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
강원택 지음 / 동아시아연구원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프롤로그_보수와 생존


"보수주의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 폭풍우처럼 몰아쳐 온 역사의 거친 변화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것은 대단한 생존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가진 자의 정치적 생존의 기술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는 하나의 이념'ism'이라기보다 경험이나 상식 등 현실적 체험과 관찰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 감정의 양태, 생활양식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구체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보수당이 대표하는 이념을 두고 당내에서 심각한 이념적 대립이나 토론이 벌어진 적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책에서 이념적 요인보다 생존의 기술로서의 보수주의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는 보수당의 역사가 이념적 순수성이나 완고함보다는 실용성과 유연성이 보다 중시되어 온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수당의 원칙은 실현하려는 추상적인 목표라기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18-9)


2 보수당 이전의 보수파_토리에서 보수당으로


"찰스 2세 시절, 왕위배척법을 둘러싼 갈등과 함께 의회는 정치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정파로 분열되었다. 한 쪽에서는 가톨릭을 믿고 로마 교황을 따르는 국왕(제임스) 하에서 영국의 헌정체제와 국교인 성공회는 절대로 보존될 수 없다고 본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라고 해도 그가 국왕직에 오르는 권리는 신으로부터 내려진 천부의 권한이므로 침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휘그Whig와 토리Tory라는 두 개의 정파로 나눠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휘그는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고 영국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의 입장을 두둔한 반면, 토리는 가톨릭교도가 영국 국왕직을 잇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토리파라고 해서 국교인 성공회보다 가톨릭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에 간섭하려는 것은 헌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며 잘못 그르치면 1640년대의 공포시기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26-7)


# 왕위배척법Exclusion Bill(1679년) : 가톨릭 신자인 왕위계승자 제임스가 국왕직을 물려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휘그파의 우려대로 즉위 후 곧바로 가톨릭을 내세웠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처럼 의회를 무시하고 절대군주처럼 통치하고자 했다. 특히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인 자신의 측근들을 정부와 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사법을 폐지하고자 했다. 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제임스 2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제임스 2세는 자신은 심사법에 규정받지 않는 초월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제임스 2세의 왕권강화 시도와 가톨릭에 대한 옹호로 인해 그의 왕위 즉위를 지원했던 토리파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국왕에 대한 충성과 제임스 2세가 위협하는 국교회에 대한 지지를 두고 토리는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결국 토리들은 국교회를 선택했다. 뜻을 같이 하게 된 토리와 휘그는 비밀리에 오렌지의 윌리엄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윌리엄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제임스 2세는 해외로 도피했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이뤄졌다."(28-9)


# 심사법Test Act(1673년) : 정부와 군에서 공직을 맡는 이들은 반드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 신자여야 한다고 규정한 법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뒤따른 루이 16세의 처형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적이었던 루이 16세의 죽음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혁명의 결과가 왕실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에 기반한 전통적 지배계급의 종말까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혁명에 대한 영국 사회의 두려움은 커지게 되었다." "이 무렵인 1794년 휘그파 내에서 분열이 생겼다. 폭스는 프랑스 혁명 정부와의 화평을 주장했고 그레이는 의회 개혁을 주장했는데 이는 모두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휘그파 내의 보수 성향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휘그 내의 대다수 상원의원과 50명이 넘는 하원의원들이 토리로 옮겨왔다. 이로 인해 국왕에 충성스러운 토리와 토지소유계급인 보수적 휘그 간 연합이 이뤄졌으며, 보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 휘그를 주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1794년 소 피트가 이끄는 토리로 옮아간 휘그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에드먼드 버크였다."(35-6)


#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토리파가 직면한 두 가지 쟁점

1. 가톨릭 : 1801년 아일랜드 통합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 대두(1673년 제정된 심사법Test Act은 군과 행정 분야에서 가톨릭 신자의 고위직 임용을 금지했다)되었고, 마침내 1829년 5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의 시민권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가톨릭구제법Catholic Relief Act을 통과시켰다.

2. 의회개혁 : 토리의 정치적 대표성은 세습 귀족과 토지에 기반을 둔 젠트리였다. 이들은 주요 기반이 농촌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도시 상공업이 활성화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구 확대와 공평한 의석 배분에 강하게 저항했다. 결국 개혁법Reform Bill은 1832년 6월 휘그파의 주도로 통과되었다.


