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해하기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7
욘 엘스터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부 역사 이론


제5장 생산양식


5.1. 생산양식에 관한 일반 이론


"마르크스는 '생산력'이라는 용어 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다른 용어들도 사용한다. 노동자의 생산성이나 총산출의 크기를 증진시키는 인과적 효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요강》에서 〈과학, 발명, 분업, 노동의 결합, 향상된 교통수단, 세계시장의 창출, 기계 등에서 비롯되는〉 생산력의 증가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좁은 의미에서) 생산력의 증가를 '구성'하는 것─예컨대 발명─이 그러한 증가의 '원인'이 되는 것─예컨대 세계시장의 발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나열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후자 그 자체가 생산력의 증가라고 말한 것으로,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최적의?) 발전을 촉진하는 한, 그것도 생산력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만일 그 자체가 생산력이라면, 생산력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각각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17-8)


"우리는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이며, 생산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산관계의 변화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설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강압에 의한 생산관계의 변화 같은 경우가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병행한다. 잠재적 잉여가 크면 동시에 현실적 잉여도 크고, 기술적 세련성도 높아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구조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관련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한다. 노예제의 붕괴를 그 체제 내의 숙련노동의 사용에 대한 내재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주의가 창출한 잉여의 비효율적 사용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흡족한 설명이 아니다. 이것이 노예제의 붕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솔깃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29-30)


# 소유관계와 생산양식

1. 독립 생산자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함께 소유한 경우

2. 과도기적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3. 농노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모두 '부분적으로' 소유한 경우

4. 노예제 : 생산자가 생산수단도 자신의 노동력도 소유하지 못한 경우

5. 자본주의 :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한 경우


"1859년의 〈서문〉의 진술을 해석해보면, 각 생산양식의 초기단계에는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형태'로서 그 둘은 서로 '상응한다'. 나중에 생산력의 정체가 일어난다. 이때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된다. 그러므로 상응과 모순은 각각 기술적 진보와 기술적 정체로 해석된다." "이 독법에 따르면, 상응에서 충돌로의 변화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하위최적 상황일 때 일어난다.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었을 때가 아니다. 생산관계가 하위최적 상황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올 다른 생산관계가 있을 때이다. 여기에서 비교대상은 현재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반사실적 생산관계이다. 이 경우 하위최적성은 기술적 정체와 우연히 일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체가 시작되면, 기술적 진보의 여지가 있다고 전제할 경우, 이를 하위최적의 징조로 여기게 된다. 다른 한편 하위최적 상황이 정체 없이 올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경우다."(38-9)


"생산양식의 모순을 생산력의 하위최적 '사용'으로 정의하면, 모순이 왜 정치적 행동을 가져오는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의 수립을 가져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모순이 급속한 기술진보와 함께 등장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생산력을 잘 활용하는 체제에서는 기술변혁의 속도가 오히려 '둔화된다'는 유명한 주장이 있다. 슘페터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낭비와 경기순환이 없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낫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더 못하다. 이 예시는 다음과 같은 일반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어떤 체제든─경제체제든 다른 체제든─모든 주어진 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체제는, 장기적으로는 그 어떤 시점에서도 그렇지 못한 체제보다 열등하다. 그렇지 못한 체제의 실패 그 자체가 장기적 성취를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소유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기라면, 이것이 생산력의 변화율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48)


5.2. 역사적 생산양식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렇다. 세계시장의 창출과 전통적인 농업의 변형이 자본주의적 산업생산 체제와 내수시장을 창출했고, 이 내수시장이 그러한 체제의 확장을 위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Ⅰ》에서 그는 소규모 소유 생산의, 〈경제적인 이유〉와 관계없는 〈폭력적 수단〉, 즉 (정치적인 이유로 발생한) 엔클로저 운동을 다룬다." "영국에서의 자본주의의 전개는 (엔클로저 운동 같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야 영국에서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에서 엔클로저 운동은 토지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시장으로 내몰았고, 이로써 도시 자본주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엔클로저 운동은 이로 인해 토지를 잃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흡수했다. 따라서 도시 노동자들의 공급은 일반적인 인구증가의 결과였다."(65-7)


"공산주의는 그 체제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일 때 (혹은 최적이 되었을 때) 바람직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폐기하고자 하는 동기유인이 생겼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공산주의의 주관적 조건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이 두 조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장하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서,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사회주의에 딱 맞는 그 순간에 정확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요인이 체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 완화하면,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은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즉 두 조건 모두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조성된다는 것이다."(84-5)


