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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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곤혹스러우며, 감정이라는 개념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 연구에는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세 개의 혁명이, 그것도 서로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인지cognition 연구를 위해 고안된 실험실 연구기법을 감정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민족지학자들은 감정의 문화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현장연구 기법과 새로운 이론 장치를 고안했고, 그로써 두번째 혁명을 촉발시켰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들과 문예비평가들은 감정이 역사를 갖는다는 것(그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는 아직 모호하다)을 발견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감상주의〉 혹은 〈감수성 숭배〉로 불리는 감정 혁명의 성쇠를 추적하고 있다. 감상주의는 느슨하게 조직된 일련의 충돌들로서 감리교, 노예제 철폐 운동, 소설의 대두, 프랑스혁명, 낭만주의 등의 다양한 문화적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7)


제1부 감정이란 무엇인가


1장 인지 심리학의 답변


"의식적 혹은 통제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무의식적 혹은 하下의식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 사이의 경계는 구체적인 실험 절차와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학계는 〈등록〉 혹은 〈전前주의적 처리〉와 같은 분리되고 고정된 구조 내지 절차의 존재를 부인하고, 특정한 반응을 낳는 통로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가정을 지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 인지에 미치는 영향이 포괄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감정이 생각에 대하여 일관된 〈하의식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권적인 개입 지점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감정이 과잉 학습된 인지 습관과 대단히 흡사하게 작동한다는 아이슨과 다이아몬드의 1989년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쌓이고 있다. 현재까지 그 어떤 실험도 감정이 인지와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감정이 언제나 간접적으로, 예컨대 인지 편향, 피부전도 수준, 심장박동률 등을 통하여 실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43)


"특히 우울은 점차 인지 장애로 간주되고 있고, 우울증에 대한 인지 치유가 개발되고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울증의 공통적인 특징은 환자가 부정적인 자기평가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그 생각이 편향된 것이고, 그 생각의 정확성을 점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생각은 고조된 감정적 각성과 결합되어 있고, 또한 그 자체로 의식에 대한 〈만성적인 접근성〉을 갖는다. 따라서 우울증에 대한 인지 치유는, 그 생각이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을 때 환자가 그것을 식별하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슬픔과 스트레스 역시 인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가까운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는 피험자들의 생각은 덜 넓고, 덜 자기준거적이며, 덜 감정적이다. 이는 트라우마에 대한 회피 전략과 고도의 심리 통제 전략의 결과로 간주된다."(43-4)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감정이 〈정서가valence; 情緖價, 즉 쾌감가hedonic tone〉와 〈강도intensity〉를 갖고 있으며, 감정은 그 두 가지 점에서 일반적인 인지와 날카롭게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다는 정서가, 즉 사물, 사건,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쾌감과 불쾌감이 모든 목표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바우어는 이를 가리켜, 〈감정은 진화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바우어에 따르면, 인간 유기체는 다양한 필요들의 긴급성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 절차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계획할 수 있어야 하며,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하여 내외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란 그런 체제가 관심을 목표에 정향된 행동으로 번역하는 작업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감정에 쾌감이나 불쾌감이 부여되는 것, 감정에 특정한 강도가 구비되는 것이, 감정이 목표를 세우도록 해주거나 혹은 목표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45)


"감정이 깊이 추구되는 목표와 긴밀히 연관된다면, 감정은 지속적으로 〈심리 통제〉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심리 통제의 작동에 핵심적인 것은 소위 〈재귀 제약reflexivity constraint〉이다." "심리 통제 과제가 긍정적으로 제시될 경우에는 재귀 계약의 원리를 위반할 가능성이 적다. 긍정적인 수행을 점검하는 과정이 그 수행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목표가 설정될 경우, 그것은 〈아이러니한 과정〉으로 귀결된다. 분홍색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으면 사람은 즉시, 무언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피할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피해야 하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를 극복한다고 해도 곧바로 두 번째 문제가 닥쳐온다. 일시적으로나마 과제의 실행에 실패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일에 성공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따라서 심리 통제는 〈재귀 계약〉 때문에 최선의 경우에도 가끔씩만 성공할 수 있다."(50-1)


2장 인류학의 답변


"(구성주의적) 감정 인류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미셸 로살도는 감정에 몇몇 생리적인 측면이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인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직된 행위와 발화 양식의 한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녀는 샤흐터와 싱거에게 의존했는데, 그 두 사람은 1962년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부신호르몬을 주사하고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피험자들은 고양감에서 불안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을, 실험자들이 피험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해준 것에 일치하게 경험했다. 로살도는 그 실험이 보여주는 점은, 감정에 생물학적인 요소(각성)가 결부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인 요소는 모호하고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결정적인 것은 그 각성에 대한 해석이고, 그 해석은 학습되는 것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살도는 자신의 연구로부터 인간 자아의 조형성 테제를 도출해냈다. 인간의 자아는 거의 무한대로 조형적이라는 것이다."(64-6)


"구성주의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감정에는 폭넓은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반면, 심리문화학파 인류학자들은 그런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서 클라인만과 조앤 클라인만은 '고통'과 '경험'이라는 서양의 핵심 개념을 그들이 보기에 문화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이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명시적으로 개입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중하게 재정의된 고통 개념을 이용하여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분리시키고, 그 개인에게서 정치적으로 유감스러운 '고통' 상태를 식별해낸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중국인들에게서 극심한 정치 테러와 억압이 남긴 개인적인 후유증들, 즉 어지러움, 두통, 우울을 발견했다." "클라인만을 따른 젠킨스는 엘살바도르를 탈출한 난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우울을 발견했다. 그러나 동시에 젠킨스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체적인 증상이 문화적으로 특수하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미국 병원에서 오진을 받기 일쑤였다는 점도 발견했다."(84)