3 필 수상과 보수당의 등장


"보수당이라는 명칭은 1830년경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1835년경이 되면 토리보다 보수당이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2년 개혁법은 보수당 내 반대자들이 우려한 것만큼 결코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혁명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국왕의 권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1911년 의회법이 통과될 때까지 보수파의 보루였던 상원의 권한에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귀족들의 지위도 여전히 내각과 지방에서 지배적인 존재였다. 토지소유 계급들의 지위 역시 약화되지 않았다. 개혁법이 몰고 온 중요한 변화는 정부의 교체를 이루는 것은 국왕의 의지가 아니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정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정당 정치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53-5)


"1832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회복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로버트 필의 리더십이다. 필은 1834년 12월 '탐워스 강령'을 발표했다." "자신의 선거구 탐워스에서 필은 강령을 통해 강경 보수파에 의한 반동적인 대응과 급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급진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한 변화를 모두 거부하고 그 사이의 중도적 입장에 대한 보수당의 가치와 사상을 제시했다. 필은 탐워스 강령을 통해 보수당은 1832년 개혁법을 존중할 것이고 폐지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하였고 이후의 추가적인 개혁도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에 의한 보다 온건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자신의 보수주의를 중산계급이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필은 자신이 귀족 집단과 상공업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에 균형 잡힌 온건한 개혁을 선호한다는 점을 밝혔다. 탐워스 강령은 1832년 개혁법 통과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 상황 속에서 보수당의 사상을 최초로 명확하게 제시했다."(56-7)


# 로버트 필의 개혁정책의 여파

1. 아일랜드 지원 :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의 가톨릭 사제학교에 지원하는 지원금을 확대하여 가톨릭 주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온건한 가톨릭교회가 분리 독립 운동과 연계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많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2. 곡물법 폐지 : 1840년대의 불경기와 도시 노동자의 증가, 해외시장 확대 필요성, 아일랜드 대기근(1845년)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감안해 곡물법 폐지를 통과(1846년 6월)시켰지만, 당 내 반대파들과 치유하기 힘든 깊은 분열이 생겼다.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분열된 보수당의 두 정파를 재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1850년 필의 죽음은 이들 정파의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필 지지자들의 일부는 정치를 떠났고 일부는 그의 서거 후 다시 보수당에 복귀했다. 그러나 필의 지지자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필이 옳았고 1846년 물러난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필에 대한 동정과 보수당 내 보호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그들은 곡물법 폐지를 지지한 휘그에 보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859년 결국 필 지지자들과 휘그는 함께 공식적으로 자유당을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필 지지자 가운데 보수당에서 휘그로 옮긴 대표적인 인물이 후일 자유당 수상이 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다." "곡물법 파동을 거치면서 보수당은 집권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했고 분열을 극복할 유능한 당내 지도자를 찾기도 힘들었다. 보수당이 다시 과반의석을 얻어 권력에 복귀하는 것은 1874년이 되어야 가능했다."(67)


4 디즈레일리_보수당의 기반


"'보수당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듣는 디즈레일리는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1874년까지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어려움을 겪던 보수당을 구하고 이후 1906년까지 약 30년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2년, 보수당 지도부는 자유당에 대한 맹렬한 공세를 시작했고 공공 생활과 관련된 많은 법안을 입법화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유당 정부가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투표법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반 유권자의 생활수준, 특히 위생 수준을 높이는 데는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더 이상 사회개혁 법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수권정당으로의 신뢰감을 높였다." "보수당 내의 이러한 전향적 움직임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움직임 등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1871년 파리코뮌의 사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71, 76-7)


"디즈레일리는 1872년에 행한 두 차례의 연설을 통해 보수당만이 현재 영국의 제도를 보존할 수 있고, 대영제국을 수호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당시 언론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디즈레일리가 제시한 보수당이 자임한 세 가지 역할은 이후에도 보수당의 중요한 정치적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을 사회개혁의 주창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통합과 대영 제국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이슈를 선점하는 안목과 능력이 있었다." "1874년 총선 승리로 보수당은 이제 잉글랜드 지역과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존하는 정당이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게 호소력을 갖는 실질적인 '전국 정당'이 될 수 있었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에 남긴 큰 족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 조직의 측면에서나, 선거 지지라는 측면에서 보수당이 전국적인 정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77-8)


