노동력으로, 피고용자로, 경쟁자로 바라본다. 따라서 소외는 이중적이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는 안티테제다. 상황이 악화─자본주의의 위기─되면,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에 대해서, 기계와 공장에 대해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시 자신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한다." "소외는 혁명을 통해 철폐되고, 인간은 의식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이 된다. 무력함과 사물화는 극복된다. 인간은 경제를 통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710-1)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사유

1. 처음에 인간은 천진무구한 상태에서 서로 조화롭게 살았다.

2. 그러다가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신은 인간적 속성들의 외적 표현, 즉 외화外化일 따름이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산물[신]에 의해 억압받는다.

3. 이 소외를 극복하려면 인간은 이 신이 실제로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일부라는 것을, 즉 그 연관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맑스는 인간이 다양한 사회집단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를 공유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노동은 [노동이 인간의 자기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형성적formative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것보다 더 긍정적인 정의이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을 통해 사회제도가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서 다른 인간적 속성들이 실현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은 도시국가에서 사는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들을 실현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형성 과정이다. (역사적인 이유에서 이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지평을 넘어선다.) 우리는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인간과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맑스는 경제적 요인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경제의 역사, 노동의 역사이다. 경제적 생활에서의 질적 변화는 역사를 항상 전진하는 불가역적 과정으로 만든다."(712-3)


# 맑스는 〈경제적-물질적 요인들이 역사적 과정의 추진력〉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그런데 노동은 맹목적인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 노동이다. 노동은 인간을 실재 세계와 접촉하는 하는 특유한 인간 활동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물에 대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스스로에 대해서 학습한다. 그리고 노동은 새로운 생산물을 창출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창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렇게 노동은 맑스 사상에서 근본적인 인식론적 개념이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인식한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광학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카메라처럼 바라보는 고전적 경험주의자들의 정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인식 모델과 상충한다. 노동과 인식의 인식론적 연관성에 대한 이 해석이 옳다면 이것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엄격한 구분과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할 이유가 된다. 노동과 인식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노동이 인과적으로 인식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718)


제19장 키르케고르 / 실존과 아이러니


"한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작가로서도 키르케고르는 긴장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죄와 불안을 중심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내향적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향한 갈망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의식적이고 성숙한 태도 간의 긴장이었다. 이 두 태도는 키르케고르가 성장한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그 뿌리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주의가 그 하나이고, 성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자기주장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다른 하나이다." "가끔 그는 헤겔과 사변철학을 아이러니한 태도로 비판하면서도 헤겔주의적 관념론자를 연상시키는 단어들과 표현들─주관적과 객관적, 개별적과 보편적 같은 대립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경건주의와 자율성, 그리고 관념론과 낭만주의 간의 상호 중첩된 이 긴장들로부터 키르케고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바로 실존적 시각이 그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737-8)


"통상적인 산문이나 과학 논문에서 우리는─〈지금 시각은 12시 30분이다〉 혹은 〈허리케인이 동남쪽에서 접근 중이다〉 같은─〈직접적 의사소통〉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키르케고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표현, 즉 보다 시적인 표현이 필요하다. 이 경우엔 무언가에 대한 명제들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 전체를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되는 태도와 〈의향〉 전체가 전달 대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이 문제가 될 때 진정한 주제는 바로 다양한 사태에 대한 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세상 속의 객관적 사태로서가 아니라 진정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표현형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을 전달하고자 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성찰적 관계를 갖는 문학적 예술가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이중 성찰적 의사소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740)


"세계와 관계하는 우리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독자가 텍스트와 관련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한 텍스트는 과학적 주장이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자신과 텍스트의 관계를 자유롭게 그리고 책임 있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열정적 몰두와 성찰적 거리 두기가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동시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열정 그리고 초연한 현존─이 개념들이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하고자 했던 것을 나타내는 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키르케고르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단순하고 직접적인 명제들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목적은 실존적 자기 인식의 전달과 교화이며, 그 수단은 수사와 아이러니의 사용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740-1)