"모든 공동체는 감정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할 것이다. 사회적 삶에 어떤 통일적인 목표 혹은 에토스가 존재한다면(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자아에게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촘촘한 목표들의 네트워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첫째, 공동체의 안정성은 공동체가 감정에 대하여 일관된 지침을 제공할 능력을 갖추었느냐에 의존한다. 또한 감정이 인지 습관인 한, 감정은 원칙적으로 조형적이다. 물론 그 노력은 의당 심리 통제에 연루된 문제들에 봉착한다. 감정이 조형적이기에 둘째, 공동체의 감정질서는 개인의 노력이 지향하기도 하도 이끌리기도 하는 이상理想과 전략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감정질서의 그 두 가지 측면이 보편적이라면, 그것들은 지극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 두 가지 측면과 결과 때문에 우리는 감정의 자유라는 이상을 이론화하고 그 이상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감정체제들을 평가할 수 있다."(93-4, 103)


3장 이모티브


"실험 심리학자들은 한편으로 실험자들 자신이 불확실하고 변화하기도 하며 비본질적인 주관적인 경험의 영역에 갇혀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관적 지각의 결함에 대한 통제 장치를 갖춘 반복 가능한 실험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피험자의 경험적이고 인지적인 결함에 초점을 맞추고, 피험자는 자신의 몸을 불완전하게 〈통제〉한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실험의 초점을 그 결함과 불완전성에 맞춘다. 그 두 유형의 결함을 신경생리학적이고 생화학적인 메커니즘의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데카르트적) 이분법은 사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대 서양의 〈주체〉 모델, 즉 고요한 경험의 장소로서의 주체가 준거하는 이분법이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발생한 비의지적인 생리적 각성 상태와 주관적 〈느낌〉의 합성물로 파악하는 서양의 상징적인 감정관도 바로 그 주체에 토대를 둔 것이다. 인류학은 그러한 감정관이 서양의 문화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08)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 쉽게 식별되는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은 자의적인 기호적 구조를 갖춘 담론에 불과하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비판한 것은, 현상을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고 또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면 현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근대 사회의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주관적 경험과 감정을 갖는 개별적인 인간, 일련의 깊이 평가되는 목표들을 추구하고 선택하며 계획을 수행하는 개별적인 인간─을 경험하는 것도 비판했다.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순전히 담론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담론이 다른 어떤 담론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음은 물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실험 심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실은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기표 체계의 허구적인 기의로서 주조된 것이며, 그 〈과학〉의 〈발견들〉은 실상 이미 내려진 결론의 포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115-6)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자체로 이미 기표가 아닌 기의에 접근할 수 없다고, 다시 말해서 제약적인 전제조건들을 구비한 음험한 담론 구조의 일부가 아닌 기의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담론이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묻는다. 담론 구조에 이미 통합되지 않은 어떤 것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반한다. 우리가 사용한 그 이름이 불가피하게 기호 체계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는 〈날 기의〉(다른 것의 기표이기만 한 것이 아닌 기의)를 〈기의〉 범주의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예로 취급하고, 그리하여 모든 알 수 있는 기의는 일련의 기표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국 〈기표〉 개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같아진다. 기표 개념이 어느덧 어떤 것을 그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구분해주지 못하는, 미끄럽기로 악명 높은 존재 개념과 같아진 것이다."(121-3)


"포스트구조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절한 해석은 〈사회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부딪친 적이 없는 기의로 비난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실제 연구는 그 설교와 정반대로 진행된다. 그들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신비스럽도록 전능한 것으로 감싼다. 사회적인 것이 언어와 담론을 발생시키는 맥락 안에 슬쩍 삽입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구조주의가 오독되고 실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전적으로 새로운 용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회적인 것을 담론이 발생하고 텍스트가 생산되는 맥락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오늘날 학문의 너무나 많은 맥락에서 전적으로 무용했을 것이다. 문학이든 역사이든 문화이든 〈사회적〉 관계이든, 오늘날 학자는 사회적인 어떤 것을 조사함으로써만 자신의 전문가적인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125)


"포스트구조주의의 난문에서 벗어나려면 제1항과 제2항의 관계를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아니라 번역의 관계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게 접근하면 두 가지가 가능해진다. 첫째, 분석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행한 번역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일 수 있다. 둘째, 번역은 언어와 언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 양상들 사이에서, 처리 습관들 사이에서, 언어적 구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데카르트적 유형의 주체성을 재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와 코드의 메시지들이 도착하는 장소, 메시지의 일부는 다른 코드로 성공적으로 번역되지만 다른 코드는 번역에 실패하는 장소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인지 심리학의 연구는 번역 작업의 한계, 불완전성, 부정확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인지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감정과 발화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발화는 감정을 말로 번역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128-9)


"활성화란 〈입력〉 〈생각〉 〈기억〉 등(이것들을 총괄하여 〈생각 재료〉로 칭한다)이 〈처리〉되도록, 즉 번역되도록 제공된 상태를 가리킨다. 〈주의〉(혹은 〈의식〉)는 번역이 발생하는 장소의 하나이되, 번역 작업의 강도가 가장 큰 장소이고, 새로운 번역 노력(학습)이 수행되어야 하는 장소이다." "활성화되는 것은 생각 재료 전체에서 극히 적은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성화된 것 내부에는 자아가 탐색하고 결정해야 할 대단히 많은 선택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곳에서 주의의 번역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코드화된 메시지는 수많은 미결정성과 모순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또한 생각 재료들이 통과할 수도 있는, 아직 열리지 않은 많은 다른 문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활성화된 것의 안에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감각을, 그리하여 역사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곳이 바로 〈감정의 지대〉이다. 따라서 심리학의 발견을 인류학의 현장조사 결과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다."(141-9)


