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곳에 있기: 인류학과 글쓰기의 현장


"서명signature의 물음, 즉 텍스트 내부에서 저자의 존재감을 확립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민족지학을 따라다녔다." "저자가 강하게 드러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과 민족지 기획의 특수한 성질에서 비롯된, 저자가 부재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 간의 충돌은 사물을 소유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입장 간의 충돌로 여겨졌다." "인류학자들은 민족지 서술과 관련된 중요한 방법론적 사안들이 지식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공감', '통찰력' 등이 인지 형태로서 적절한지,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내재주의적 설명이 입증 가능한지, 문화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민족지 서술을 구성하는 데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지조사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있다고 보았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친밀한 관계)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저자와 텍스트 간의 관계(서명)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20)


"민족지학자가 그것을 대면하든 아니면 그것이 민족지학자를 대면하든 간에, 서명에 관한 문제는 저자이기를 주장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다신주의와 저자라는 의식이 넘치도록 충만한 소설가의 주권 의식을 모두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둘 중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첫번째 태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가사는 듣지만 음악은 듣지 못한다며 둔감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물론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도받는다. 두번째 태도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취급하며 실재하지도 않는 음악을 듣는, 인상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때도 역시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 민족지학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입장을 통일하지 못하거나, 혹은 한 권의 책 속에서도 갈팡질팡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친밀한 관점과 냉정한 평가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텍스트에서 연구자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애당초 그런 관점을 취해 평가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과제인 것이다."(21)


"(저자는 무엇을 저술하는가에 대한, 혹은 내가 담론discourse 문제라 칭했던) 또다른 예비적 질문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와 작가」에서 한층 종합적인 형태로 제기된 바 있다. 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다른 저서에서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작품work'과 작가가 만들어내는 '텍스트'를 구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 저자는 사제 역할을 하고(그는 저자를 마르셀 모스가 연구한 주술사에 견준다) 작가는 서기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동사이다. 〈그는 세계의 '왜'를 '어떻게 쓰는가' 안에 철저히 흡수하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타동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쓴다. 〈그가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전달할 때) 언어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언어는 '실천'을 떠받칠 뿐 실천을 하지는 않는다. ······ [그것은] 의사소통 수단의 본질, '사유' 수단의 본질로 복원된다.〉"(29-30)


"이러한 '저자'와 '작가'의 구분, 혹은 담론성의 창시자와 특정 텍스트의 제작자라는 푸코식의 구분이 본질적 가치에 따른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술했던' 전통적인 '글쓰기' 대부분이 그것의 모델을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이 '저자-작가'는 마법 같은 언어적 구조물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 '언어의 극장'에 입장하고 싶은 욕구, 사실과 이념을 소통하게 하고 정보를 상품화하고 싶은 욕구, 이 욕망 또는 저 욕망에 대한 발작적인 탐닉 사이에 끼여 있는 전문 지식인이다. 실천으로서의 언어나 수단으로서의 언어 중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철저한 문학이나 과학적 담론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인류학적 담론은 마치 노새처럼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서명의 기준에서 볼 때 한 텍스트를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침범하는가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그 불확실성은, 담론의 기준에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창의적으로 구성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31-2)


2 텍스트 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믿어지지 않았던 것의 갑작스러운 현전現前과도 같은) 구조주의의 '도래advent'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수사학적 업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사학적이라는 말을 트집잡을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 수전 손택이 쓴 호칭에 따르자면) 지적 영웅으로 만든 것은 이상야릇한 사실, 또는 그보다 더 이상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설명틀을 잡기 위해 그가 발명해낸 담론 양식이었다." "인류학에 소소한 관심 정도밖에 없었을 이들을 대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진행한 기획의 본질적인 특징은 과학과 예술의 어휘에서 빌려와서 개조한 전문어(기호, 코드, 변형, 대립, 교환, 소통, 은유, 환유, 신화, 구조 등)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상상의 공간을 정리해준 덕에, 흥밋거리를 찾아헤매던 세대가 그곳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39-40)


