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5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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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주술


14장 잉글랜드 주술 : 범죄와 주술의 역사


"주술은 마술의 나머지 종류들과 뚜렷이 구분할 수 없다. 성직자들이 마술이란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이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밀스런 수단을 이용해 (또는 이용하는 척하면서) 일반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방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종류의 '주술'만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술은 불행을 누군가의 은밀한 개입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주술사는 성별을 불문하고 (여성이 훨씬 많았지만) 은비한 수단으로써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자를 뜻했다. 그녀가 끼칠 수 있는 해악은 전문용어로 'maleficium'(저주염력)이라 불리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타인의 신체를 손상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가축을 해칠 수도 있었고, 자연을 거슬러 젖소의 젖이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버터나 치즈나 맥주의 실내제조를 좌절시킬 수도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주술혐의를 받은 활동은 대체로 이런 죄목들 중 하나에 속했다."(11-3)


"중세 말에 이르면 유럽은 다른 원시주민들의 주술신앙과는 구별되는 주술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주술사의 능력이란 악마와 계획적인 밀약을 맺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녀는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적에게 앙갚음할 초자연적 수단을 얻는 것으로 믿어졌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주술의 본질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숭배라는 이단성에 있었다. 주술이 오래전부터 기독교 이단이라는 최악의 죄로 취급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숙적에게 충성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주염력'은 부차적 활동, 즉 그 거짓 종교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타인을 해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주술사는 하나님을 배신한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자였다. 바로 이런 개념에 의존해 제례 형태의 악마숭배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정립되었고, 이는 특히 주술사들이 함께 모여 그들의 주인에게 경배하고 그와 성행위하는 야간집회, 즉 '사바스'를 겨냥한 것이었다."(16-7)


"그러나 주술을 악마와의 밀약에 기인한 능력으로 보는 편협한 신학적 정의는 잉글랜드에서 완승을 거둔 적이 없었다. 많은 영어 논고들 및 주요 판례보고서들을 통해 대륙적 관점이 널리 보급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조차 그러했다." "비록 법원에서는 대륙 노선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편파성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민간에서의 주술 개념은 결코 악마숭배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이 시골마을에서 고발을 자극한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에게 '주술'의 본령은 여전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능력이었다." "대륙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백주술과 흑주술을 싸잡아 비판하는 태도는 민간신앙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에식스의 성직자 조지 기퍼드가 1587년에 강조했듯이, 주술사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심은 악마와의 가상된 제휴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증오심이 아니라, 이웃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심이었다."(34-5)


15장 주술과 종교


"당시 종교가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인간적이고 내재적인 악마라는 관념을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악마와의 밀약을 다룬 이야기들도 유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탄은 원래 구약성경에서는 중요성이 덜했으나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에 의해 우주 내 하나님의 강력한 적수라는 위상으로 제고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정교하고 세련된 악마론을 개발했던바, 대중에게는 그것이 한층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형태로 스며들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이런 악마 개념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오래전에 소멸되었다. 하지만 기성 종교가 전력을 다해 인간적 사탄의 관념을 형성해온 수세기를 거친 16세기에는, 사탄을 가장 심지 굳은 마음마저 장악할 만큼 강력한 현실성과 직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개념을 약화시켰다기보다 강화시켰음이 거의 분명하다. 루터 자신이 가시적인 현실세계와 육신은 전적으로 이승의 주인인 마왕의 소유물인 것처럼 자주 언급했다."(74-6)


