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국의 초상 -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을 읽는 아홉 가지 담론들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4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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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사회 연대기


"19세기 후반은 평론지review와 잡지의 황금 시대였다. 저명한 학자는 물론, 정치가와 성직자, 재능 있는 문필가들이 앞 다투어 평론지에 글을 썼다. 그리고 주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독자가 이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공공 여론을 형성했다." "독자의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지식도 소개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전통적인 문필가들의 작업 외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학문 분야들이 태동하고 있었다. 각 분야에서 지적 탐구를 계속해온 학자들이 전통적인 문필가 집단에 뒤이어 새로운 기고자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성서 연구, 새로운 과학, 과거 역사에 관한 많은 논설들이 실리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현실 문제 또한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평론지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지성지知性誌이자 현실 문제를 예리하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시사 잡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17-8)


1부 사회와 개인


1장 민주주의에 관한 성찰


"영국 의회가 자유당과 경쟁 구도로 정착된 19세기 중엽 헌정제도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과 월터 배저트다. 우선 밀은 대의정부야말로 공공업무를 잘 수행하고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선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대의정부란 주민 전부 또는 다수가 정기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통해 궁극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뜻한다. 밀에게는 대의정부가 바로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그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인이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민주주의false democracy'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선거제에 바탕을 둔 대의제를 최선의 정부 형태로 꼽았다고 하더라도, 밀은 정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서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투표자의 견해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9-51)


"배저트는 영국의 헌정제도를 '위엄 부분'와 '능률 부분'으로 나눈다. 앞의 것은 국민의 존경과 충성심을 유발하는 왕실과 상원을 뜻하며, 뒤의 것은 실제 행정과 통치를 맡는 하원과 내각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능률 부분, 특히 내각이다. 내각제는 행정부가 입법부 의원으로 구성되는 반면, 의회 해산권을 보유해 둘이 결합되는 장점을 지닌다. 이렇게 보면 영국 헌정은 군주제를 가장한 공화정인 셈이다. 유능하고 규율 잡힌 입법부와 잘 짜인 행정부, 즉 서로 협조하는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가 바로 내각제의 산물인 것이다." "배저트는 선거권 문제에 관해서는 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대의제와 민주주의를 구분한다. 민주제는 하층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 보통선거권에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었다. 밀이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에 가중치를 두기 위해 복수투표제를 제안한 것과 대조적이다."(51-4)


"로버트 월리스는 자신의 논설 〈자유주의의 철학〉(1881)에서 자유주의, 자유당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자유당의 정치는 보통선거권 확대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자유당의 정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그런 한계를 고려하면서도 인간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월리스는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신학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신학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다. 예수의 출현은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렇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간섭하고 개입한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도덕을 강조하고 불의보다는 정의, 억압보다는 자유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다."(64-5)


"1880~90년대에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논설을 기고한 지식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선거권 확대를 되돌리려 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맹목적인 선거권 확대가 초래한 정치적 혼란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사실 1886년 이후 보수당은 바로 증가한 유권자와 농촌 선거구 덕택에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질서, 제국 정책, 애국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바로 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한 것이다. 하층민의 상당수가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이끌리거나 선동에 넘어가기 쉽다는 비판은 오히려 당시 보수당의 전략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로 하층계급 유권자들에게는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적절하게 계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릇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보수당 정치의 정당화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70)


#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교육과 사회 발전을 통해 유권자들 간의 능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80~90년대 반민주주의 담론의 불을 지핀 것은 현실 정치에서 승리한 보수당의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논설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주의, 인간 능력에 대한 불신이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당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 이념은 인간 능력의 불평등 그리고 그에 따른 엘리트 지배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 당시의 엘리트주의는 한 세기 전 귀족적 이상과 상당한 거리를 보여준다. 엘리트란 출신과 배경에 직접 연결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연결될 뿐이다." "물론 이들 능력 있는 실세의 대다수가 전통적 지배세력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능력'이 엘리트의 외피를 장식하면서, 새로운 대중정치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제도의 성취를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제도를 통해 엘리트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여러 전략과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73-4)


