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만드는 사람들 (반양장) - 인권과 국제질서
니콜라 기요 지음, 김성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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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민주화의 세계 정치


"오늘날 저명한 법률가들은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통해 수행되는 국제법의 필수 요소〉, 즉 국가의 자격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기준으로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온갖 유형의 통치를 정당화할 것으로 기대되는 원칙이 됨으로써〈점차 집단적인 국제 과정에 따라 촉진되고 옹호될······범세계적인 권리 부여(global entitlement)〉라는 보편적 권리가 된다." "전통적으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연대에 토대를 둔 인권운동가들, 다양한 저항 인사들, 비정부기구들, 네트워크들, 그리고 때로는 교회들이 민주적 개혁운동을 위한 채널이었다. 그러나 싱크탱크, 박애주의 재단, 행정기관, 유엔이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 민간 컨설팅 회사, 직능단체, 법률 운동가, 학자 등과 같이 다양한 제도적·개인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자원과 전문성을 팽창하는 이 장(field)에 점점 더 투자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민주주의 촉진과 옹호의 '집단적인 국제 과정'을 주제로 한다."(21-2)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의 연결에서 이러한 계획이 모호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주창 그룹(advocacy group), NGO, 이슈 네트워크 등은 가장 엄격한 의미로 시민적 미덕(civic virtue) 안에서 작동한다. 고전적인 정치 전통에서 미덕이었던 공화주의적 언어는 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권리 개념과 대립된다. 후자가 자유(liberty)를 구속에서의 자유(freedom)로 파악한다면[통치권(imperium)에 반대되는 자유(libertas)], 전자는 권력에 대한 참여를 자유(liberty)가 실행되는 조건으로 만든다[통치권에 참여하는 자유]. 시민적 미덕은 정확하게는 공동선(common good)의 생산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민적 미덕의 개념은 언제나 귀족적 유형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시민적 미덕은 동기가 순수하고 무욕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지배적 사회 신분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사용한다. 도덕의 언어는 귀족 지배의 언어이기도 하다."(26-7)


"이러한 것들을 분류하는 어려움은 국제 무대가 극심하게 변동하고 있고 근대성(modernity)이 생산해온 상징적 경계들(도덕성과 정치, 국내 행위자와 국제 행위자 등)이 지속적으로 변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낡은 국민국가의 세계 질서와 그것에 대한 정치 '과학'의 범주들로 이 새로운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때 권력 비판의 무기였던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제 권력 자체의 무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의 절대적 한계로서 발전한 인권 독트린은 인권 정치가 탄생하게 만들었다. 자율성과 참여의 지속적인 증가로 민주주의는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더 이상 권력 비판의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 민주주의 촉진과 인권 옹호는 세계 권력의 핵심 언어가 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17세기 정치 이론가 조반니 보테로가 '국가이성(Ragion di Stato, Reason of State)'이라고 부른 것, 즉 권력의 공고화를 지향하는 도구적 합리성의 새로운 형태를 대표하게 되었다."(30-1)


제1장 냉전의 전사에서 인권운동가로


"냉전은 안정과 세력 균형을 유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은 전적으로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풀뿌리 수준에서 공식적인 권력 구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를 재구성하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경제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이 있다. 그러므로 좌익 반스탈린주의에서 냉전적 반공주의로 이동하고 그 후 자신들의 혁명적 국제주의에 개입했던 과거를 신보수주의 진영에서 지배적 정치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방법으로 바꾸어놓은 정치운동가들을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이 중요한 전문성의 배출구가 되어왔으며 이들 정치운동가 범주의 형성에도 기여했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 정치운동가들 중 많은 이에게 미국 외교정책은 1988년 조지 부시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위해 작성된 몇몇 문건에서 제안된 바와 같이 '해방의 독트린'이 되어야 했다."(64)


"엔조 트라베르소는 전체주의 개념이 전후에 국제관계의 중심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급격한 의미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전체주의 개념은 1930년대처럼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기보다 이제 서구의 질서를 변호하는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변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의 변화는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이 1950년대 자유주의적 컨센서스의 효과적인 지지자이자 공산주의 조직들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자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이 과거의 동지였던 소련의 적이 되자 한때 열세에 놓인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갑자기 전략적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소련을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과거의 인물들은 냉전을 향한 미국 외교 정책을 지휘하는 인사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1930년대에 비공산주의 좌파들이 쌓아둔 공산주의 비판의 경험과, 공산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투쟁했던 그들의 능력은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72-3)


