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4 -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근대세계체제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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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데올로기로서의 중도적 자유주의


"프랑스 혁명의 지문화(地文化, geoculture) 변화에 대한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반응은 사실 자유주의가 아니라 보수주의였다. 버크와 드 메스트르는 사건이 한창 전개되는 중에, 오늘날까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천으로 남아 있는 책에서 혁명에 대해 즉각적으로 기록했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는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국가권력을 계속 유지하거나 다시 장악해야 하며 국가 기구들이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핵심 수단이었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이상적인 해법은 자유주의적 추진력을 반영하는 운동들의 완전한 소멸이었을 것이다." "보수주의의 지속적인 정치적 강점은 〈주권자 대중〉 속에 개혁에 대한 다양한 환멸을 반복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대중이 가지게 된 신중한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반면, 보수주의의 큰 약점은 항상 그것이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교의(원칙)였다는 점이다."(22-5)


"정치철학으로서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좋은 사회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인민주권의 요구에 관한 메타 전략으로서의 자유주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타고난 어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하고, 흔히 상반되는 이해관계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815년 이후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적 공세의 반대자로 묘사했고, 그 자체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코뱅적〉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기세, 지지, 권위를 얻게 되자, 그것의 좌파 증명서는 약화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우파 증명서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것이 중간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할 예정이었다." "변화라는 정상 상태에 직면하여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능한 한 변화의 속도를 늦추려는 우파─와 〈민주주의자〉(또는 급진파, 사회주의자, 혁명파)─가능한 한 그 속도를 높이려는 좌파─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할 것이었다."(27-9)


"벤담에게 국가는 〈최대 다수의 최대 선(善)〉을 성취하기 위한 완전하고 중립적인 도구였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결코 반(反)국가주의의 메타 전략이거나 이른바 야경국가의 메타 전략도 아니었다. 자유방임에 반대하기는커녕, 〈자유로운 국가 그 자체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국 자유주의는 항상 개인주의라는 양의 가죽을 쓴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하게 확실한 개인주의의 궁극적인 보증인으로서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다. 물론 누군가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개혁을 이타주의로 규정한다면, 두 가지 목표는 양립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개인주의를 자기 자신이 규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개혁을 그 속에서 강자가 약자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동시에 강자가 약자보다 더 쉽게 그들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내재적인 양립 불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2-3)


"사회주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형성되었다. 1848년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아직 그것이 분명한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광범위하게 비난받고 〈자유주의자〉가 다른 역사적 기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영국에서조차 〈급진주의자〉(미래의 〈사회주의자〉)는 처음에 단지 좀더 전투적인 자유주의자들처럼 보였다. 사실 정치 프로그램으로서, 따라서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와 특별히 구별해주는 것은 진보의 성취가 단지 지원이 아니라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는 확신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진보의 성취는 매우 느린 과정일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역사의 경로를 가속하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왜 혁명이라는 단어가 개혁보다 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개혁은 진지하고 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참을성 있는 정치 행위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고, 주로 관망하는 태도를 구체화한다고 인식되었다."(34)


"간단히 말해서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적절한 역사적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단지 누가 인민의 주권을 구현하는가에 대한 탐색에서 요구되는 세 가지 출발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전통적 집단이었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었다. 〈주체〉로서 인민은 가장 중요한 객체로서 국가를 소유했다. 인민이 그 의지를 행사하는 곳, 즉 인민이 주권자인 곳은 국가 내부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 우리는 또한 인민이 〈사회〉를 구성한다고 들어왔다. 우리는 근대성의 거대한 지적 모순(이율배반)을 구성하는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무엇보다 정치적 전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각각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에 국가의 도움과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 판명되었다."(38-9)


2 자유주의 국가의 건설 : 1815-1830년


"1815년 당시의 문제는 1789-1815년의 시기가 〈왕정복고〉와 〈토리 반동〉에 묻히고 만 일종의 혁명적 막간일 뿐이었는지 아니면 인민주권 개념이 오래 지속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것인지 여부였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구분은 막스 벨로프의 말에 따르면, 〈19세기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이었다.〉 19세기의 용례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명사들은 그렇게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인민주권의 구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후 줄곧 유효한 정치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일종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무지하고 변덕스런 대중의 엉뚱한 생각에 굴복하는 불쾌한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명사들에게 문제는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그러나 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였다. 그 작업은 쉽지 않을 터였다. 자유주의 국가가 역사적 해법일 수밖에 없었다."(51-2)


