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 체제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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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사 주해


▶ 읽게 될 것


"역사,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사 모두 궁극적으로는 '읽기'다. 읽는 것은 정신의 연습이다. 헬라스 신화에는 아홉 명의 무사mousa 여신들이 있는데, 그것 이전에 보이오티아에서 기원한 신화에는 아오이데 여신과 므네메 여신, 멜레테 여신 이렇게 세 명의 여신이 있다. 아오이데 여신은 노래와 목소리(song, voice)를, 므네메 여신은 기억(memory)을, 멜레테 여신은 연습과 기회(practice, occasion)를 관장한다. 앞의 두 여신들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여하는 반면 멜레테 여신은 이들과 달리 행위, 즉 노래를 잘하거나 기억을 잘하기 위한 연습에 관여하므로, 이 여신은 다른 여신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얻게 될 통찰력 또는 창발創發(emergence)은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앎과 그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원리로 올라서는 힘이거니와, 이 원리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의 이론'은 '아무것도 아닌 이론'(TON, Theory of Nothing)이다."(125-6)


▶ 우리가 시도하는 바


"철학은 서사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맥락에서 탈피한 추상적 보편성에 이르러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요구는 '오늘의 나'가 역사적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해야만 충족될 수 있다. '오늘의 나'를 소거하고 탈시간적 보편성의 규준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는 것은 배진적背進的 소급적遡及的 태도로 과거에 접근하는 것인데, 이는 취사선택한 부분적 과거에 근거하여 오늘을 섣부르게 정당화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떻게 하여도 공정한 재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실천철학이 '사상사적 탐구를 통한 역사성'과 '철학적 관상으로써 얻어지는 보편성'을 통일한 참다운 사상이려면 어제의 발현이라 할 '오늘의 희미한 빛'이 주는 실마리를 잘 살펴봄으로써 사태 자체(사상事象)의 보편적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세계사의 진행과정과 미래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그러한 이상(Ideal)이 지배하던 관념론(Idealismus)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섣부른 목적론적 형이상학으로 간주될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언을 삼가고 각각의 시대가 드러내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짐작되는(또는 그것이라고 상정想定한) 것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126-7)


서문


▶ 쾌락에 빠진 시민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 같은 이들은 현전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여기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는 초월적 이념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초월적 이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차안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피안의 세계와 불변하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박한 동경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동경에서 이끌어 낸 이념적 열정으로써 현실을 개조하려 한다. 아테나이 폴리스 쇠퇴기에 등장한 플라톤의 형상形相(eidos) 이론은 이러한 동경과 변혁의 강력한 전조이다.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헛소리이지만, 적어도 초월적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그 이념이야말로 진짜이며 생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에게는 세계가 둘이 된다─거짓 세상과 참다운 세계, 땅 위의 세속 세계와 하늘의 신성한 세계." "현세의 삶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 그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초월적 반성을 요청했던 사람이 아주 가끔 등장했던 세계, 그 요청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세계가 고전 시대 전반기의 폴리스라는 역사적 공간이었다."(130-3)


1장 민주정이 시작된 역사적 공간 '폴리스'_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정의는 정의로운 것의 심판 


"정의(dike)는 법적인 정의이고, 정의로움(dikaiosyne)은 넓은 의미에서의 올바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합법성'(legality)과 '올바름'(justice)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법 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만 되어 있다면 합법성을 획득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현대의 개체주의적 자유 민주정은 내면의 양심과 이념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절차적 합법성을 체제 구축의 필요조건으로서 승인한다. 절차적 합법성에 따라 선출된 권력은 바로 그 합법성으로부터 권위의 '정당성'(legitimacy)까지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정의로움, 즉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은 격렬한 이념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폴리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규정을 준용한다면, 폴리스의 정당성이 올바름에 정초되지 않았을 때, 또는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어떠한 합법성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137-8)


2장 민주정의 절정기, 체제 유지를 위한 패권 싸움_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 《헬레니카》