"악의 화신에 대한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대한 신 존재 증명들 중 하나로 격상될 만큼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 교리를 부정하면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은 유일신 개념이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일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마왕은 완전한 신격이라는 개념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신의 화신과 악의 화신이 동일한 토대에 의존했던 만큼, 그 두 개념은 불가분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마왕이 실재함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가까운 성질을 띠고 있었다." "어디든 악마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기여했다. 낯선 질병이나 동기 없는 범죄나 이채로운 성공에 대해 사탄은 편리한 설명 수단이었다." "사탄이 일상사에 개입한 일화들은 성직자들, 특히 퓨리탄 성직자들이 신도교화용으로 퍼트린 '심판' 및 '섭리'에 관한 이야기들과 동일한 목적에 기여했다."(86-8)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살아간 사람들 대다수에게 악령의 존재는 여전히 생생한 현실이었다. 성직자들이 악령을 막는 전통적 보호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금식과 기도를 신봉한 프로테스탄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국교회에 속한] 프로테스탄트들은 퇴마능력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수수방관했던 것 같다. 일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무속인들과 마법사들에게 의존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악마추방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특권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당시 식자층이, 이를테면 존 셀던처럼 퇴마의례란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현란한 요술에 불과하다〉고 냉소하기는 쉬웠지만,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은 퓨리턴들이나 가톨릭교도들에 비해 국교도들이 훨씬 약했다. 실제로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사제의 마술능력에 대한 농민들의 믿음이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116-7)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은 일관된 신앙심이 인간 영혼에 대한 마왕의 공격을 빈틈없이 막아주지만 인간 육신과 재화에는 그런 보호막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왕이 인간의 물질적 재화를 강탈하면서 추구하는 진짜 목적은 그의 신앙심을 약화시켜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배신해야겠다고 변심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저주염력'은 사탄이 인간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임시로 제공하는 미끼였다. 마왕의 희생양은 마왕의 물질적 공격을 피하려고 마술에 의존하며, 일시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끔찍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욥(Job)처럼 굳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재화와 육신이 철저히 파괴되더라도, 그의 영혼은 오히려 그 역경을 거쳐 더욱 단단해지지 않았던가." "따라서 저주염력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행동은 수동적 인내였고, 마왕이 사람 몸이나 재화에 무슨 짓을 하든 결코 불멸의 영혼만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인내를 뒷받침해야 했다."(125-6)


"종교는 확실한 보호책을 내놓지 못하면서도 대항마술을 금했다. 따라서 주술에 의한 피해를 저지하는 최종 책임은 법원 몫으로 돌아갔고, 주술사에 대한 법적 기소는 자칫 총체적 난관으로 치달을지 모를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 되었다." "중세인들도 주술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교회의 마술적 대책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감도 그만큼 강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사람들은 교회의 처방을 준수하는 한, 주술사에게 피해를 입을 일이 없었다. 교회 처방을 준수하지 않으면 불평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교회마술에 대한 신뢰는 주술사 기소를 저지한 것이기도 했다. 레키는, 〈사람들이 별 변화 없이 미신에 물들어 있었더라면, 그들의 미신은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주술을 막아 준 장벽은 크게 위축되었다. 교회마술이 산산조각 나면서, 이제 막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주술의 위험에 대해, 사회는 법적 조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29-30)


16장 주술사 만들기


"(특정한 유형의) 저주에 효험이 있다는 지속적 믿음의 진정한 원천은 신학이 아니라 민심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은 비록 저주의례의 적절성과 효험 모두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저주를 유발한 가해 정도가 지나치게 가증스러우면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지지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 무엇보다 효과를 발휘한다고 여겨진 것은 가난한 자와 상처받은 자의 저주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모든 저주들이 예외 없이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극적 효과를 노린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에게는 없어도 가난한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에게만은 그런 보복능력이 있다는 믿음,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필연이었다. 이렇듯 튜더-스튜어트 시대의 종교이념들은 사회 하층민들이 발하는 저주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법원기록이 보여주듯이, 저주와 기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극히 애매했고, 저주는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142-8)


"저주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좌절과 무력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휴 래티머는 우리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일부는 무속인을 찾아가며, 〈또 일부는 욕하고 저주한다〉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가 초자연적 응징을 비는 대안에 의지했던 것은, 그가 너무 약해서 혼자로는 더 이상 확실하게 복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저주란 약자가 강자에게 사용한 것이었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었다. 부친의 저주라는 두려운 무기가 적용된 것은, 자녀의 머리가 커져 부모의 일상적 통제수단을 벗어났을 때였다. 거지가 적선을 거부한 부자에게 달려드는 것은 일상적 구걸이 실패로 끝났을 때였다. 가난한 자들의 전형적인 죄는 〈그들이 스스로 바란 만큼 얻지 못했을 때 내뱉는 욕설과 저주〉였다. 단지 악의만으로는 그런 저주가 나올 수 없었다." "이웃의 적대감에 직면해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대안적 보상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의례형 저주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151-2)