"도시 노동자들은 인민주권의 교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18년에 맨체스터는 〈당대인들에게 동요와 소란의 도시라는 특별한 평판〉을 얻었다. 특히 명사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저항운동의 특성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18세기 말에 여전히 저항운동의 지배적인 방식이었던 지역 차원의 식량 소요는 더 이상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운동은 〈범위에서는 전국적이고, 조직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그들은] 점점 더 [1880년 이후] 새로운 산업 지대와 결부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그 구호가 전반적으로 반산업적인 색조를 띠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과거 지향적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명사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 자체가 진보에 반대하고 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 구성원 내에서 놀랄 만한 조직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다이트는 〈노동계급 자코뱅〉에 맞서 토리와 휘그를 하나로 묶었다."(55-6)


"노동계급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인민주권의 확인과 민족주의의 시대가 머지않아 노동계급의 참정권을 배제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상류층은 이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향락주의조차 기꺼이 희생할 의지가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귀족문화는 사치스런 오락과 여흥, 방탕한 쾌락, 알코올 의존증을 야기하면서 〈광대하고 목가적이며 거만하게 뽐냈다.〉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개인적 습관의 규칙성과 질서, 자기규율, 절제〉를 설교하는 복음주의자들이 떠올랐다. 명사들은 행동 양식(나중에는 빅토리아 풍조로 제도화한)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개종시켜서 그 개종이 암암리에 재사회화─비용이 더 드는 가부장주의 형태를 비용이 덜 드는 형태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전에는 정치적 권리의 확대나 사회적 승인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56)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유럽의 협조체제가 가동되는) 1815년 이래 국경 내에 세계 각지에서 축적된 자본을 집중시키고자 했고, 그들이 얼마나 잘 그렇게 했는지는 단지 부분적으로는 각 기업이 가진 힘과 함수관계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노동 비용을 제한하고 외부 공급의 항구성을 보증하며 적절한 시장을 확보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적 규모에서 두 국가 모두 높은 편이었던 경제적 효율성을 증대하는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과업이었다. 두 국가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그것의 사용은 미묘한 문제였다. 두 국가가 이득을 보증할 뿐 아니라 손상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국가 모두 길들여지고, 다룰 수 있어야 하며 합리적으로 이끌어져야 했다. 후속 60년 동안의 정치는 국가의 역할을 〈합리화〉하려는 노력, 즉 〈국부〉와 특히 국경 내에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의 부를 늘릴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국가의 구조를 미세조정하려는 노력에 집중할 것이었다."(72)


"1815년 직후 영국 정책의 기조는 신중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인들은 보호주의적 조직의 해체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들은 현금 지급의 재개에 신중했다. 식민지와 상업체계에도 신중하게 접근했다.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제국주의에 반대했지만, 〈기존 체제의 갑작스러운 전복〉에도 반대했다.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내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다. 자유시장에는 찬성했지만, 자본 축적을 희생하면서까지는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에 대한 가르침에서조차 신중했다. (이윤 창출이 최우선 과제였던) 영국인들에게 해외의 사회적 변화란 실제로 그것이 경제적으로 불가피했을 때에는 영국인들의 식민화를, 그리고 그것이 영국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유익했을 때에는 다른 국가들이 보유한 식민지들의 탈식민화를 의미했다. 나폴레옹식의 보편주의적 허식이 없는 섬나라의 국민에게 세계는 갑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기회의 장이 되었다."(92-3)


"독립운동에 대한 제한적인 지지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영국의 태도는 발칸 반도와 오스만튀르크 제국까지, 특히 그리스의 경우까지 확대되었다. 영국의 여론은 어쨌든 그다지 문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전제정치에 대한 경멸과 너무 깊이 연루되지 않으려는 신중한 욕구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에번스는 〈연루되지 않은 영향력〉이라는 말로 당시 영국의 외교정책이 유럽에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그렇지만 이 목적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존립원칙이 극도로 불안정한 신성동맹을 궁지에 빠뜨림으로써 그것을 천천히 침식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스 혁명은 1820-1822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혁명과 거의 동시에, 그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신성동맹이 1822년 여전히 〈무시무시한 전조〉에서 1827년 무렵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면, 그것은 주로 그리스 혁명 때문이었다."(95-6)


