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3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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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환경


"튜더와 스튜어트 시대의 잉글랜드는 한편으로는 영양부족과 무지에 시달린 인구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한 저개발 사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문필문화를 꽃피우고 과학과 지적 활동에서 전대미문의 흥분을 경험한 사회였다." "이 시대는 희곡, 시, 산문, 건축학, 신학, 수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문헌학, 기타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엄청난 창조활동이 분출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인구의 압도적 다수(17세기 중반에 성인 남성의 2분의 1에서 3분의 2 사이)는 여전히 문맹이거나 기호로 서명하는 수준이었다. 생계, 교육수준, 지적 감수성에서 이토록 큰 편차는 당시의 잉글랜드를 다양한 사회로, 그만큼 일반화하기 힘든 사회로 만든다. 16~17세기 내내 조건이 변화했는데, 그 기간 내의 어떠한 시점에서든 다수의 이질적 신앙체계가 존재했고 지적 정교함의 수준도 가지가지였다. 더욱이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공간상 먼 사회나 시간상 먼 고대로부터 유입된 다양한 사고체계가 유지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31-2)


# 튜더 왕조(1485-1603)와 스튜어트 왕조(1603-1714)


"이런 공동체[소규모의 동질적 공동체]에서는 모든 주민이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며 다른 사회로부터 유입된 믿음은 별로 없다. 반면에 역사가가 떠안는 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통일적인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도 무한히 다양한 사회이다. 그것은 사회적·지적 변화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사회요, 무수한 세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사회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신앙체계들도 다양한 사회적·지적 층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신앙체계들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불행을 설명하고 줄이는 데 골몰했다는 점이다. 공통 관심사가 그러했다는 것은 환경이 매우 불안정하고 위협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은 환경적 위협이 그런 신앙체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대다수는 오래전부터 전승되었으며, 그것들이 만개한 사회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7세기 환경에서 몇몇 고유한 특징이 그 신앙세계들에 덧칠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33)


"이 시대의 사회환경에서 빈곤과 질병과 돌발 재난은 만성화된 특징이었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처한다면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은 시대착오의 오류이다. 튜더-스튜어트 시대 잉글랜드에서 질병과 낮은 기대수명은 친숙한 일상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유아기에 잃을 수도 있음을 잘 알았기에,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야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부는 한쪽이 죽은 후에야 남은 다른 쪽이 재혼한다는 관념에 익숙했다. 빈민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토아 철인처럼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많은 부르주아 논평자들이 페스트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불감증을 언급했으며, 사람들이 자기 안전을 위한 규제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빈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식량을 구하려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당시 정치적 급진주의에는 거의 기여한 것이 없었고,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58)


제1부 종교


2장 중세교회의 마술


"종교가 초자연적 수단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지상의 생활환경을 통제할 수단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도 이런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라는 신생 종교로의 개종은 개종자들의 기대에 자주 의존했다. 개종자들은 저승에서의 구원수단만이 아니라 새롭고도 한층 강력한 마술도 얻으려 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 제사장들이 대중 앞에서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켜 바알 신의 숭배자들을 압박하고 무력화하려 부심했듯이, 초대 교회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키고 초자연적 치료를 수행함으로써 추종자 무리를 이끌었다. 신약성경과 교부문학은 이 같은 초자연적 활동이 선교와 개종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은 곧 신성함의 필수불가결한 증거가 되었다. 초자연적 권능은 앵글로색슨 교회의 이교(異敎) 반대투쟁에서 필수적 요소였으며, 선교사들은 기독교 기도문이 이교 주문(呪文)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70)


"중세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진리 독점권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는 전통에 편승하고 있었다. 그 전형을 일찍이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성인(聖人)전기물이었다." "성인숭배는 중세 사회조직의 중요한 일부였고, 모든 교회는 각기 나름대로 수호성인을 모셨다. 강한 지방색은 토템숭배에 가까운 성격을 성인숭배에 부여했다." "이렇듯 어떤 개인을 특정 성인과 엮어 준 것은 지엽적인 충성심이었다. 하지만 성인숭배를 전체적으로 지탱해 준 것은 옛 성인과 성녀가 도덕적 행위의 귀감이요, 초자연적 능력으로 추종자들이 지상에 서 겪는 불행과 재난을 줄여 주는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종교개혁이 임박한 시점에서 기성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다." "성인은 매개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이 그의 간원을 못 들은 체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신자들이 낙관적 기대에 부풀어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71-5)


