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버나드 크릭 지음, 이관후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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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정치적 지배의 본질


"정치─〈순전히 실천적이거나 즉자적인〉 행위가 아닌─는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곧 종속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치가 그 자체로 생명력과 독자적 특성을 가진 어떤 것으로 칭송받는 경우는 드물다. 정치는 종교, 윤리학, 법, 과학, 역사나 경제가 아니다. 정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란,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단일한 정치적 교리가 아니다. 비록 이런 교리들이 가진 요소들을 대부분 자기 것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정치란 결국 정치다. 정치란 그것보다 더 소중하거나 특별한 어떤 것과 〈같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 그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그 무엇이다. 정치는 정치다. 정치 때문에 문제를 겪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도외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은 모든 일을 선의善意로만 대하다가 정치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20)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치란, 공통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 단위 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집단들이 문화나 정복 혹은 지리적 조건 등 어떤 방식으로 통합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원시사회와는 달리 정치가 그 사회의 통치, 곧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있을 만큼 사회구조가 충분히 다원적이며 분화돼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질서가 수립되는 원리는 다른 질서들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그것은 자유의 탄생 또는 승인을 뜻한다. 정치란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 곧 통치란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이 공개적인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가능하다는 것, 실로 그래야 통치가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자유로운 인간의 공적 행위이며, 자유는 공적인 행위와 구별되는 사적인 일이다."(23-4)


"모든 통치가 정치를 수반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사修辭이거나 혼란일 뿐이다. 물론 참주정이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도,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기 전까지는 정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본질적으로 취약한, 마지못해 하는 그런 상황이다. 설령 이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고 해도, 통치자는 이를 정상적 상황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란 전혀 안전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장애물로 여겨질 뿐이다. 정치란 때로 자유가 없는 정체regime에서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런 곳에서 정치는 달갑지 않은 무엇이다. 통치자들에게 이것은 통합성을 저해하는 부적절한 진보다. 통치자들은 피지배자들이 그저 분란을 알지 못하도록, 그리고 〈공중〉이 형성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따라서 궁정 정치는 사적인 정치라는 말은 용어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정치적 행위의 독특한 성격은 문자 그대로 그것의 공개성publicity에 있기 때문이다."(28)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밖에서 살 수 있는 존재는 야수가 아니면 신뿐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신성한 기원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인 어떤 것, 말 그대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최고의 학문〉이었다. 정치가 최고의 학문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모든 〈학문〉(모든 기술, 사회적 활동, 집단의 이해 등)을 포괄하거나 설명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개별 공동체에서 희소한 자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시적 경쟁들 사이에서 우선순위와 질서를 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 속에서 다양한 〈학문들〉이 자신들의 실제적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제도의 발전을 의미한다. 정치란 말하자면 모든 사회적 요구들이 거래되는 시장이자 가격 결정 메커니즘─물론 정당한 가격이 매겨진다는 보장은 없다─이다. 정치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신중하고 지속적인 개인들의 행동에 의존한다."(33-4)


"정치란 대화의 과정이며,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대화란 본래 변증법적 논증을 요구한다. 대화가 진실되고 유익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 그것과 상반되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나은 방법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그것을 듣는 것이다. 자유로운 정부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오래됐지만 확실한 테스트가 있다. 그곳에서 가능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개적 비판이 허용되는지, 곧 반대가 허용되는지의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정치란 자유롭게 행위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회는 분열돼 있고, 정치란 분열된 사회를 과도한 폭력 없이 통치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시도야말로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정치 따위〉를 존중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9)


2 이데올로기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전체주의적 지배는 정치적 지배에 대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가장 명확한 대조를 보여 주며, 이데올로기적 사고는 정치적 사고에 대한 명백하고도 직접적인 도전이다." "자유 정부를 그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동의에 기초를 둔 정부로만 보는 관점은 전체주의 정권 앞에서 완전히 무색해진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썼듯이, 〈전체주의자들이 언제나 대중 운동에 의해 인도되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대중을 통솔하고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한때 나치 독일을 부정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량한 자유주의자인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수가 통치에 대해 완전히 기만적인 이론, 곧 인민의 합의가 필연적으로 자유를 창출한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잘못되고 위험한 징후다."(53-4)


