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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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최초의 자폐아(1930~1960년대)


"도널드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특이한 점 중에서 부모는 이 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품에 뛰어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간절히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렇듯 주변 사람의 존재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으면 즉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던 일이라봐야 허공에 단어를 쓴다든지,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냄비뚜껑을 돌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 그것은 '동일함'이었다. 완전하고도 순수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주 조금만 변해도 참지 못했다. 가구를 옮기면 화를 냈고, 밖에 나갈 때는 들어올 때 밟았던 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꾸로 밟았으며, 장난감은 놀다 내버려둔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이전에 그것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조리) 기억해야 했다."(29)


"도널드를 진료한 의사들이 으레 사용한 용어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런 진단이 붙으면 부모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았다. 아이를 어딘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수용시설에 보내라는 조언은 그리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함이 있다〉는 말이 특별히 차별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심장판막의 결함〉처럼 그저 정상적인 기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을 지닌 임상용어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1902년에 등장한 〈백치idiot〉, 〈치우imbecile〉, 〈노둔moron〉이란 용어도 〈정신연령〉이 3세 미만, 3~7세, 7~10세인 사람을 지칭하는 의학용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누군가를 조롱하고, 상처를 주고, 낙인을 찍기 위한 말로 변질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지체retarded〉라는 말도 한때 장애에 관한 용어 중 가장 중립적인 말로 〈발달이 늦다delayed〉는 의미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모욕적인 단어를 파생시켰다."(41-3)


"인류학, 동물학, 유전학, 심리측정학 등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의 결합에서 탄생한 우생학은 인류의 혈통에서 결점과 불순물을 씻어버릴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친구인 뉴욕의 변호사 메디슨 그랜트가 쓴 우생학 선언서 〈위대한 혈통의 전승〉을 추켜세웠다. 책에서 그랜트는 집단 선택번식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허약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정신적 불구인〉 유전적 영향을 일소하고,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수백만 시민을 제거하라고 권고했다. 루스벨트는 〈국민이 가장 절실히 깨달아야 할 사실〉을 잘 요약한 책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오스트리아 청년은 그랜트에게 팬레터를 보내 그의 책이 자신의 〈바이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청년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랜트는 자손을 이어갈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불임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우생학에 어찌나 열광했던지 1920년대에 미국 17개 주에서 강제불임술을 법제화할 정도였다."(53-4)


"1974년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미시간 대학의 나탈리아 찰리스와 호러스 듀이는 (500년 전 러시아에서 〈신성한 바보〉로 간주되었던) 바질을 비롯해 비슷한 이야기로 전해지는 몇몇 사람의 행동을 그저 어리석거나 성스럽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신성한 바보들 중 일부는 말을 못했지만 일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으며, 수수께끼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권력자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불쑥 내뱉기도 했다. 찰리스와 듀이는 그런 경향이야말로 러시아 민중이 그들을 사랑했던 이유라고 적었다. 아무도 권위에 맞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문화였지만, 그들의 거침없는 행동에서 구약 속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500년 전에 자폐증이란 진단명이 있었다면 민중은 이 바보들을 신성한 존재로 추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의 경외심과 존경은 이들이 일부러 혹독하고 외로운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기에 생겨났다."(79-80)


2부 비난 게임(1960~1980년대)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자폐아 엄마들의) 소그룹 만남은 강렬한 고해성사의 장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몇 주 또는 몇 개월, 기억조차 희미한 그때를 떠올리며 자폐증이 시작된 순간을 잡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폐증을 언제 처음 알아차렸는지 찾는 것이 아니었다.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뭔가 잘못한 순간, 아기에게 심한 정신적 외상을 가해 스스로 지어낸 현실 속으로 영원히 숨게 만든 그 무언가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다. 아이들은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로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다름 아닌 엄마에 의해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정이었다."(121-2)