제20장 다윈 / 인간 개념을 둘러싼 논쟁


"다윈의 자연선택설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특성들이 어떻게 유전되는가라는 문제와 새로운 유전적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해 설명되었고, 두 번째 문제는 돌연변이 개념에 의해서, 즉 돌연적이면서 상대적으로 항구적인 유전물질의 변화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형질의 변이의 발생도, 자연선택도 어떤 의지나 의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돌연변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특정 돌연변이가 언제 발생할지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돌연변이는 원칙상 과학적으로,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자연선택도 의지나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토대로 하는 신학적 설명만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도 배제되었다."(759-60)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중 하나가 바로 〈기본적으로〉, 즉 유전적으로 우리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우리가 무엇인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당위적으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믿고, 그리하여 인간들 간의 관계가 이기주의적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부당하게도 〈존재〉로부터 〈당위〉로 이행한 것이다. 존재로부터 당위로 연역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과학 이론으로서의 다윈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적자, 즉 강자의 권리를 진화론적 주장을 빌려 사회를 조직하는 규범으로 승격시키는, 다윈주의에 대한 정치적 해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763-4)


제21장 니체와 실용주의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역사를 의미 있고 이성적이며 정의롭다고 보았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세계관들은 단지 카오스를 회피하려는 인간의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세계를 지속적으로 〈위조〉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세계를 카오스로 바라보는 이 견해는 니체 철학의 지배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세계는 무계획적이며 운명의 장난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사유는 언제나 엄격한 논리적 형식과 구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실재는 형태가 없으며 혼돈이다. 카오스의 위협은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만들어서 〈형이상학적 예술가〉가 될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형태를 부여하고 생존하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부가한다. 철학적 체계와 세계관은 우리의 실존을 확보하는 데 쓰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부가한 구조는 점차 세계 자체의 구조로, 신에 의해 창조된 구조로 이해된다. 이것이 평화와 안전을 위한 가정이다."(773-4)


"신이 가치와 권위를 상실함에 따라 우리는 신을 대체하여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다른 별들, 즉 정언명령, 헤겔의 이성, 역사의 목적 등을 찾는다. 허무주의는 우리의 외부에도 내부에도 실제로는 어떠한 도덕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신에서 직접 귀결되는 하나의 사유 방식이자 심리 상태이다. 실존이 〈목적〉, 〈통일성〉, 〈목표〉 그리고 〈진리〉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는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무가치함의 감정이 생긴다. 가치가 부여된 이러한 범주들은 우리 자신이 세계에 부가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범주들을 포기하면 세계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이 죽었다면 도덕과 진리의 토대도 사라진 것이다. 〈진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다 허용된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니체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그의 화신인 차라투스트라는 신과 허무주의와 실존적 진공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그 조건은 우리가 만든 〈유용한〉 생활용 거짓말들을 떨쳐버리는 것이다."(774-5)


"니체는 그의 위버멘쉬[초인] 이론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다." "니체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가 위버멘쉬와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전망을 피력하려고 쓴 책이다. 역사 속의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세계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러한 실수를 저지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또한 그 점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도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스스로 이 유일한 목적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업을 떠맡았고, 이것이 바로 위버멘쉬 개념이 자리할 곳이다. 〈위버멘쉬가 지상의 의미[Sinn]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밧줄이다. 사람한테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그가 위버강[넘어감]이자 운터강[내려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든 것을 떨쳐버려야 한다."(783-6)


"니체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 곧 진술과 사태 간의 대응correspondence이라는 진리대응설을 부인했다. 니체에 따르면, 그 이유는 우리의 이론에 대응하는 중립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사실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항상 〈이론 의존적〉이다. 순수한 사실이라든가 〈중립적 서술〉이란 것들은 모두 은폐된 해석일 뿐이며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힘에의 의지 이론과 영원회귀 이론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허구들과 다른 허구들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니체는 이 이론들이 참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답변은 어떤 해석들은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해석들은 삶과 삶에 대한 긍정에 유용한 것들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론들이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고 보았다. 그것들이 참인 이유는 그것들이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니체에게는 그러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도움이 된다[실용주의적 진리]는 의미에서이다."(791)