# 신성동맹Heilige Allianz :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체결한 동맹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1815년 이후 시기는 〈노동계급에게 번영도 풍족함도 가져오지 않았고〉 오히려 대도시를 중심으로 국내 이주가 진행되면서 실업의 악화를 선사했을 따름이다. 사회적으로 노동자들과 도시 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은 엄청났다." "그런 가운데 1820년대 중반에 정치 과정에서 심각한 염증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자유주의적 토리당파가 정권을 잡은 바로 그 순간에 샤를 10세는 국왕(루이 18세)의 요절로 인해서 우연히 1824년 프랑스 왕위에 올라 특히 반동적 관점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인들과의 긴장, 국내에서 심지어 법률을 준수하는 대다수 인민과의 긴장, 그리고 노동계급과의 긴장을 초래했다. 게다가 샤를 10세의 즉위는 1825년에 시작되어 1829년에 크게 악화된 경제적 하강 국면과 시기적으로 겹쳤다. 정치적 경화(硬化)와 경제적 난국의 결합은 폭발적인 경향이 있었고, 직접 1830년의 혁명적 분위기로 이어졌다."(100-1)


"1830년 혁명은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전개된 대중 혁명이었다. 영광의 3일은 곧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에 포획당했고, 자기 자신을 프랑스의 국왕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국왕으로 부를 준비가 되어 있던 루이 필리프와 함께 7월 왕정으로 귀결되었다. 티에르는 〈오를레앙 공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무질서한 군중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구체제의 일부 형태를 진정으로 복구하기를 바라는 과격파에 맞서 7월 왕정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적 형태를 정당화했다. 〈1830년 혁명으로 1789년 혁명에 대한 공격은 마침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경제와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1830년] 혁명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을 신속히 깨달았다. 노동자들이 각성했을지라도 과격파는 낙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7월 왕정이 성공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최소한 초보적 형태였지만 자유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102-5)


"1830년 11월 18일, 벨기에의 국민의회가 (영국과 프랑스의 묵인 아래) 독립을 선언했다. 그것은 폴란드가 아니라 벨기에가 영국-프랑스 모델을 강화하는 데에서 잠재적으로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을 입증해준다. 결국 선택된 왕 레오폴트 1세(재위 1831-1865) 아래 벨기에는 레오폴트 1세가 〈이기주의적 관례〉라고 비난한 〈의회제와 중간계급의 광범위한 합의에 토대를 둔 입헌군주정의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합류했다." "에번스는 이를 〈유럽 외교사에서 자연스런 분기점〉─동유럽의 전제정치, 서유럽의 자유주의 입헌체제─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개념인 〈서부〉의 구체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부자유한 동부〉에 맞서 개인의 자유라는 깃발을 높이 드는 서부의 개념은 19세기 나머지 시기와 20세기를 위한 모범이 될 것이었다."(115)


3 자유주의 국가와 계급 갈등 : 1830-1875년


"19세기 전반기에 개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개념으로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여전히 분리되지 않았거나 라브루스가 말하듯이 〈자코뱅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적 삶 속에 뒤죽박죽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 그 뒤 최소한 한 세기 동안 이 두 개념 사이의 완전한 구별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관용어인 듯하다)와 사회주의는 1830년 이후 정치적인 선택으로서 서로 다른 궤도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급과 계급투쟁의 개념은 카를 마르크스는 말할 것 없고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공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기획의 일환으로 기조가 발전시키고 게속 실행한 생시몽주의의 구상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계급구조에 대한 생시몽의 관점에 따르면, 세 가지 계급, 즉 유산계급(재산 소유자), 무산계급 그리고 학자계급이 존재했다." "기조에게 계급 개념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염원을 정당화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127-8)


"프랑스와 영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들은 이제 산업주의가 배태한 〈사회문제〉가 되었고 특히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즉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화라는 공포〉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생시몽과 기조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될 것이었다. 1830년 혁명 자체는 특히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어려움(높은 실업률, 밀 가격의 비정상적 폭등)의 순간에 찾아왔다. 그것은 정치적 봉기의 유용성에 관한 증거를 제공했고 노동자들의 의식, 즉 〈오직 프롤레타리아로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식, 〈노동자의 자존감〉을 자극하는 데에 기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시 이런 변화를 인지했다. 티에르는 하원에 보내는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혁명 이후 우리는 그것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질서였다.〉"(130)