"밀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대표제 정부는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주장의 핵심은 자주 오해되곤 했다. 사람들은 〈자유 정치〉의 특징을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규정하려 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민주적임을 표방하는 것이 어찌하여 그토록 그럴듯해 보였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전체주의 정권들은 실로 민주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 정권들은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전체주의자들은 사회를 마치 단일한 하나의 대중이나 그것과 가까운 어떤 것처럼 다루는 방법을 알아냈다. 여기서는 물지 않고 짖기만 하는 반대자들조차 제거될 것인데, 그들이 독재 정권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이론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부에서는 잠자는 개조차 가만히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꼬리를 흔들며 반길 때까지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54-5)


"나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그저 예외적으로 효과적이며 거대한 몸체를 가진 [정치적] 신조의 집합체가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정치적 신조들과는 수준을 달리 한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각각 자신들이 사회의 모든 측면에 존재하는 총체적 관계의 필연적이고 배타적인 산물이라고─그래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명확히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사회가 그 자체로 자유로울 때에만, 아니면 사적 소유권이 지닌 분열적 요소로부터 또는 가능한 최대한의 일관성과 일반성, 통일성을 방해하는 인종적 이질성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이데올로기는 모든 내적 모순들로부터 안정적이고 최종적이며 자유로울 수 있다. 전체주의자들이 보기에, 정치 〈따위〉가 가진 제한적인 역할은 오류투성이의 기만적인 술책이자 〈사회〉의 지배를 방해하는 〈국가〉의 눈속임일 뿐이다. 『공산당선언』이야말로 〈공적 권력〉에서 〈그것의 정치적 성격〉을 제거하자고 주장한 책이었다."(62-3)


"우리 시대의 거대한 두 전체주의 정권이 모두 (열광적인 대중적 미신을 등에 업은) 한 개인을 국가의 지도자로 숭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단 국가가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단일한 형태로 압축하고자 하면, 그리고 사회가 일단 완전히 통합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그너의 〈종합예술〉이든, 아니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인공의 동물〉이든 간에, 거기에는 어쨌든 예술가가 필요하다. 토마스 만의 파시즘에 관한 우화 『마리오와 마술사』가 잘 보여 주듯이,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신비로운 비밀'처럼 보이려면 가짜 마술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규율하는 전통적인 제약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분명하게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 이상 필요하다. 그는 매우 무질서하게 분산돼 있는 사회적 힘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필수적인 폭력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 관점을 사기와 간계 혹은 마술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70-1)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시기가 곧 비상 상황이다. 자유로운 인간에게 이것은 실로 부조리한 일이다. 광신자는 대의명분에 입각한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희생이 곧 자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보았는데,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대규모의 진정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 희생은 노예의 본성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는 희생당할 뿐이다. 오직 자유인만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위대하고 최종적인 대의명분을 위해─최후의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지속되는) 싸움에서─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대의명분을 위한 폭력은 그래서 자기해방적이다. 즉, 그것은 개인을 자아로부터 해방[분리]시켜, 개인을 거대한 집단성에 결합시킨다."(81-2)


"정치란 지저분하고, 따분하며, 결론이 없고, 엉망으로 뒤엉키는 일이다. 거기에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열정이나 전체주의적 지식인들을 괴롭혔던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매력적인 질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최악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고, 일단의 다양한 공동 경험과 그 자신의 영혼을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한 정치 공동체에서 〈근본 원칙들〉에 대한 합의는 결코 강압이나 기만을 통해 이루어질 수만은 없다. 정치적 정부에서 가장 기본적인 합의는 정치적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치란 행위이며, 신뢰의 체계나 고정된 목표들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정치적 사고는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배치된다. 정치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순 없다. 이데올로기란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만약 이데올로기들이 약하고 체제가 충분히 강하다면, 정치 체제 안에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각축을 벌일 수는 있을 것이다."(88-9)


3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로 가장 흔하게 쓰이지만, 다른 모든 특별한 의미들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민주적) 다수로부터 (민주적)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토크빌처럼 평등의 동의어로 사용할 수도 있다. 허버트 스펜서에게 민주주의는 지위나 부의 격차가 크지만 동시에 계층 이동성이 매우 높은 (다원주의적) 자유기업 사회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뽑힌 (민주적) 정부에 대해 헌법적 제한이 가해지는 정치체제를 의미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인민의 의사〉 혹은 〈일반의지〉가 헌정적 제도라는 〈인위적〉 제한을 넘어서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1인 1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진정한 선택권〉이라는 의미를 덧붙이려고도 한다. 포괄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란 특정한 제도적 원리나 〈삶의 방식〉, 특정한 유형의 정치나 통치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94-5)