"이제 도시지역과 새로이 형성된 교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산층이 보수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교외 지역에는 계급적으로 하위 중산계급이 밀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런 지역에서는 공동체적인 관계보다 계급에 의한 투표가 보다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사무직 종사자와 같은 하위 중산계급이 일반 노동계급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표현하게 된 것도 보수당의 지지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즉, 교외 지역에 형성된 신흥 주택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보수당의 지지자들, 곧 '빌라 토리즘'이 1874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상승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보수당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보수당은 음주나 유희 등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의 생활방식에 관대했고, 대영제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강조했다. 이처럼 '맥주와 대영제국'으로 요약할 수 있는 노동계급에 대한 보수당의 접근방식은 특히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중년 혹은 노년 노동자들에게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81-2)


5 자유당의 분열과 보수당의 행운


"솔즈베리는 디즈레일리 이후 16년간 보수당을 이끌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업적이었다. 솔즈베리는 1867년과 1884년의 선거권 확대를 마지못해 수용했으며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디즈레일리의 사회개혁과 대중에 호소력을 갖는 보수당을 만들겠다는 토리 민주주의의 이상은 솔즈베리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다. 랜돌프 처칠이 이러한 입장을 이어 받았지만 그는 솔즈베리와의 당권 경쟁에서 밀려났다." "솔즈베리의 보수당이 이후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보수당 스스로의 변신과 개혁 노력보다는 자유당의 내홍과 분열 때문이었다. 자유당 내각을 이끌었던 글래드스턴이 1886년 12월 아일랜드 독립 법안을 추진하면서 당내에 커다란 내분이 생겨났던 것이다."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자유당 내부의 불만 세력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실제로 이 정책에 불만을 가진 자유당 의원들이 이후 보수당에 참여함으로써 정당 재편을 이끌었다."(100-1)


"디즈레일리처럼 솔즈베리의 후기는 외교 및 제국 이슈가 지배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확대되고 있었다. 버마를 복속시켰고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었다. 솔즈베리 정부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복속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국내적으로는 아일랜드를 포함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솔즈베리는 당시 수상으로서는 드물게 1900년까지 외무장관을 겸직했고 내각 내에서 외교문제에 관해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그의 외교정책은 내각 내에서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삼각동맹과 협력관계를 모색함으로써 영국의 이익을 보장받으면서 대외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과 이에 따른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 악화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솔즈베리의 고립주의 정책은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적절한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니었다."(108)


6 보수당의 분열과 관세개혁


"솔즈베리를 뒤이은 새로운 수상은 밸포어였다. 밸포어는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을 이끄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가 주도했던 교육법은 영국 국교회 및 가톨릭계 학교에 대한 지원만을 규정함으로써 그 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던 비국교도 학교들을 소외시켰다. 이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보수당을 굳건하게 지지해 왔던 비국교도들이 보수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노동계급 또한 벨포어의 정책에 분노했다. 1901년의 테프 베일 판결은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했다." "노동조합 측은 노동운동과 파업 권한을 회복시키는 법안 제정을 요청했지만 벨포어는 이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노령 연금 관련 법안을 잇달아 부결시키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벨포어의 보수당 정부는 노동계급의 요구에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노동계급은 이제 막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당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116-7)


"체임벌린이 주장한 관세 개혁은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에 기반했는데, 강력한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독일이나 미국과 경쟁할 수 있도록 영국은 대영제국을 호혜관세로 보다 가깝게 묶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임벌린은 대영제국 외부의 상품이 영국에 수입되는 경우 대영제국 국가의 상픔보다 높은 관세를 물리고, 반대로 대영제국 국가들은 영국 제품에 대해서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관세를 물리도록 함으로써 대영제국 국가들끼리의 교역에 혜택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즉 대영제국 내의 각 자치령이 독자적인 공업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제국 내 각 자치령의 원심적 이탈을 막고 상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영제국 내 국가간 호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899년 보어전쟁에서 보듯이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며 체임벌린은 관세를 징수함으로써 외국이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119)


"그러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 체임벌린의 마스터플랜은 사실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보호무역 대 자유무역 간의 갈등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경제는 이미 분화되고 있어서 관세개혁은 어떤 산업에는 이득을 보장해 주지만 다른 산업에는 심각한 손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관세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관세 개혁이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식품 가격(빵 값)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 내 식민지 국가에 대한 특별한 보호주의적 혜택을 위해 다른 국가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 보다 값싼 곡물 수입에 대해 관세를 물림으로써 전반적인 식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도시 노동자 가구에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책 추진은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구에서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120)