"『슬픈 열대』에 대해 제일 먼저 말해야 하는 것, 또 어떤 의미에서는 최종적인 발언일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즉 서로 다른 종류의 텍스트가 하나하나 덧씌워져 무아레(물결무늬) 같은 패턴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덧씌워진'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슬픈 열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니며, 한 층 한 층 벗겨나가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 속에 숨겨진 또다른 텍스트 따위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같은 층위에 존재하면서 상호간섭하는 텍스트이다." "즉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의 평면'이라 부른 것을 따라 연속적 요소들이 계열적 체계를 이루며 수직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 요소들이 '근접성의 평면'을 따라 통시적으로 결합되어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47-8)


"여행서, 어쩌면 열대지방의 철 지난 관광 안내서, 또하나의 새로운 과학의 기초를 세우는 민족지 보고서, 루소의 복권, 사회계약론과 초조해하지 않는 삶이 지닌 장점의 복권을 꾀하는 철학적 담론, 심미적 근거를 들어 유럽식 팽창주의를 공격하는 개혁주의자의 글. 그리고 문학적 근거를 예시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문학작품······ 이 모든 것이 전시회에 나란히 걸린 그림들처럼 병존하면서, 정밀하게 상호작용하여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거기서 어떤 무아레가 출현하는가? 전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화이다. 텍스트 유형들 간의 모든 통사론적이고 환유적인 밀고 당기기가 만들어내는 이 책을 아우르는 형식은 다름아닌 성배 추적 이야기다." "그곳에는 절정을 이루는 신비인 절대적 타자, 고립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아쉬워하며 지친 채로 집에 돌아가, 소심하게 뒤로 물러나 있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준다."(60-1)


"물론 추적자로서의 인류학자라는 신화 역시 또하나의 환유적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그가 의도한 것은 역시 다중적인 텍스트 유형을 그 구조 자체가 주제의 한 가지 사례인 하나의 단일한 구조, 즉 '신화논리학mytho-logic'으로 묶어내는 것으로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생활의 기초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른바 인간 존재의 토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작업의 요체는 『슬픈 열대』의 텍스트를 저마다 굉장히 다양한 통사론적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 연결하고 다시 연결하며 또다시 연결하는 긴 발언으로 보인다. 『슬픈 열대』라 불리는 어떤 집적물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신화-텍스트가 출현하여, 그것으로부터 전개된 전체 작품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요약된 완결판을 넘어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신화, 음악, 수학이 실재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그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유일한 참된 소명이라고 여긴 이유이다."(61-2)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개인들'을 가장 잘 알기 위한 길은 그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 표현들을 누비고 꿰매어 관계의 추상적 견본을 만드는 일이라는 확신이, 계시적인 (혹은 반反계시적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절정의 경험을 통해 생겨났고 그것이 『슬픈 열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쓸쓸한 일이지만 그의 탐색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외부인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투피카와이브인을 드디어 만났을 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낯설게 보이는 생활의 기초를 꿰뚫어보는 것,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곳에 있기'는 그들 속에 개인적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오로지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 즉 낯설게 보이는 독특한 삶의 면모를 보편적으로 해석해 직접성을 해체시킴으로써, 그 낯섦을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62-4)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저작 고유의 특징─추상화된 자기 완결성이라는─을 마침내 충분히 전해준다. '냉담한', '폐쇄적인', '차가운', '진공 상태인', '지적인' 등 문학적 절대주의 주변을 맴도는 온갖 형용사가 작품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책은 삶으 그려내는 것도, 삶을 환기하는 것도 아니며, 번역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남겨놓은 재료들을 배치하고 재배치하여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 체계로 정비한다. 말하자면 그의 책은 재규어, 정액, 썩어가는 고기를 반대, 도치, 동형구조로 변형시키는, 유리로 둘러싸인 자기봉합적 담론인 듯하다. 신화와 기억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인류학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인류학 텍스트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슬픈 열대』가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자, 그것이 밝혀낸 그의 전체 작품이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다."(64)


