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 지음, 유광태.임채원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미국 정부는 서유럽에서 문화를 이용한 선전선동 활동cultural propaganda이라는 비밀 첩보 프로그램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문화 분야에서는 선전선동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 그 자체였다. 프로그램의 운영은 CIA에 의해 철저히 그리고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비밀 첩보 작전의 중심에는 1950년부터 1967년까지 CIA 요원 마이클 조셀슨이 주도했던 세계문화자유회의CCF가 있다. 활동 기간 동안의 성과는 엄청났다. 활동이 가장 활발했을 즈음, 이 단체는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수많은 직원을 거느렸으며, 유력 잡지 20종 이상을 발행했다. 또한 미술 전시회를 개최했고, 뉴스 통신사를 소유함과 동시에, 세간의 이목을 끄는 국제 컨퍼런스를 조직했으며 음악가와 미술가들에게 수상 기회와 공연 기회를 제공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서유럽의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의 매혹에서 벗어나 '미국의 방식'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15-6)


1장 우아한 시체


"1947년 당시 대중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가 임명한 여러 고위직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제3제국이 유지되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을 계속 지휘했지만,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는 그의 소련 망명을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또한 미심쩍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예술가들이 당대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치 청산 프로그램의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었다." "반공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상징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요구가 나치 제국에 협조한 용의자들의 혐의를 벗겨 줘야 한다는, 시급하면서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지상 과제를 만들어 냈다. 파시즘과 가까웠다는 혐의도 관용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상이 공산주의에 맞서는 데 이용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36-9)


"문화를 정치적 설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데 전문가였던 소련은 냉전 초기에 '문화적 냉전'이라는 중심 패러다임을 확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탈린 체제가 경제력 면에서 미국에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 정신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뉴딜 시기에 예술 분야에 대한 막대한 통제가 있기는 했어도, 문화 투쟁 분야에서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한 정보 장교가 색다른 전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한 것이 1945년에 이르러서인데, 그 전략은 이미 소련이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정보 장교는 전략사무국OSS의 도너번 장군에게 (새로운 냉전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 바 있다. 〈원자폭탄의 발명은 국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평화적' 수단과 '전쟁'이라는 수단 사이의 불균형을 불러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적' 수단의 중요성이 확연히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42)


"각 점령국들이 선전전에서 서로 점수를 올리듯이 경쟁했기 때문에, (당시 유럽의 비참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세련된 문화생활이 왜곡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문화 투쟁에서 소련이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영국 측에는 열람실 난방에 필요한 석탄이 부족했던 그때, 미국은 '미국의 집'을 개관함으로써 소련에 대담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문화의 전진기지'로 설립된 이 기관은 혹독한 기후를 피해 안락한 환경 속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과 영화 상영, 음악 연주회, 토론회와 미술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모두 〈압도적으로 미국 문화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주로 소련에서 나온 정치선전의 영향으로, 미국은 문화적으로 척박한 나라, 껌이나 질겅질겅 씹고 쉐보레 차를 몰면서 뒤퐁 나일론으로 휘감고 다니는 속물들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미국의 집'은 이러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43-6)


"소련의 거짓말이 전 세계에 걸쳐 빛의 속도로 전파되고 진실은 아직 드러날 기미조차 없던 와중에 멜빈 조너 래스키는 분연히 일어나 미국의 정치선전 전략에 혁신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멜빈 래스키 제안서'로 명명된 이 문서는 래스키가 문화적 냉전을 수행하기 위한 독자적 청사진의 근간이 되었다." "래스키가 언급한 〈실재하며 중대한〉 공백은 〈결국에는 사회에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리더십을 제공하는 교양 계층, 즉 문화적 소양을 갖춘 계층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한 실패, 다시 말해 그들을 미국적 이상으로 이끌지 못했던 실패를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결핍은 새로운 학술지를 발간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학술지는 〈공식적인 미국 민주주의의 대표자들 뒤에는 위대하고 전위적인 문화와 예술, 즉 문학, 철학, 기타 모든 문화 분야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 주는 풍부한 성과물이 있다고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60-2)


# 월간지 『데어모나트』Der Monat 창간


2장 운명의 선택


"'미국의 과업'은 이미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에서 분명하게 표현된 바 있다. 이제 미국의 첫 평화 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 창설과 함께 냉전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1947년 7월 26일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해 창설된 CIA는 군사적·외교적 첩보 활동을 조율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 결정적으로, 또한 지극히 모호한 용어로 CIA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명시되지 않은 〈공통의 관심사가 되는 사안〉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정하는 〈여타의 기능과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1947년 법 어디에도 CIA가 다른 국가 내정과 관련하여 정보를 수집하거나 은밀하게 개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명확한 조항은 찾을 수 없다〉라고 훗날의 정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융통성 있는 해석이 가능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여타의 기능' 부분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CIA를 스파이 행위, 비밀 공작 활동, 준군사작전, 적국의 기술 정보 수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65)


"이제 깃털이 나기 시작한 CIA의 위계를 채워 줄 사람들은 유서 깊은 엘리트들로, 미국 기업의 이사회, 고등교육기관, 주요 신문 및 미디어, 로펌, 정부 등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비리그 출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워싱턴에 집중된 100여 개의 부유층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혈거인들'cave dwellers로, 가문 대대로 영국성공회 또는 장로교적 가치를 보존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이었다. 탄탄한 지식, 출중한 운동 능력, 상류사회의 예의범절, 확교한 기독교 윤리라는 원칙 아래 교육을 받은 이들은 피바디 신부Reverend Endicott Peabody 같은 인물을 모범으로 삼았다. 피바디는 이튼, 해로, 윈체스터 등의 영국 사립학교와 같은 원칙으로 그로턴스쿨을 설립하여 미국의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을 배출한 바 있다. 기독교적 가치와 특권에서 나온 의무를 익혀 온 그들은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주도적인 계층이었지만, 무한정한 평등주의에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71-2)


"미국 엘리트들에게 공통된 신념의 핵심적 대변인이 바로 조지 케넌이었다. 그는 외교학자면서 마셜플랜의 기획자이자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이었고, CIA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였다. 1947년 케넌은 이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지지했다." "그해 7월 케넌은 소련의 위협이 진정 어떠한 성격인가 하는 문제보다 소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자신의 관점을 수정했다. 그리고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그 유명한 'X'라는 필명으로 논문을 기고해 냉전 초기를 지배했던 명제들을 도출해 냈다. 케넌은 크렘린이 〈광신적인 이데올로기〉로 〈세계의 힘이 몰려 있는 구석구석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절대 불변의 대항 세력〉, 〈경계를 늦추지 않는 굳건한 견제〉 정책을 펼치자고 제안했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케넌이 특히 주안점을 뒀던 내용은 〈선전선동술과 정치전 기술 개발의 극대화〉였다."(75-6)