"1908년, 자유당 정부 내에서는 노령 연금 등 사회개혁 지출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로이드 조지나 윈스톤 처칠 등의 입장과 군함 건설 등 해군력을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소위 '대포와 버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심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소득세 인상, 새로운 토지세의 도입, 양주에 대한 과세 등 상층계급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국민의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벨포어는 관세개혁을 '사회주의' 예산안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심지어 보수당 내 강경 자유교역주의자들도 자유당이라는 더 큰 적에 대항하기 위해 벨포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10년 1월 실시된 총선은 귀족들로 가득한 상원의 특권을 둘러싼 논란과 '귀족 대 평민' 간의 대결이라는 자유당의 선거 이슈가 주도했다. 그 결과 자유당은 노동당을 파트너로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의 지지를 지원군 삼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29-31)


7 보나 로와 아일랜드 이슈


"보나 로는 보수당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 대안 제시보다 자유당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는 전략을 펴기로 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 보수당이 역점을 두고 공세를 퍼부었던 것은 아일랜드 독립 문제였다." "이제 곧 아일랜드가 독립국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보수당을 두렵게 했고 이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불러왔다. 보수당 내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막기 위해 대단히 위험하고 극단적인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당시 유명한 법학자였던 윌리엄 앤슨은 의회법을 통해 헌정질서에 폭력을 가한 것은 바로 자유당이므로,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을 부여하려는 또 다른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얼스터 출신으로 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에드워드 카르손은 아일랜드 독립법안이 통과된다면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의 주도州都인 벨파스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반란 계획에 깊이 가담하기도 했다."(140-2)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은 일차적으로는 보나 로 자신이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의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 여기에 자유당이 의회법을 통해 상원에 대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현재 헌정체제가 일시적으로 '유보된 상태'인데, 새로운 헌정질서가 자리잡히기도 전에 아일랜드 독립 같은 영토상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비헌정적인 형태의 저항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보수당 의원들이 공유하는 상황 인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당 당수까지 나서서 무력 저항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보수당 역사에 전례가 없었다." "보수당을 이런 미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덕분이었다. 1914년 7월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위기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던 보수당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 동안 보수당이 강조해 온 연합왕국의 보존, 관세개혁, 그리고 대영제국과 같은 사안들은 모두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142-4)


8 제1차 세계대전과 연립정부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애국주의적이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해 왔다." "반면 전쟁 상황으로 인해 도입된 징병제─1916년 5월 강제복무제 전면 도입─를 비롯하여 새로이 '전면전'이라는 이름 하에 요구되는 억압적 조치들은 자유당을 힘들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당의 전통적인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전쟁은 보수당의 입지를 전반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방위비 지출이나 징병제 등에 대한 보수당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전쟁 수행에 참여한 호주,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많은 자치령 국가들의 도움과 기여로 인해 대영제국의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한 인식도 커졌다." "전후의 새로운 관심사는 국가의 역할, 경제, 사회개혁, 실업문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의 부상 등이었다. 노동당은 이제 자유당과의 협약 없이도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많은 당선자를 낼 수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148-52)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참전 군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전시 물품제조 등 후방에서 전쟁수행에 기여한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 이유로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18년 선거법 개정으로 21세 남성─군인의 경우에는 19세 이상─과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함으로써, 이제 성인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과 비교하면 약 700만 명의 유권자에서 2,100만 명으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와 함께 이제 노동계급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즘의 확산이 유럽 전역을 위협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노동분규와 사회주의 운동이 격화되는 등 사회 불안정과 혁명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보나 로는 당시까지 대단치 않은 존재였던 노동당이 점점 지지를 확대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153-4)


"선거권 확대로 인한 정치적 결과를 확신하지 못했던 보수당은 스스로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려 하기보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며 노동계급 유권자에 보다 호소력을 가진 자유당 로이드 조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시 연립내각에 계속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상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보수당의 원래 원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40-50명의 보수당 평의원들이 1921년 결집하기에 이른 것이다." "1922년까지, 연립정부 잔류 여부를 두고 보수당 내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겨났지만 1916년 이후 자유당처럼 파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자유당에서는 로이드 조지와 애스퀴스의 갈등이 위에서 아래까지 당을 수직적으로 갈라놓았다면, 보수당의 경우에는 그 갈등이 당의 상층부를 수평적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에 당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154-7, 162-3)


9 격변기의 보수당_대공황, 사회주의와 볼드윈


"1922년 11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처음으로 얻은 확실한 승리였다." "1922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보수당과 권력을 겨루는 강력한 경쟁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1918년 선거에서도 노동당은 의석수에 있어서는 63석으로 전체 의석의 8.9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득표율로는 이미 22.2퍼센트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1922년 선거에서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약 80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민족당 소속 의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1886년 자유당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독립 법안의 추진을 밝힌 이래 아일랜드 민족당은 자유당의 견고한 동맹세력이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의석은 영국 정치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보수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 얼스터 지역의 연합파 영국계 주민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수당이 한결 유리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165-6)