3 슬라이드 쇼: 에번스프리처드의 아프리카 슬라이드


"E-P(에번스프리처드)의 민족지 저술에는 토착민의 방언을 제외하면 외국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매우 폭넓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문학적 암시를 거의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표현 영역의 전문가 중 최고의 전문가지만, 인류학 용어나 다른 분야의 전문용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뽐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빈도수를 막론하고 언어 행위라고는 무난한 평서문밖에 없다. 미심쩍은 의문사, 연계된 조건문, 명상적인 돈호법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언어를 놓고 씨름한 표시는 완벽하게 감춰진다. 말하는 것마다 모두 명료하고 자신감 있으며 호들갑 떨지 않는다. 어쨌든 언어적으로는 채워야 할 빈 곳도, 연결해야 할 점도 없다. 보이는 것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심층적인 독해는 권장되지 않는다." "낯섦도 방해물이나 위협이라기보다는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요소로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의 범주를 굴절시키지만 깨뜨리지는 않는다."(80-2)


"민족지 기록에 대한 이런 태도는 줄줄이 이어지는 깔끔하고 명석한 판단의 연쇄로, 무조건적 발언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무척이나 명료하게 소개되어 있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선제공격적인 자기주장은 E-P의 저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베두인족은 확실히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고 신이 자신들에게 안배해둔 운명을 믿는다.〉 (『키레나이카의 사누시 교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에르족에게는 법이 없다.〉 (『누에르족』). … 그는 어떻게 작업하는가. E-P가 민족지 기록에 접근하는 그의 뛰어난 면모와 설득력의 주요 연원은 문화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상, 인류학적 슬라이드로 구축하는 그의 굉장한 능력에 있다. 그는 무엇을 하는가. 마법의 등잔인 민족지학의 주된 효과, 그 주된 의도는 인류학적 슬라이드가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괴상하든 간에, 우리 자신이 본능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적 지각의 확립된 틀로 그것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다."(83-4)


"삽화, 사진, 스케치, 도표, 이런 것들은 E-P의 민족지를 조직하는 힘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영상화된 관념에 의해 움직이며, 신화(혹은 일기)보다는 풍경화와 비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수께끼 같은 일을 명백하게 풀어내는 데 헌신한다. 그의 세계는 정오의 세계로, 햇빛 속에서 형체의 윤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형체 대부분은 더없이 고유한 존재이며, 지각 가능한 배경 위에서 묘사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나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어떤 책에서 메리 더글러스는 E-P를 〈인류학계의 스탕달〉이라고 주장한다. 〈욕망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균형〉을 다루는 그의 〈예리한〉 감각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가 그런 감각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산세베리나 공작부인과 마찬가지로 그가 연구한 아누아크족, 아잔데족, 누에르족, 딩카족, 실루크족, 베두인족 등이 (텍스트 속에서는 그 자신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88)


#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 스탕달의 장편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의 여주인공


"E-P는 준비된 청중 앞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는 말은, 그보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아무리 극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시스 강에서든 아코보 강에서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용감하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했고, 친절한가 하면 잔인한 사람도 있었고, 합리적인 사람도 바보 같은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가장 하찮은 남자도 남자로서 최고의 삶을 누린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이제는 여기에 여성도 추가되어야겠지만.) 그런 감정을 영국을 넘어 아프리카에까지, 그보다 더 멀리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탈리아까지도) 확대 적용하는 것이 E-P가 슬라이드 쇼를 보여준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오만하고 낭만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국 이데올로기가 다시 등장한다' 따위의 몹시 부적절하기만 한 것일 수도 있지만─그것은 음흉하지도, 인색하지도, 무자비하지도 않다. 또 그 문제에 관한 한, 거짓도 아니다."(91-2)


# 아이시스 강the Isis : 옥스퍼드 부근을 지나는 템즈 강 상류의 별칭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말리노프스키는 사실에 관한 그 자신의 고집 때문에, 또는 비상한 환기 능력을 갖춘 자신의 작업 덕분에, 그 자신이 사용한 반어법을 가져와서 말해보자면, '야수 만나기join-the-brutes' 민족지라 불릴 만한 것의 수석 사도로서 우리에게 왔다. 그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방법론을 다룬 저 유명한 서문에서 〈민족지학자는 카메라와 공책, 연필을 치워두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직접 가담하는 편이 좋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쉬운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공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더다로 시도 자체는 누구나 해볼 수 있을 터이다〉라고 말했다. 이국적인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것처럼 만남의 즉각성에서 물러나 사고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혹은 E-P가 한 것처럼 그들을 아프리카 항아리에 그려진 형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99)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기』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문제, 거의 전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문제는, 민족지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토착생활 외에도 우리가 풍덩 뛰어들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풍경, 고립, 그 지역에 사는 유럽인들, 집과 남겨두고 떠나온 것들에 대한 기억, 소명감과 각자의 지향점, 가장 불안한 것, 자기 열정의 변덕스러움, 약한 체질,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 말하자면 어두운 자아. 그것은 토착민 방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중적인 삶을 사는, 여러 곳의 바다를 동시에 항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목격하는 나'를 이해하게 하려면, '나'를 먼저 이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100-1)