2장 경제 불황과 여론


"19세기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불황과 저물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 불황이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현재이 상황을 단순한 경기변동 과정으로 바라보거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나타난 혼란으로 볼 경우에는 미래를 좀 더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었다. 반면 그 불황이 영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면, 좀처럼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왕립위원회(이즐리 위원회)의 다수가 서명한 〈다수보고서〉는 불황을 경기 순환의 측면에서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소수보고서〉는 불황을 가져온 영국 경제의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나타냈다. 1880년대의 경제 논설 또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이즐리 위원회 보고서와는 대조적으로, 1880년대의 논설에서는 낙관론이 소수이며 다수 논설은 불황의 심각성과 지속성을 강조한다."(81-2)


"패터슨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에도 인간은 자연의 힘이나 주위의 동력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기술은 더욱 더 급속하게 발전했다." "웰즈는 기계화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기업 형태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는 생산 증대를 가져온다. 반면 모든 생산물 가운데 가장 비싸다. 기계를 구입하고 사용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 때문에 거대 기업 또는 주식회사가 성장한다. 그것은 결합자본이 조직화된 형태다." "이러한 낙관론자들도 기술 혁신에 따른 혼란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모든 변화는 〈낡은 생산 방식의 커다란 혼란〉을 낳았으며, 개별 측면에서는 〈자본의 손실과 직업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근래의 불황은 어디까지나 혁신과 진보에 따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라는 것이다."(85-6)


"기펀은 당시의 논란이 결국 사람들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불황이 심각하지 않고 일시적인데도 사람들이 이를 깊이 느끼는 것은 이 과장된 언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펀은 여러 통계를 동원해 지난 50년간 이루어진 부의 축적과 생활수준 향상을 입증한 후, 그럼에도 왜 불황에 관한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가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이들 언어의 영향 아래서 불황을 체감한다. 그는 이런 언어의 대표적인 원천으로 중산계급 지식인의 사회적 양심, 노조 지도자들의 실업 항의, 다른 나라의 산업 발전에 대한 경고, 재정 위기 및 은행 파산에 대한 우려, 물가 하락으로 피해를 입은 계층의 불만 등을 차례로 언급한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불황에 관한 일반적인 언어는 과장되고 잘못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즐리 위원회와 같은 의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불평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86-7)


# 불황의 원인에 관한 담론

1. 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 및 과잉 생산

2. 해외 시장(특히 독일과 미국)의 경쟁

3. 금본위제의 부정적 영향(금 가치 상승에 따른 물가 하락)


3장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한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렀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구 런던 시 서쪽 교외로 이주한 반면, 많은 노동자와 빈민이 구 런던 시 바로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9세기에 이스트 엔드의 인구 증가는 공사판, 부두 하역 작업, 이민, 고한제─sweating system, 열악한 수준의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자들을 고용한 '소규모' 생산방식으로 의류·제화·가구제조업 분야에서 등장했으며, 공장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등과 직접 연결된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숙련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뜻하는 자조나 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임금, 비정규노동, 실업 등의 문제는 항상 또는 간헐적으로 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이들이 거리의 술집이며 부랑아며 범죄자들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이스트 엔드는 단순한 지리적 실체를 넘어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113-6)


"이스트 엔드를 다룬 논설들은 이 지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빈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특히 1880년대는 주기적 불황, 농업 공황, 이민, 치열한 생존경쟁이 점철된 시기였다. 음주, 조혼, 무모한 다산, 만성질환 등으로 시달리는 극빈층은 실제로는 '가망 없는 계급hopeless classe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씌어졌다. 1888년에 이 지역의 실태를 다룬 찰스 부스도 처음 사회 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가난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과 극빈층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논설들은 그 극빈층에서도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난, 질병, 저소득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인구 과잉과 조혼과 이민이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일 뿐이었다."(130)


"자선조직협회COS는 1833년 신빈민법New Poor Law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였다. 그들은 공적 구호와 개별적인 자선을 엄격하게 구별했으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이에 바탕을 둔 합리적 대안을 강조했다. 그들은 1870년대 이후 여기저기 난립한 개별 자선단체들이 오히려 신빈민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적 자선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에게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자선을 받을 수 없는' 빈민pauper이 바로 공적 구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격character'이었다. 인격을 가진 빈민은 자조를 통해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선은 그들의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넷이나 힐과 같은 COS의 주요 인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자선 행위, 즉 원외구호가 오히려 빈민을 더 나태와 타락으로 빠뜨리고 부도덕을 낳고 있다고 생각했다."(134)


