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정치가는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 조제프 푸셰 : 어느 기회주의자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강희영 옮김 / 바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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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어둠의 서막


"푸셰는 그의 생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서도 어디까지나 배후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보이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속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그는 사건의 내부에 있었고, 각 당파 안에서 익명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마치 시계 내부의 기계장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활동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역사의 전면에서 재빨리 사라지는 그의 옆얼굴을 얼른 포착하려 해도 곧 포기해야 할 만큼 그는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설사 날쌔게 움직이는 푸셰의 옆얼굴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처음 본 때와 그다음에 본 때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같은 피부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이 1790년에는 수도원의 교사였고, 불과 2년 후인 1792년에는 교회의 겁탈자가 되었으며, 1793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그리고 10년 후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8)


1 조제프 푸셰, 세상 밖으로 진출하다


"1770년경 프랑스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각성된 시민계급들은 조바심치며 바깥세상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직장은 그다지 변변치 않았다." "제3계급에게 문이 열려 있는 곳은 교회뿐이었다. 아주 신분이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정신의 왕국에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소년 조제프는 수도복을 입고 머리 한가운데를 삭발한 모습으로 다른 신부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했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오라토리오회 생활 10년 동안은 한 사람의 사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높은 서품을 받지도 않았고, 어떠한 서원도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빠져나갈 길을 열어놓고 변화의 가능성만은 남겨두고 있었다. 그가 후일 혁명, 총재정부, 통령정부, 제국, 왕국에 대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교회에 일시적으로, 그것도 잠시 동안만 있었을 뿐이다. 조제프 푸셰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에게조차도 일생 동안 변함없는 충성을 서약하는 의무를 단 한번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15-7)


"프랑스의 모든 근원을 뿌리째 뒤흔들게 될 대의원 집회에 나가기 위해 로베스피에르가 출발하자, 곧 아라스의 오라토리오회 수도자들도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이 바람의 관측자는 사회적 폭풍이 프랑스로 몰려오고 있으며, 정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정치의 한가운데로! 그는 단숨에 수도복을 벗어던지고, 삭발했던 머리를 길게 기르고는 낭트의 용감한 시민들에게 정치 강연을 시작했다." "의회 선거가 공포되자마자 한때의 사제교사는 입후보자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의원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셰는 선량한 유권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상업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며,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했다. 낭트에서는 좌익보다는 우익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는 구제도에 대항하는 것보다는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들을 향해 격렬하게 욕하는 쪽을 선택했다."(21-3)


"이 영리한 남자는 어둠 속에 몸을 도사렸다 그는 권력가에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모든 공공연한 권력,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을 경원했다. 연단에서나 신문지상에서나 떠들썩하지 않게 위원회에 선출되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도 감시받는 일이 없고, 미움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그늘 속에 숨어서 여러 사건을 통찰했다." "이렇게 흑막의 인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생 동안 조제프 푸셰가 보였던 삶의 태도였다. 결코 표면상 권력의 소유자가 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권력을 억제하고, 모든 끈을 끌고는 있지만 절대로 매사에 책임자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다. 언제나 일인자의 배후에 숨어서 그를 방패로 삼으며 전면에 내세우다가 그 사람이 뛰어나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이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정치 무대에서 아주 완전무결하게 간사한 이 사람은 스무 번 넘게 분장을 바꾸면서 공화당원으로서도, 국왕 밑에서도, 황제 밑에서도 많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32-3)


"1793년 1월 16일, 예상을 뒤엎고 루이 16세의 '사형 집행'에 투표한 다음날, 푸셰는 선언문을 인쇄해서 발표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깊이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먼저 덤벼들면서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고 위협하려는 태도마저 취했다." "〈폭군의 여러 범죄행위는 명백하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의 머리가 단칼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강도나 살인자가 모두 머리를 쳐들고 날뛰어도 별 수 없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사회문란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시대는 우리들 편이고, 지상의 모든 국왕에 반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하루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찬 처형 반대의사 선언문을 호주머니 속에 준비하고 있던 이 남자는 처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라고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적 순간에 모든 계산의 결정적인 분모는 대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변절자의 계산은 옳았다."(41-2)