"(의학도 심리학도 아닌 예술사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브루노 베텔하임은 1967년에 《텅 빈 요새》를 출간하면서 최고의 자폐증 전문가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기계소년 조이〉의 사례를 든다. 조이는 어려서 부모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결과 자신을 커다란 기계의 부품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커다란 기계가 바로 세상이란 관념을 발달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조이는 사람과 접촉을 피하면서 주로 기계, 특히 선풍기에 관심을 보였다. 왜 선풍기일까? 베텔하임은 선풍기가 회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형태의 원은 자폐 어린이에게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절대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상호관계를 갈망한다.〉 베텔하임은 조이가 스스로 어떤 탁자 밑에 기어들어가 자신을 품은 알을 낳았다고 상상하던 날 〈악순환〉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상징적으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옴으로써 다시 태어났고, 완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136-7)


"루스와 남편은 완전한 베이비붐 세대이자 독실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 자신이 여덟 명의 형제자매 중 맏이였을 뿐 아니라 일곱 아이의 엄마였다. 일곱을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키웠지만 하나만 자폐증이었다. 저절로 대조군이 설정된 실험이었다. 6대 1이라고? 그 정도면 증거로 충분했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상식이야말로 루스가 삶에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냉장고 엄마라는 이론을 믿은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 이론은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 이론은 어린이를 배제하고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처방했기에 애초부터 실패할 것이 확실했다. 모든 것을 깨닫자 행동가의 본성이 꿈틀거렸다. 꽉 막힌 현실을 깨뜨려야 했다." "루스는 대중의 힘을 믿었다. 여성들이 힘을 합친다면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흔치 않은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엄마라는 작은 세계에서부터 그런 집단을 조직할 참이었다."(167-8)


"뭔가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면 예외 없이 부모들이 나서 도울 방법이 없다고 변명하는 구태의연한 상태를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문제란 편견의 벽에 맨손으로 맞선 루스 설리번과 올버니 엄마들, 고립된 상태에서 각지에 선구적인 조직을 만든 부모들은 주춧돌을 놓은 셈이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자폐가 엄마 때문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인식을 부추겼다.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냉장고 엄마 이론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대항이론이 필요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격과 신뢰성을 지닌 누군가가 그런 이론을 주장해주어야 했다." "1964년 그런 인물이 나타났다. 한때는 샌디에이고의 열쇠 수리공이었지만, 자신이 변화시킨 세계에서 그는 버나드 림랜드 박사로 알려졌다. 버니는 자폐증에 관해 한마디할 만한 학위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심리학이다. 또한 루스 설리번처럼 자폐증을 겪는 아들을 두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열정적이었다."(172-3)


"루스와 림랜드는 너무나 잘 맞았다. 둘은 즉시 서로를 하늘이 내려준 파트너로 생각했다. 설리번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과 미디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림랜드는 수많은 연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능숙했고, 의사나 과학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녀들에 대한 인식과 교육과 사회적 대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 네트워크를 넓히려고 노력해왔다. 1965년 늦여름,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설리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고립된 가족들을 전국 규모의 단일한 집단으로 결집시켜야 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종이에 적어 가며 구상을 마친 후, 자신의 생각을 림랜드에게 적어 보냈다. 림랜드가 보낸 편지 역시 우송되는 중이었다. 편지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으니 도와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1965년 11월 14일 전미 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189)


3부 수용시설의 종말(1970~1990년대)


"예전에 자폐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자녀를 시설로 보낸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곳이 〈뱀구덩이snake pit〉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많은 시설에서 수용자를 극단적으로 방치하거나 대놓고 학대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기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마다 격분과 개탄이 들끓었지만, 이내 잊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1949년 찰스 아멘트라우트는 헌팅턴 주립병원에 잠입하여 〈목재들이 썩어가는 방[들]〉과 〈어두침침한 복도[들]〉를 돌아다니며 본 것들을 보도했다." "그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였다. 하나같이 거의 벌거벗은 채 몸에 자신의 배설물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장난감은 물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아멘트라우트는 대소변 가리기 훈련이 안 되어 있음을 알고 기겁했다. 〈정신질환자들의 냄새〉라고 표현한 악취에 거의 압도당할 것 같았다."(225-8)