"사법 관련 기록은 고발된 주술사들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준다. 첫째는 그들이 가난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들이 대체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높은 학식을 지닌 권위자들은 더 심약한 성별이 사탄의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백들이 한 목소리로, 피고인들이 대체로 무기력과 절망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의 가장 공통된 동기는 한없는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라 여겨졌다. 마왕은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약속했다." "홉킨스의 일부 희생자들의 자백들을 검토해 보면, 빈곤만이 아니라 종교적 좌절감도 마왕의 유혹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왕은 메리 베케트 앞에 나타나 그녀의 죄가 너무 커서 〈그녀를 위한 천국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적 강박과 물질적 빈곤이 결합해서 야기한 절망감은, 이단적인 구원수단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키울 수 있었다."(172-5)


"튜더-스튜어트 시대 마을생활 기록들이 남긴 단 하나의 인상이 있다면, 그것은 마을 여론의 독재, 그리고 사회부적응이나 사회적 일탈에 대한 불관용이었다. 시골 사회에는 개인의 권리, 사생활 같은 현대적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골 풍습은 기쁜 일과 슬픈 일, 결혼과 장례를 공동체 전원이 공유할 것을 요구했다. 휴일 관념도 없었다. 개개인의 가장 사사로운 일조차 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관심사라는 견해에 도전하는 것도 일체 없었다." "이웃 여론의 중요성은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되었다. 나쁜 평판은 교회법상 기소사유가 되기에 충분했거니와, 관습법 법원에서도 배심원들을 불편부당한 심사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죄인과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마을 내에서 죄인의 전반적 위상을 잘 아는 주민들일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었다." "주술사는 마을공동체가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고자 일관되게 가혹한 조치를 취해온 악의적인 자나 부적응자의 극단적 사례였다."(186-91)


"공동체 내 나머지 성원들과 사이가 틀어져 외톨이가 된 노파에게는, 단 하나의 또다른 복수수단, 주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잘 발각되지 않는 수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방화였다. 다른 시대에도 마찬가지지만, 17세기에 방화는 이웃에게 해를 입었다고 믿는 자들의 흔한 보복수단이었다. 그것은 큰 체력이나 재원을 요구하지 않았고 은폐하기도 쉬웠다. 그렇지만 불길은 일단 발화되면 쉽게 번진다는 점에서, 방화는 무차별적인 보복수단이기도 했다." "방화나 악담, 주술 같은 저항들이 얼마나 비효과적이었는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다. 주술사도 방화범도 자신의 생활고를 이웃주민들의 인격적 결함 탓으로 돌렸을 뿐, 개인과 무관한 사회적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쇄신이나 사회개편을 추구하기보다, 타인에게 사적인 위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고난을 앙갚음하려 했다.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가 결국 그것에 의해 폐기되었다."(194-7)


17장 주술과 사회환경


"주술은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일상생활 속 불행들을 설명해 주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돌연사한 자식, 잃어버린 암소, 일상 가정사에서의 이런저런 실패들, 이 모든 예기치 못한 재난들은 어떤 악의적인 이웃의 영향 탓으로 돌려질 수 있었다. 딱히 주술 탓으로 돌리지 못할 개인적 불행의 유형 같은 것은 없었기에, 때로 피해목록은 잡다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초자연적 설명이 특별한 매력을 발휘한 것은, 위험의 다양함에 비해 인간의 무능력이 너무도 뚜렷한 의료영역이었다. 예컨대, 오늘날 암이나 심장병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돌연사들에 대해 당시에는 만족할 만한 설명방법이 없었다." "병의 원인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식의 설명에서 만족을 느낀 것은 서민들만이 아니었다. 주술 신앙은 당시 개업의들이 약점을 감추는 데도 일조했다." "당시 의사들이 주술이라는 진단을 암시하거나 확인해 준 사례들은 문헌사료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들만 추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200-2)


"물론, 불행에 대한 설명대안들 중 가장 명백한 것은, 불행이란 죄를 처벌하기 위해, 혹은 신자를 시험하기 위해, 혹은 알 수는 없으나 틀림없이 정당한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야기해온 것이라는 신학적 견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편안히 받아들일 만한 교리가 아니었다." "불행에 대한 신학적 설명에서 가장 큰 난점은, 점성술적 설명을 위시한 여러 설명들과 공유한 난점으로, 진단이 주어져도 시정할 수단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하나님께 구제를 기도할 수는 있어도 확실한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어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술신앙의 매력은 바로 그 시정의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각자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개인화함으로써 상황을 시정할 수 있었다. 우선, 상투적인 마술적 보호수단들 중 하나를 이용해서 닥쳐올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주술사가 이미 공격하고 난 이후라면, 그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주문(呪文)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항주물들도 많이 있었다."(213-5)