"〈나는 두려워요〉 〈나는 화가 나요〉와 같은 감정적 발화들, 즉 내가 1인칭 현재시제 감정문이라고 칭하는 발화들은 일종의 화행speech act으로, 그것도 기술적─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기술하거나 재현하는 것─이지도 않고 수행적─말로써 무언가를 행동하는 것─이지도 않은 화행으로 지칭하는 것이 옳다. 나는 그러한 발화를 〈이모티브emotive〉로 칭하고자 한다. 수행적 발화는 스스로를 지시함으로써 세계에 무엇인가를 행하는 발화이다. 〈나는 여러분의 지명을 받아들인다〉는 진술에서 동사인 받아들인다accept는 그 진술 자체를 지시하는 것 혹은 그것에 이름붙이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그 진술을 수용acceptance으로 만든다. 이때 그 수용은 기술적인 진술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화자의 행동이다. 이모티브는 수행문과 달리 자기준거적이지 않다. 〈나는 화가 난다〉고 말할 때 〈화가 난다〉는 단어는, 〈나는 받아들인다〉에서 〈받아들인다〉가 수용인 것과 같은 방식의 화가 남은 아니다."(163-4)


"이모티브는 주의에 제공된, 즉 진행 중인 번역 과제를 언어적인 〈기술記述〉로 옮기는 번역인 동시에, 여타의 대기 중인, 주의의 역량을 넘쳐나는 번역 과제들을 기술로 옮기는 번역이다. 이모티브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지시물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수행문과 유사하다. 세계에 무엇인가를 행하기 때문이다. 이모티브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요, 감정을 구축하고 숨기고 강화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보다 성공적일 수도, 덜 성공적일 수도 있다. 이모티브는 〈분산된 자아disaggregated〉의 내부에서 주의에 포착되어 다양한 상위의 목표들에게 이용되는 역동적인 도구다. 그러나 그 이모티브는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그것이 기여하도록 의도된 그 목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화, 그것도 정치적인 관련성을 갖춘 개념화가 구축될 수 있는 지점은, 유전적으로 입력된 〈기본〉감정이라는 추정적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164-5)


4장 감정의 자유


"앞서 나는 감정을 목표 조정과 관련된 생각 재료의 활성화로 정의했다. 생각 재료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가장 단순한 경우에서도 목표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목표 갈등이 나타났다는 신호이다. 전투에서 병사가 최초로 적병을 죽여야 할 때, 사람을 마비시키는 듯한 죄책감과 역겨움의 물결이 닥쳐오기 때문에, 병사는 갑작스러운 차가운 공포를 느낀다. 이는 비폭력이라는 목표와 군인다움이라는 목표가 충돌했음을 나타낸다. 비폭력을 배제하기로 하면, 그것을 주의로부터 제외하라는 신호가 심리 통제에 전달된다. 비폭력이라는 목표가 제거되어야만 군인다움이라는 복잡한 활동이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심리 통제는 자아의 어떤 감각에서 나온다. 이때의 자아는 〈인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자아이고, 그 자아는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행동 지대가 되어야 하는 자아이다. 활성화된 광대한 범위의 생각 재료들은 어떻게든 다듬어지고 재배열되어야 한다."(186-7)


"이모티브는 생각 활성화들을 다듬고 재배열하는 수단이다. 다만 이모티브는 자아-탐색적이고 자아-변경적인 힘이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결코 심리 통제의 편리한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모티브는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의도치 않게 심리 통제의 애초 목표를 전복시킬 수도 있고, 또한 웨그너와 스마트가 〈깊은 활성화〉라고 칭한 것을 강화할 수도 있다. 그 복잡한 이모티브를 이용하여 심리적인 균형을 유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모티브는 너무도 독자적이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대단히 힘들지만, 화자의 규범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모티브를 통하여 확보하려는 그 〈균형〉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를 알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이용 가능한 모델 내지 규범들 속에서 적절한 것을 찾고 선택해야 한다. 감정 인류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규범적인 감정관리 양식은 모든 정치체제, 모든 문화적 헤게모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다."(187-8)


"감정이라는 복잡한 생각 활성화는 목표와 이상理想의 변화를 향하기도 하고, 그 속의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관리가 파탄으로 치닫기도 하고, 새로운 관리 전략이 투입되기도 한다. 관리하는 자아도, 관리의 지향점도 지속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감정 관리라는 개념의 〈관리〉는 이모티브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한 은유다. 따라서 이모티브가 수행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는 〈관리〉보다 〈항해〉가 낫다. 〈항해〉는 항로의 급격한 변경 가능성은 물론 선택한 항로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수정 가능성도 포함한다. 〈항해〉라는 단어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함축하는데, 목표의 변경은 그 변경이 보다 높은 우선순위 목표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경우에만 합목적적이다." "〈항해〉는 높은 수준의 목표 변동을 포함하는 대단히 광범위한 감정적 변화들을 가리킨다. 〈항해〉는 〈관리〉를 포함하지만, 이때 그 관리는 고정된 목표 세트의 이름으로 이모티브의 자아-변경 효과를 이용하는 관리이다."(188-9)