"이제 급진파 소속으로 지방에 파견의원으로 나간 푸셰는 그의 관할 지역인 루아르 강 남부의 낭트, 느베르, 물랭 등 여러 곳에서 미친 듯이 과격하게 행동하며 온건파에 맞서 호통을 치고 속사포 같은 포고로 그 지역을 뒤흔들었다. 부자와 겁쟁이, 얼간이, 잡종 패거리들을 난폭한 방법으로 위협하고, 부락에서 지원병을 강제로 끌어내어 연대를 조직해서 적과 싸우는 데 동원하기도 했다. 조직력과 재빠른 정세 파악에서 그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철면피적인 언변에서는 단연코 모든 동료들을 능가했다." "리옹의 '훈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공화국 법률을 지킨다면 공화국 국민에게는 어떠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법률을 위반하거나 표면상이라도 그 목표를 넘어 이탈하는 자는 언제나 정당한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한 자유는 더욱더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46-8)


"그러나 조제프 푸셰는 격정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언제나 변함없는 타산가이자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의회에 보고서를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국적인 상투어나 편지는 불환지폐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시세가 떨어졌으며, 사람들을 감탄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성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징용한 군대가 국경을 향해서 진격하는 동안 교회에서 강탈한 물건에서 나온 모든 소득을 파리로 보냈다. 각종 상자 더미가 계속해서 의회로 운반되었다. 무엇보다도 공화국이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 이러한 웅변적 포획물을 대의원들에게 보낸 것은 그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활동력에 다른 의원들은 깜짝 놀랐고, 터질 듯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푸셰라는 이름은 이 시간부터 강철 같은 사람, 공화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모르는 자, 가장 강력한 공화당원으로 불렸고, 또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54)


2 리옹의 학살자


"혁명 지도자들은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피 흘리는 것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들은 정적을 몰아내고 규탄하기 위해 처형이라는 위협용 무기를 들이댔다. 살인이라는 용의 이는 한 번 살인을 이론적으로 시인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계속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가의 죄과는 피에 취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말에 도취한 것이다. 그들은 다만 국민을 감격시키고 자신들의 급진주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은어를 창조하여 끊임없이 배반자와 사형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거칠고 자극적인 말에 도취된 민중이 얼이 빠져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착각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하면, 지도자들은 배반자들을 단두대에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에 반대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단두대에 대한 자신들의 경고가 거짓이라고 책망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68-9)


"조제프 푸셰 역시 리옹에서 왕당파 반동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무시무시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재현하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변호했다. 〈재판소의 판결은 범인에게는 소름끼치는 무서움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동요하는 민중은 점차 진정되고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들이 죄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은총의 영예를 배풀었다면 아마 민중들은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우리들은 단 한 번의 은총도 허락한 일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푸셰가 태도를 바꾸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의회의 바람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그 특유의 민감한 감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그의 거친 사형집행의 나팔소리에 당연히 메아리쳐 돌아와야 할 반향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코뱅당의 친구이자 무신론의 동지인 에베르, 쇼메트, 롱생 등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로베스피에르의 무정한 손이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81-2)


"이미 다수당에 있지 않다는 오래 전부터의 불안감이 푸셰의 마음을 휘감았다. 테러리스트들은 물러났는데 더 이상 테러리스트가 될 필요가 있을까." "이전에 그는 팸플릿에서 교수대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계속 작동은 하되 주저주저했다. 그 옛날 브로토 들판의 '국민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했다. 그 대신 푸셰는 갑자기 총구의 방향을 축제의 발기인과 명령의 집행관인 급진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양쪽에 도박을 걸었다. 파리에서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책임을 추궁하면, 그는 수천의 묘지와 파괴된 리옹의 건축물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 또 자기를 학살자로 고발하면, 자신은 온건주의자이며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견책한 자코뱅 당원의 탄핵서를 끌고 와서 방패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오른쪽 주머니에는 준엄하다는 증명서를, 왼쪽 주머니에는 온건주의자라는 증명서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82-3)