"퇴마의식으로 정화된 성수는 악령과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질병과 불임 치료제이기도 했고 가옥과 음식에 축복을 비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절차들이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살얼음 걷듯이 만든다고 주장한 신학자는 없었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그 절차들이 단지 영적이나 상징적인 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굳게 믿었다." "성수뿐만 아니라 교회는 갖가지 예방부적과 기복부적의 사용을 장려했다." "비기독교적 상징물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복음서 성구나 십자가 형상을 종이에 적거나 메달에 새겨 착용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했다. 이런 부적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원래 부활절 양초로 제작되고 교황의 성별을 거쳤던 작은 양초 케이크에는 이제 어린 양과 깃발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이 이미지는 악마의 급습을 막는 수호기능만이 아니라 천둥, 번개, 화재, 익사, 분만 중 사망 등 다양한 위험에 대한 예방기능을 의도한 것이었다."(78-81)


"그러나 중세교회가 의도적으로 정교한 마술체계를 개발해 평신도들에게 전파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문 암송, 성인숭배, 성수 이용, 성호 그리기 같은 의례들은 모두 속박용이 아니라 위무용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영속적 확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시혜자임을 자임했다. 물론 성사들은 집전 사제의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즉, 행해진 일 그 자체로부터 ex opere operato) 효력을 발휘한 것이었고, 따라서 중세 기독교에 현저히 마술적 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성사를 제외한 교회 사업은 대체로 선량한 사제와 경건한 평신도에 의해서만 (즉, 행한 자의 행한 일로부터 ex opere operantis)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교회 사업은 참여한 자들의 영적 조건에 의존했다. 일례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을 지닌 자도 신앙심이 약하면 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1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란 신앙기관인 것 못지않게 마술적 기관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강화한 몇몇 조건을 검토해보면, 첫째는 최종 개종이 남긴 유산이었다. 앵글로색슨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모신 성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이 있음을 강조했으며, 나아가서는 그 성인들이 이교도가 제공한 어떠한 마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예화들을 유포했다." "교회의 마술적 주장을 강화한 또 다른 조건은 교회 스스로 퍼트린 선전이었다. 신학자들은 종교와 미신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었지만, 그들의 〈미신〉 개념은 상당한 융통성을 가진 것이었다."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의례는 미신이고 교회가 수용한 의례는 미신이 아니었다." "신학자들은 그 신비한 권능이 신자를 악령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목한 것은 교회 수중에 있는 대항마술이었다. 교회는 바로 이 대목에서 독점권을 주장했다."(112-6)


3장 종교개혁의 영향


"마술과 종교 간 경계선을 흐린 것이 중세교회였다면, 그 경계선을 다시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 의례의 근간에 잠복한 것으로 보인 마술적 함축을 처음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많든 적든 이용할 수 있다는 교회 주장을 전면 부정했다. 교회가 주관하는 축원, 퇴마, 주문, 성별, 그 어떤 것에도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성직자가 평신도 죄인들에게 내리기로 한 저주도 마찬가지로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법을 위반했다면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저주를 내렸을 것이니 교회가 상관할 바 없으며, 위반하지 않았다면 교회의 저주가 효험이 없을 터였다. 이처럼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하나님이 정한 길을 따라 수행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교회마술을 거부했다. 교회가 도구적 권능을 소유한다는 주장, 교회가 그리스도의 일과 직분을 능동적으로 공유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주장은 부정되었다."(119-22)


