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지음, 이종인 옮김 / 북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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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르크스의 이론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 계급 이론과 역사의 경제적 해석은 두 개의 독립된 학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전자(사회 계급 이론)는 후자(역사의 경제적 해석)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그리하여 그것(사회 계급 이론)은 생산의 조건 혹은 생산 양식의 '운영 방식modus operandi'을 구속하거나 더욱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생산 조건 혹은 생산 양식은 사회 구조를 결정한다. 또 그 구조를 통하여 문명의 모든 발현물이 나타나고, 문화적·정치적 역사의 전반적인 행진이 시작된다. 하지만 사회 구조는 모든 비非사회주의적 시대에 대해서도 계급의 관점─두 개의 계급─에서 규정된다. 이 두 계급은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들이고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 체제(두 계급을 통하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체제)의 논리에서 유일한 '직접적' 창조물이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두 계급을 순전히 경제적인 현상, 그것도 아주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 현상으로 만들어버렸다."(41-2)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사회학적으로, 즉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적 통제의 제도로 '정의'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의 '역학mechanics'은 그의 경제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마르크스 경제 이론은 계급, 계급 이해, 계급 행태, 계급 간의 교환 따위의 개념들에 구현된 사회학적 데이터가 어떻게 경제적 가치, 이익, 임금, 투자 등의 경제적 수단을 통하여 발현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또 그런 데이터가 어떻게 독특한 경제 과정을 창출하는지 보여준다. 그 경제 과정은 마침내 그 자체의 제도적 틀을 부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사회적 세계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을 창조한다. 사회 계급 이론은 역사의 경제적 해석과 이익 경제의 개념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교통정리하고, 모든 현상을 공통의 초점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이론은 유기적 기능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 체계에서는 그 이론으로 어떤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그런 유기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43-4)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을 논의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완전 경쟁적 경제하에서 착취 이윤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을 확대하도록 유도하거나, 생산의 확대를 시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축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축적의 대대적 효과는 제품 가격의 하락을 통하여 혹은 결과적인 임금 비율의 상승을 통하여 잉여 가치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보여주는 아주 그럴듯한 사례로서 마르크스는 이런 모순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런 경향은 개별 자본가들이 축적을 강제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 자본가 계급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심지어 이와는 다른 정태적 과정에서도 일종의 축적 충동이 발생한다. 이 과정은 안정된 균형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축적이 잉여 가치를 제로 수준으로 떨어뜨려 자본주의 그 자체를 파괴한다."(58-9)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경제는 정태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 경제는 꾸준한 방식으로 내내 확대되어 나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기업에 의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변혁을 이루어나간다. 즉 그 어느 때든 새로운 상품, 새로운 생산 방법, 새로운 상업적 기회가 기존 산업 구조로 흘러드는 것이다. 기존 구조와 사업 수행 조건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어떤 상황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뒤집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발전은 곧 동요를 의미한다. 이런 동요 속에서, 경쟁은 정태적인 과정(비록 경쟁적이라 할지라도)에서 작동하는 것과는 완전 다르게 작동한다.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이윤을 올릴 가능성, 낡은 제품을 더 값싸게 생산하여 이윤을 올릴 가능성 등이 한결같이 발생하며 새로운 투자를 요구한다. 이런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방법은 낡은 제품 및 낡은 방법과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게는 죽음을 안겨주는 불공평한 방식으로 경쟁한다."(59)


"마르크스는 경기 순환론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잉여 가치의 출현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 기계화(고정 자본의 상대적 증가), 잉여 인구, 이 인구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궁핍화 현상 등이 서로 결합하여 자본주의의 대재앙을 가져온다는 논리에 동의하자.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자본주의 과정의 경기 변동을 꼭 집어 설명해 주고 또 번영과 침체가 교대하는 '내재적'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을 얻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생산 규모가 〈발작적으로〉 확장하는데 이것이 〈똑같이 갑작스러운 수축의 서곡〉이라는 견해를 표시했을 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적절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경제학의 피상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경제학은 산업 사이클의 주기적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에 불과한 신용의 확대와 수축을 그 변화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일련의 부수적인 사건과 우연한 사건들을 마치 중요한 공헌을 하는 요인처럼 말하고 있다."(69-70)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 당시에 경기 변동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업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선배 경제학자들도 경기 변동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는 챘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들〉이라고 알려진 대규모 붕괴에만 주목했을 뿐, 그 위기의 진면목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 위기들이 경기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들임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보다 큰 그림 혹은 보다 세부적인 그림은 보지 못하고, 위기들을 오류, 과도함, 비행의 결과 혹은 신용 메커니즘의 오작동 등에서 발생하는 산발적 불운으로 여겼다. 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그런 전통을 극복한 최초의 경제학자였고 쥐글라의 저작을 예고하는 사람이었다. 마르크스는 경기 사이클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현상을 분명히 꿰뚫어 보았고, 그 메커니즘을 상당부분 이해했다. 이 때문에 그는 현대 경기 순환 연구 분야의 아버지들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70-1)