"민주주의가 식민지 아메리카처럼 이미 자유로운 체제가 수립된 곳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정치적 자유를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그것이 혁명기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나타났을 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민주주의는 실제로 중앙집권화와 전제정치를 강화할 수도 있다. 통치의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대중적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유지하며, 기계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마침내 모든 반대파들을 괴멸시켜야 할 필요를 만들어 낸다. 인민은 국가와 당을 파괴하려는 지속적인 음모(잘해야 절반의 진실이거나 전적으로 거짓인)에 대한 소식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미래의(그리고 항상 미래형인) 막대한 이익이라는 거창한 약속과 희망에 고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자유 정부를 안정화시킬 뿐 아니라, 비자유주의적인 정부를 강화하기도 하고, 실제로 전체주의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처음으로 사회의 모든 계층이 통치자에게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97)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적 교리는, 모든 발전된 사회는 다원적이며 다차원적이라는, 정치의 씨앗이나 뿌리에 다름없는, 핵심 관념을 위협한다." "토크빌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민주적 국가를 위협하는) 이 새로운 현상을 〈민주적 전제정〉이라 이름 붙이고, 그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회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계급 간의 구별도, 고정된 신분도 없다. 개인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인민은 서로 대단히 닮아 있는데 사실 똑같다. 이런 혼란스러운 대중이 유일하게 정당한 주권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대중은 그들의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조차 박탈당한 상태다. 이 대중 위에는 그들과의 어떠한 협의도 없이 그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단일한 행정의 지도자가 존재한다. 이 지도자를 통제할 수 있는 대중의 의견은 제거돼 있다. 그를 체포하려면 법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 원칙적으로 그는 심부름꾼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주인이다.〉"(103-4)


"민주주의란, 지성사적으로는 인간이란 어떤 면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을, 헌정적 차원에서는 다수의 통치를, 사회학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의 통치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정체나 혼합정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지만, 민주주의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직접 통치라는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하려는 시도이며, 다수의 직접 통치란 실은 다수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휘두르는 자들의 통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통치는 정치에 선행하지만, 민주주의는 정치에 선행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는 둘 다 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특히 〈선동가들의 오만〉에 의해 독재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반짝이고 아름답다〉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현대의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확한 묘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104-5)


4 민족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민족주의는 다음의 네 가지 중에서 하나 이상의 주장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소수자를 억압하는) '민주적 민족주의' 또는 〈인민주권〉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기능할 수 있다. 둘째, 그것은 제국주의 또는 '외부의 압제와 착취'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데, 그로부터 민족[인민]을 해방시킨 사람들이 저지르는 과도함을 모두 용인해야 한다는 식의 마음을 심어 준다. 셋째, 그것은 끔찍하게도 '인종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오래된 국가에서 등장한 민족주의'조차 위기의 시기에는 외국인 혐오를 낳을 수 있고 그것은 그 위기 자체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며, 최소한 한 국가가 외국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아마도 민족주의의 주장에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에 차가운 회의주의를 섞음으로써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비등점으로부터 정치적 관용이라는 인간적 체온으로 그 온도가 내려오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124)


"민족주의는 정치적 정의正義와 그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다. 마찬가지로 부정의와도 별 관계가 없다. 민족주의와 관련해서 가장 분명한 것은, 어쨌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국가의 자격에 대한 그 어떤 객관적 기준도 제공하지 못하며, 무엇이 민족인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주관적 힘만은 대단히 강력하다. 르낭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다.〉 민족성은 민족을 형성하겠다는 결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폴란드인, 독일인, 헝가리인, 아일랜드인, 미국인, 페루인, 알제리인, 가나인, 말리인이라는 의식은 누군가가 설득한다고 사라질 그런 것이 아니다─아마도 누군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통해 민족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강제하려는 시도가 너무 멀리 가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정도일 것이다."(127-8)