"주술사 사건들에서, 최초 고발로부터 최종판결에 이르는 모든 절차가 매 단계마다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있으니, 사람들은 이미 참이라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법절차에서 피고 측은 죄목이 무엇이든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지만, 주술 유죄판결에 필요한 증거기준은 특히 부실했다. 17세기 악마론자들은 그 기준을 높이려 했지만, 주술이라는 불능범죄에서 단순한 〈추정〉과 확실한 〈증명〉을 구별하려 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수준에서는 용의자의 유죄를 손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마왕의 낙인을 조사해 보면, 그녀의 몸은 반점이나 사마귀를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 안 보인다면, 그녀가 잘라내 버렸거나, 마술로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마왕의 낙인은 신비롭게도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술사가 자백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백을 거부하면 그녀에게는 위증죄가 추가되었다."(228-9)


"옛 장원체계는 고유한 구빈시스템에 의해 과부들과 노인들을 성심으로 배려했다. 빈민에 대해서도 지역마다 다양한 관습적 특혜들이 있었다. 하지만 튜더-스튜어트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배려들 중 다수가 쇠퇴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구증가는 많은 관습적인 소작인 권리들을 파괴하는 압력으로 작용해, 공유지 점유를 초래했고 경쟁적인 소작료 인상을 가져왔다." "공동체 내 빈민층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있었던 것과 동시에, 상부상조라는 오랜 전통도 침식되고 있었다. 토지 확장, 가격 상승, 농경전문화의 진척, 도시 성장, 상업적 가치의 증가 등 새로운 경제적 발전 때문이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영주법원과 종교 길드들이 과거에 제공했던 마을 갈등 해소 메커니즘들도 소멸되었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들이 분열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믿었고, 이를 중세의 사라져 버린 조화로움과 대조했다. 일례로 로버트 버튼은 소송사건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을 오랜 사회적 유대들이 쇠퇴한 탓으로 돌렸다."(248-50)


18장 주술의 쇠퇴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는 주술 기소도 현저히 줄었고 주술적 범죄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확산되었다." "주도적인 회의론 저자들은, 주술이 악마숭배라는 '대륙적' 관점은 성경에 정당한 근거를 둔 것이 아니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사탄의 대중적 이미지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았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회의론자들은 당시의 새로운 철학 조류로부터도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데카르트 추종자들과 토마스 홉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무형적 실체라는 개념 자체를 용어모순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악마들을 자연세계 밖으로 쫓아냈다." "주술 기소 반대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왕에게 아무 세속적 권력도 없다는 교리였다. 마왕은 육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그의 공격은 영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다." "공위기에 여러 신흥종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조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마왕은 억압된 욕망을 표상할 뿐, 정말로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이 될 수는 없었다."(263-6)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해석은 정통파 집단들 사이에서도 한층 수용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 경은 악령이란 마음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교 스틸링플리트는, 기독교 도래 이전에는 악마들이 물리적 힘을 행사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그들 자신에서든 자식들에서든 재화에서든 더 이상 악마들로부터 해를 입을 리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추세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지옥의 몰락이었다. 많은 17세기 지식인들은 육체적 고통의 특화된 장소로서의 지옥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어떤 정신상태, 즉 내면의 지옥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왕을 지옥 왕국에서 추방한 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사들이 마왕과 밀약을 맺을 가능성을 논박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어떤 노파가 마왕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하더라도,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초자연적 능력이 주입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266-8)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가 두 방면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첫째는 우주란 질서 있고 규칙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이나 마왕이 무시로 개입해 뒤바꿀 수 없다는 가정이었다. 이런 세계관은 새로운 기계론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신학자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진척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질서정연하게 일하시며, 인간의 연구로 접근가능한 자연적 원인들을 이용해 역사하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적을 논하는 것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회의론적 태도를 뒷받침한 두 번째 가정은, 이제껏 미궁으로 남은 일들도 하루 안에 자연적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확신이었다." "17세기에 과학자들이 이룬 진보는 거의 모든 동시대인들이 자연지식의 응용력을 자각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일부 동시대인들에게는 인류의 미래 성장 잠재력에 대한 엄청난 확신을 심어 줄 정도로 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주술이 수행해온 설명 역할을 추호도 미련 없이 폐기할 수 있게 해 주었다."(276-8)


