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2 -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제2판 근대세계체제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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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17세기의 위기는 과연 있었는가?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형태를 띠며 이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 유럽에 그 기원을 둔다. 여기에는 봉건 유럽의 특정한 재분배적 혹은 공납적 생산양식(브로델이 말하는 〈경제적 앙시앵 레짐)〉으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 지리적으로 지구 전체를 뒤덮게 팽창하며 (2) 팽창과 수축의 주기적 유형(시미앙이 말하는 A국면과 B국면)을 나타내고, 경제적 역할을 맡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이동한다는 것(헤게모니의 확립과 붕괴, 핵심부 /주변부 /반주변부 지역들의 부침운동) 그리고 (3) 기술의 진보, 공업화, 프롤레타리아트화,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구조화 등 지금도 진행 중인 장기적인 이행과정을 겪게 되었다." "17세기, 대략 1600-1750년까지의 기간에 두드러진 질적 도약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장기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팽창과 수축, 성장과 저성장이라는 한 가지 큰 차이는 있었지만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20-1)


1 수축(B) 국면


"1600-1750년까지 유럽 경제의 전반적 유형(B국면)을 1450년 또는 1500-1650년까지의 기간(A국면) 및 1750년 이후 기간의 유형과 비교해보면 전자는 경제적 고원(高原)의 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1300-1450년에 〈봉건제의 위기〉가 있었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위기〉는 아니다. 〈중요한 징후들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1650-1750년의 〈불황은 중세 말의 심각한 경제적 쇠퇴보다는 훨씬 온건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수축은 이미 작동하고 진행 중인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 체제가 장차 겪게 될 여러 번의 세계적 수축 또는 불황의 첫번째 예였다. 그런데 이 체제가 장차 겪게 될 여러 번의 세계적 수축 또는 이해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이 정치적 지배층의 에너지는 크게 보아서 또한 집단적으로 볼 때, 이 체제를 해체시키기는커녕 경제 수축기에도, 아니 오히려 그러한 때일수록 이 체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움직여줄 수단을 찾는 쪽으로 쏠렸던 것이다."(35)


"사람들이 교역조건의 변동에 따라서 생기는 이윤을 중시했다는 점이 이 시대 경제활동을 설명하는 데에 핵심적인 것이다. 빌라르가 지적하듯이 눈여겨볼 것은 단지 물가가 오르내린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물가 전반의 〈움직임의 격차〉이다. 이 격차에는 시계열적인 것과 지리적 배치에 따른 것이 있으며, 그것은 체제 전반에 미친 효과 면에서도 중요했다. 토폴스키에 따르면 이 수축은 사실 〈경제활동의 약화에서 오는 정체, 침체, 혹은 후퇴를 뜻하는 전반적인 경제적 위기〉는 아니었고 이 시대의 특징은 오히려 체제 전반에서 〈불균형의 증대〉에 있었다. 불균형의 증대란 수축에 대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수축의 시대에 불균형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의 하나이자 자본의 집중과 축적의 증대를 가져오는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빌라르는 〈전반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각기 다른 나라들은 각기 다르게 대응하게 되며 거기서 불균등 발전이 생기고 결국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설명한다."(36)


"1600년에서 1750년까지의 수축에는 체제측에서 보면 건설적인 면모도 있었다. 우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은 이 시기에 적어도 핵심부 국가들과 새로 흥기한 반주변부 국가들에서 수축에 대응하는 한 방식으로 국가구조들이 강화된 것이다." "17세기에도 전쟁과 파괴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였지만 그것들은 지배층 내부의 대량 유혈사태와 같은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 전쟁의 양상이 변했으니 용병의 활용이 널리 이루어진데다가 무엇보다 특히 17세기의 투쟁은 귀족 상호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국가간의 전투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경제적 힘을 키우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또한 언제나 어느 지역에선가는 번영의 조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경제활동이 있었다. 가장 뚜렷한 예로 황금시대를 맞이한 홀란트, 17세기 말부터의 독일의 상승, 영국 농업경제의 착실한 진보 등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 우울하고 어려운 17세기에도 자잘한 진보는 끊임없이 일어나서 축적되었다.〉"(46-7)


"장기 16세기는 인플레이션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상의 혁명적인 시대였으니 새로운 급진적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집단이 대거 나타난 것도 그 중요한 한 측면이었다.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사상은 그들을 흥분시켜 걷잡을 수 없는 데까지 몰고 갈 위험이 있었다. 이에 비해서 17세기는 진정시키고 머리를 식히는 시기였다. 고전주의는 절대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서술이 아니라 프로그램,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탄생으로 상징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치적, 문화적 주도권을 부유한 상층계급에 되돌려놓으려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17세기는 세계경제의 성장률 저하에 발맞추어 형태와 구조의 안정화를 꾀한 시대였다. 이렇게 보면 17세기는 〈위기〉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속도 조정의 시대였던 셈이며 재앙의 시대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본질적인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57-8)