제22장 사회주의와 파시즘


"고전적 맑스주의는 공산주의가 도입되면, 즉 계급사회와 억압이 철폐되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국가가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억압 기구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경찰, 군대, 법체계─이 모든 것은 계급국가의 단면이다. 그런데 레닌은 권력을 획득하자 국가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소멸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야 했다. 레닌의 답변의 핵심은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반혁명 시도를 타도하고 봉쇄할 이행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이행기에 자본주의 계급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독재국가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새로운 폭력적 국가가 아니다. 이것은 한 단계 앞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의 독재체제인 자본주의하에서는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자본가들에 의해 억압당한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하에서는 반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 다수에 의해 억압당한다."(801)


"그리스 말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위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필요들을 토대로 사회를 재조직하자는 정치 운동이었다." "아나키Anarchy는 조직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조직이 자발적으로, 즉 공통의 이해관계와 그것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생해 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의 계급 개념은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 개념과는 다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들과 오직 일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가진 자들 간의 구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다. 이것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일차적으로 투쟁 대상으로 삼는 구분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당독재 국가형태의 〈이행기〉가 새로운 계급사회 말고 다른 것을 이룩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적 조건의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려면 대중의 자기 조직과 행동을 토대로 해야만 한다."(803-5)


"파시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야만과 전제정치로의 도덕적 회귀일 것이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나타낸다. 자본가들이 무너질 것 같은 자신들의 제도를 테러와 폭력을 통해 안정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파시즘은 균형을 상실한 문화의 극단적 표현으로 보일 것이다. (종교로 대표되는) 진정한 공동체와 참된 권위가 상실되자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추종한 것이다." "파시스트(나치) 국가에서 경제와 사회 일반은 평시에조차 가상적 〈전쟁 상태〉에 있다. 질서와 규율이 부과된다.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는 사유는 제거된다. 자기 이익은 공동의 이익하에 종속된다. 문제들은 거의 명령과 힘에 의해 해결된다. 경제생활은 가격 동결, 임금 동결 그리고 파업 금지와 함께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동시에 취업률은 높고, 생산수단의 소유는 계속 사적 소유로 유지된다."(811, 815)


제23장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많은 면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간 개념을 전복시켰다. 데카르트, 로크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다. 이 능력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격의 핵심이자 의식적 〈자아〉와 연관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psyche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환상이라고 보았다. 의식적 〈자아〉는 단지 강력한 무의식적 정신생활의 외향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꿈과 사소한 실수와 농담과 신경증적 증상들의 배후에는 무의식적 (통상 성적) 동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적인 의도와 동기에 비추어 볼  때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탐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이해가 불가능하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증상들을 무의식적 동기와 의도의 표현으로 볼 경우 그것들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의심의 해석학〉을 도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23-5)


"우리의 충동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계와 우리의 양심(〈내부의 목소리〉)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의 모델(이드, 에고 그리고 슈퍼에고)을 구성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허구의 개념과 실체 간의 경계 지점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공간적 외연을 가지며 합목적적으로 구성되고 삶의 욕구를 통해 발전된─오직 일정한 조건하의 특정 장소에서만 의식의 현상들을 발생시키는─정신 기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은 심리학을 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유사한, 예를 들어 물리학과 유사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분명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물리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의 근본적인 메타심리학적 가정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정신생활을 정신적 힘과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정신분석학이 자연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832-3)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의 이론들이 명백히 경험에 의해 확증되었고 엄청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포퍼는 정신분석학의 강점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라고 보았다. 포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적 이론들은 어떤 가능한 과학적 결과들(〈사실들〉)과 양립될 수 없음으로써 반증될 수 있는 반면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과 양립 가능하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반증될 수 없고, 그래서 비과학적이다. 즉 반증 가능성이 어떤 경험적 이론을 과학적으로 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반적 판단 기준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과학적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원칙적으로 어떤 사실이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정신분석학의 외관상의 성공은 이와 같이 그것이 내용이 없다는 사실 덕택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철학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들과 가설들이 반증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845-6)