"일기를 쓰는 사람─즉 (롤랑 바르트보다 더 광범위하기도 하고 동시에 협소하기도 한) 내 용어인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강경한 태도로 취하는 민족지 텍스트 구축자라면 누구든─의 과제는, 리비도적인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또한 〈작가에서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회전고리를 통해 매혹하고······ '나는 내가 쓰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고 불확실하고 어딘지 진정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이러한 종류의 글에, 또 요즘은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자발적'인 글쓰기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삼류 배우 중에서도 제일 어설픈 배우임을 알게 되었으니.〉" "당장 인류학 분야의 글을 살펴보더라도, 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텍스트 구축 양식과 그것을 괴롭히는 문학적 불안의 신호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기병'은 이제 고질적인 것이다."(113-4)


5 우리/우리 아닌 자: 베네딕트의 여행


"베네딕트가 주로 의존하는 수사학적 전략은 너무나 익숙한 것과 굉장히 이국적인 것의 자리를 뒤바꾸는 병치 전략이다. 베네딕트의 저작에서 문화적으로 가까운 것은 괴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은 논리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그려진다. 우리 자신의 생활 형태가 낯선 민족의 낯선 습관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있는 곳이든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든 멀리 떨어진 곳의 관습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측 가능한 행동이 된다. 그곳이 이곳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아닌 자(또는 미국인이 아닌 자)가 (미국인인)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저작을 지배하는 어조는 진지하기 짝이 없으며 그 어조에 조롱하는 기색은 전혀 배어 있지 않다. 그의 방식은 인간 권위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태도가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더없이 진지한 방식으로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희극적이다. 베네딕트의 아이러니는 전부 진심 어린 것이다."(134-5)


"신념과 관습들을 숨기는 데 성공한 저작에서 베네딕트는 그 업적을 근간으로 하여 저자-작가로서 '담론성의 창시자'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베네딕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타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방식으로 일관하는 『국화와 칼』, 『문화의 패턴』이 그 저작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를 고안해본다면 '자기-원주민화self-nativising'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놀라운 업적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현지조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네딕트는 현지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조사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런 이론화 작업에 관심도 거의 없었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강력한 해석적 스타일을 간결하고 자신있고 정교하게, 무엇보다도 단호하게 발전시킨 결과다. 즉 명확한 견해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136-7)


"전문 인류학자로서 베네딕트의 문체는 애초부터 성숙해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전문화된 연구들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고, 그런 연구를 토대로 그는 입문하자마자 그 분야에서 매우 일찍 인정받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마찬가지다. 운동 법칙처럼 명백한 것으로 보일 때까지, 또는 법률가의 발표문처럼 날조한 것으로 여겨질 때까지, 같은 것이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된다. 예로 드는 보기만 바뀔 뿐이다. 그의 글에는 스스로 단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고자 하는 고슴도치 같은 태도가 배어 있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진리(대평원의 아메리칸인디언들은 황홀경에 빠지기 일쑤이고 주니족은 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하며 일본인들은 위계적이라는,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렇지 않다는 진리) 때문에 베네딕트의 전문 독자들은 그의 글을 권위 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편집증 같다고 보기도 한다. 폭넓은 독자층이 생긴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137-9)


#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남긴 시구인 〈여우는 아는 게 많지만, 고슴도치는 딱 한 가지 큰일에만 집중한다〉에서 비롯된 표현


