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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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공장으로의 귀환


"20세기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대공장들이 사회를 지탱한 시대였다. 포디즘이 단순히 새로운 생산조직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20세기 자본주의, 즉 '무거운 근대성', 또는 달리 말해서 '중후장대重厚長大식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된 것은 근거가 있다." "사실 '무거운 근대성'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그들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켰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본에 의존하는 임노동자의 지위에 길들여졌고, 기업가 또한 자본의 재생산과 성장을 위해 임노동에 기댔다. 그들의 모임에는 고정된 장소가 있었다. 양측의 어느 쪽도 쉽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대공장의 벽은 두 당사자들을 감옥처럼 둘러쌌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종신서약한 부부처럼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공장은 그들 공동의 거주지였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든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거양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법, 담합구조, 복지국가 모델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된다."(10-1)


1부 전前시대의 유산


"수공업길드의 발젼은 도시화와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일단 생산의 전문화에 걸맞게 직종별 길드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조합원 모두를 서로 규제하는 길드 조직의 근본적인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길드의 본질은 〈살그머니 앞질러 나가는 것〉에 제동을 가하는 데 있었다. 수공업길드 조례는 수호성인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 상호부조에 관한 내용 이외에, 은밀히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특정한 시간 전후의 판매를 금지하고 가격경쟁이나 덤핑행위 또는 저가매수 자체를 막았다. 즉 시장을 둘러싼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약화시킴으로써 조합원 자신이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기만 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는 고도의 정태적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길드제도의 극단적인 평등주의는 그 대신 경제활동의 심각한 예속을 대가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시사회에 변화의 요인이 작용할 경우 쉽게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32-3)


"길드제도 아래서 마스터가 몇 명의 직인과 도제를 데리고 영업하는 전형적인 영업장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형태를 확대가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혈연적 친족가족의 외피에 직인과 도제 또는 한 두 명의 하녀를 포함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비록 길드제도가 도제-직인-마스터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하더라도 마스터로 상승하는 것은 대다수 도제들에게는 〈비현실적 전망〉에 지나지 않았다. 길드제 자체의 배타적인 속성 때문에 영업장 개설 허가를 받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업장 개설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한 숙련공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선대상인이 생산을 주도하면서 독립적인 영업장을 운영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직인 가운데 상당수는 선대상인의 하청을 받아 생산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더욱이 선대상인들이 대량수요에 발맞추어 직인들에게 특정 공정에 해당하는 일거리만을 주문하면서, 완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조차 점차 사라졌다."(36)


"수요 증가가 당시 원산업화proti-industry 지역의 수공업생산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요의 자극을 받은 원산업노동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의 생활과 다른 노동윤리를 발전시켰고, 기본 생산단위인 가정에서 생산자원을 재배치함으로써 생산 증가를 꾀했다. 적어도 18세기 후반 랭커셔 면업지대에 관한 한, '근면혁명'과 비슷한 변화가 가내수공업자들의 삶과 노동세계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장 드브리스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원산업화 지역의 생활태도 또는 삶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드브리스는 특히 18세기 가내경제가 전통적인 생활수준을 지향하면서도 일단 그 수준에 도달하면 더 심한 노동보다는 여가를 선택하는 전산업적 패턴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과 달리 가내노동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채우기 위해 과외소득을 올리려 하고,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시기에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61-2)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


"18세기 말 이래 증기기관은 사회를 극적으로 변모시켰다. 사실 회전굴대엔진이 처음 출현했을 때 기술적 호응을 얻은 것은 탄광이었다. 이전에 뉴코맨 식 엔진을 사용해온 분야에서는 와트의 방식이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력에 익숙해 있던 섬유 분야에서는 도입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와트의 기관어 얼마나 효율적인지 비교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증기력의 사용을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것은 증기기관차의 출현이다." "눈으로 직접 보는 증기기관차며 증기선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원동력이 증기기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아마 우리는 1830~40년대에 이루어진 영국 철도망의 발전에서 증기력 시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836년 당시 철도망은 보잘 것 없었지만 10여 년이 지난 후 철도망은 영국인의 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101-4)


