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 - 프랑스혁명200주년기념총서 5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총서 5
F.퓌레 / 일월서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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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판을 펴내며


"혁명의 먼 기원은 15,16세기 중세 프랑스 사회가 겪은 위기에 있다. 또한 리슐리외가 주도한 절대왕정의 건설과 이에 수반된 사회적 개편, 그리고 17세기 이중─과학과 철학의─혁명의 지연된 효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789년의 사건들을 순수한 구조적 설명으로 축소시킬 수만은 없다. 그들의 양상은 사회적 모순 속에 '각인된' 불가피한 유형이 아니다. 혁명적 사실 그 자체, 즉 '사건'에게 역사적 불연속성을 창조하는 기능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기층 민중을 동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1788년의 흉작이 주요 사건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기상적 우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 16세가 자신을 파멸시킬 그 위기에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서 영불 상업조약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의 기원은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만 단순할 뿐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원에 관해 살펴볼수록 이 역사 속에는 우연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과 구사회와 구왕정을 장기 지속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6)


제1장 루이 16세 시대의 프랑스


"자연으로부터 삶의 물질적 조건, 특히 무엇보다도 빵을 쟁취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은 아주 오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국가의 부 가운데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압도적 우위, 낮은 노동 생산성, 인구와 식량 간의 불안한 균형 등이 그것이다. 실제에서나 의식상에서나 문제는 생존이었다." "수확이 좋았든 나빴든 사람들은 먹고 살았다. 그러나 흉년이 들거나 서리, 우박, 가뭄 같은 기후적 재난, 나아가 전쟁과 그로 인한 약탈 등이 겹치면 곡식의 품귀는 경제적, 사회적 파노라마의 대종을 이룬다. 즉 사재기, 밀 가격 폭등, 빵값 상승 등이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선별적 결과를 가져온다. 도시와 농촌에서 기아로 인한 사망은 가장 가난한 계층의 잉여 인구를 제거하였고, 따라서 생산된 부와 양립할 수준으로 어린이와 어른의 수를 유지시킨다. 1709년의 위기가 그러하였고 1741년의 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지나가고 '숙청'이 행해지면 정상, 말하자면 불안정 상태로의 복귀를 중심으로 사회적 회복이 진행된다."(13-4)


"그런데 왜 1789년에 혁명이 발생했는가? 우선, 역설적이지만 그 풍요함 때문이다. 1789년은 빈곤한 세기의 정점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한 세기의 부유한 나라에서 터진 것이다. 부유하다는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그 직전 과거와 비교해서, 그리고 주변 대부분의 국가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모든 프랑스 사람이 경기 상승의 혜택을 평등하게 입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실제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그 이상으로 소작료가 인상되었는데 여기에서 우선 이득을 본 사람은 토지 소유자, 그리고 지대 수입으로 살아가는 영주였다. 농촌 경작자의 경우 손바닥만한 토지를 가지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따라서 시장에 내다 팔거나 다음 해를 위해 저장할 아무런 잉여 생산도 가지지 못한 소농민들에게 이 농산물 가격 상승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던 중요한 동맹자, 곧 부르주아지가 도시의 풍요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17-8)


"부르주아지는 개혁을 요구했지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미 절대왕정의 개혁적 소명이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개혁안, 대담성, 능력, 심지어는 주기적이지만 최고의, 즉 프랑스 왕의 선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저항 세력이 개혁 세력보다 더 강력했다는 점이다. 루이 14세에 의해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귀족들이 이제 그 복수를 한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세속적 직책 등 국가를 장악하였으며 자기들의 막중한 사회적 위치, 부, 정치적 보수주의 등으로써 국왕의 우유부단함과 유능한 개각의 개혁안을 분쇄하였다. 귀족이 단지 전통의 이름으로 절대주의를 공격한 반면, 개명된 제3신분은 개혁의 이름으로 절대주의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대조적인 조류가 합쳐 권력을 약화시켰으며 귀족이 기본적으로 바랐던 대로 그 권력을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었다. 군주의 중재가 가능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뛰르고는 1776년 그가 실각당했을 때 알아차렸다."(20-1)