2 세계경제에서의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헤게모니는 핵심부 지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핵심부 국가의 생산효율이 아주 높아져서 그 나라의 생산물이 대체로 다른 핵심부 국가들에서까지 경쟁력이 있는 상황, 그래서 그 핵심부 국가가 최대한 자유로운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상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분명히 이 생산성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그런 국가는 안팎으로 생산 요소의 자유로운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정치적 장벽을 없애거나 최소화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자리잡은 지배적인 경제적 세력은 그들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모종의 지적, 문화적 추진력들, 운동들, 이데올로기들을 장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게 된다. 헤게모니에서 문제는 그것이 지나간다는 점이다. 한 국가가 진정으로 헤게모니를 확립하자마자 그 헤게모니는 약화되기 시작한다. 한 국가가 헤게모니를 잃는 것은 그 국가가 약해져서가 아니라(적어도 어지간히 시간이 흐르기까지는) 다른 국가들이 강해지기 때문이다."(63)


"헤게모니의 유형은 놀랄 만큼 단순해 보인다. 농-공업의 생산효율에서 압도적 우위에 섬으로써 세계무역의 상업적 분배영역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계교역 대부분의 중심으로서의 이익과 〈보이지 않는 상품〉인 운송, 통신, 보험의 장악에서 오는 이익이라는 서로 관련된 두 가지 이익이 따라온다. 이러한 상업상의 우위는 다시 (외환, 예금, 신용의) 은행업무와 (직간접의) 투자를 포괄하는 금융부문의 지배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우위는 차례로 이루어지지만 서로 겹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위를 잃을 때도 같은 순서대로(먼저 생산, 이어서 상업, 마지막으로 금융) 거의 차례로 잃게 된다. 따라서 특정한 핵심부 국가가 생산, 상업, 금융 모두에서 동시에 다른 모든 핵심부 국가들에 대하여 우위에 있는 상태는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이 일시적인 최정상의 상태가 바로 우리가 헤게모니라고 일컫는 것이다. 홀란트, 즉 연합주의 경우 이 순간은 1625년에서 1675년 사이였다고 여겨진다."(63)


"동인도 무역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상업적 팽창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으로 성장한 부문이었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서양 무역, 즉 대 서반구 무역과 그 부속물 격이었던 대 서아프리카 무역을 살펴보면 우리는 네덜란드 상업망의 중심부에 한결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유럽에 면화, 설탕, 담배(이것들은 모두 아프리카인 노예 노동과, 동인도산 향신료와 차를 얻기 위하여 유럽인들이 쓴 은으로 키운 셈이다)를 제공한 이른바 삼각 무역의 기초는 이 지역을 담당한 서인도회사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구조의 개척자들이었으며 그 이익의 대부분이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에게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로 최초의 〈사회적 투자〉가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결산을 해보자면 그것은 네덜란드인들이 낳았지만 1670년대 네덜란드의 헤게모니가 끝난 뒤에 그 이윤을 거둘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훗날 생산효율을 한층 더 높인 영국인들이 거두게 된 것이다."(81-3)


"1621년 서인도회사가 세워진 후 네덜란드는 다음 사반세기 동안 대서양으로의 팽창을 꾀했다. 세계경제에서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과연 무엇이 이룩되었을까? 첫째로 네덜란드인들은 남북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몰아내면서 〈해군 방패막〉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정착 식민지를 건설했다. 둘째로 남북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서 쫓겨나자 바베이도스 섬으로 그 재배가 옮아갔고 이 섬은 영국령 카리브 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식민지가 되었다. 셋째로 네덜란드인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인력을 대기 위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은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 상인으로 이 지역에 남으려고 했지만 1675년이 되면 네덜란드의 우위가 끝나고 새로 설립된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83)


"발트 해 무역은 이미 16세기에 네덜란드의 배들이 전체의 60퍼센트 가량의 운송을 담당해서 〈모무역〉이 되어 있었으며, 영국인들이 필사적으로 시장에 들어오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적어도 1660년까지는 네덜란드인들이 계속 우위를 유지했다. 영국인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영국에서도 네덜란드 상인들이 영국 상인들보다 싸게 발트 해 산물을 팔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무역 루트─동인도, 레반트, 심지어는 그리스도교권 지중해나 대서양 무역 등─는 확실히 중요하긴 했지만 부차적이었다. 1620년대부터, 어쩌면 일찍이 1590년대부터 1660년대까지 유럽 세계경제에서 네덜란드 상업 헤게모니의 열쇠는 〈북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오래 전부터의 교역이었다.〉 나아가 네덜란드의 상업적 우위의 이유는 이미 획득한 농-공업의 높은 생산효율과 관련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높은 효율은 주로 배삯, 보험비용, 일반적인 경상비를 통해서 상업상의 효율로도 옮겨갔다."(84-7)


