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흑역사 - 부지런하고 멍청한 장군들이 저지른 실패의 전쟁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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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양이 사자의 탈을 쓰면?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이집트 침공


"그라치아니는 젊은 시절 촉망받는 군인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알프스산맥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면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최연소 대령으로 진급했고 두 번이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라치아니가 명성을 떨치게 된 비결은 리비아 반란 진압과 에티오피아 정복이었다. 여기에는 나치 못지않은 잔혹함이 숨어 있었다. 1930년 그는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베두인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만 200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키레나이카 주민 절반에 달하는 10만여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수용소 환경이 워낙 열악하여 수감자 절반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코란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으로 저항운동의 수장이었던 오마르 알무크타르는 지형을 이용하여 20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끝내 그라치아니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의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해주었지만, 아랍인들은 '페잔의 도살자'라고 부르며 그를 증오했다."(25)


"무솔리니는 새롭게 리비아 총독에 임명된 그라치아니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1940년 8월 8일까지는 이집트로 진격하라고 닦달했다. 대경실색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과 싸우는 일은 베두인족 게릴라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솔리니의 등쌀에 내몰린 그라치아니는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다 할 전투가 거의 없었는데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영국군이 측면을 기습할 수 있다는 핑계로 시디바라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더이상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퇴를 고려하거나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지도 않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대였던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물론이고 로멜, 몽고메리 등 앞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칠 다른 장군들에 비해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44-9)


"전후 에티오피아 정부는 그라치아니를 전범으로 기소했다.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조직적인 학살과 독가스 사용으로 수많은 에티오피아인을 살해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탈리아인들을 전범으로 단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는 데 이탈리아의 협력이 필요했던 영국은 그라치아니가 실제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법정은 그라치아니에게 나치에 협력한 죄로 19년 형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연합군의 방관과 냉전 속에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라치아니는 네오파시스트 이탈리아 사회당을 조직하여 명예 당수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어떤 처벌이나 책임 추궁조차 받은 일이 없이 1055년 로마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로 평온하게 사망했고 로마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아필레에 묻혔다."(57-8)


2장 일본군은 초식동물, 쌀 없으면 풀 먹으면 되지 -무다구치 렌야와 임팔작전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가 초식동물이다. 이만큼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팔작전을 입안하며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1944년 2월)" "〈제군, 사토 사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지 않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작전을 훈시하면서(1944년 7월 10일)"(61-2)


"1937년 7월 7일 밤 베이핑 교외 루거우차오에서 야간 훈련중이던 현지 일본군 부대가 중국군의 도발로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허위 보고를 했다. 무다구치 렌야는 처음에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참모를 파견했다. 하지만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마음을 바꾸고는 본국의 허락도 없이 반격을 지시하여 사건을 확대했다. 이것이 8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사건이었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월권이자 군법재판에 회부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바꾸어 말해서 무다구치 렌야 한 사람의 자의식 과잉이 수천만 명의 사상자와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중일전쟁을 초래한 셈이었다. 그때까지 무다구치 렌야는 야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을 모르면서 전쟁을 떠드는 군인이었다. 내세울 공은 없는 주제에 윗선의 눈에 들어 꽃길만 밟아온 터라 거만과 허세로 가득했다."(71-2)


"임팔작전은 단순히 중과부적으로 패했다기보다 기획 단계부터 개인적인 공명심에 눈이 먼 무책임한 졸속작전이었다. 여느 나라였다면 무다구치 렌야와 주요 지휘관, 참모들, 직속상관이 가와베 마사카즈, 데라우치 히사이치 모두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엄중한 문책을 받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처벌은커녕 군법재판조차 열리지 않았다. 일이 시끄러워지고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잠시 예비역에 편입된 뒤 몇 달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육군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가와베 마사카즈는 본토의 중부군 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 가와베 마사카즈의 뒤를 이어 버마 방면군의 지휘를 맡은 기무라 헤이타로 중장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에게 워낙 잔혹하여 '버마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쳤다." "일본 패망 후 무다구치 렌야는 싱가포르에서 포로 학대 죄목으로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증거 부족을 이유로 1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88-9)


