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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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새로 만들어진 영국 위임통치 당국(유대인 정착민들의 자치 구조 구성을 도운)이 지지하는 가운데 대규모로 유입된 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맞선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이 철저히 탄압을 받으면서 원주민 인구는 한층 더 감소했다. 영국이 10만 명 규모의 병력과 공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진압하는 가운데 당시 성인 남성 인구의 1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년 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이후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24-5)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랄라시아 (또는 아일랜드) 등 어디서든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지배하려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특유의 언어로 언제나 원주민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통치한 결과로 토착민들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의 이론적 근거와 나란히, 유럽의 시온주의 식민화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 수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꽃피는 정원으로 바뀌었고, 오로지 그들만이 이 땅에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즈라엘 쟁윌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한 기독교인들까지 소리 모아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26-8)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게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이나 이츠하크 벤츠비(훗날에 각각 이스라엘 총리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40)


"벨푸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벨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46-7)


# 벨푸어 선언(1917. 11. 2) :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여러 민족 정체성은 근대적이고 우연한 현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상황에서 생겨난 소산이다.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원주민에게 이득을 준다는 헤르츨의 식민주의적 견해와 일맥상통하며, 벨푸어 선언과 그 후속 조치들로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민족의식을 삭제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55-6)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발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벨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위임통치령 세 번째 문단에는,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60)


"1937년 7월, 필 경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소요 사태─1936년에 6개월간 진행된 총파업─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은 왕립위원회가 나라를 분리해서 영토의 약 17퍼센트에 작은 유대 국가를 형성하고 이 지역에서 200만이 넘는 아랍인을 추방할 것(추방expulsion 대신에 〈이동transfer〉이라는 완곡한 단어가 사용되었다)을 제안하자, 이런 개입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드러났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라의 나머지는 계속 영국이 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랜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 변화도 없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 실체나 집단적 권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한다는 시온주의의 기본 목표가 충족되고, 팔레스타인 쪽이 열렬하게 바라는 자결권이라는 목표가 부정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를 한층 더 전투적인 단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73)


"숱한 희생이 벌어지고 반란이 잠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남았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는 가운데 영제국에 새롭게 제기된 중대한 전 지구적 도전이 아랍의 반란과 결합되어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앞서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제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대반란Great Revolt을 강제로 진압하는 것에 대한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대해 추축국이 중동 지역에 선전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78-9)


"1939년 봄,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이민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아랍의 주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을 제안하였고, 5년 안에 대의 기관을 마련하고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게에서 아마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을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참이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날 터였다."(79-81)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전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러 아랍 정권들과의 관계는 이미 불안했다." "영국의 후원으로 아랍 6개국이 아랍연맹을 결성한 1945년 3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회원국들이 아랍연맹의 창립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팔레스타인 대표자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자신들이 갖기로 결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 "더욱 원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유럽의 난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하는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는데(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방안이었다."(96-7)


"주로 이라크의 누리 알사이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의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아랍청은 결국 다른 아랍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특히 범아랍권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외시켰다. 양국 지도자,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도자는 아랍청 창설이 이라크가 지역 차원에서 야심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아마도 정확하게─의심했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이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및 영국의 지지자들과 타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쪽으로 옮겨 가자 국왕은 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유대인기구 지도자들과 거듭 회동했다." "따라서 이라크의 누리와 달리, 압둘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의 독립 지도부가 필요 없었고, 팔레스타인의 외교 부서 역할을 할 아랍청 같은 기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106-7)


"1947년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엔을 지배하는 미국과 소련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111)


"나크바─1947년 말부터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 추방하고 심지어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집단 학살 행위를 가리킨다─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하가나Haganah와 이르군Irgun을 비롯한 시온주의 준군사 집단은 무장과 조직력이 형편없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이 첫 단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1948년 봄 플랜 달렛Plan Dalet이라고 명명된 전국 차원의 시온주의의 공세에서 정점에 달했다. 플랜 달렛은 4월과 5월 전반에 아랍의 양대 도시인 야파와 하이파, 그리고 서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 도시와 소읍, 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낳았다."(112-3)


"추방을 피해 이스라엘로 바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을 수 있었던 16만 명 정도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제 그 국가의 국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다수가 된 유대인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잠재적 제5열로 바라보았다.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대민족기금의 차별적 헌장에 따르면, 이런 토지는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와 종교에서 상당한 다수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환경에서 멸시받는 소수로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스로를 절대 전체 국민의 국가로 정의하지 않은 유대 정치체의 피지배자가 되어야 했다."(126-7)