"1969년 겨울 PARC(펜실베이니아 지체아동협회)를 대표하는 두 명의 부모가 찾아왔을 때까지 톰 길훌은 그런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펜헐스트 주립학교의 소유주이자 운영자인 펜실베이니아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승산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PARC의 부모들은 〈인권〉 변호사를 원했다. 〈인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헌법을 근거로 학교에서 인종분리 정책이 퇴조하고, 소수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주 의회나 주지사 집무실에서는 승산이 없어도, 법정에서라면 약자들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다는 정서가 생겨났다." "길훌은 아홉 쪽에 이르는 전투계획을 제시했다. 핵심 단어는 〈교육받을 권리〉였다. 길훌은 어린이들이 감금된 소위 주립학교가 사실은 전혀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중심으로 결론을 구성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길훌은 승리를 거두었다. PARC의 부모들을 대신해 쟁취한 승리였다. 이후 2개월간 그는 주 정부와 13개 교육청이 취해야 할 조치들을 문서화했다."(236-40)


"시설에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세가 강화되면서 마지못해 장애 어린이의 교육 의무를 포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떤 교육청도 그 의무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어린이에게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육청들은 프로그램에 방해가 되고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어린이들을 배제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자폐 어린이는 이제 시설에 수용될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아직 학교에 갈 권리는 없었다. 1972년 숀 레이핀은 네 살이 되었다. 이미 카운티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예비 자폐 프로그램에 다니고 있었지만, 3년 뒤 일곱 살이 되면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캘리포니아주에서 자폐 어린이를 위한 기회의 물꼬를 터야만 했다. 레이핀 부부는 길훌의 자문을 받아 소송을 제기했다. 다른 지역 자폐 부모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법정 소송과 의회 로비를 벌였다. 요구는 하나같았다.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란 단어를 명시하라는 것이었다."(258-9)


# 1974년 9월 30일,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마지막 날에 법안에 서명함


"입소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거대 수용시설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미국의 시설 수용자 수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했다. 새로 입소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에는 시설 수용자 중 48.9퍼센트가 21세 미만이었다. 이 연령군이 가장 많았던 때다. 1977년에 이르면 이들의 비중은 35.8퍼센트로 떨어지고, 1987년에는 12.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추세는 어린이들에게 하루 종일 가 있을 곳을 제공한 덕분이다. 바로 학교였다 1975년 연방 장애아동교육법(1990년 장애인교육법으로 개칭)이 제정되면서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에 새로운 의무가 생겼다. 계속 보조금을 받으려면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 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어떤 장애가 해당되는지는 목록에 명시되어 있었다. 1990년에는 자폐증도 그 목록에 등재되었다."(267-9)


4부 행동, 분석되다(1950~1990년대)


"1960년대에 자폐 어린이를 돕는다며 온갖 희한한 방법을 추구했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실상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환각 효과가 정신질환의 주요 증상과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LSD 실험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이런 변명은 1965년 이바 로바스라는 UCLA 심리학자가 건전지로 작동하는 소몰이용 작대기로 어린이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등장했다. 그의 실험은 논쟁적이었던 만큼이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로바스는 자해행동이 나타나는 순간 처벌을 가함으로써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실험 결과, 처벌은 어린이들의 자해행동을 억제하는 데 눈에 띄는 효과를 보였다." "로바스는 자신의 과학을 깊이 신뢰했다. 그에게 과학이란 인간심리학의 원칙이 관찰 가능하고, 확인 가능하고, 측정 가능하고, 몇 번이고 신뢰성있게 반복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동물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었다."(282-92)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 사이의 도덕적 균형은 20년간 로바스의 자폐 어린이 연구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종종 잘못 이해되었던 '강화와 처벌'이란 용어는 사실 래트, 마우스, 비둘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래했으며, 임상 및 분석 목적으로 사용된 특정 방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실에서 이런 유형의 심리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물의 거의 모든 행동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지 밝히는 핵심적 원리를 발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화와 처벌 외에도 자극stimulus, 반응response, 행동형성shaping, 조작적 조건형성operant conditioning, 부정적 강화negative reinforcement, 소거extinction 등 이 분야의 어휘는 연구대상이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학습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주의라는 과학이다."(294-5)