"사실 비공산주의 좌파들의 역설적인 정치 여정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냉전의 논리에 따르고 우익을 향한 현실적인 이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좌파의 특징이었던 전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정치 문화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적 반스탈린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그리고 그 후에는 신보수주의)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 개념과 이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본 틀은 비록 새로운 방식을 통해 사용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반스탈린주의 좌파를 냉전의 주요 선수로 만든 것은 이처럼 특수한 정치 문화였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속해 있었지만, 1950년대 무렵에는 대부분 이미 계급투쟁의 전망을 포기하고 개량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컨센서스에 가담한 이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보다 공산주의와 투쟁하기 위한 무기를 더 잘 갖춘 사람은 없었다."(74)


"'민주주의 코민테른' 모델은 민주주의 촉진을 둘러싼 구조화된 국제적인 장의 출현에서 처음부터 핵심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이 주도한 민주주의 성전이 취한 조직의 형태는 이 성전이 패배시켜야 할 적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성전의 조직 형태는 똑같은 역사의 상이한 결과물이었으며, 간접적으로는 공산주의 문화의 깊은 영향력에 의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노력에서 프로파간다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 걸친 민주주의의 수호와 촉진은, 당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반스탈린주의 진영의 다른 좌파들이 확고하게 믿은 것처럼 서구가 민주주의의 진정한 형식을 대표하고 공산주의 체제보다 노동계급의 권리를 더 잘 보장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장점들이 더 고차원적인 민주주의 형태와 더 나은 노동계급 이익을 옹호한다는 소련의 주장과 뚜렷하게 대조되고 더 강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었다."(84-5)


"'민주적 사회주의' 사고의 노선은 혁명 정치의 포기, 자유민주주의 환경 안에서 노동계급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적 전략, 경제의 자본주의적 성격 수용, 복지국가 건설에 대한 참여, 스탈린주의 고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위한 도구로서의 경험적 사회과학 촉진, 자본주의 이후에 초점을 맞추고 공동 경여의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의 비전을 담고 있었다. 이 노선은 1950년대의 정치적 시대정신(zeitgeist)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되었으며 '이데올로기 종말론'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데올로기 종말의 주제는 1955년에 '자유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지적 경향이 다양한 비공산주의 좌파(예를 들어 대니얼 벨, 시모어 마틴 립셋, 시드니 훅, 아서 슐레진저) 출신인 반면, 이들의 유럽 파트너들은 옛 공산주의자(아서 케스틀러에서 자유주의자[레몽 아롱]와 보수주의자[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지평이 다양했다."(88-9)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성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동맹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통 시각과 두 그룹이 활용한 전략적 자원들의 상호 보완적인 특징으로 유지되었다. 한편은 국가권력을, 다른 한편은 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적이고 매우 전략적인 성격 때문에 이와 같은 관점의 수렴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관점의 수렴은 전적으로 외교정책 이스태블리시먼트─가문, 학문, 재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주류 상층계급─의 응집성에 의존했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 이스태블리시먼트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 메커니즘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냈으며, 이스태블리시먼트는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잔혹한 비밀 전쟁에 개입했다."(93-4)


"사회학, 정치학과 같이 우리의 역사적 재구성에 더 상응하는 분야에서 이주 학자들은 전 유럽에 걸쳐 권위주의의 발전과 독일 나치즘의 경험에 동요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한 형태를 수입했다." "이와 동시에 이주 학자들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실패와 전체주의 운동에 동원된 형체가 없는 '군중'이 되어버린 중산계급의 원자화를 특수한 입장(미국 학문 기관들의 입장)에서 숙고했다." "문화적 관점에서 미국의 중산계급은 대중 이데올로기에 결합되어 있으며, 거대 자본과 사회주의에 모두 반대한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 사회계층은 그 어떤 독점자본의 집중이나 자본의 국가 장악, 즉 파시즘의 가능성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보였다. 또 그들은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사회 연구는 결국 중산계급을 실질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이자 수호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산계급의 민주적 미덕에 대한 경험적 발견은 이민 사회과학자들의 점진적인 정치적 변화에 부합하기도 했다."(108-9)


"이 점에서 시모어 마틴 립셋의 저작들은 매우 시사적이다. 〈세속적인 개혁적 점진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산계급의 미덕에 대한 그의 찬양은 '노동계급의 권위주의'라는 주제와 함께 그의 저작에 공존한다. 좌파와 미국 중산층, 그리고 미국의 예외주의의 만남은 구좌파가 사회적 착취보다는 유동성과 성취에 토대를 두고, 봉건적 과거가 없는 자본주의 형태의 역동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미덕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피에르 그레미옹처럼 많은 좌익 인물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생산력 발전에 대한 부르주아의 장애에서 해방된 사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영구 혁명의 아이디어에 내용을 제공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미국은 결국 혁명 국가였다." "전후 사회과학은 비공산주의 좌파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했다. 즉, 사회주의를 위해서 미국 민주주의가 수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10-1)