"근대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다. 그것은 봉건제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공적 질서에 대한 귀속감을 대체했다. 프랑스혁명은 그런 귀속감을 만들었지만, 또한 파괴도 했다. 군중들은 넘실대는 파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들떴고, 때로 이전보다 영광스럽게 대우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리를 잃어버렸고 어디에 소속돼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민족주의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래는 일정한 영역 내에서 하나의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민족을 무장시키는 일이 유럽 전체로 번졌다. [민족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첫째, 패배할 때조차 믿을 만하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둘째, 용병들에게는 불가능한 분투와 희생을 그들에게는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보편주의가 무너지는 가운데 나타났다. 민주주의가 그것의 힘과 신념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이와 동시에 통치 체제로서는 참혹하게 실패했을 때, 나폴레옹의 민족주의가 등장했다."(129-30)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이 민족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줘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혁명적 정의의 시대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며, 한때 민족주의가 개인의 자유가 넘쳐흐르기 위한 조건이자 [자유를 위한] 최선의 기반으로 주장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자주 상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아직 사실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자유와 민족주의 사이의 균형은 전 세계적으로 흔들리고 있고, 이 균형이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근거들도 충분하다." "아마도 가장 깊고 가장 폭력적인 억압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고 거기에 천착할 것이다. 반면 오직 모욕과 불의만 알고 있는 사람은 국가적 복수심이나 민족적 위신에 대한 열망 앞에서 자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될 것이다. 파드라크 피어라스[패트릭 헨리 피어스]의 자랑, 곧 식민지에서 자유인으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아일랜드에서 죄수가 되고자 한다는 말은 참으로 사실일 것이다."(150-1)


# 파드라크 피어라스 : 아일랜드의 교사, 변호사, 작가이자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1916년에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에 반대하는 '부활절봉기'를 이끌었다.


5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과학〉, 〈기술〉, 〈행정〉 등과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정치 혐오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타협의 과잉과 확실성의 결여에 시달리고 있는 정치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특정한 사고 양식을 구성하는 상징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믿음은 종종 과학이나 기술 또는 행정과 같은 행위들에 연관돼 있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지 속에서 유지되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상당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발휘한다." "물론 기술은 과학적 원리를 도구나 상품에 단순히 적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사회적 교리를 왜곡하기도 한다. 인간 문명이 맞닥뜨린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곧 기술적인 것이며, 그래서 충분한 자원만 뒷받침된다면 현존하는 지식이나 조만간 얻을 수 있는 지식들에 기초해 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술〉은 갖게 한다."(155-6)


"그래서 〈기술주의자〉에게 모든 국가란 단지 사회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보인다. 국가를 권리의 보호자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의 중재자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소비재의 생산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이 같은─주인인 사회를 위해 국가가 하인으로 종사하는 복지국가로서의─관념조차도 진정한 〈기술주의자〉에게는 지나치게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이며, 정치적인 해석이다. 자기 완결적 개념으로서의 〈기술〉에서는 모든 사회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장이며 국가는 그것의 관리자다. 공장은 생산자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 생산하며, 모든 사람은 곧 생산자로 상정된다. 물론 관리자의 지시나 기술,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될 수 없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위의 목적이 그 행위 자체에 있는) 행위들, 곧 예술, 사랑, 철학 그리고 휴식─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관리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면─은 그 자체로는 생산과는 관계없는 비효율적인 것들이다."(158)


"모든 산업 문명을 〈기술〉을 통한 공통된 발전 단계의 하나로 보는 사람에게 전형적인 시민상은 '엔지니어'다. 엔지니어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시민 영웅이다. 그가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서 정치인, 사업가, 관료, 장군 또는 정당 지도자들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는 정치와 굶주림의 고통(그리고 질투심?)이라는 딜레마로부터 우리를 구해 낼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모든 종류의 교육을 기술과 훈련으로 집약할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사회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엔지니어들을 배출하는 데 있다. 엔지니어들은 유지나 관리가 아니라 발명과 건설의 관점에서 사고하며, 일반적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스럽게 〈정치 따위〉를 공격하는 교리에, 그리고 기존의 위대한 기술적 진보를 보여 주었고 이제는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분야에 개입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정부에 매료될 것이다."(159-60)