제2부 역사 속의 감정: 1700~1850년의 프랑스


5장 감상주의의 만개 1700~1789


"몰리에르의 『돈 주앙』(1665)은 악명 높은 그 바람둥이 귀족이 수많은 여성을 유혹하던 그의 매력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여자들이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로서 주어져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감정 역시 격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탐구되지는 않는다. 플롯도 돈 주앙의 매력이 야기한 갈등에 집중한다. 라파예트의 선구적인 작품 『클레브 공작부인』(1678)에서조차 주인공들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이해도 없다. 그로부터 백 년 뒤 문학과 정치는 상전벽해를 보여준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92)는 성격상 감정적인 것인 유혹의 수단을 묘사하는 데 수백 페이지를 할애한다. 위선적인 발몽은 그의 먹잇감인 아름답고 독실한 투르벨이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이타애적으로 대하는지 목격하도록 고의로 일을 꾸민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녀가 그의 감수성, 즉 그의 감정적 예민함, 그녀를 사랑하는 능력, 그녀에 의해 변화될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도록 일을 꾸민다."(216-7)


"1789년 여름 프랑스 삼부회가 왕국의 헌정체제를 영구히 변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제르멘 드 스탈 부인은 프랑스인들이 인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진지하고 사심없는 열광'이 모든 프랑스인을 움직이고 있다. 모든 곳에 공적인 정신이 자리 잡았다. 상층도 그렇다. 그 모든 사람들 중 최고는 나랏일을 결정하는 데 국민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를 '가장 열렬하게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감정의 정치적 역할은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에 의문에 붙여졌다. 그의 몰락 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감정에 대한 지배적 견해가 근본적으로 변했고, 감정이 한때 수행했던 역할이 은폐되고 부인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179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는 과학, 합리성, 사회계약론, 자연권에 대한 논의로 제시되었고, 프랑스혁명은 그 새로운 이념을 적용하려던 잘못되어버린 시도로 파악되었다. 혁명의 발발과 〈공포정치〉의 과격한 국면은 사회적인 틀로 설명되었다."(217)


"이 시기는 통상 〈이성의 시대〉, 즉 새로운 자연과학이 확산되고 사회계약론과 수요와 공급의 법칙 같은 새로운 정치경제 이론이 높은 지위를 획득한 시대로 해석되어왔다. 최근의 역사가들은 출판 산업에 의해 열성적으로 뒷받침되던 새로운 독서하는 공중, 그림 전시회, 도서관, 카페 등의 새로운 공적 기관에 집중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살롱, 프리메이슨, 사적인 통신 네트워크 등은 〈새로운 공적 영역〉의 핵심 기관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혁명은 새로운 정치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일치된 시도라기보다 그 공적 영역이 낳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정치문화)의 귀결이다. 그 새로운 실천들(전부는 아니다)이 입각하고 있던 특수한 감정적 성격, 감정을 선한 힘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감정표현과 친밀성에 대한 열광 등이 당대를 지배하던 명예 코드에 대한 감정적 피난처였으며, 그 피난처가 혁명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핵심적이었다. 나는 그 모든 현상들을 〈감상주의sentimentalism〉로 통칭하고자 한다."(222-3)


"감상주의는 강력한 이모티브의 작성에 필요한 처방전들을 다량으로 제공했다. 감상주의의 주창자들은 연민, 이타애, 사랑, 감사는 모두 똑같이 자연적인 감성들이고, 그것들이야말로 도덕과 사회적 결속의 뿌리이자 토대라고 주장했다.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무분별한 열정에 대한 최선의 방어 장치요, 미덕을 훈련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런 생각을 수용하고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연민을 느껴요〉라고 말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감정이 솟구쳐서 그 문장을 확인해주면, 그것이 의식 내지 합리적 지도의 피안에 위치한 타고난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고, 이어서 선과 아름다움의 원천인 그 감정이 자극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이모티브를 발화하고 이어서 그 작동을 체험한 사람은, 그 성공이 그가 진실로 자연적인 감정의 샘물을 마셨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때 그 사람을 압도한 것이 자연이었으니만큼, 그 느낌과 강도와 진정성은 함께하는 것이었다."(248)


"물론 그 감정은 (감상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무릇 학습되고 계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브로 이끌어낸 감정 역시 학습되고 계발된 것이다. 감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믿어지던 18세기의 현실에서는, 감정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기보다 결합시켰다. 사람들은 감정을 공유하였고, 그래서 감정은 공적 자원이었다.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당황하기보다 넉넉한 진정성과 사회적 결속의 표지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 수용 능력 역시 실천에 의하여 계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소설에 의해 생성된 것이건, 삶에 의해 자극된 것이건, 감정은 동일한 것이었고, 감정을 낳는 원천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예술과 삶의 경계가 흐려졌다. 사람들은 감정의 인지와 감정의 표현이 예술에서든 정치에서든 사생활에서든 올바른 행동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당대의 소설과 연극과 예술은 교육적 경향을 노골화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도덕 교육은 동일한 것이었다."(249)


"감상주의적인 소설, 연극, 오페라는 마니교적이었다. 그것들은 절대선에 절대악을 대립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유도하고자 했다. 마자의 연구는 18세기 변호사들이 변론문을 작성할 때 감상주의 문학의 플롯 구조와 강렬한 감성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보여준다. 그런 변론문은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 수만 건이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변론문에는 정치, 사회, 감성, 도덕이 융합되어 매력적인 개혁주의 비전으로 제시되었다. 일부 변론문은 마치 소설처럼 읽혔다(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여기서도 무너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소설의 비할 수 없는 사실주의와 교육적인 힘을 찬양했다. 변호사들도 변론문의 그 양식을 진실성의 표지로 간주했다. 변론은 인쇄되었고, 여론은 법정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소송에 대한 여론의 판단은 법정의 판결보다 더 큰 무게를 지녔다."(259-60)