"1924년 1월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집권하게 되었지만, 캠벨사건이라고 불린 정치적 논란 끝에 붕괴되었다." "192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적색 공포를 최대한 활용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보수당의 전략은 '지노비에프 서신'이라는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총선을 불과 나흘 앞둔 1924년 10월 25일 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최고 간부회의 의장인 지노비에프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 내용은 영국에서, 특히 영국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 선동을 강화하라는 지령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동당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지노비에프 서신'은 노동당이 공산주의의 동조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일 지노비에프 서신은 조작된 것으로 결국 확인되었지만 19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역사상 첫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172-3)


# 캠벨사건 : 공산주의 계열 잡지인 〈워커스 위클리〉workers' Weekly의 편집장이던 존 캠벨은 이 잡지에 영국 군대가 (적국의 군대라 해도) 동료 노동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을 게재했다. 검찰은 캠벨에게 반란법 상의 선동죄를 적용했고, 결국 하원 내 조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자 맥도날드는 이 조치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한 볼드윈은 '새로운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적으로는 평온한 삶, 대외적으로는 평화와 군축 그리고 전쟁 이전의 일상생활로의 복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다. 볼드윈의 보수당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볼드윈이 이끈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보수당 정부는 매우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회개혁 가운데 하나인 1925년의 과부·고아·노령연금법은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가 부담해야 하는 강제 기여 구조였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슬럼을 없애고 주택을 제공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도시 외곽의 마을과 도시에는 중산계급을 위한 새로운 가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28년에는 동등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은 여성의 투표 연령을 30세로부터 21세로 낮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규정했다. 경제분야에서는 석탄과 면직산업의 합리화 정책, 중앙전력국 창설 등을 이끌었고, 1926년에는 BBC 방송을 설립했다."(175-8)


"1929년 총선은 자유당 당수로서 로이드 조지의 권력을 향한 최후의 일전이었다. 자유당은 1924년에는 340명을 공천했지만, 1929년 총선에서는 513개의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했다. 447개의 선거구에서 보수당-노동당-자유당 3당 간 각축전이 벌어졌다. 적극적인 공세로 자유당은 보수당의 표를 상당부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단지 59석을 얻는데 그쳤고 이후 자유당은 정치적으로 사실상 몰락했다. 보수당의 의석은 419석에서 260석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노동당은 288석을 차지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제1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이번에도 과반 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두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전처럼 소수파 정부로 다시 출범했다. 노동당의 크나큰 불운은 하필이면 월 스트리트가 붕괴하고 대공황이 시작된 그 해에 집권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29년의 선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한 정당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선거가 되었다."(180)


10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에서 볼드윈의 뒤를 이은 체임벌린의 온건한 유화정책은 사실 오랫동안 국민들 사이에 무척 인기 있는 정책이었다. 1938년 9월 체코 위기 와중에는 실제로 다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 때 체임벌린이 독일을 방문했고 뮌헨협상에서 히틀러와 타협을 이뤄냈을 때 영국 국민들은 큰 안도감을 느꼈고 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귀국길에 체임벌린은 자신이 '명예로운 평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어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지지는 물론 국민들의 커다란 성원을 받았다. 그가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영웅의 귀환과 같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그러나 소수의 의원들은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우려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의회 연설을 통해 그는 많은 이들이 지금 무시하고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지만 유화정책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체임벌린을 강하게 비판했다."(200-1)


11 처칠과 제2차 세계대전


"처칠은 이제 수상이 되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보수당 내에서 고집불통의 비판자였다. 관세개혁을 둘러싸고 당 노선에 반대하여 한때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보수당으로 복당한 후에도 인도 자치정부 허용 문제나 대유럽 정책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해 왔고 이 때문에 한동안 당내에서 사실상 소외되어 외톨이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내각의 각료로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동료 의원들이 볼 때 고집 센 독불장군이었고 당에 대한 충성심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광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처칠은 전시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전시내각에는 보수당뿐만 아니라 자유당과 노동당 의원을 모두 포함했다." "정치권은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위기 상황을 맞아 대체로 결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회 내에서 전시 연립정부의 지위는 굳건했고 처칠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도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208-10)