"1880년대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을 쓴 지식인들의 언어에는 진화론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포터, 마셜, 윌리엄 부스 등이 도시 빈민을 가리키는 언어로 즐겨 사용한 '찌꺼기residuum'라는 말은 다윈의 '자연도태' 개념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882년 앤드류 먼즈가 자신의 책 제목에 처음 사용한 이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이라는 말도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는 반면,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도태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메울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묘한 현실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였다. 도태된 사람들이 생존한 것은 문명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세계와 다른 점이었다."(134-5)


"찰스 부스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자연선택'의 구현체였다. 기업가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생산, 분배, 경영〉의 추진 동력이며, 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박애주의나 체계적인 사회 조사를 표방한 도덕주의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환경이 악화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에 적응해 타락한 존재로 변모할 것이다. 타락한 환경 아래서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넷이나 힐은 국가의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135-6)


4장 유대인 문제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유대인은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중엽 이래 이들이 런던의 시티와 이스트 엔드에 홀동 및 주거 공간을 마련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당시 영국은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해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런던에 정착했다고 해서 특별히 법적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법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다른 비국교도와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7세기 후반 런던으로 이주한 유대인 집단의 주류는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들은 런던의 상업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구 런던 시, 즉 '시티'야말로 그들이 상업적 자질을 발휘하는데 걸맞은 지역이었다. 물론 그들이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티의 영국 상인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에 대해 여러 제약을 가했다."(145-6)


"18세기에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스트 엔드를 떠나 좀 더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이나 스텝니에는 좀 더 가난한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왔다. 이들은 대부분 세프라딤이 아니라 동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슈케나짐의 이민 물결은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기에 장기간 중단된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민 1세대보다 영국 태생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18세기만 하더라도 부유한 세파르딤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경멸했으며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영국 출생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두 집단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더욱이 아슈케나짐계 유대인 가운데 상업 및 무역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경멸감도 사라졌다."(146)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인 논설들은 당시 유럽에 만연한 유대인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에서 찾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했다. 유대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민족의 기질이나 성격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실제로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1880년대 이전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 문제를 다룬 공적 언어를 내놓지도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 또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잠겨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뒤바뀐다. 유대인 문제가 공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하면서,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깃들어 있던 편견이 새롭게 구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166-8)


5장 딸들의 반란?


"19세기 말 영국 식자층의 논설에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언어로 널리 쓰인 것은 '신여성new woman'이다. 이 말은 1894년 미국의 새러 그랜드가 처음 사용했으며, 곧바로 영국 문필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관계없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에 해당하는 여성은 19세기 후반 중등교육의 확대와 더불어 나타났을 것이다. 신여성이라는 말은 박애주의적인 사회봉사에 거침없이 나서고 자신의 소득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진보적 견해를 나타내는 젊은 여성을 가리켰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신여성은 일반적으로 독립적이고 가정의 구속을 덜 받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신여성이 당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유일한 말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점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ist, 급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 등의 말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억센 여성'이나 '딸들의 반란'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이다."(171-2)


"19세기 중엽 중간계급의 가정생활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도덕률과 산업적 경제 원리 사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기여했다. 가정은 공사 영역 간의 〈효율적인 도덕적 균형〉을 유지하는 공간이었다. 〈고상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아내에게 부여된 사명이었다." "'억센 여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집안의 천사로 형상화된 중간계급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였던 것 같다." "《19세기》에 '억센 여성'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린턴이 보기에, 이들은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것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이다. 린턴은 특히 여성 참정권론자들을 조롱한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일반인과 다른 성징性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거뭇거뭇 털이 난 턱, 낮은 목소리, 평평한 가슴과 같은 볼품없는 모습〉이 그것이다. 린턴은 이러한 성징에서 곧바로 그들이 여성 고유의 모성maternity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언한다."(174-7)