6장 프랑스혁명과 감상주의 1789~1815


"선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물론 낙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그 관점이 선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1789년이 되면 도덕적 감수성의 존재는 아예 상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프랑스인에게 일일이 물어보지 않고도 한 사람이 그들 모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캐럴 블룸이 루소와 루소의 동시대인들 사이의 차이를 과장한 면도 있다. 물론 루소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루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루소가 동료 철학자들과 벌인 갈등, 그의 외롭고 어쩌면 편집증적인 행동 방식은 고립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감상주의자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도덕적 감각의 필연적인 무오류성을 강조한 것은 루소만이 아니었다. 루소는 그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것뿐이다. 그가 그 일을 했을 때, 수천 명의 교육받은 독자들은 이미 루소의 생각을 이해하고 찬양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272-3)


"역사가인 프랑수아 퓌레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정치적 주장과 정책의 정당화에 투입된 〈인민〉 〈자유〉 〈민족〉과 같은 추상들이 감상주의적 신념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그 추상적인 빈 단어들이 공포정치 기간 동안 발휘한 정치적 힘은 제도와 정치에서만 유래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에서도 발원했다. 역사가인 파트리스 이고네가 포착하지 못한 것은, 자코뱅이든 감상주의자이든 혁명가들은 개인주의적인 가치와 공동체적인 가치가 서로 상충된다고 파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각 개인이 타고난 도덕적 감각의 명령에 자진해서 따르기만 하면 공동체의 승리는 의당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견이 서로 엇갈릴 경우에는 우선 협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아야 했다. 이때 자신의 감정이 자연적이라는 확신이 들 경우,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이야말로 도덕이 결여된 존재였다."(273-4)


"1789년의 사건들은 낙관주의와 이분법적 감상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민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정식화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던 그 유명한 '8월 4일 밤'은 온통 감상주의적 발화와 제스처로 치장된, 국민 자체를 감정의 피난처로 전환하려던 시도였다." "감상주의의 맥락에서 볼 때 두드러지는 것은, 국민의회의 공식 의사록이 개혁을 의원들의 자연적인 감수성에서 대두한 감상적인 이타애 행위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의사록은 〈애국적인 희생〉을 강조하지만, 이때 〈애국적〉 행위란 협소하게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애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날 밤 회의는 폐지할 특권을 거명할 특권을 보유한 의원들의 개혁 제안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귀족 의원은 귀족 면세 특권의 폐지를, 성직자 의원은 십일조세 특권의 폐지를, 도의 대표는 지역적 특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감상적인 개혁의 홍수가 일어났고, 감정표현이 계산적인 생각을 마비시켰다."(277-8)


# 감정의 피난처 :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 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


"감정적으로 온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콩도르세는 의원들에게 열정이 아니라 이성에 입각하여 행동하라고 촉구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보다 계몽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1792년 10월 31일이라는 늦은 시점에 발표된 신문 논설에서 그는 연설에 열정을 이용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콩도르세를 따르지 않았다. 브리소는 1792년 4월 25일에 입법의회에서 비판자들에 대하여 콩도르세를 변호했다. 그는 콩도르세가 볼테르와 달랑베르 같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구체제하의 광신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오랜 노력을 되돌아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만일 그 위대한 인물들의 불타는 정신이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여주고 우리 영혼에 그 정신의 위대함과 힘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이 자유에 대하여 행하는 연설이 오늘과 같은 호응을 얻었겠습니까?〉 브리소는 콩도르세의 위대함을 감상주의의 전진 속에 통합시켜서 제시했던 것이다."9283-4)


"자코뱅이 공화국에 대한 엄중한 위협에 직면하여 도입한 입법들의 강조점 역시, 적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기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에 찍혀 있었다. 자코뱅이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만인을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조치들은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취해졌다. 자코뱅의 법이 요구한 것은 진실한 헌신이었다." "따라서 자코뱅의 공포정치 입법은 지롱드의 전쟁 정책과 다를 바 없고, 역사가인 마자가 분석한 변론문과도 다를 바 없다. 공포정치 역시 진실한 감정은 강하다고 가정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본색은, 진실한 감정이 있으면 저지르지 않았을 잘못으로 인하여 혹은 진실한 감정에 내장된 그 강력함의 부재로 인하여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793년 9월 17일의 혐의자법에 의하여 체포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행동과 관계와 말과 글에 의하여 스스로가 폭정의 파당 ······ 자유의 적이라는 것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294-5)


"자코뱅은 새로운 체제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며 쾌감을 주는 이타애 위에 건설하고자 했다. 만일 그런 감정이 실제로 있었더라면, 자코뱅의 정책은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보다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모티브 이론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사실에 보다 근접한 이론이라면, 우리는 자코뱅의 입법이 체제의 적만큼이나 큰 고통을 체제의 지지자들에게도 주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고통은 정작 체제의 활동가들에게서 가장 강력하게 느껴졌다. 이는 공화국을 드러내놓고 반대한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공화국 활동가들(연맹주의자들 포함)이 처형된 것에서 입증된다. 공포정치하에서 내적인 의심과 외적인 의혹은 서로를 강화했다. 모두가 스스로 위선자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감상주의 이모티브가 발휘하던 확인해주는 힘은 약화되었고, 사람들은 타인을 겨냥함으로써 외적인 의혹을 피하려 했다. 정확히 누구를 겨냥하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유죄였기 때문이다."(298-9)