3장 월도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시드니 훅은 1902년 12월, 뉴욕의 윌리엄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당시 견줄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브루클린의 빈민 지역이었기에, 훅은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 지지자가 되었다." "미국 공산당을 도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초판 번역을 준비하기도 했던 훅의 신념은, 많은 뉴욕 지식인들의 태도 변화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현실에 대한 일련의 폭로들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1936~37년에 일어난 레온 트로츠키의 반역 재판, 1939년의 독소불가침조약, 그리고 재판·이론·정책과 관련하여 재앙에 가까운 스탈린의 실책이 잇따르자 결국 신념을 배신해 버렸던 것이다. 결국 공산당의 '공공의 적'이 되어 '반反혁명의 파충류'로 비난을 받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십이지장충'Hookworm으로 폄하되었다. 1942년에 이르러 훅은 작가이자 편잡자인 맬컴 카울리의 동향을 FBI에 고발하기도 했다. 윌리엄스버그의 혁명가 훅이 이제는 보수 진영의 귀염둥이가 된 것이다."(100-1)


4장 민주주의 진영의 데민포름


"소련의 선전이 늘어놓은 거짓 주장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한 발 늦게 이루어졌다.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공산주의 진영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정보조사국IRD을 설립한 것이 1948년 2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당시 외교부 산하 조직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IRD 설립을 기획했던 당시 외교부 장관 어니스트 배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로지 물질적인 성장이라는 측면에 기반해서 공산주의를 비난함으로써 공산주의가 격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미망에 불과하다. 유럽의 기독교적 정서가 가진 위력을 고려하면, 기존의 민주주의적·기독교적 원칙에 긍정적인 성격이 보태져야 한다. 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서유럽 정부들이 소련의 핵실험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부의 시스템에서,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공산주의의 대안이 될 미래상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106-7)


"초기 IRD의 가장 중요한 자문역 중 한 명이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서 쾨슬러였다. 쾨슬러는 소련에 있을 때, 전쟁 전 설립된 전위 선전조직망(지휘자였던 빌리 뮌첸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뮌첸베르크 사단'으로 알려져 있다)의 배후에서 책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소련의 정치선전 조직들이 내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쾨슬러의 가르침 덕에, IRD는 좌파라는 정치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권력의 중심과 대립한다고 여겨지는 연구 기관 혹은 개인을 다시 권력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는 일이 얼마나 유용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포섭의 목적은 이중의 소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진보적인' 단체를 가까이 둠으로써 그들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었으며, 둘째는 진보 단체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혹은 내부 구성원들을 [진보적인 체할 뿐인] 유사한 주제로, 더 나아가 은근히 덜 급진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단체의 영향력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109-11)


"당시 CIA는 어떤 아이디어에 골몰하고 있던 상태였다. 바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는 예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쾨슬러와의 협의 끝에 이 아이디어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쾨슬러의 주장에 따르면, 공산주이 신화를 파괴하는 유일한 수단은 비공산주의적인 좌파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쾨슬러가 얘기했던 사람들은 이미 국무부와 정보기관이 '비공산주의 좌파'Non-Communist Left, NCL라는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를 마친 상황이었다. 이로써 아서 슐레진저가 '조용한 혁명'이라 일컬은 바와 같이, 공산주의의 환상에서는 벗어났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에 여전히 빠져 있던 지식인들과 그들이 사상에 대해서 정부 차원의 이해와 지원이 증가하게 되었다." "〈칩 볼런, 아이재이어 벌린, 니콜라스 나보코프, 에이버럴 해리먼, 조지 케넌 모두 비공산주의 좌파의 결집을 독려하는 제 주장을 열렬하게 지지했습니다.〉 슐레진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114-5)


5장 이념의 십자군


"1950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의 개회식이 열렸다. 나흘간 계속 토론회가 열렸고, 브란덴부르크 문과 포츠담 광장과 베를리 동서 분계선을 둘러본 뒤에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다시 칵테일파티와 특별히 마련된 콘서트에 참여했다. '과학과 전체주의', '예술, 예술가와 자유', '자유 사회의 시민', '평화와 자유 수호', '자유세계의 자유 문화'의 다섯 가지 주요 주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공산주의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극단적인 의견 대립이 나타났다. 쾨슬러는 서구 지식인들이 진용을 갖추어 투쟁 그룹Kampfgruppe, 즉 공산주의를 전복시키겠다고 무조건적으로 맹세한 전투 집단을 형성할 것을 호소했다. 〈슐레진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무미건조하고 감정 없는 연설을 했습니다. 쾨슬러가 온 마음을 다해 연설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이었어요. 쾨슬러가 분위기를 바꿔 놓았던 거죠.〉 로런스 드 네프빌의 기억이다."(138)


6장 '회의'라는 이름의 작전


"위즈너는 세계문화자유회의를 상설 독립체로 확립할 계획을 세우고 OPC 프로젝트 검토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1950년 11월 말 브뤼셀에서 회합을 가진 운영위원회는 래스키가 밑그림을 그린 조직안을 채택했다. 조직안에 나온 대로 25명으로 구성된 국제위원회와 5명의 명예의장단이 지명되었다. 그들은 다시 5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의 지도를 받는다. 상임위원회는 행정국장, 편집국장, 조사국장, 파리 지국장, 베를린 지국장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다시 사무총장의 통제를 받는다. 래스키의 이 조직도는 코민포름의 조직도를 그대로 빼닮은 것이다. 〈그들의 조직명은 공산당의 조직명과 같았죠.〉 한 역사학자가 지적했다. 〈CIA는 이 문화 재단을 공산당의 거울 조직으로 구성했는데, 그 핵심에 비밀 조직이 있는 것까지 똑같았습니다. 마치 두 조직이 그렇게 하기로 짜놓은 듯이 말이죠.〉 니콜라스 나보코프는 문화자유회의를 주재하는 상임위원회를 두고 〈우리 정치국 동지들〉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기도 했다."(157)


# OPC : CIA 정책조정실


"〈인간의 정신으로 겨루게 될 때, 진실은 미국만의 특유한 무기이다.〉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바렛은 이렇게 선언했다. 〈진실은 고립된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의 설파는 구체적인 행위나 정책과 연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고도로 숙련되고 효과적인 방식을 택한다면, 진실을 위한 활동은 우리에게 공군만큼이나 필수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진실은 미국의 것이다. 진실을 도모하기 위해 속임수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라. 그것이 바로 쾨슬러가 말한 〈절반의 진실로 전적인 거짓말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었다." "좌파 세력을 지원해 주는 목적은 그들을 지배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신중하게 접근하고 그들 집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울분을 해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나올 경우에는 그들의 주장이 알려지지 않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활동마저 제한하는 것이었다."(171-3)