"세계경제 내 네덜란드의 우위는 생산, 상업적 배분, 금융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그 중 금융 측면을 살펴보면,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가 〈17세기의 월가(街)〉로 여겨졌던 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힘이 그만큼 강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그러한 힘은 차례로 일어난 세 단계의 결과이다. 첫 단계는 세계경제에서 생산과 상업에서 강해진 결과 건전한 공공재정의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두번째 단계로 공공재정이 건전한 데다가 세계적인 상업망 구축으로 암스테르담은 국제결제체제와 화폐시장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세계경제가 완만한 하강세에 있었고 그 결과 통화 사정이 불안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세번째 단계로 생산과 상업에서 강하고 국제화폐시장을 지배한 덕분에 네덜란드는 자본 수출을 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서 네덜란드인들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산잉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것도 네달란드가 주요 생산국이던 시대를 훨씬 지나서까지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91)


3 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1 : 1651-1689년


"네덜란드인들이 사실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자국의 교역을 증대시킬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즉 영국 상인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외국 상인에 대한 국가의 제약이 그것이다. 후자의 정책을 취하여 네덜란드인들의 반감을 살 것을 두려워한 영국인들은 1621년에 규제회사(regulated company)의 형태로 전자의 정책을 선택했다. 이 정책은 그 회사들에게는 제대로 도움이 되었으나 영국 부르주아지 전체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규제회사의 반대를 뛰어넘으면서 〈전체의 경제력 촉진〉에 발맞추어 영국인들은 1651년에 수입을 규제함으로써 네덜란드에 정면으로 맞섰다. 1651년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는 영국에 들어오는 상품이 영국의 선박이든지 생산국(최초에 생산물이 실린 항구의 나라로 정의된)의 선박이든지 어느 한쪽의 선박으로 운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법령은 바로 〈네덜란드인들의 중계무역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119-20)


"1660년에서 1763년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순수한 극빈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게다가 증가하고 있던) 비상근 노동자를 포함해서 인구의 4분이 1에서 절반 정도에 영향을 미친 〈만성적인 빈곤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윌슨은 영국에 대해서 〈거대하지만 불안정한 수출용 제조공업에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의존하는 노동자 대군〉이 있었다고 한다. 사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으나 수출에 대한 강조가 더 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소기의 고용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임금의 역할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네덜란드인들의 불리한 점은 고임금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인데 당시에도 그러했다. 이는 공업의 도시 입지와 그로 인한 노동자의 조합적 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또한 높은 세부담의 원인이 되었다. 고임금과 중과세는 네덜란드 생산물의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이것이 상대적 쇠퇴의 원인이다."(141-2)


"그러므로 수축시대에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한 핵심부 열강은 서로 모순되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편으로 그들은 비용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생산품에 대한 수요를 찾아내야 했다. 비용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는 압력은 노동자에게 노동 규율을 지키도록 압박했다. 퍼니스는 영국에서 이런 노동규율 관념이 대두하게 된 것을 〈고용권〉의 상관물로 알려진 〈노동의 의무〉에 관한 관념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톰슨은 17세기에 시계장치의 이미지가 확대되고 〈마침내 뉴턴과 함께 그것이······전 우주를 사로잡게 되었다〉고 한다. 네프는 이와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탄광부와 제염 노동자가 초기 산업주의의 결과로 (자유로운 임노동은 말그대로 허울 뿐인) 〈노예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 상황이 프랑스의 왕립 매뉴팩처에서도 일어났는데, 여기서도 노동자는 사실상 일터에 구금되어 있었다. 다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았다."(143-4)


"장기 16세기에 발트 해 무역은 기본적으로 서쪽을 향한 곡물의 흐름(여기에서 그다니스크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과 동쪽을 향한 직물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7세기의 정체로 인해서 이 무역은 종말을 맞았으나, 진정한 〈발트 해 지역의 붕괴〉는 세기 중반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났다. 곡물 수출의 쇠퇴는 곡물 가격의 세계적인 붕괴로 인한 것이었고 그 결과 폴란드와 엘베 강 이동(以東)의 곡물 생산지가 국제시장에서 퇴조했다. 이는 또 바로 이들 곡물 생산지에서 직물 시장이 쇠퇴함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경화의 양이 줄어들고, 지주가 곡물 시장의 손실을 다소 만회하려고 하면서 지역적으로 수공업 생산이 다시 나타났다." "곡물 무역을 붕괴시킨 원인이었던 세계경제의 침체는 핵심부 열강 3국간의 치열한 상업적 경쟁으로 치달았고, 그 경쟁이 빈번히 전쟁(특히 해전)으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발트 해 지역이 공급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즉 해운 관련품과 철의 수요가 커졌다."(151-2)