"자유주의 국가는 중간계급의 정치적 역할을 정당화하고(따라서 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받으면서) 지정학적 영역에서 그들의 지배를 보증하기 위해서 화친 협정에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에 대한 국내적 억압을 결합시켰다. 이는 처음에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48년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취약했다." "그 취약성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유주의적 양보가 극도로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있었고, 만일 더 나아가 심각한 주기적 경기 침체에서 비롯된 혼란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는 자유주의 정부들을 힘겹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7월 왕정과 그 자유주의적 아류인 기조가 싫증나는 사회적 불만에 맞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보수화되고 있던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847-1848년의 경제 위기, 당시까지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위기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를 강타했다. 위기의 절정기에는 파리의 공업노동자 75퍼센트가 실업 상태에 있었다."(139)


"1848년 2월의 봉기는 〈사회적 공화정〉, 즉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빈곤과 불평등에 시달리는 모두에게 해방을 제공할 막연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를 조명했다. 특권과 생산방식을 복원하려는 〈장인〉, 전통적인 집단적 관습을 재확립하려는 농민, 〈보통〉선거권을 확대하려는 여성, 노예제 폐지를 원하는 노예 등 모두가 자신의 주장을 내놓았다. 시계추가 너무 많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6월에 카베냐크 장군이 이끈 질서파가 제어하기 힘든 위험한 계급들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카베냐크는 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국가를 다시 합법화할 수는 없었다. 어떤 군주도 복귀할 수 없었다. 이런 공백 탓에 루이 나폴레옹이 힘들이지 않고 끼어들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롭고 질서가 잡혀 있으며 근대적인 국가를 재건하고자 했고, 젤딘이 잘 표현한 대로 〈[질서파의] 후보였기 때문에 선출된 것이 아니라 질서파가 보기에 틀림없이 승리할 것 같았으므로 그들의 후보가 될〉 인물이었다."(144-5)


"1850년대에는 영국의 수출 신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면포류 수출은 1850년대에 〈거의 두 배가 늘었고〉 실제로 성장률까지도 증가했다. 홉스봄이 주장하듯이 이는 〈매우 귀중한 [정치적] 휴식의 기회〉를 제공했다. 면직물은 여전히 영국의 부에서 핵심을 차지했으나 이 시기에는 금속과 기계류가 주요 공업 분야로 전면에 등장했고 더불어 〈도처에서 더 큰 규모의 공업 생산 단위〉가 출현했다. 분명히 영국은 공업 국가로 변화하는 여정에 들어섰다. 〈진로는 정해졌다.〉 영국에게 이는 〈활황기〉였다. 그동안 세계경제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지배력은 〈사실상 의심할 바 없이 확고해졌고〉 새로운 산업 세계는 〈화산이라기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의 뿔처럼 보였다.〉 영국은 항상 세계경제의 모든 변동을 감시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마음 편히 만족스럽게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누렸다. 영국에서는 이 시기를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호황〉이라고 불렸다."(161-2)


"프랑스에서도 19세기는 강력한 국가의 수립 시기였다. 확실히 국가의 수립은 리슐리외에서 콜베르, 자코뱅파, 나폴레옹, 제한군주정, 제2제정, 제3공화정을 거쳐 제5공화정에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2제정은 중대한 일보전진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수립한 것은 위로부터의 복지국가 원리였다. 제2공화정은 모든 인민의 주권이 〈그들 중 일부가 처한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비참한 열세와 대조를 이루고 상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문제〉를 의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자〉 가운데 첫 인물로서 나폴레옹 3세가 찾으려고 한 것은 〈대중에게 보존할 무엇인가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을 보수적으로 만들〉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프랑스를 자유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기획을 완수할 수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는 자유주의 국가일 뿐 아니라 민족국가였고 19세기 유럽에서 이 두 가지의 동일시를 보증한 것도 바로 프랑스였다."(178-81)