제2장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 새로운 자유주의적 컨센서스를 둘러싼 전문 영역의 형성


"냉전 국제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의 신보수주의적인 전략은─문화적 자유를 위한 협회의 재정 지원에서 CIA의 배후 역할이 폭로되었던 1960년대 중반에 침체를 겪은 이후─새롭게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사실 1980년대의 민주주의 선전 프로그램들은 트로츠키주의, '국무부 사회주의', 우익 사회민주주의의 옛 정치 전통에서 훈련받은 정책운동가, 조직가, 그리고 기타 냉전 이데올로그들의 네트워크로 형성되었다. 미국민주주의재단의 설립과 레이건의 인권 정책의 형성에서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각별한 공헌은 낡고 전통적인 국익 개념─협소한 의미에서 헨리 키신저의 지정학적 이익의 의미─을 '이상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현실주의 독트린은 새롭고 강력한 도덕성의 형태를 취했으며, 미국 권력의 확장은 인권이라는 면에서 진보와 동일시되었다."(121)


"그러나 '민주주의' 수호에 있어서 외교정책의 활용과 인권의 정의를 위한 이와 같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들을 바꾸고 확장한 강력한 전문화 과정도 고려되어야만 한다. 특수한 기관들과 보조적인 대학 과목들의 설립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를 촉진하거나 인권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지식 및 기교의 생산과 이러한 활동을 개척한 정책 서클의 외부에 있는 인력의 충원으로, 민주주의의 촉진은 점차 이데올로기적 기원에서 멀어져갔다. 미국민주주의재단이나 휴먼라이드워치 같은 기관들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방식을 통해 이러한 전문화 과정의 선봉에 섰다." "가령, 미국민주주의재단은 민주화 과정에 내재된 '기술적'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의 전문화에 기여했다. 이 같은 전문성의 전략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을 안정되게 만들고 그것을 개척한 세대를 넘어서까지 이 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124-6)


"지미 카터의 재임 기간에 인권이 미국 외교정책의 지도적 원리로 도입되었을 때, 인권은 처음에 국제 조약과 협약에서 중시되는 법률 규범과 동일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법은 국제법의 한 부분이었고, 미국 인권 정책은 적어도 공식적인 성명에 따르며, 국제적인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그러한 원리들에 따를 것과 일반적으로 미국의 국제적 책임의 준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미국에 대한 구속력도 가졌다." "레이건 행정부의 초기 반응은 이 정책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외교 정책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각별한 기여는 인권 담론을 그들의 자유주의적 적수들에게 넘겨주기보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인권 개념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인권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인권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은 '인권의 초점을 국제적 평등에서 국내의 제도와 사회구조로 옮김으로써' 수행되었다."(129-30)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인권의 이해에 반대해 인권이 〈구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해석, 즉 민주정치체제와 법률 시스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해석을 내세웠다. 본질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은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에 대한 관심이어야 했다. 이 개념은 인권을 국가권력의 절대적인 제한을 반영한다거나 국가권력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권이 '국가의 도덕적 본체이자 토대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 기초했다." "인권을 수호하고 촉진하는 것은 인권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는 정치체제를 수립하고 촉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권은 이제 초국가적(supranational) 규범으로 간주되지 않고, 혁명 직후의 고전적인 18세기 헌법과 그것의 현대판, 즉 실정법에 각인된 일련의 권리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론이 국가 수준의 우월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틀에 직접 대립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인권을 '국가화'하려는 시도였다."(131)


"1980년대 초반 신보수주의자들과 냉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인권 독트린─한때 국제 법률의 표준이었던─은 이제는 미국의 특수성에 따라서, 또는 적어도 미국의 이익에 순응하도록 다른 나라들을 개조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인권이 제국주의적 통제 방식으로 변형됨으로써' 촉진되었다. 돌이켜보면 레이건 행정부가 인권 개념을 거부하지 않고 채택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강경한 정책 어젠다는 미국이 군사적으로 재무장해야 함을 시사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재무장을 내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 개념은 인권운동 내부에 있는 반대파들에 의해 새로운 정부에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미국 헤게모니를 재구축하고 미국의 도덕적인 자원들을 동원함으로써 헤게모니를 복원하려고 한 정책 논리에 포함되기도 했다. 인권은 일단 국제법에서 분리되어 '민주국가의 도덕적 개념'으로 재공식화됨으로써 이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139)