"특히 영국은 목재를 나라 바깥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발트 해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고 북아메리카에서도 프랑스인들보다 더 많은 공을 들였다. 프랑스가 목재를 국내에서 더 많이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두 가지의 중요하고 광범위한 부수적 효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서 발트 해 무역이 지리적으로 동쪽으로, 즉 그다니스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어서 리가로, 나아가 나르바로 뻗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스톡홀름과 비보르 항을 통하여 러시아와 핀란드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파급효과가 더 컸던 두번째 사실은 영국이 석탄자원을 개발하도록 내몰렸다는 것이다." "난방과 취사에 목재 대신 석탄을 이용하는 방식은 제임스 1세 시대 무렵 처음으로 유행했으나, 그것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목재 수입이 중단된 결과로써 사실상 촉진되었다. 그후, 제조업자들은 석탄의 이용이 가능한 공정을 찾기 시작했고, 1738년 무렵 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석탄이 〈영국 제조업의 정수〉라고 썼다."(154)


"세계적인 경기수축이라는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중상주의적 대응을 보였고 먼저 연합주를 겨냥했고 이어서 서로를 겨냥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대외무역에 어느 정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자구책이었다. 즉 영국은 무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선박이 필요했고 그 다음에는 해운 관련품, 그 다음에는 해운 관련품들을 구매하기 위한 생산품, 그 다음에는 늘어나는 제품을 구입할 식민지 구매자가 필요했다. 양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선박이 많아지면 한쪽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교역과 선박의 활용성 저하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이 삼각 무역이었다. 더구나 삼각 무역은 정주 식민지의 효용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들자면, 영국이 더 큰 대서양 무역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재수출 무역도 더 컸으며, 그 결과 영국에는 유력한 반(反)중상주의적 압력집단이 생겨났다. 이것은 아마도 18세기 양국의 발전의 차이를 설명해준다."(159)


4 저성장기의 주변부들


"장기 추세가 저성장기로 반전된 시기는 유럽 세계경제가 통화 불안─발트 해 지역의 '통화 반란, 에스파냐의 동화 인플레이션, 아메리카에서의 귀금속 생산의 급감─으로 영향을 받은 시기와 동일하다." "시장의 형편이 갑자기 나빠졌을 때, 주변부의 수출용 작물 생산자는 어떻게 하는가? 그 생산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치에 닿는 대응방식은 두 가지이다. 수출량을 늘리거나 생산비를 줄이든가 아니면 그 두 가지를 모두 행하는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을 쓰든 아니면 두 가지 방법을 다 쓰든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개별 생산자에 종종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중기적으로는 주변부에 있는 일정 지역의 생산자 전체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수요가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시장에서 수출용 작물의 생산이 늘어나면 세계적인 생산량은 훨씬 더 증가한다. 생산비의 절감은 주변부 지역에서 흔히 그렇듯이 자연자원이나 인적 자원의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달성되는 경우 이는 미래의 생산 잠재력을 쇠진시키게 된다."(197)


"16세기 동유럽에서 환금작물 재배를 위한 강제노동(이른바 재판농노제)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하는 늘어나는 영지에 대한 노동통제 장치로서 널리 확산되었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점은 17세기에 수출시장이 수축하는데도 왜 농노에 대한 수요가 한층 더 강화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17세기에 경작되고 있는 토지 내에서, 영주직영지가 차지하는 몫이 점점 커졌다." "농민의 농장에 비해서 실제로 중간규모 이상의 대영지는 몇 가지 점에서 유리했다. 대규모 단위는 다양한 토지가 있어서 흉작을 대비한 일종의 내부 보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상 불가능한 수확의 변동에 유리했다. 일관된 공급이라는 측면의 이러한 이점 외에도, 수요 면의 이점도 있었다. 수요 면에서 보면, 시장에의 직접적인 접근, 즉 그들이 자신의 상품을 중개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항구로 운송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이점〉이어서, 쿨라는 이것이 토지집중화 과정의 〈부분적인 이유〉라고 믿는다."(203-4)


"경기가 나쁠 때 생산자가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즉 비용을 줄이는 것과 경쟁자를 배제하는 것이 있다. (대)귀족은 임금노동에 반대되는 부역노동을 늘림으로써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이리하여 평균비용이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생산량도 증가했다. 총생산량의 증가는 시장가격의 하락에서 나오는 손실을 메워주는 제2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영주 토지에서 생산이 늘더라도 시장이 확보될 수 있도록 영주는 농민의 토지뿐만 아니라 심지어 귀족의 토지까지 매입해버렸는데, 귀족과 농민의 다수는 사실상 파산상태에 내몰려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영주들이 새로운 토지를 생산에 투입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그것이 자신의 원래 토지와 경쟁을 벌이면서 상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작물의 수출로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17세기 초의 금융위기에 의해서 조장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205-6)


"핵심부 나라에서 신흥계층은 젠트리이든 법복귀족이든 국가 기제가 구귀족의 요구들을, 그리고 특히 시장경제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는 이런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세계경제의 하강기에 핵심부 국가들은 민족주의(중상주의)와 상층민 내부의 입헌상의 타협의 길을 모색하도록 이끌어져 그 결과 하층민이 반란을 일으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은 약했기 때문에 중상주의 전술에 의한 이익을 추구할 수도 없고 상층민 내부의 어떤 타협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주변부 지역에서는 계급갈등이 격해지고, 지역주의가 고개를 드는 한편 민족의식이 약화되었다. 또한 내부에 희생양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농민층의 반항은 극에 달했다. 남유럽과 아메리카의 구 주변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7세기에는 이와 같은 양상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그 특징은 〈사업상의 정체〉로 나타났다."(215-9)