"그의 모든 단점들은 그의 논증이 추구하는 위대한 비전 때문에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 그 단점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 비전에 의해 구제되고, 어떤 때는 구제되지 못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가 실제로 성취한 경제학 방법론 중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경제의 역사를 직접 연구하거나 아니면 다른 학자들의 역사서를 활용했다. 하지만 경제사經濟史의 사실들을 별도의 공간에다 따로 모셔놓았다. 경제사의 사실들이 이론에 도입될 때에는 예증의 역할 혹은 결과 검증의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경제사의 사실들은 그 이론과 기계적으로 섞였을 뿐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사실과 이론을 화학적으로 결합시켰다. 다시 말해 그는 사실들을 논증의 중심으로 도입하여 결과를 도출했던 것이다. 그는 경제 이론이 역사 분석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최초의 일급 경제학자였다. 다시 말해 역사 이야기가 '이론적으로 규명된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74-5)


"마르크스가 볼 때 진화는 사회주의의 부모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구도의 내재적 논리를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혁명이 진화 과정의 어떤 부분을 대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혁명(구체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도입되었고, 완전히 다른 전제 조건들 아래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 혁명은 그 성격이나 기능에 있어서 부르주아 과격파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음모꾼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벌어지는 혁명이다." "사물의 내재적 논리에 의해 촉발된 여느 사상들이 그러하듯이, 그 심오하고 원숙한 사상은 의심스러운 환상적 번쩍거림 아래에 뚜렷이 보수적인 의미를 감추고 있다. 그 어떤 진지한 논증도 무조건적으로 〈이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화려한 수사修辭를 벗겨보면,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보수적 의미의 해석을 발견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아주 진지한 대접을 받을만한 사상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94-5)


2부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 과정은 우연의 작용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의 공력으로 인해 점진적으로 일반 대중의 생활 수준을 높인다. 자본주의 과정은 일련의 변천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데, 그 변천의 강도는 발전의 속도에 비례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그 작업을 수행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1928년 이전의 60년 동안에 누렸던 호황을 다시 누려 1인당 1,300달러의 소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사회 개혁가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미해결 소망 사항이 자동적으로 해결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 과정을 크게 손대지 않고서도' 성취될 수 있다." "망각의 공동묘지에는 아동 노동, 하루 16시간 노동, 방 하나에 다섯 식구 거주 등의 유령이 잠들 것이다. 이런 유령들은 과거에 자본주의 업적의 사회적 비용으로 자주 거론되었으나, 장래의 나머지 대안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관련 있는 사항들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시대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창기 시대의 무능력과, 완전하게 성숙한 자본주의 체제의 능력 사이의 중간쯤에 서 있다."(108-11)


"자본주의는 그 성질상 경제적 변화의 형태 혹은 방법이 결코 정태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자본주의 과정의 이런 진화적 특징은 경제생활이 사회 환경이나 자연 환경(늘 변화하고 그 변화로 경제 활동의 데이터를 변화시키는 환경)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서만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은 중요하고 이런 변화들(전쟁, 혁명 등)이 종종 산업 변화의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주된 동인은 아니다. 진화적 특성이 인구와 자본의 준準자동적인 증가 혹은 화폐 제도의 변덕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엔진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근본적 충동은 새로운 소비자 물품,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 방법, 새로운 시장,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 등에서 나온다." "(돌연변이와도 같은) 이 과정은 '내부로부터'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항이다."(125-6)