"당시에는 아무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공포정치의 종식을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사후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그때는 아무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자코뱅적인 판본의 감상주의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 심지어 정치에 감정을 긍정적으로 개입시키려는 거의 모든 시도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듯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이모티브에 대한 염증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남용되지 않은 새로운 어조가 공식적, 비공식적 맥락을 주름잡기 시작했다. 자코뱅의 청교도적인 감시위원회가 폐지되고 부패가 공공연해지자, 파리에 냉소적인 파티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에 빨간 리본을 맨 여자들이 극장과 무도장에 나타났다. 그것은 기요틴에서 처형된 사람들에 대한 유희적 기억 행위였다." "나는 그 시기가 망상으로부터 벗어난 시기였다고, 자코뱅주의뿐만이 아니라 감상주의가 부추긴 모든 종류의 감정적 자기훈련에 대한 망상으로부터 깨어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303-4)


"감상주의가 1789년 이전의 대항 언어로서 거둔 성공이 크면 클수록, 그 후의 실패는 그만큼 가혹했다. 대략 테르미도르의 반동 직후에 시작된 감상주의적 원천과 감상주의적 어법의 삭제 작업은 1814년경이면 사실상 완성된다. 이데올로그들과 샤토브리앙만이 아니라 쿠쟁과 기조 그리고 토크빌까지 포함되는 새로운 세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지평에 실제 역사와는 달랐던, 오로지 남성적인 계몽주의만을 그려놓았다. 그들이 그려놓은 계몽주의는 오로지 이성의 산물이었고, 그 결과물이 1789년의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은 능력 있는 남성들의 공적인 고려와 토론과 투표에 의한 이성의 지배를 보장해주는 입헌군주정을 수립했다. 8월 4일 밤은 평등의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과 감상주의가 혼용되어 있던 현실은 망각되거나 삭제되었다. 공포정치는 일탈로 치부되었고, 그 일탈은 사슬에서 풀려난 훈육되지 못한 아랫것들의 정치적 열정의 부산물로 간주되었다."(314-6)


7장 자유로운 이성과 낭만적인 열정 1815~1848


"18세기 말에 이성과 감정은 반대되는 힘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19세기 초에 이성과 감정은 반대되는 힘으로 이해되었다. 18세기 말에 미덕은 자연적인 감성을 토대로 자라난다고 생각되었다. 19세기 초에 미덕은 의지가 이성의 안내를 받아 열정을 규율함으로써 성취하는 결과물로 생각되었다. 사실 고대부터 17세기까지 미덕은 그렇게 함양된다고 생각되었다. 18세기 말에 사람들은 이타애와 박애라는 자연적 감정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최선의 정치 개혁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일부 사람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이타애와 박애에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했지만, 이제 그보다 훨씬 더 중요시된 것은 개인적인 특성들이었다. 그 특성에는 원칙에 대한 헌신, 군인 같은 용기, 필요할 경우 폭력까지 투입할 각오, 그리고 특히 정의와 권리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포함되었다." "감상주의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그 이념만이 거부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념이 18세기에 점하던 중요성 자체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졌다."(327)


"빅토르 쿠쟁은 1833년에 공공교육부의 수장이 되었고, 이때 자신의 철학 체계를 프랑스 교육의 커리큘럼에 통합시켰다." "인간 의식에 대한 쿠쟁의 견해에서 감정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쿠쟁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진리, 자유, 정의, 미, 선과 같은 관념들─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이 추론하는 능력, 판단하는 능력, 선택하는 능력 등, 우리 모두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의 근본인 추론 능력은 우리를 감각 인상이라는 경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영역과 연결시킨다. 쿠쟁은 이성을 찬양했고, 이성의 힘을 강조했다. 그 힘은 칸트의 주장처럼 감각 인상에게 선험적 구조(우리가 결코 입증할 수 없는 것)를 제공하는 힘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데카르트가 열어젖힌 길과 비슷한 길을 따라) 신의 존재와 같은 진리들에게 접근시킨다. 쿠쟁의 철학은 〈합리적 유심론rational spiritualism〉이라고 이름붙일 만하다."(331-3)


"쿠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기독교적인 관점에 매우 가깝게 그려냈다. 다만 그것은 완전히 세속적이고 과학적이었다. 사람들은 쿠쟁을 읽으면서 혁명이라는 재앙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재앙에 대한 처방이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의 제도적 힘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쿠쟁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감정 상태를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감성을 믿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감정은 (너무나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안전한 안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쿠쟁은 그들에게 감정을 이성의 신호이자 조력자이자 지지자로 평가하도록 초대한다. 적절하게 훈련되기만 하면 감정은 올바른 생각과 선한 행동과 적절한 미적 판단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탐색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광대한 탐험의 영역을 열어준다."(338-9)