"회의론적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유행한 신플라톤주의 우주관, 즉 수많은 비가시적이고 은비한 영향력들이 교차하는 우주라는 개념으로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 많은 저자들이 주술을 회의했던 것은, 주술 외의 다른 문제에서 경박한 믿음을 유지한 덕이었다. 그들은 감응치료나 원거리 작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광석은 숨은 속성들을 갖는다, 사체는 살인자가 접근하면 피를 흘릴 수 있다, 눈에서 어떤 빛을 방출해 다른 사람을 〈흘릴〉 수 있다고 믿어졌다. 존 웹스터가 주술을 회의하면서도, 무기연고, 별의 영(星靈), 사티로스, 피그미, 인어, 바다괴물 등을 믿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회의론자들이 신비한 사건들에 대한 설명수단에서 주술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현상으로 가정한 범위가 그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학풍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훨씬 쉽게 주술사의 저주염력을 〈자연적 원인에 의해〉 설명할 수 있었다."(278-9)


"이러한 지적인 원인 못지않은 사회적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자주 주술사 고발을 일으켰던 자선과 개인주의 간 갈등이 17세기 후반부터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 구빈법이 체계를 갖추면서, 빈민구제가 법적 의무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빈민구제는 더 이상 도덕적 의무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주술혐의를 유발했던 사회적 긴장과 죄책감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빈손으로 쫓아 돌려보내도 그의 양심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다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자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술고발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라면 그가 느꼈을 양심의 가책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필요가 없었다. 주술고발은 상부상조라는 공동체적 규범과 자조(自助)라는 개인주의적 윤리 간의 갈등을 반영했다. 그렇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갈등은 거의 해소되고 있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주술고발을 자극해온 요인 자체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84-6)


제6부 관련 믿음들


19장 유령들과 정령들


"가톨릭 신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반동종교개혁 이론가들은 영혼들이 몸을 떠나면 세 범주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첫째 범주와 둘째 범주는 구원받은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로, 이들이 되돌아올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셋째 범주는 연옥에 배정된 자들로 구성되는데, 가톨릭교시에 따르면 이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되돌려질 수 있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유령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교회의 사기와 기만에서 나온 결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치는 허깨비들은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들이 영적 존재들로 인정될 수는 있으나 몸을 떠난 영혼들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극히 드물게만 선한 영들이요, 대체로는 마왕이 덫을 놓아 사람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보낸 사악한 영들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이 믿을 만한 존재들인지는 엄밀하게 검증되어야만 했다. 단호한 회의적 태도만이 그것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대책이었다."(294-5)


"그렇지만 대체로 신학자들은 가시적인 영들의 완전 폐기를 꺼렸다. 그들이 유령이라는 개념에 공감을 표한 것은, 무신론이 가톨릭교회보다도 참된 종교에 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랠프 커드워스가 지적했듯이,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무신론자를 막는 보루였다. 〈일단 가시적인 유령들이나 영들이 영원한 존재들로 인정되기만 하면, 그들과 세상 전체를 관장하는 유일하고 지고한 영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손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보스웰의 《존슨 전기》에 수집된 이야기들이 보여주듯이, 18세기 많은 지식인들에게 유령의 존재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이 아무리 그들을 비웃었을지라도 말이다." "심오한 철학수준에서는 그 출현가능성이 신플라톤주의자들, 파라켈수스주의자들, 뵈메주의자들 등의 비학(秘學) 이론들에서 생생하게 유지되었다. 그들이 믿기에, 육체가 소멸되어도 별로부터 온 영은 그 주변을 계속 맴돈다는 것이었다."(298-300)


"당시 사람들은 유령을 위시한 허깨비들이 실존한다고 배웠기에 그것들을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유령은 아무 곳이나 정처 없이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뭔가 목적을 갖고 등장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결론내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주술사들처럼 유령들도 늘 동기를 갖고 움직였고,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일례로 셰익스피어 희곡들에서 많은 유령들은 늘 어떤 목적을 갖고 등장한다. 그들은 보복수단이나 보호수단이 되기도 하고, 예언하기도 하며, 제대로 된 매장을 염원하기도 한다. 그들은 늘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유령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코미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거니와, 18세기 이전에는 가벼운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 편에서 보면, 유령에 대한 믿음이 수행한 역할은 한층 뚜렷해진다. 그 믿음은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범죄를 막는 추가 억지수단이 될 수 있었다."(308-13)