제24장 사회과학의 대두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그리고 실증적 단계라는 세 단계를 거쳐왔다.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이미 실증적 단계에 정착하였다. 이것들은 신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이미 벗어난 과학들이다. 그러나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콩트는 이 학문들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관점에서 그는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실증적 학문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反사변적이다.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고전역학은 실증적 학문의 모델이며 사회학은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구성적이고 교화적이라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854-5)


"토크빌은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서, 그리고 정치와 제도에서 모두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발전 경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크빌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것은 귀족적 가치와 엘리트적 지성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주의 및 자유와 민주적 평등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적 다수가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잡으면, 다양한 소수와 일반적인 사회 관습을 따르지 않는 개인들은 억압받을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이 억압은 공개적인 물리적 폭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하다. 여론은 일반적이지 않은 견해들을 고통 없이 조용하게 억압한다." "토크빌은 자유와 평등은 결합시키기 어려운 것이며, 평등은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토크빌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강한 국가권력을 초래할 것이며 국가는 인민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통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857-8)


"짐멜에게 근대 세계는 균열이 가고 조각들로 분산된 세계였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짐멜은 자신의 대작 『돈의 철학』에서 목적-수단이란 연결 고리들의 계산이 근대적 삶에서 어떻게 더욱 득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목적 합리성이 다른 형태의 합리성들을 몰아낸 것이고, 화폐경제 때문에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변형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짐멜은 독특한 사회관계에서의 소외 및 사물화 이론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물들이 점차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상호작용은 객관적이고 초개인적인 구조들로 〈경화〉될 수 있다. 근대적 삶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형식들에 내재하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결과들은 우리에게 낯설게 된다."(867-8)


"뒤르켐의 기본 사상은 사회의 토대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면 사회는 병든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이 연대를 회복하기 위한 올바른 처방을 찾아야 한다. 뒤르켐에게 사회학은 이 연대에 관한 학문이다. 즉 이 연대의 토대와 그것이 어찌해서 약화되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뒤르켐은 자신이 살던 시절의 프랑스가 바로 연대가 약화된 사회, 즉 병든 사회라고 생각했다." "뒤르켐이 대체로 반대한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및 맑스주의에 공통되는 것, 즉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계몽주의의 유산인 발전, 해방 그리고 진보의 이념들이었다. 이 이념들을 뒤르켐은 해체로 나아가는 위험한 경향들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안정과 행복의 전제 조건인 사회적 연대를 이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뒤르켐은 주장했다."(869, 873)


"우리는 연구 주제가 가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며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버가 보기에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는 것은 가치를 통해서이지만 우리가 과학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베버의 과학철학에서는 〈이념형〉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념형은 과학에서 사용되는 기본 개념들로 이해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명론자인 베버에게 (〈경제적 인간〉과 같은) 이념형적 개념들은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리케르트와 신칸트주의를 좇아서 베버는 이념형은 단지 실재의 다양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는 형식적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념형은 사안의 특정 측면들을 순수하게 부각시키며 어떠한 규범적 성질도 갖지 않는다." "이념형은 연구자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지만, 주어진 사태와 관련하여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적합〉해야 한다."(878-9)


# 네 가지 〈순수한〉 행위 유형들(이념형들)

1. 행위는 주어진 목적과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목적 합리적 행위).

2. 행위는 절대적 가치와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가치 합리적 행위).

3. 행위는 행위자의 감정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정동적affective 혹은 감정적 행위).

4. 행위는 전통과 뿌리 깊은 습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전통 지향적 행위).


