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단 - 이슬람의 암살 전통
버나드 루이스 지음, 주민아 옮김, 이희수 감수 / 살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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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세의 아사신파와 현대 이슬람 암살단 사이에 나타난 유사성은 아주 놀랄 만하다. 가령 시리아와 이란의 연관성, 미리 계산된 테러 자행, 비밀 암살단이 보이는 완전한 충성, 적극적이라고 할 만큼 자기를 희생하는 태도, 대의명분에 충실하고 천국의 보상을 기대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일각에선 중세 집단은 십자군을, 현대 집단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겨냥했으니 둘 다 공통적으로 외부의 적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 큰 유사성을 찾아냈다. 분명 그와 같은 유사성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유사성은 이 테러 공격의 실제라기보다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 이후 서구 세계에 만연된 관점에 의하면, 아사신파의 분노와 무기는 주로 십자군을 겨냥했다.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아사신파에 희생된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십자군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조차 무슬림의 문제로 인해 표적이 된 것이었다. 아사신파에 희생된 절대다수는 무슬림(특히 당대 이슬람 세계의 엘리트층)이었다."(19)


"아사신 요원이 목표물을 죽이고 나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오로지 이런 면에서만 아사신파가 오늘날의 자살 폭탄 테러의 선조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점에서 그 자살 폭탄 테러집단은 선조들의 신념과 관습에서 급격하게 이탈했다. 이슬람은 줄곧 자살을 중대한 죄라고 여기면서 강하게 비판해 왔다. 자살은 그 장본인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 봤자, 천국의 권리가 박탈되는 중죄였다. 한 가지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아사신파가 절대적으로 강력한 적의 수중에 자신을 그대로 던지는 쪽이라면, 현대 테러집단은 제 손으로 죽음을 자초하는 쪽이다. 전자의 경우,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은 성전에서 실행하면 천국으로 가는 직행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지옥 불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과거에 결정적으로 차별화되었던 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것은 자살 폭탄을 관습으로 흡수, 새로운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던 20세기 무슬림 신학자들의 소행이다."(21)


1 아사신파의 발견


"맨 처음 십자군 연대기를 보면, '아사신'은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 종파로서 절대군주 '산중 노인'이 이끄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특히 선한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하나같이 그들의 신앙과 행위를 혐오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아사신파의 상황은 우선 중세 여행가들이 아사신파에 관해서 동방에서 듣고 퍼뜨린, 끔찍한 소문과 판타지와 너무 달랐다. 또한 19세기 동방학자들이 보수파 이슬람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원고 자료에서 인용했던, 적대적이며 왜곡된 이미지와도 매우 달랐다. 보수파 이슬람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주요 관심은 아사신파를 반박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지 결코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아사신파는 교활한 사기꾼들이 주도하던, 상습 마약꾼들이 모인 갱 집단이거나,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의 음모이거나, 전문 살인자 조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세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27, 52-3)


2 이스마일파


"초기에 시아파는 권력을 잡을 후보자를 지지하는 집단으로서 특유의 종교적 교리도 없고, 이슬람 정권이 본질적으로 지닌 종교적 취지도 크게 내세우지 않은, 일종의 정치 파벌에 불과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시아파 내 추종자들의 성격과 시아파 교리의 본질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대다수 무슬림들이 볼  때, 당시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는 방향 전환을 잘못하고 있었다. 즉 선지자 무함마드와 맨 처음 그를 따르던 독실한 무리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는 전혀 딴판으로, 탐욕스럽고 사악한 귀족 상류층이 지배하는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었다. 정의와 평등은 온데간데없이 불평등과 특권과 압제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많은 무슬림들은 선지자 무함마드 혈족에게 권력이 돌아간다면 이슬람이 꿈꾸던 본래의 진정한 메시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시아파의 주장과 지지는 종교적일 뿐 아니라 메시아적인 인물을 구하기에 이르렀다."(58-9)