"경제활동의 위축을 최소화하려는 핵심부 열강들은 부분적으로 주변부 지역들에 선취권적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함으로써 그들끼리 첨예한 경쟁을 벌인다. 이들 열강은 식민화에 나서는 동시에 다른 쪽의 식민화를 방해한다. 이는 격렬한 식민지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 열강들은 지배 가능성이 낮은 지역보다 높은 지역(동유럽과 남유럽보다는 아메리카)에 유리하도록 세계시장을 다시 짜고자 했다. 게다가 열강들은 에스파냐 제국과 포르투갈 제국의 경우에 대체로 그렇듯이 약한 식민지 국가의 영토를 당장 빼앗는 데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히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 식민지 국가를 살찌우고자 한다. 따라서 세계적인 경기위축이 시작되자,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카리브 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손에 넣기 쉬운 지역을 식민화한 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무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이점을 얻고자 했다."(237-8)


"1600년에서 1750년까지의 장기적인 수축의 실상은 이전에 주변부의 일부 활동(특히 곡물 생산과 목축업)이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재배치되고(그 결과 동유럽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지역시장으로 전환되었다) 일부 직접적으로 식민지배를 받고 핵심부 국가에서 생산될 수 없는 상품들만 생산하는 새로운 주변부 지역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변부는 북동부 브라질에서 메릴랜드까지 뻗어 있는 광의의 카리브 해 지역이었으며, 그 지역의 세 가지 주요 생산물은 설탕과 담배 그리고 금이었다. 중상주의의 세기인 17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중상주의 국가에 끼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반주변부 국가들로 바뀌어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핵심부 열강들의 이익을 옮겨주는 전달장치가 되었다. 핵심부 3국인 연합주와 영국, 프랑스는 경제적 이익들을 나누어가졌다. 네덜란드는 1650년까지 몫을 더 많이 차지했으며 영국은 그후, 특히 1690년경 이후에 더 많은 몫을 차지했다."(251-2)


5 기로에 선 반주변부들


"에스파냐의 〈쇠퇴〉는 17세기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현상으로서 이는 심지어 당대인들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16세기의 에스파냐는 제조업의 중심지였고, 이런 부문에서 쇠퇴가 훨씬 더 두드러졌다. 직물업이 가장 격심하게 쇠퇴했다. 에스파냐산 견직물과 아마포 생산의 중심지였던 톨레도에서는 1600년에서 1620년에 이르는 20년 사이에 그러한 생산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세고비아와 쿠엥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직물업만이 아니라 제련업과 조선업도 쇠퇴했다. 근대 초기 유럽의 이 〈성장 공업들〉 세 부문 모두에서 에스파냐는 〈자신의 수출시장을 잃었고, 또한 자신의 국내시장과 식민지 시장 대부분도 상실했다.〉 그러므로 이 불황기에 에스파냐는 농업적 퇴화만이 아니라 산업조직의 파괴도 겪었다. 그 결과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에스파냐 내에 양극화 및 지역적 대립이 증가했고, 다른 한편으로 에스파냐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식민지 세습재산을 써버릴 수밖에 없었다."(268-70)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연합(후에 '60년간(1580-1640년)의 속박'이라고 부르게 된) 속에서 법적으로 에스파냐의 일부가 되었던 것은 유럽 세계경제가 팽창과 인플레이션의 시대에서 불황의 시대로 새로 방향을 잡아가는 바로 이 시기였다." "이 연합에 대한 반대는 미약했는데, 그 이유는 포르투갈인에게도 그것이 어느 정도 분명한 이익(이베리아 반도 내 관세장벽의 폐지 같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르투갈인들은 에스파냐 함대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번성하는 브라질 설탕 식민지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연합이 가져온 이점을 통해서 포르투갈인들은 17세기에 분 최초의 세찬 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 포르투갈인들의 이러한 이익에 대해서 에스파냐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인들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보호를 에스파냐인들이 점점 더 제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272-4)


"15세기와 16세기에 거대한 공업 중심지였던 여러 지역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유럽의 등뼈인 북부 이탈리아, 남부 및 서부 독일지역, 그리고 남부(에스파냐령)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극적으로 쇠퇴했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식민지가 전혀 없었고 수입품을 구입할 금은 공급원이나 게다가 열대산 원료도 없었던 그 지역들은 단지 살아남는 데 기반이 된 그들 고유의 공업 및 농업과 오랫동안 육성된 상업적, 금융적 전문기술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 지역들이 살아남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선대제'였다." "17세기의 불황기에 선대제는 16세기보다 훨씬 더 광범하게 퍼졌는데, 여기서는 중요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유럽 도처에서 선대제 공업이 농촌지역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선대제가 발전해가면서 취한 방식 중의 하나는 상인-기업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종속이 영속적이고 끊임없이 확대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반주변부 나라들에서는 선대제가 흔히 외국 상인-기업가들의 수중에 있었다."(290-3)