"이론상 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식민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이론적인 차원에 그쳤다. 실제로 영국의 자유주의(그리고 사회주의) 경제학자들과 논객들은 다소 회의를 품었던 일부 시기(1780-1800년, 1860-1880년)가 있었지만, 〈야만인〉(이는 식민지의 백인 정착민들을 포함하지 않았다)에 대한 영국의 제국 지배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점점 더 그것에 호의를 보였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민족자결의 강력한 지지자들조차 (한 민족이 자치정부를 가질 수 있는) 〈적합성〉의 기준을 무리하게 강제했다. 인도는 물론 영국 제국주의 기획의 중심이었다. 베일리가 제대로 주장하듯이, 인도는 처음에는, 그리고 아마 주로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세입의 문제였다."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그에 못지않게 제국주의 국가에 적응했다. 결국 〈인류 진보의 확실성〉을 신뢰하는 많은 다른 이들처럼 생시몽에게 〈동양〉은 여전히 진보의 〈유아기〉에 있다고 생각되었다."(192-4)


"그들이 지배할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수립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큰 실패이기도 했다. 한편에서 양국은 경제적, 군사적 위세를 충분히 신장시켰지만 독일과 미국의 꾸준한 상승세를 막을 수 없었다. 독일과 미국은 실권을 강화하고 이들의 상호 경쟁은 1870년 이후 점점 더 갈등이 고조되는 세계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그들만이 속도를 정하던 방식에서 이제 (적어도 꽤 많은) 참가국들이 자유롭게 〈앞 다투어 쟁탈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획득의 유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는) 세계체제에 자유주의라는 '지문화'를 부과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스마르크는 신성동맹의 언어를 재개할 수 없었고, 그러려는 관심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스마르크와 디즈레일리는 제2제정에서 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것이었고, 실제로 자유주의의 보수적 변형인 개화된 보수주의를 제안했다."(199-200)


"19세기 세계질서의 전환점은 1866-1873년, 즉 〈19세기 후반의 역사가 바뀌는 거대한 경첩(이음새) 같은〉 시기일 것이다. 미국은 연방을 유지했고, 1866년 독일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이라는 대도약에 합류할 참이었다. 1867년 영국의 의회 개혁은 상당히 정확하게 〈한 시대의 종말〉로 비춰졌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폭발과 더불어 1867년 영국의 개혁법은 1815년에 시작된 위험한 계급들─특히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길들이기 과정, 즉 이들을 체제 내로 정치적으로 통합해서 이들이 양국의 기본적인 경제, 정치, 문화 구조를 뒤엎지 않도록 만드는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상징했다." "노동계급을 방어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중간계급에게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보수주의자들은 영국을 더 명백한 자유주의 제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200-4)


4 자유주의 국가의 시민


"불평등이 표준이었을 때, 다른 신분,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구분 이상의 어떤 구분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평등이 공식적 표준이 되었을 때, 누가 실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모든 사람〉, 즉 〈능동〉 시민에 포함되는지를 아는 것이 갑자기 중요해졌다. 평등이 도덕적 원칙으로 선포되면 될수록, 사법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장벽은 그것의 실현을 막기 위해서 더 많이 설치되었다. 시민의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화적 기반을 구성하게 된 긴 이분법 목록의 (지적이고 법률적인) 구체화와 견고화를 강제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여성, 성인과 미성년자, 생계비를 버는 가장과 주부, 다수파와 소수파, 백인과 흑인, 유럽인과 비유럽인, 교육받은 자와 무지한 자, 숙련공과 비숙련공, 전문가와 아마추어, 과학자와 문외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이성애와 동성애, 정상과 비정상, 건강체와 장애인, 그리고 이 다른 모든 것이 암시는 원형의 범주, 즉 문명과 야만."(220-1)


# 시에예스 신부는 신체, 재산, 자유 등을 보호받을 권리(수동 시민의 권리)와 공적 권위의 형성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권리(능동 시민의 권리)를 구분했다.


"19세기에 이른바 중간계급이 서양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문제는 더 이상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자리에 머무를 것이냐였다. 국가 차원에서 중간계급, 전 세계적 차원에서 유럽인들은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본성과 미덕의 계승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렀고, 이 개념은 그들이 기울인 노력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서양 세계에서 그것은 교육으로 바뀌었고 교육은 대중을 통제하는 방식이 되었다.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시작된(그러나 곧이어 다른 모든 유럽 열강들도 채택한) 〈이데올로기로서 문명의 개념은 염치없이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그저 정치적 상징과 문화적 기억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 전체에 기념비적인 유산을 남겼다. 바야흐로 주권은 인민, 달리 말해서 국민의 것이 되었다."(235-6)