"워싱턴 대학의 몬트로스 울프와 토드 리슬리는 자해가 심한 자폐아 디키를 대상으로 〈행동분석〉 접근법을 시도했다. 그들은 디키의 분노발작을 없애기 위해 당시 발표된 자폐증과 무관한 두 건의 연구에 착안하여 가벼운 처벌과 〈소거〉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들은 교사에게 아이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지나치게 운다든지, 혼자 논다든지, 심하게 몸을 긁는다든지 등)을 나타내면 완전히 무시하라고 했다. 선생님의 주목을 끌지 못하자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이내 〈소거〉과정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사라졌다. 반대로 사이좋게 노는 등 보다 적절한 행동으로 바뀌면 교사는 즉시 주목했다. 교사의 주목은 강화에 효과적이었다. 적절한 행동의 빈도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다." "디카를 지켜본 연구팀은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아이의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행동을 더욱 강화하고, 심지어 더 자주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300-1)


"1980년대 내내 소위 혐오 이슈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처벌을 사용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며 응용행동분석applied behavior analysis, ABA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반대진영에서 보기에 사람들은 약간의 충격이 행동이 향상시킨다면 더 많은 충격을 가할수록 행동이 향상된다고 믿을지도 몰랐다. 처벌은 너무나 쉽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한없이 사용하게 될 수 있다." "주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갈등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근치수술이나 항암화학요법 등 가혹하지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의학적 치료들을 예를 들어 이들은 장기적 이익을 위해 엄격하게 통제된 최소한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들은 혐오치료 반대자들이 힘세고 다루기 힘든 성인이 쉴 새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진정한 중증 행동문제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314-9)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폐증에 대해 로바스가 내놓았던 해답, 그 나름의 방식에 의한 ABA는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캐서린 모리스라는 한 엄마가 쓴 《네 목소리를 들려줘》라는 책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1991년, 캐서린 모리스는 그녀의 가족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혐오자극을 사용하지 않는) ABA를 통해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자폐증에 관한 서사를 완전히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의 책은 자폐공동체에 미친 영향이란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 "그 이유는 책의 부제에서 잘 드러난다. 〈자폐를 이겨낸 한 가족의 승리〉. 승리란 결국 회복 이야기였다." "로바스는 그 책의 후기를 쓰기도 했다. 책 속에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모리스의 수기 덕분에 로바스의 ABA에는 진정 존경받을 만한 방법론이란 품위가 덧씌워졌다. 로바스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요소였다."(352-63)


5부 런던에서 제기한 의문(1960~1990년대)


"영국과 미국 연구자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우선순위가 크게 달랐다. 미국인들은 자폐증의 치료, 심지어 완치를 추구했다. 상황을 일종의 응급상태로 받아들이고, 되도록 빨리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반면 호기심에 불타는 영국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자폐증의 모습을 보다 정확히 그려내고, 자폐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또한 영국 연구자들은 항상 보다 큰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폐증은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작동방식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라는 물음이다. 영국식 접근법은 50년간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벽에 부딪혔지만, 마침내 미국과 뚜렷이 다른 결과들을 내놓았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실험심리학자와 학계에 몸담은 정신과 의사들이 내놓은 통찰들은 전세계에서 자폐증이란 현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버렸다."(388)