"선대제는, 관직매매 및 용병부대의 이용이 국가 공직의 관료화(즉 프롤레타리아화)의 시작을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의 시작을 의미했다. 선대 하청 아래서 직접생산자는 형식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했지만 사실상 상인-기업가의 피고용인이 되었다. 상인-기업가는 생산자의 실제 수입을 조절했고, 아직은 작업현장에 대한 직접감독을 통해서 자기 효율의 극대화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생산자의 잉여가치를 전유했다. 선대제는 공장제보다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노동 착취는 더 심했고, 그러므로 그것은 상대적 불황기에 이상적이었다. 반주변부 국가들에 어쨌든 선대제 공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주변부 지역들과 그 국가들을 구분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주변부 지역들의 선대제 공업이 얼마간 비토착 집단들의 통제하에 있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보호주의적 입법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 핵심부 지역들의 공업과 그것들을 구분짓는 것이었다."(293-5)


"유럽의 등뼈 지역의 구 공업들은 모두 17세기에 쇠퇴를 겪었다. 이 쇠퇴는 특히 북부 이탈리아에서 극적으로 전개되었지만, 독일지역과 남부 네덜란드에서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로마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북부 이탈리아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네 가지 경향으로 요약한다. 즉 도시 인구의 쇠퇴, 전형적인 공업 중심지들(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에서 공업생산 특히 값싼 직물 생산의 쇠퇴, 유통업의 쇠퇴, 그리고 가격 및 통화가치는 하락했지만 임금은 꽤 안정적인 상태(이것은 실업으로 귀결되었고 그리하여 극빈자와 유민의 수를 증가시켰다)가 그것이다." "통상 한 지리적 영역의 몰락은 이 영역의 자본 소유자들이 그들의 투자처를 옮기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본 이동은 경제적 전망이 더 나은 지리지역으로 이동하는 형태와, 같은 지역 내에서 종종 보다 더 높은 착취율에 힘입어 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생산단위들로 이동하는 형태가 공존했다."(295, 303-4)


"17세기의 장기적 불황에서 기회의 계기를 발견한 비핵심부 지역 중에는 스웨덴이 단연 돋보인다. 17세기에 경제적 침체의 첫 징후가 유럽을 강타했을 때, 구스타프 아돌프 같은 강력한 인물은 위기를 이용하여 스웨덴 국가를 한층 더 강화하고 경제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아돌프는 스웨덴의 자원을 동원하여 30년전쟁을 치렀다. 그는 세수를 증대하고 세금을 화폐로 납부할 수 있게 했으며, 징세청부업을 실시했다. 또한 그는 (소위 '프로이센 특허장', 즉 입항세를 모든 항구에서 징수할 수 있는 권리에 의거하여) 프로이센으로부터 자금을 끌어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시기에 시작되었고 크리스티나 여왕의 치세 동안 악셀 옥센셰르나의 행정적 주도로 계속된 이 거대한 발전적 도약에서, 네덜란드인들과의 연계는 결정적이었다." "스웨덴산 구리를 사들여서 화폐 주조의 주성분으로 재수출하고 〈네덜란드의 도시들에서 꽤 번성한 구리제품 산업〉에 공급하던 곳이 바로 암스테르담(또한 함부르크)이었다."(305-10)


"스웨덴은 경제적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쇠퇴하여 도착한 그 자리, 즉 주변부와 핵심부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의 자리로 올라섰다. 그러나 유럽의 기준에서 볼 때 스웨덴의 인구는 아주 작았고, 그래서 스웨덴 국가 기제의 재정적 기초도 근본적으로 약했다." "마리안 말로비스트는 폴란드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관찰하면서 스웨덴을 기생적 존재로 보았다. 〈17세기에 스웨덴은 그 주변지역의 산업적 허약성으로부터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귀족세력의 거대한 성장으로 인한 주변지역 정부들의 허약성으로부터도 이익을 얻었다. 요컨대 스웨덴은 자신의 주변지역들의 허약성에 기반하여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100년 동안 스웨덴이 발트 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이러한 주변지역의 허약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스웨덴은 러시아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스웨덴은 러시아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에 더하여 프로이센에도 자리를 내주었다."(328-9)