"공산주의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존재하는 가장 빠른 시점을 현실화하기 위해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똑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첫째, 노동자들이 봉건·절대·식민 정권에 대해 투쟁에 성공하고 나면, 이들의 투쟁은 이전의 동맹이었던 부르주아 계급을 향하게 되는데, 이 (때 이른) 투쟁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둘째,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의 적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용의주도하게 경계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부르주아 계급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는 것이다. 이 패배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고, 미래의 투쟁을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킨다. 노동자들은 굳건해야 하지만,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약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93-4)


5.3.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통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가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국지적인 혹은 일시적인 정체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발전단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연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발전의 진보적 성격을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잉여의 규모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반드시 잉여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잉여는 노동시간의 강제적인 연장을 통해, 혹은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 혹은 임금 삭감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산성에 변화가 없어도 잉여의 규모는 중단 없이 증대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제도들의 연속이 된다. 이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견해가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를 주장하는 견해보다는 더 그럴듯하다. 계급투쟁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99-100)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한 선형 진보의 형태로 보지는 않았다. 역사는 나선형을 보였다. 계급 사회는 일반적으로 퇴보단계를 나타내는데, 자본주의는 특히 그러하고, 인류는 이를 거쳐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진보의 기준은 생산성이나 잉여의 구묘가 아니라 사회적 통합의 정도이다. 전계급 사회의 원시적 통일성은 탈계급 사회의 더 높은 통일성 획득을 위해 붕괴되어야만 한다. 개개인은 전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을 상실하고 전문화된 다음에야 다시 전면적 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생산력의 중단 없는 진보, 인간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의 중단 있는 진보."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론적 전제로부터, 공산주의는 일어나게 되어 있고, 따라서 공산주의의 등장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도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발전도식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작동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100, 107)


제6장 계급


6.1. 계급 정의하기


"계급은 생산요소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또는 비소유의 관계가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소유와 비소유로 정의할 경우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소자본가와 약간의 생산수단을 가진 임금노동자(선대제도의 경우)가 구별되지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계급을 착취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착취자를 한 계급에 넣고, 모든 피착취자를 또 한 계급에 넣는 것은 너무 거칠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착취 계급, 즉 지주와 자본가가 구별되지 않고, 서로 다른 피착취 계급, 즉 동시대에 존재했던 노예와 가난한 자유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은 시장행위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사는 자, 노동력을 파는 자, 사지도 팔지도 않는 소부르주아가 그것이다." "이 방법의 난점은 비시장경제를 연구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25-8)


"시장경제에서는 〈기본재산 구조에서 비롯되는 활동이 계급의 특징〉이다. 이것은 노동 혹은 비노동,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자본의 대부와 차용, 토지의 임대와 임차이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개념 쌍들은 경제행위자 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게다가 노동 혹은 비노동의 속성은 그 자체만으로 계급의 특징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노동 및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 혹은 '비노동 및 토지 임대'와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계급의 특징은 반드시 관계적이다." "이 기준은 생산요소들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비시장경제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경제에서는 생산 행위자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통제의 결여는 소유재산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통제권을 가진 자가 생산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물론 소유구조와 그에 따른 행위자의 강제된 활동 사이의 관계는 두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130)


# 시장경제에서는 행위자가 시장의 거래에 참여한다는 전제가 있고, 비시장경제(가령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는 거래에 앞서 존재하는 제도가 결정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의 기준으로서 재산을 과대평가하고, 권력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정한 계급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적 일관성과 이론적 직관에 있어서 그러했다는 뜻이다." "계급 분류를 착취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따라 결정하더라도, 지배와 복종의 관점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행위만 보고 구조에 대한 고찰은 불충분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가진 것에 의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었지만,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는 오로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야만 한다. 록펠러가 하위 관리직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의 계급적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력의 고용과 판매를 소유재산에 결부시킨 것처럼, 지배와 복종에 대해서도 그 구조적 기초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기초는 〈문화자본〉, 〈타고난 기술〉, 〈교육 기회〉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연이라는 요소도 중요하다.)"(135-6)