제3장 발전 엔지니어에서 민주주의 의사로: 근대화 이론의 성공과 실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이 완성되자 미국 외교 및 원조 정책은 점차 제3세계를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의 탈식민화 과정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야기했다. '발전'의 문제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발전은 무엇보다도 자본의 국제적인 순환을 확장하고, 해외 잉여를 수취하여 미국의 번영을 유지한다는 두 가지 문제에 답해야 했다. 초기부터 기업과 박애주의 세계의 통찰력 있는 부문들은 미국 경제의 취약성을 인식했고, 해외 무역과 투자를 증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3세계에서의 반식민 민족주의의 발흥은 이러한 목표에 위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이라는 망령을 깨움으로써 국제 질서의 안정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제 제3세계 민족주의를 범죄시했던 과거의 전략은 점차 민족주의를 (잘 통제할 수 있다면) 소련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잠재적 방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간주하는 긍정적 접근으로 대체되었다."(171)


"또한 옛 식민국가에서 '국가 건설' 과정에 대한 원조는 정치적인 유대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 나라를 안정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유형을 촉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개발원조는 로버트 우드가 '방어적 근대화(defensive modernization)'라고 부른 것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주요한 정책 도구였다. 핵심은 개발도상국들이 냉전적인 지정학적 균형을 와해하는 사회적 격변을 겪지 않으면서 사회적·경제적 근대성과 국가 건설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근대화 이론이 세계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반영한 것은 이 연구 프로그램이 외교정책 이스태블리시먼트와 그들이 지배한 박애주의 재단들의 직접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박애주의 재단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CIA를 비롯한 안보 기관들과 협력하여 지역들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지역연구와 비교정치 분야의 학문 기관들을 설립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했다."(172)


"정치학의 재조직은 (포드 재단으로 대표되는) 박애주의 재단이 촉진한 경험적 응용사회과학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통은 '사회 통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과학과 유사한 형태로 사회과학을 모델화하는 것이었다. 또 지역연구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과학적으로 만들려고 한 행태주의는 포드 재단의 매우 실용적인 전략적 관심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바꾸어놓을 사람들의 훈련을 촉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50~1960년대에 근대화 이론은 외교정책 입안자들의 전략적 신조와 정치학자들의 가설 사이의 수렴을 제도화했다. 사회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기술적·도구적 능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믿음은 이 연구 어젠다와 개발원조 정책 프레임의 공통된 토대였다. 그것은 당시에 특징을 이루었던 (정치적) 독트린과 (학문적) 이론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학문적 지위, 국가 관료 기구, 박애주의 재단, 국제기구 간에 똑같은 인력의 순환으로 관점의 수렴이 촉진되었다."(174)


"신흥 공업국들에서 산업화 과정은 국내 공산주의를 격퇴함과 동시에 정치적인 격변을 피하기 위해 느리고 점진적인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민중 부문의 통합은 공산주의 선전이 유리한 토대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층계급은 잠재적인 민주주의의 잡단 행위자라기보다 파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립셋은 『정치적 인간』에서 권위주의에 이끌린 노동계급의 사회적인 성향을 설명했다." "'노동계급의 권위주의'라는 주제에 대한 립셋의 연구는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공산주의 위협과 관련되어 있었다. 월터 리프먼과 새뮤얼 헌팅턴으로 통하는 미국 정치학 내부의 모든 엘리트 전통에 따라, 대중이 상대적인 물질적 복지를 누리며 정치적 무관심 속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지식계급은 〈민주주의를 대표하고 자유롭게 만들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182-3)


"발전 노선의 수렴은 민주화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민주주의는 처음에는 종속변수로서 근대화 이론에 포함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발전 정책들이 성장시키기를 원했던 구조적 사회 진화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발전을 촉진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0~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친 권위주의 체제의 구축은 근대화의 과학적 내러티브에 대한 심각한 충격이었다. 근대화는 권위주의적 근대화 행위자들, 즉 관료·기술관료·군부가 수행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동시에 근대화 이론가들의 연구 어젠다는 민주주의보다 안보와 안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맞서 근대화 이론과 이것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거부한 학자들은 〈미국·라틴아메리카 학문 외교〉를 해체하기는커녕,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새로운 초국가적 정책 네트워크의 행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188-9)


"일군의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프레비시의 불균등 교환 이론과 수입 대체 산업화를 종속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급진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남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은 불균등한 교환에서 자신들의 자원을 이끌어냄으로써, 한편으로 민족적인 경영계급과 중산계급 분파를 포함하는 근대적인 부문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부문 간의 균열을 발생시키는 사회계급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균열은 균형발전을 가로막았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주류 분석 틀에 대한 남아메리카의 반대는, 해외 원조와 안보 정책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비판과 함께 수렴되면서 배가되었는데, 이 비판은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연구자와 학자에게서 나왔다." "1960~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권위주의 정부와 군사 정부의 출현으로 이어진 근대화 계획의 위기는 미국 학문의 장에 이미 존재하던 모순들을 명확하게 드러냈고 이것들을 격화했을 뿐이었다."(191-3)