"과학적 합리화는 베버가 의미 상실 및 그에 따른 우리의 내적 곤경이라 부른 것을 초래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질병에 대한 진단에서 베버는 근대의 〈무의미성〉 문제에 직면했다. 확고한 윤리가 부재한 가운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결과는 합리적 주장과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 없었다.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처럼 베버도 이 투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합리적 토대도 갖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베버의 소위 〈결단주의decisionism〉이다." "우리는 베버가 합리성과 관료화의 증대를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베버가 이러한 발전에 대한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 본 것은 카리스마적인 〈수령민주주의(퓌러데모크라티Führerdemokratie)〉였다. 즉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통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의 미래관에는 비관주의가 스며들었다. 베버에게는 어떠한 낙관주의도 환상일 뿐이었다."(889-90)


제25장 자연과학에서의 새로운 진전


"자연이 예전에는 테크놀로지로 간주되었다면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자연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물리학에서 현대물리학으로의 이행과 함께 우리는 인식론적 전환을 하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는 예전에는 연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수학적 속성을 가진) 자연적 과정을 인식하고 따라서 자연은 우리가─평형 바퀴, 낙하하는 구球 등과 함께─공학에서 볼 수 있는 원리들에 의해서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이제 우리는 자연적 사건이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와 공학기술에 의해 결정된 실험 장비 및 관찰 장비의 산물이 되었음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관찰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학적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측정과 관찰에 사용하는 개념 및 장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요건은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다. 〈실재론적인〉 인식론적 가정은 그렇게 함으로써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901)


"오늘날 우리는 사용하고 이해하는 데 장기간의 수련을 요하는 복잡한 테크놀로지와 복잡한 이론적 전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과 관계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 간의 상호 관계는 점차 이렇게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다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펜과 종이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쓴다─[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정교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점점 더 삶의 경험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코드들을 매개한다. 이렇게 과학화 과정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매개체를 창출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서나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나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일면적이고 진부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921-2)


제26장 현대 철학 개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라고 불리기도 하는 논리실증주의logic positivism는 영국 경험주의(로크, 버클리, 흄)와 계몽철학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물리학(아인슈타인)과 새로운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에 대한 철학적 응답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체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들, 특히 독일 나치즘의 등장에 대한 반응으로도 볼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지식이 확증될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어떻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경험에 의해 검증될 때 주장들은 어떻게 강화 내지 약화되는가 하는 방법론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현대적 방법론 및 논리학이 종합되어 논리경험주의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구문론)와 방법론적 검증에 호소한다. 〈논리경험주의〉란 명칭은 심리학으로부터 언어 및 방법론으로의 이러한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925-6)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언어는 한편으로 원자적 사실을 가리키는 〈원자적〉 언어 표현과, 다른 한편으로 이 언어 표현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논리적 관계들은 형식논리학에 상응한다." "변증법은 개념들 간의 내적 관계들을 토대로 한 총체성을 지향한다. 하나의 개념이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때 그런 관계는 '내적 관계'이다. 논리적 원자론에서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갖는 관계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외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 실증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가치판단들─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은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경우의 거부는 신학적 진술과 형이상학적 진술에 대한 거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진술들은 인식적 근거 성립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태도와 평가를 표현하고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931-4)


"쿤은 서로 다른 과학 패러다임들 간에는 도약이 존재한다고 상정했기 때문에 중단 없는 직선적 발전으로서의 과학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상이한 두 패러다임의 옹호자들 간에 상호 이해를 창출하는 일도 어렵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가정들의 관점에서, 즉 자신의 패러다임을 통해 논점을 바라볼 것이다. 의사소통은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가능하지만 상이한 패러다임들 간에는 그렇게 쉽지 않다." "또한 개별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중립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관성과 객관성과 진리의 모든 판단 기준은 특정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다. 그러한 판단 기준 중 어떠한 것도 상이한 패러다임들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고, 모든 패러다임에 공통되는 판단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약 진리와 타당성의 문제가 상이한 패러다임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많은 입장이다."(947-8)