"세계체제를 안정시키고 어느 정도의 정치적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불확실한 모색과 노력의 해소를 요구한 것은 바로 1848년의 세계혁명과 그것의 즉각적인 여파였다." "그것은 벨기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가 결집의 계기를 부여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혁명들은 근대세계체제의 첫 번째 세계혁명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또한 혁명가들은 목표를 성취하지도 못했다. 대개 혁명은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혁명은 배제라는 쟁점, 즉 시민권 혜택의 배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반체제 운동의 두 가지 부류, 달리 말해서 이 배제를 다루는 두 가지 별개의 방식─국가 내에서 더 많은 권리를 추구하는 방식(사회혁명)과 지배적인 다른 종족 또는 민족 집단으로부터 특정한 종족 또는 민족 집단을 분리하는 방식(민족주의 혁명)─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목격하게 된 계기가 바로 1848년이었다."(237-40)


"장기적 전략의 문제가 처음으로 분명히 제기된 것 역시 1848년이었다. 1815년부터 1848년까지 이념 투쟁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모든 전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프랑스 혁명 정신의 계승자와 더 오래된 세계관에서 유래한 질서를 회복하고자 열렬히 시도하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투쟁에서 〈민주주의자들〉과 〈급진파〉는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보수주의자들이 끔찍이 혐오하고 자유주의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주목을 끌 수 있도록) 더욱 대담해지도록 압박을 가하면서 기껏해야 쇠파리(잔소리꾼)의 역할을 맡았다. 1848년 혁명들의 역할은 때때로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만 또다른 경우 〈민족주의 혁명가〉라고도 부르는 이 민주주의자/급진파가 귀찮은 존재 이상의 역할을 맡을 수 있게, 그리하여 그들이 자유주의 중도파와는 구별되고 뚜렷이 다른 대중 활동을 조직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었다."(240)


"1848년의 경험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두 가지 교훈을 도출했다. 하나는 그들이 여러모로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보수주의자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 사이에 계속 구별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더 정교하게 고안해야 한다고 결심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교훈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영국이 보수주의자들이 좀더 중도적인 길을 따랐던 유일한 국가로서 적어도 중간계급 세력을 정치적 의사결정의 무대로 흡수하고 끌어들이기 위해서 얼마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급진주의자들(옛 민주주의자)은 훨씬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자발성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자 한다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직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는 일시적 개념인 〈운동〉을 구성원과 지휘관, 재정과 언론, 강령, 그리고 궁극적으로 의회 참여를 동반하는 관료적 조직의 길로 이끌 것이었다."(241-2)


"이 시기 내내, 19-20세기에 걸쳐서도 〈대중에 대한 두려움, 질서에 대한 우려는······항상 지배계급의 행동에 내재하는 고민거리였다.〉 어떤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는 노동계급에게든 지배층에게든 늘 남아 있었다. 지배층의 관점에서는 억압이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그것은 끓어오르는 불을 지피고 결국 반란을 낳는다. 그리하여 1860년대 말에는 나폴레옹 3세와 영국의 보수당 모두 제약을 완화하고 노동자 조직의 존재를 더 가능하게 만들며, 시민권에 대한 실제적 정의를 다소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동자의 시민권 확립이라는 목표는 유럽 대륙의 노동운동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운동의 유일한 목표였다는 것은 잉글랜드에서조차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운동이 성취하게 될 모든 것이고, 이론적 측면에서 자유주의 중도파이자 실천적 측면에서 개화된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거나 요구해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고 설득하고자 노력했다."(254-5)


"전 세계적으로 19세기는 유럽의 절정기였다. 〈유럽 혈통의 백인 남성들이 [이토록] 도전을 덜 받으면서 [세계를] 지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군사력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에 의해서 보증되었다. 〈유럽은 문명이라는 통합적 체계의 건설을 통해서 '유럽화'되었다. 다른 모든 문화권들은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분류될 수 있었다.〉 국가들은 균질적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국민을 만들고자 시도하면서 동시에 생시몽이 옹호한 〈세계의 후진 지역에 맞서 싸우는 성전(聖戰)〉을 통해서 백인(유럽계) 인종을 창출하고자 했다. 성전은 식민화를 수반했다. 〈색깔을 인간 이하의 존재와 결부시키는 태도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개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던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물론 이는 국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조던은 혁명 이후 미국에서 지식인들이 수행한 일은 〈사실상 미국을 백인 남성의 국가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316-7)