"여기에서는 종속이론에서 발전한 국가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분석에 투자되고 민주주의의 촉진을 이론화하기 위해 사용된 정책 지식을 산출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데이비드 레만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민주적인 경향을 재발견했고 1980년대 후반 사회민주주의의 지지자로서 출현했다.〉 또한 이 경향은 정치적 실천과 행위의 이론들을 강조했으며, 이 정치학자들의 정치 활동은 '민주주의의 문제'와 민주주의로의 이행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관리된 이행 과정의 종착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거시구조적 접근 또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 분석은 상대적으로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들은 행위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결정론적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이러한 학문적 지식은 워싱턴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전개한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국제 성전을 지지하는 공식적인 독트린이 된다."(197, 204)


"1950~1960년대에 미국 이스태블리시먼트가 추구했던 사회과학에 대한 투자 전략은 〈효율적이고, 전문적이며, 온건하고〉 경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범세계적 엘리트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통치와 사회변동에 대한 접근을 목표로 했다. 비교정치학과 지역연구 분과는 이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근대화 이론의 형태로 학문적 근거를 산출했다. 특히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진 이 패러다임의 위기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안적 수단을 모색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역설적으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근대화 패러다임의 포기였다. 결국 전문적이고 온건한 정치 변동의 개념을 더욱 촉진한 정치 '네트워크'와 초국가적 학문 네트워크의 중추를 제공한 것은 바로 학문 기관들과 재단들의 뒷받침을 받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근대화 이론 비판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치학은 국가 전문성과 개혁 정치의 장 내부에서 중시되는 일종의 자본이 되었다."(210)


제4장 민주화 연구와 새로운 정설의 구성


"근대화론의 종식은 종속적인 발전, 권위주의, 그리고 미국 외교정책의 유착을 비판한 학자들의 공격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학자들과 정치적이고 지적인 그들의 동맹자들은 결국 과거의 이스태블리시먼트가 계획한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국제적인 '엘리트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비판적인 입장과 연결되어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책임감은 그들의 자유주의 스폰서들뿐만 아니라 미국 행정부와 국제기구들의 관심에 잘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향해 이동했다. 민주화와 포괄적인 사회변동 개념을 분리한, 민주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는 협상되고 질서 정연하며 궁극적으로 관리 가능한 정치 변동의 개념에 의지했으며, 여전히 사회적·경제적 변동과의 구분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의 학문적 생산은 메틴 헤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점진적이고 통제된 체제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오랫동안 이스태블리시먼트가 추구한 목표들을 되풀이했다."(214)


"(권위주의 통치로부터의) 이행(transiton) 시리즈에 담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의 분석은 방법론적 관점에서 종속이론 패러다임에서의 점진적인 이탈과 일반적으로는 체제 변동에 관한 구조주의적 설명에서의 이탈로 해석되었다. 그 대신 때때로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게임이론에 가깝고 정치적인 것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정한 미시적 엘리트 분석이 민주주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접근의 기치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저명한 기고자 몇몇의 과거 연구와 정치 활동이 종속이론 학파와 관련을 맺은 상태에서 이행 시리즈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불가피성을 이론화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시리즈는 강력한 국제 경제의 정설하에 온건한 케인스주의적 개혁을 수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 점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그들은 1970년대의 지식운동과 관련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정치학의 경향들을 자본주의적 경제조건하의 비혁명적 변화의 규범이론으로 바꾸어놓았다."(218)


"『권위주의 통치로부터의 이행(Transitions from Authoritarian Rule』(1986) 시리즈는 최선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온건한 정치 과정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는 민주적 변화에 대해 진정한 책임의식을 강조한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1950년대 정치사회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반드시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반대로 종속적인 발전이 오도넬과 종속이론가들이 1970년대에 주장한 바와 같이 반드시 여러 나라를 권위주의로 이끈 것이 아니었다면, 민주주의는 예란 테르보른의 말처럼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특수한 단계의 정치체가 아니라 상황에 따른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화적인 변동의 산물이 아니라 특수하고, 이행을 겪으며, 역전 가능한 정치적인 힘의 구현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구조적인 요인들에서 상대적으로 독립된 결과이고, 따라서 적절한 정치 행위자 간에 충분한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언제든지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운동가적 시각이었다."(227)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가장 안전한 동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통제하고 지배계급이 권위주의 환경에서 이끌어내는 이익을 위협하지 않는 온건한 목표들을 향해 동원을 이끄는 것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부의 재분배 요구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화 과정에 대해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반대자로서', 더 바람직하게는 그들의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반대자로서 기여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성공적 이행에 〈조직된 노동자들의 순응성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셰보르스키의 변화는 전체적인 정치적·지적 변화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주류이자 학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구인 합리적 선택이론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성찰을 결합했다. 그 결과는 클라이드 베로가 주장한 바와 같이, 노동계급에게는 〈생산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대가로 자본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양보들을 협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었다."(231-3)