▶ 전쟁이 시작


"전쟁의 시작에 관한 논의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투퀴디데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한국어 판은 모두 '원인'으로 옮겨져 있지만 헬라스 어 원문에는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prophasis와 aitia이다. aitia는 〈양쪽이 공공연하게 제기한 (···)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고 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원인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당시의 헬라스 세계 사람들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휴전협정 파기와 선전포고의 원인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완결될 수 없다고 보아 alethestate prophasis, 즉 〈진정한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아테나이의 세력이 커진 것에 대한 펠로폰네소스 지역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진정한 원인〉은 일종의 내면적인 원인 또는 의도인데, 이것에 실현 도구가 더해지면 〈공공연한 원인〉이 도출된다. 즉 'prophasis+도구=aitia'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투퀴디데스를 비롯한 고대의 기록자들은 prophasis까지 파고들어야 참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prophasis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심상 지도(mental map) 같은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려면 도구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그 도구들이란, 작용하는 토대인 지리적 구조와 현실의 힘(자본, 제해권, 함선 건조기술 등과 같은 인간사를 구성하는 것들)을 통칭한다."(155-7)


▶ 민중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를 가리킨다. 플라톤은 《정체》(Politeia)에서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를 논하면서, 과두 정체에서 〈올바르지 못한 짓을 아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경우〉(554c)가 등장하고 이것을 누구나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민주 정체로의 이행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니까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바뀌는 것은 (···) 그것이 내세우게 된 '좋은 것'에 대한, 즉 최대한 부유해져야만 한다는 데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aplestia) 때문〉(555b)이다." "민주 정체의 시민들은 개인이 가진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가치가 절대로 공격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목격할 수 있는, '미숙한 평등주의'로 변질된 자유이다.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공허한 자만심에 편승하여 떼를 쓰는 이들이며, 그것에서 정치적 자산을 취하는 이가 나쁜 의미의 '포퓰리스트'이다."(167)


▶ 30인 참주를 축출


"뤼시아스에 따르면 30인 참주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 돈을 갈취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7)다. 그들의 주요한 행동 동기는 이익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당한 이들〉(52)이나 〈페이라이에우스 측 사람들을 위해서나 부당하게 죽어가고 있던 이들을 위해서 분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56)다. 이들은 명료하게 나쁜 짓을 한 이들(Wrongdoers)이다. 불의를 당한 이들은 저항자들(Resisters)이나 희생자들(Victims)을 가리킨다. 그런데 뤼시아스는 다른 이들도 있었음을 알린다. 〈그 민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훌륭한 시민이었던 이들은, 사전에 준비된 것과 강제된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일부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적어도 도시에 대해 그 어떤 해악도 표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75). 침묵을 지키거나 표결에 불참한 사람들은 중립적인 이들(Neutrals) 또는 수동적 방관자들(passive By-stander)이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다름 아닌 그 협조자들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 올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입니다〉(85). 이들은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던 협조자들(Beneficiaries from Wrongdoing)이다. 저항했던 이들과 희생당한 이들이 한 쪽에 서고, 나쁜 짓을 한 자들과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은 자들이 한덩어리가 된다."(168-9)


3장 민주정 시대를 체감한 소크라테스_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 기록


"플라톤의 철학적 사색(필로소피아philosophia)은 궁극으로 추상적인 기하학과 초월적 형이상학으로 귀결한다. 이는 서구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전통(metaphysical tradition)의 시원이 되고, 기독교 신학에서도 신플라톤주의로 계수된 것이 접합되어 핵심적인 한 줄기를 이룬다. 이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 개념은 신념 체게가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문주의적 전통(humanist tradition)의 원천 중 하나이다. 이 둘의 구분은 플라톤이 《정체》에서 제시한 '선분의 비유'(509d~511e)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참된 앎은 의견(doxa)이 아닌 최상위에 있는 사유(noesis)이고 철학자는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의견에서 시작하여 합의에 이르는 것이 합당한 탐구활동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고독한 진리 탐구자이나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는 인간사이다. 인간의 일이 이소크라테스의 관심사이고, 소크라테스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록들도 소크라테스가 인간사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173-5)