"18세기 말 이래 공장형태의 주류가 수력방적공장에서 증기력공장으로 급속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산업혁명사 연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면업 분야에서는 특히 동력 뮬 방적기가 도입되면서 증기기관을 설치한 방적공장이 급증한다." "증기력의 승리는 한 세대라는 짧은 시기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증기동력을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방적기에 연결하는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증기기관 자체의 진동이 컸고, 그 진동을 견딜 수 있는 방적기를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수력방적공장은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한 동력 전달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수량이 풍부할 경우 수차와 동력 전달장치와 방적기를 연결한 공장 시스템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가동되었으며, 고품질의 면사를 생산했다." "증기력과 수력 겸용 공장의 상당수가 사실상 수력공장의 전통을 잇는 형태라고 가정할 경우 증기력의 결정적인 승리보다는 점진적인 우위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113-6)


"산업혁명 초기에 공장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곳이 아니었다. 공장은 빈민원이나 감옥과 같은 혐오스러운 곳이었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특히 아크라이트 식 공장은 수력을 이용할 수 있는 강변이나 계곡 외딴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노동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력방적공장이 외진 곳에 세워진 것은 한편으로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낌 없는 공장활동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후에는, 연소자나 어린이의 수요가 늘었다. 공사장 노동자들 중에서 미혼이거나 식구가 단출한 가장은 또 다른 공사판으로 옮겨갔지만 여러 자녀가 딸린 사람들은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수력방적공장에서 연소자와 어린이는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사실, 이들을 광범하게 고용하는 것은 수력공장뿐만 아니라 그 이후 다른 형태의 면공장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130-1)


"우리는 산업혁명기의 경제를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기계와 증기력에 개방적이고 그 영향으로 빠른 성장을 계속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는 점차로 또는 급속하게 쇠락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동시대 문헌은 대부분 이 전통적 부문의 쇠퇴와 조락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시대인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인상은 번영보다는 쇠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앞에 클로즈업 된 산업화의 풍경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탈락한 수공업자, 생활수단을 상실한 농민,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도시 슬럼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빈민의 행렬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공업도시와 공장은 사람들의 삶에 낙관적인 전망보다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칼라일은 기계화와 공장제도의 도입을 단지 생산의 영역에만 국한해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기계와 공장제도는 사람들의 행동양식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 양식마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148-9)


"(반反공장주의를 표방한) 토리주의적 정서는 산업화 이전의 노동세계를 이상화하고 있다. 그 노동세계는 주로 토지와 공동체와 교회와 계서제에 기초를 둔 농촌사회를 가리키지만, 가내수공업의 경우에도 인간과 자연, 노동과 여가, 자립과 도덕이 조화를 이룬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전산업사회의 가내수공업자들이 누렸던 독립적인 생활과 산업화 이후 공장노동자들의 신체적·도덕적 전락을 대비하는 반산업적 감정은 특히 개스컬의 《장인과 기계》(1836)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개스컬이 보기에, 증기력과 기계는 건강하고 도덕적인 노동자집단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에 그들 못지않은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지닌 집단을 창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개스컬이 가장 개탄한 것은 노동자들의 가난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동자가족이 미숙련노동자로 공장에 진출함으로써 야기되는 가족적 가치의 파괴와 도덕의 타락을 우려했다. 공장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앗아가는 해악이었다."(154-5)


"1830년대 초 방적공 지도자들이나 급진파 인사들은 기계에 관해 토리-래디컬과 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우선, 방적공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오언주의자들은 기계와 공장이 초래한 병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경쟁이라는 사회관계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구성원들이 경쟁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기계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악덕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경쟁을 의식해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계와 노동자는 영원한 적대자다. 그러나 경쟁을 지양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들 모두 포함하는 단일한 생산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기계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협동으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 기계가 노동자를 내쫓고 실업자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자본주의에만 들어맞는다. 협동사회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오히려 노동자의 작업을 쉽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언주의자들은 (여가시간을 늘려주는) 기계의 유용성에 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224)