"본래 이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는 신성한 법 아래에 수립, 유지되는 종교적 조직체이다. 이상적 국가의 주권은 신으로부터 나오며, 군주인 칼리프는 이슬람 사회를 떠받치고 무슬림들이 선한 무슬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의무를 맡은 사람이다. 이런 사회에서 법률, 사법권, 또는 권위의 측면에서 세속과 종교 간의 구별은 없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회와 국가는 칼리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이며 한 몸인 조직체이다. 사회 내부의 정체성과 결속력의 기반, 국가 내의 충성과 의무의 유대 관계는 전부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되며 표현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볼 때, 종교·정치적 태도와 활동을 구분하면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서구의 관점은 무의미하며 비현실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어느 집단이 국지적인 반대를 넘어 권력자들에게 주장을 펼쳤다면, 즉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조직을 세웠다면 그 행위는 하나의 신학이 되었으며 그 조직은 하나의 종파가 되었다."(59-60)


"초기의 실패와 이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극렬주의자들과 무장 종파들은 계속 등장했고, 심지어 이맘의 최측근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었다. 극렬파와 온건파 간의 결정적인 분리는 765년 알리 이후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사망한 뒤에 이루어졌다. 자파르의 장남이 이스마일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추측건대 극렬주의 집단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이맘 자리를 상속받지 못했다. 그래서 시아파의 대다수가 이스마일의 동생 무사 알 카짐을 7대 이맘으로 인정했다 무사 가문은 12대 이맘까지 배출하고 873년에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시아파의 절대 다수가 인정하는 '준비된 이맘' 즉 마흐디이다. 12명의 이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스나 아샤리, 즉 12이맘파로 알려져 있으며, 시아파 중에서도 보다 온건한 분파에 속한다. 순니 이슬람 본체와 시아파의 차이는 교리 면에서 몇 가지 정도뿐이며 최근 몇 년 사이 이것마저 무의미해졌다. 16세기 이후 12이맘파 교리는 이란의 국교가 되었다."(67)


# 이맘 : 압제자를 물리치고 정의를 수립하는 올바른 지도자, 마흐디Mahdi라고도 한다.


# 다이 : 이맘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신도들을 뽑으며 결국 그들을 승리나 순교로 이끄는 설교자


"이스마일과 그의 후손을 따르는 또 하나의 집단은 이스마일파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비밀리에 활동을 하던 중, 응집력과 조직 면에서 그리고 지적·감정적 친화력 면에서 모든 경쟁 집단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종파를 형성했다. 초기 종파들의 혼란스러운 사변과 원시적인 미신을 대신하여, 일련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높은 철학적 수준에 기초한 종교적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수립했으며 문학을 창조했다." "이스마일파는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꾸란과 전통, 순니파의 법에 뒤지지 않는 그들의 법에 경배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고대의 자료, 특히 신플라톤주의를 원용하여 철학적인 우주론을 제시했다." "끝으로 불만을 품은 자들에겐 제대로 조직화되고 널리 퍼진, 강력한 반대파 운동의 견인력을 알려 주었다. 이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그 자리에 전 인류의 올바른 지도자 이맘이 영도하는,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주는 듯했다."(67-8)


3 신종파


"이란의 거대 고원 지대 다일람Daylam에는 호전적이며 독립적인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8세기 말 알리 당파가 압바스조의 박해 때문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은신하고 지지를 받았을 때부터 다일람은 시아파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바그다드와 기타 순니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독립성을 지키는 기염을 토했다. 10세기에 부이드 왕조 치하에서도 다일람족은 페르시아와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패권을 차지하고 한동안 칼리프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을 정도였다. 이후 셀주크가 들어오면서 이슬람 제국 내에서 다일람족과 시아파의 통치가 끝이 났고 이후 다일람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바로 이 북부 부족들, 즉 이미 시아파가 지배했었고 이스마일파 선전 운동이 강하게 스며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산 이 사바가 중추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기존 정부에 불만을 품은 호전적인 이곳 다일람과 마잔다란 산악지대 부족들에게 하산의 투쟁적인 교리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91-2)