"진정한 과학적 활동에 대한 왜곡, 곧 과학을 그 자체의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를 〈과학만능주의〉scientism라고 불러 보자. 과학만능주의가 주장하는 것의 규모는 [하나의 원리로 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그것과 일치한다. 하나의 과학 법칙은 일반화라는 목표를 위해 그것이 다루는 모든 사례들에 적용돼야 한다. 단 하나의 반대 사례도 과학적 이론을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세계 질서의 기반임을, 곧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거대한 주형틀을 주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의 신봉자들의 관점에서는 눈앞의 정치적 이슈들이란 단지 완전히 합리적인 세계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전략의 한 부분으로서의 전술, 곧 역사적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적 일반화의 범위[크기]와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다."(166-7)


"과학만능주의와 별로 관계가 없는 기술적 사고도 있다. 그들은 행정이 항상 정치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일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서 어떤 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는, 공무원의 경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바보들끼리 경쟁하도록 두면 된다. 최상의 행정을 가진 국가가 최상의 국가다.〉 [그들이 보기에는] 경험 없이 하는 말이 곧 이론이며, 국가 사무를 실제로 돌보는 사람들이 정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 "물론 그 공무원은 모든 문제를 다 기술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보다 나은 〈민주적 의사 결정 기구〉의 〈수단이자 방법〉 역할을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부의 '모든' 결정이 〈과학적으로〉 또는 명확하고 사전에 잘 준비된 기술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는 그런 기술을 통해 가능한 일들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177-8)


"그런 〈전문화〉에 대해 극심한 경멸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모하게 위장한 테크노크라트 유형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맞서 다재다능하고 현명한 다방면의 아마추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전문가주의에 맞서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는, 심지어 공무원을 위한 그 어떤 형태의 특별 교육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정말로 정치 이전pre-political의 발상이다. 그는 정부의 첫 번째 의무가 통치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개혁적인 정치인들이 대체로 이 같은 점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매우 정확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 이전의 통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다." "어떤 정부에서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행정이 아니라 정부 그 자체다. 공무원들은 정치인들에게 그들이 잘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비난하지만, 정치야말로 질서 속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가져온다."(178-9)


"〈기술주의〉는 자원의 [정치적] 배분이라는 문제와 자원이 [기술적] 적용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 적용은 기술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에 투입될 자원과 그 결과물의 배분에 대한 권위 있는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야 적용될 수 있다. 이런 결정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바로바로는 아니더라도 수개월 또는 소년이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사실 이런 결정이 〈시장〉에서 내려지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경제란 과학이며,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학은 우리에게 자원의 배분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유용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증거들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경제학이 그 자체로 어떤 결정을 미리 내릴 수는 없다. 모든 자원이 경제적인 것도 아니며, 모든 대체물들─가령, 자유 같은─이 다 값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0-1)


6 정치의 친구들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 정치의 (거짓) 친구들

1. 비정치적 보수주의자

2. 정치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자

3. 반反정치적 사회주의자


"자신이 정치보다 상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정치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들 모두의 위에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이 탐욕스럽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국정 운영에 마음대로 개입하는 온갖 정치인들과 로비스트들, 그리고 출세주의자들로부터, 국가에 필수적인 질서를 수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개들에게 언제든 뼈다귀를 던져 줄 준비가 돼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정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라면 통치의 한 수단으로 후견주의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 그가 존스 박사에게 말한 대로, 정치란 바로 〈이 세계에서 성공하는〉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비록 저 졸부들과 약탈자들을 제거할 수 없다고 절망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정치 위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으며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한다. 다시 말해, 이 용기가 지속되는 동안만큼 그는 이 〈작은 개〉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186)


"이런 보수주의자는─적어도 그가 속한 인민들에게는─압제자는 아니다. 그가 훈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자의적인 것 혹은 자의적이라는 평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편협한 사람은 아니다. 대중을 그 이전보다 더 불안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이념이라도 허용할 것이다. 검열은 사회를 통제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신사들이나 기본적으로 인기가 별로 없는 작품들에는 적용될 필요가 없다. 또한 그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반적인 이념을 박해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모든 광신주의를 혐오하는 그의 태도는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지만, 그는 정치인 역시 경멸한다." "재산이야말로 인간에게 여가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과 자립의 조건을 제공하는 유일한 요소다. (토지 귀족의 후예와도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재산권은 정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정치적 입법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권리다. 그는 재산권이라는 비밀 뒤에 자신을 감춘다."(187-8)