"현대 사회학에서는 계급보다는 지위집단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개념을 창안한 막스 베버는 지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순전히 경제적으로 결정된 '계급상황'과는 달리, 인간 생활의 전형적인 구성요소를 '지위상황'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특정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은 생산에 대한 관계와 재화의 획득에 따라 계층화된다. 반면에 지위집단은 재화의 '소비'원칙에 따라 계층화된다. 이 소비원칙은 특정한 생활스타일로 나타난다.〉 지위집단은 〈실제로 그러하건 전통적으로 그러하건 그들이 함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며, 〈당사자의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한〉 닫힌 공동체이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처럼 국외자를 배제한다. 이를 기초로 그는 계급에 기초한 사회와 주로 지위에 기초한 사회를 구별한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계급을 시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조는 자연스럽다."(137-8)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간의 중심적인 관계는 아래로부터의 잉여의 이전과 위로부터의 권력의 행사이다.〉 이 둘은 종종 함께 간다. 노예, 농노, 계약상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임금노동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권력의 행사 없이 잉여가 이전될 수도 있다.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자본가, 은행에 의해 착취되는 소생산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반대로 잉여의 이전이 없는 권력 행사도 있을 수 있다. 상급 관리자와 하급 관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들은 매우 특수한 경우들로서, '더 적게 버는' 그런 관계와는 다르다." "'더 적게 버는' 혹은 '더 착취당하는' 관계들이 분노와 적대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잉여 이전 및 명령 발령 관계와는 달리, 항구적인 사회적 갈등을 산출하는 힘은 없다. 특수한 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계층이 갈등, 혹은 '밥그릇 싸움'을 산출할 수 없다고 마르크스가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계급투쟁과 같은 안정성은 없다는 것이다."(151-2)


# '더 적게 버는' 관계의 계층도는 자신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상위에 놓는다.


6.2. 계급의식


계급의식은 '공동체', '결합', '조직'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요소들이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생긴 후에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나에 대한 인식은 당신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계급의식도 그러한지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자적 계급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신들을 한 계급의 성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 나는 (긍정적) 계급의식을 〈계급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무임승차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 노동 계급은 (집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무임승차자의 배반행위도 극복해야 하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해치면서까지 당장의 정치적 가능성을 끝까지 이용하려는 '행동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즉 성숙한 노동 계급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157-61)


집합행위의 효용은 세 가지 변수로 계산된다. 첫째는 '협동의 이익'이며,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과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개인이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둘째는 '무임승차자 이익'이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집합행위에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모두가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 간의 차이를 말한다. 마지막은 '단독행위의 손실'로, 집합행위에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을 때 그가 얻을 이익과 자기 혼자 또는 소수만 가담했을 때 그가 얻을 이익─헛수고에 든 비용이나 처벌 같은 것─간의 차이를 말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집합행위의 가능성은 첫째 변수에서 증가하고, 둘째 및 셋째 변수에서 감소한다. … 일반적으로 집합행위는 '개인적으로 불안정'하거나(무임승차의 이익이 커서), '개인적으로 접근 불가능'하다(단독행위의 손실이 커서), 혹은 둘 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행위는 발생하기 때문에 이 장애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5-6)


# 집합행위의 메커니즘

1. 합리성·이기심 : 노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 하면, 이들이 어떤 순간에 선택한 행위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합리성단일 : 한 행위자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관찰되며, 각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행동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 협력을 선호한다.

3. 비합리성 : 자신을 어떤 집단의 대표자 또는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는 집합행위의 미시적 기초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이 단결할 필요성이 있고, 이미 단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미래의 계급투쟁을 준비하는 일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은 그 투쟁이 요구하는 물질적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투쟁이 발전했을 때 생기는 성숙한 계급의식 자체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부산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바람직한 상태를 그 행위의 동기목표로 삼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에 참여한다면 사용자와 충돌하면서 계급의식이 발전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경제적 투쟁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투쟁의 지양이 경제적 투쟁에 가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187-8)