"케어드를 비롯해 '이른바 억센 여성'의 지지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결혼 제도에 냉소적이다. 이 시기 《웨스트민스터 리뷰》에는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여성 문필가들의 에세이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특히 신성한 배우혼과 가정생활이라는 이미지가 허구일 뿐이고, 역사 속에서는 본질적으로 '여성성의 구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이 제기된다. 케어드에 따르면, 여성을 묶어놓은 가정이라는 틀과 배우혼의 관습은 실제로 매춘과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방패의 앞뒷면과 같다. 여류 박물학자인 앨리스 보딩턴도 비슷한 견해를 내세운다. 가족 제도의 지속은 기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보호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성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여성이 남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일종의 허위의식에 바탕을 둔다. 이와 함께 여성 스스로 정숙함이라는 덕목에 지고지순의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결혼의 강제 존속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180)


"그렇다면 여성의 모성을 강조해 온 이른바 가정의 신화는 계속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상쇄하는 힘이 작용한다. 이 시기의 사회적 요인들이 가정의 신성성에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충격을 완화하는 또 다른 북원 기제가 작동할 수 있었다. 바로 우생학이다. 19세기 말 제국 팽창기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출산율 하락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욱이 보어전쟁 당시 징병 검사에서 드러난 하층 계급 젊은이들의 허약한 신체등급과 체력이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의 우생학 담론들은 건전한 모성과 가정 그리고 여성의 건강한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는 등 오히려 19세기 말 가정의 신성화에 기여했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새로운 여성성의 도전에 직면한 전통 가정은 한편으로 약화와 해체의 위기에 접어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가정의 신성화를 복원하는 이중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200-1)


2부 지식과 시선


6장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


"영국의 초등교육은 잉글랜드 국교회와 비국교회Non-conformists 등의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day school에 의해 이루어졌다. 1830년대 공장법은 13세 미만의 공장 아동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정규교육을 시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주간학교의 수요가 급증했다.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들은 늘어나는 교육 수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단체 자체 재원과 기부금만으로 새로운 교육 시설을 확충하고 교사를 채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정부에서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주간학교에 교부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833년 휘그 정부는 국교회나 비국교회의 구분 없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에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역 주간학교 지원액은 80만 파운드를 넘어섰다. 1858년 초등교육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주안점을 둔 것은 바로 이 증가하는 교부금의 절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210-1)


"위원회는 많은 학교에서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산수arithmetic, 즉 '3R 교육'이 부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매년 시험관이 개별 학생을 대상으로 만족할 만한 학업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부금을 책정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3R에 효율적인 교육을 촉구하면서 그와 함께 납세자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이 제안에 따라 정부는 1864년부터 교부금 지원을 받는 모든 주간학교에 대해 평가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시험은 정부 직속의 시험관들이 학년 말에 각 지역의 학교들을 방문하여 실시했다. 이들은 구술 또는 필기시험으로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평가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했다. 정부는 평가 결과에 따라 교부금 지원액을 삭감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른바 '시험 결과에 따른 지원'이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시험 제도는 교부금 지원액을 적절하게 삭감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212-3)


"그렇다면 옥스-브리지 장학생시험 및 퍼블릭 스쿨 입학시험은 어떻게 도입되었는가." "중등교육에 대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한 톤튼 위원회 보고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우선 사회적 재생산의 중요한 요소로서 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지위와 비슷한 직업을 갖기를 열망한다. 다음으로, 최고 수준의 고전 교육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퍼블릭 스쿨의 랭킹과 평판이 엘리트로 상승하는 빠른 경로를 제공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톤튼 위원회는 클러랜든 스쿨을 제외한 다른 퍼블릭 스쿨을 정확하게 평가하여 등급화함으로써, 중등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당시 일류로 분류된 학교들은 클러랜든 스쿨에 뒤이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출신과 추천에 의한 입학이 줄어들고 그 대신에 입학시험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216-7)


"《19세기》에 실린 항의서한과 뒤이은 몇 편의 논설들은 대부분 시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한다. 문제는 시험만능주의가 교육 자체를 끊임없이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지식의 파편화, 암기 위주의 학습, 개인의 창의성 억압, 대학에서의 고시 열풍, 학원 과외 성행 등이다. 특히 대학교육의 경우 기말시험과 고시 열풍이 똑똑한 범인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엘리트는 오히려 시험 제도 아래서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교육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과서보다는 시험지가 실제 공부하는 과목이 된다. 학생들의 목표는 교사 및 교장의 내면이 아니라 시험관의 내면을, 그가 공부하는 과목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숙련을 알아치리는 데 있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전문 집단, 학원 강사crammer가 증가한다. 그들의 일은 가르치거나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합격하도록 하는 것이다.〉"(227-9)