"이 모든 것은 가톨릭 핵심교의인 미사에 대한 공격을 예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문과 퇴마에 효험이 없다면, 성변화도 거짓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집트의 어느 마술사도 실천할 수 없었고 감히 비슷한 짓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빵과 포도주를 변성한다는, 명백히 마술적인 권능을 가장하는 것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칼뱅은 교황의 무리가 〈진정으로 효험이 있는 신앙과는 무관하게, 성사들에 미술적 힘이 있음을 가장한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성별된 성체의 기적적인 성변화 의례는 약식추모의례로 대체되었고 성체유보도 중단되었다. 성체배령이나 성체묵상이 세속적 이익과 직결된다는 낡은 관념 역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표적이었다. 성체배령자 수만큼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는 과거의 신중한 태도조차 공격을 받았다. 성찬례에 대한 그들의 처방은 그 해묵은 미신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23-4)


"성사의 마술적 측면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격은 기성 교회 의례들을 현저하게 잠식하였다. 가톨릭교회의 7성사(세례, 견진, 혼례, 미사, 서품, 고해, 종부) 가운데 세례와 미사(성체성사)만이 성사로서의 뚜렷한 특징을 유지했지만, 그 두 성사의 경우에도 중요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47년과 1549년 사이에 교회는 성찬례용 물과 기름과 빵도 모두 폐기했다. 2차 에드워드 기도서에 규정된 환자방문 의례에서는 환자 도유가 생략되었다. 성별된 종이 악마를 쫓는다는 믿음도, 성찬례용 양초와 십자가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포기되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의례만으로 물질적 효험을 기대할 수 없고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이끌어 내거나 강압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견해가 실질적으로 수용되었다. 신흥종파 지도자 존 케인이 적시했듯이, 〈하나님을 위하도록 규정된 성사들이 주물이나 흑마술처럼 ···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130-1)


"프로테스탄티즘은 초대 교회가 유화적인 태도로 수용했던 이교 유산에 대해서도 새로운 투쟁에 착수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교 제민족의 미신들〉이 총결집된 거대 창고로 묘사되었으며, 가톨릭 의례의 대부분은 고대 이교의례의 눈가림식 변형으로 간주되었다. 성수는 로마의 정화수(aqua lustralis)에, 성축일 전야제는 로마의 바커스 축제(Bacchan alia)에, 참회의 화요일은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에, 기원 행진은 로마의 풍년제(ambarvalia)에서 각각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많은 노력이 기울어졌다." "동시대인들에게 뚜렷한 퓨리턴적 특징으로 각인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철저함이었다. 존 해링턴 경이 풍자했듯이, 누군가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독실한 퓨리턴은 〈그런 것은 주술이니 저주받아 마땅하리라〉고 말할 터였다. 사소한 문제조차도, 퓨리턴들은 비기독교적이거나 마술 낌새가 있는 모든 의례, 모든 미신, 모든 관행을 일소하려는 욕망을 표현했다."(146-9)


4장 섭리


"종교개혁 이후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승에서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모든 글들을 관류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연(혹은 운)을 그 가능성마저 부정한 점이었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우연이나 운의 작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던 반면에, 필킹턴 주교 같은 16세기 저자는 우연 따위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보에티우스에서 단테에 이르는 중세 기독교 문학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과 함께 운의 여신 포르투나라는 이교 전통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튜더 시대의 신학자들에게는 운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님 주권에 대한 모독이었다." "삶이란 제비뽑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합목적적 설계가 반영된 것이라는 자각은 이런 양상으로 모든 기독교도의 가슴에 새겨졌다. 뭔가 잘못되면 불운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작용했다고 믿어야 옳을 터였다. 이승의 모든 사건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정연한 질서를 갖는다."(174-6)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특별 섭리─하나님은 서로 다른 갈래의 인과(因果)사슬에 한꺼번에 작용함으로써 동시다발적으로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개념─의 교의에 큰 압박을 가했다. 기계론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저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태초 창조행위에 국한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창조 이후로 세계는 창조주가 처음 작동시킨 법칙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굴러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00년 이전에는 아직 이처럼 정교한 합리화가 필요치 않았다. 세계는 창조주가 원하는 바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전개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제 의지대로 움직일 권리를 위임하고 숨어 버렸다는 '숨은 신'(deus abconditus) 관념은 아직 비난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기적이 가끔 일어날 가능성마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매개 없이) 직접 작용한다는 것은 자연사건의 일상적 작용(규칙성) 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178-9)