6.3. 계급투쟁


"두 계급의 경우, 두 가지 형태의 계급투쟁이 있다. 하나는 두 착취 계급이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분배 몫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전자는 순수 갈등게임, 즉 일정합 게임으로 보인다. 분배할 총량이 투쟁에 앞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계급들은 '순'소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익다툼이 있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이 그러하듯이 그 게임은 실제로는 변동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총산출 자체가 그 투쟁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 비용을 생각해보자. 조직을 건설하고 노조간부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비용만 드는 것이 아니다. 파업이 일어나면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따라서 몫을 요구할 생산물의 크기 자체가 줄어든다. 이 경우 투쟁은 생산에 있어서나 분배에 있어서나 변동합 게임이다. 반면에 착취 계급 간의 투쟁은 분배 측면에서만 변동합 게임이다."(195)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1848년 이전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주역은 셋이다. 노동자, 금융자본가, 산업자본가. 전선의 형태는 단순하고 고전적이다. 산업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금융귀족'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한다. 그런 다음 산업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항하여 금융자본가와 동맹을 맺는 반전이 일어난다." "영국의 계급투쟁에서 영국 공장주들은 토지소유자들과 싸우는 척하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인 노동자들의 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다. 프랑스 공업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계급의 다른 분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영국에서 부르주아 계급 내의 계급협력의 절정은 반곡물법동맹의 해체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절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에서는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의 계급의식 형성을 막기 위해 협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최소한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았다."(211-3)


"계급투쟁이 사회적 갈등의 전부는 아니다.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들의 투쟁도 계급투쟁 못지않게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페인의 지역갈등, 아일랜드나 중동의 종교갈등, 미국이나 남미의 인종갈등, 벨기에의 언어적 갈등, 폴란드의 민족주의 등도 계급갈등만큼이나 강력하고 파장이 큰 사회적 갈등이다." "마르크스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계급은 계급의식을 획득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사라지며, 비계급적 집합행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화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러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틀렸다. 다른 계급이 무대에 등장했다. 법인재산 혹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농민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 통신수단 덕분에 다른 계급에 버금가는 계급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근대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옳았다."(219-20)


제7장 정치와 국가


7.1. 국가의 본질과 국가에 대한 설명


"국가는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정의될 수도 있다. 베버의 정의, 즉 폭력의 합법적 사용의 독점이라는 정의는 둘째 유형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기능의 관점에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점에서 그는 정치 이론의 전통, 혹은 전통 중 하나를 따른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공공재 공급자로 간주되어왔다. 공공재에는 법과 질서는 물론, 개인들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공급될 수 없는 경제재도 포함된다. 크게 보면, 국가는 죄수의 딜레마에 놓인 개인들의 협동적 해결책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사회 속에 국가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의 과제는 이러한 딜레마의 관점에서 등장한다. 다만 행위자가 다를 뿐이다. 국가의 과제는 경제적 지배 계급이 직면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협동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과제의 일부로서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그들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이제 국가의 모든 과제는 자본을 위하여 수행되거나, 자본에 위임된다."(231)


"나는 마르크스가 권력에 대해 좁은, 전략 부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봉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두 행위자 A(자본)와 B(정부)가 있고, 각각 일정한 수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 B는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공식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 A는 특정 대안을 고려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B는 A의 봉토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B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B는 자신의 권력이 A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보유 또는 행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B가 A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B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A의 권력도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은 권력을 직접 맡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행위자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239-41)


# 이때 A가 직접적인 권력을 원치 않는 것은 제3의 행위자인 C(노동계급)의 관심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 마르크스는 이전과 달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의지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프랑스에서처럼) 양보하거나, (영국, 독일에서처럼) 자제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양위국가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1848년 이전에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이 대리인으로서의 정부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50년대의 사건은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유럽 주요국들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체제하에서도 번성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변을 역사적 유물론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수정해야 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제1의 계급이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가 정치를 설명한다는 견해는 그대로 유지했다."(246-8)


"말년에 이르러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가능한 전략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양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3년에 쓴 〈정치적 무관심〉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정적인 '사회 청산'을 기다린다는 구실 아래 묵종주의를 조장하는 극좌 편향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와 싸우는 것은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적대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진정한 원칙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설혹 지배 계급이 정치권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겠다고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의 수용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 견해에 반대한다. 첫째, 권력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둘째, 현재 노동자들의 고통을 무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체제 내의 정치적 행동으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57-8)


7.2. 혁명론


"마르크스는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 사이에 간간이 공화정이 들어설 때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일시적 승리는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에 봉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한 싸움은, 1793년과 1794년 프랑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싸움의 '방식'이 부르주아 계급과 달랐을 뿐이다. '프랑스의 모든 테러'는 '부르주아 계급의 적'을 상대하는 '평민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싸웠을 때 그들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였고, 이성의 간지가 구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분석한 것처럼, 부르주아적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과거가 깨끗이 청산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크르크에 따르면 이 과업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272-5)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필연적인 도래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공산주의를 수립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어떻게 공산주의의 효율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결함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 나타난 혁명의 전술 및 전략에 관한 언급들은 주로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혁명의 와중에 혹은 혁명을 기대하며 쓴 것이므로, 그러한 언급들은 혁명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나는데, 각각 '타협편향'과 '권고편향'으로 부르겠다. 이 두 편향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희망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다. 희망적 사고는 그의 사고 자체가 왜곡된 것인 반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편향은 표현이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독자들을 격려할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285-6)