5 사회과학으로서의 자유주의


"모든 초창기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자들은 〈사회과학 이론이 결국 사회질서의 재건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며 이는 확실히 정치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경향의 근거지였던 반(反)평등주의적 주장의 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전문화는 대중문화의 허세와 이윤 위주의 사업가들의 협소한 시각 모두를 겨냥했다." "전문적 능력의 권위는 새로운 〈과학의 사회적 조직〉을 요구했다." "이것이 반드시 목표로서 중도적 사회 개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표의 실행을 전문가들에게 더 견고하게 맡겨두는 것이었다. 이는 직접적인 지지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계 인사들에게는 학계 바깥의 저명인사들의 엄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객관적〉 지식, 달리 말해서 오직 과학적인 전문가들이 확립할 수 있었고, 일반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지식의 옷 속에 개혁의 목표들을 숨기는 일이었다. 묘책은 정치적인 듯이 보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이어야 했다."(345-7)


"사회과학의 전문화는 형태상 대학 내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학문 분야들을 확립하고 다양한 분야에 상응하는 전국적인(결국에는 국제적인) 전문/학술조직의 창설을 이끌었다." "새로운 대학 구조에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최초의 학문 분야는 대학의 범주로서 가장 오랜 존재감을 가진 역사학이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일은 역사가들의 저작을 위한 적절한 자료들의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역사서술의 〈과학혁명〉이라고 불리고 레오폴트 폰 랑케의 작업과 두드러지게 연관된다. 우리에게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기록해야 한다는 유명한 강조를 유산으로 남겨준 인물이 바로 랑케였다." "헤릅스트는 랑케식 역사주의의 모순을 이렇게 강조한다. 〈이상주의자로서 그들은 자기 학문 분야와 모든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자율성을 주장한 반면, 경험론자로서 그들은 자연과학의 도구들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353-4)


"랑케 식의 역사학 연구는 그것이 경험적 증거와 연결될 경우에 한해서 타당하다고 간주되었으므로 〈과학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 대다수는 이런 경험적 연구에서 추론될 수 있는 법률과 같은 진술을 찾으려는 어떤 탐색도 거부하면서 이론적 접근에 반대했다." "노빅은 랑케의 〈도덕적 판단을 자제하는 태도가 사심 없이 객관적인 중립을 표명했다기보다 당시의 맥락 속에서 매우 보수적인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정치에 대한 분석을 〈가장 좁은 의미의 사건들〉로 〈축소시키는 것〉은 중도적 자유주의자들의 이해관계에 꽤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가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구성원들이 하나의 〈국민〉으로서 동질감을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고, 그들은 거기에 주된 충성심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창출은 자유로운 국가의 토대로서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국민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를 가져야만 했다."(355-6)


"국민적 정체성을 창출하고 강화하는 일은 자유주의적 의제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강력한 국민적 정체성은 국가를 합법화하고, 계급, 종교, 종족 또는 언어 공동체에 대한 대안적이고 잠재적으로 대립적인 충성심의 정당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순조롭게 기능하고 특히 위험한 계급들의 반자유주의적인 압력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계속 진행 중인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세 가지 법칙정립적 사회과학─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의 기능이 되었다." "이런 분열이 발생한 원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근대성〉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사회구조를 서로 상당히 다른 세 가지 구획으로 차별화하는 것이었다는 자유주의 사상가(보수주의 사상가나 급진주의 사상가가 아니라)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세 가지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분리되어야 했고, 그러므로 아주 명확하게 분석되어야 했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였다."(360-1)


"W. S. 제번스는 1879년에 경제학이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명칭 변경을 제도화한 인물은 앨프리드 마셜이었다." "그렇다면 마셜은 무엇을 제도화했는가? 그것을 서술하는 하나의 방식은 경제학 연구의 초점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명칭의 변경은 가치의 생산과 국부의 분배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에 몰두하는 〈고전파〉 경제학과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했고, 경제학을 교환과 가격 형성의 학문으로 새롭게 재출범시켰다. 지대, 이윤, 임금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의 주체, 즉 지주, 자본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과 분배의 이론 대신에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그 틀 속에서 추상적인 경제적 주체의 계산이 희소 자원의 할당에 영향을 미치는 이론이 되었다. 새로운 가치 이론은 이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었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그들의 욕구는 곧이어 그들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따라서 시장 가격을 창출하도록 이끌었다.〉"(367-8)