"30년전쟁은 호엔촐레른 가문에게는 그 힘이 가장 떨어진 시기이면서 동시에 얼마간 순전히 요행으로 거대한 기회를 얻은 시기였다. 그 행운이란 브란데부르크 선제후가 방계 혈통을 통해서 일부 영지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1609년에 클레베 공작령(라인 강의 북쪽 끝에 있는 연합주와 인접한 지역)을, 1625년에 프로이센(폴란드에 인접하여 사실상 폴란드의 종주권 지배하에 있으면서 발트 해에 면해 있던 지역)을, 그리고 1637년에는 포메른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브란덴부르크는 라인란트와 발트 해라는 두 개의 주요 전쟁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몹시 탐냈던〉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큰〉 지역들을 자신의 〈어떠한 군사적 노력도 없이〉 획득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열강의 세력균형에서 이익을 얻은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다른 국가들이 브란덴부르크의 확장을 지원한 것은 바로 스웨덴의 힘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344-5)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국가는 영지 소유자들을 다루는 데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건이란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의 통치자들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 바로 대규모 영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불경기 및 전쟁으로 인한 광범한 황폐화, 국토의 빈약한 자연자원과 결합하여 〈물질적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프로이센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농민에 대한 귀족의 〈봉건적〉 권리를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귀족을 국가관료제로 편입시키는 문제를 이 시기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잘 풀어나갔다. 그렇지만 융커 소유지는 규모상으로는 기껏해야 중간 정도에 불과했고 비교적 가난했기 때문에 국가구조는 처음에는 군사강국으로서, 뒤에는 세계시장에서 활동하는 한 세력으로서 점점 더 강력해졌고, 그리하여 18세기 초 무렵에 프로이센은 반주변부 국가가 되었다."(348-50)


"물론 여러모로 보아서 프로이센이 하려던 역할을 맡기에는 오스트리아가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합스부르크가는 자신의 영토를 국가간 체제 내에서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는 응집력 있게 통합된 국가로 결코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러한 통합이 이루어지는 데에 주로 장애가 된 것은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17세기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투쟁으로 점철된 세기였고 그것은 합스부르크가가 제2차 빈 포위를 성공적으로 이겨냈을 때인 1683년의 '터키의 해'에 절정에 이르렀다. 합스부르크가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를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란 이 시기 내내 투르크 카드를 활용하여 합스부르크 왕국 내에서 자치권을 요구했던 헝가리 귀족에게 일련의 양보를 한 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중상주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두 배인 군대와 훨씬 더 많은 부와 인구를 가지고서도 프로이센이 이룬 정도의 일밖에 해낼 수 없었다."(350-2)


"이 시기에 나타난, 다른 곳들과는 다소 다른 마지막 반주변부 지역은 뉴잉글랜드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중부 식민지들이었다." "17세기에 이 식민지는 영국에 팔 만한 것을 거의 생산하지 않았고 영국 상품의 시장이 되기에도 너무 작았다. 그러나 해운업에서 영국과 경쟁했고 따라서 영국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영국이 북부 식민지를 붙들고 있었던 것은 프랑스가 그것을 얻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예방적 보유였다." "북부 식민지는 세 가지 면에서 운이 좋았다. 빈약한 자연자원을 가졌고 성장하고 있는 세계 공업 및 상업 열강의 식민지였지만 본국과 지리적으로 충분히 먼 거리에 있어서 자신의 주된 자원인 목재를 조선업에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업은 출발점이자 결정적인 산업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의 변화된 상황 속에서 미국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19세기에는 주된 산업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창출되었다."(358-9, 366)


6 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2 : 1689-1763년


"1689년에 오란예가의 빌렘은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 윌리엄 3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1688년 11월에 시작된 네덜란드-프랑스 전쟁은 영국-프랑스 전쟁으로 바뀌었다. 영국에게 이것은 〈크롬웰 시대에 맞먹는 규모의 대외정책〉을 재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명예혁명으로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 화해가 월폴과 휘그 당 집권기 동안에 확고해지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프랑스에 대한 투쟁에서 영국군은 과거에 할당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영국군은 그러기 위해서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결국 그것은 공공대부를 보장받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에 반드시 필요했던 왕과 의회 사이의 협력은 1689년의 화해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이 전 세계적인 경제적 불황기에 모든 전선을 동시에 지탱할 수 있는 군사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영국이 해군으로 기울고 프랑스가 육군으로 기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371-5)


"1701년에 에스파냐 왕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노예무역을 독점했던 아시엔토권을 프랑스령 기니 회사로 넘겨주었는데, 그 회사의 주식은 프랑스 왕과 에스파냐 왕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유력 자본가들도 소유했다. 그 아시엔토권은 이전에 포르투갈 회사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행동이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을 분노케 하여 전쟁을 재개하도록 만들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인정했지만, 아시엔토권은 영국에 넘겼다. 남해회사는 30년 동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매년 4,800명의 노예를 수입하여 판매할 권리를 얻었다."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로 넘어갔지만, 네덜란드는 소위 네덜란드 방벽을 얻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각 해상세력들은 에스파냐라는 파이에서 각자 자기 몫을 챙겼고, 거기서 이익을 끌어냈다. 그에 뒤이은 25년간의 평화기 동안 승리한 영국은 평화가 그들의 이해관계에 보탬이 된다고 믿지 않았다."(385-6)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그 전쟁은 프랑스와 동맹한 프로이센과 결국 영국 및 네덜란드와 동맹한 오스트리아 사이에 발생한 오스트리아 왕위게승 전쟁이었다. 1748년에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그 해결은 전쟁 전의 상태로 거의 그대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무익한 전쟁이 대영제국의 상업적 이해관계에는 아주 많은 보탬이 되었다." "남해회사는 대영제국 내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강력하고 주의깊게 방어하고 있었고 강력한 압력단체로 기능하고 있었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주들은 전쟁이 1730년대의 격심한 설탕 불경기를 종식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영국의 해상보험회사들은 〈해상에서 영국 해군에 나포될 위험에 대비하려는 프랑스 선박의 보험을 맡았다.〉 실제로 전쟁기간 내내 호위함제도가 채택되고 동행하는 선박들이 〈호송의 안정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삼을〉 정도로 영국 정부의 정책에서 상업적 이해관계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386-8)