"유령은 윤리기준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화목한 인간관계를 편들고 죄인의 잠을 방해했다. 하지만 유령은 조상을 향한 의무를 강화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망자를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 유해를 훼손하거나 유언에서 원한 바를 이행치 않으려는 자들을 포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유령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런 기능이 모든 사회들에서 똑같이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중세 가톨릭교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지 않으면 그 영혼이 연옥에 머물게 된다고 믿었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각 세대가 앞 세대의 영적 운명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 모든 개개인은 각기 대차대조표를 유지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후손들의 기도에 의해 속죄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이제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의 관계를 철저히 원자론적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조상의 명복을 우선시한 의례집행에 그토록 많은 재원을 할애하지 않게 되었다."(320-3)


20장 시간과 징조


"길일과 흉일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 고전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불용일'을 유지했고, 중국을 위시한 고대 동양에도 비슷한 개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길흉일에 대한 관념은 산업화 이전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중세교회는 시간들 각각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한 이런 미신들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연중 모든 날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장본인이었다. 시간이 균질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강화한 면에서 교회력(敎會曆)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에조차 교회 역년(曆年)은 일자에 따라 금해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로 점철되었다. 모든 금요일들과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한 것은 특정 시점에 특유한 식습관을 조장했다. 모든 노동이 금지된 성인축일들은 시골 주민들 삶에서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따. 1년이 축일들을 경계로 분할되어, 어떤 과업이 연중 어느 시점에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더욱 편리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345-50)


# 불용일(不容日)은 국가의 공식행사가 열려서는 안 되는 날을 뜻한다.


"퓨리턴들은 교회축제들로 불규칙하게 점철된 전통 교회력 대신에, 6일간의 규칙적 일과와 뒤이은 하루의 안식일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17세기 말에 이르면 사회 전체가 고루 받아들이게 되었다. 노동습관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는, 사회가 점차 비균질적이고 불규칙한 원시적 시간감각을 포기하고 시간이 균질적으로 운동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 안식일이 모든 일과가 금지된 금기일로 출발했던 것처럼, 퓨리턴들 사이에서도 일요일은 철두철미하게 준수되어야 할 엄격한 규칙으로 출발했다. 아무리 불편해도 상관이 없었다." "1651년 서리에서 어떤 젠틀맨 장례식 설교를 위해 초청된 목회자는 고인이 일요일에 병에 걸리자 의사를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노라고 칭송했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합리적 계산에서 안식일을 지킨 측면은 그보다 훨씬 원시적인 가정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357-8)


결론


21장 상호연관성


"종교, 점성술, 마술은 어떻게 불행을 피할 것인지,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가르침으로써, 일상문제들에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 요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종교가 폄하되거나 마술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당시 기독교는 인간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기독교의 정교한 자기충족적 의례들은 인간 경험을 전체적으로 반영하는 상징체계를 형성했는데, 이 상징체계가 사회와 심리에 영향을 미친 범위는, 기독교의 마술적 측면들이 적용된 특수하고 제한된 범위를 훨씬 능가했다. 잉글랜드에서 민간마술이 수행한 기능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주술을 막는 보호를 제공했고, 질병, 도난, 불행한 인간관계 등에 대해 다양한 치료법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민간마술은 포괄적 세계관을 제시한 적도, 인간존재를 설명하거나 내세를 약속한 적도 없었다. 기독교 신앙이 삶의 구석구석을 지도한 원리였다면, 마술은 갖가지 구체적 난관들을 극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383-4)


"불행에 대한 비종교적 설명들은 대체로 신학자들과 동일한 윤리적 가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통은 누군가의 도덕적 과오에 기인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특히 고통받는 자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기인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목회자들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받는 고통은 받을 만하기에 받는 것이라는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마찬가지로, 정령들과 유령들도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강했다. 본인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 있는 주술조차도, 피해자 자신에게 어느 정도 도덕적 자책감이 없다면 이용하기 힘들었다. 이렇듯 불행과 죄책감 사이에 함축된 상관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도덕적 과오를 반성하게 함으로써, 기존 사회규범들 강화에 일조했다. 이 점에서 마술과 종교는 공히 중요한 사회 통제수단이 될 수 있었다."(386)


