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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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페이라이에우스(피레우스) 항 근처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밋밋한 대화가 아니라 격정과 냉소, 찬탄과 질책이 오고가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희곡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호적인 이들도 있고 적대적인 자들도 있다. 적대적이라 해서 당장 상대방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적대적이면 아예 마주앉아 대화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끼어들었을 리 없다. 설득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이들이다. 말을 섞는 것조차 곤란한,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호적이라 해서 좋은 말만 하고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의외로 그런 자들이 하기 마련이다." "(대화편 《정치가》나 《법률》과는 달리) 《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이끌고 가지만 다른 이들도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화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16-7)


서론 또는 문제 제기: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폴레마르코스는 단순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붙잡은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대화가 시작된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약간의 긴장, 이 정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와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한다. 《국가》는 '대화를 통한'(dia logon)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이 대화가 끝날 때쯤 여기서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에 승복하거나 적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26-8)


#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1. 케팔로스 :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갚을 것은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2. 폴레마르코스 :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름이다.

3. 트라쉬마코스 : 더 강한 자의 편익이 바로 올바름이다.

4.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 올바름은 그 자체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해야 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결국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77-8)


"담대한 글라우콘과 섬세한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세우는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것까지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한 사람의 올바름과 한 나라 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올바름 모두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아테나이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도 지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 놓을 것인가."(80-1)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의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이 공공 영역인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귀감서에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닌 피지배자들, 주권자가 아닌 자들, 신민의 쾌락은 그저 억누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민주 정체가 성립하면서 바로 이들이 폴리스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들의 쾌락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돈 놓고 돈 먹기'와 같은 보수 획득술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선거의 핵심 주제, 심지어 당락을 가르는 쟁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를 쌓아 올리려는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즉, 《국가》는 민주 정체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89-90)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올바름의 기준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철학적 정치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호자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호자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원칙인 '한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수호자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직업을 갖는 나라에서 수호자들도 그 명칭은 '하나의' 직업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서 다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 그 다면성이 수호자 또는 통치자의 근본적인 특성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수호자(와 통치자)만 유식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무식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인가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민정치를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113-4)


"시가 교육이 좋은 성격과 그에 이은 지성의 측면을 위한 것이었다면 체육 교육은 '격정'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을 위해서 양쪽 다를 제도화한 것〉(410c)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혼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을 위해서 그 두 가지 교육이 요구된다. 〈수호자들은 성향상 이들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만〉(410e)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시가와 체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둘을 골고루 쓸 수 있다. 이것이 혼화混和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름은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활동을 가리킨다. 올바름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의 것을 궁리해 내는 사유활동이다. 플라톤에 있어 올바름은 혼의 혼화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어서 혼화의 상태와 적절함을 만들어 내는 사유의 힘이다."(124-6)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서 장남은 집안의 문장紋章을 이어받는다. 차남은 자신의 운명에 승복하고 다른 방책, 이를테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십자군에 참전한다. 왜 불평이 없는가? 그것이 자신의 기본값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굳이 따져서 알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함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장남이 될 수 없다. 노력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체제에서만 올바름과 공평함이 문제된다." "플라톤이 올바름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 것은 민주 정체에서 핵심적인 쟁투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정 시기는 물론 참주정 체제에서도 이런 일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는 민주정에서 조화로운 정치적 행위들이 가능한 방법, 체제 붕괴를 불러오는 당파적 쟁투를 막는 민주 정체 지도자들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궁리한 것이다."(128-9)


"통치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없애야 하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들도 한 명의 주권자이지만 그들이 공직에 있는 한 그들은 공직이라는 기구(apparatus)의 한 조각이다.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의 한 기관(organ)에 불과한 것이다. 이 조직과 기구는 그 안에 어떤 인간이 들어온다 해도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플라톤 시대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민주 정체는 시민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회에서 모든 공적인 사안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민주정을 흔들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상적인 권력 기구라 부르는 장치를 구상한 것이다. 수호자들의 사적인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권력 기구와 전면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 '폴리스'만 남는다. 그들은 폴리스의 일(ergon)을 수행하는 기계와 마찬가지다."(191)


제2부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것에 상응하는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질 가망이 없는 것을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며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을 현실적이라고들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조직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유형有形의 것들이 있다. 그것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사유를 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가. 이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인 것을 반영한다 해도 인간의 사유는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할 수 없다. 모든 사유에는 인간의 반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반성은 사유이고 관념이다. 관념(idea)은 이상적(ideal)이고 이상주의적인(ideal) 것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생각, 곧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정치가가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의 아테나이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검토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관념이고 이상적인 것이다."(200-1)