"1788~1789년의 대규모 정치적 위기는 1788년 후반기의 흉작과 함께 시작되었다. 1787년의 홍수, 가뭄, 그리고 프랑스의 서부를 강타한 1788년 7월 13일의 우박 등에 의해 1788년 여름 수확이 격감된 것이다. 경기 국면의 우연이 겹쳐 대규모 경제위기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소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다. 그 후 다시 한번 고전적 메카니즘, 즉 단기적 경련이 시작되었다." "도시에서도 곡가 상승에 의해 민중들의 소비가 격감되었고, 나아가 공산품 시장이 위축되었다. 더욱이 1786년 영불 상업조약에 의해 영국 상품의 프랑스 수입 관세가 낮아짐에 따라 무서운 경쟁의 문이 열리자 그만큼 기업들은 취약해졌다. 가격은 상승한 반면 직물공업은 침체에 빠지고 고용은 감소하였다." "경제적 주기는 18세기의 모든 변화로부터 고조된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정점에 올려놓았다. 특히 그것은 국왕과 특권층, 부르주아지 사이의 거대한 논쟁에 신참자를 소개하였으니 민중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24-5)


"도시 민중 계급의 수는 계속 증가했지만 아직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지는 못하였다. 자기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하는 순수 임금 생활자─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인─로부터 소규모 장색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중간적 지위가 존재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고용주의 집에 거주하면서 동업조합적 규제 속에 살아가는 도제, 섬유산업 분야에서 상인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지고 상인을 위해 단순 노동을 하는 가택 거주 노동자, 그리고 임금이 부정기적이고 보조적 수입에 불과한 수없이 많은 소규모 소유주들이 있었다. 하나의 계급의식 속에 노동세계를 통합하기에는 아직 생산 형태가 너무 개인적이었고, 따라서 너무 다양하였다. 도시 민중의 집단적 반작용이 생산자의 투쟁이 아니고 대개의 경우 소비자의 대응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파업이나 임금 인상 요구보다는, 가격 상승에 반대하거나 빵값 규제를 위한 폭동 속에 주기적으로 도시의 분노가 결집되었던 것이다."(37-8)


제2장 신분들의 반란


"국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이 중앙집권화된 정치조직은 아니었다. 국민당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그것은 여론 그 자체, 도시의 여론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클럽의 여론이었다. 1788년 말, 수년 전 브르뙤이유 장관에 의해 폐쇄된 클럽들의 문이 다시 열렸으며, 특히 그들의 수가 급증하였다." "중앙집권화에 의해 타격을 입은 과거의 자치정신이 고개를 들었고 게다가 실업과 빈곤이 겹쳐 시끄럽던 지방과 몇몇 클럽이 연결되었다.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되어 통신이 이루어졌고, 도시 사이에 연락망이 짜여졌다. 즉 구왕국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반란과 공포 속에서였다. 빠리는 논쟁의 중심지였고, 이 논쟁은 클럽이라는 폐쇄사회의 테두리를 점점 벗어났다. 루이 14세에 의해 생명력을 빼앗겼던 수도 빠리는 불현듯 그의 모든 권리를 회복했으며 18세기가 그에게 부여해 준 역할을 떠맡았다. 빠리에 있는 6,7백개의 카페에서는 오락이나 말장난 혹은 소위 빠리적 기질이 투영된 행태 대신 정치적 토론이 분분했다."(67-8)


"1788년 말, 재기용된 네께르는 국왕의 선한 의지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스위스 재정가는 국민당에게 양보하고자 했다. 귀족들에 대하여 '묵인할 수 없음'을 표시하려는 왕과 마리 앙뜨와네뜨의 동의를 얻어, 그는 12월 27일, 제3신분의 수를 배가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머릿수별 표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만일 이를 유지한다면 이미 한 양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루이 16세의 중재는 너무 우유부단하여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는 제3신분의 기만 높여주었고 귀족들의 불만만 샀다. 이로써 그는 국민당과 특권층 사이의 투쟁만 격화시킬 뿐이었다. 제3신분은 더욱 과격한 가설을 향해 전진하였다. 2월에 씨에이에스는 그의 유명한 팜플렛인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귀족을 국민으로부터 냉정하게 제외해 버렸다. 〈이 계급은 그들의 나태함 때문에, 국민과는 확실히 관계가 없다.〉 발언권은 이제 삼부회로 넘어갔다."(69)