"다음으로, 정부의 첫 번째 임무는 통치하는 데 있다는 케케묵은 사실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가 있다. 이런 관점이 잘못된 진실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한 진실이라는 점을 자유주의자들이 자주 상기해야 하는 만큼, 보수주의자들도 이것이 충분한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모종의 질서가 존재하는 상태와 완전한 무정부 상태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통치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국가를 유지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그저 통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잘 통치할 것인가의 측면을 더 자주 생각해야 한다. 잘 통치한다는 것은 피통치자들의 이해관계를 잘 관리한다는 뜻이며, 그들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면 정치적 주권 기관을 통해 그들이 대표되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모두 또는 단번에 충족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면, 어떤 국가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경험하고 눈으로 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189-90)


"모든 내용을 다 제거해버리고 [보수주의를] 단지 정치학 연구의 방법론이라고 말하면, 이 주장은 동어반복이 되고 만다. 즉, 모든 것이 전통이라면, 모든 것이─정말로─전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경우, 우리는 경험의 모든 흐름을 인식 가능하고 유용한 차원으로 통제하기 위해 다른 기준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학문적 보수주의는, 겉으로는 방법과 교육, 철학에 대해서만 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내용과 본질을 몰래 들여온다. 〈전통〉이 각기 다른 전통들의 총합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전통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매우 흡사한 개념이 된다. 어떤 하나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고, 다른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통주의자와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는 어떤 중요한 것도 바뀔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똑같이 과장된 전제로부터 단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뿐이다."(198-9)


"보수주의자가 기대가 너무 적은 사람이라면, 자유주의자는 기대가 너무 많은 사람이다. 자유주의자는 어떤 비용이나 고통 없이 정치의 모든 열매를 즐기고자 한다. 그는 나무가 아니라 그 과실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 한다. 그는 열매─자유, 대표제 정부, 정직한 정부, 경제적 번영, 무상교육이나 보통 교육 등과 같은─를 수확하기를 바라지만, 수확한 후에는 그것들을 정치와의 접촉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한다. 그는 어떤 가치들을─정치의 밖에서 정의함으로써─자연적 권리로 취급하거나 정치란 단순히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일이라는 식의─그래서 정치에 대해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매우 좁은─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자유주의자는 정치와 행정, 국가와 사회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한다고 믿는 테크노크라트에 가깝다." "그는 이성의 힘과 여론의 일관성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정치적 열정이 가진 힘과 자신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괴팍함을 과소평가한다."(205)


"그는 실용성을 위해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그는 계몽된 여론이 [어떤 조정이나 타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단순 명료하게 대표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정치인들은 단지 그 여론의 힘 안에서 눌려 찌그러지는 존재다. 그들은 창조적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중개인들에 불과하다. 사실 미국 영어에서 〈정치인〉politician이라는 단어에는 18세기적인 부당한 비난의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의 정치인이란 부당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해결사〉이며, 사업가들조차 이들을 나쁜 사람 취급한다. 자유주의자는 이런 요소들을 정화해 버리기 위한 정치적 성전聖戰에는 참여하겠지만, 직업 정치인은 혐오한다." "그는 어떤 한 개인[특히 자신]을 대통령보다 더 옳은 사람이라고 찬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위험과 그것이 얼머나 무책임한 태도인지 알지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독선과 내숭이라는 악덕을 품은 정치의 유형이다."(206)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를 한편에 제쳐 놓고 다른 대안들을 찾았다. 자유의 순결성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들은 정치라고 하는 남자들의 세계로부터 그녀를 떼어 놓으려 애쓸 정도다. 자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정치와의 관계만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분명하다. 하나의 신조로서 자유주의를 본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개별적 목표들은 가치가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정치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설명과 이해를 제공한다. 자유주의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박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그 견해들은─정치적 견해가 도덕적·종교적 견해와 같은 수준의 경험에 기초하는 것처럼─그것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협력적 수단들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정치적이지 않은 자기 이익이란 없으며, 정치적이지 않은 공동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11-2)


"개인주의는 그 자체로는 정치적 신조가 될 수 없다. 그가 가진 자기 정체성은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정치는 이데올로그들이 하듯이 개별성을 해소해 버리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어떤 유형의 정치도 자기 정체성이라는 위대하고 분명한 사실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 그 자체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모든 행위란 결국 개별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정치를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은 전체로서 하나의 도덕적·사회적 통일체로 간주될 수 없는 영역 내에서의 집단적 이해들이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집단의 이해는, 자신의 양심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진 온화하고 명확한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거칠고 즉흥적인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옹이투성이의 비틀어진 나무를 돌볼 생각은 없이 그저 부드러운 열매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다."(212)