3 혁명과 반동: 로베스피에르와의 결전


"위대하고 순수한 이념이 1794년의 로베스피에르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더 적절하게 말하면, 그 이념은 살아 있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응고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헤어날 수도, 또 그 역시도 그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독단적 정신의 운명이다. 이렇게 속을 터놓는 온정이나 매혹적인 인간성이 부족한 그의 행위에는 참다운 생산적인 힘이 없었다. 완고한 데에만 그의 강점이 있고, 냉엄한 데에만 그의 힘이 존재한다. 독재적인 것이 그에겐 생활의 뜻이고 형식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자아를 혁명과 일체화시키지 못하면 자아가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남자는 어떠한 다른 의견을 허용할 수 없고, 누군가를 자기와 견주는 것을 용서치 못한다.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다. 자신의 견해를 거울처럼 반사하는 생쥐스트와 쿠통 같은 정신적인 노예에게만 참을 수 있을 뿐이다."(96)


"푸셰의 등골에는 공포가 스쳤다. 지형도 알지 못한 채 너무 깊이 파고들었으니 재빨리 후퇴하는 것이 좋다. 홀로 권력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다. 푸셰는 후회하면서 곧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그날 밤 로베스피에르의 집으로 가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용서를 구했다." "그 당시 푸셰가 로베스피에르에게 무엇을 말하고, 또 그의 '재판장'이 그에게 무엇을 대답했든 간에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결코 친절한 환대가 아니라 내리치는 듯한 무자비한 설교이며, 노골적으로 차가운 위협이자 일종의 결석재판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격분에 떨면서 생토노레 거리의 계단을 내려온 그 남자, 굴욕을 당하고 거절당하고 위협당한 조제프 푸셰는 다만 자신의 목이 얼마간은 붙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제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푸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93-5)


"푸셰는 계획적으로 두더지처럼 지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위원회를 방문하고, 의원들과 그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또 만나는 누구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자코뱅 당원들이었다. 그들과는 재치 있고 솔직한 말로 충분히 상통할 수 있었고, 리옹에서 이룬 성과도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주히 돌아다니거나 산책하듯 배회하면서도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며,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들에게도 뜻밖이었지만, 특히 로베스피에게 그러했다. 9월 18일, 조제프 푸셰가 다수결로 자코뱅 클럽의 총재로 선출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소식을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경련을 일으키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푸셰가 그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100)


"로베스피에르의 분노에 찬 연설은 명백하게 푸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말이었다. 이제 700명의 의원 중에서 푸셰는 가장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가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푸셰가 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는 은밀하게, 그리고 차례로 의원들을 방문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준비하고 있다는 새로운 비밀징집 명부에 대해 넌지시 수군거렸다. 그리고 〈당신도 리스트에 들어 있습니다〉 혹은 〈다음 차례는 당신입니다〉라고 속삭였다. 급작스러운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하에서 퍼져나갔다. 고대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카토 같은 철저한 청렴결백 앞에서 완전히 깨끗한 양심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대의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푸셰는 차례로 실을 풀어 새로운 그물코를 맺으며, 불신과 혐의의 이 거미줄 속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했다."(107-8)


"반동의 성공 이후, 예상과 달리 푸셰는 자코뱅당의 옛 좌석을 지켰다. 그는 정치적인 열정의 냉정함을 알고 있었다. 반동도 혁명과 똑같이 그 이빨을 뽑아버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으며 배를 채울 것이고, 최후의 자코뱅 당원이 법정에 끌려 나와서 공화국이 붕괴되기 전에는 반동의 복수심이 중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가 범한 살인죄로 인해 끊으려야 끊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혁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단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하층계급 출신의 프롤레타리아인 그라쿠스 바뵈프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 푸셰는 겉으로는 바뵈프와 제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민중을 자극하도록 바뵈프를 꼬드겼다. 그러나 바뵈프를 앞세운 푸셰의 대담한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알몸뚱이의 생명만을 부지했다. 그 후 3년 동안 프랑스에서 푸셰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126-8)