"1830년대 공장 관련 문헌을 저술한 배비지와 유어는 오랫동안 그저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4편의 각주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유령과 같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배비지와 유어는 기계의 도입과 공장제의 발전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향이 가져올 '생산력'의 발전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과학의 이용을 강조하면서 나아가 작업장 조직과 과학기술의 결합을 내세웠다. 그들의 저술은 공장의 기계적 원리와 공장운영에 관한 경제의 원리를 종합한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과 정치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실제 노동의 공간이자 생산의 산실인 공장의 분석에 원용함으로써 얻은 일련의 지식체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장제가 노동자의 삶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하거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들의 저술은 (당대의) 공장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여론에 대응하는, 이른바 공장제 옹호론이기도 했다."(171-4)


"공장제에 관심을 가진 당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성공이 어느 정도 생산 공정을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통제는 기계 자체의 질서와 정확성과 '규모의 경제' 등을 통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비지는 기계를 사용함에 따라 대공장으로 이행하는 경로를 강조하면서, 생산비의 최소화 문제를 중시한다." "배비지가 기계의 생산 통제를 염두에 둔 것과는 달리, 유어는 기계의 통제를 넘어 자본가의 생산 통제 가능성을 바라보았고 이를 위해 중앙집중적인 자동화공장의 전망을 내놓았다." "배비지와 유어가 공장에 대해 서로 다른 전망을 제시한 것은 두 사람이 생각한 공장생산 및 운영의 기본원리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배비지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공장생산의 원리로서 스미스 식의 분업론에 집착했다면, 유어는 그의 자동장치의 개념─기계가 작업의 주체가 되어 노동자를 지배하게 된다는─에서 보듯이 자본가의 노동자 통제를 중요하게 여겼다."(184-8)


"배비지가 새로운 공장 모델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연대와 공동 이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유어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완벽한 통제와 지배에서 오히려 노동자의 안정과 발전 가능성을 찾는다." "유어는 공장 어린이의 과도노동이 주로 숙련노동자의 비도덕성에서 비롯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자동장치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비도덕적인 숙련노동자의) 노동력을 쫓아낼 근거를 마련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좀 더 유순하고 순응하는 사람들로 교체한 이후에는 자동장치는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 인간 전체를 통제하는 지배자로 군림한다. 유어가 자동장치automat를 경우에 따라서는 전제군주autocrat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유어는 어떠한 일탈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기계적 리듬에 따라 작동하는 상태를 공장의 질서이자 유토피아로 인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장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로 전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즉, '생산성에 대한 압력'이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196-7)


"한편, 대공장주가 공장아동의 규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공장법을 지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마벨은 1833년 공장법이 중소자본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대자본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에 따르면, 1833년 입법의 목적은 〈많은 중소 섬유공장의 생산비를 높여 그들의 생산을 감축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섬유류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공장법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자본의 준지대準地代가 증가할 것이다. 피해를 입을 부류는 농촌의 수력 공장주, 그에 따른 반사적 이득은 증기력 공장주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력공장은 증기력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동 고용의 비율이 높았으므로 1833년 공장법의 아동고용 제한 및 보호규정은 특히 수력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터였다.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한 자본가들의 주류는 바로 중소 수력 공장주였다." "결국, 1833년 공장법은 대자본과 중소자본의 이해관계 대립을 암묵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212-3)