"이러한 시험 제도는 전통적 관행 주위에 수재 임용이라는 새로운 보호막을 둘러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시기라면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었을 것이다. 경쟁은 시장의 기본원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험 제도의 도입은 시장의 확산과 심화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일 수 있다. 특히 이를 통해 능력 있는 중간계급 출신 엘리트가 자신의 삶을 개척할 기회가 더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통적 지주 세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학벌을 토대로 경쟁하는 제도였다. 연줄(출신)-학벌-경쟁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유리한 것이었다. 경쟁시험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고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험 제도보다도 시험 과목이야말로 재생산 구조의 본질을 반영한다. 적어도 19세기 후반 영국의 교육에서 연줄과 경쟁은 대립항이 아니라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221)


7장 과학과 과학 지식인


"19세기에 독자들이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 자체보다도 그 지식 체계가 기존의 종교, 기존의 신앙과 배치되며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탓이었다. 특히 다위니즘이 창조론으로 자연을 해석한 전통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학은 종교를 대신해 도덕과 사회질서를 지탱할 책무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열역학 이론 또한 진화론 못지않게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에 충격을 주었다. 힘과 에너지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에너지는 전화할 뿐 소멸하지 않는다고 본 에너지 보존의 개념은 성서의 메시지, 이를테면 성서에 나타나는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같은 역사의 종말이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높은 온도를 가진 물질에서 낮은 온도의 물질로만 열이 전도될 수 있다는 제2법칙의 개념, 달리 말하면 열에너지의 비가역성 또한 종말론적 사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243-6)


"한편, 19세기 일반 독자층의 과학 지식이 전문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입되었는가 아니면 독자 스스로 전유專有했는가라는 근래의 논의 또한 종교 문제와 관련지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의 견해는 과학 엘리트가 과학 지식의 발전을 주도하고, 문필가는 단지 이를 수동적으로 단순화해 독자에게 전달할 뿐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반면 뒤의 견해는 엘리트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 과정 이외에 대중 스스로 그 유포된 지식을 번역하여 주체적으로 변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 지식은 유포 과정에서 〈암묵적인 저항〉을 포함함과 동시에 〈문화접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과학 지식과 종교의 화해를 적극 추구한 문필가들은 전유의 추세를 보여준다. 반면 과학 전문가이자 동시에 문필가로 활동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둘 사이의 화해보다는 과학 지식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연스럽게 과학 지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248-9)


8장 신앙의 위기


"영국사에서 18세기를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세속주의 경향이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사회 저변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우선 종교적 관용은 기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나타났다.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성서주의scripturalism에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성경의 모든 말이 성령의 계시로 씌어졌다는 믿음〉은 〈절대자 아래서 인간 운명에 대한 좀 더 낙관적인 모델을 수반하는 새로운 합리적 신앙〉으로 바뀌었다." "종교가 이성에 종속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분석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는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가.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과 신앙은 하나이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종교와 신앙은 이성을 통해서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화 또는 객체화가 바로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는 주장이다."(276-7)


"정통 신앙의 옹호자들은 신학적 전거를 통해 기독교 비판에 맞섰지만, 근대 사회의 변화에 맞게 종교와 신앙 형태도 변해야 한다는 자성적인 논설들도 있었다." "라언 램지는 고대에서 근대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 종교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래 신학 연구가 종교의 전통적인 토대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현실을 인정한다. 이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신학이 〈초자연을 이미지화하고 신을 해부하며 이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반면, 종교는 초자연적 존재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바라보며, 〈이상적인 것이 확대되고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램지는 절대적 의미의 종교성 대신에 종교의 변화를 당연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의 도덕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다만, 신개념 자체가 인격신이자 유일신으로서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적 주재자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284-5)