7장 캔디


"마셜플랜 초기, 아직 혁신적인 움직임이 남아 있었을 때, 마셜플랜의 자금이 이중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금의 수혜국들이 각각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에 비례한 일정 금액을 자국의 중앙은행에 예치해 해외 원조 프로그램에 기여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수혜국과 미국의 상호 조약에 따라 이 자금은 양자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자금이 된다. 대부분의 자금(95퍼센트)은 수혜국 정부의 자산이 되지만, 나머지 5퍼센트는 예치와 함께 미국 자산이 된다. 바로 이 '대충자금'─매년 대략 20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 자금─은 곧 CIA의 활동 자금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충자금을 지출 관리하는 경제협력처는 1949년 4월, '독재와 전쟁에 대한 국제적 저항의 날' 집회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4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제 어빙 브라운은 마셜플랜이라는 '캔디'를 통해 CIA의 비밀 자금을 대거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183-5)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CIA가 그들을 '지도'하면서, 그리고 즉흥적 활동을 억제하면서 관료 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고상한 탄생 과정에도 불구하고, 문화자유회의가 CIA의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은 곧 문화자유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워싱턴의 의중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에는 호혜의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CIA가 미국 외교정책의 목표를 전달해 주면, 그 대가로 서유럽의 지적 흐름에 깊이 관여하는 지식인 집단이 이 목표들을 명료화formulate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이나 주장을 쉽게 표현해 주거나 심지어는 수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 CIA는 즉시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주었다. 조셀슨은 CIA의 지휘 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문화자유회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임무도 착실히 수행했다. 그 일은 해내기 어려운 임무였고, 신뢰감을 주며 수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지만, 조셀슨은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186-8)


8장 이 미국의 축제날에


"1951년 초 나보코프는 어빙 브라운에게 대형 예술 페스티벌의 기획에 관해서 비밀 메모를 보냈다. 〈유럽에 있는 미국 최고 수준의 예술가 단체와 유럽의 예술가 단체가 처음으로 공동 작업 하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는 미국과 유럽 문명 간의 문화적 연대와 상호 의존성을 보여 줌으로써 자유세계의 문화생활에 전방위적 효과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퍼뜨리는 데 성공한) 미국 문화가 열등하다는 유럽의 치명적인 통념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이 페스티벌은 성공일 것입니다. 이 페스티벌이야말로 전체주의 반反문화에 대한 자유세계 문화의 도전이며 용기의 원천이자 '도덕적 교정'이 될 것입니다.〉" "CIA 국제조직국IOD의 톰 브레이든은 이 계획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우리의 문화가 주는 효과나 의미에 대해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논쟁해 봤자 문화 그 자체가 낳은 결과물에는 비할 수 없다〉라는 나보코프의 주장에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195-6)


"1952년 4월 1일, '20세기의 걸작' 페스티벌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봄의 제전」을 연주하는 가운데 파리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히틀러나 스탈린에 의해 공연이 금지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다(개중에는 알반 베르크처럼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에게서 금지 처분을 받은 영광의 인물도 있었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퇴폐적 음악'을 작곡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났으며, 소련의 음악 '평론가'들이 〈반反미학, 반反화성, 혼란과 무의미〉로 규정해 버렸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도 무대에 올랐다. 그 밖에 나치 독일을 떠난 또 다른 망명자이자 스탈린주의자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사이비 모더니스트들의 맹종을 부른 사이비 대위법〉 유파의 창시자라고 조롱하던 파울 힌데미트, 소련의 음악 저널 『소비에츠카야무지카』가 〈인상주의라는 나무〉 아래 〈모더니즘이라는 악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했던 클로드 드뷔시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201-2)


"회화 및 조각 전시회 큐레이터는 미술 평론가이자 뉴욕현대미술과MoMA의 부관장을 역임한 제임스 존슨 스위니가 맡았다. 4월 18일, 미국이 수집한 마티스, 드랭, 세잔, 쇠라, 샤갈, 칸딘스키를 비롯한 20세기 초기 모더니즘 대가들의 작품이 추려졌다. 스위니가 언론에 발표한 보도자료의 내용을 보면, 전시회 측이 체제 선전의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 작품들은 〈자유라는 조건 아래 다양한 나라에서〉 창작된 것들로, 작품 자체가 〈현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웅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전시가 예정된 걸작들은 나치 독일이나 현재 소련, 그리고 그 위성국과 같은 전체주의적 체제 아래에서는 탄생할 수도, 전시 허가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정부가 우리가 전시하려는 회화·조각 작품을 '퇴폐적인 것' 혹은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딱지를 붙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204-5)


9장 컨소시엄


"문화의 자유는 싸게 먹히는 장사가 아니었다. 17년이 넘도록 CIA는 세계문화자유회의와 그 관련 프로젝트에 수천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CIA는 사실상 미국의 문화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화를 냉전의 무기로 활용하려는 CIA의 시도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은 '민간' 단체들이나 '후원자들'의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조직해 비공식적인 컨소시엄(민간-정보기관 복합체)을 만드는 것이었다. 컨소시엄은 박애주의 재단, 기업체, 기타 기관이나 개인이 연합해 만든 기업형의 조직으로, 서유럽에서 비밀 첩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 CIA와 밀접하게 협력해, 엄폐물을 제공하고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이 '후원자들'은 국내외적으로 정부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용되었지만, 겉보기에는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개인과 단체들은 자신의 '사적인' 지위를 유지하면서 실상은 CIA가 선정한 냉전의 벤처 투자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221)


"박애주의를 표방한 재단들은 수혜자가 돈의 출처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대규모 자금을 CIA 프로젝트에 조달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재단들을 통해서 CIA의 대규모 개입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진짜' 재단들, 이를테면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뉴욕카네기재단 등은 〈자금 모금을 위장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단체〉로 여겨졌다. 1966년, CIA에 대한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이 위장술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일수록 특히 효과적이었는데, 그들에게 적대적인 비판자들은 물론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재단 구성원들이나 후원자들에게 재단이 순수하고 부끄럽지 않으며 민간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CIA가 〈1950년대 초반부터 청년 단체, 노동조합, 대학, 출판사, 기타 민간 기관을 가장하여 거의 무제한적인 범위의 첩보 활동〉을 벌여 왔기에 자금을 모으기 유리했다는 점은 확실하다."(229-30)


10장 진실 알리기 캠페인


"1950년대 초반, 미국의 문화 전쟁에서 의제를 설정하는 데 가장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은 바로 전미자유유럽위원회 위원장으로, 이후 아이젠하워의 심리전 특별 자문 역을 맡았던 C. D. 잭슨이다." "C. D.의 첫 번째 임무는 미국의 첩보전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심리전과 정치선전 활동의 주체는 국무부, (마셜플랜을 운영하던) 경제협력처, 군 정보부, CIA, 그리고 CIA 내부 조직이지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위즈너의 정책조정실OPC로 분리되어 있었다." "비밀 첩보 활동의 범정부적인 내부 분열과 갈등 확산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부와 CIA는 심리전 활동 조정 업무를 총괄할 독립 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했다. 국무부의 저항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제안을 적극 지지했던 조지 케넌이 1951년 4월 4일 심리전전략위원회PSB를 설치하는 기밀 명령에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C. D. 잭슨이 그토록 바라던 '정책 청사진'을 그려 줄 위원회가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247-51)