"1966년 우타 프리스는 여덟 단어로 된 목록을 죽 읽어준 후, 바로 어린이들에게 들었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무작위적인 단어 목록을 제시했을 때 자폐 어린이는 비자폐 어린이와 똑같이 여덟 단어 대부분을 반복했으며, 사실 목록 마지막에 있는 몇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는 더 좋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하는 목록을 제시했을 때는 비자폐 어린이들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반면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순수하게 시각적 기억을 검사하는 실험에서 비자폐 어린이는 역시 시각적 단어에서 의미를 추정하여 좋은 성적을 냈다. 이는 자폐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점수는 대조군의 점수와 사실상 같았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409-10)


"심리학에서 〈마음이론〉이란 용어는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생각, 꿈, 믿음)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 실체임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자신의 의지가 없는 물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한편 마음이론의 필연적인 결과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나중에 〈정신화〉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과정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타인의 생각을 추정하고, 그 추정을 근거로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배런-코언이 제1저자, 앨런 레슬리와 우타 프리스가 제2, 3저자로 참여하여 작성한, 〈자폐 어린이에게도 마음이론이 있을까?〉라는 제목을 붙인 논문에서 그들은 (거짓믿음시험의) 데이터가 밝혀냈다고 믿는 바를 과감히 선언했다. 〈우리의 결과는 단일 집단으로서 자폐 어린이들이 마음이론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422-7)


6부 진단을 재정의하다(1970~1990년대)


"로나 윙과 주디스 굴드는 자폐성향을 판별하는 기존의 진단 범주가 너무 좁게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고,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을 아우르는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을 제안했다. 우선 뭔가를 주고받는 사회적 기술의 장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비음성언어를 포함한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였다. 세 번째는 윙이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예컨대 가상놀이에 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가변성이었다. 윙은 이 개념틀 내에서 자폐성향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날 수 있으며, 때로는 〈정확히 정상과의 경계선상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속선continuum〉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저서에도 〈자폐성향의 연속선〉이란 장이 있었지만, 1988년에 이르면 똑같은 목적으로 〈스펙트럼spectrum〉이란 용어를 사용했다."(438-9)


7부 꿈과 한계(1980~1990년대)


"1961년생인 애니 맥도널드는 뇌성마비로 진단받았으며, 뇌가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추정되었다. 걷지 못했고, 혼자서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로즈메리 크로슬리는 70년대 후반 애니가 하루종일 생활하던 수용시설의 보조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소녀의 지능이 사실은 온전하며 활발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크로슬리는 단어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열심히 추구하며 애니의 생각과 접점을 찾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개발한 방법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그런 성공이 애니가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으며, 할 말이 아주 많다는 자신의 직감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했다. 그간 말을 못한 것은 뇌성마비로 인해 물리적 발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로슬리는 발성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녀가 〈촉진적 의사소통facilitated communication〉이라고 명명한 이 방법은 FC라는 약자로 널리 알려졌다."(484)


"내면에 갇힌 아이. 자폐인의 가족들은 그 개념만 떠올리면 언제나 애가 탔다.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너무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방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끝없는 죄책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폐증은 단단히 걸어잠근 방 같은 것이었다. 부모들은 끊임없이 열쇠를 찾아헤맸다. 〈내면에 갇힌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가족마다 독특하게 나타났다. 다운증후군처럼 다른 발달문제를 안고 있는 가족에게 사랑이란,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폐 어린이의 부모 또한 자녀에 대한 사랑은 결코 덜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자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끼며 이를 위해 놀라운 치료를 찾아다니는 형태로 나타난다."(494-5)


"언어병리학자 하워드 쉐인은 FC의 검증 과정을 고안했다. 환자와 촉진자에게 동시에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촉진적 의사소통을 위해 나란히 앉지만, 그들 사이에 칸막이를 세워 상대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쉐인은 환자에게 그림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실험의 멋진 점은 촉진자와 환자에게 때로는 똑같은 그림을, 때로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FC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촉진자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촉진자가 보는 그림과 별개로, 환자는 매번 자신이 본 그림 속의 물체를 정확히 타자할 것이었다."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촉진자와 환자가 다른 그림을 볼 때만 틀린 답이 나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틀린 답은 촉진자가 본 그림과 일치했다." "환자는 진정한 의사소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사소통 따위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507-9)