"하산 이 사바의 명에 따라 셀주크 왕조의 재상 니잠 알 물크(1018~1092)를 살해한 사건은 미리 계산된 테러 전쟁에서 발생한 공격으로 이스마일파 교리를 비난하고 이스마일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국왕, 군주, 장군, 총독과 심지어 성직자들을 비명횡사시킨, 기습 공격의 시초였다." "희생자들 측에서 보자면, 이스마일파의 암살단은 범죄자 광신도들이며 종교와 사회에 대항하는 살인적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었다. 한편 이스마일파 측에서 보면, 그들은 이맘의 적에 대항하여 전쟁에 나간 정예 엘리트 부대였다. 그들은 압제자와 찬탈자를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의 신앙과 충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직접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이스마일파측은 실제 암살 담당 교도를 가리켜 열성 신도라는 뜻을 지닌 피다이fidai라고 불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들의 용기와 충성,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 신앙심을 찬양하는 시가 남아 있다."(100-1)


"이스마일파의 위협이 점점 커지자 자기만족에 심하게 빠져 있는 그들에 대한 술탄 베르크야루크의 분노가 점점 쌓여 갔다. 마침내 술탄은 행동에 나섰다. 셀주크 군대는 타바스와 그 외에 이스마일 성을 정복하고 파괴했고, 이스마일 정착지를 약탈하고 일부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마일파에게 '절대로 다시는 축성하지 않고, 무기를 사지도 않을 것이며, 신앙을 포교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한 후에 철수했다. 이 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용인한 산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마일파는 또다시 쿠히스탄에 견고하게 입지를 다졌다." "당시 이스마일파는 실패와 좌절에 몸부림치던 중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베르크야루크의 묵인에 의존할 수도 없었고, 한동안 피다이들은 상대적으로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성은 여전히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았으며, 비록 통제를 받긴 했으나 그들의 테러 권력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107-8)


"1118년 술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끼리 또다시 대량 살육으로 번진 여러 분쟁이 줄을 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사신파는 그간 겪은 고통에서 회복하고 쿠히스탄과 북부에서 그들의 입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때가 되어 베르크야루크와 무함마드 타파르 형제 술탄 하에서 동부 지역을 통치하던 산자르가 셀주크 군주들 중에서 아슬아슬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시기쯤 이스마일파와 순니파 제국 간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스마일파는 최종 목적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본토 중심 지역에서 파괴와 테러는 잠잠해진다. 대신에 그들이 지배하는 영토를 방어하고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평판도 얻는다. 동시에 거대한 셀주크 정복으로 중단되었던 중동의 분열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이스마일파의 공국과 영지는 소규모 독립 국가의 형태로 바뀌고 심지어 지역 동맹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술탄 산자르의 치세 동안 이스마일파는 수월하고 평온하게 지냈다."(117)


"하산 이 사바는 행동가이면서 동시에 사상가이자 작가였다. 순니파 저자들은 그의 저작에서 두 개의 인용문을 보존했는데, 각각 자서전과 신학 논문 초록의 일부분이었다. 후세 이스마일파 교도들에게 그는 다와 자디다(da'wa jadida, 신종파)의 최고 활동가로 존경받았다. 신종파는 카이로와 단절한 후에 공포된 개혁 이스마일파 교리로서, 니자리파 이스마일 교도들 사이에서 보전되고 정교화되었다." "하산은 결코 이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이맘의 대리자일 뿐이었다. 이맘이 사라진 후, 그는 당시 숨겨진 이맘에 대한 지식의 근원, 증거자, 후자hujja였다. 즉 과거와 미래의 명백한 이맘과 다와의 지도자 사이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고리였다. 이스마일파 교리는 기본적으로 독재주의를 표방한다. 신도들은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러나 권위 있는 가르침, 탈림ta'lim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그 지도의 최종 근거는 바로 이맘이었고 직접적인 근거는 이맘이 인정한 대리자였다."(122-3)


"순니파와 마찬가지로 신도들은 이맘을 선택할 수 없으며 신학과 법률 사안을 두고 진리를 결정할 때에 판결을 행사할 수 없었다. 신께서 이맘을 지명하셨으므로 그 이맘이 진리의 보고였다. 그래서 오직 이맘만이 계시와 이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즉 그 직위와 가르침의 본질상 오직 이스마일파 이맘만이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맘 홀로 진정한 이맘이었고, 그의 경쟁자들의 가르침은 거짓이었다. 충성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거부하는 이런 교리는 비밀스럽고 혁명적인 반체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자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집트 내 파티마 칼리프 제국의 뼈아픈 현실은 이스마일파의 입장에서 볼 때 당혹스러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카이로와 결별하고 신비에 싸인 이맘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자 이스마일파의 열정과 헌신적인 신앙의 억압된 힘이 분출했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일파를 일으켜 세우고 지휘했던 하산 이 사바의 업적이었다."(123)