3장 나야말로 히틀러의 X맨 -모리스 가믈랭과 프랑스 전역


"제1차세계대전 당시 가믈랭은 마른 전투의 작전을 기획했고 풍전등화였던 파리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제11사단을 맡아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처럼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에 매몰되어 병사들의 목숨을 무익하게 희생하게 하는 대신 뛰어난 전술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프랑스 북부 누와용을 탈환했다. 1918년에는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를 보좌하여 독일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후 해외 주재 무관과 식민지 주둔군을 지휘했다. 1931년에는 베강을 대신하여 프랑스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가믈랭은 세계대공황이라는 매우 불리한 여건 속에서 프랑스군의 재무장과 마지노 요새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때만 해도 유럽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심지어 독일 장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그는 예전의 명성에만 연연할 뿐 변화에 둔감하고 우유부단한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노인이었다."(99)


"가믈랭이 독일과의 싸움에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1914년의 악몽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조프르 원수를 비롯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있었던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광적으로 전쟁을 외치며 프랑스인들을 전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근거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현실적으로 프랑스가 독일을 이길 힘이 있는지에 대해, 전란이 불러올 엄청난 참사나 고통에 대해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는 수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프랑스는 영국·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나긴 싸움 끝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얻은 것이라고는 상처투성이 영광뿐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치인들과 장군들은 이전의 호전적인 모습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위축되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오랜 격언을 잊은 듯이 공격이라는 말은 쏙 들어가고 이번에는 방어만이 능사라는 식이었다. 그 상징이 마지노 요새였다."(102)


"'D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면 즉각 영불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벨기에에 파병하여 독일군과 결전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가믈랭은 프랑스군 최강부대로 구성된 22개 사단을 벨기에 북부로 진격시켰다. 독일군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주력부대를 출동시킨 진짜 이유는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믈랭은 벨기에를 전장으로 삼아서 제1차세계대전 때처럼 자국 영토가 또 한번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한마디로 기왕 싸워야 한다면 내 집 마당이 아니라 남의 집 마당에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잔머리는 도리어 프랑스가 패망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가믈랭은 독일군이 자신의 함정에 빠졌다고 믿었지만 정작 함정에 걸려든 쪽은 자신임을 깨닫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를 향해 신나게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진짜 공세는 아르덴에서 시작되었다."(112)


4장 사디스트가 사단장이 되다 -하나야 다다시와 하호작전


"어릴 때부터 군인의 길을 택한 하나야 다다시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정통 엘리트 코스인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그는 관동군 사령부와 도쿄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같은 사관학교 동기생이라도 학교 성적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일본군이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제아무리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쌓고 실력 있는 유능한 장교라 하더라도 사관학교에서 성적이 나빴다면 영원히 열등생으로 낙인찍힌 채 만년 대위나 소령에 머물러야 했다. 진급에 필수적인 육군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보니 나중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를 상관으로 모셔야 했다. 반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려도 '엘리트'라는 이유로 출셋길이 보장되었다. 성적이 곧 신분이었고 인간의 가치 척도였다. 하나야 다다시도 일본군의 성적 지상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괴물 중 한명이었다."(135)


"1944년 2월, 일본 버마 방면군은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의 건의에 따라 인도 동부의 요충지 임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북부 버마를 침공한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버마에서 연합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별도로 양동작전이 수립되었다. 남부 버마를 맡은 제28군 산하 1개 사단이 국지적인 공세로 연합군의 시선을 속여 제15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호작전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역할을 맡은 부대가 하나야 다다시의 제55사단이었다." "하나야 다다시는 무조건 공격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영국군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준비 부족이 아니라 일선 장병들의 의지 부족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하나야 다다시는 불리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해당 지휘관을 불러 정신력 탓을 하면서 몇 시간씩 두들겨팬 뒤 자결을 강요했다. 단 한번도 전선을 시찰하지 않은 그의 작전 지도는 전황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비현실적인 명령만 반복했다."(144-8)