4 몰락과 부활: 장막 뒤의 권력자


"조제프 푸셰의 유배는 3년이나 계속되었고, 그가 추방되었던 절해고도의 이름은 빈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견의원이었고 혁명의 향방을 좌우한 신분이었던 그가 권력의 최고단계에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진창과 수렁 속으로 몰락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5인 회의인 총재정부에서 오래 전부터 바라스와 뜻을 달리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가장 올곧은 사람으로 알려진 카르노였다. 바라스는 이 두 사람을 없애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계획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리저리 날뛰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암살자와 도살자가 필요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철학이 없으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적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푸셰가 아닌가. 이렇게 유배는 입신출세의 학교가 되었다."(136-9)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푸셰는 공화주의적인 양심 따위는 밑바닥에서부터 털어버렸고, 금전욕에 대한 증오도 다락방 굴뚝 밑에 걸어놓은 채 아예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새로운 상대들과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는 총재정부의 대표 격인 바라스의 옆방에 밀정으로 드나들며 새로운 권력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무차별의 빵'을 구워서 민중들과 함께 나누려 했던 1793년의 급진 공산주의자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은행가들의 친구가 되었고, 좋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그들의 여러 소망과 사업을 돌보아주었다." "성가신 감시자들을 모두 처치한 프뤽티도르(열매달, 프랑스 혁명력의 12월) 18일에 일어난 바라스의 쿠데타 때 오로지 푸셰만이 지하운동을 통해 그의 동업자를 도왔던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게 후원자 바라스가 새롭게 조직된 총재정부에서 독재군주가 되자 이제까지 남의 눈을 꺼리던 푸셰는 요란스럽게 덤벼들며 당당하게 보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141-4)


"조제프 푸셰가 대신이라고! 파리는 포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모두 경악했다. 리옹의 학살자, 성체 모독자, 교회 약탈자, 무정부주의자, 바뵈프의 친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후 혁명파, 반동파 모두에게 '이번 경무대신이 정말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대신이 된 자코뱅 당원은 더 이상 자코뱅당의 대신이 아니라는 미라보의 명언이 진리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전에는 피에 젖어 있었던 입술이 지금은 속죄의 언어로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질서, 평온, 보안 같은 관용어가 예전 테러리스트였던 푸셰의 경무부 고시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무정부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구호로 등장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무제한의 선동 연설도 종말을 고하였다. 첫째도 둘째도 질서와 평온과 보안이다. '리옹의 학살자' 조제프 푸셰보다 더 보수적인 훈령을 내린 사람은 없었다."(146-7)


"그는 때로는 음모를 조장하고 때로는 음모를 방해했다. 때로는 교묘하게 선동하고 때로는 떠들썩하게 적발했다. 그와 동시에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게 시기를 놓치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 점차 그의 정열이 되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력과 시간을 많이 투입해야 했지만,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 푸셰는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정치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모든 서류를 살펴보고, 보고사항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중대한 사항은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 앉아 문을 잠그고 혼자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서서히, 어느 누구로부터 임명받지 않았음에도 프랑스 전역의 '고해신부'로서 모든 인간의 비밀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153-4)