"인간의 생체리듬에 들어맞지 않는 가혹한 공장노동에 대한 항의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항의는 주로 개량방적기 그 자체를 향한 것이었다. 1820년대부터 주기성을 띠며 나타난 경기변동과 그에 따른 실업을 겪으면서, 그리고 단조로운 공장노동의 변화(실질적 종속 경향)를 감지하면서 방적공들의 항의는 기계라는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향해 조직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대 방적공의 정치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와 달리 급진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방적공의 시간단축운동은 그것이 보여준 격렬함과는 상관없이 조만간 '표준노동일'을 지향하는 대자본의 이해와 맞부딪쳐 상쇄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운동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30년대 방적공들은 시간단축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들 나름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그 운동을 통해 의식의 고양과 함께 더 활성화된 대중적 조직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226-7)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테일러의 담론은 공리주의 전통이 깊고 자본주의 시장이 한층 팽창하던 세기 전환기 미국 경제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생산증대를 필요로 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었다. 그것은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분위기였다. 세기 전환기 미국은 대불황 이후 촉발된 새로운 이민 물결로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과 동시에 시장팽창을 겪고 있었다. 인구증가뿐만 아니라 급격한 도시화 또한 시장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이러한 팽창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공장생산의 대규모화를 넘어서 새로운 조직 원리를 필요로 했다. 테일러는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는 사측의 입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생산증대를 가져올 새로운 조직화가 두 세력의 상호적대를 완화할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생산성 증대가 한쪽에는 고임금을, 다른 한쪽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비용을 허락해주기 때문이다."(260-1)


"테일러의 '과학적' 접근은 결국 노동과정에서 '시간'과 '동작'의 문제로 귀결된다. 테일러는 시간과 동작 연구에서 직접 생산증대를 지향하기보다는 피로를 경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생산증대를 목표로 할 경우 오히려 여러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의 동작에서 기본적인 것은 속도가 아니라 리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전제 아래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불필요한 동작'이 '불필요한 시간' 또는 '게으른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설파했다. 노동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이런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노동자 개인의 욕망, 정체성, 성별 등 다양한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을 단지 연구대상으로 객관화하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 관리에서 노동자의 개인적 차이는 무시된다. 이것이 테일러가 권장하는 접근방식이다. 테일러는 개별 노동자의 동작과 작업을 분석할 때 그 사람을 감정과 이성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작업수단으로 인식했다."(263)


"자동차생산 분야에서 시작되어 내구소비재 일반뿐만 아니라 공장생산의 성격을 크게 변모시킨 이른바 포디즘 생산방식은 20세기의 성격을 규정짓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가능한 시장을 전제로 하는─은 포디즘 생산방식에 의거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포디즘은 일단 〈일관작업 생산방식, 기술적 분업, 부품 및 생산물의 표준화에 바탕을 둔 대규모 경제 추구〉로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부연 설명하면 그것은 수직적 통합과 공간적 집중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챈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드 사는 세계에서 가장 잘 통합된 자동차회사였다. 거대한 공장 설비를 통해 끊임없이 가장 절절하게 계획된 물류를 이루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포드는 철강, 유리, 부품, 보조제품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이와 함께 고임금을 제공해 노동자에게 안정된 소비 패턴의 기회를 제공했다. 포디즘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급 소비의 규범을 만들었던 것이다."(268-73)


"영국 기업가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조직화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 초기 군수물자의 차질 없는 생산이 필요했던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1915년 6월 군수물자부를 신설하고 군수물자법을 입안한 후에 정부는 직영 군수공장과 조선소는 물론, 재정 지원을 계속하는 기업들에 대해 〈기술 및 관리 면에서 최신의 이론〉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자동 및 반자동 기계설비를 도입하고 제품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뜻했다. 이미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된 테일러주의 또는 과학적 관리의 방식을 통해 이전의 구태의연한 경영관행을 타파하려는 취지였다. 군수물자부는 무엇보다 전시에 생산성 제고와 노사 평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경제적 재건은 자본과 노동의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생산 증가와 노동조건 개선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289-90)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할 경우 영국 기업의 특이성은 한 기업이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전 부품을 자체 조달하려 했다는 점이다. 미국 자동차회사는 조립생산자로 출발했다. 상당수 부품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났을까? 당시 영국 자동차공장 숙련공들은 오랫동안 금속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로서 금속 가공에 관련된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뤘다. 따라서 그들은 한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생산방식에 더 적합했고, 한 사람이 여러 공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노사관계에서도 다른 관행을 낳았다. 영국 자동차회사는 조립라인 위주의 미국 회사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자체 생산단위와 더 많은 노동자집단을 조절해야 했다. 노사관계의 평화가 자동차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특이성은 1920년대 영국 기업들이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다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297-8)