4 페르시아에서 수행한 임무


"암살시도가 줄어든 것이 이스마일 공국의 성격에 생긴 유일한 변화는 아니다. 이방인이었던 하산 이 사바와 달리 그의 후계자인 부주르구미드는 루드바르 출신이었다. 그는 하산과 함께 비밀 정치 운동가로서 경력을 쌓은 게 아니라 대부분 군주와 행정관으로서 조직 활동을 했다." "1138년 2월 9일 부주르구미드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후계자 자리를 계승했다." "이제 이스마일파 신앙에서 열정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스마일파 공국과 순니파 제국 사이에 사실상 상호 교착 상태와 암묵적인 상호 인정이 전개됨으로써, 숨겨진 이맘의 이름으로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새 천년을 건설하려는 거대한 몸부림은 사소한 국경 싸움과 가축이나 공습하는 모양새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애초에 순니파 제국에 가하는 맹렬한 공격의 선봉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던 성의 본부가 지역의 종파별 왕조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이슬람 역사상 흔히 발생한 왕조의 형태였다."(132-7)


"하산이 보여주었던 헌신적이며 모험적인 초기 투쟁들, 전 교도들을 감동시켰던 종교적 신앙을 그리워하던 이들은 무함마드의 아들인 하산에게서 지도력을 발견했다." "1162년 자리를 물려받은 하산은, 알라무트 안마당에서 했던 설교를 통해 스스로 이맘의 대리자이며 살아 있는 증거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부활(키야마)의 인도자로서, 그는 이스마일파 종말론에서 중추적 인물인 카임Qa'im이 된다. 라시드 알 딘에 의하면, 하산은 공적 선포를 한 뒤에 표면적으로 자신은 부주르구미드의 손자로 알려져 있지만 종말론 실체로 보자면 당대의 이맘이자 전 이맘, 즉 니자르 가문의 아들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배포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아마도 하산은 니자르의 후계 혈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의 시대에 혈통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일종의 영적 계보만이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의 이스마일파 전통에 따르면, 하산과 그의 후손들이 니자르의 진정한 계보였다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137, 141-2)


"알라무트의 이맘들은 당대 다른 이슬람 군주들처럼 이교도 몽골이 이슬람을 침략한 것에 저항한다는 일념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의 새 맹주는 이 위험천만한 이슬람 무장 집단이 점점 독립적으로 커지는 사태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몽골이 행한 페르시아 내 이스마일파의 근절과 멸망은 그리 철저하지 못했다. 이스마일파 열성 신도들이 볼 때는 루큰 알딘이 죽은 후에 그의 어린 아들이 이맘의 자리를 계승했으며 이맘의 계보를 이을 자식을 낳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가 되어 19세기에 아가 칸 가문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동안 이스마일파는 계속 활발히 움직여 1257년에 아주 잠시 알라무트를 재점령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의명분은 사라졌고 이때부터 쭉 그들은 페르시아어권에서 비주류 소수 종파로만 생존하여 동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지금의 구소련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루드바르 지역에서 그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165-6, 172)


5 산중 노인


"시리아에서 최초로 시아파를 자처한 인물은 8세기에 등장했다. 이후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이스마일파의 숨겨진 이맘들은 시리아를 자파의 비밀 본부이자 권력을 얻기 위한 최초의 무대로 삼기 위한 작전을 펼칠 때, 그 지역의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0세기 말과 11세기에 이집트 내 파티마 왕조 수립과 그들의 아시아 확장으로 인해 시리아는 간헐적으로 이스마일파의 지배를 받았고 이스마일파의 선전과 선교에 나라를 개방하였다. 공식적인 이스마일파 외에 교리와 관점 면에서 이스마일파와 매우 유사한 기타 종파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알라무트의 밀사들을 위한 잠재적 기반이 되었다. 마운트 레바논과 인접 지역에 거주했던 드루즈파가 대표적이다. 이 반체제 이스마일 교파는 당시에는 후세의 경직된 배타성을 아직 드러내지 않았던 때였다. 또 다른 잠재적 지지자들은 누사이리Nusayri파, 일명 알라위Alawi파가 있었다. 그들은 본래 12이맘파에서 유래했지만 과격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178)