"비록 이 책에서 다룬 시대는 종교가 마술에 승리한 것으로 끝났지만, 승리한 종교는 처음과는 다른 종교였다. 이제 성직자들은 점차 불행한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길 꺼리게 되었고, 보상 없는 고통도 흔하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스코트는 불행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자들에 대한 논박을, 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욥은 무고했으나 하나님만이 아는 불가해한 목적을 위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자연신학이 이룬 업적은 바로 죄와 불행을 잇는 고리를 최종적으로 끊어 버린 점이었다. 죄와 불행을 연관 짓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한 많은 원시적 믿음들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이런 변화에 편승해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정통교리와 편안하게 동행할 수 있었다." "마왕이 지옥에 유폐된 것만큼 하나님도 자연원인들을 통해서만 역사하는 존재로 제한되었다. 〈특별섭리〉나 개인적 계시는 자연법칙을 지키는 섭리 개념에 굴복했다."(389-90)


22장 마술의 쇠퇴


"마술의 쇠퇴를 가져온 한 가지 조건은 17세기 과학·철학혁명을 이룬 일련의 지적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식자(識者) 엘리트층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일반대중의 사고와 행동으로 영향력을 확장해갔다. 그 혁명의 핵심은 기계론 철학의 승리였다. 기계론 철학은 중세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자리를 넘보던 신플라톤주의 이론도 거부했다. 소우주 이론이 붕괴하면서, 점성술, 수상술, 연금술, 관상술, 점성마술 등 관련 마술들의 지적 토대도 모두 파괴되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불변적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한다는 관점은 기적 개념에 치명상을 가했고, 기도로 육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약화시켰으며, 신이 직접 계시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위축시켰다. 데카르트의 물질 개념은 악령이든 신령이든 모든 영들을 영계에 유폐시켰는데, 영을 불러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의미한 야망이 될 수 없었다."(396)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합리주의적' 태도는 갈릴레오나 뉴턴의 작업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16세기 초 파도바학파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피에트로 폼포나치는 자연세계 규칙성, 기적 불가능성, 영혼 필멸성 등을 주장했으며, 이런 주장은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자유사상가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이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은 새로운 과학이라기보다 고전고대 합리주의적 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종교적 설명이나 마술적 설명이 쇠퇴하면서 발생한 공백을, '자연적'이기는 해도 그릇된 원인들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감-반감 같은 신비한 영향력에 의존한 설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온갖 경이로운 것들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연인식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과학혁명이 한 일은, 바로 이 같은 추론 방식을 극복하고 기계론 철학에 기초한 훨씬 안정적인 지적 토대로 고대 합리주의적 태도에 버팀목을 제공한 것이었다."(403-5)


"주술사, 유령, 하나님 섭리 같은 견지에서 불행을 설명하는 신비주의 설명법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도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 못지않게 중요했다. 갓 태어난 경제학과 사회학은 이 기간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곤경은 개인 외적인 원인들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 인적·계급적 차이는 교육 및 사회제도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자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으로 통했다. 그것은 계몽운동의 핵심 주제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과학 분과들은 점성술의 설명력을 대체해갔다. 사회현상이 우연히, 제멋대로 발생한다는 관념은 거부되었다. 모든 사건에는 숨어 있을지언정 뭔가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베이컨은 '포르투나'(운명)을 비존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제 운명은 새로운 역사법칙으로 대체될 터였다." "제임스 해링턴은 〈땅이나 하늘뿐만 사회에도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연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420-1)


"역설적이게도 잉글랜드에서는 적절한 기술적 해법이 마술을 대체하기 이전에 이미 마술은 매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마술을 포기한 것이 기술의 분출을 가져왔지, 그 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17세기에 진행된 것은 기술적 변화라기보다 정신적 변화였다." "이 새로운 기대를 구체화한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염원하는 것들'을 열거한 목록에는, 수명연장, 회춘, 불치병 치료, 고통 경감, 자연과정 단축, 새로운 식량자원 발견, 날씨 통제, 감각적 쾌락 증진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점복이 자연에 근거하기를 원했다." "그가 염원한 것은 점성술사나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염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설계한 방법론은 달랐다. 베이컨은 저들의 비밀주의 관행을 혐오했다. 저들의 믿음은 〈인간 이성보다는 인간 상상력에 협력하고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목적하거나 표방하는 것들〉만은 〈고귀하다〉는 점을 인정했다."(424, 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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