"비교적 신사업 분야였기 때문에 자동차회사 노동자들은 다른 철강, 조선, 탄광 분야에 비해 조직 결속력이 약했다. 점차 미숙련노동자의 고용비율도 높아졌다." "미숙련공을 충원하는 추세가 일반화될수록 노동조합의 성장에 장애가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국 자동차공장에서 기업주의 반노조 성향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산업 분야의 노동조합은 전투적인 성향은 덜했지만, 그럼에도 사용자측과 협상파트너로서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었고 그에 상응하는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그들은 임금 인센티브제나 보너스제도 등 다양한 성과급제도를 통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측의 경영전략이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포디즘체제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량생산을 지향하면서도 노동자와 타협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동차회사들간의 경쟁과, 그리고 영국 시장의 특성상 무제한의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302-3)


"포디즘 생산조직 자체는 부품 표준화와 일관작업생산으로 상징되지만, 노사관계의 측면에서는 관리자층에게 막강한 권위를 부여해 노동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는 체제다. 여기에는 청원경찰을 통한 노동자 감시, 위법에 대한 즉각적인 해고, 무급휴업,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이것이 미국식 포디즘이다. 포디즘 생산방식은 처음 등장했을 때, 생산과정을 마치 〈천체가 일렬로 정돈된 것 같은 상황〉으로 만들었다." "톨리데이의 표현을 빌리면, 포디즘에서 진정 혁신적인 내용은 〈숙련노동의 적절한 공급이 없는 상태에서도 생산량 및 생산성의 급속한 증대〉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에서 포디즘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민노동자층의 공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도입하려 했을 때 기존 공장에서 노동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과정 통제, 조직노동운동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304-5)


"과연 영국 기업가들은 노동자 저항에 직면해 새로운 생산시스템을 포기할 것인가. 영국 기업가들의 전략은 오히려 영국의 협소한 자동차시장과 조직노동운동의 전통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자의 노동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성과급 체제를 정착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궤도 위를 이동하는 차체에 단계별로 작업을 시행하는 조립생산라인을 도입하면서도 조립과정 자체는 반자동기계보다는 훈련된 노동인력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포디즘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1920년대에 확립된 영국식 생산체제는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토대로 둘 사이의 안정된 동거양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거운 근대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기에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전후에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모델을 구체화한 것은 바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무거운 근대성이 널리 퍼져나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308-11)


4부 탈공장의 시대


"산업 자본가들의 전통 지향적 태도는 위너의 《영국문화아 산업정신의 쇠퇴》(1981)가 출간된 후 영국 학계에서 열띤 논란거리가 되었다. 위너는 영국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사문화가 기업정신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검토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영국의 신사문화는 원래 반산업적 특징을 지녔는데, 이런 경향이 사립학교를 비롯한 제도교육을 통하여 기업가 2세들에게 전수되었고 이들이 지주층에 동화됨으로써 기업활동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위너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19세기에 부르주아적 가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토지귀족은 강력했고 그러면서도 부를 축적한 기업가라면 신사층gentry의 대열에 쉽게 합류할 수 있는 길이 뚫려 있었다. 전통적 지배세력은 역사적 사형선고를 모면하고 그들의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를 다시 확보했으며, 나아가 중간계급을 자신의 모습대로 주조할 수 있었다. 영국의 근대화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362-3)