"완전 경쟁은 모든 산업에의 자유로운 진입을 의미한다. 일반 이론의 범위 내에서는 자유 진입이 최적 자원 분배의 조건이고, 또 생산을 극대화하는 조건이다. 만약 우리의 경제 세계가 잘 확립된 불변의 생산 방식으로 친숙한 상품들을 생산하는 여러 개의 회사들로 구성되어 있고, 추가 인원과 추가 저축이 결합하여 똑같은 유형의 새로운 회사들을 복제하는 세계라면, 특정 산업에 신규 진입을 가로막는 것은 공동체에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완벽하게 자유로운 진입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입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상품에의 진입은 처음서부터 완전한─혹은 완전하게 신속한─경쟁 상황 아래에서는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 발전의 상당 부분이 완전 경쟁과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완전 경쟁을 주장하는 전통적 명제의 경제생활 구도에서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없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150-1)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진화의 조건들 속에서 작동하면서 완전 경쟁 모델은 그 나름의 낭비를 보여준다. 완전 경쟁과 양립하는 형태의 회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내부적 효율성, 특히 기술적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완벽하게 경쟁적인 산업은 대기업에 비하여 발전과 외부적 교란의 영향 아래에서 파괴되기가 훨씬 쉽다. 즉 불황의 세균을 퍼뜨리기가 더 쉽다는말이다." "반면에 대기업은 경제 발전의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되었고, 개별적 사례나 개별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제한적인 전략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대기업은 장기적인 총생산량의 확대에 기여했다. 이런 점에서 완전 경쟁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열등한 모델이며, 이상적 효율성의 대명사로 찬양받을만한 자격도 없다. 따라서 정부의 산업 규제 이론이 기존의 대기업 이론에 바탕을 두는 것은 오류이다. 각 산업이 완전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기업도 움직여야 한다는 그런 원칙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153-4)


"안타깝게도 기업가의 사회적 기능은 이미 중요성을 잃고 있고, 장래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중요성을 잃을 것이다. 기업가 정신의 주된 동인인 경제 과정 그 자체가 앞으로도 계속 현상을 유지한다고 해도, 이런 전망에는 변함이 없다. 우선, 일상적인 업무 바깥에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과거보다 현재가 훨씬 더 쉬워졌다. 혁신 그 자체도 이제 일상적인 업무로 축소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개발은 점점 더 훈련받은 전문가 팀의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고, 그 팀은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그것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초창기에 있었던 상업적 모험의 로맨스는 신속히 사라져간다. 과거에 천재의 섬광 속에서만 구상되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철저하게 사전에 계산될 수 있다. 경제적 변화에 적응되어 그런 변화를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는 개성이나 의지력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리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저항 아래서) 경제 발전은 몰개성화되고 자동화된다."(190-1)


"만약 자본주의 진화(발전)가 중지되거나 완전 자동화된다면, 다시 말해 기업가의 사회적 기능이 중요성을 잃게 된다면, 산업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은 현행 관리직에게 지불되는 임금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단 일부 예외로서, 유사 임대료나 독점적 소득은 당분간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 정신은 그 성취로 인해 발전을 자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기업 정신은 그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의 성공이 가져오는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산산 조각나버린다. 완전 관료화된 거대 산업 재벌은 중소기업들을 몰아내고 그 소유주들을 〈수탈〉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기업가들을 추방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수탈한다. 그 과정에서 이 계급은 그 소득을 잃어버리고, 또 더욱 중요하게는 그 기능을 상실한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는 그 사상을 선전하는 지식인이나 선동가들이 아니라, 밴더빌트, 카네기, 록펠러 같은 재벌들인 것이다."(193)