"정치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보수주의의 편협성과 자유주의의 보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과 사상가들이 가진 특징적인 위험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확실성을 추구하고 정치를 경멸하는 경향을 낳는다. 정치적 방식의 느린 속도를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정치가 평등의 진전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이용하는 속임수나 음모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의 유혹에 다시 빠지게 된다." "사민주의적인 정책이 집행된 실제의 경험을 보면, 그것은 공상적 이상주의나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사민주의 역시 기존의 정치적 맥락에서 출현한 것이다. 사민주의 그 자체는 기존의 정치적 관습과 가치를 확장시킨 것이지, 비정치적 정부를 지향한다는 쪽으로의 급작스런 방향 전환이나 [전에 없던] 도전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책임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위대한 스승이다."(217-9)


"그들은 보수주의자처럼 현실에 안주하거나 자유주의자들처럼 고상한 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그들은 어디로든지 가서 사회의 모든 층위를 들여다볼 것이고, 그들의 연민은 더욱 열정적이며 광범위해질 것이다. 물론 이런 그들의 태도는 [결국에는] 위선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이 세운 기준이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원리들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선거에서 지는 게 더 낫다〉라는 식의 말을 누구나 듣는다. 요지는 간단하다. 그런 태도는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 막스 베버의 구분에 따르면, 그들은 책임 윤리보다는 신념 윤리를 추구한다. 그들은 〈순전히 정치적인〉 고려 사항들, 곧 모든 정치 공동체에는 상호 조정돼야 하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관계와 도덕적 목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멸한다. 이 같은 사실은 누구든지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222-3)


"이런 부류의 정치적 반反정치가 가져오는 최종적인 부조리는 너무나 편협한 나머지 〈학생 정치〉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행동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현실의 정치적 활동을 회피하고자 하는) 아마추어들이 (정치적 교리들과 대의명분들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원하기보다는, 하나의 교리와 하나의 〈대의명분〉을 원하는) 광신자들의 행동 양식에 빠질 때 나타나는 유형이다. 이것은 선거에서 승리해 유권자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광범하고 제한적이지만 직접적인 이익보다는, 〈푸르고 상쾌한 대지 위에 세워지는 영국의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는 사람들의 행동 유형이다. 〈학생 정치〉는 확신의 정치다. 집단들, 특히 학생 집단은 그들이 가진 대의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당대의 모든 개별 이슈들에 대해 특정 원칙이나 〈그들만의 기준〉을 확정적으로 적용하려는 전형적 집단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생각은 그런 정치가 실제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든다."(224-5)


"모든 문제를 원리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사람은 정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x나 y를 얻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든지, 〈우리는 a나 b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심지어 정치적 시스템 안에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우리의 이상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 속에 내던지거나 권위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상이란 이상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가까운 시일 내에 나타날 새로운 질서를 위한 계획이 아니다. 또한 이상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위한 수단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이상─〈진정한 평등〉이나 〈사회적 정의〉 같은─과는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더 많은 국유화〉나 〈민주주의〉가 결코 포기되거나 수정될 수 없는 첫 번째 원칙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상대적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들이 적절한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것이다."(227-8)


7 정치를 찬미함


"정치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정치는 자유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것의 존재 여부가 곧 자유의 기준이다. 자유민의 칭찬만이 노예근성과 잘난 척하며 겸양을 떠는 위선, 양자 모두로부터 자유롭다." "정치란─기존 질서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이익을 보존한다는 점에서─보수주의적이다. 정치란─특정한 자유들과 결합돼 있고 관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자유주의적이다. 정치란─여러 집단들이 공동체의 번영과 생존을 위한 공정한 기준을 확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의식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조건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사회주의적이다. 이 가운데 무엇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는 시간, 장소, 조건은 물론 사람들의 정서 상태에 따라 다양하며, 어떤 경우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 그들 간의 대화를 통해 진보가 가능하다. 정치란 단지 요새를 지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벽의 밖에서 다양한 언어를 가진 풍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235-6)