"진화론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과학 지식을 좀 더 낯익은 사회적 언어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일례로, 그가 보기에 생명 에너지는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연에서 축장된 에너지 양에 지나지 않는다." "스펜서는 기독교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현재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 능력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종교성은 높아질 수 있다. 지적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비가시적 존재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그것을 더 정교하게 상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전제 아래 원시 사회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개념화되었는가를 고찰한다. 요컨대 1880년대에 이르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기존 종교와 신 관념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저명한 문필가들의 논설에서 자주 나타났다. 이들의 문필 활동은 잡지의 전성시대에 독서층의 종교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285-8)


"매닝 추기경은 종교의 세속화가 장래의 종교와 신앙에 미칠 나쁜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초등교육의 세속화를 앞서 이룩한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미국의 경우 자력으로 자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부유한 학부모도 교육세를 납부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교육할 권리를 박탈당하며, 부모 자신의 도덕적·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매닝은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 대해서도 불길한 미래를 감출 수 없었다. 1875년 쥘 페리가 제출한 교육법 수정법안 7조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교회나 종교 단체의 교육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프랑스에서도 초등교육 세속화의 길이 열렸다." "궁극적으로 그가 우려한 것은 공교육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자원적 제도 교육을 위축시킴으로써 젊은 세대에 대한 종교 교육 일반이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292-3)


9장 동아시아를 보는 눈


"1880년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들은 조선의 산하가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도시와 농촌의 풍경에 대해서는 불쾌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서술에는 아름다운 본래의 자연과 불결한 농촌이 겹쳐 나타난다. 마을은 불결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지만 〈처마가 깊이 팬 갈색 지붕이 과수원 속이나 완만한 경사면 또는 반짝이는 냇물 둑〉에 어우러져 있는 풍경에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도시는 너무 불쾌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청계천과 덕지덕지 붙은 〈가옥 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숍은 북경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서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한편, 궁핍이 서민의 일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식재료는 너무 빈약했다. 쌀이 주식이기는 하지만, 양반층에게나 해당될 뿐이고 서민은 수수나 보리 또는 콩을 주식으로 사용했다."(321)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증폭된 것은 역시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일본에 관한 논설이나 저술을 남긴 지식인들은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 이후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본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유럽인만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역사 인식은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었다. 1868년 일본의 혁명은 지도층의 주도 아래 봉건 사회 일본을 근대 사회로 개혁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결과였다. 프랜시스 콘더는 그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일본에서] 근래 발생한 변화, 그 진보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순간 일본은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더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봉건영주제 폐지가 일본 농민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 조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고취했으며 그에 따른 국가의 세수 증대는 거의 기하급수적이었다."(327-9)


"(유럽중심주의를 내면화한) 19세기 말 영국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바로 문명을 이루지 못한 타자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비극은 문명을 이루지 못한 그들의 무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영국 문필가들은 때때로 조선 민중의 순박성과 친절함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습속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명인이 잃어버린 원시성에 대한 동경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유순함과 인내심 같은 것은 그들의 유럽중심적 시각을 강화하는 촉매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은 부분적으로 예외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일본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하고 사회 진보를 이룩한 점에 관한 한, 영국 지식인 스스로도 예외성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본인의 문화와 습속을 다룰 때 타자의 차이를 끊임없이 확인하곤 했다."(337-8)


에필로그_한 세기의 끝에서


"사실 오랫동안 영국의 근대 사회 형성 과정은 근대화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근래의 해석들은 근대 영국 사회의 발전을 주도한 여러 계기들의 혁명적 성격을 부정함과 동시에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튜더혁명은 허구이고 영국혁명도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벌인 단순한 내란이 지나지 않았다. 농업혁명에서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만의 특유한 개량도 아니었다. 더욱이 농업에서 상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새로운 사회세력보다는 시장을 통한 자본 축적의 방식을 일찍 깨달은 전통적 지배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도 기계와 공장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경제 전반에 걸쳐서 전통적 부문과 근대적 부문이 공존하는 불균등 발전의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다. 노동계급의 형성 또한 점진적이었고 노동운동 및 그 운동의 이념에서 핵심을 이룬 것은 전前세기의 급진적 정치이념의 전통이었다."(344)


"영국 근대사에서 이 같은 모호성을 낳은 원인은 너무 일찍 시작된 근대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야말로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시기가 아닐까 싶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을 것이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제국의 동요를 가져왔던 것이다."(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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