"나는 부르주아 계급이 합리적이고 반反영웅적이라고 말했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국가를 자신의 의지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반영웅적인 수단에만 의존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경제적 성과에서 기대하는 것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고, 돈을 내놓겠다고 약속하거나 내놓지 않겠다고 위협할 수 있으며, 배신을 잘 하는 용병 부대 혹은 정치가 혹은 언론인을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 정치적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적 보호 틀을 해체하면서, 자본주의는 발전의 장애를 제거하는 한편 그 자신의 붕괴를 막아주는 보호벽도 함께 날려버렸다. 그 과정은 무자비한 필요성의 측면에서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계층의 협력자를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 협력자와의 공생이 자본주의 구도에서 아주 핵심적 요소인데도 말이다."(199-201)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과정은 모든 제도들, 특히 사유 재산과 자유 계약의 제도적 틀을 뒷전으로 내몰고 말았다. 진정으로 〈사적인〉 경제 활동의 욕망과 파도를 표현해주던 것들을 제거한 것이다. 노동 시장의 자유 계약은 이미 사라졌다. 또 그런 제도들을 철폐하지 않은 곳에서는 기존의 법적 형태의 상대적 중요성을 다르게 바꾸어 놓음으로써─가령 합자 회사 혹은 개인 회사에 속하는 법적 형태를 주식회사의 법적 형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동일한 목적을 달성한다. 혹은 그 형태의 내용이나 의미를 바꾸기도 한다. 자본주의 과정은 공장의 담장과 기계류를 단순한 주식 뭉치로 대체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개념에서 생명력을 빼앗아버렸다." "가시적이고 가촉적인 실체가 없는, 구체성이 없고, 기능성이 없으며, 주인이 부재하는 소유권은 과거의 역동적인 재산권처럼 강력한 도덕적 동맹을 이끌어낼 힘이 없다. 결국, 사유재산의 의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205)


3부 사회주의는 작동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 청사진이 우월한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사회주의가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경쟁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화가 최대 속도로 내달릴 때에는 이런 해방의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진화가 경제 메커니즘의 내부적 요인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항구적으로' 침체된다면, 그 주장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무한한 움직임과 반대 움직임이 필요하고, 또 행동을 마비시키는 불확실성의 분위기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반면,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그런 전략이나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산 문제의) 확정적 해결로 가는 길을 단축하거나 부드럽게 해주거나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은 뭐든지 인간의 에너지와 물질 자원을 절약해주고, 또 소정의 결과에 도달하는 비용을 줄여준다. 이렇게 하여 절약된 자원이 완전히 낭비되지 않는 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식) 효율성은 필연적으로 늘어나게 된다."(275-6)


"이것은 특히 경기 순환의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대부분의 현상들에 적용된다. 자본주의 기업은 조절 장치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들이 벌어질 때 생산을 미리 확정하는 계획 경제, 특히 체계적인 조정과 질서 있는 분배는 아주 효율적이다. 특히 어떤 때에는 돌발적 경기를 예방하고, 또 어떤 때에는 불황적 반작용을 방지한다. 이런데 있어서 계획 경제는 이자율이나 여신 공급의 자동적 혹은 조작적 변경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실, 계획 경제는 경기 순환의 상승이나 하강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반면, 자본주의 질서는 그런 상승이나 하강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과정─특히 경쟁적 자본주의 과정─에서는 낡은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일시적인 마비와 손실, 그리고 부분적인 기능 부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괄적 계획 경제에서는 이 과정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낡은 것, 그것만을 버리기〉로 최소화될 수 있다."(277)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도 우리가 앞서 도달한 결론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들의 동의는 이런 단서를 달고 있다. 〈그래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사회주의 엔진을 지휘하는 사람이 신적인 존재이거나, 그 엔진을 담당하는 사람이 대천사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사회주의 사회라고 해도 인간은 신적인 존재나 대천사가 아니고, 인간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예요. 동기 부여와 책임과 보상이라는 패턴을 가진 자본주의 제도가 이론상으로는 최선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실천성 높은 제도라는 거죠.〉" "우리는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사회주의 엔진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 그런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결해야 할 과제─일단 이행기의 어려움들이 모두 처리된 이후에─는 현대 세계의 산업 지도자가 직면한 과제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니면 한결 더 쉽다고 할 수 있다."(284-7)