"아이러니하게도 곤경과 역경의 경험만큼 인간정신을 종교로 향하게 하는 것은 없었고 세속적 성공보다 큰 신앙의 적은 없었다. 종교는 고통받는 자에게 위안을 주었고 자신감마저 줄 수 있었다." "신성한 섭리의 교리는 자기 확인적 성질을 가진 이론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놓쳐서는 안 될 요점이다. 그 이론은 일단 수용되기만 하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악인이 역경에 처하면 하나님의 처벌임이 분명하지만, 선량한 신자가 괴로움을 당하면 하나님의 시험일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형편이 좋을 때면 자신의 행운을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지, 배교자인 이웃이 자기와 똑같이 잘 산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고난을 수반하지 않은 삶이란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다는 끔찍한 징표일 수도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고통은 하나님이 그 고통을 겪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고단한 삶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181-2)


"무엇보다 신학적 접근이 용이한 것은 발병(發病)이었다. 엘리자베스 기도서는 소교구의 병든 신도를 방문할 때 성직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환자가 자신의 질병─성병이나 전염병이라면 더욱더─이 하나님의 처벌임을 깨닫도록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내과의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해 치료를 시도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내과의의 치료는 하나님이 허용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할 터였다. 1637년에 어떤 성직자는 독자에게 경고조로, 〈물질적 수단에 너무 기대할 것이 아니라 ··· 그 수단을 허용된 만큼 이용하되 하나님을 조심스레 살피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과의가 아니었다. 외과의도 수술 전에 기도해야 하며 [수술 후] 자기 환자가 신앙심 없는 내과의를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대다수 신학자와 윤리개혁가(moralists)는 그렇게 가르쳤다."(188)


"섭리적 역사관의 저변에 깔린 것은 해묵은 믿음─인간의 도덕적 행동과 무시로 변하는 자연환경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모든 국민의 흥망은 하나님의 불가해한 목적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이런 유형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고 자처한 부류였다. 존 폭스를 통해 민간에 널리 영향을 미친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신화에 따르면 잉글랜드인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국민이요, 섭리의 기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선민(選民)이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만든 신화에서 강력한 요소였고 종교개혁 후 1세기에 걸쳐 역사서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 "미덕은 미덕대로, 악덕은 악덕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는 일반적 가정은 당시 윤리의식의 강력한 잣대로 작용했다. '매너의 개혁'을 향한 퓨리턴의 열망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도, 사람이 개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가 직접적이고도 뚜렷하게 이 땅에 내릴 것이라는 확신이었다."(201-3)


"대체로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판과 섭리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섭리에 대한 믿음에 힘을 실어 준 것은 바로 그 주관적 성격이었다. 오직 유리하게 해석될 만한 일화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은 저마다 주님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을 견고히 굳힐 수 있었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는, 세상살이가 보상받을 사람만 보상받고 처벌받은 사람만 처벌받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편적 성향이 놓여 있었다. 결국에는 미덕이 보상을 받고 악덕은 처벌을 비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섭리의 교리는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인간운명에 철두철미한 질서를 부과하려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도덕적 혼란이 자리하던 곳에, 전능한 하나님이 주재하는 질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고안물은 설명체계로서는 완벽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해설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성과 물질적 성공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는 많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231-4)


5장 기도와 예언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신성한 섭리라는 주제에 관해 가르친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사에 간여해 자신의 백성을 돕는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경건한 기독교도가 기도로 간원해서 얻지 못할 유익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론집》은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육신에 속한 것이든 영혼에 속한 것이든 뭔가가 필요하거나 부족할 때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야 마땅할 것인즉 모든 유익한 것을 내려주시는 유일한 시혜자가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같은 간원을 허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의무였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혼자의 노력으로는 최말단의 물질적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날마다 재확인되었다." "이례적 곤경에서 벗어나고 구제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건강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간원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려야 마땅한 것이었다."(245-6)