"테오도르 주프루아는 전적으로 기조의 관점에 의거하여 최근의 역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판단을 작성했다. 기조와 주프루아는 혁명이 혁명을 추동했던 사상의 부정적 성격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 평가에는 감상주의가 아예 탈각되어 있었다. 기조는 18세기의 진보 세력이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실패했다고 파악했다. 첫째, 18세기의 사상은 〈적을 제거하기〉만을 원했다 둘째, 18세기의 철학은 〈인간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았다〉. 그 결과 이성은 〈그 논리적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주프루아가 보기에 혁명 초기의 감정주의와 과격한 국면에 나타난 격렬함은 새로이 발견된 그 부정적 신념의 울림을 반영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혁명이 파괴를 건설로 대체해야 하는 국면으로 이동하자, 혁명가들은 내부 투쟁에 빠져들었고, 결국 구체제 세력이 지배권을 탈환했다." "그의 생각을 지배하던 것은 나폴레옹 치세를 특징짓던 타협과 수용의 분위기, 제정 말기의 위기, 복고왕정에 대한 실망이었다."(350-2)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이 감상주의 예술과 다른 점은, 예술의 교육적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1815년 이후의 새로운 세대에게 예술은 독립을 선언했다. 예술은 삶이 아니다. 예술이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도 비예술적인 실제적인 것이 미치는 효과와 다르다. 정확히 이 지점에 예술의 힘이, 즉 피난처로서의 예술, 숭고한 것과 상상적인 것의 우월한 영역으로서의 예술의 힘이 자리한다. 예술가는 예술이 가진 표상의 힘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것, 이국적인 것, 불가능한 것을 묘사함으로써 예술의 독립을 구현한다. 신화, 전설, 이교적인 상징주의, 동양, 중세, 머나먼 곳, 잊힌 것, 그런 주제들을 통하여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각인시킨다. 아름다움은 예기치 못한 것, 낯선 것에서 튀어나오는 법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처럼 예술을 나머지 사회생활로부터 단호하게 분리시킴으로써 감정의 피난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362-4)


8장 민사소송 속의 감정


"1815년 이후에 움튼 새로운 시대는 이성과 감정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멘드비랑, 쿠쟁 같은 이들은 재단장한 데카르트적 이분법에 의거하여 내면 탐색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물론 이론에서의 그 구분이 고스란히 실천에 적용될 수는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감정은 인간 동기의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혹은, 감정과 생각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분법이 실천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깊은 비관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그리고 타인)을 환경과 신체의 영향에 휘둘리는 존재로, 망상에 가득 찬 존재로, 간헐적으로만 합리성을 따르는 존재로 바라보았고, 또한 그것이 감정과 희망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느낌은 명예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지만, 연약한 사람들은 명예의 유연성에서, 즉 은폐를 통하여 치유하는 명예의 능력에서 피난처를 찾았다."(390-1)


"재정의된 명예 코드와 결합된 새로운 비관론은 보다 관대하고 그래서 보다 유연한 질서를 창출했다. 1792~1794년과 비교해서 기대치가 근본적으로 낮아졌다. 동시에 나폴레옹 법전은 아내와 자식에 대한 가부장의 권력을 실체적으로 뒷받침했다. 그 권력은 남자가─아무리 연약하다고 할지라도─여자와 아이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라는 근거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조르주 상드처럼 비판적인 사람이 보기에는, 남자란 합리적이기는커녕 깨지기 쉬운 존재였고 따라서 그 자체로 위험이었으며, 그 위험은 남자에게 부여된 법적인 권력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1794년 이후의 역사는 체계적인 자기기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드의 감상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기대치의 저하가 성격상 비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의 감정 경험과 더욱 합치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시대의 근본 문제는 비관론에 있었다."(391)


"민사소송에서 변호사들이 사용한 이모티브들은, 직업적인 연설가인 그들이 일종의 감정적인 조형성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 직업의 비밀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능숙하게 다룬 것은 법과 유서 깊은 연설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화를 통해서 감정을 느끼는 데서도 대단히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감정적 조형성을 통하여 변호사들은, 사람이 어떻게 법, 명예, 이익이 요구하는 행동 안에 감정의 삶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일반인들도 감정의 조형성에 의하여 일탈적이고 위반적인 감정을 규범적인 요구와 화해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감정의 조형성은 존중받는 동시에 인간의 취약성의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비판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상드는 그러한 양가성을 공격함으로써 과거의 감상주의적 진실성과 자연주의적 규범을 본질적으로 우월한 규범으로 내세웠지만, 자코뱅주의의 실패와 감상주의의 추락 및 삭제를 결코 되돌릴 수는 없었다."(429-33)


"포스트혁명 체제는 명료한 동기들을 보유한 통일적인 자아가 공적 영역에서는 탁월함을 추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감정의) 충족을 추구하는 체제였다. 이는 그 자체로 놀라울 것이 전혀 없다. 그러한 질서의 구축은 적어도 1794년부터 모든 개혁가들이 공공연하게 선언하던 목표였다." "감정의 이해에서 감상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감정의 공적 효용성과 관련해서는 감상주의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미덕은 더 이상 자연적인 단순성에서 나올 수 없었고, 진실성은 쉽게 식별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감성은 정치를 안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타애, 박애, 곤경에 빠진 미덕,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각별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인간을 고귀하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박애와 상호적인 존중심은 계약관계를 고양시켜주고 신용을 뒷받침했다. 사랑이 관습, 예의범절, 가족의 명예와 충돌할 경우, 일부는 사랑에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했다."(463-4)


"포스트혁명 체제의 가장 강력한 힘은 계약적 관계와 감정적 유연성이 결합된 데 있었다. 체제의 비판자들은 계약의 자유에 기초한 사회는 이윤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요, 그 사회는 이윤 동기를 그 정신적인 공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이 경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인에게 부여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만인에게 애국적 이타성을 요구하던 공포정치와 달리, 1815년 이후에 정립된 계약적 자유와 경쟁의 체제는 공적 영역과 시장에서 움직이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적 태도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 체제는 사람들이 감정적 태도를 시험하고 선택할 넓은 여지를 허용했다. 그 체제는 또한 동기와 감정을 엄격히 검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도 허용했다. 물론 감정 작전의 여지는 빈자보다 부자에게, 그리고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컸다. 그러나 포스트혁명 체제는 전체적으로 보아 감상주의자들이 건설하려는 체제보다 더 유연하고 더 살아갈 만한 체제였다."(467)