"1945년 5월 전시 연립정부가 해산되면서 전쟁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정당 간 경쟁이 다시 본격화되었다. 전쟁기간 내내 국내 문제를 책임지면서 경제, 사회정책을 담당했던 노동당은 유권자에게 정책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당은 중산층 유권자에게 자신의 장점을 확신시키지 못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의 제안 같이 적극적인 사회개혁 정책에 대해 보수당이 보여준 부정적이고 불확실한 태도는 노동당 각료들의 확신에 차고 일치된 지지의 입장과 분명한 대조가 되었다. 보수당이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자산은 처칠 수상뿐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전쟁 수행 중 보수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했었다. 때문에 보수당은 1945년 총선에서 적절한 정책 공약을 마련하지 못했고 당 소속 각료들이나 지방조직 등도 선거에 일사분란하게 대비하지 못했다. 결국 1945년 총선은 1906년 이래 최악의 참패를 보수당에 가져다 주었다."(219-20)


"그러나 보수당이 참패한 보다 중요한 원인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영국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전쟁은 영국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군대 징집과 군사물자 조달을 위해 새로운 지역에 공장이 건설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기존 거주지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의 어린이들은 공습을 피해 안전한 시골로 옮겨 가면서 상이한 계급 간, 지역 간 사회적 경계가 약화되었다. 여성들도 전례 없이 대규모로 전쟁 관련 업무에 동원되었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경험 속에서, 상이한 계급의 사람들이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로 뒤섞이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 희생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기간 중 산업과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운송 관련 산업의 국유화 등을 경험하면서 정부 계획이나 국가 소유는 더 이상 낯설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전쟁 사회주의'의 경험은 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221-3)


12 전후 합의체제와 처칠


"1947년 5월 11일, 버틀러가 이끄는 산업정책위원회는 보수당이 추구할 보편적인 원칙을 담은 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산업헌장은 노동당 정부가 행한 초기 입법 내용을 받아들였고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노사 간 상호협력을 지지했다. 보수당은 이와 함께 국가의료보험NHS의 설립과 철도, 석탄, 가스산업 등의 국유화도 수용했다. 또한 산업헌장 속에는 보수당이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국가, 기업, 노조 간의 협력 관계를 강조하는 코포라티스트corporatist적 입장도 수용했다. 즉 보수당은 케인즈주의 경제관리 방식이 안정적인 고용과 건전한 노사관계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며, 국가의 역할 확대를 수용하면서 보수당은 복지국가를 해체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수당은 사기업을 억누르거나 부의 재분배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확대된 역할도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230-1)


13 이든과 수에즈 운하 사건


"앤소니 이든은 1955년 총선에서의 압승을 통해 처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명백한 위임을 국민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탓에 경제를 비롯한 국내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이든은 버틀러에게 경제문제를 맡기고 자신은 대외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리더십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든과 버틀러는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주택 보조금을 줄였고 국유화 기업에 대한 자본투자 계획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더욱이 소비세도 높였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은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든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사건은 경험이 일천한 국내 문제보다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외교 정책 분야에서 발생했다. 1953년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권력자로 떠오른 압둘 나세르가 1956년 7월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251-2)


# 1956년 10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를 전격 침공했으나, 미국은 해당 작전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명했고, 결국 두 나라는 외교적 망신만 당한 채 무기력하게 퇴각해야 했다. 


14 합의체제의 유지와 변화의 바람


"맥밀란은 1930년대에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 국가개입과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소수의 보수당 의원 중 하나였다." "1957년, 수상이 된 이후에도 다소 인플레이션의 우려가 있더라도 국가 지출을 위축시키거나 실업을 늘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에즈 운하 사건에서 맥밀란이 얻은 교훈은 영국이 이제 다시는 미국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맥밀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전시 중 맺은 인연을 주고받으며 이전의 수준으로 양국간 연대감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다." "1950년대 영국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고 실업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959년 총선 승리는 사실 부분적으로는 노동당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결과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은 다소 약화되었다. 완전고용과 복지국가로 인해 이제 많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전쟁 이전과 비교할 때 노동조합과 노동당에 훨씬 덜 의존적이 되었기 때문이다."(257, 259-62)