"현실은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간다. 가끔은 그것을 되짚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살펴볼 때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만들어 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닮은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本이 있어야 그것에 대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러다 보면 뭐가 되더라도 되겠지,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어'라는 태도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정치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정치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다."(201-2)


"소크라테스는 자체를 아는 것이 앎이고,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견 속에서 산다. 그들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름을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이 무지의 자각은 앎인가, 의견인가? 아직은 의견이다. 자신이 무식한 건 알지만 아직 앎은 없다.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이것은 모름과 앎의 운동 과정이다. 앎과 모름은 이처럼 연속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닌 반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흰색과 까만 색도 반대 관계이다. 흰 색에 때가 묻으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때가 아주 많이 묻으면 까만 색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간 단계를 우리는 '생성'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성에 나섰을 때 그것을 인도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국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일단 앎을 가진 철학자가 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212-3)


"형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은 형상을 닮은 것이다. 형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의 면적을 계산할 때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다. 이는 원을 다각형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쪼갠다고 가정해서 얻어 낸 원의 면적이 원의 진짜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한히 쪼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주율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얻어 낸 면적은 원의 진짜 면적에 접근해 있을 뿐이다. 원의 진짜 면적은 신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면적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 닮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하나는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와 합치하는 차원, 즉 신의 차원,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노력을 기울여 형상의 차원에 가깝게 간 '본'의 차원이다."(213-4)


"형상을 알아내는데서 그치면 그는 철학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한다. 천상에 올라가 지식을 얻은 다음 그들을 인도하러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라가면 철학자이고 내려가면 정치가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철학자는 형상을 앎으로써 스스로 완성된다. 그것으로써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 형상의 세계는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인간 세상은 변화에 얽매여 있는 곳이다. 천상의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한정되어 있으나 아래는 혼돈스러우며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 각각은 진리와 비진리이니 겹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자족성(autarkes)이 있다면 본을 가진 정치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은 논리적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상에 있는 형상을 '전체에 따라서'(kata holon) 모방한 본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 본은 어중간하게 중간에 있는 것이다."(220-1)


"폴리스에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까닭으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를 제시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면 '공동선'共同善이다. 이러한 최종 근거의 원초적 형태는 자연적 우주론, 즉 우주적 혼(cosmic soul)의 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가 이것에 관한 정신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근대적 형태의 우주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선험론에서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최고선, 자유의지, 영혼불멸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인간 삶의 윤리적 국면을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공복지 같은 이념이 정치에서의 최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설정됨으로써 정치의 궁극적 과제가 도출되며, 이것으로써 정치는 사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정치의 궁극적 정당화 근거'이다."(253)


"많은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야만 한다. 상승과 하강,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묶어서 '이행'(메타바시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매정하게 설명했다. 폴리스에서는 특정한 부류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지내게 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자면 정치가는 공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서 그곳에서 누리는 '관상적 삶', 현실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철학적 정치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견뎌 내는, 서로 다른 상태인 올라감과 내려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것, 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다."(282-3)


제3부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아테나이, 로마 공화정, 현대 민주정 등을 제외한 정치 체제들에서는 정치적 공직이 출생, 군주의 호의, 확립된 과두제 안에서의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성취될 수 있었다. 이는 공직을 귀속적으로 충원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폴리스에 적용되는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교육적 충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체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정체의 쇠퇴가 일어나는 원인이 정체의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체에 살고 있다 해도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사느냐, 즉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체는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시민들에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 체제의 상태를 평가하고 이름 붙이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정치학적 의미에서의 체제론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302)


#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은밀하게 추구함

2. 과두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드러내놓고 추구함

3. 민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인이 추구함

4. 참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광적으로 찾아내서 지도자로 추대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극대화되어 겹치면 민주정으로 가게 된다. 욕망 충족과 멋대로 하기에는 민주정만한 곳이 없다." "민주 정체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불변의 고정적 정의가 없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민주 정체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 왜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면서 기존의 것을 엎어 버리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통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전통을 깨는 합의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극도의 대중영합주의 시대가 되어 버리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이 깨져 나간다." "모든 즐거움은 동일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 민주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욕구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소비자주의'다. 가치의 위계질서가 해체된 상태, 이것이 민주 정체의 필연적인 귀결이다."(324-8)