"그는 권력을 은밀하게 누릴 줄 알았고, 그 권력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는 나름의 비결도 알게 되었다. 강압적이었던 혁명 친위대가 총검을 빼들고 최고 권력자, 즉 파견의원의 집을 지키던 리옹 시대는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지금은 포부르 생제르맹의 귀부인들이 그의 객실로 몰려들고, 흔쾌히 면회가 '허락되는' 시절이다." "푸셰는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한 인상을 주는 인물로 변신했다. 내일 당장 어느 당파가 정권의 키를 잡을지 알지 못하는데, 자코뱅당이든, 왕당파든, 온건파든, 혹은 보나파르트든 간에 불쾌하게 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매혹적이고 융화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공개적인 연설과 정치적 성명을 통해 왕당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을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뒤돌아서서는 은밀하게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거나 매수하기도 했다. 그는 시끄럽게 법적 절차를 밟거나 잔인한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은 피했고, 폭력 대신 폭력을 가할 듯한 제스처로 만족했다."(154-5)


"이런 가운데 조제프 푸셰는 총재정부의 운명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감했다. 난세가 되면 사람들은 영웅을 갈구한다. 모든 사람의 눈에 칼과 두뇌, 두 가지 모두를 한 몸에 겸비한 유일한 남자는 보나파르트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 10월 11일, 보나파르트는 독단적으로 이집트에서 돌아와서 프레쥐스에 상륙했다. 민중은 그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했다." "훗날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나에서 술회한 바에 따르면, 두 시간 동안의 첫 대화에서 푸셰만큼 딱 들어맞고 일목요연하게 프랑스와 총재정부의 전체 사정을 설명해준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정직하게 털어놓는 일이 거의 없었던 푸셰가 왕위를 노리는 보나파르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모든 것을 이 사람의 자유에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역할은 정해졌다. 주인과 하인, 세계의 형성자와 시대의 위정자로서 그들의 공연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157-62)


5 황제와 신하: 적대적 공존


"두 사람 사이에 친숙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푸셰가 나폴레옹에게 유쾌한 신하가 아닌 것처럼 나폴레옹도 푸셰에게는 유쾌한 주군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충성심을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수많은 문서에서도 드러나듯 나폴레옹은 부관과 고문관 앞에서도 푸셰를 가차 없이 꾸짖었다. 입에서 거품을 내뿜을 만큼 극도로 분노해서 리옹 사건이건 그의 테러리스트 시대의 일이건 모조리 끄집어내서 푸셰를 배반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은 배반자야! 확 총살했어야 했어!〉라고 황제가 호통 칠 때도 그는 말투 하나 바꾸지 않고 〈폐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수백 번의 해직 예고는 물론이고, 추방과 파면 협박도 받았지만 황제는 내일이면 다시 자기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는 태연히 방을 떠났다. 언제나 그가 옳았다. 분노하고 믿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했지만 나폴레옹은 마지막 순간까지 푸셰를 완전히 내칠 수 없었다."(205-7)


"전쟁은 나폴레옹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를 미천한 지위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점점 더 전쟁을 원했고, 한층 더 강력한 적이 출현하기를 바랐다." "해가 거듭될수록 전국 각 도시의 성문에 붙은 장정들의 징집 명단에 따라 18세가 19세의 젊은이들이 집에서 끌려 나와 포르투갈 국경이나 러시아의 눈 덮인 황무지에서 아무런 명분 없이 죽어가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의지 때문에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반항심은 거센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별만을 쳐다보는 황제와, 조국의 피폐한 상황과 국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 점차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다. 전제군주가 된 나폴레옹은 대개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황제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듯이 굴러가고 있는 이 수레바퀴를 어떻게든 멈춰 서게 할 수 있을지 은밀하게 숙고하기 시작했다."(211-3)