"사회주의 엔진을 돌리기 위해서 대천사 역시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 목적을 위하여 유익한 구분을 하나 해보자. 첫째, 느끼고 행동하는 일련의 성향들이 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바뀔 수 있다. 단, 그 성향들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 패턴(〈인간성〉)은 그대로이다. 우리는 이것을 '재조건화에 의한 변화'라고 부르자. 둘째, 그런 근본적 패턴 내에서 재조건화가 느끼고 행동하는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적 변화가 합리적인 것이라면 그 성향은 결국 그 변화에 부응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성향이 변화에 일시적으로 저항하면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저항을 '습관'과 결부시켜볼 수 있다. 셋째, 인간성이라는 것도 동일한 인간 집단 내에서 변화될 수 있고, 또는 그 집단의 불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인간성은 인적 구성이 바뀐 집단 내에서는 어느 정도 신축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해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필요는 없다."(287-8)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소규모이지만 고도로 집중된 러시아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붕괴시켰다. 노동자 대중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그들은 마치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무수히 파업을 벌이거나 공장을 접수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노동자 평의회 혹은 노동조합에 의한 관리가 통상적이었고,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1918년 초에 이루어진 타협에 의하여, 노동조합은 엔지니어들과 최고 평의회에 대하여 최소한의 영향력을 겨우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타협은 아주 불만족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결국 1921년에 신新 경제 정책을 실시하게 된 주요 이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1차 5개년 계획(1928년)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32년에 이르러 산업 프롤레타리아들은 과거 차르 시대보다 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볼셰비키들이 다른 것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이 점 하나만은 그때 이후 확실하게 성공했다."(306)


"노조는 탄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에 의해 권장되었다. 노조원 숫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1932년 초에는 근 1,700백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집단 이익을 주장하며 규율과 성과를 방해하던 존재에서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규율과 성과를 올려주는 수단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는 이런 조치에 붙이는 반反혁명적이라는 기이한 레이블에 미소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조치를 반마르크스적이라고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태도에는 반사회주의적인 것은 없다. 계급 투쟁과 함께 방해주의적인 관행은 사라지고, 집단 협약의 특성 또한 바뀌는 것은 논리적 결과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 규율과 집단 규율을 정립시킬 수 있었고, 그것은 우리가 규율에 대하여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켰다. 동시에 권위주의적 규율이 경제적 성과에 수행한 역할을 간과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권위적 규율은 개인 규율과 집단 규율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강력하게 보충했다."(306-8)


4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고전 (민주주의) 이론의 주된 문제점은 〈국민들〉이 모든 개별적 문제에 대하여 확정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의견을 갖고 있고, 또 그런 의견을 대행해줄 〈대표〉를 선임함으로써 그런 의견을 구체적으로 표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민주적 제도의 2차적인 의미이고, 유권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직접 결정한다는 것이 1차적인 의미였다. 이 순서를 바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을 위임하는 것이 1차적 의미이고, 유권자에 의한 문제 결정을 2차적 의미라고 해보자. 다르게 설명하자면 국민의 역할은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 혹은 중간 단체를 만들어내고, 이 단체로 하여금 전국적인 행정부 혹은 정부를 결성하는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갖게 된다. 이 민주적 방법은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며, 그 제도 내에서 개인들은 국민의 표(투표)를 얻는 경쟁적 투쟁의 수단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을 획득한다."(380-1)