4장 체제의 정당성을 묻는 '이념 혁명'_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소한 이들의 행동에서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이러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고발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잘못된 행동은 바로 이 수치심 결여에서 나온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께서는 저한테서 모든 진실을 들으시게 될 것입니다〉(17b).  소크라테스가 자기 변론 첫머리에 내놓는 핵심은 이처럼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밝히려 하는 진실은 도덕이 포함된 진실이고, 이는 부끄러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게 강하게 반론할 때 취하는 주제이다. 부끄러움은 좋은 것에 대한 보편적 욕구와 앎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공명심이나 명예욕에서 생겨나는 굴욕감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 대한 규정 두 가지, 즉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자."(74-5)


"앎에 대해서는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디까지를 알고 있고 어디부터는 무지한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무지의 지이다. 마지막은 뭔가 아는 것이 있기는 한데,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소크라테스는 두번째 경우를 선택하겠다고 한 것이다. 무지의 무지가 최악이다. 차라리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낫다. (무지의 무지는 오만함이다. 무지를 낯설게 느끼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인과 정치가와 장인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이 사람들은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무지를 아는 자,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자와 대립하는 자, 인간을 넘어서는 자가 아닌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임을 의미할 것이다."(81-2)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 중 일부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열광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들의 민주 정체는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그저 청렴하고 고고한 도덕주의자의 상투적인 지탄이 아니다.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사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그가 일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촉구한 것은 혼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질문을 하고 캐묻고 심문〉(29e)한다. 이것이 그가 행하는 신에 대한 봉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당대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아테나이 사람들 중 일부는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결심했던 것이다."(91-2)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혼을 돌보라고 깨우치는 일을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올바름을 늘 말할 수 있으려면 특정 당파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 당파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반정치, 정치 혐오가 아니라 불편부당한 진리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아테나이는 전쟁의 격변 속에서 그리고 패배의 혼란 속에서 정치 체제가 계속 바뀌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정파에 가담하는지는 올바름의 기준이 아니었다. 특정 정파에 가담하는 것은 공인의 입장에서 그 정파에 동조하는 것이어서, 그 정파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주장할 때에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사인의 입장을 고집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법적 책임보다 더 근본적인 부끄러움을 짊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치를 혐오한 것도 아니요, 민주정도 참주정도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입장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92-6)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의 난관을 이겨 내고 마침내 민주 정체를 성취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고 시민들은 폴리스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테나이 시민들의 삶은 '쾌락이라는 참주'에게 굴복한 것이다. 민주 정체에서 산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름을 지향해야만 '더 많은 이의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민주 정체의 탁월함이 참으로 실현될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민주 정체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이 아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매개로서 완성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은 바로 올바름인 것이다." "어떤 정체에 살고 있는지보다 훨씬 더, 아니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에 대한 철저한 촉구 때문에 미묘한 경계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체제 정당성에 대한 급진적 이념 혁명가가 된다."(101-2)


5장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치적 지향_플라톤 《메넥세노스》


▶ 나라 체제는 인간들의 생활양식


"나라 체제, 즉 어떤 정치 체제(politeia)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trophe)이 규정된다. 정치 체제는 생활양식을 조건 지우고 생활양식은 정치 체제를 조건 지운다. 서로 스며들어서 서로를 적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지 못하므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하려면 나라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르지 못하면 나라 체제를 올바르게 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람들이 악해져 있으니 체제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정치 체제가 생활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보다는 미약하지만 생활양식도 정치 체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므로 《정체》에서는─나라와 개인의 올바름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지만─한 나라의 올바름을 먼저 따진 후 한 사람의 올바름을 따지는 것이다. 더 큰 것이기에 따지기 쉽기도 하지만, 나라가 올바르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도덕주의적 처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 처방은 그저 사람이 올바르면 된다는 처방이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지혜롭고 사려 깊다면 그러한 것이 정치 체제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메넥세노스》에서 제시된 연설은 생활양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정치 체제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해서 보여 줌과 동시에 두 영역의 미묘한 경계선도 보여 준다. 이 경계선, 즉 사인이 공적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가 역사다."(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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