"우드로 윌슨 센터의 정치학자들은 민주화를 순전히 '절차적인' 측면에서 정의하고 경험적으로 연구하려고 했다." "정치학에서 이와 같은 주류 전통으로의 복귀는 결국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을 '조작화(perationalization)'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의 학문적 규율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종속이론의 비과학적인 특징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준에 입각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 엘리트들의 전략적 선택에 대한 연구, 상호 경쟁하는 파벌 간의 결합 게임에 대한 분석, 불확실성의 상황(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불완전한 정보의 상황)엣 선호의 형성에 대한 질문, 학문적인 도구로서 '거래비용'과 '인센티브' 같은 개념들의 활용은 탄생 중에 있던 이 정치학의 하위 분과가 경제학의 형식적인 자질뿐만 아니라 전문적 정당성을 모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견고한 구조주의에서 합리적 선택이론과의 결합으로 이동한 셰보르스키 같은 사람들의 계속된 연구들은 이 두 번째 측면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236-7)


"신보수주의 정책 전문가들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비판적 학자들을 대립시킨 상징적 갈등은 그 격렬함 때문에 경쟁자와 어젠다 간의 유사성이 빈번하게 은폐된 완벽한 '세력 확보 싸움'의 사례였다." "신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근대화는 소련과의 긴장 완화와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는 '범세계주의'와 동일시되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동조한 진보 정치학자들은 카터 행정부 정책 중 몇 가지를 냉전 국제주의의 연속이자 다른 수단을 통한 미국 제국주의로 간주했다. 그 결과, 카터 행정부에 대한 그들의 시각도 신보수주의자들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에게 근대화 이론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였던 반면에, 진보 정치학자들에게 그것은 '발전주의' 형태로 적용되는 권위주의 실험의 원인이었다. 양측 모두에게 구조주의가 제공한 광범위한 분석 틀은 정치적으로 무익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거부되었다."(248-50)


제5장 국제관계 이론과 인권 네트워크의 해방적 담론


"물질적인 권력 개념에 기반을 둔 낡은 국가들의 세계에 반대해 새로운 '초국가적' 관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의사소통 과정과 아이디어의 세계이다. 국제관계의 현실주의 모델을 강조한 도구적 합리성에 대해 새로운 접근 방법들은 자유로운 발화 상황이라는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대립시켰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아이디어의 힘(power of ideas)'으로서 권력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상징권력은 이러한 권력의 양상에 대해 더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 부르디외에게서 빌려온 상징권력 개념은 분할과 구분 짓기, 그리고 위계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보이도록) 강요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NGO, 초국가적 이슈 네트워크, 운동가, 도덕 사업가 등 '아이디어 권력'의 국제적 투사들은 대부분 일종의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현대 권력관계의 정의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경우가 많다."(262)


"여기서 비정부 행위자들은 도덕적인 행위자로, 나아가 국제적인 생활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행위자로 설명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디어의 힘'을 대표하는 국제운동가 네트워크들은 암묵적으로 추상적인 인권의 보편성이든 구체적인 환경의 보편성이든 간에 특수한 보편성을 담지한 행위자의 역할로 개조되었다. 이것은 '아이디어의 힘'이 세계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는 식의 일종의 제3섹터의 헤겔주의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앞에서 검토한 연구들이 이 초국가적 운동들을 위해 규범적으로 편향되는 것이었다." "이 담론에서 세계화는 무엇보다 해방의 과정이고, 민주화는 그것의 가장 뚜렷한 양상 중 하나이다. 민주화는 점차 복잡한 정치·사회·경제 발전의 결과라기보다 아이디어의 '확산'이나 '전염'의 과정으로 해석되었고,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경계들을 가로질러 확대된 의사소통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초국가적 주창 네트워크'에 의해 전파되는 기준이 되었다."(263)