"1095년 술탄 말리크샤의 아우 투투시는 최고 술탄 자리를 놓고 다툰 형제간의 싸움 도중에 페르시아 전투에서 사망했다. 원래 존재했던 시리아의 지역적 분열 양상에다가 셀주크의 왕조 분쟁 전통이 한데 결합하여 시리아 왕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혼란과 갈등이 고조되던 이 무렵, 새로운 세력이 시리아에 들어왔으니 바로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북쪽 안티오키아를 거쳐 빠른 속도로 시리아의 해안을 따라 진군했고 해안 근처엔 그들에게 대항할 만한 강국이 없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은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하여 라틴 국가를 수립했다. 셀주크 권력이 시리아로 확대되자 동방에 익숙한 시리아 내에 여러가지 사회적 변혁과 불안을 조장하는 문제들이 불거졌다. 게다가 라틴 국가의 침략과 정복으로 인한 충격이 시리아인들이 고통과 절망에 더해짐으로써, 그들은 더욱더 메시아적 희망의 메시지를 간직한 인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179-80)


"12세기에 아사신파는 투르크족 외에 또 하나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볼 때, 카이로를 지배하던 파티마 칼리프는 찬탈자였다. 다시 말해 그를 축출하고 니자리파 계보의 이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였다. 12세기 초반부 50년간 이집트에서 니자리파를 지지하는 폭동이 한 건 이상 발생하여 진압되었으며, 카이로의 파티마 정부는 백성들 사이에서 니자리파 포교를 금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프랑크족과 아사신파의 관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이스마일파와 적군의 협력에 대해 후세 이슬람의 자료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아마도 근동 무슬림(Near Eastern Muslims, 근동은 지중해 연안의 서아시아 지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마음이 이슬람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 사로잡혀 있던, 후대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아사신파 피다이들의 단검에 죽은 프랑크족 희생자 기록은 없으며, 다만 최소한 두 번 아사신파 군대와 십자군의 충돌로 인한 희생은 있었다."(192-3)


"이 무렵 아사신파의 전반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아주 광범위한 윤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사신파는 모술의 군주 장기와 그의 내각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모술의 군주들은 항상 투르크족 군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리아와 페르시아 간의 교통 경로를 장악하고 동방의 셀주크 군주들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사신파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당시 그들은 틈만 나면 주기적으로 시리아로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1148년 누르 알 딘 이븐 장기는 그때까지 이용된 시아파 방식의 '예배 알림(아난)'을 알레포 내에서 완전히 폐지했다. 이 조치는 알레포 내 이스마일파와 여타 시아파들 사이에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신파의 대표가 안티오키아의 레몽과 함께 싸웠던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당시 시리아 내에서 모술 군주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만한 힘을 지닌 군주는 레몽뿐이었기 때문이다."(195-6)


# 시아파 방식의 아난에는 선지자 무함마드와 함께 알리를 칭송하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슬람 통합과 정통성의 설계자이자 성전의 승자로서 살라딘이 급부상하면서 그는 아사신파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아사신파는 어쩔 수 없이 모술과 알레포의 장기 군주들에게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라딘의 중대한 적이 되었다. 1181~1182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낸 서신에서, 살라딘은 모술의 군주들이 이단 아사신파와 동조하고 있으며 아사신파의 알선으로 신앙이 없는 프랑크족들과도 결탁하는 분위기라고 비난한다. 또 그들이 알레포 내 아사신파의 성, 영토, 포교원을 보장하고 있으며 시난과 십자군 양측에 밀사를 보낸다고 언급한다. 동시에 자신이 무신앙 프랑크족, 이단 아사신파, 모술 군주의 반역이라는 삼중 위협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시난의 전기를 쓴 이스마일파 작가도 후세에 성전이 지닌 이상적 목표에 감흥을 받아, 시난을 십자군에 대항하여 투쟁을 벌이는 살라딘의 협력자로 묘사한다."(200-1)