"사회학(sociology)은 경제학과 동일한 전문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사회 개혁에 헌신한다는 측면에서 사회학은 학문 분야로서 더욱 적극적이었다. 사회학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관계의 연구를 실증주의적 활동의 절정, 즉 〈학문의 여왕〉으로 생각했던 오귀스트 콩트가 고안했다. 그렇다면 정치적 스펙트럼 속에서 콩트의 성과는 어디쯤에 위치할까? 니스벳은 이렇게 평가한다. 〈과학에 대한 콩트의 애정 어린 숭배를 통해서 가족, 공동체, 언어, 종교의 사회 구조들은 노골적으로 신학적이고 반동적인 맥락에서 제거되었고, 과학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그 맥락과 전문용어를 제공받았다······콩트의 작업은 후대의 사회과학자들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으로 보수적인 원칙들을 바꿔주는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콩트가 생시몽의 비서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이에크는 콩트가 더 좌파적인 입장에서 진화하여 더 분명하게 정치적 중도파에 도달했다고 이해한다."(373-4)


"법칙정립적 사회과학의 세 분야 가운데 정치학(political science)은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 가장 늦게 출현했다." "1903년 수립된 미국 정치학회(APSA)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선배처럼 〈사회과학을 위한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역할〉을 완수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 방법은 중도적 자유주의였다. 로위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 늦게 그리고 천천히 출현한 연방정부는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서 수립되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 역시 그랬다······우파와 좌파를 거부하면서 자유주의는 행동 규범이나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을 회피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단지 결과적으로 해롭다고 간주되는 행동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었다. 사회과학은 그런 체제를 분석할 수 있었고 또한 행동과 그 결과 또는 그와 연관된 원인들에 관한 가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런 체제에 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왜 정치학과 새로 등장한 연방정부가 모두 과학과 친화성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392-3)


"서양 세계는 (세계 체제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연구하고 자신의 기능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세계의 나머지는 열강(列强)에게 얼마간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타자〉를 가장 잘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자 했다. 통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필요한 지식을 산출하기 위해서 학계의 전문 분야들이 출현한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나머지는 정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전문가들은 때때로 식민지와 반(半)식민지를 언급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류학(anthrop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출현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대개 식민지나 본국(서구 열강)의 속령(또는 준주[準州]) 내에 있는 특정 지역들을 다루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두 번째 분야는 이 시기에 주로 반(半)식민지들을 다루었다(그러나 그 지역들만 배타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393-4)


"두 〈학문 분야〉는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심지어 21세기에도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그러했다. 더욱이 일련의 공통 주제에 대한 두 가지 변종으로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 분야 사이에 공통의 주제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두 분야가 19세기 말 지배적인 범(汎)유럽 지역의 일부가 아니었던 세계의 〈나머지〉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주제는 그들이 다루었던 주민들이 〈근대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주민들이 근대적 〈진보〉를 구성하는 요소로 평가된 기술과 기계장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주민들은 범유럽 세계에서 상상되고 실행되는 것과 같은 근대적 가치들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인식되었다. 세 번째 공통 주제는 이 국가/지역/주민들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단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진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394)


# 차이점으로는 인류학의 대상이 〈원시인〉들로 명명된 집단이었다면,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은 〈문명〉, 그러나 근대성이 결여된 〈문명〉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연구 대상인 부족 또는 문명의 근본적인 합리성을 설명하려는 인류학자들과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욕구는 거의 불가피하게 그들 자신을 암시적인 이념에서 중도적 자유주의자로 이끌었다. 그들은 권력자들이 다른 문명들을 더욱 지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하도록 지원하면서 약자들과 권력자들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갈등과 더불어 무엇보다 범유럽적인 지정학적 세력의 현상을 급진적으로 뒤집으려는 시도를 제한하는 데에 도움이 된 개혁을 부추겼다." "영국과 (곧이어 미국의) 대학들에서 연구 분야와 학과목으로서 고전학(古典學)의 출현이 '지문화'에서 중도적 자유주의의 공세를 반영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고전학은 꼼꼼한 문헌 읽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옥스퍼드-케임브리지 교육의 정체된 교육과정과의 단절을 상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불러일으킨 급진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대변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3의 길〉이었다."(397-400)


6 논점의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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