"하호작전은 졸속작전과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문책이나 조사도 없었다. 오히려 버마 방면군 사령부는 임팔작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대신 3월 8일 당초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제15군 전체의 괴멸이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마 탈환을 시작했다. 제55보병사단은 또 한번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나야 다다시의 사령부가 있는 버마 중부 핀마나도 풍전등화였다. 제33군 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하나야 다다시에게 후퇴 불가와 옥쇄를 명령했다. 그동안 하나야 다다시가 부하들에게 강요했던 짓을 자신이 당하게 된 꼴이었다. 그러나 하나야 다다시는 참모장이 더이상의 손실을 줄여야 한다며 철수를 건의하자 냉큼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후퇴하여 전선 붕괴에 일조했다. 물론 이번에도 무단 후퇴의 처벌이나 문책은 없었다. 이후 타이 주둔 제18방면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평온한 종전을 맞이했다."(150-1)


5장 동토의 땅에서 혼쭐이 난 스탈린의 간신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겨울전쟁


"1924년 1월 레닌이 죽었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레닌에 비견되는 혁명 지도자이자 소련 건국의 공신이었다. 냉혹하면서 탁월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언변, 군사적 재능을 두루 갖추었으며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이상으로 권력욕과 냉혹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오만한 성격의 트로츠키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간부들과 손을 잡으며 은밀하게 세력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충복이 보로실로프였다. 1년 뒤 소련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이자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미하일 프룬제가 죽자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그 자리에 추대했다. 우직하고 충성스러웠던 그는 스탈린을 도와 트로츠키에게 군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공을 잊지 않았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비호 아래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35년 11월에는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더불어 소련 5대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167-9)


"1937년의 대숙청은 이전처럼 스탈린을 위협하는 몇몇 정적이나 반혁명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보기에 2억 명에 달하는 소련 인민 자체가 잠재적인 적이었다. 소련체제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나서서 당과 인민들을 더욱 옥죄어야 한다고 여겼다. 스탈린의 광기 속에서 숙청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소련 사회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처형하느냐였다. 스탈린은 그 숫자까지 정해주었다. 지역 책임자들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더 많이 잡아들이려는 실적 경쟁을 벌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편집광적인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거역할 배짱도 없었다. 그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장교들의 처형 명령서에 쉴새없이 서명했다. 다섯 명의 원수 중 보로실로프 자신과 부됸니를 제외한 세 명이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총살당했다."(172)


"부작용은 금방 드러났다. 서쪽에서는 야심을 드러낸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4주 만에 정복했다. 무솔리니도 발칸의 약소국 알바니아를 손쉽게 손에 넣었다 그동안 유럽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영국, 프랑스는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스탈린은 자신도 이참에 히틀러를 흉내내어 영토 확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손바닥만한 발트 3국을 집어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총 한 발 쏠 일 없이 호통 한번으로 굴복시킨 스탈린의 다음 목표는 동토의 나라 핀란드였다. 하지만 핀란드는 단호히 거절했다. 말로 안 되면 다음은 주먹이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했다. 1939년 11월 30일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소련군이  한 달이 넘도록 승리는커녕 한 발도 전진하지 못한 채 핀란드의 동토에 갇혀서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자 스탈린은 분통을 터뜨렸다. 1941년 1월 7일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자리에서 쫓아냈다."(174-80)


# 1941년 3월 12일 평화조약 체결


6장 국민과 군대보다 내 목숨이 우선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이탈리아 패망


"전쟁보다 처세에 능했던 바돌리오는 무솔리니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20년 동안 군부의 수장으로 지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좌충우돌 사고를 치면서 이탈리아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졌다." "무솔리니는 뮌헨회담 때만 해도 자신이 뒤를 봐주었던 히틀러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자 질투심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동업자의 승리에 숟가락 얹을 궁리만 했다. 프랑스 침공은 겨우 체면치레라도 했지만 그 후에는 모조리 재앙으로 끝났다. 이집트로 진격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대패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통치자였던 아오스타 공작은 영국령 소말리아를 점령하여 반짝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군이 반격하자 파국에 직면했다.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데 6개월이 걸렸지만 영국군은 3개월 만에 승리했다. 50여 년에 걸친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지배도 끝장났다. 제일 손쉬워 보였던 그리스 원정조차 참패였다."(216-7)