"같은 족속이면서 차이가 있는 친구보다 더 격렬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자는 없다. 탈레랑과 푸셰는 내적인 본능으로 상대를 혈육처럼 세밀하게 알게 됨으로써 상대편을 꺼리고 외면했다." "그들은 독설의 칼로 서로를 마구 찔러댔다. 두 사람이 서로 원한을 품고 증오하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백 명의 근면한 밀정이 감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두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파리 사람들은 두 호적수의 끈질긴 적대관계를 보며 즐거워했고, 옥좌 곁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연출되는 광경을 몰리에르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관찰했다. 두 신하는 끊임없이 서로를 비꼬았으며, 신랄한 기지로 서로 비방했다." "그런데 모두가 좀 더 재미있는 개와 원숭이 싸움을 기대할 즈음, 갑자기 두 배우는 서로 역할을 바꾸어 진지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갖고 있던 주군에 대한 분노가 처음으로 둘의 경쟁의식보다 더 커졌던 것이다."(217-9)


6 권력투쟁: 황제에게 맞서다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영국과의 강화회담을 진행하던) 푸셰의 면직은 곧 세상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여론은 그의 편이었다. 혁명으로 지위가 높아진 한 남자가 '단독'으로 '제정'에 홀연히 반항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억압의 사슬을 타파하고 자유의 공기를 맛본 프랑스 국민에게 제정이란 이미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자에 불과한 푸셰에게 그렇게 많은 동정이 쏠린 것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황제의 뜻을 거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과 강화를 맺으려 했던 푸셰의 노력이 처벌을 받을 만한 범죄였다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왕당파는 물론 공화주의자들과 자코뱅당, 외교 사절들마저도 이구동성으로 나폴레옹 휘하의 아량과 능력을 겸비한 대신의 실각은 평화사상의 명백한 퇴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황제의 질투가 한 남자의 사회적 명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보다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249-50)


7 생존을 위한 줄타기


"나폴레옹은 자신의 바람을 성취하였고, 권력은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위이며, 로마 국왕의 아버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황송하게도 자신들의 크고 작은 왕관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나폴레옹의 자비로움에 감사해하며, 그 앞에서 강아지처럼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고 알랑거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적인 영국도 나폴레옹의 위세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푸셰 같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보좌진 정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단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음 편히 명상에 잠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된 오트란토 공작(푸셰)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인 나폴레옹과 힘으로 겨루려 했던 자신의 실책과 불손을 깨닫게 되었다." "푸셰에게는 황제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영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푸셰는 이미 처리된 것이다. 황제에게 공공연히 반항한 이 남자에게 파리와 튀일리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269)


"나폴레옹이 푸셰에게 다시 한번 관직을 제안한 것은 결코 그를 좋아하거나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관직을 제의한 것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불안감 때문이었다. 황제는 처음으로 패배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군대의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거드름을 피우며 환영 깃발에 둘러싸여 개선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털가죽을 턱 위까지 둘러 얼굴을 가리고 야음을 틈타 남몰래 들어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가장 막강했던 정예부대 병사들이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서 동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언제나 승리한다는 신화가 무너지자 가장 가까운 친구들부터 등을 돌리고 달아나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면서 엎드려 절하던 주변 나라의 군주들은 대패한 황제 앞에서 체면을 차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무력으로 압박당하고 있던 한 세계가 그 가혹한 군주에 대항해서 일어났다."(272-3)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파리는 성문을 활짝 열었다. 적군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이 파리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는 동안 푸셰는 황제의 의도에 따라 국내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결국 새 정부는 탈레랑의 영도 하에 완전히 새롭게 조직되었다. 이전 정부에서 파문당했던 탈레랑은 필요한 때 그 자리에 있었고, 푸셰보다 더 민첩하게 수완을 발휘해서 간판을 바꿔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가 탈레랑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다 루이 18세도 그를 선임하고 있었기에 탈레랑은 자신의 뜻대로 내각의 모든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일리리아와 이탈리아를 분주히 오갔던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그 어떤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려주거나 걱정해주지 않았다. 푸셰는 인생의 어떤 한때처럼 다시 야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282-3)