"참주 정체로 나아가는 씨앗은 이미 민주 정체 안에 들어 있다. 민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자나 정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되므로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대중의 격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지점, 즉 선도자가 되면 참주정으로 가게 된다. 마지막에 선도자는 '참주'로 변한다. 시민이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처럼, 똑같은 정치가가 상황의 변화와 진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군중을 거느리고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때부터 참주가 된다. 그는 늑대인간이다. 〈다른 제물들의 내장들 속에 잘게 썰어 넣은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다. 참주 정체에서는 이러한 일이 사법살인의 형태로 자행된다. 대중선동가, 선도자, 참주, 이 연속 단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339)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궁극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 내놓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진리 닮은 것이다. 진리는 항상 저쪽에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강제하겠는가. 결국 마음을 닦으라는 말만 하게 된다. 공동체의 법을 어기는 불법과 결합된 한 사람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처방은 한 사람의 심신수련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341-2)


제4부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플라톤은 철학자가 언어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진리라 하고, 시인이나 화가가 말하는 것은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철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모방(mimesis)을 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모방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행위자가 초월적 실재로서의 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의 후보자들이 있다. 은유는 인간이 만들어 낸 임의적인 것이라 약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모방한 결과물이 은유인 것이다. 은유는 초월적 실재인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한마디로 모방은 은유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모방은 진리와 인간이 은유를 통해 오고가는 것, 즉 이행(metabasis)이다. 진리는 인간으로, 인간은 진리로 오고가는 것이다. 진리가 아무래도 위에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 인간이 올라가서'(anabasis) 진리를 가지고 '내려오는'(katabasis) 것이다. 은유는 오르내리는 사다리다."(369-70)


"소크라테스는 시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진리의 인식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온갖 착시에 빠져 있다. 〈같은 것들이 물속에서 볼 때와 물 밖에서 볼 때, 구부러져 보이기도 하고 곧은 걸로 보이기도 하는가 하면, 색채들과 관련되는 착시로 인해서 오목하게도 또는 볼록하게도〉 보인다. 시각을 통해 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이것을 꼭 시각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판적인 안목 없이 사태를 바라보면 대상이 던져 주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산된 것과 측정된 것 또는 계량된 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들은 비판적 검토를 거쳐서 객관화된 것들이다. 계산된 것, 측정된 것, 계량된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플라톤 시대에는 시인이었다. 시인들이 '혼의 헤아리는 부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의 미디어론으로 읽을 수 있다."(370-1)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은, 살아서 혼을 순수한 상태로 만들고 올바름을 지켰던 사람은 죽어서도 훌륭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살아서의 삶이나 죽어서의 삶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보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의 보전'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과제라 천명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야기를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설득할 의무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자들은 '잘 지낸다'(eu zen)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아 인간들과는 물론 신과도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올바르게 살았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존하는 것, 사실 이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다. 앞날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가 본 길들을 철학자가 갈 수 있겠는가. 안 가 본 길들은 정치가들이 가는 것이다."(385-6)


추기追記


"아테나이 민주정의 결정적 계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는 방식을 개조하였고, 정치적 선택을 아테나이 전래 집단인 데모스에 전체적으로 할당하였다. 여기서 민주정은 근대의 개인주의 방식이 아닌 집단의 선택으로 작동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 민주정 체제에 숨은 문제는 '쾌락'과 연관된 부의 문제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적 투쟁의 핵심인 부의 원천을 둘러싼 분배방식의 쟁투가 민주정으로 봉합되었고, 전쟁 시기에는 일당지급제도(misthophoria)라는 편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로 충당된 국가의 핵심인력으로서의 해군에 대한 사회적 지위 부여 문제와도 얽혀 있는 것이다. 부를 분배하는 방식은 민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으나 부의 원천 자체는 토지 이외의 것이 획기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이 불가능했던 고대 경제는 약탈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이다."(394-5)


"민주정의 지도자가 가진 문제는 권력 획득의 과정과 기술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치적 기술로서의 연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의 술어로 표현하면 '대중영합주의'의 문제다." "한 개인의 내면적 심성의 특성이나 도덕성보다는 대중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기술, 곧 연설술이 민주정에서는 탁월한 정치술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를 배척한 것은 체제의 요체를 곧바로 겨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민주정이 실현한 일종의 '세계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 하였다. 주지하듯이 민주정은 절차적 합리성만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에서는 최종적 정초가 되는 이념이 없는데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이념을 도입한다. 이는 탈주술화의 귀결인 민주정을 다시 주술화하려는 시도이다. 《국가》의 주제가 '올바름'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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