제3장 1789년 여름의 세 혁명


"관례에 따라 각 바이아쥬(재판 관할 구역) 단위별로 모인 세 신분은 그들의 대표가 삼부회에 가지고 갈 진정서를 작성하였다." "여러 진정서들은 왕과 국민 사이의 화합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입법권은 국민과 동시에 왕에게 속하고 행정권은 왕에게만 속한다는 것인데,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부심하던 빠리의 제3신분이 이러한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새로운 사회적 행복에 대하여 이처럼 종교적으로 속화된 관점은 폭력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던 '혁명'은 목표로서 정의되었지 결코 수단으로서 정의된 것은 아니었다. 식량 폭동으로 분열된 1789년의 프랑스에서, 엘리뜨와 농민들은 폭력에 대한 옹호 속에서가 아니라, 화해에 대한 신화 속에서 교감하였다. 18세기의 철학은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그렸지 출산 방식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바란 것이 전반적인 화합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70-2)


"18세기가 꿈꾼 혁명은 무기의 혁명이 아니었으며 빈곤의 혁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제3신분의 법률가들 뒤에서 무수히 많은 빈자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무정부 상태 속에서 영주제를 파괴하였다. 강력하게 폭발한 폭력은 이제는 귀족들의 이해관계 이상의 것을 위협하였다. 우선 무엇보다도 영지를 구입한 부르주아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이제 이들 역시 마찬가지의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특히 봉건적 소유와 부르주아적 소유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혁명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였다.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나 이는 농민들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민병대와 왕의 군대를 연합시킴으로써 결국 국왕의 처분에 맡기는 꼴이 될 것이었다." "격렬한 토론 끝에 8월 11일에 최종적으로 표결된 법령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 사실상 모든 앙시앙레짐의 사회체제를 폐지한다는 뜻이다."(90-3)


"뒤이어 8월 26일에 표결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더이상 부르주아지의 전술적 신중함이나 소심함의 산물에 그치지 않았다.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에 대한 사상이 이 헌장의 기조를 이루었다." "물론 이 새로운 원리들이 프랑스에게만 고유하였던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원리들도 인터내셔날의 소산, 즉 유럽의 세계주의적인 작품이었다. 이것들은 이미 아메리카 독립전쟁의 식민지군을, 최근에 들어서는 네덜란드의 주장관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애국파들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벨기에 민주주의를 고무시켜왔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가장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국민의회는 이들의 사상과 스타일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천재들의 예견에 비견될 만한 것을 공동으로 작성하였다는 희귀한 예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그것은 미국의 전례를 뛰어넘어 유럽의 모든 기대에 새로운 시대적 바이블을 제공하였다."(95-6)


제4장 행복한 해


"1789년 여름의 사건들을 공통의 정치적 목표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고리 사슬로써 즉 빠리의 도시 혁명이 위협받는 대표들의 손에서 횃불을 이어받고, 다시 농민혁명이 구체제에 최후의 타격을 가했다는 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유혹이야말로 얼마나 근사한가!"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의회의 혁명, 빠리와 도시의 혁명, 그리고 농촌의 혁명이라는 세 개의 동시 자연발생적인 혁명이 충돌하였고, 이로써 개명된 개혁주의 일정이 뒤죽박죽 변하였던 것이다. 그 중 첫번째, 즉 국민의회의 혁명만이 명확한 정치 의식과 미래 사회의 비전을 가진 혁명이었다. 나머지 두 개의 혁명에는 과거와 미래가, 향수와 공상이 뒤섞여 있었다. 철학보다는 상황에 의해서 동원된 이 두 혁명은, 18세기의 사상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빈자들의 천년왕국설에 의해 배양되었다. 특히 이 두 혁명은 앙시앙레짐이 직면하였던 위기의 새로운 차원을 즉 성급함과 민중 폭력이라는, 시스템의 다른 이면을 보여 주었다."(107-8)