"찰스 버턴 마셜은 PSB가 '비합리적 사회 이론'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파레토, 소렐, 무솔리니 등을 언급〉시킨다는 것이다." "마셜에 따르면, PSB는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들을 〈정책 기획자들의 세계관〉에 경도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토착 엘리트들을 포섭하면, 이러한 계획을 미국이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자생적인 발전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PSB의 교조적인 문서를 뒷받침하는 엘리트 이론은 비공산주의 좌파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세계문화자유회의에 대한 지원을 정당화하는 CIA와 아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정책 기획자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엘리트 지식인들이 동원된 것에 대해서, CIA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CIA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고취하려고 했던 태도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추론과 확신'을 통해서 미국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고 믿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252-3)


11장 새로운 합의


"1952년에 열린 『파르티잔 리뷰』 심포지엄의 주제는 '우리의 국가, 우리의 문화'였다. 편집자가 직접 설명한 이 심포지엄의 목적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국가와 국가기관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얻었다는 자명한 진실〉을 조망해 보는 것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흔히 미국은 예술과 문화에 비우호적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점점 바뀌기 시작했고,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은 이제야 자신의 국가와 문화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 정치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미국식 민주주의가 고유하고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단순히 자본주의자들의 환상이 아니라, 소련의 전체주의에 맞서 지켜내야 할 현실이라는 뜻이다. ······ 유럽은 더 이상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다. 비판이든 옹호든 미국식 삶에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주었던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운명의 바퀴가 돌고 돌아, 이제 미국이 서양 문명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268-9)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혁명 이후 처음으로 지식인 사회의 주요 인원들이 더 이상 꼭 필요한 반대 세력이 아님을 보여 준 사례였을 겁니다. 자기네 국가를 지지한다고 해서 지성적 또는 예술적 진실성의 격이 낮아지지는 않는다는 얘기죠.〉 이 점에 주목했던 역사학자 캐럴 브라이트먼의 말이다. 『타임』이 '파르나소스,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연안까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게재하면서 이렇듯 새로운 지식인데 대한 개념이 확정되었다. 〈저항하는 인간은 ······ 긍정하는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긍정하는 인간은 국가가 새로운 모습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지식인들의 참된 역할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반체제 인사refusniks에서 '체제 옹호자'all-rightniks로 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자유주의자에서 급진주의자로, 미적지근한 공산주의 동조자에서 열렬한 반스탈린주의자로 변신하던 그 빠른 속도는 여전히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드와이트 맥도널드가 남긴 기록이다."(270-1)


12장 잡지 'X'


"1953년부터 1990년까지 발행된 『인카운터』Encounter는 전후 지성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문학계의 칵테일파티라고 할 만큼 매력과 활력이 넘쳐났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들, 아널드 토인비, 버트런드 러셀의 평론 등 당대 최고 지성의 글들이 이 잡지를 통해 출판되었고, 영국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문화를 주제로 잡다한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허다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거나, 단지 외면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보나, 이 잡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확고한 반공주의 냉전 사상의 정수였다. 그렇지만 재정 면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겨 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심각한 적자 상태로 운영되었다. 적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발행 부수가 두 배는 되어야 했다. 이 잡지의 성격은 지적intelligent이었다. 그와 동시에 첩보intelligence의 세계와도 심각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277-8)


"영국 정부 내의 정보기관들도 『뉴스테이츠먼』이 '아둔한 논조'와 '끔찍한 단순화'를 고루 갖춘 잡지라 판단하여,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영국 정보조사국IRD이 『트리뷴』을 지원하고 해외의 요원들이 그 내용을 발췌해 국제적으로 배포한 것도 그러한 연장선상의 몸부림이었다. 맬컴 머거리지와 우드로 와이엇은 1950년 4월, 주간지 『트리뷴』의 편집자 토스코 파이벌을 만나서 잡지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결과 머거리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잡지가 심각한 파산 위기에 처해 있음은 명백했다. 나는 그들에게 계속 냉전의 관점을 대변하여 『뉴스테이츠먼』에 강력하게 대응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내 마음에 들었던 『뉴스테이츠먼』의 의제 하나를 예로 들면, 『뉴스테이츠먼』이 정치선전을 위한 매체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좌파는 곧 지성인이다, 역으로 지성적인 사람은 좌파임이 분명하다'라는 의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279)


13장 성스러운 윌리들


"소비경제의 호황과 안정적인 사회를 이룬 미국의 이면에는 또 다른 미국이 있었다. 음울하고, 어둡고, 어딘가 불편한 미국, 예일대의 역사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교과서 『미국 역사 탐험』이 있는 미국이 있었다. 이 교과서는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각자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다른 미국인을 목격할 경우, FBI 담당 부서에 즉시 신고토록 합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렇게 썼다. 〈어린 고자질쟁이에 대한 칭찬은 전체주의 사회의 징표였고, 냉전은 이러한 고자질을 '미국적 전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마블Marvel의 만화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공산주의자, 스파이, 배신자, 외국의 비밀 요원은 들어라! 내 뒤의 모든 충성스러운 자유인들과 함께, 너희들 마지막 하나하나까지 찾아내 비열한 인간쓰레기임을 낱낱이 밝힐 때까지, 캡틴 아메리카는 너희들을 찾아 싸움을 벌일 것이다!〉"(320-2)


"바로 이것이 매카시의 '간악한 2인조', 로이 콘과 데이비드 샤인의 미국이었다." "1953년 봄, 로젠버그 재판의 충격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인들에 대한 분노가 널리 퍼져 나가고 있을 때, 마침 콘과 샤인은 유럽에 소재한 미국의 정보 분야 전초기지들로 시찰을 떠났다.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 소식이 크렘린에 의해 공식 발표된 이후, 이 두 사람의 다음 행보만큼 그 사상적인 측면에서 소련 밖에 있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 스탈린주의의 고약한 입 냄새를 충실하게 재현해 내는 것은 없었다. 7개국의 미국 공보원USIS 도서관을 방문한 그들은 200만 권의 도서 중 30만 권이 '친공산주의' 작가의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책을 모두 없애 버리도록 요청했다." "유럽에 소재한 미국 정부 기관과 재외 공관들이 매카시에 굴복해 버리자 미국 문화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 같은 매카시의 문화대청소 작업은 표현의 자유를 선도한다는 미국의 위상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322-4)