9장 결론


"심리 통제는 생각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주의의 용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생각을 주위로부터 격리시키는 작업은 아이러니한 과정이다. 주의 밖에는 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는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 상태, 즉 주의에 입장할 준비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 통제를 포함하여 주의를 인도하는 전략들은 활성화된 막대한 양의 생각들 중에서 어떤 생각이 주의의 집중적인 수행활동에 접근할 것이냐를 결정한다." "번역 작업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매순간 발생한다. 다만 그 번역은 언제나 미결정적이다. 그리고 번역이 개인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더 개인 내부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미결정성은 개인에게 풍부함과 창조성을 부여한다. 활성화된 생각 재료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생각 재료에 결부되어 있는 세계와 목표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받아들이게 하기도 하고, 그와 다른 해석과 목표들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게 해준다. 항해는 그렇듯 행위 주체성을 보장한다."(476-7)


"사람은 이모티브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일시적으로나마 관리할 수 있다. 이모티브는 활성화된 생각 재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적인 심리 통제 전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정문을 발화할 때 스스로도 그 문장을 듣고, 상대방이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자기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 사회적인 동시에 자기수용적인proprioceptive 〈입력〉은 〈기술〉된 상태를 확인하거나 높이는 방식으로 활성화들을 유발하거나 변경시킨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원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이모티브는 번역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번역의 결과는 언제나 미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모티브가 기술된 상태를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효과를 생산하거나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모티브가 목표 달성을 촉진시키기보다 목표의 수정 혹은 거부라는 활성화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480)


"높은 우선순위 목표들과 감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목표가 깊이 수용되었다는 것은, 그 목표가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목표는 다른 중요한 목표와 결합될 수도 있고, 다양한 유형의 보조적이고 단기적인 목표들과 결합될 수도 있다. 감정문은 종종 그런 목표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맥락에서 작성된다." "감정의 자유란 이모티브의 효과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규범적 감정은 빈번히 목표 갈등을 유도함으로써 관철된다. 공포정치 시기의 파리에서는 기요틴에 대한 공포가 구의회에서 오만함을 과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목표 갈등을 유도했을 것이다. 〈감정체제〉는 일련의 감정 규범을 수립하고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실천들의 복합체다. 대부분의 감정체제는 감정 규범이 이완되어도 좋은 통로, 심리 통제의 아이러니한 효과가 발동되도록 허용되는 통로, 즉 감정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상적인 감정체제는 감정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체제일 것이다."(481-2)


"섀프츠베리는 로크에 대한 비판에서 인간에게는 생득적인 도덕 감각이 구비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감각은 감성의 덕성스러운 충동으로 느껴진다고 강조했다. 섀프츠베리의 주장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허치슨, 마리보, 디드로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즉시 수용되었다." "그러나 감상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감정적 감수성이 생득적인 도덕 감각을 구성한다는 자연주의적 교의에 있었다. 그 신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모티브를 이용하여 자신을 훈련함으로써 강렬한 〈자연적〉이고 선한 감성을 느끼고자 했다. 그들은 그때 거둔 성공이 감상주의 교의의 타당성을 입증한다고 여겼다." "선한 감정의 자연적 기원에 대한 믿음은 정치 개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다만 그 믿음은 개혁에 대한 희망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는 동시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만들었다. 정치 개혁은 자연적인 감정을 보호하기 위한 규범을 수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연적인 감정의 장애물들을 쓸어버리는 작업으로 보였다."(484-6)


"공포정치의 종말과 나폴레옹 독재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체제를 가져왔다. 의당 감성주의 교의는 거부되었다." "민주화된 명예 코드가 신속히 제공되었고, 그 코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자기이익에 상응하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이를 통하여 공적인 치적과 사적인 치부致富가 공존하는 새로운 남성 영역의 비전이 나타났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던 특정 부류의 남자들─예를 들어서 변호사들과 정치가들─의 감정적 유연성은 그들에게 위신과 권위를 부여해주었지만, 사적인 영역에는 여전히 감상주의가 살아 있었다. 따라서 비록 감상주의 이모티브의 지적 토대가 이미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 이모티브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구성하고 있었다." "민주화된 새로운 명예 코드의 장점은 규범 이탈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지원해준다는 데 있었다. 일탈하더라도 적절히 은폐되기만 하면 용납해줄 수 있다는 면죄부가 새로운 명예 코드에 들어있었던 것이다."(487-9)


"우리의 〈항해〉는 우리의 〈지도〉를 변경시킨다. 프랑스혁명을 횡단하면서 감정체제의 정치사를 검토해보니, 18세기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감상주의가 그들을 전례 없는 새로운 종류의 감정의 자유로 안내해주리라고 믿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 믿음은 1794년 7월 28일에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쥐스트와 함께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이 현기증 나는 실패에 대한 반응 속에서 근대의 이분법적 감정론이 작성되었다. 그 관점은 기대를 낮추었고 보다 큰 유연성을 허용했다. 다만 대가가 따랐다. 우리에게 우리의 자결 능력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관적인 폄하라는 고통스러운 짐이 지워진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비관적 이분법이 단순한 구성물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는 아기와 목욕물을 한꺼번에 내다버렸다. 주체성subjectivity과 함께 자아selfhood도 버려진 것이다. 이모티브 이론은 우리가 돛에 바람을 가득 안고 항해할 수도 있는 광대한(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력의 영역을 회복시켜준다."(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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