"사회적 구성주의의 특이한 경향 중 하나는 사실 책임감을 이끄는 아이디어들이 이것(아이디어)들이 옹호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정체성과 물질적 인식에 대해 존재론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권운동가들이나 '규범 기획자들'의 네트워크 출현을 인과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네트워크 멤버들의 사회적인 성향과 계산 또는 더 광범위한 구조적 요인들이 아니라 네트워크들이 뒷받침하는 인권이나 기타 가치들의 본질적 타당성(intrinsic cogency)이 된다. 또한 인권운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관점'이나 대중적인 의미가 원인으로서 작동하기 위해 그러한 실천에 관여하는 개인들의 동기와 혼합된다. 아이디어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투자와 계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이 그 자체로서 동기가 된다. 그 결과, 이러한 집단적 국제 행위자의 사회적 구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지적 자만은 이론상으로는 그들이 옹호하는 아이디어나 가치에 의해 완벽하게 충족된다."(272-4)


"이처럼 〈부활하고 있는 관념론(resurgent idealism)〉이 정치학에 미친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무엇보다 이러한 부활하는 관념론(사회적 구성주의)은 암묵적으로 사회적 실천에서 독립된 영원한 진리로서(sub specie aeternitatis) 자율적인 아이디어의 존재를 가정한다. 실천은 심지어 아이디어의 타당성이라는 원인의 결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치학 용어에서 아이디어는 '독립변수'로 간주되어야 한다. 아이디어의 사회적 생산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이 언급될 때조차도 이 가능성은 즉시 회피된다." "둘째, 사회적 구성주의는 한편에 있는 특정 행위자들을 신념에 헌신하는 네트워크에 합체하는 동기와 다른 한편에 있는 그 신념 자체를 혼합함으로써 어떤 행위의 합리성과 이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된 이유나 그것의 정당화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방법론적 걸작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전략적 행위자들의 자기 서술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성찰 없이 과학적 언어로 번역된다."(274-6)


"운동과 외교정책에 대한 관념적 이론들─가령, 인권의 도덕적인 성격에서 정당성을 이끌어내려는─은 아이디어가 기본적으로 〈경쟁에 사로잡힌 개념〉, 즉 상호 경쟁하는 행위자 집단 간의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의미임을 모르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국제적 법률 조항이 되기 이전에 실증적이고 다각화된 헌법적 현실로서 출현했다. 따라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상호 경쟁하는 해석들과 이해들의 상황에 따르는 대상이 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의미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실천과 담론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 결과, 레이건 행정부가 인권의 '의미를 파괴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 외교정책을 위해 이 권리와 이것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심도 깊고 지속적으로 변화시킨 자신만의 인권 독트린을 적극적으로 생산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의 힘'을 이해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은 사실 레이건 행정부의 정치 지도자 집단이었다."(280-1)


제6장 '시장민주주의'의 구성을 위한 재정 지원: 세계은행과 '굿 거버넌스'의 범세계적 감독


"세계은행은 (경제이론을 빌려오고, 처리하며, 적용하는) 학계와 (자신의 주요 후원자의 외교정책과 자신의 활동을 분리할 수 없는) 미국 행정부, 그리고 (금융시장에 갈수록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는) 은행들의 교차점에 위치함으로써 상이한 권력의 지위들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복잡한 기관이다."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세계은행은 '굿 거버넌스' 개념을 받아들여 정치적 참여, 투명성, 책무성, 또는 법의 지배 촉진에 관여하는 규범적인 기관이 되었다." "학식 있는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성공은 세계은행이 공식 파트너가 되고, 참여와 권능 강화의 테마와 인권과 환경보호의 테마를 만든 NGO들의 성공과 만나게 되었다. 초국가적 이슈 네트워크의 '사회적 구성주의' 이론의 생산은 올바른 신념과 피지배 집단을 대변하는 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적 전환'은 전적으로 경제적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혁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296-8)


"'굿 거버넌스' 어젠다로 마련된 새로운 개발운동은 도덕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공공 부문의 순수성과 정치인들의 책무성을 위한 부패와의 전쟁을 포함했고, '실패한 국가'와 저개발의 문제들에 대한 치료약으로서 '법의 지배'라는 미덕을 강하게 신뢰했다. 또한 정책 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문제도 새로운 개발 어젠다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생기 있는 '시민사회', '투명한' 제도와 참여가 통치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행정가들을 책임 있게 만들기 위해 요구되었다. 그 결과, 세계은행은 자신의 임무 때문에 기술적·비정치적 방법을 통해 이 정책들을 수립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이러한 발전운동은 자유주의 체제의 출현을 촉진한 친민주주의 정책과 쉽게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으로 편협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구조조정에 대한 관심과의 단절로 간주되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반민주주의적 칼날을 가지고 있음을 명시해야 했다."(323)