"〈연방정부의 거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의심의 대상이었다.〉 매카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CIA 감찰관으로 일했던 라이먼 커크패트릭의 말이다. 〈당시 분위기는 맹렬한 비난과 공판이 단두대로 이어지던 프랑스 혁명 때와 비슷했다. 워싱턴의 실제 단두대는 없었지만, 개인의 경력이나 삶 전체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단두대보다 훨씬 심한 상황이었다.〉 국무부의 사기를 심각하게 꺾어 놓은 매카시는 이제 CIA로 눈을 돌렸다. CIA는 〈주요 타깃이자 훨씬 중요한 타깃이었다. 특히 그에게 더 큰 유명세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계산에서라면.〉" "중대한 순간이 다가왔다. 이 순간은 매카시의 재야 반공주의가 CIA가 가장 공을 들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한 비공산주의 좌파의 전위 네트워크를 붕괴시켜 침몰로 몰아갈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매카시가 CIA의 비공산주의 좌파 프로그램 주위에서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고 다니자 CIA는 가능한 한 몸을 사려야 했다."(329-31)


"그러나 매카시도 결국은 1954년 말부터 서서히 몰락해, 1957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덜레스의 CIA는 매카시의 공격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미국은 한동안 매카시가 키워 놓은 악마에 퇴마의식을 하느라 애써야 했고, 여전히 〈매카시가 신봉하던 가치와 그가 벌인 십자군 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근거 없는 가정들이 대부분 그 유산으로 남겨졌다.〉"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 없이 매카시즘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진실에 대한 확인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에서 멀어지고, 공포와 적개심으로 판단이 흐려지고, 머리 켐턴이 말한 〈과격함에 대한 과도한 참여〉가 이루어져 사람들이 이제는 〈정상적인 것이 나쁜 것인 양〉 착각하게 되는 사태야말로 냉전 사상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우리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문제를 다룰 때만큼은 증거와 추론이라는 정상적인 법칙에서 벗어나게 된다〉라고 훗날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주장했다."(353-4)


14장 음악과 진실을,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미국문화자유위원회가 카라얀이나 푸르트벵글러 같은 개인에 대해 보여 준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일관성도 없고 모순된 태도로만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제가 보기에, 교향악 연주회의 가치는 지휘자가 한때 어느 정권에 줄을 댔느냐 하는 사실과는 무관합니다.〉 조지 케넌의 말이다." "미국의 문화적 냉전주의자들은 곧 그들이 위험한 역설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곳에서는, 예술로부터 정치를 열심히 떼어 놓고 있었지만 공산주의를 다룰 때는 그렇게 구별해서 보지 않았다. 이런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태도는 1940년대 후반 독일의 나치 청산 과정에서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프루트벵글러는 에후디 메뉴인과 함께한 연주회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멜빈 래스키의 『데어모나트』를 통해 조롱을 받았다. 문화적 냉전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가 내건 전제 조건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데올로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79-80)


"미국문화자유위원회가 그렇게 색출해 내고자 했던 공산주의 동조자나 중립주의자에게 관용이 돌아갈 몫은 없었다. 적어도 195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 내에서 문화의 자유를 짓밟는 주적이 공산주의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른 전문 직업인들처럼 반공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 틈을 타 자신의 시장을 방어 내지 확장하고자 했다." "자유유럽방송 국장이었던 조지 어번은 많은 냉전주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와 맺는 적대적 공생contrapuntal 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주제와는 거의 상관없이, 논쟁하고, 편 가르고, 싸움을 벌이도록 강요하는 충동〉이 이러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냉전주의 지식인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격렬하고, 냉소는 너무나도 삭막하며, 또한 그 분석은 예전에 그들이 포기했던 세계상에 너무나 얽매여 있다. 그들은 부정不定의 발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지만, 그 발걸음은 언제나 똑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라고 덧붙였다."(381-4)


15장 랜섬의 아이들


"〈책이 다른 모든 정치선전 매체와 다른 이유는 한 권의 책이 독자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어떤 매체보다 크기 때문이다.〉 CIA 비밀작전팀장에 따르면, CIA는 고유의 비밀 출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었고, 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책을 출간하거나 배포하라. 그러나 미국의 영향은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해외 출판업자나 서적상에게 은밀히 지원금을 지급하라. 미국 정부와 공공연한 관게로 엮인 단체의 책이 아닌 '오염'되지 않은 책을 출간하라. 특히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미묘하여 노골적이지 않은' 책이라면 더욱 좋다. 작전상의 이유가 있을 때 책을 출간하라. 상업적 고려는 하지 말라. 해당 국가의 기관이나 국제기구에 보조금을 지급해 책을 출간·배포하게 만들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책은 해외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로 하여금 쓰게 하라. 작가에게 직접 후원금을 지급하거나, 비밀 계약이 가능할 경우 출판 대행인이나 출판사를 통해 후원금을 지급하라.〉"(417-8)


16장 양키 두들


"미주리 주 공화당 의원 조지 돈데로는 추상표현주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보았지만, 미국 문화계의 주류 인사들에게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반공주의, 자유, 자유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예술의 비구상적 성격과 정치에 대한 침묵은 추상표현주의가 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척점임을 말해 준다. 그것은 소련이 증오해 마지않았던 예술 형태 중 하나였지만, 앞으로 추상표현주의가 맡을 역할은 그 이상이 될 터였다." "일찍이 1946년에 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미술에 박수를 보내며 〈독립적이며 자존적이고 국가의 의지, 영혼, 성격을 드러내는 진실된 표현〉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이 평론가들 눈에 〈새로운 미술은 그 미학적 특성을 보아, 어중간한 지성으로 해외의 '이론'을 조립하고 편집하고 소화하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이식해 놓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예술이 더 이상 유럽의 영향에 종속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새로운 국가적 발견의 주요 대표자는 잭슨 폴락이었다."(432-3)


"이제는 붓조차 들기 힘든, 무기력에 빠져 늙어 가는 유럽 모더니즘의 대표자 마티스의 옆으로 혈기 방장한 폴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폴락은 '액션페인팅'이라 알려진 기법을 들고 나타났다. 땅바닥 위에 거대한 캔버스를 놓고(야외면 더 좋았다) 그 위에 온통 물감을 뿌리면, 흩뿌려진 물감이 만드는 불규칙한 선들의 덩어리가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고, 물감이 경계 밖으로 넘쳐 나오면, 그는 마치 아메리카 대륙을 다시 발견하려는 듯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술로 충전되어 자유분방하고 무아지경에 빠진 폴락의 손이 빚어낸 모더니즘은 엄청난 열광을 몰고 왔다. 어느 평론가가 〈술 취한 피카소〉라고 평했음에도,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앞다투어 〈미국 회화의 승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폴락의 찬미자들에게 미국은 활기 넘치고 건강하고 자유분방하며 거대한 나라였다. 그리고 폴락의 작품은 위대한 미국의 신화, 즉 두려움을 모르는 개인이 홀로 외치는 자유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434)