"1640년에 장기의회가 열리고 교회법원 및 특권법원이 폐지된 후로 전개된 광신적 활동은 그 규모면에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이 기간에 다양한 신흥종파가 왜 그토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프로테스탄트의 고삐 풀린 자제력이 분열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종교집단들은 국교회가 적절히 배려하지 못한 빈민계층의 정치사회적 열망을 대변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신흥종파 교도들이 세속적 문제에 대해 초자연적 해결책을 제공하려 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주역들이 완강히 거부한 초자연적 해결책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고, 중세 가톨릭교회의 기적 의존적인 측면을 부활시켰다. 로마풍의 위계적인 특징까지 부활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언과 신앙치료를 수행했다." "이런 종류의 치료와 퇴마는 종교개혁이 전복시키려 한 바로 그 종교행태로 되돌아간 측면이 있었다."(271-6)


"내란기에 흔한 일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특정인을 편든다고 선포한 환상을 해설함으로써 국왕이나 군지도부에게 로비를 벌이곤 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목표가 항상 뚜렷했던 만큼 그들의 접근방법은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언자는 사적인 개인으로서는 무명인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무소불위의 능력을 내세움으로써, 일시나마 경의를 표하는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권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론이 기득권 유지에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 서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모든 개혁가에게 중차대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개혁가는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구절에서 도덕적·정치적 권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 논증의 오랜 관행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성경인용보다 폭넓은 이용가능성을 가진 것이 바로 계시였다."(299-301)


"왕정복고와 국교회 부활이 비국교회 신흥종파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면서, 예언의 불길은 급속히 잦아들었다. 통치계급은 공위기─찰스 1세 처형 후 왕이 없던 시기─에 있었던 사회무질서가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신흥종파 교도들도 대체로는 스스로 준법정신을 입증하고자 부심했다." "이미 중세에도 종교적 예언을 빙자한 활동을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여긴 예리한 관찰자가 있었다. 17세기에는 이런 태도가 일상화되는 추세였다. 베이컨과 홉스는 생생한 예지몽과 전조예감을 육체적·심리적으로 설명할 길을 모색했다. 주교 스프랫은 질병이 계시라는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흥종파 교도들의 예언능력이나 환시능력은 그들의 금식 및 금욕과 육체적으로 연과된 것임을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16세기에는 자칭 예언자의 주장이 결국 사실무근으로 밝혀질지언정 늘 신중하게 조사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식자층 대다수가 그런 주장을 검증절차 없이 간단한 허풍으로 무시했다."(310-3)


"이런 활동의 일부는 표방된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부수효과 때문에도 존중되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활동을 액면 가치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산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역병퇴치를 위해 합심해 기도한 사람들이 단지 물질적 효과만을 노리고 그런 형식의 마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하니님의 구제를 간원한 것은─비록 그 간원이 받아들여질 것인지 확신하지는 못했겠지만─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또 다른 의도는 공동체에 닥친 위협이 공동체 전체에 야기한 관심사를 한목소리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역병에 대항해 함께 뭉침으로써 사회적 연대감을 증명했으며, (그들이 믿기에) 역병을 야기한 그들의 죄를 함께 고백함으로써 공동체의 윤리규범을 재확인했다. 이 같은 집단표현은 공포심과 무질서를 저지하는 데도 탁월한 수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늘 헛되지 않다. 기도는 명시된 기능만이 아니라 사회학에서 말하는 잠재(latent) 기능도 갖는다."(314)