"국민의회 의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조우는 이미 설정된 조화가 아니라 놀라움의 만남이었다. 빠리는 그들을 위해서 봉기한 것이 아니었으며, 농촌은 내놓고 의원들에게 강요하기도 하였다." "법과 절차를 존중하는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폭력과 무식한 사람들의 피어린 각성 등은 견디기 힘든 발견이었지만, 시류와 역류를 하나의 같은 급류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거기에 양보하여야 했다." "국민의회는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그 법은 시행되어야 했고, 준수되어야 했다. 농민들은 사실상 봉건적 권리의 무조건적 폐지를 강요하면서, 의회로 하여금 실상을 분명히 보도록 강요하였다. 도시와 농촌에서 1789년 여름에 태어난 이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힘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국민의회는 이제 더이상 국왕에 대한 적대감만을 고려해서는 안되었다. 한쪽 눈으로는 점점 높아지는 민중적 요구를 주목해야 했던 것이다. 좌파와 우파 공히 궤도 이탈을 경계하였다. 1789년에 중용의 길은 정말 비좁았다."(108-9)


"라 파이에뜨의 뒤에 몰려든 젊은 해방 귀족들은 영국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가 꿈꾸어온 부르주아 사회의 무통 분만을 성사시킬 뻔하였다. 가장 초보적인 계산, 그 건조한 정확성도 이 경우 웅변적이었다. 54명의 제헌의회 의장 가운데 33명이 귀족이었고, 자꼬뱅 클럽에서도 평민들과 더불어 애기용 공작,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빅또르 드 브로이 등이 계속해서 의장직을 차지하였다. 애국적 여론이 그 형태를 잡아가던 쌀롱에서나 귀족 신분에 대한 전래의 존경이 새로운 지위에 대한 애착과 아무 충돌없이 화합되었던 도나 구역 의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790년은 절대군주제에 의해서 가신화되었던 귀족계급의 복수를 해준 듯했다. 그것은 불랭비에, 쌩시몽, 몽떼스뀌외 등의 복수였으며, 또한 영국에서 실현된 바 있었던 기능의 새로운 분배에 대한 약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태의 흐름은 이 뛰어난 혁신적 귀족들의 추억을 잃어버린 환상 속에 남겨 놓을 것이다."(122)


제5장 혁명의 일탈


"1790년 7월, 위험은 지나갔고 용수철은 이완되었다. 작업 완수의 만족감, 질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호, 식량공급의 정상화 등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희구하게끔 하였다. 의회는 조용한 가운데 위임받은 일을 하면 되었다. 또 앙시앙레짐의 잔해 위에 제3신분이 꿈꾸어 온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도 의회의 일이었다. 커다란 방들을 가진 이 밝은 집에서 각자는 자신의 재능과 재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믿어져오던 것 이상으로 전통의 위신 등에 따라 정해진 장소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합법적인 국가와 그 대표자들에게, 혁명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1792년 8월 10일, 뛸르리에서 전개된 드라마는 루이 16세의 개인적 운명과 이미 거리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위축된 입법의회의 운명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붕괴였다. 제헌 국민의회가 세운 건물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민중의 개입으로 이번에는 대중 투표의 길이 열렸고, 군주제가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135)


"왕의 도주, 그것은 신화의 종말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입헌군주가 된 루이 16세는 수수께끼적 인물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연출한 이중적 게임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10월 사태 이후 그가 '무력에 의해 빼앗겼던' '왕권에 반하는 법령'에 저항하기 위해 스페인에 있는 자기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바렌느 사건 이전에는 마라가 예언가적인 대변인 역할을 하던 단지 소수만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도주, 검거, 그리고 거대하고 고요한 빠리로의 귀환은 동상을 감싸고 있던 베일을 찢어버렸다. 바르나브는 소유권 때문에 불안해 하던 제헌의회로 하여금 국왕이 유괴되었던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었으며, 루이 16세는 수정된 헌법에 별 어려움없이 선서할 수 있었다. 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보수정치의 메카니즘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왕이라는 본질적인 부속이 빠져버린 것뿐이었다."(138)