"1754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리고 1756년에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일어난 계속적인 상업분쟁은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7년전쟁이라는 절정에 이른 투쟁으로 〈바뀌었다.〉 네덜란드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영국은 무력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와의 무력을 제한하도록 강제했다. 에스파냐는 마침내 프랑스와 결합하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프랑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763년의 파리 조약은 100년 간에 걸친 프랑스와의 투쟁에서 영국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확립된 것을 의미했다. 〈유럽에서 에스파냐의 경우에 비견될 만한 장기적인 질병기가 프랑스에 닥쳐오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1세기에 걸친 장기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17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던 네덜란드 헤게모니를 최종적으로 계승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뿌리를 둔 세계 부르주아지의 일정 부분이 영국 국가의 도움을 받아서 거둔 승리였다."(389)


"영국과 프랑스 모두 국가 운영에 자신의 수입을 넘어서는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국가 운영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신용력만 있다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신용은 주로 경제적 현실을 반영한다. 성공은 성공을 낳고, 실패는 실패를 부른다. 프랑스는 재정적자를 극복하는 기제로서 (통화의) 평가절하를 이용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국가가 장래의 조세수입을 담보로 대부를 받는 형태(징세청부업)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1690년대 말에 상인-은행가들은 장래의 조세수입에 대한 재무성의 예상에 기초하여 할인된 공채를 팔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이 확산되면서, 실제로 나타난 사실은 상인-은행가들이 사실상 전시에 정부가 한 믿을 수 없는 약속에 기반하여 일종의 신용화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용체계가 1709년에 붕괴했다. 국가는 상인-은행가들에게 채무변제에 대한 지불유예를 허가했다. 그렇지만 뤼터가 말하듯이, 〈실은 국가가 그 자신에게 지불유예를 해주고 있었다.〉"(422)


"이전 시기에는 영국도 사실 국가재정을 조달하는 데에 프랑스와 비슷한 어려움들이 있었다. 클래펌은 〈스튜어트 왕조 말기의 재정은 버는 족족 쓰기에 바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윌리엄과 메리의 치세기였고 그뒤 앤 여왕의 치세기였던 1689-1714년의 전쟁기에, 영국인들은 장기 공공대부 제도를 창설하고 그리하여 공채제도를 설립하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정부 쪽에서 보면, 대부는 비록 상환의무가 있었지만 사실상 영구적이었다. 그리고 채권소유자의 입장에서는, 이자율이 높았고 가격도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은 국가를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안정된 재정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1694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그에 더하여 이 시기에 재편된 동인도회사가 세워졌고 남해회사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들 세 회사는 모두 국가에 대한 장기 대부를 해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세 회사의 대부금은 〈유동공채를 정리국채로 전환시키는 데에······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23)


"1763년 이후에야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암스테르담에 대한 유럽의 신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8세기로의 전환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자금을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것은 〈노골적인 상거래〉였는데, 그 속에서 네덜란드인 투자자들은 높은 수익을 얻는 대신 영국 국가가 자신의 대부비용을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자기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네덜란드의 투자로 〈영국은 국내경제의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전쟁들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헤게모니 세력과 새로 등장하는 주역 사이에 맺어진 공생적 거래는 전자에게는 적절한 퇴직금을 제공했고 후자에게는 자신의 경쟁자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런 양상은 뒤에 1873-1945년 시기에 네덜란드의 역할을 한 대영제국과 영국의 역할을 한 미국 사이에 되풀이되었다."(427)


"연합주와 영국에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적 가치가 충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폴 아자르가 입증하는 바를, 즉 계몽주의 사상이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시기나 심지어 백과전서파의 등장과 함께가 아니라 1680-1715년 시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브루스가 말한 것처럼, 〈[프랑스의] 18세기는 부르주아적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프랑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이전 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외관이 여전히 유럽 세계경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여러 집단들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이해관계를 지키면서 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은 점점 더 커졌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아직은 부르주아 문화도 프롤레타리아 문화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적 실천과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은 이미 사회적 행동을 기본적으로 구속하고 있었다."(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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