"간략히 말해 분석철학은 언어와 실재 간의 일대일 대응 이론을 거부하며, 기본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특정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한 단어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는 오직 그 단어가 사용되는 구체적 방식을 언급함으로써만 답변이 가능하다. 단어와 문장은 고립된 채로는 오직 잠재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것들은 특정 맥락 속에 투입됨으로써만 실제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사용이 의미를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맥락에서 언어는 기술적記述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시와 도덕에서 언어는 주로 실제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과학의 언어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언어를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과제는─시나 윤리적 상호작용이나 실생활 같은─각각의 맥락을 지배하는 독특한 언어 사용을 찾아내는 것이다."(950-1)


"비트겐슈타인적 전통에 따르면 무의미성이란 의미 있는 일상언어의 오용이다.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들은 이러한 오용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한 맥락에서는 의미 있는 기능을 가졌던 말들을 그것들이 쓰여서는 안 되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분석철학은 일상언어의 오용으로 생겨난 언어적 혼란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분석철학자들에게 이 치료법은 특히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위한 것이다." "치료법적 방법의 목적은 상이한 언어적 맥락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방법은 하나의 언어공동체 내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공동체의 의미 있는 언어적 실천 규칙들에 대한 묵시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언어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인 언어분석은 무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분석과 논증을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묵시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시도이다."(952-4)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 언어는 기본적으로 발화행위로 표현되며, 이때 발화와 과제와 대상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언어와 실재의 구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


"현상학은 문자 그대로 현상들에 대한 학문으로서, 사건과 행위를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려고 한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에 의해서 기술된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비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언어철학자들의 언어게임 개념과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현상학이 (후설이 제시한) 생활세계(레벤스벨트Lebenswelt) 개념을 과학적 개념들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세계는 인식론적 우선성을 갖는다. 단순하게 과학이 생활세계로부터 역사적으로 생성되어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가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식론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학의 과제는 현상들(도구, 의도, 동료 인간 등)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심원한 목적은 (과학 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활세계 내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위와 합리성의 의미 구성적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다."(962-4)


"실존주의는 엄밀한 의미의 철학 학파가 아니다. 이 용어는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무신론자 장-폴 사르트르,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존재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서로 상반된 사상가들에게 붙여진다. 그런데 이들 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일정한 가족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방식의 뿌리는 키르케고르,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 가족 유사성은 이 사상가들이 인간의 존재를─자기의식이 근본적이고 확고부동한 위상을 갖는─미완성의 삶 속에서 종종 비극적이며 역설로 가득한, 유한하고 죽을 운명인 개인으로서 내면화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실존철학의 기본 특징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실존적 성찰 속에서─죽음마저도 정면으로 직시하는─우리는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의식을 가지고 각성하고 사실상 다시 태어난다."(968-9)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는데, 그때는 보부아르가 거의 40세가 되었을 때였다." "당시에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타자'로 정의되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규정하고 여성을 〈제2의 성〉으로 규정한 남성의 시각이었다. 남성적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이 지배했다. 따라서 여성은 제2의 계급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자아관과 남성관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 결과 여성은 허위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규정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또 그렇게 정당화되었다." "이 역할 모델을 재규정하려면 그것이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규정의 문제라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하고─이론적 노력과 실천적 노력을 통해─남성과 여성 양측이 자신과 타자를 보다 공평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부아르의 필생의 작업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리고 철학과 문학 모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974-5)


"타자를 평등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현대(탈근대postmodern) 논쟁에서 점차 중심 테마가 되었다. 우리는 젠더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민족성과 문화 일반과 관련해서도 사회비판적으로 차이를 옹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던적인 문화 다양성이 전면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하여 몇몇 철학자는 상이한 문화와 가치 간의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규범의 형태로 보편타당한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존 롤즈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반 규범이라는) 〈옅은thin〉 보편성을 찾으려는 이 시도는 새로운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 규범의 이상적 보편성 역시 구체적 상황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규범들을 구체적 상황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분별력을 요구한다."(977-9)