8부 자폐증, 유명해지다(1980~1990년대)


"영화 〈레인 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단순히 서번트 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자폐인을 그려냈으며, 그가 그려낸 자폐인의 초상은 실로 흠잡을 데 없었다. 처음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뒤에도 레이먼드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약간 재미있어 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의 여정을 정의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쑤시개와 K마트에서 산 속옷을 필요로 한다. 감각이 너무 예민해 시끄러운 소음을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고,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스포츠에 관한 온갖 통계 숫자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난생 처음 키스를 받아본 느낌이 어땠느냐고 물어도 단 한마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축축했어.〉 몸에 손을 대면 벌컥 화를 내며, 초조할 때면 애벗과 코스텔로의 〈1루수가 누구야?〉에 나오는 유명한 대화를 끊임없이 반복한다."(576)


"표준적인 할리우드 영화라면 결국 레이먼드의 자폐증이 완치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습을 충분히 본 후에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영원히 그 밖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일주일간의 모험과 우여곡절 끝에 형제가 매우 가까워져 같이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인 맨〉의 결말은 뻔한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동생 찰리는 깊은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훌륭한 삶을 살아갈 것 같다는 희망을 던지지만, 레이먼드의 성장은 분명치 않다."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자폐인이다. 그것도 혼자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자폐인이다. 그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돌아간다. 다만 24시간 내내 인간적으로 돌봐주는 값비싼 수용기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폐증에 관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결말은 자폐인과 부모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자폐란 항상,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다."(576-7)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폐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번째 책은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받았다. 자폐증이란 경험이 책의 형태로, 그것도 실제 자폐증을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에 의해 기술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그랜딘은 대학에 진학했고, 애리조나주의 대학원에서 가축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하는 압박에 대해 소牛가 나타내는 반응을 연구했다. 오래도록 매혹되었던 주제였다. 그녀의 연구는 미국 전역에서 가축을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관행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 영국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뇌의 신경연결이 비전형적인 사람들의 다양한 양상을 그린 저서에 그랜딘을 등장시켰다. 그는 그녀가 때때로 〈화성의 인류학자〉처럼 느껴진다고 한 말에 매혹되었다. 그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에 관해 쓴 《뉴요커》 기고문과 나중에 발표된 저서의 제목으로 쓸 정도였다."(578-82)


"불운하게도 자폐증이 마침내 미국에서 진정 〈유명해진〉 것은 대중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자폐증은 드물고도 매혹적인 현상에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위협으로 돌변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물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사람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자폐증이 사회적 비상사태가 되었다는 급작스러운 인식 변화는 상식적인 관찰에 근거했다. 자폐 어린이가 옛날보다 훨씬 늘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폐증은 과거부터 존재했던 어떤 한계를 넘어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 같았다." "자폐증 유행병epidemic이란 마음 불편한 망령은 내키지 않는 대중적 컨센서스에 의해 21세기를 규정하는 심리적 스트레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세상이 결코 아이 키우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 것이다. 《어린이》라는 잡지는 이런 불안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자폐증에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장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585-8)


# 2000년대 자폐증 유병률의 상승 요인

1. 끊임없이 변경·확대되는 자폐증의 정의

2. 지역별, 집단별로 집계된 통계의 남용

3. 질병역학 분야의 발달로 유병률 상승


9부 〈유행병〉(1990~2010년대)