# 편향의 두 종류

1. 타협편향 : 어떤 조직의 대변자로서 그 조직성원들과 타협한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경우에 나타난다.

2. 권고편향 : 이론가의 '정세분석'(권고)는 혁명의 실현에 기여하는 수단이나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무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 소수 혁명론, 다수 혁명론, '경쟁체제' 전략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권력 장악, 다수의 획득,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서가 각각 다르다. 소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그런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마지막으로 다수를 획득한다. 이것은 레닌의 전략과 유사하다. 권력을 사용하여 농민을 산업노동자로 바꾸고 이들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레닌의 전략이었다. 다수 혁명론에 따르면, 우선 노동자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혁명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가정 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은 자본주의 사회를 안으로부터 변혁하고, 이로써 다수를 확보하고,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경쟁체제 전략에서 자본주의 내에 수립된 공산주의적 성채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288)


"우리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소렐 류의 급진적 행동주의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지배 계급을 타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그도 수단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의 함의는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수단이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으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한 반면, 훗날의 수정주의자들은 그러한 수단이 오히려 혁명을 수행하는 계급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초기의 입장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그런 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평생에 걸쳐 혁명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마르크스로서는 전혀 새로운 도구주의적 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296-7)


7.3.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의 어법으로는 독재라는 말이 꼭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초법적 형태, 기존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코뮌은 〈국가가 위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에게 군림했던 관리들을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는 공복으로 바꾸고, 항상 대중의 감시 아래 일하도록 하여 형식적인 책임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에 들어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징은 다수 지배, 법외성, 국가기구의 해체 및 대의원의 소환가능성이다." "다만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독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독재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독재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위헌적이어서가 아니라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였기 때문일 것이다."(298-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 혹은 과도적 상태는 국가자본주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시장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협동체들이 상호 간에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두 체제 모두 교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이 교환되고, 시장사회주의에서는 생산물과 화폐가 교환된다. 자본주의적 속성은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없어진다. 시장사회주의에서 계급은 없어지지만, 착취는 남아 있을 것 같고, 소외는 확실히 그대로이다. 협동체에 따라 자연적·인적 자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이 없다 하더라도 시장교환을 통해 착취가 발생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계급과 착취가 다 없어지지만, 소외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해 과도적 단계로서 국가자본주의를 선호했다."(301)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와 마지막 단계를 구분하여 제시한다. 첫 단계는 복지국가와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다. 소비는 기여에 따라 이루어진다. 기여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이므로, 생산자들이 생산물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는 하지만, 자본가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팔기 때문에 계급은 형성되지 않는다. 착취도 없다. 기여에 상응하지 않는 소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제외) 이것은 어떤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노동의 이질성 때문에 '노동으로 기여한 만큼 분배한다'는 원칙 자체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체의 재산 혹은 공유재산의 관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 즉 권력관계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형성의 기초라면, 이러한 현상은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303)


"마지막 단계의 공산주의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고에 공상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단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날고 싶다고 해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중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다." "생산과 소비의 조직에 관하여는 폴라니가 제시하고 콤이 발전시킨 유용한 분석틀이 있다. 폴라니는 자급자족하는 사회가 아닌 한 재화의 유통은 필수적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시장교환, 재분배(즉 주변에서 중심으로 간 다음, 일부를 뗀 나머지를 다시 주변으로 보내는 것), 상부상조(즉 가격을 정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제도화된 재화의 교환)가 그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재분배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시장, 계획, 상부상조로 약칭할 수 있겠다. 콤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지 이 세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데 조합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306-7)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형공장도, 예술가 천국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사회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회사(개인들의 집단)들은 상호 간에 물품을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형태'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계획'에 가까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시장에서 먼 곳에, 다른 한편, 자율적인 노동자 협동체들은 일을 통해 최소한의 자아실현이 보장될 것이며, 대규모 생산단위와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은 시장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그 가치들을 동시에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모든 좋은 것은 함께 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는 최대한의 자아실현과 최대한의 생산성과 최대한의 협동을 동시에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후기산업사회'가 이 목표들을 어느 정도 근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격차는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309)