제27장 근대성과 위기


"르네상스 이후 인식주체가 철학적 출발점이 되었다. 경험주의자들에게도, 합리주의자들과 칸트에게도 그러하다. (로크에서 밀까지의) 정치 이론에서는 시장에서건 정치나 법에 있어서건 개인이 합리성의 담지자이다. 계몽된 주체의 적은 무지와 편견이다. 진보는 과학과 계몽, 자연에 대한 기술적 통제 그리고 물질적 복리의 증대이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과학과 계몽, 그리고 진보와 이성─이 개념들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개념들이다. 버크와 토크빌, 루소와 헤르더─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즉 이들은 전통의 힘과 진보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으로부터 귀결하는 파괴적 경향을 강조했다. 이것들이 〈근대 프로젝트〉에 대한 보수적 비판의 주요 주제들이었다." "맑스와 프로이트와 니체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에 대한 수많은 비판─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이트의 이성과 자율성 비판, 그리고 니체의 도덕 비판─을 쏟아냈다."(989)


"우리가 자유롭고 도덕적인 행동과 태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합리화라고,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왜곡이라고, 그리고 환상이라고 폭로되었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의 상이 산산조각났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욕구와 소망의 혼탁한 바다만이 남겨졌다." "따라서 진리와 비진리는 서로 손잡고 나란히 나아가고, 모든 것의 저변에는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가 놓여 있다. 과학적 활동과 정치적 행위에서 높이 찬양되는 합리성은 실상은 숨겨진 힘이다. 이로써 신학적이든 인문주의적이든 간에 가치는 환상임이 폭로된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그릇된 희망은 사라졌다. 유럽의 허무주의는 완성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과 숭고한 행위를 통해서만 합리성의 쇠우리를 벗어날 수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시적인 것뿐이다. 이것 말고 우리가 가진 다른 형태의 비판은 말과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힘을 폭로하는 〈해체〉이다."(989-90)


"하이데거에게 본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만 우리 스스로 낯선 것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이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언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어는 열어젖힘이며, 특히 시적인 언어는 전달하기 힘든 것을 유난히 예민하게 포착한다. 같은 이유에서 진정한 예술이 중요하다. 언어는 말이다. 우리는 말로 우리의 뜻을 전달한다. 말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의사소통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알린다." "하이데거는 시를, 그리하여 말을 매우 높이 친다. 언어는 인간의 집이다. 그리고 시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재창조와 실현이 이루어진다. 빈말과 상투적인 언사와 수다에 의한 언어의 빈곤화는 인간 본질의 빈곤화이다. 하이데거에게 전위대는 과학자나 정치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고대 도시국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합리적 토론은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994-5)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의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진정으로 행위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는─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측면인─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의 출현이다. 따라서 근대의 〈대중적 인간〉은 새로운 독재 체제의 상응물이다. 아렌트의 분석에서 대단히 흥미로운─그리고 우리를 깊은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점은 근대의 분화와 합리화가 어떠한 뿌리나 정체성도 갖지 않은 개인들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잉여라고 느끼며, 따라서 자신들에게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정체성을 제공할 수 있는 지도자들에게 매료된다." "정의상 근대성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다. 근대인은 언제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 결코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근대인은 결코 〈여행에 질리지〉 않으며 불멸성을 추구한다. 근대인은 지상에 고착된 삶을 넘어서기를 원하고 이미 우주 공간에서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 진보 이념은 일종의 휘브리스[오만]이다."(1000-1)