"1964년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보수당은 다시 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3년 간 보수당은 노동당을 압도하며 지배해왔다. 이러한 보수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자유당의 몰락으로 선거 경쟁은 사실상 보수당과 노동당 양 당 간에 이뤄졌다. 자유당의 득표율은 이 시기 6퍼센트를 넘기지 못했다. 특히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97퍼센트에 달했다. 거의 완전한 양당제가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유권자의 대다수가 견고하게 보수당을 지지했고, 노동계급 유권자의 지지 역시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보수당을 총선 승리로 이끈 세 명의 지도자, 처칠, 이든, 맥밀란은 모두 총선 무렵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노동당의 애틀리는 1945년과 달리 1951년, 1955년 총선에서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고 쇠약해졌다. 그의 후계자인 게이츠켈 역시 맥밀란을 압도하지 못했다."(271-2)


15 막다른 골목


"출신 배경을 볼 때 보수당의 많은 지도자는 '이튼 출신의 마피아'이거나 '매직 서클' 내에 포함되는 인물이었지만, 히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오히려 중하류층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있었다." "히스가 보수당을 이끄는 동안 드러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수당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1950년대 이래 이어져 온 합의정치 체제에서 보수당은 복지 문제나 완전고용, 노동정책에 있어서 노동당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당내에서는 보수당이 온정적 진보주의로부터 벗어나서 노동당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즉, 전후의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에 기반한 복지국가 모델에서 벗어나 공공지출을 줄이고 직접세를 낮추고 노조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등 버츠켈리즘에서 탈피하기 위한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 우파나 서독 기민당의 변화 역시 이러한 당내 노선 변화의 필요성을 부채질했다."(278)


# 버츠켈리즘Butskellism : 보수당 정부 버틀러 재무장관의 정책과 그 이전 노동당 정부 휴 게이츠켈 재무장관의 정책이 유사한 것을 빗대어 지어낸 말


"1970년 3월 런던 남부 크로이든의 셀스돈 파크 호텔에서 열린 예비내각 회의에서 히스는 보수당이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집권 후 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를 했다." "여기서의 논의 결과 자유 시장 경제 정책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셀스돈 회의에서는 복지국가, 세금, 교육, 국유화 등 매우 폭넓은 정책 분야에 대해 논의했으며, 기본 방침은 보수당 정부가 낙후된 산업이나 경쟁력 없는 산업 분야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레임덕' 산업이 홀로 서지 못하더라도 국가 보조금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렵더라도 무료 학교급식이나 우유 배급, 무상 의료지원 등을 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역시 영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셀스돈에서의 논의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한 합의체제로부터 보수당의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282)


"하지만 당초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실업이 계속 늘어나면서 제조업 투자도 침체에 빠지게 되자 당황한 히스 정부는 정책상의 급격한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1972년 3월 예산안을 짜면서 재무장관 바버는 세금을 다소 낮췄지만 공공 지원금은 대폭 늘렸다. 이도 저도 아닌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1972년 산업 분야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정부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둔 1972년의 산업법은 히스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레임덕' 산업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정책이 폐지되었고, 산업개발처를 신설하여 경쟁력이 없는 기업에게도 지원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기업 지원을 위해서 지역개발지원금도 활용하기로 했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도록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교육과학성 장관을 맡고 있던 대처의 태도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셀스돈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교육과학성에서 관장했던 학교 무료 우유급식 폐지는 나중까지도 바뀌지 않았다."(285-6)


# 1975년 2월 11일 마가렛 대처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다.


16 대처 시대_철의 여인과 신자유주의 혁명


"대처의 예비내각에서 중요한 인물은 키스 조세프였다. 키스 조세프는 1974년 중순 마가렛 대처를 비롯한 당내외의 지지자들과 함께 정책연구센터를 설립했다. 보수당 조사국의 싱크탱크였던 정책연구센터는 영국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히스 정부 때와는 달리 통화주의,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강조했다. 히스와 그 이전의 맥밀란 수상은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세프와 그의 동료들은 확대된 정부가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만이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집단주의의 흐름은 이제 퇴조했으며 탈규제, 민영화, 재산권의 확대, 개인의 노력과 노조의 개혁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적 방향은 뒤에 대처 정부의 핵심적 의제가 되었다." "대처의 리더십 하에서 보수당은 점진적으로 보다 통화주의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지만, 총선을 의식해서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인 정책 공약의 제시는 피해나갔다."(296-9)


"1982년 4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1976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침공한 것이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150년 전에 영국이 차지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르헨티나가 침공해 오기 전까지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이 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침공은 영국 국민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했다." "5월 21일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은 항복했다. 포클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은 재확인되었다. 전쟁 승리와 함께 보수당 정부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대처의 결단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의 지속, 실업의 증가,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 실추 등 그 동안 영국 국민들이 들어 온 실망스러운 소식과는 달리 포클랜드에서의 승전부는 다시금 국가적 위신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307-9)