"우리가 취한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민〉이 〈통치〉한다는 그 문자적 의미대로 국민이 실제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이 자신들을 통치할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국민은 이 문제마저도 아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의를 더욱 비좁게 잡아야 했다. 즉, 민주적 방법을 확인하는 추가적 기준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민주적 과정이란 유권자의 투표를 얻기 위해 지도자 후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유 경쟁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의 한 가지 측면을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다. 즉, 민주주의는 정치가의 통치이다."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정치가 필연적으로 평생 전문직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개별 정치가들이 정치 분야에 갖고 있는 뚜렷한 전문적 이해, 그리고 독립된 그룹들의 이해를 인식하게 된다."(398-9)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정치의 인적 요소─당 기구를 운영하는 사람, 의회에 진출하는 사람, 각료직에 오르는 사람 등─가 충분히 높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절한 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갖춘 개인들이 충분히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민주적 방법은 국민 전체 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소명에 부응한 사람, 좀 더 구체적으로 선출직에 입후보한 사람들 중에서만 뽑는다. 모든 선출 방법이 이렇게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소명이 재능과 품성을 유인하는 정도에 따라, 그 소명 내에서 국민 평균보다 낮은 혹은 높은 성과가 달성될 것이다. 그러나 관직에 대한 경쟁적 갈등은 한편으로는 인력과 정력의 낭비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적 과정은 정치 분야 내에 손쉽게 어떤 조건들을 형성한다. 그런 조건들이 일단 형성되면, 정치 말고도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둘 만한 인재들을 대부분 물리치게 된다."(405-6)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정치적 결정의 효과적 범위가 너무 멀리까지 확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적 방법의 전반적 제약 사항들에 달려 있다." "그 범위는 정치적 리더십의 경쟁을 벌이는 정부가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의 종류와 수량에 달려 있다. 또 그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자질, 정치적 기구의 유형, 정치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일반 여론의 패턴 등도 그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민주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일반 국민이 이해할 수 있고 또 진지한 의견을 갖고 있는 문제들만 정부가 다루는 것은 아니다. 성격은 같지만 강도가 조금 떨어지는 문제들도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가령 형법 같은) 특정 문제의 입법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자면 정부나 의회의 비전문가들이 빠져들기 쉬운 복수심이나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정치적 결정의 '효과적' 범위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407-8)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현대 산업 국가들의 민주 정부는 공공 행위의 모든 영역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공공 행위는─그 숫자가 많고 적음의 문제와는 상관없이─잘 훈련된 관료제의 서비스를 포함한다. 이 관료제는 좋은 전통과 명성을 갖고 있고, 투철한 사명감과 그에 못지않은 '단체정신esprit de corps'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관료제는 그 나름의 행정 원칙들을 개발해야 하고, 또 그런 원칙들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나름의 권리를 갖춘 권력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관료 사회의 인사, 보직, 승진은 형태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그 사회의 집단 의견에 따라─정치가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공무원 규정에 의거하여─결정되어야 한다. 언제나 그런 일이 벌어지듯이, 정치가나 일반 여론이 공무원 사회에 비위가 상하여 아우성을 칠 때에도 관료 사회는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409-10)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네 번째 조건은, '민주적인 자기 통제'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가 내의 모든 중요한 집단들이 법령집에 들어 있는 법규와 유능한 입법 기관이 내놓은 행정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민주적 방법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민주적 자기 통제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유권자와 의회는 사기꾼과 협잡꾼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적·도덕적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혹은 그들의 방식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국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손상될 것이고 또 그에 대한 충성심도 감소할 것이다. 입법적 개혁이나 행정 조치를 위한 개별적 법안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줄 서는 것을 돕는 정도로 그쳐야지, 빵 배급소에 달려들어 빵을 직접 나누어주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상당히 자발적인 복종이 필요한 것이다."(411)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적 방법의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한 가지 훌륭한 자격을 갖고 있다. 정치적 결정의 영역을 경쟁적 리더십의 방법이 주무를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지는 그들만의 독특한 해결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정치 구도는 공공 권위의 영역을 제한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을 제한한다. 부르주아의 독특한 해결안은 절제하는(간섭을 적게 하는) 국가의 이상으로, 국가는 주로 부르주아의 합법성을 보장하고 전 분야에서 자율적인 개인 노력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 내재된 평화를 사랑하고─적어도 반전적反戰的이고─자유 무역을 선호하는 경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는 정치적 결정의 역할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크게 감소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정치적 역할의 중요성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축소되어 때로는 정치 분야의 무기력이 의심될 정도인 것이다."(415-6)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민주적 절차의 형태와 조직은 부르주아 세계의 구조와 문제들로부터 자라나온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원칙 그 자체도 이런 과정에서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민주주의적 형태와 조직이 자본주의와 함께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충선, 정당, 의회, 내각, 총리 등은 사회주의 체제가 정치적 결정의 아젠다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편리한 도구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아젠다의 리스트에는 오늘날 목격되는 개인의 이해와 그 이해를 규제해야 하는 필요에서 나오는 갈등의 흔적이 전혀 없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사항들이 추가될 것이다. 투자량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기존의 사회 제품 분배 규칙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신규 사항으로 등재될 것이다." "이때 내각의 정치가들, 특히 생산청의 수석 자리를 맡은 정치가는 틀림없이 정치적 요소의 영향력을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효율성과 배치되는 수준으로 그런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다."(420-1)


"민주적 과정을 지키는 일은 아주 미묘할 수도 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이 언제나 유혹에 빠지기 쉬운 행동 노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결국 사회주의 경제의 효과적 관리는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를 의미한다. 공장에서 엄격한 규율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도 투표소에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주권을 이용하여 공장의 규율을 완화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으므로, 정부─국가의 미래를 늘 명심하는 정부─는 이런 규율을 잘 활용하여 그런 주권을 제한해야 한다. 현실적 필요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비하여 더 속임수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고전 이론에 깃든 이상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그런 체제는 아닐 것이다."(423)


5부 사회주의 정당들의 역사적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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