"아렌트는 오직 소수만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엘리트주의적 참여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렌트의 정치관은 다소 낭만적이었다. 정치는 시민들이 영광과 인정을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싸움터이다. 정치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싸움터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아마도 자기실현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는 어느 정도 자기표현적 행위로 축소된다. 그래서 아렌트에게 진정한 정치는 위대한 연극과 유사하다. 이 관점에서는 일상 정치 개념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언제나 시한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타협과 전략적 결단 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사라진다." "다양한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사회문제는 정치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문제를 정치에서 배제한다면 정치적 삶은 아무런 실체적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1003-4)


"해석학자로서 가다머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영향도 받았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해석이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저자와 저자의 필생의 업적 전체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특정 부분을 저자의 저작 전체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삶과 지적 삶 그리고 경력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위 해석학적 순환은 어떤 텍스트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다. 텍스트 이해는 텍스트 전체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부분들을 해석하고 부분들을 토대로 전체를 해석하는 작업을 번갈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삶도, 가급적이면 재구성된 전체로서의 저자의 저작까지도 끌어들이는 해석학적 순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텍스트 해석이 대체로 심리학적 (혹은 역사적)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서 가다머는 유보적인 의견을 표명했다."(1007)


"데리다는 텍스트 혹은 글쓰기 개념을 확대하여 언어를 〈글쓰기〉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글쓰기〉로 이해했다." "〈존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서 토대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글쓰기〉를 특징짓는 것은 〈구분짓기(차연差延)〉이다. 글쓰기는 새로운 차이들 간의 끊임없는 경쟁,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같의 경쟁으로 나타난다. 이 열린 경쟁에서 다른 것, 즉 〈타자〉는 우리의 개념들을 가지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의되는 것에 저항한다." "데리다에게 문제는 유명한 자기 지시의 문제이다. 해체가 진리 개념을 포함한 철학의 모든 고전적 개념이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데리다는 이것에 관해 자신이 말한 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그는 자기 지시적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을 하나라도 말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1013-4)


"푸코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 인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며, 실재는 근본적으로 구조이다. 다른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처럼 푸코도 구조적 조건 개념을 우선시하지 않고 인간을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는 인간 개념을 지지하는 이론들을 비판했다. 푸코는 그가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부른 것, 즉 특정 시대의 근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연관 관계를 찾아내려고 했다. 푸코는 특정 시대의 생각과 행동까지도 결정하는 결정 구조를 에피스테메epistémé라고 불렀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의 특징은 저작이 취하고 있는 학문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실천적(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합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푸코는 해체주의자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데리다처럼 푸코도 〈타자〉로 정의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코의 정치적 헌신은 너무도 강렬했고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너무도 일관된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그의 실천적 헌신 간에는 명백한 긴장이 존재했다."(1014)


"로티는 진리대응설이 아니라 유용성을 강조했는데, 이로써 그는 실용주의 쪽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그는 생각은 항상 특정 맥락 속에 〈처해〉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맥락주의자이다. 로티의 실용주의와 맥락주의는 그에게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리버럴하고 민주적인 정치적 전통이 철학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로티에게 철학적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철학적 텍스트를 읽는 것은 흥미롭고 교양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식견과 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나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티는 우리가 (진리와 허위의 구분 같은) 철학적 구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예를 들어 절대적 진리의 이념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그것들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들에 대한 반박이 진리 개념 같은 보다 온건한 형태들에 대한 반박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1015-8)


"해석학적 전통과 비판적 해체는 모두 텍스트로서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비교문학 연구와 역사 연구, 신학 및 법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버마스는 언제나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처음부터 언어를 발화행위로 파악했다. 하버마스의 경우 행위 (그리고 제도) 개념이 텍스트 개념보다 우선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인식관점만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설명하고 통제하는 인식관심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인식관심─기술적 인식관심, 실천적 인식관심, 해방적 인식관심─이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가설연역적 연구와 해석학적 연구(〈이해사회학)〉 둘 다를 수행할 수 있다. 보다 포괄적인 역사-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하버마스가 본질적으로 통제가 아니라 우리의 상호 이해 능력과 관련된 그런 종류의 합리성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행위가 있다."(1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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