"소위 자폐증의 백신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의료행위로 인해 어린이에게 자폐증이 생길 수 있다는 대중적 공포였다.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을 이 공포는 정확히 1998년 2월 26일 아침 런던의 로얄 프리 병원에서 불붙었다."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논문은 한두 해 사이에 진료한 열두 명의 어린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자폐적 행동과 함께 심한 장의 염즘을 나타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세 살에서 열 살 사이였는데, 추가적으로 검사한 결과 또 다른 특이소견을 발견했다고도 했다. 위장관에서 홍역 바이러스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견들을 근거로 웨이크필드 연구팀은 위장관 문제, 자폐증, 홍역 바이러스라는 세 가지 요인의 조합을 한 가지 단일한 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했다." "열두 명 중 열한 명의 어린이가 MMR 백신(홍역, 볼거리, 풍진 예방 백신)을 맞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장관 문제와 자폐적 행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611-2)


"전 세계 바이러스학자, 소아과 의사, 공중보건 전문가 중에서 MMR 백신이야말로 응용과학의 빛나는 성과이자 실제로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치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MMR 백신이 등장한 뒤로 세 가지 질병은 사실상 대중의 기억에서 잊힐 정도였다. 웨이크필드가 이 백신 접종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고 싶다면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엄청나게 탄탄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호소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지지층이 있었다. 영국에서 백신 회의론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극구 지지하는 사람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줄곧 공중보건당국과 불화를 빚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영국의 대중이 백신 접종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백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국가가 침습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615-6)


"문제는 주류 의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웨이크필드 말고는 자폐증과 MMR이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전성에 관해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는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부모들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MMR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은 웨이크필드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예방주사가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대중적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웨이크필드조차 연관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그 때문에 영국의 언론, 인간의 본성, 자폐증과 백신 사이의 관련성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와 한데 묶였다. 바로 공포였다."(623)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연구는 언제나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1998년 《랜싯》지에 발표됐을 때도 예리한 비판자라면 즉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의 백신 연구자 로버츠 첸과 프랭크디스테파노가 쓴 논문은 일종의 선제공격이었다. 그들은 백신과 자폐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며, 심지어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MMR 백신의 안전성을 신뢰할 만한 근거가 차고도 넘친다는 것이었다." "웨이크필드의 연구에 반대되는 과학적 증거는 계속 쌓여 갔다. 1999년 6월 《랜싯》지는 브랜트 테일러라는 로얄 프리 병원 소속 연구자가 수행한 역학조사 결과를 게재했다. 그의 팀은 영국에 MMR 백신이 도입된 해를 포함하여 수십 년간 자폐증 진단을 받은 500명 가까운 어린이의 예방접종 기록을 조사했다. MMR 백신을 사용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자폐증이 급증했다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656-7)


10부 현재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 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 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종류가 확실히 달라지자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동과 함께 자폐증의 정치학을 영원히 바꿀 훨씬 급진적인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이다."(712)


"1960년대 이후 40년간 자폐증 권리옹호운동은 자녀를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부모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 문제에 관한 목소리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녀들을 위해 말했다. 하지만 1993년 싱클레어의 주장 또한 대부분 옳았다. 부모 운동에 투영된 자폐증의 모습은 종종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증이란 자녀의 삶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아이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헌신은 정반대 사실을 입증했다. 엄마 아빠들은 자녀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들의 기이한 점 때문에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716-8)


"자폐 스펙트럼을 겪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사반세기 전 사회가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을 폐쇄했을 때 받아들인 가치였다. 하지만 중증 자폐 어린이가 어떤 면에서는 병자가 아니라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은 2007년 당시 훨씬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725-9)


# 아리 네이만 : 자폐증 자기권리옹호 네트워크Autistic Self-Advocacy Network, ASAN 설립자


"자폐증에 관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점일 것이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복잡하다.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는 계속 새로운 의문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전문가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또 다시 움직일 수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 "자폐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폐증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실제로 〈자폐증〉이란 단어에 관련된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논쟁을 밀고 나간 힘은 점차 사회를 변화시켰다. 자폐증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루고자 노력했던 모든 사회는 그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을 사회와 조화시키려는 과정을 통해 '어딘가 다른 개인'의 존엄성을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크게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자폐증을 겪는다는 것은 인류라는 옷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름일 뿐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름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7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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