"시칠리아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7월 25일 밤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전격 선언했다. 다음날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가 22년이나 파시스트들의 지지를 받으며 철권통치를 했다는 점에서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지만 정권 교체는 의외로 순탄했다.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던 파시스트단체들은 침묵했고 자신들의 수령을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바돌리오는 자신을 쫓아낸 무솔리니에게 복수하고 권력의 정점에 앉았다. 그는 입으로는 여전히 독일 곁을 지키면서 연합군과 싸우겠다고 했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독일에게 승산이 사라진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이탈리아인들은 없었다."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에 깜짝 놀란 히틀러는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지금의 폴란드 켕트신)의 사령부 '볼프스샨체(Wolfsschanze, 늑대 소굴)'에서 급히 장군들을 모은 다음 〈돼지들을 그곳에서 끌어내야 한다〉라며 길길이 날뛰었다."(226-7)


"9월 8일,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에서 만슈타인을 만난 뒤 라스텐부르크로 돌아와 저녁 7시 50분 영국 BBC를 통해 이탈리아 항복 뉴스를 들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텔에게 '악세 작전(Operation Achse)' 발동을 명령했다. 이탈리아의 점령과 유럽 각지의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로멜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3시간 뒤인 밤 11시가 되자 각지에 주둔한 이탈리아군 부대에서 독일군이 행동에 나섰다는 보고와 명령 요청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 순간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 각료들, 군 수뇌부의 선택은 싸우는 것도, 독일과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치졸하게도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본인들만 도망칠 참이었다. 바돌리오는 국왕을 찾아가 당장 로마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한 장군이 떠나기 전에 내릴 명령이 있냐고 묻자 〈없소, 나는 바로 떠날 것이오〉라고 말하고 국왕 일행과 함께 야반도주하듯이 로마에서 빠져나갔다."(231-4)


7장 군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이름과 성욕뿐 -나폴레옹 3세와 스당전투


"여론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시작되기만 하면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대육군의 후예들이 베를린을 또 한번 짓밟아 프랑스의 위세를 보여줄 것이라며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규모의 직업군인제를 선호했던 장군들은 프로이센식 대규모 징집제도를 도입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군인이지 쓸모없는 신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에야 '기동근위대'라는 이름의 예비군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전시에 4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무기는 구식이었으며 치안 유지 이외에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징병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장군들과 정치인들이 프랑스 국민들을 무장시키기를 꺼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민중은 애국자가 아니라 언제라도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292-4)


"나폴레옹 3세는 두 가지 결정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첫번째는 전쟁이 시작되면 4년 전의 복수를 꿈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호응하여 프로이센을 협공하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남부의 친오스트리아 왕국들도 가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트리아는 참전을 주저했고 독일 남부 왕국들은 프랑스를 편들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 편에 서서 프랑스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프로이센이 운이 좋았다기보다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물밑에서 설득하고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여 독일 전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덕분이기도 했다." "두번째는 프로이센의 부대 동원 능력에 대한 오판이었다. 프로이센의 동원 속도는 프랑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는 몰트케가 이끄는 참모본부가 지난 수년 동안 얻은 귀중한 경험을 활용하여 전쟁 계획과 병력 동원, 철도 수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한 성과였다."(296-7)


"유럽 최강자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결승전은 프로이센의 완승으로 끝났다.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5년 내에 납부하되, 그것을 갚을 때까지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더욱 치욕적인 일은 라인강 서쪽의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겼다는 점이었다. 면적 1만 4000제곱킬로미터에 프랑스 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그 옛날 신성한 독일의 일부였으며 2세기 전 루이 14세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땅을 230여 년 만에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가 두 번 다시 일어서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의 오판이었다. 프랑스는 2년 만에 배상금을 모두 지불함으로써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증명했다. 알자스로렌의 할양은 양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40년 뒤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309-10)


8장 흑인들에게는 희망을, 백인들에게는 조롱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와 아두와 전투