"좌파 예술가들은 후원해 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류 인사들의 믿음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에게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후원자가 기부하는 땡그랑 동전소리에 묻혀 잠잠해질 수 있었다. 예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깨어 있는 후원자들의 후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타당성을 역설했다." "CIA가 민간의 투기 자본가들과 함께 한 후원 활동들 또한 바로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특히 톰 브레이든이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그들을 먹여 살릴 엘리트를 필요로 한다는 그린버그의 제안에 매료되었다. 마치 르네상스 시절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브레이든이 말하는 후원이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지도하고 교육할 의무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무식한 사람들, 또는 좀 더 좋은 말을 쓰자면 그저 이해를 못할 뿐인 사람들과 항상 싸워 나가야 합니다.〉"(440-1)


"추상표현주의라는 거인 앞에서 자기가 왜소해졌다고 느낀 사람은 비단 유럽의 예술가들뿐이 아니었다. 애덤 고프닉은 〈특대 사이즈의 추상 수채화는 미국 미술관의 유일한 스타일이 되어 버렸고, 두 세대에 이르는 사실주의자들을 지하로 몰아넣어 정물화를 마치 지하출판물samizdat처럼 돌려 보게 만들었다〉라고 썼다. 1959년, 존 캐너데이도 〈당시는 추상표현주의가 최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때로, 뉴욕에서는 뉴욕파 화가들의 화풍을 닮지 않은 무명 화가의 작품은 전시회를 열고자 해도, 마땅한 갤러리를 한 군데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했다. 12년 간의 외유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 운동 전체가 거대한 비즈니스 투자 사업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추상표현주의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체계화되어, 한때는 도발적이고 학계의 관례에 이질적이었던 모습을 버리고, 공인된 매너리즘 혹은 공식 예술의 지위로 축소되었다."(466-7)


17장 분노의 천사들


"추상표현주의가 냉전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을 즈음, 미국은 더욱 강력한 무기를 발견했다. 그 무기의 이름은 하나님이었다. 도덕률에 입각한 종교적 신념은 1789년 미국 헌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지만, 미국이 호산나 소리 높여 외치는 하나님 찬양을 얼마나 유용한 무기로 쓸 수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바야흐로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신은 어디에나 있었다. 1954년 성경풍선프로젝트에 따라 철의 장막 위를 떠다니던, 성경을 넣은 1만 개의 풍선 속에도 신이 있었다. 1954년 6월 14일, 국기에 대한 맹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미국〉이라는 문구를 포함하도록 의회의 결의가 있던 순간에도 신의 윤허가 있었다. 아이젠하워의 말에 따르면, 그 문구는 〈미국의 유구한 전통과 미래를 아우르는 종교적 신념의 우월성〉을 되새기도록 해주었다. 신은 심지어 달러 지폐에도 등장하여, 1956년 미 의회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구절을 국가의 공식 모토로 삼기로 결정했다."(474-5)


"라인홀트 니부어는 세계문화자유회의의 명예 홍보대사였고, 냉전의 '현실주의자'로, 정확한 계산을 통해 권력의 균형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엘리트들만의 권위로 배타적인 책임을 지는 대외 정책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니부어 또한 그러한 엘리트들의 일원으로서 권위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한편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니부어로부터 '잠재적인 악惡'을 교훈으로 얻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원죄라는 교리는 정치적 도구로 성공적인 탈바꿈을 하고 〈하나님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삼자는 주장으로 니부어는 시드니 훅의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 종교의 의무는 모든 주요 냉전 강령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1950년대 미국의 모든 권력 체계는 어떤 일원론적이면서 근본주의적인 선언에서 비롯되는 듯 보였다. 그 선언이란 미래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간이라는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결정됨을 의미했다."(477-8)


"극비 문건에 따르면, '전투적 자유Militant Liberty'는 〈공산주의 치하의 실상을 단순한 용어로 표현하고, 자유세계에서 생활양식의 근거가 되는 원칙들을 설명하도록〉 고안된 개념으로, 〈자유세계가 직면한 위험성의 규모를 자유 시민들이 이해하도록 일깨워주고, 그리하여 이러한 위험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투적 자유'는 미국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제국으로서의 책임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한 지상 과제(그리고 그것을 위한 희생)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는 의무, 집단, 명령에의 복종, 남성적 대담성의 우월함 등을 찬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정상적으로 오랜 기간 병역을 회피했던 존 웨인이 미국 군인의 전형이자 미국지상주의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듀크'Duke 존 웨인은 개척자의 모습으로 세계를 굴복시켰다. 1979년 의회는 그에게 명예 훈장을 추서했다."(483-7)


"소련은 미국의 약점인 인종 문제를 내세우면서 이를 줄곧 물고 늘어졌다. 특히 1946년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에게 '당혹감과 낭패감'을 안겨준 좋은 예가 있다. 그가 발칸반도 국가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는 소련 측에 항의하자, 즉시 이런 대답이 되돌아 온 것이다. 〈번스 선생네 나라를 보시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흑인들도 똑같이 권리 없기는 매한가지 아니오?〉 할리우드에서 벌인 알섭의 활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 저임금, 불평등, 폭력에 대한 소련의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벌인 광범위한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무부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던) 작전조정위원회OCB 내의 심리전 전문가들은 흑인 예술가들의 해외 투어 기획을 주 업무로 하는 비밀 조직인 문화공연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다양한 인종 및 흑인 예술가들의 공연은 이렇듯 비밀스럽게 기획된 '수출'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494-5)


18장 새우가 휘파람을 불 때


"1956년 11월 4일 일요일, 오전 8시 7분이 되자 라디오부다페스트는 침묵에 잠겼다. 밤사이에 수도로 밀어닥친 소련 군대는 10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억류 국가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근 10년 동안 계획을 짜고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하던 미국은 이제 넋이 나간 듯 꼼짝없이 서서 소련의 완력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투쟁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고 혁명의 승리만을 함께 향유하려 하는 자유세계에 절망하며 헝가리 혁명은 숨을 거뒀다.〉 11월 11일 마네 스페르버는 비통해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미국 정부의 전략가들과 정보기관의 최고위 관리들이 이미 헝가리 봉기와 같은 사건을 수년에 걸쳐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현실에 직면하고 나니 이러한 탁상공론은 '용두사미'처럼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어느 누구 하나 현실에 맞춰 계획을 짜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때 그 일이 터진 겁니다.〉 1954년 자유유럽방송에 배치되었던 로런스 드 네프빌의 말이다."(512-4)


19장 아킬레스의 뒷꿈치


"CIA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자산'asset은 〈작전을 수행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정보기관이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자원〉을 의미했다. 정보기관에서는 작전 운용의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이란 톰 브레이든에 의해 공식화된 것으로, 그 산하 조직들이 CIA의 지원은 받더라도 굳이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들을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좌파적인 의제도 『인카운터』 같은 기관지를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반면에 영국 철학자 리처드 월하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한 의제는 좌익적 성격을 띠되, 좌익적이라는 인상만 줄 뿐이었고요. ······ 제 생각에, 그렇게 하는 목적은 『인카운터』에 게재된 모든 의견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떤 정도에 이르면 글을 여지없이 삭제해 버렸어요. 그 주제가 미국 외교정책상의 이해관계와 결부될 때 특히나 그러했지요.〉"(531-2)