8 백일천하: 푸셰, 권력의 정점에 서다


"1815년 3월 20일 아침, 엘바에서 귀환한 나폴레옹 황제의 백일천하의 첫날 아침이 밝았다. 수천 명의 환호성이 아직도 그의 핏속에서 일렁이고 있지만, 이미 냉정한 현실을 달관으로 체득한 나폴레옹은 승리 속에 숨어 있는 위험을 내다보고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권좌에 오르기보다는 오랫동안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토록 등을 보이고 싶지 않고 미워하는 푸셰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인물은 푸셰밖에 없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오트란토 공작을 경무대신에 임명한다는 기사를 실은 관보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푸셰는 자신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무대신이라니!"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한 더 큰 도박만이 그를 자극할 수 있었다. 대륙의 여러 나라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도박이 아니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299-301)


"푸셰는 지극히 불만스러웠지만 경무대신직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 야심만만하고 열정이 끓어오르는 도박사에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었다. 도박판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생을 건 이 거대한 도박판의 밖에 서 있을 수도,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방관자로 있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말과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그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천재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평범함이다. 푸셰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푸셰라고 생각했다. 목마른 자가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물에 손을 내미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충실하고도 무능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교활하지만 믿을 수는 없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이처럼 10년 동안의 격렬한 적의가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이 어중간한 우정보다 더 신비스러울 때가 가끔 있다."(302-4)


"1815년의 나폴레옹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 황제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이름뿐인 권력의 옷을 입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 비해 그의 곁에 있던 푸셰는 힘이 있는, 말 그대로 숨은 권력자였다."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결국에는 혼란의 바람에 흔들리는 믿을 수 없는 나폴레옹의 천재성보다는 푸셰의 냉정하고 타산적인 이성이 피로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확신과 안심을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 황제가 보낸 밀사들이 가차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그 삼엄한 국경이 오트란토 공작의 밀사에게는 마법의 열쇠라도 닿은 것처럼 쉽게 열리곤 했다. 웰링턴, 메테르니히, 탈레랑, 오를레앙,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도 푸셰의 밀사를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이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기만 했던 이 남자는 단번에 세계를 무대로 한 도박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도박꾼이 된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사건은 의도한 대로 처리되었다."(308-9)


"그런데 푸셰가 다른 나라, 즉 적들과 공공연하게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주변국이 나폴레옹을 배제한 채 푸셰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게 아닌가. 이는 유럽 열강들은 프랑스에서 어떠한 정부 형태가 성립되든 동의할 수 있지만, 다만 한 가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부만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뜻이다." "자기에게 이처럼 대담하게 도전한 남자를 나폴레옹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푸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20년 전인 1793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도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로베스피에르는 2주일 후에는 푸셰의 목이든 자기의 목이든 둘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도박사 기질을 지닌 오트란토 공작은 그때도 자신에 차 있었다. 나폴레옹의 화를 돋우지 말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푸셰는 로베스피에르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떨어져 나간 것은 그의 목이었소.〉"(320-3)


"(나폴레옹을 퇴위시킨 후) 푸셰는 자신이 옳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그 한 가지를 실행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의회에서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카르노 앞에서는 공화제를, 동맹군 앞에서는 오를레앙 공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그 이전의 국왕, 즉 루이 18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금씩, 그러나 능숙하게 방향을 돌림으로써 자기와 가장 가까운 동료들조차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방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부패와 뇌물이라는 거대한 수렁의 늪을 지나서 왕당파 쪽으로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보나파르트파와 공화파를 넘나들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정부를 부르봉가에 넘기기 위해 교섭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결법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를 이전 국왕에게 넘겨주는 협약을 통해 외국 군대에 유린된 프랑스를 보호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339)


"푸셰는 루이 18세가 자신을 새로운 정부의 내각에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만 하면 언제든지 파리 성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파리의 어둠 속에서 근세사의 가장 파렴치한 거래가 전 자코뱅 당원과 전 국왕 사이에 비밀리에 성립되었다. 튀일리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부조리극이 펼쳐졌다. 루이 16세의 후예이자 그 동생인 루이 18세가 푸셰를 맞는 생각지 못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푸셰가 누구인가. 그는 루이 16세를 시해한 자들과 공범이며, 왕정 이후 공화국에서 대신을 지냈으며, 무엇보다 일곱 번이나 서약을 어기고 배신한 자가 아닌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직접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담벼락을 타넘고 도망쳤던 자가 아닌가. 그래서 루이 18세는 〈그놈처럼 교활하고 약삭빠른 놈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푸셰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다짐하겠다는 여덟 번째 서약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345-6)