"이른바 '빅토리아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절(19세기 중후반) 유럽 열강은 너도나도 아시아, 아프리카를 경쟁적으로 침략하면서 식민지를 확장해나갔다. 유럽인들에게는 황금기였다. 잘 훈련된 유럽 군대와 현대적인 무기, 강철 군함의 함포 앞에서 중국이나 인도처럼 가장 오랜 역사와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비(非)유럽권 국가들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역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는 비록 통일은 했지만 열강의 반열에 들기에는 여전히 약하고 가난했다. 하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포르투갈, 벨기에처럼 유럽에서는 변변찮은 약소국도 자국보다 훨씬 넓은 땅을 식민지로 경영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시선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동아프리카였다. 지형적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코뿔소의 뿔을 닮아 '아프리카의 뿔'이라고도 불렸다. 그때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손길이 아직 뻗치지 않은 아프리카의 몇 안 남은 지역이었다."(323)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의 작은 마을 아두와에서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 4개 여단 1만 4000여 명은 1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게 포위 섬멸되었다. 그것도 유럽인들이 미개하다며 깔보던 아프리카인들에게 패했으니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때까지 유럽 여느 나라들, 벨기에나 포르투갈 같은 약소국조차 아프리카인들에게 그 같은 참패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국회의장 도메니코 파리니는 일기에 〈이탈리아는 끝났다〉라고 썼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내각은 총사퇴했다. 국왕 움베르토 1세는 3월 14일에 자신의 52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신 '애도의 날'로 정했다. 이탈리아는 온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로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무모한 원정을 강행한 정부를 비난하는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아두와전투가 이탈리인들에게 절망을 주었다면 유럽의 침략에 시달리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섣부른) 자신감을 주었다."(319-21)


9장 미군, 1라운드에서 KO패 당할 뻔하다 -로이드 프레덴들과 횃불작전


"1943년 1월 아르님 휘하의 독일 제10기갑사단과 제334보병사단, 이탈리아 제1보병사단 '수페르가'는 로멜과의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 프레덴들이 내린 명령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생뚱맞은 소리였다. 그는 미 육군의 표준 명령 규약을 무시하고 자신이 만든 기묘한 은어로 명령을 내렸다. 보병대는 '워킹 보이(walking boy)', 포병대는 '팝건(popgun)'이라고 불렀다. 인명과 지명에 대해서는 〈~로 시작하는〉이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붙였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프레덴들의 해괴한 행태는 부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알쏭달쏭한 명령을 해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명령 하달. 땅개 소년들, 장난감 총, 베이커의 팀과 베이커의 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은 현재 귀관의 위치에서 북쪽에 있는 M으로 갈 것. 가능한 한 당장. 귀관의 상관은 M에서 왼쪽으로 다섯번째 사각형 격자 판에 있는 D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J로 시작하는 이름의 프랑스 신사에게 보고할 것.〉"(388-9, 373)


"2월 14일 미 제1기갑사단 A전투단과 제34사단 제168연대 보병들이 지키고 있는 시디부지드를 향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평야와 언덕 여기저기에 분산 배치된 미군을 손쉽게 포위했다. 프레덴들이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지도만 보고 배치한 결과였다. 제168연대장 토머스 드레이크 대령이 프레덴들에게 당장 철수해야 한다고 했지만 프레덴들은 구원부대를 곧 보낼 테니 진지를 굳건히 지키라고 엄명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꾸물대며 시간을 낭비했다. 다음날에야 제1기갑사단 C전투단이 출동했다. 미군 전차부대는 마치 열병식을 하듯 대오를 이루고 행군을 하던 중 독일 공군의 폭격과 매복에 당해 전차 46대와 차량 130대, 자주포 9문을 잃었다. 전차 4대만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 한번의 전투로 사단 전력의 3분의 1이 전멸한 셈이었다. 프레덴들은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포위된 미군 병사들에게 내린 명령은 그냥 알아서 탈출하라는 것이었다."(390-1)