"성경주석이나 정치철학은 일정한 교육을 요구하는 활동이었기에 상류계급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예언자는 전혀 교육받지 못한 자였다."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믿음은 하층민 급진주의자들에게 자신감과 혁명추동력을 주었다. 유산자들이 그런 믿음을 증오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로서는 어떤 제5왕국파 교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특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맹남과 무식녀의 한 무리가 어두운 예언에 능통한 기술과 미래사건에 대한 예지를 내세우는데, 이런 능력은 가장 박식한 랍비나 가장 유능한 정치가조차 감히 희망하기 힘든 것이다.〉 왕정복고 이후로 지배계급 머릿속에는 종교적 광신과 수평화 운동이 한통속으로 엮였다. 광신과 수평화는 주교 애터베리가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천민의 자포자기식 음모〉라 부른 것의 두 얼굴로 간주되었다. 지배계급은 이제 다시는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319-22)


6장 종교와 사람들


"종교개혁 후 공식 종교가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를 선점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정통성을 결핍한 이 신앙체계들이 보여준 도전 강도는 언뜻 보아도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잉글랜드 국교회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였고 그 사회적 기능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모든 아이는 교회의 품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마을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고 부모나 그의 주인에게 넘겨져 신앙의 걸음마로 교리문답을 익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범죄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도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중세교회가 입장순서를 신중히 정했던 것처럼, 국교회 좌석배치는 소교구민들 간의 사회위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술적 믿음은 종교가 갖춘 제도적 기반도, 체계적 신학도, 윤리규범도, 광범위한 사회기능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종교가 사람들의 충성심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외부의 경쟁자에게 매우 취약했다."(323-7)


"성직자들은 고해성사를 대체할 (설교와 권면 이외의)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서 평신도들이 결단을 내릴 때 영향을 주려 했다. 중세에 고해신부용 매뉴얼의 특징은 결의론(決疑論)으로, 이것은 노련한 신학자들이 제시한 풍부한 사례에 의존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양심사례들〉을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했고, 식자층 독자는 그것들 중 자신이 부닥친 문제와 상황 면에서 가장 유사한 선례를 찾아내 해결책을 배울 수 있었다. 독실한 평신도를 내향화하는 것도 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는 온갖 의문과 불확실한 것을 영적 일기에 담고 기도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평신도를 이끄는 것이었다. 퓨리턴에게 일기나 자서전의 심리적 기능은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기능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개인적 조언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제레미 테일러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언제나 생생한 안내자를 선호하기 마련〉이었다."(336-7)


"세례, 혼례, 거룩한 장례 같은 의례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극빈층 중 다수는 정규 교인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증거로, 어떤 저자는 빈민의 여러 죄목 가운데 〈소교구 교회에 출석해 그들의 의무를 더 잘 듣고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포함시켰다. 18세기 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옥스퍼드셔의 어떤 성직자는 그의 소교구 교회의 축일 출석률이 저조한 이유에 관해, 〈불참석자는 모두가 빈민 노동자로, 법정기준을 초과해 구호품을 지급하지 않고는 그들의 참석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변명했다." "17세기 동안 독실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극히 열세에 놓여 있음을 자각했고, 천민을 참 종교의 최대 적으로 간주했다. 1691년 리처드 백스터는, 〈누군가가 지식과 종교를 박멸할 군대를 모집한다면, 수선공, 개백정, 짐꾼, 거지, 뱃사공 등 글모르는 자들이 앞다투어 그런 군대에 입대할 것〉이라고 외쳤다. 백스터는 〈훨씬 더 많은 주민〉이 실천 신앙을 혐오한다고 생각했다."(340-5)


"회의론의 강한 전염성은 공위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물론 1648년 '신성모독 금지령' 입안자들은 영혼불멸성을 부정하는 자, 성경을 의심하는 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 심지어는 하나님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이단설의 일부는 신흥종파들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소치니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란터파는 영혼불멸성, 부활의 사실성, 성경의 절대적 권위,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부정했다. 이 파는 패밀리스트파와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되 상징적 의미로만 사용했다. 이를테면 사람이 웃을 때가 천당이고 찌푸릴 때가 지옥이라는 식이었다. 지옥은 상상 속에나 존재할 뿐이었다. 리처드 코핀은 〈우리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한에는, 우리에게 지옥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단설들은 결국 종교 전체에 대한 공식 거부로 흘렀다."(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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