9 실각과 종언: 역사의 복수


"권력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반발이 뒤따른다. 국왕이 파리에 무사히 입성하려면 푸셰를 경무대신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국왕은 파리에 입성할 때 유혈 참사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바심을 냈던가.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귀족들이 돌변해서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눈곱만큼도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리옹에서 수백 명의 성직자와 귀족들을 학살하고, 루이 16세 처형에 가담한 푸셰만큼은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트란토 공작은 언젠가부터 국왕 주변의 귀족들이 자기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멸시하는 태도로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옹 학살자에 대한 탄핵 문서가 갑자기 등장하고, 복고 프랑크당과 갑작스럽게 출현한 '애국단체'들이 집회를 열어서 〈백합기는 과거의 오점을 걷어내고 새롭게 순화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푸셰는 결사적으로 저항했다."(358)


"그러나 이 노회한 야심가도, 국가를 판돈으로 걸었던 대담한 도박꾼도, 더없이 교활한 인간도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아무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유령과 싸우는 법이었다. 푸셰는 왕궁에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같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왕투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일가 중에서 학살을 면했던 단 한 사람, 바로 앙굴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가담한 공범자인 푸셰에게는 결코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공간에 머무르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대신과 귀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푸셰를 멸시하고 증오감을 표출했다." "그녀가 변절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경멸하자 다른 사람들도 푸셰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왕족 모두가 루이 18세에게 이구동성으로 국왕의 주권이 확립된 지금 튀일리궁에서 푸셰를 내쫓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360-2)


"다시 세상에 내던져진 푸셰에게 얇은 외투라도 걸쳐주기 위해서 지극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작은 직책이 주어졌다. 관보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경무대신 직위에서 파면되었다는 사실은 제외하고, 드레스덴 궁전의 공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만을 실었다." "의회에서는 아무도 오트란토 공작의 공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의 한 고관이, 새 국왕 루이 18세가 의기양양하게 환호 속에 파리로 귀환하게 했다는 사실은 모두 잊어버렸다. 그들 모두는 다만 일개 시민 푸셰, 1792년 국왕의 처형에 가담한 푸셰, 리옹의 학살자 푸셰만을 입에 올릴 뿐이었다. 마침내 32대 334라는 절대다수로 〈하느님으로부터 선출된 국왕에게 맞선〉 푸셰는 특사로서의 모든 은전을 박탈하고, 평생 동안 프랑스에서 추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당연히 공사 직책에서도 파면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모든 직책과 권리를 박탈당한 푸셰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한발에 걷어 채여 차가운 거리로 쫓겨났다."(366-7)


"이렇게 오트란토 공작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 때문에 메테르니히가 1819년에 오트란토 공작에게 트리에스테 이주를 허락했을 때에도 몇 명의 오스트리아 경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주의해서 보는 사람이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도 된다는 것을 메테르니히는 알고 있었다. 일하기 좋아하고 쉴 줄 몰랐던 푸셰에게 아무런 기약 없는 무위도식의 나날은 30년 동안의 격무보다 그를 더 지치게 했고 심신의 손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의 폐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험한 기후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태양빛이 비추는 곳을 죽을 장소로 허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트리에스테였다." "북해의 어느 항구에서 태어나 기이하고 숙명적인 생애를 살아온 푸셰는 1820년 12월 26일, 남해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2월 28일, 이곳저곳으로 불안하게 쫓겨 다니다가 결국 추방당했던 이 남자는 마침내 영원의 안식을 찾았다."(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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