"미 제2군단 전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일군은 1000명의 사상자와 전차 20대를 잃은 반면, 미군은 전사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3000여 명이 넘었고 37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또한 전차 183대, 600여 대의 차량도 격파되었다. 굴욕적인 패배 소식에 워싱턴이 들끓었다. 충격을 받은 루스벨트는 〈우리 병사들이 싸움을 할 줄은 아는가?〉라고 물었다. 영국군은 경멸감을 드러내며 미군을 가리켜 〈우리의 이탈리아군〉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프레덴들은 비겁하게 모든 책임을 워드에게 떠넘겼지만 아이젠하워는 직접 제2군단을 방문했다. 그로서도 자신의 앞날이 걸린 문제였고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부사령관 브래들리를 비롯하여 일선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났다. 그리고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프레덴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프레덴들은 해임되었다. 워드도 함께 쫓겨났다. 워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군대식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393)


10장 식초 조, 중국을 망치다 -조지프 워런 스틸웰과 버마작전


"스틸웰은 사령부에서 군림하던 프레덴들과는 정반대로 '병사들 중의 병사'였다. 그는 고위장성에 걸맞지 않게 항상 허름한 군복을 입고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직접 소총을 메기도 했다. 그런 탈권위적 모습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귀족적인 군인보다 서민적인 군인을 선호했던 미국의 젊은 좌파 언론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스틸웰이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일개 사단장이나 연대장이 아니라 장제스의 참모장이자 연합군 전선의 한 축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전술적인 역량보다는 외교관의 유연성과 전략가의 시야, 조직가의 수완이 더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었다. 외교관으로서 빵점이라면 전략가로서는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패튼이나 로멜, 구데리안과 같은 특출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야전군인도 아니었다 그는 버마 전선에서 정글전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 현대전에서 전차와 항공기가 차지하는 중요성도 알지 못했다."(402-3)


"따라서 스틸웰은 굳이 전선에 나와 익숙지 않은 전투를 지휘하기보다 차라리 충칭에 남아 중국군을 돕고 자신과 미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를 쌓는 데 노력하는 편이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쪽이었다. 스틸웰은 중국에 오자마자 장제스를 압박하여 최정예부대를 얻어낸 뒤 버마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쳤고 재앙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쫓겨난 맥아더가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스틸웰 역시 명예를 회복하겠다면서 버마 탈환에 매달렸다. 그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치러야 할 몫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권한을 악용하여 원조 물자의 대부분을 중국에 제공하는 대신 인도에 쌓아두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이 직접 지휘하는 인도 주둔 중국군 부대 이외에 중국 본토에 남은 대다수 중국군은 전쟁 내내 미군의 원조 물자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404)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루스벨트는 1944년 10월 대선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하여 스틸웰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두 사람의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장제스도 승자는 아니었다. 중국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악선전만 믿고 〈왜 장제스의 군대는 전혀 싸우지 않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공의 교묘한 심리 전술에 넘어간 이들은 장제스보다 마오쩌둥이 더 다루기 쉽고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 착각했다. 트루먼은 공산주의에 덜 유화적이었지만 그 역시 누가 진짜 친구이고, 누가 진짜 적인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평화 중재자 노릇을 하겠다며 국공의 싸움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장제스가 수세에 몰리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손을 떼었다. 1년 뒤 한반도에서 맥아더가 마오쩌둥 군대에게 여지없이 패한 뒤에야 비로소 중국 공산당이 미국의 친구가 아님을 깨달았다."(406-7)


11장 가벼운 주둥이가 프랑스군을 결딴내다 -로베르 니벨과 니벨 공세


"프랑스군에게 베르됭전투는 단순히 그때까지 수없이 반복된 여느 전투의 하나가 아니었다. 양군은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총력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벌였다. 승리에 도취된 프랑스인들은 드디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찾았다고 우쭐했다. 그 비결이란 위대한 명장 니벨과 그가 자랑하는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이었다. 헤이그와 달리 니벨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페탱의 강력한 병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베르됭전투 내내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10개월 동안 독일군은 35만 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프랑스군은 4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손실되었다. 제아무리 니벨이 승리를 장담한들 독일군은 일석일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니벨과 망징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프랑스 청년들이 제아무리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은 결과에 열광했다."(491)