"아사신파 권력은 몽골 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로부터 동시에 이중 공격을 받는 바람에 끝이 났다. 시리아에서 아사신파는 몽골 제국을 쫓아내느라 다른 이슬람 종파와 합세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의 호의를 얻으려고 특사와 선물을 보냈다. 애초에 바이바르스는 아사신파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1266년 구호 기사단과 휴전 협정을 조인하면서, 당시 아사신파의 성을 비롯해 여러 이슬람 도시와 구역에서 받고 있던 세금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의 지상 과업은 기독교 프랑크족과 이방인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근동 이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시리아 한복판에서 이단과 암살이라는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 집단이 계속 독립적으로 나가는 모습을 용인하지 못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머지않아 알라무트의 군주를 대신하여 바이바르스가 아사신파를 지명하고 해고하는 등 전권을 행사했다."(213-4)


# 바이바르스 :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의 5대 술탄


6 수단과 목적


"이슬람 전통은 어느 선까지는 정당한 반란이라면 그 원칙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 규정에 의하면 군주에게 전제 권력을 용인하지만, 군주의 명령이 죄에 해당한다면 백성들의 복종 의무는 중단된다. 그리고 '창조주에 대항하는 인간에 대해선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군주의 명령이 정당한가를 시험하는 절차, 또는 사악한 명령에 불복종할 권리를 행사하는 절차 규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있는 백성에게 유일하게 효율적인 수단은 군주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무력으로 그를 제압하거나 하야시키는 것이다. 이보다 신속한 절차는 암살로 군주를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마일파가 부정한 군주들과 그 신하들을 살해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할 때, 결국 (공동체의 해방이라는) 오랜 이슬람 전통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지배적인 전통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존재를 드러낼 즈음 특히 반체제 과격 종파 세계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224-5)


"하산 이 사바는 굳게 확립된 정통 순니파 이슬람에 대항하여자신의 설교가 아무런 효과가 없고, 그의 추종자들이 셀주크 제국의 무장 세력과 대적하여 그들을 물리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보다 앞선 다른 수장들도 무계획한 폭력, 무력한 반란, 혹은 어쩔 수 없는 복종과 인내를 보면서 절망을 터뜨렸다. 그래서 하산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즉 제대로 훈련받고 매우 헌신적인 작은 세력들을 키운다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극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정치적 암살은 개인의 활동이었으며 기껏해야 목적과 결과 모두 제한적인, 작은 집단의 음모자들이 꾸민 일에 불과했다. 살인과 음모의 기술 측면에서 아사신파에겐 무수한 선배들이 있다. 심지어 살인을 하나의 예술, 종교 의식, 의무로 발전시켰다는 측면에서 보아도 그들에겐 선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최초의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228-9)


"단 하나의 간단한 이론만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 속에서 이스마일주의의 복잡한 현상을 명확히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중대한 역사적 교리와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마일주의도 많은 자료들을 끌어다 붙였고 여러 정권에 의존했으며, 여러 가지 요구사항과 의무를 수행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구체제의 복원이든 신체제의 구축이든 그 목적에 상관없이, 증오하는 지배체제에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또 다른 이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이 세상에서 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군주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외래 간섭에 대항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안전하게 지키고 유지하는 방안이었으며, 전 세계에 군림하는 제국으로 가는 방편이었다. 메마르고 쓰라린 삶에 존엄성과 의미를 안겨 주는 열정이자 성취감이었으며, 해방과 파괴의 복음이었다. 또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진리로의 회귀였으며 동시에 미래의 빛을 예지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242)


"이슬람 역사에서 아사신파의 위치에 관해서 적절한 확신을 담아 네 가지 사항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아사신파의 추동력이 무엇이었든 그들의 운동은 기성 질서, 정치, 사회, 종교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둘째, 아사신파는 세상과 동떨어져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오래도록 계속 이어진 메시아 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하산 이 사바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공적으로 모호한 욕망을 재구성하고 방향을 수정하였으며 불만이 쌓인 민중들의 조야한 신앙과 표적 없는 분노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넷째, 아무래도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인데 바로 그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지 못했다. 즉 수많은 이슬람 분파들 중에서 소수, 비주류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아사신파의 메시아적 소망과 혁명적 폭동의 저류低流와 그들의 이상적 목표, 방식은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많은 모방 집단을 양산했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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