"아랍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1948년의 재앙적 결과를 뒤집으려는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자, 나크바 이후의 황량한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주의가 여러 형태로 되살아났다. 소규모 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에 대처하는 것 외에도 아랍의 난민 수용 국가, 특히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의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유대 국가에 비해 군사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들은 이웃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기를 대단히 꺼렸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에도 그들은 일부 아랍 국가가 이런 운동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시도를 물리쳐야 했다.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한 것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136-7)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이 가자를 어떻게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가려졌다. 강대국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간 충돌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 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고, 나중에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로 겪은 충격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143-4)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벨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한 강대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발표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안보리 결의안 SC 242의 형태로─를 낳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는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하고 있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 대표 캐러돈 경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배 이후 아랍 각국과 그들의 후견인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된 사정이 반영되었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152, 156-7)


"게다가 결의안 제242호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핵무장을 갖춘 이 지역 강대국은 그 후 이 조항을 이례적으로 폭넓고 유연하게 해석해 왔다. 마지막으로, 결의안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실제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57)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안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그린라인이라고 불렸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로써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적 쟁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보상을 받을 권리가 무시되는 결과로 이어져 그들의 열망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결의안 제242호는 이런 탁월한 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점령당하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2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총리는 정착민-식민주의 기획에 특징적인 존재 부정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원주민이라는 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59)


"1950년대에 실지회복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 집단들을 창설한 것은 중간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젊은 급진주의자들로서 대부분은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해 1936년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여전히 영웅적인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기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1956년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창설한 범아랍 조직으로 1967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Fatah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두 집단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시 최초의 지도자들은 대학생이나 최근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166-7)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가까워서 학생과 식자층, 중간계급, 특히 좌파 정치에 이끌리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난민촌에서 헌신적인 추종자들이 있었다. 인민전선의 급진적 메시지가 가장 고통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강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타는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좌파를 표방하는 그룹과 비교할 때 정치적 입장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창립 당시 파타는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나 바트당 같은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공산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사회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 양쪽 모두에 대한 반발을 상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파타의 호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폭넓은 입장이야말로 파타가 순식간에 최대의 정치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170)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제한적이나마)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180-1)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성원들은 이런 압력─아랍 국가들이 점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국경을 놓고 국가들끼리 벌이는 대결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제한적 관점─에, 특히 소련의 촉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방식은 특히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1969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파타 지도부도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파타의 일부 간부들은 일찍부터 두 국가 해법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라파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이 이 방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국가라는 최대주의적 목표와 여기에 담긴 혁명적 함의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나란히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좀 더 실용적인 목표로 나아가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시작이었다."(187)


"카터 시절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권리와 교섭 참여를 거의 지지했지만, 양쪽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멀어졌다. 캠프 데이비드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신호였고, 이 제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베긴과 리쿠드당의 후임자들인 이츠하크 샤미르,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나 주권 확보,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지배권 회복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에브 자보틴스키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자인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오직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을 뿐이다." "향후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기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202-3)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페다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줄곧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레바논 남부, 특히 1978년 리타니 작전에서, 그리고 1981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등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결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까닭에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군사 작전으로는 최소한의 영향만 미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침공을 이끈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209)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 세운 일종의 미니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은 종종 민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대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라도 진척시키는 데 가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222)


"1982년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이었다. 이 내전은 훨씬 더 복잡한 지역적 분쟁으로 비화했다. 1982년 침공은 여러 가지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58년 미군이 잠깐 레바논에 파병된 이래 미국이 최초로 중동에 군사 개입한 사례였고,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제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많은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겨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1982년 전쟁을 개시하면서 내린 선택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결과였다."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정교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끔찍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 나갔고,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38-9)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하게 약해진 듯 보였고, 샤론은 핵심 목표─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는─를 전부 달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십 년 전에 나크바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샤론과 베긴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점령지를 흡수하기 위해 침공에 착수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40)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동 외교를 독점하려 하고 이스라엘의 야심을 부추긴 것은 자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241-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인티파다 시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젊은 시위대가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는 광경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주목했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246-7)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가─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대조적으로─팔레스타인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대체로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서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하고 오래가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252-3)