20장 문화적 NATO


"영국 노동당의 명성은 제2차 세계대전 말, 압도적인 드표를 기록하며 처칠을 실각시켰던 1945년 총선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947년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열기가 시들해졌고, 냉전으로 인해 당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노동당 우파는 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합심했던 반면, 노동당 좌파는 반스탈린주의 진영과 소련을 옹호하는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이 노동당 우파는 『소셜리스트커멘터리』Socialist Commentary라는 학술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가장 눈에 띄는 인사로는 데니스 힐리, 앤서니 크로슬랜드, 리타 힌든, 휴 게이츠켈 등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국유화에 관한 당헌 4조─생산·분배·교환수단의 공동소유를 명시한─의 폐지를 포함하여 전력을 다해 노동당을 현대화시키려 했던 사람들로 이른바 '수정주의자들'로 알려진 집단이었다. 당시 CIA는 유럽에서 자신들의 구상에 맞게 영국의 정치계와 사상계를 옭아매고 싶어 했는데, 이 집단이 바로 그러한 활동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555-6)


"통합된 유럽, 그리고 미국 간의 동반자적 관계라는 개념을 증진하기 위해서 주요한 압력 집단으로 활동했던 단체는 유럽운동이었다. 윈스턴 처칠, 에이버럴 해리먼, 폴앙리 스파크가 주도했던 이 단체는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감독을 받았으며, 거의 대부분의 활동 비용을 (유럽통합추진미국위원회라는 위장 단체를 통해) CIA에서 제공받았다." "이러한 조직들은 CIA의 지도를 받아, 유럽인들이 보다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선봉에서 정치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좌익 정치운동 단체들의 급진성을 완화시키는 일을 했다. 워싱턴 측은 국제주의적 자유주의자들, 즉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따르지 않고 유럽 고유의 원칙에 의거하여 유럽을 통합할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을 그저 중립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CIA와 심리전전략위원회PSB는 다름 아닌 이러한 이단 행위를 〈분쇄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획과 대중매체를 이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556-7)


21장 아르헨티나의 시저


"세계문화자유회의는 남미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년에 걸쳐 노력 중이었다. 문화자유회의가 남미에서 관여한 잡지는 『콰데르노스』로, 편집장은 (1921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공산당을 창건했고, 코민테른의 지하 조직망에서 일한 바 있는) 훌리안 고르킨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 '극심한 불신'을 퍼뜨리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고르킨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히 미국을 욕하면서 사르트르나 파블로 네루다가 쓴 시구나 글귀를 암송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CIA를 등에 업은 1954년의 과테말라 쿠데타나 1958년의 쿠바 혁명은 고르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국 정부의 남미 개입 여파로, 이 시기는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맹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시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킨은 이 적대적인 상황에 둘러싸인 채, 남미에서 문화자유회의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홀로 분투하고 있었다."(588-9)


"1963년 초, 존 헌트는 파블로 네루다가 1964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제보를 입수했다. 이러한 형태의 내부 정보 유출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왜냐하면 노벨상 수상 선정위원회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1963년 12월 네루다를 중상모략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문화자유회의의 역할은 신중하게 은폐되었다." "스톡홀름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했다. 네루다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상자가 발표되었을 때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작전의 성공을 기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수상자가 장 폴 사르트르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네루다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기 위해서는 197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시 그는 친구이자,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대표해서 주프랑스 칠레 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592-5)


"1964년 8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하원의원 라이트 패트먼의 주도하에, 미국 민간 재단의 면세 지위에 대하여 의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조사를 통해, 수많은 재단들이 CIA가 설립한 위장 조직임이 밝혀졌다. 가텀 재단, 미시건기금, 프라이스기금, 에드셀기금, 앤드루해밀턴기금, 보든신탁, 비컨기금, 켄트필드기금 등이 그것들이다. 이 재단들은 CIA가 다른 곳으로 자금을 전달할 때 합법적인 외양을 띠도록 설립된 유령 조직으로, 주소지만 등록된 '우편사서함'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CIA가 이 계좌로 돈을 이체하면, 이 재단들을 통해 '재전달' 내지는 '자금 경유'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위장 재단이 합법적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재단들에게 '기부'의 형식으로 자금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어떠한 질문도 있을 수 없었다. 『휴스턴포스트』의 회장이자 하비재단의 이사인 윌리엄 하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야 그 사람들이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 수밖에요.〉"(600-1)


22장 펜클럽 친구들


"1964년은 냉전의 전사들에게는 불운한 해였다. 그들이 의지해 왔던 신화들이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걸음으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가 출간되었다. 존 르 카레는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면서 끝없이 계속되는 크나큰 환멸감〉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당시 CIA의 비밀 작전을 지휘하던 리처드 헬름스는 이 소설을 몹시 싫어했다." "그 뒤를 이어, 냉전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풍자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나왔다. 루이스 멈퍼드는 『뉴욕타임스』에 보낸 서한 형태의 칼럼에서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옭죄고 있던 냉전 시대의 강박적인 광기를 처음으로 깨뜨렸다. ······공개적인 토론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고, 그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우리나라가 도덕적이고 민주주의 국가인 체하는 것이야말로 욕지기가 나는 일 아닌가.〉"(609-10)


"신좌파와 비트족처럼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왔던 문화적 반역자들이 주류에 진입하면서, 왕년의 반공 투사들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조지프 헬러는 자신의 소설 『캐치22』에서 미국이 제정신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광기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앨런 긴즈버그는 1956년에 비가悲歌 「아우성」을 발표해 황폐하게 변해 버린 세월을 애도했다.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네〉라고 말이다. 긴즈버그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와 '페요테의 고독'의 환각이 빚어내는 기쁨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비트족은 LSD를 씹어 먹고, 육체적 흥분을 노래하며, 나체로 시를 읽고, 벤제드린과 헤로인이 만들어 내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세상을 유영하면서, 노먼 홈스 피어슨 같은 꼰대들의 손에서 월트 휘트먼을 되찾아와 히피들의 원조로 숭배했다. 그들은 『인카운터』 같은 잡지들이 격식에 집착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질서에서 혼돈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추저분한 반항아들이었다."(611-2)


# 페요테 :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선인장


"마이클 조셀슨 또한 새로운 정신적 경향의 등장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또한 '미국의 과업'에 대해 점점 커지는 환멸을 감추려고 몹시 애썼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속에 품었던 환멸이 실체를 갖추기 시작하자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몇 년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60년대의 절반쯤 접어들자 우리의 개인적인 가치와 이상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여타의 무분별한 정책들로 인해 파괴되어 갔다.〉 미사일 격차 선언, U-2기 격추 사건,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이 모든 제국주의적 실책들 때문에 미국의 세기,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책임이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한 조셀슨의 믿음은 약화되고 있었다." "데탕트의 이념을 수용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조셀슨은 세계문화자유회의가 상호격리주의apartheid라는 냉전적 관습을 버리고, 동구권과 대화를 모색하도록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무엇보다도 국제펜클럽과의 관계를 통해서, 바로 그 이상적인 준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613-4)