"제헌의회나 10월 1일에 이를 계승한 입법의회나 모두 이제부터는 결정권을 가진 축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 다른 곳에서, 즉 온건파가 빠진 자꼬뱅 클럽, 민주주의적 출판물, 빠리의 거리 등지에서 동원명령을 찾아야 했다. 동원, 그것은 곧 전쟁이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공포에 질린 프랑스를 자신들의 품으로 던져줄 패배를 원하였다. 바르나브를 중심으로 뭉쳤던 소수의 온건파 외에도 자유주의적 귀족과 보수적 부르주아들은 라 파이에뜨가 생각했던 것처럼 짧은 기간의 전투로도 장군들이 문제의 클럽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혁명전쟁이었다. 로베스삐에르의 반대는 고립된 자의 독백이었다. 브리쏘와 지롱드 파의 변설가들이 주축이 된 개전파에게 있어서 전쟁은 미지의 세계로 도피하는 격이었다. 불안과 불확실의 구름이 혁명 프랑스의 기상을 무겁게 눌렀다. 비가 올 것이었고, 실제 비가 내렸다. 혁명이 안정될 수 있던 마지막 기회가 이 비와 함께 사라졌다."(138-9)


"바르나브는 최초의 패전이 정치권에 대중의 격렬한 난입을 야기시키고 군주제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배신의 의심을 받고 있던 왕에 대하여 싸우기를 거부한 장군들에 대항하여, 그리고 권력과 비판 사이에서 주저하던 브리쏘 파에 대항하여 민중의 방어적 반사운동이 마침내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상뀔로뜨는 자율적이고 무서운 세력이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8월 10일은 불완전한 승리였다. 비공민적이라고 의심받는 부자들에 대항하여, 혁명이란 곧 국민과 평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을 결합시킨 이 정열과 이해관계가 복합된 1792년의 애국주의, 즉 '위기에 처한 조국'과 '라 마르세이에즈', 그리고 8월 10일의 애국주의는 재출현이나 연속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2의 혁명이었다. 혁명적 애국주의는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벌써 순교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후일 패배와 함께 이 종교는 자신의 종교재판소와 화형용 장작더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139, 172)


제6장 혁명의 낭만주의


"1789년 여름처럼, 그리고 바렌느 사건 당시처럼 대중들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8월 10일의 사태로도 종식시키지 못한 대규모 귀족의 음모라는 신화는 정확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던 당시의 여론을 지나치게 흥분시켰다. 더할 나위 없이 불길한 루머가 빠리의 구석구석에 퍼졌다. 공포는 압제로 분출되었다." "8월 14일 이후 공무원과 공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선서를 해야만 했다. 선서를 하지 않으면 반혁명 용의자로 간주될 것이었다. 8월 11일의 법령은 자치시가 경찰조사를 수행하도록, 그리고 각 도가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죄인들'의 처벌은 일일 행사였다. 사람들은 감옥을 일소하자고 말하고 다녔다. 산악파의 리더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탄압을 합법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8월 17일 설치된 특별재판소는 처벌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는데, 이 재판소의 관용 자체가 또한 의심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83-5)


"(전황이 불리해지고 징집이 시작되자) 배신에 대한 강박관념, 자원병들이 이제 빠리를 떠나면 자신들의 처자식을 감옥에 있는 음모자들의 처분에 맡기게 된다는 생각 등이 상뀔로뜨의 의식을 흐리게 했다. 다시 한번 불행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해묵은 불안이 무의식의 어둠을 뚫고 솟아나와 광적인 집단폭력으로 개화되었다. 9월의 학살에 관해서 조레스는 〈불안은 혁명의 힘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8월 10일 이전에 이미 (인간 진보의 상위단계로 이행할) 필요성과 지성의 혁명이 자리잡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불러일으킨 힘의 움직임은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즉, 단기적으로 볼 때 전면에 나서는 것은 빈곤과 격정과 처벌적 폭력의 혁명이다. 이러한 류의 혁명이 없다면 필요성과 지성의 혁명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꼬뮌도, 감시위원회도 학살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학살을 방관하면서 단지 그 범위를 줄이고자 했을 뿐이다. 법무장관 당똥은 모든 간섭을 자제하였다."(189)