"198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패배한 뒤, 이 조직은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지배가 20년이 흐른 뒤 점령 체제의 본성이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인티파다를 튀니스에서 원격 통제 방식으로 관리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침을 발표하고 상황을 관리하면서 애초에 봉기를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의 견해와 우선순위를 종종 무시했다."(254-5)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 이집트가 한때 아사드 정권이 행사하는 압력에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지만, 사다트가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룬 뒤에는 이제 그런 역할이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다른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시리아의 경쟁자인 이라크였다." "이렇게 의존하게 되자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의 정책에 순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무지몽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정보부장 아부 이야드만이 예외였다. 그는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아라파트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부 이야드가 내다본 대로 상황이 펼쳐졌지만,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3일 전인 1991년 1월 14일 튀니스에서 암살당했다."(265-8)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이 기구를 추방했다. 그리하여 1990~1991년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이 올라탄 빙산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단단한 땅에 뛰어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공교롭게도 이런 위기 상황과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이 종언을 고하면서 의기양양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평화회담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을 한 탓이 컸다."(268-9)


"샤미르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 뒤, 총리가 된 라빈은 시리아 경로와 팔레스타인 경로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할지 망설였다. 언제나 전략가였던 그는 시리아와 먼저 협상을 타결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그들과의 교섭이 용이해지는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쪽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갈릴리호 동쪽 연안에 있는 몇 평방마일의 전략적 땅의 처분을 둘러싸고 불거진 견해차가 주된 요인이었다. 골란고원에서 조금이라도 철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몇몇 집단(과 미국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실질적인 입장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레스타인 대표단 내부와 튀니스에서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995년 10월, 크네셋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조직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그는 암살당했다."(279-81)


"1993년 6월, 오슬로에서 양측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이 협정과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협정들은 오늘날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 시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온갖 특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셈이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오슬로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289-90)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Ⅱ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Ⅰ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이 악명 높은 누더기 지역들(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퍼센트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퍼센트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치안권, 22퍼센트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은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퍼센트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퍼센트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대해 계속 전면적인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인 권리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은 수십 곳의 군사 검문소와 수백 마일에 해당하는 장벽과 전기 울타리 때문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되었다."(292-3)


"오슬로 협정 이후 사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흔히 거의 동등한 세력, 즉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라는 준국가의 충돌이라고 그릇되게 묘사되어 왔다. 이런 묘사는 변함없이 불평등한 식민지적 현실을 가린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라빈이 아라파트와 끌어낸 안보 합의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1993년 6월 나와 동료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합의에 관해 발표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295-7)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 초기에 창설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었다. 점령 당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하마스를 너그럽게 방치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인티파다 시기에 하마스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고집하면서 통합민족사령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 선언에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력 사용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302-3)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다가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인티파다가 불붙는 데는 성냥불 하나면 충분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부르는 곳─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 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당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 극단론자들이 이웃한 서쪽 벽Western Wall에서 깃발을 흔들며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자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양쪽에서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의 민간인 피해자였으며, 전체 사망자의 3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332명은 이스라엘 군경이었다."(306-8)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민간인을 겨냥한 이런 공격이 치명타가 되어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고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분열되어 있는 〈인위적인〉 정치 체제라는, 널리 퍼져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분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명명백백한 성공을 거둔 시온주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이다."(310-2)


"하마스와 파타의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잠재적인 재앙이었고, 이런 우려의 정서는 여론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5월에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이슬람지하드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주요 조직의 지도자 다섯 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나라는 하마스가 자치당국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서구와 아랍의 재정 지원자들이 파타에게 하마스를 멀리하라고 가한 압력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에 속한 파타의 베테랑들에게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애당초 그들은 라말라의 금박 거품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훨씬 강력한 적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험에 내맡기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분열로 무너지는 쪽을 선호했다."(316-8)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 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 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가림막을 제공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2008, 2012, 2014년)에서 나타난 43:1이라는 일방적인 사상자 비율과,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인 반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319)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관한 한, 미국의 주요한 전략적·경제적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반대를 상쇄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듯하다. 트루먼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이런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이스라엘이 진행 속도를 정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입장까지 결정하도록 놔두었다." "게다가 중동은 오랫동안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집중된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 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여론을 무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332)


결론


"수십 년간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국가의 독립 선언을 언급해 가며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정식화에 내재한 모순들이 한층 더 분명해지자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유대 국가가 우선이라고 인정했다(실제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2018년 7월, 크네셋은 헌법에 그런 선택을 명문화하면서 〈유대 민족국가에 관한 기본법〉을 채택했다.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아랍어의 지위를 격하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다른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민족적 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들 사이에 법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법이다. 유대인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이 법의 발의한 전 법무장과 아옐레트 샤케드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몇 달 전에 솔직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유대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확고히 유지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를 위해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350)


"상황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18세기나 19세기라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력한 민족운동과 번성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원주민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뿐이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극히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고 쫓겨나는 경우,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43-4)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들(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 있든 말든 팔레스타인인을 무슬림으로 뭉뚱그린다)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식민적 미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분쟁의 진정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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