"이 같은 세계은행의 '진보적'이고 해방적이며 민주적인 전환은 NGO들의 새로운 역할의 발전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거버넌스 개념이 옹호하는 수많은 주제는 이러한 비정부 행위자들의 관심을 명확하게 반영했으며, NGO들의 전문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정치제도, 법률 환경, 민중의 참여, 권리, 시민사회의 역할에 맞추어진 강조를 넘어서, 이 개념은 때때로 호소력 있는 해방의 언어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 세계은행이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되는) 최소국가의 촉진과 거리를 두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1997년 세계은행 개발 보고서는 최소국가의 편협한 주장을 비판하고 개발을 위해 시장 지향적 전략을 적용하는 데 〈국가들은 이따금 이 목표를 과도하게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시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0년 전에 제3세계 국가가 구조조정을 충분하게 실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세계은행을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주장이었다."(324-5)


"즉, 정부를 통한 더 적은 통치는 세계은행이 추구한 구조조정 방식에 내재한 문제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거버넌스' 정의에 대한 잇따른 연구들은 정책 작성과 실행에 적절하다고 간주되는 영역들을 (국가-사회 관계의 모든 시스템이 걸려 있는 지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특징이 있다. 강조점은 가격 메커니즘과 무역 및 통화 문제로부터 제도, 법률, 이익집단, 책무성, 정치적 자유, 인권을 향해 계속해서 이동했다. 즉, '굿 거버넌스'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목표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세계화와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의 주요 신봉자들을 좇아 국가를 새롭게 개조함으로써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실행을 수정함을 의미했다. NGO에 대한 개방,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인기 없는 이 정책들을 정당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수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성 인자들과 이익 주창자들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327-8)


"'거버넌스' 개념은 세계은행의 목표를 경제에서 정치와 사회로 이동하게 하면서 경제학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과거의 초점과 대조되는 사회적·경제적 발전 메커니즘에 대한 조사·연구·실험의 영역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영역을 장악하는 것은 정통 경제학의 틀에서 벗어나고 수학적 공식화와 계량적 변수로의 환원에 몰두하지 않는 지식 생산을 의미했다. 그것은 행정과 이익집단 간의 연계, 비공식적인 사회구조와 코드화된 규범들의 상대적인 비중, 정치적·경제적 행위에 대한 가치 체계의 역할, 법률 시스템과 정책 결과 간의 관계, 정책 과정 공개의 정도를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반대로 미디어의 지위와 대중 참여의 경로, 나아가 정치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체제의 성격을 포함했다. 즉, '거버넌스'를 향해 문제를 전환하는 것은 정통 경제학 이외의 다른 전공에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은 이렇게 해서 경제학과 경쟁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328)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워싱턴 컨센서스를 강조한 지식의 서열은 구조조정 정책을 향한 변화와 세계은행으로 대표되는 이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들을 연구한 비경제학자들의 비판적 태도를 설명해준다. 권위와 정당성이 결여된 이 비경제 전문가들에게 NGO는 단순화된 형태로나마 그들의 연구 내용을 광범위하고 다양한 청중에게 전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브로커'로 보였다. 반대로 많은 NGO들은 쉽게 '시민사회'나 '참여'의 전문가로 대표될 수 있는 학자들을 영입함으로써 그들의 전문적인 프로필을 강화하려고 했다." "학계에 대한 NGO의 개방은 1980년대에 일어난 비정부운동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수많은 NGO에게 그것은 그들이 부족했던 과학적 신뢰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기부자들과 개발은행 또는 다른 NGO들을 지원하기 위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전문성의 자본을 증가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332-3)


"구조조정의 구호가 '가격을 정당하게 만들기'였다면,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개발 어젠다의 공고화는 이 구호를 '정치를 정당하게 만들기'로 대체한 것으로 보였다. 제도의 '투명성'을 증가시키고 법률적인 틀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계획들은 더는 경제적인 면이나 비용·이윤 분석을 통해 평가되지 않는다. 이것보다 필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자율성 정도나 정치제도의 개방도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들과 정책 결정 절차에 대한 제도적이고 사회학적인 연구들, 즉 사회과학자들이 경제학자들보다 쉽게 제공할 수 있는 지식들이다." "'거버넌스' 어젠다는 인권, 민주적 발전, 빈곤 완화, 환경, 소수자의 권능 강화, 인종적 문화 등을 민영화, 서비스 및 사회관계의 공동 조정, 그리고 글로벌 시장을 향한 개방과 조화롭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어젠다에 내포된 갈등이나 모순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대를 해방과 권능 강화의 힘으로 각색하려는 전략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336-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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