#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 : 보병이 돌격하기 직전에 포병이 적군 진지에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쏟아 부은 뒤 보병의 진군 속도에 맞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탄막을 전진하여 적진을 파괴하는 방식


"베르됭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치인들은 조프르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새로운 총사령관에 니벨을 임명했다. 니벨은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 바로 보안이었다. 평소에도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던 그는 극비를 유지해야 할 계획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세부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작전 지도까지 보여주었다. 런던 방문중에는 한 사교클럽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귀부인들에게도 신나게 떠벌렸다. 니벨의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 언론을 통해 모두 공개되었다. 더이상 공격이 언제 어디서 어느 부대에 의해 시작되는지는 비밀이 아니었다. 니벨의 보안 위반은 일반 병사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비밀 유지 명령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세 성공이 기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나사 빠진 행동이었다. 게다가 일선부대에 너무 빨리 작전 계획서를 배포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독일군 정보부는 니벨 공세의 전모를 손쉽게 파악했다."(495)


"루덴도르프는 전선 일부를 축소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방어를 한층 강화하고 최일선에 배치된 일부 병력을 예비대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방어선의 이름은 '지크프리트선(힌덴부르크 선)'이었다." "니벨은 독일군이 제 발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철수중이라는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가벼운 입 때문에 정보가 독일군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었다. 어쨌든 영불 연합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잃은 땅 일부를 찾은 셈이지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니벨의 목적은 단순히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포격으로 독일군의 주력을 박살내고 적진을 돌파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물러나면 작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니벨은 독일군의 철수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대신 당장 자신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만 불쾌하게 여겼다. 그에게는 전략가로서의 사고가 없었다."(496-7)


"4월 16일에 개시된 니벨 공세는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5월 9일 모든 공세는 중단되었다. 15일 동안 프랑스군은 2만 8500명의 포로와 187문의 대포를 노획했으며 최대 6, 7킬로미터를 전진했다. 독일군은 16만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도 18만 7000명을 잃었지만 겨우 수백 미터를 전진하려고 수만 명씩 죽어나가던 당시 기준에서 보면 큰 손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1년이나 2년 전이었다면 니벨의 공세는 충분히 성공이라고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에 직면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니벨은 결정적인 승리를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실망한 프랑스군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뻔했다. 니벨의 실패는 다른 장군들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서가 아니라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론이 급격히 약화되고 항명과 반란이 이어졌다. 5월 15일 니벨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511)


12장 내 군단은 어디로 갔나? -유재흥과 현리전투


"1949년 3월 2일 유재흥은 새로운 보직을 받았다. 막중하면서도 민감한 임무였다. 제주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지옥이나 다름없던 제주도에서 (1년여 전에 일어난) 공산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 육지에서 좌우익의 격렬한 대립과 반미 시위로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제주도는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휩쓸었던 1946년 '10월 항쟁(대구 10·1사건)' 때도 제주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보다 이념색이 약했던 이유는 토지 집중화 현상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 전체의 소작농 비율이 43퍼센트에 달했던 반면, 제주도에서는 자작농 비율이 72.8퍼센트였다. 소작농은 겨우 6.3퍼센트에 불과했다. 따라서 육지와 달리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좌익에 물들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억지였다."(531-3)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미군정 산하에서의 생활고였다. 맥아더는 남한보다 일본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흉작으로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미 본토에서 가져오는 대신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강제 공출했다 남한 역시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그중에서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제주도는 특히 고통이 심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조선인들은 쌀이 없어도 생선과 해초로 능히 살아갈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발표하여 분노를 사기도 했다. 결국 제주도민들도 폭발했다. 육지에서 이미 10월 항쟁과 미군정의 탄압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인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서 2만 명의 주민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여섯 명이 죽었다." "미군정 조사팀은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좌익 세력에 동조하는 좌익 거점〉이라는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정이야말로 제주도민들을 자극하여 좌익들의 온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었다."(533-5)