제8장 이데올로기


8.1. 문제 제기


"나는 이데올로기를 기능적 관점이 아니라 구조적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어떤 존재물이 다른 존재물에 대해 가지는 일정한 효과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물로 정의하고자 한다. (정신적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 크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이다. 이데올로기는 ① 존재하고, ②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③ 의식적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정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상태 또는 특정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존재물'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존재물들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 용어도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기능적으로 정의한다) 중 강제적 성격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정의하면, 예컨대 대의정치제도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는 식의 진술이 가능하다."(319)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설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념소유자(혹은 여타 행위자)의 '이익'에 입각한 설명과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입각한 설명으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각각 이익 설명과 위치 설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또 하나는 인과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 것들은 부분적으로 중첩된다. 모든 위치 설명은 인과적이지만, 이익 설명은 기능적 성격과 인과적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즉 신념은 그것이 어떤 이익에 '봉사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고, 이익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속류 경제학자들의 '조화 이론'은 내생적인 경제적 환상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변론이라고 말한다." "노동자 계급이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내생적인 정신적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분할통치를 통해 자본가 계급이 얻는 이익이다."(324-8)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적 창조물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연속적인 생산양식 A, B, C ··· 가 있고, 각각에 상응하는 관념 a, b, c ··· 가 있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양식 A가 주어지면 관념 a가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생산양식 B의 등장은 이전의 생산양식 A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다. 이전의 이데올로기 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지막으로 a-b-c의 연속성은 A-B-C에 존재하는 연속성에서 파생된 '겉보기' 연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으면, 이것은 새로운 생산양식에서 성립하게 될 가능한 이데올로기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 b는 당대의 생산양식 B는 물론, a에도 상응해야 한다. 즉 이 두 요인의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견해는 생산양식에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역사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28-31)


8.2. 메커니즘


"사변적인 명제들(신 또는 정신)을 뒤집는 것은 이전에 뒤집혀 있던 것(경험적 인간), 즉 진짜 주어를 술어로 만들어놓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전도(顚倒)는 이데올로기 형성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가 그다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전도는 추상화(abstraction)와 투사(projection)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의 전형적인 예는 헤겔 철학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헤겔 철학은 존재와 의식이 전도되어 있다. 사유를 사고행위로부터 분리시키고, 의식(Bewusstsein)을 의식하는 존재(das bewusste Sein)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는 헤겔의 추상물들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인류, 인간, 유일자 역시 추상물이었다. '정신'의 술어였던 '인간'을 주어로 만들었지만, '인간' 역시 추상적인 인간이고 진정한 인간의 술어일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인 개개인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추상물들은 완전히 폐기된다."(341-3)


"투사의 관념은 포이어바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특히 종교적 사유가 인간의 본질을 초월적 존재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본질은 타자의 본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투사는 소원성취의 한 형태이다.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가 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참함을 사상 속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소원성취를 위해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전유한다. 이 대상은 사실상 자신을 객체화한 것이며 그렇게 전유된다.〉 정신분석 이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투사자와 투사물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이론뿐만 아니라, 정치 이론과 자본론의 골격이 바로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분석으로부터 나왔다. 세 영역의 공통된 주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만든 산물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자본론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서 인간이 자신의 두뇌의 산물에 의해 지배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인간은 자신의 손의 산물에 의해 지배된다.〉"(344-5)


"마르크스는 신념을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특수한 계급이익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의 일반이익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념이 반드시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어떤 시기에는 한 계급의 특수한 이익이 사회 전반의 이익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즉 특수이익의 실현이 지배적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그 계급은 압도적인 힘을 얻는다. 특수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한다는 신념이 그릇된 것일 경우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된 신념도 예외적이긴 하지만 진실일 수 있다. 모든 계급이 자신의 특수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이 신념이 진실일 때에는 권력을 얻게 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한 사회계급과 그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다른 계급들에게 '계속판매'를 신청하는 셈이다."(350)


"《무월 18일》에서 마르크스는 〈크롬웰과 영국 백성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하여 구약성서로부터 어법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왔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과거가 넘겨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념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한다. 확실히 이것은 이념에는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는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즉 인간의 사상은 현재의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의한 제약만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부구조의 '관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현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요점은 과거의 사상이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미래와 직면했을 때 분석과 행동에 쓸모가 있으면 부활한다는 것이다."(364-5)


8.3. 적용


# (마르크스가 파악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 이론

1. 중상주의자 : 중상주의자는 돈이 아무런 매개 없이 돈을 낳는다거나(이자부자본), 상품의 유통에서 이윤이 발생한다(누구나 그 물건을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여)고 주장한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성의 오류이다.