# 9월의 학살 : 상뀔로뜨가 빠리 지역의 모든 감옥에서 데려온 수인들을 상대로 '인민법정'을 열고, 소위 말하는 반혁명 음모자들에 대한 자의적인 처형을 집행한 사건


"국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베스삐에르가 보기에 왕을 재판한다는 것은 왕을 폐위시킨 사람들을 재판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 자체를 상고심에 회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재판없는 처벌이었다." "루이 16세에 대한 어떠한 개인적인 원한이 의원들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로베스삐에르 스스로 이를 고백하였다. 〈나는 국민주권의 힘 앞에 굴복한 죄인의 면전에서 가슴 속으로는 공화주의적 덕성이 동요함을 느꼈다.〉 재판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다수─사형에 찬성한 혁명파들─가 필요로 했던 것은 타협에 대한 모든 희망의 다리를 끊는 일, 1789년의 정치적, 사회적 성과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반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리고 국가재산을 수취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새로운 정치제도와 관련된 모든 이익을 보장하는 일 등이었다. 반혁명에 대한 도전으로 왕의 머리를 던짐으로써 그들은 후퇴하지 않도록 분연히 자신에게 제동을 건 것이다."(195-8)


"공화파의 승전으로 인해 국민의회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제 화평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국토 방위의 문제로만 제한되지 않는 마당에 피정복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모든 정파가 분열되었으며, 이들 모두는 또한 1792년 4월 작동되기 시작한 톱니바퀴의 노예였다. 차후 평화를 거론하는 사람은 반혁명 용의자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브리쏘 같은 사람은 '자매 공화국'을 수립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좌파에서는 병합을 요구하는 소리가 퍼져나왔다. 결국 가장 냉철하였던 사람들을 압도하였던 광적인 제국주의적 바람을 가장 설득력있게 표현한 사람은 좌파 산악당원이었던 쇼메뜨였다. 〈빠리와 피터스부르그 그리고 모스크바를 가르고 있는 땅은 곧 해방되고 자치도시화되며 자꼬뱅화 될 것이다.〉" "자발적 합병이라는 신화만이 적어도 원칙적인 수준에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합병의 정당성이 조금씩 변모해갔다. 해방의 십자군에 프랑스의 정열적 팽창주의가 접합된 것이다."(201-3)


"(뒤무리에의 배신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험이 심각해지고 방데에서 반혁명운동이 일어날 무렵 물가상승이 주 원동력이었던 민중의 소요가 재개되었다." "민중들의 요구에 대하여, 모든 부르주아지는 초기에 체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 부분, 즉 경제적 자유에 있어서 산악파와 지롱드 파는 원칙적으로 분열되지 않았다." "실제의 민중과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생각했던 민중 사이의 괴리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들에게는 정치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민중들에게는 경제와 정치가 하나의 불길로 용해되어 방데의 폭발과 마찬가지로 국민공회를 위협하였던 것이다. 대중의 원초적 원한이 방데에서는 가톨릭적이고 영주적인 황금시대에 대한 농촌적 신화를 중심으로, 그리고 빠리에서는 이보다 더욱 신화적인 공동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되는 축을 구심점으로 응고되어갔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부르주아 혁명에 있어서 그 위험은 동일하였으니, 바로 고립이었다."(212-4)


"1793년 6월 2일은 하나의 단절이었다. 지롱드 파가 제거됨으로써 혁명적 낭만주의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6월 2일은 내각 변동 그 이상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비록 민주주의적 음조를 띠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대의제에 대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혁신적 이론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오랜 열정 사이에 조화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6월 2일은 의회주의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다. 당똥과 대다수 산악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는 로베스삐에르가 말한 바 있는 '도덕적 봉기'만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의회는 육체적으로 포로가 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무장 세력이 국민의 대표기관에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 세력이 근위대가 아니고 평민이라는 점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다! 6월 2일 발진된 메카니즘은 미쉴레가 말하였듯이 그 속에 '프뤽띠도르와 브뤼메르'를 간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지롱드 파의 패배만이 아니라 혁명의 패배였다."(222-3)