"베네딕트가 쓴 (그가 전쟁 동안 맡았던 정보 업무와 선전 작업에서 시작된) 『국화와 칼』의 탁월한 독창성과 그것이 가진 힘의 토대, 준열한 비판자들조차도 느낀 그 힘의 토대는 그가 일본과 일본인들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괴상하게 무장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괴상하게 생긴 세계라는 느낌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그런 느낌을 오히려 더 강화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상상 속의' 그들을 대비시키는 습관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른다." "『국화와 칼』이 예쁘게 단장된 '피도 눈물도 없는 과학정책'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는 의사였다가 다음에는 배 여러 척의 선장이 된 레뮤얼 걸리버가 세계 방방곡곡 오지로 떠난, 4부로 구성된 여행기』가 동화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베네딕트는, 자신은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성가시게 하려고' 글을 쓴다고 한 스위프트처럼 글을 썼다. 세상이 그 점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꽤 애석할 것이다."(146-59)


6 이곳에 있기: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삶인가?


"거의 모든 민족지학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양분된 존재 양식에 내재되어 있던 균열은 최근 들어 더 첨예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두어 해씩 목축민들이나 얌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드잡이하다가,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동료들과 논쟁하는 생활방식 사이에 생긴 균열 말이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과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 사이의, 항상 엄청났지만 잘 인지되지 않았던 간극이 갑자기 극도로 눈에 잘 띄게 된 것이다. 단지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으로만 보였던, '그들이' 삶을 '우리의' 연구로 옮겨오는 일이 이제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심지어 인식론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자족성, 에번스프리처드의 자신감, 말리노프스키의 무모함, 베네딕트의 태연함은 이제 무척 먼 일이 되었다."(164-5)


"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실제로 일어난 변화, 즉 인류학자 대부분이 글로 다루었던 종족들이 식민주의의 대상에서 주권국가의 시민으로 변한 상황은 민족지 연구가 이루어지는 도덕적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식민지는 아니었더라도 외딴 오지나 '바다 한복판에' 고립된 황제의 영토라는 전형적인 다른 어떤 곳(레비스트로스의 아마존이나 베네딕트의 일본)들은 그 처지가 매우 달라졌다. 팔레스타인 분할, 루뭄바, 수에즈, 베트남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세계의 정치 문법을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글쓰기가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의거해온 주된 가정, 대상과 독자는 분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무관하며, 대상은 서술되기만 할 뿐 발언할 수 없고, 독자는 통지를 받을 뿐 책임은 없다는 가정은 철저히 와해되었다. 여전히 세계는 구역화되어 있지만 그 구역들을 잇는 연결통로가 훨씬 더 많이 생겨났고, 격리되는 정도도 훨씬 더 약해졌다."(166)


"현지조사 보고서나 주제별 조사를 제외하고, 이건 매, 저건 해오라기라는 식으로 식별하는 글쓰기는 실제로는 인류학에서 매우 드물다. 이 분야가 끌었던 일반적인 관심은 앞서 다룬 저자들 같은 인류학자들이 구축한 빛나는 탑 위에 쌓인 것이다. 마치 한쪽에서만 보이는 스크린을 통해 보듯이 세계를 곧바로 바라본다는 미명, 오직 신이 바라볼 때처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미명은 정말이지 굉장히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런 미명 자체가 하나의 수사학적 전략이고 설득의 양식이다. 완전히 내다버리기 힘들어 여전히 읽히기도 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지만 여전히 믿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실화소설faction이, 즉 실제 장소에 실제 시간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에 대한 어떤 상상적인 글쓰기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교묘한 조작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인류학이 현대 문화에서 지적인 영향력을 이어가려면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175-6)


"인류학적 소명의 중요한 측면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볼 가치가 있다. 그 까닭은, 그러다보면 타인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를 대하는 한 집단의 의식이 열리며 또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도 개방적으로 보게 되어, 우리의 이해력을 철저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완전한 실패를 면한 정도 이상으로 해낸 사람이 없었던 과제인) 그것은 현재를 새겨넣는 일, 세계의 젖줄이 흐르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다.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그곳'보다는 '이곳'을, '그때'보다는 '지금'을 말이다. 민족지가 그 외에 달리 무엇이든─말리노프스키식의 경험 추구일 수도 있고 레비스트로스식의 질서를 향한 열광, 베네딕트식의 문화적 아이러니, 에번스프리처드시의 문화적 자신감일 수도 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의 번역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된 생명력이다."(17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