# 미사일 격차 : 소련이 핵탄두 보유 수에서 미국을 능가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미국이 엄청난 군비 증강에 나섰던 일


23장 문학계의 피그스 만 침공


"『인카운터』가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자산이라는 치명적인 주장을 불식시키려는 조셀슨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이었다. 이제 조셀슨이 탄 배에 물이 새는 구멍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파리와 뉴욕, 그리고 런던의 사교계에서 떠돌던 추문들이 이제 확고한 사실로 드러났다." "어째서 CIA는 문화자유회의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것일까? 문화자유회의는 자체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꾸려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비밀 첩보 작전에는 깨뜨리기 어려운 관료주의적 계기가 있다. 지난 20년간 CIA의 정보요원들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비대해져 가는 작전 중심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첩보 '기반'을 비대한 규모로 확장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몰두한 나머지, CIA는 이러한 기반의 노출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작은 것이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훗날 톰 브레이든의 평가이다."(637-8)


24장 방벽에서 내려다본 광경


"1966년 초, CIA는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되는 『램파츠』Ramparts라는 잡지가 CIA의 위장 조직 네트워크를 앞장서서 파헤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CIA가 『램파츠』를 파괴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워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램파츠』가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CIA가 두려워했던 대로, 『램파츠』는 한술 더 떠 CIA의 비밀 첩보 활동에 대한 취재 내용을 출판해 버렸다. 1967년 4월에 출판된 이 잡지의 취재 내용은 전국 유력 신문에 즉각 게재되었고 '폭로의 향연'이 뒤를 이었다. 이를 지켜본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머지않아 미국의 모든 정치 단체, 복지 재단, 대학 동아리, 야구 팀이 CIA의 일선 조직이라고 정체를 밝힐 날이 올 것이다.〉 미국 국내의 조직들만 노출된 것이 아니었다. CIA의 세계문화자유회의 후원에 얽힌 세부 사항들과 잡지들과의 관계는 물론 오브라이언이 『인카운터』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646-8)


25장 그렇게 허물어지는 마음


"1967년 5월 14일, 마침내 세계문화자유회의의 공식 성명서가 보도자료로 배포되었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국제총회는 ······이 자리에서 미 중앙정보국의 자금을 사용해 왔다는 확인된 보도 사실에 직면하여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자 한다. ······본 회의의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회의에 속한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실에 무지한 채로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국제총회는 1950년에 설립된 이래로, 문화자유회의가 이룩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또한 문화자유회의의 활동이 어떠한 재정적 후원자의 영향력이나 압력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웠음을 확신하며, 업무에 협력해 왔던 모든 분들의 독립성과 고결함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공표하고 싶다. ······본 총회는 이러한 비난이 지성계의 담론이라는 우물에 독을 풀어 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음을 밝혀 두려 한다. 따라서 본 총회는 사상의 세계에서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여 비난을 가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한다.〉"(668-9)


"이 진실을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명단에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튜어트 햄셔, 아서 슐레진저, 에드워드 실즈(나타샤 스펜더에게 이 사실을 1955년부터 알고 있었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드니 드 루즈몽, 대니얼 벨, 루이스 피셔, 조지 케넌, 아서 쾨슬러, 정키 플레이시먼, 프랑수아 봉디, 제임스 버넘, 빌리 브란트, 시드니 훅, 멜빈 래스키, 제이슨 엡스타인, 메리 매카시, 피에르 에마뉘엘, 라이오넬 트릴링, 다이애나 트릴링, 솔 레비타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솔 스타인, 드와이트 맥도널드 말이다. 이 모든 사람이 기만 행위를 알고서witting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사실을 '눈치챘거나',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 나보코프는 CIA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에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저는 모두 부인하겠습니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CIA와 어떠한 직간접적인 관계도 맺은 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소련이 짜놓은 계략 아닙니까?〉"(670-2)


"그러나 믿었던 톰 브레이든마저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에 글을 기고해서 조셀슨의 화를 돋웠다." "브레이든은 부정확한 정보를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았다. 대신에 지금껏 어떠한 방식으로도 절대 공개된 적이 없었던 비밀 정보들을 자진해서 내놓았다." "CIA의 기술적인 용어로 '말썽'flap이라고 알려진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으로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이상스럽다. 톰 브레이든은 아무런 심의도 받지 않고 글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에서 폭로된 비공산주의 좌파 프로그램에 밀접한 관계가 있던 요원들은 경력상에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코드 마이어와 그의 동료들 모두 더 높고 더 나은 자리를 찾아 신속히 움직였다(마이어의 경우, 서유럽에서 CIA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는 책임자인 런던 지부의 부장으로 영전했다). 오로지 비공산주의 좌파 진영에서 충원된 인력들만이 용도 폐기의 운명을 맞았다."(675, 687)


26장 값비싼 대가


"1967년 폭로 사태는 기왕에 일어났던 일을 덮으려고 의도된 것이거나 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소설가 리처드 앨먼은 CIA가 자행한 '문화계의 조작 행위'를 통해 〈선동에 넘어가거나 원조를 받은〉 지식인들이 책임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욕지기를 느꼈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보다 정교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들, 즉 현실 자체를 냉철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잠시 또는 영원히 실제의 기억에서 벗어나거나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서 편리한 기억을 지어낸다. ······ 이렇듯 거짓에서 교활한 기만으로 조용히 이행하게 되면, 이는 유용한 수법이 된다. 따라서 확신을 갖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거짓을 보다 자세히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를 쉽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705-6)


"지식인들은 특정한 결과를 얻어 내려는 목적에서 편향된 태도를 선택한 뒤,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발휘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혼동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자유를 교조주의적 이념으로 추구했지만, 그 결과는 다른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바로 '맹목적 자유주의'freedomism 또는 자유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성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이단적인 시각마저 포용하는 고결한 정치적 주장이 되었다. 〈물론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자유라고만 짧게 줄여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명칭일 뿐이야.〉 소설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화자인 앤서니가 한 말이다. 〈'진정한'이라는 말은 마법의 단어지. 이 말이 '자유'라는 또 다른 마법의 단어와 결합하면, 그 효과는 끝내 주거든. ······ 꼬치꼬치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면 진정한 진리true truth 같은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는다고. 나도 그건 진짜 괴상한 말 같아. 진정한 진리, 진정한 진리 ······ 아니, 그런 말은 없어. 그건 '베리베리'나 '와가와가' 같은 말이거든.〉"(707-8)


# 베리베리beri-beri나 와가와가Wagga-Wagga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내용 없는 공허한 수사를 가리킨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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