"영국 제조업 분야에서 거대기업의 성장은 주로 기계·전기·화학 분야의 기술 진보가 주도했다. 전기 기기를 주로 생산하던 회사들은 전기설비뿐만 아니라 항공기, 선박엔진, 운송설비, 중장비 기계류까지 생산 분야를 넓혔다. 전기에서 기계까지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달성한 것이다." "요컨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1950년대 영국의 산업구조는 소수의 거대기업이 특정 산업 분야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적 성격이 좀 더 뚜렷해졌으며, 산업별 전문화 대신에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생산 기업이 등장했다. 거대기업간의 합병과 상호투자도 잇달았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업가나 노동자, 정책 결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정치인에게 이르기까지 불과 10여 년 후에 영국 제조업이 파국적인 결말을 맞으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번영의 시대에 영국 제조업은 여전히 상당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0년대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해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370-1)


"일례로, 1950년대 철강업계는 비교적 호황을 누렸다. 승용차 및 건축 분야의 호황으로 철강재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이 전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후 수년간 영국 철강업계는 유럽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이래 영국 철강산업은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영국 철강업의 침체는 새로운 기술혁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1950년대 세계 철강업계는 '염기성 순산소제강법'을 개발,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공법은 선철을 강철로 정련하는 과정에서 공기 대신 순수한 산소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순산소제강법은 거대한 설비 투자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했다. 이 개량공법의 도입과 더불어 중소 고로 위주의 소규모 기업들은 갱쟁력을 갖추기 어려웠다. 전후에 새로운 설비투자를 단행한 독일과 일본 등은 후발성의 이점을 살려 새로운 제조공정을 도입했다." "중소 고로시대가 저물면서 영국의 철강회사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372-3)


"이 주장은 독일과 일본은 순산소제강법을 응용한 새로운 설비를 비교적 손쉽게 도입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이나 영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발성의 이점만으로 한 산업 분야의 쇠퇴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은 새로운 공법 도입은 정책적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영국 철강산업은 혁신을 뒤로 미룬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도입된 고율의 보호관세,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입 거부 등이 이 산업 분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7년 국유화 조치는 신공법을 도입할 만한 투자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이 속출했기 때문에 부득이 단행한 조치였다. 사실 국유화는 철강산업의 군살을 빼고 구조조정을 통해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국유화 없이 정부 지원 아래 사기업들의 경쟁구조를 유지하면서 혁신을 추구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74-5)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한편으로는 영국 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생산체제의 황금시대가 종국을 맞은 1970년대 초부터 나타난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량생산체제의 무게중심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국가로 이동하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공생관계가 굳건한 나라에서 그 징후는 아직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스미스-유어-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대량생산의 성장담론이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생산의 원리가 장인생산을 모두 구축하지는 않았다. 독일과 일본에서 광범하게 뿌리를 내린 소기업주의는 장인생산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집중화된 영국 제조업이 쇠퇴한 반면, 일본이나 독일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의 대안으로서 장인생산의 원리를 다시 성찰할 필요성을 느낀다."(381-3)


"(현대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물신적 성격, 이윤추구의 비인간적 속성만을 주목하고 비판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지속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활동 안에는 전자본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어떤 속성이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특히 산업사회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작동기제 아래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윤추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성향들, 이를테면 노동의 습관,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참으려는 태도, 상호신용의 관습과 성취 등 전자본주의 세계에서 유래한 여러 성향들에 의존했다. 좀 더 넓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권리와 상호의무, 선행, 희생과 양심 등 일반적인 도덕률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왔다.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자본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이다."(386-7)


"일례로, 루터와 칼뱅이 가르친 기존 사회의 종교적 전통, 즉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직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어떤 임계선을 넘어 팽창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차로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서 전자본주의적 도덕률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원래 자본주의는 삶을 둘러싼 모든 사물과 모든 조건들을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 아래서는 전통적인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해체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는 대량생산사회의 불안정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상은 바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의 급속한 쇠퇴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공기가 희박해졌을 때 생명과 공기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이 약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387-8)


종장 탈공장의 시대와 인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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