"1987년 10월 19일 전 세계적으로 증시가 갑자기 폭락했다. 소위 '검은 월요일'의 충격으로 영국 증권시장 역시 하루아침에 24퍼센트의 가치가 하락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등 쌍둥이 적자로 고전하고 있던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감 하락이 주된 원인이었다. 금융 관련 스캔들도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에 재무장관 로손은 동요하지 않고 기존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가 고집한 감세 정책으로 인해 물가상승이 계속되었고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또한 경상수지 적자는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고 계속된 인플레이션으로 이자율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대처는 공기업의 민영화와 임대주택의 판매 등으로 주식이나 주택을 소유히게 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율의 상승과 계속된 인플레이션은 대처로 인해 혜택을 입은 바로 이들 중산층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처로서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이 동요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320)


# 1989년 11월 22일, 보수당 당수 2차 경선에 불참하면서 대처 시대가 막을 내리다.


17 유럽 이슈와 당내 불화


"대처의 뒤를 이은 메이저 수상은 여론조사와 당내에서의 비관적인 예측을 뒤집고 1992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례 없는 보수당의 연속 4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정작 메이저가 당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메이저 리더십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도전은 다름 아닌 유럽 문제였다. 총선이 끝난 뒤 다섯 달 뒤인 1992년 9월 16일 투기 자본이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면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수요일'의 충격으로 인해 메이저 정부는 부득이 '유럽환율조정체제'ERM에서 탈퇴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유럽통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당내에서 보다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메이저는 토니 블레어의 등장으로 만만치 않은 야당을 상대해야 했다. 토니 블레어가 주창하는 '신노동당'은 보수당의 비밀 병기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 적응력, 유연성을 선점해 버렸다." "이제 노동당은 더 이상 보수당을 지지해 온 유권자들을 두렵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332-5)


"메이저 수상이 이뤄낸 중요한 업적은 북아일랜드 정책이다. 1993년 12월 메이저는 아일랜드 수상 알버트 레이놀즈와 함께 '다우닝 가 선언'을 통해 북아일랜드의 정치세력들이 무력투쟁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후 가톨릭계와 신교 측의 무장테러세력이 휴전을 선언했다. 후일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된 1998년 '굳프라이데이협정'을 조인한 이후 당시 수상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인정했듯이 메이저는 북아일랜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참패를 당했다. 메이저에게 아쉬웠던 점은 기존의 당내 갈등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아젠다를 발굴해서 그것을 자신의 리더십으로 연결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그 과제는 메이저가 떠난 이후에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338-9)


18 다시 황야에서


"2005년 데이비드 카메론이 보수당 당수로 당선된 것은 1997년 이전 18년 간 야당 신세에 머물러 있던 노동당이 당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당시 41세였던 젊은 토니 블레어를 필요로 했듯이 보수당 역시 당의 면모일신을 위해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카메론은 한 때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블레어의 계승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지면서 당의 개혁과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카메론은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적 색채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기조는 '온정적 보수주의'로 요약되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보수당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보수당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와 연두색을 넣은 새로운 당 로고를 제정하기도 했다."(347-9)


19 에필로그_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성공적인 생존의 역사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보수당은 대단히 권력을 열망하는 정당이다. 이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급격한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실 보수당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데는 다소 취약하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정당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바꾸려고 하기보다 지키려고 하는 데서 보수당이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셋째, 보수당은 당의 외연을 넓혀 왔다. 토지소유 계급, 귀족 집단으로 출발한 보수당은 산업혁명 이후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사회적 힘으로 떠오른 상공업자들을 끌어들였고 이들과 하나로 융합했다. 노동계급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된 이후 당 조직의 강화를 통해 이들을 보수당의 지지자들로 만들었다."(353-8)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수호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당은 디즈레일리나 볼드윈처럼 필요하다면 사회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애국주의 정당, 제국의 정당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요소를 보수당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은 기존 질서와 헌정체제의 수호라는 보수당의 전통적 가치에 사회개혁과 애국주의 정당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디즈레일리는 사회개혁을 통해 보수당을 어느 한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모두의 정당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일국 보수주의'의 전통은 보수당의 정치적 명분과 기반을 크게 확대시켰다." "애국주의에 대한 강조가 계급 적대감을 퇴색시키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모든 계급이 국왕과 유니온 잭 그리고 국가의 상징에 감동하고 보수당을 중심으로 단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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