제7장 비탄의 시간


"공포정치는 산악파 정치가들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1793년 여름 동안 그들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충분히 밝혀진다. 반혁명의 위협은 국경에서, 그리고 방데에서 여전히 존재하였다. '연맹주의자'의 봉기는 혁명 진영을 두 개의 적대적인 블록으로 분열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령이 내려졌던 20명의 지롱드 파 의원들이 도망을 치는 것이 가능했을 정도로 6월 2일 이후 바람은 관용쪽으로 불고 있었다. 혁명적 독재가 조직화되지 않은 가운데 여름이 지나갔다. 해방자적 사명에 충실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타도하고자 한 속박이라는 수단에 의지하기를 꺼려하였다. 폭력적 조치들은 거리로부터 강요될 것이었다. 바로 9월 사태가 국민공회로 하여금 혁명군의 조직, 반혁명 용의자 체포령, 최고 가격, 최고 임금 등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하였다. 바로 상뀔로뜨의 압력으로 인해 10월과 12월 사이에 혁명적 조치들이 가속적으로 채택된 것이다."(225)


"1793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들은 공포정치에 대한 요망이라기보다는 위기의 강렬함이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한층 높여주었고, 이로써 위협을 받고 있던 부르주아지가 공포정치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쟁취한 정복의 본질, 즉 의회주의라는 18세기의 발명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독재는 국민공회에 의해서 통제되는 독재였다. 그리고 상뀔로뜨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이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가을과 겨울 동안 정부는 과격 행동에 대한 제어장치를 가중시켰다. 에베르가 제거됨과 동시에 상뀔로뜨 운동의 정치적 자율성이 사라졌다. 극적인 상황에 의해서 배태된 독재는 시류가 관용으로 흐름에 따라 약화되었다. 자본가적 이윤에 대한 규제는 제르미날 이후 완화되었고, 부르주아지의 안전에 대한 제약은 떼르미도르 9일 종식되었다. 모든 혁명의 불가피한 모델이기는 커녕 혁명력 2년의 독재는 우연과 예외적인 것, 그리고 비탄으로 점철되었다."(225-6)


"전투적 행동에 있어서 상뀔로뜨를 결합시킨 것은 바로 최고 곡물 가격을 제정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그들의 꿈을 부추긴 것은, 재산권이 일반적으로는 인정되나 개인적인 필요에만 국한되는 이상 사회, 즉 자본가적 독점에 대한 거부였다." "사회적 이상에 있어서 반동적이었던 이들 지구 상뀔로뜨들은, 그들의 가장 최근 역사가인 알베르 소불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혁명집단이었다." "그러나 전투적 활동가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이들은 행정회합을 공개하였고, 구두로 투표하였으며, 고발을 시민의 의무라고 간주하는가 하면 만장일치를 깨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고, 항상 폭력에 의존하는 등 매우 오래된 기층의 집단심리를 표출하였다." "혁명적 심성의 배후에서, 인민의 '소요'가 항상 불질러온 두 개의 열정(평등과 처벌)이 분출되었다. 단두대, 이 '평등의 허울'은 이들 두 열정을 만족시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에 불과하였다."(227-8)


"꼬르들리에 파의 참모부를 제거함으로써 공안위원회는 국민적 대표권에 대한 시정의 압력─1792년 8월 10일 이래 부르주아 혁명을 그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왔던─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르미날은 결정적인 달이었다. 모든 영역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로의 복귀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이를 떼르미도르 파에게서만 찾는 것은 상당히 그릇된 시각이다. 반면 당똥을 처형했지만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모순─1789년 이후 성숙한 새로운 부르주아지가 전쟁의 열매를 포기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적 정부로 복귀하고자 한다는─은 소멸되지 않았다. 제르미날에서 떼르미도르까지 로베스삐에르의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세력을 확고히 하였으나, 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채 공포정치에 매달려, 독재와 신화라는 미지의 세계로 대책없이 피신하였다. 떼르미도르는 제르미날의 변화에 제도를 적응시켰다는 의미에서 현실로의 복귀를 완수한 것에 불과하였다."(27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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