2. 중농주의자 : 중농주의자는 산업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국부의 순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잉여가치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자연의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업부문은 비과세, 농업부문은 과세를 해야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산업자본가에게 유리하다.

3. 맬서스 : 마르크스가 보기에 맬서스 학설의 특징은 유효수요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구매자 계급이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로써 맬서스는 (혁명적 단계의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토지귀족과 국가 관리의 더할 나위 없는 대변자가 되었다.

4. 속류 경제학자들 : 속류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기존 체제를 변호한다. 이들의 핵심적인 오류는 토지·노동·자본을 각각 독립적인 생산요소로 동등하게 놓고, 각각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낸다고 본 점이다. 이러한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믿고, 이를 정당화한다. 


결론


제9장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탁월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 체제와 이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러한 신념은 체제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종 그릇된 틀 속에 들어 있기 대문에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곳곳에 헤겔식 방법의 잔재가 남아 있다. '자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신비한 행위주체로 등장한다. 공장법은 마법에 의해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적 이동성도 자본의 법칙을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중농주의자의 학설도 봉건체제 내에서 자본을 대변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러한 설명들은 방법론적 전체론과 기능적 설명과 변증법적 연역이 뒤범벅된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목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되는 목적론의 한 축이요, 궁극적으로 자본을 파괴하는 과정의 필연성이 또 한 축이다."(395)


"대체로 마르크스는,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의미에서 빈곤이 증대된다는 이유로,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활수준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비교기준은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체로 소외는 생산력의 더 나은 '사용'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모순은 생산력의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함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두 현상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외를 진압하고 나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창조적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전대미문의 생산성 향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본주의가 창출한 기술적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토끼를 잡은 다음 버리게 될 올무 같은 것이다."(400-1)


공산주의


"확실히 마르크스의 일부 주장에는 과장이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일면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식물처럼 맥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직장에서 그들은 기계에 붙어 있는 부속품이었고, 집으로 돌아와도 너무 지친 나머지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곤 소비의 수동적 쾌락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 반대편 극단에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조차도 그에게는 창조적인 힘이 넘쳐났다. 그는 창조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긴장이 해소되었을 때 어떤 기쁨이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좋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좋은 삶이 더 이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를 갈망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본질이다. 여기에 모리스의 손으로 하는 창조활동을 추가하면 더욱 균형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404-5)


"공산주의에서도 자기중심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①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풍요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재화는 희소할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이 차지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②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들어 있는 분배적 정의의 원칙은 자아실현의 평등이다. ③ 자아실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할 경우, 고비용 활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전제를(따라서 두 번째 전제도) 부정할 경우, 그런 사회는 이상향이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세 번째 전제를 부정하려면, 각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즉 타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일부 희생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기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이타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아실현이 '완전한' 공동체와 함께 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409)


혁명


"두 개의 유령이 공산주의 혁명을 괴롭히고 있다. 하나는 때 이른 혁명의 위험이다. 혁명사상은 앞서 가는데, 그 나라의 상황은 빈곤하여 공산주의를 할 정도로 성숙되지는 않은 경우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선제(先制) 혁명의 위험이다. 이것은 혁명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위로부터 개혁이 추진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때 이른 혁명의 사례를 많이 보았다. 이런 판단 자체가 때 이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들이 없었더라면 미성숙 여부를 떠나 더 많은 혁명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옹호한 혁명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혁명의 호기가 언제인지, 어느 하나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언젠가 자본주의를 앞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중에 가서 자신들의 혁명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418)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일생의 과업은 실패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도덕적인 측면에서 혹은 지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가치설, 이윤율 하락 이론 등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긴 이론들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와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있다. 나는 내가 중요한 진리라고 믿는 것 대부분을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다. 방법론에서도 구체적인 이론에서도, 특히 가치문제에서도 그렇다. 착취와 소외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창조하고, 발명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테니까."(4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