"정치적 권력이란 (문법적으로 보자면) 가정법의 권력이다. 정책이란 과학에서의 가설과 같을 수밖에 없다. 그 가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상정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것이 진실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 역시 창조적인 쪽과 회의적인 쪽 모두에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을 때 찬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그 정책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어떤 장치들을 고안해 내려 한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헌법 제정자들이 정치에 무엇인가 영구적인 것을 담아내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무용한 시도인 동시에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정치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반대를 금지하거나 파괴해 버리려는 독재적 시도이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 역시 언제나 물러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기 때문에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다."(243-4)


"확실히 잘 뿌리내린 법적 질서는 자유와 정치를 위해 언제나 필요하다. 법은 모든 복잡한 사회에 필요하며,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상당히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자유 사회의 필요악은 정치가 아니라 소송이다)." "정치란 분명히 절차라는 측면에서 찬사를 받아야 한다. 정치의 업무가 서로 다른 이해들을 조정하는 것인 한, 정의는 그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현되는 과정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법의 통치〉라는 문구가 담고 있는 의미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조정을 위한 체계는 절차적으로 복잡하고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지만, 모든 중요한 반대의 목소리와 불만을 듣기 전까지는 결정이 내려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차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지만, 이는 반대의 목소리가 얼마나 타당한지를 평가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246-7)


"정치적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절대적인 이념이나 그 자체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보통 사람들의 판단 속에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도덕성은 이상적인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믿음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정치적 도덕성은 사람들이 원할 때 그런 진리들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할 뿐이며,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정부의 강압적 수단으로 격하시키지도 않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어떤 이념의 활동이 〈완전한 자유〉에 의해 보장된다면, 그런 진리나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강요된 복종이라는 가짜 자유에 끌어들이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도록] 하자." "물론 자유freedom and liberty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도덕성을 대체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일부이며, 정치 역시 정치일 뿐이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256-7)


"〈공화당은 노예제가 우리 안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제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그리고 그것에 관한 모든 헌법적 의무들을 특별히 고려해 왔습니다. (···) 우리 중에서 노예제가 제가 말씀드린 어떤 측면에서도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장소를 잘못 택한 것이며 우리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노예제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나머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단숨에 제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무시하는, 또한 그와 관련된 헌법적 의무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정당에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곳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 행동에서 그 사람에 대한 공감을 부인하는 바입니다〉(1858년 10월 15일 링컨의 연설에서). 이것이 진정한 정치적 도덕이며 진정한 정치적 위대함이다."(258)


"정치인들은 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위선자들, 그리고 개혁의 반대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할 때 시간을 들먹인다." "1955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공적 지원을 받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인종에 근거한 차별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책임 당국에 즉각적으로가 아니라─이것은 자유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사용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신중한 속도〉로 통합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아마 법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혜가 담긴 행위였다. 그 법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법원과 도덕주의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다. 물론 현재의 연방정부 기구들이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를 대면서 기존의 입장[차별 관행]을 시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비열한 행위가 될 것이다. 시간 그 자체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정치적 시도는 또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259-60)


"〈이 싸움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약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노예는 해방시키고 어떤 노예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 나는 공적 의무에 대한 내 견해에 입각해서 내 목표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제가 자주 언급했던,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야 한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수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링컨은 연방의 수호라는 정치적 질서 그 자체를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흑인들의 고통과 배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다─그는 그것을 염려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연방이, 곧 북부와 남부 사이에 공동의 정치적 질서가 다시 복원되어야만,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261-2)


"정치에는 존재하지만 경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상대와의 창조적 대화다. 정치는 자유로운 문명이 의지하는 대담한 신중함, 다양한 통합성, 무장된 유화책, 자연적인 인공물, 창의적인 타협이자 진지한 게임이다. 정치인은 개혁하는 보수주의자이며, 희의하는 신자이고, 다원적인 도덕주의자다. 정치는 활기 넘치는 냉철함, 복잡한 단순성, 난잡한 고상함, 거친 정중함, 그리고 장구한 신속성을 지녔다. 그것은 대화로 귀결되는 갈등이며, 우리에게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도적인 과제를 부여한다. 그것이 직면하게 될 위험에는 끝이 없는 반면, 자유에 대한 책임이나 그것의 불확실성을 회피하려고 내세울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반복해서 상기해보자면, 〈폴리스가 점점 더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 가면, 그것은 마침내 폴리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폴리스를 그런 통일체로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는 폴리스의 파멸일 것이기 때문이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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