"유재흥이 제주도에 내려온 때는 이미 광기의 피바다가 섬 전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는 전임자들의 무분별한 섬멸전 대신 보다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불만이 온상이었던 극우단체들의 행패부터 금지했다. 유재흥의 선무 활동은 대번에 효과를 드러냈다. 산속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주민들은 그제야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을 잃은 게릴라들의 세력도 빠르게 약화되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불과 두 달 남짓 있었지만 육지로 떠나는 5월 초에는 대부분의 반란이 종식되면서 모처럼의 평화가 찾아왔다." "당시는 유재흥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조차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면서 모르는 척 침묵을 지키거나 오히려 과잉 충성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유재흥이 20대의 젊은이답지 않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제주도민의 민심을 안정시킨 사실만큼은, 그가 한국전쟁에서 군인으로서 보여준 과오를 떠나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541-2)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방면을 맡은 유재흥의 제7사단은 북한군 주력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북한군은 3개 사단 및 1개 기갑여단 등 3만 2000여 명에 달한 반면, 제7사단은 2개 연대 7000여 명에 불과했다." "유재흥이 평생 처음 경험하는 '진짜 전쟁'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동두천을 맡은 제1연대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격퇴했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지 못한 채 그날 밤 밀려났다. 포천 방면의 제9연대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채 후퇴했다. 육군 본부에서는 부랴부랴 제3연대는 다시 제7사단에 배속하여 전선으로 출동시켰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자리에 없었기에 실제 병력은 1개 대대에 불과했다. 그들 역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간단하게 분쇄되었다. 그 와중에도 대통령 앞에서 큰소리쳤던 채병덕은 직접 전선으로 나와 사단장들에게 즉각 반격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닦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된 반격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개전 이틀 만에 제7사단은 붕괴되었다."(544-5)


"중국군의 제2차 춘계 공세(1951.5.16~25)를 가장 먼저 받은 쪽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이었다." "현리는 공세에 밀려 철수중인 두 사단의 병력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당장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철수는커녕 독 안에 든 쥐가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은 2개 사단이 아직 건재하여 오마치 고개를 충분히 탈환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는 군단장으로서 일선에서 직접 전황을 살피고 독려하는 대신 제3사단장 김종오에게 모든 지휘를 맡기고 사령부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적에게 퇴로가 막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군단장이 달아난다!〉며 패닉에 빠진 채 너도나도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리 주변은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달아나는 한국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중화기는 모조리 버려졌다. 손에 쥐고 있는 무기는 소총에 불과했다. 게다가 패잔병의 태반은 험준한 산속에서 길을 잃은 채 탈진과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추격해온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559-61)


"유재흥은 하진부리에서 일단 잔여 병력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밴 플리트는 유재흥에게 더이상 한 발짝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폭격기를 출격시켜 맹폭격을 퍼붓고 미 제2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에서 병력을 빼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보강했다. 스스로 무너진 제3군단과 달리 백선엽의 제1군다는 북한군의 공세를 잘 막아내 동부 전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결국 중국군의 5차 공세로 괴멸한 부대는 유재흥의 제3군단밖에 없었다. 게다가 5월 21일 유재흥은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하고 또 한번 돌파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미 폭격기들은 한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와 탄약을 폭격하여 파괴해야 했다. 분노가 폭발한 밴 플리트는 참모총장 정일권과 함께 직접 제3군단 사령부를 찾았다. 그는 유재흥을 크게 질책하고 그 자리에서 지휘권 박탈과 한국군 편제에서 제3군단을 아예 지우겠다고 선언했다."(561-2)


"아무리 유재흥의 추태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해도 밴 플리트의 조치는 냉철하거나 불가피하다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또한 미군의 우월적인 지위를 남용한 횡포이기도 했다. 그는 전후 사정을 살피고 우리측 입장을 들어보는 대신 마치 분풀이하듯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 "유재흥은 그 자리에서 밴 플리트에게 맞서느니 일단 참고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는 쪽이 일을 더 키우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일본군에서 일본인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하는 일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머슴이 불만을 품을 수는 있으되 감히 대들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저자세가 오히려 밴 플리트의 마지막 인내심을 건드리면서 더 큰 분노를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유재흥은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아니라 참모총장인 정일권, 제1군단장 백선엽과 더불어 한국군 전체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다."(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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