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 광기의 시대와 역사에 휘말린 초라한 지도자의 초상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페이퍼로드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1장 충실한 신봉자


"1898년 9월, 히데키는 조호쿠심상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중학교는 매년 많은 학생을 도쿄육군유년학교에 입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유년학교 수험자격을 획득하자 히데키는 즉시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이리하여 14세에 육군에 들어가 그곳의 공기밖에 알지 못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육군유년학교는 청일전쟁 후 군비확장의 일환으로 도쿄,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토 그리고 과거 진대鎭臺가 있던 곳에 설립되었다. 여섯 개 유년학교의 정원은 각각 50명, 총 300명. 2년 동안은 각 학교소재지에서 배우고, 3년째는 도쿄에서 교육을 받는다. 3년째 배우는 곳을 중앙유년학교라고 부른다. 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면 연대에 배속되며, 그 연대 이름을 짊어지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사관학교의 수업연한은 2년, 졸업 후에는 연대로 돌아온다. 그때 그들은 20세의 나이로 소위 계급장을 단다. 징병으로 입대한 신병과 나이는 같지만 신분상으로는 큰 차이가 난다."(42-3)


"1916년 8월 도조는 육군성 부관이 되었다. 육군성 부관으로서 도조는 사무적 직무에 어울리는 성격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주위에 보여주었다. 육군성에는 건군 이래의 관계 법규, 조례, 관행, 내규를 문서화한 두께가 20센티미터쯤 되는 「성규유집成規類集」이라는 서류철이 있다." "도조는 집무 중 「성규유집」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중요한 부분은 머릿속에 넣었다. 암기는 그의 '노력'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까지 「성규유집」만을 생각하는 장교는 육군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노력은 오로지 눈앞의 직무만을 위한 것이었고, 주어진 틀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최대의 무기가 되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야말로 우수한 무리들의 토양이자 이 나라의 부침浮沈을 틀어쥐고 있는 장소라 믿고 있었다." "성실한 중견 장교의 자기 연마, 군인 우위를 믿는 자의 편협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자기 단련이었다."(74-6)


"1919년 7월, '독일국 주재'를 명받고 유학길에 오른 도조는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육군 장교가 패전에도 굴하지 않고 육군 재흥을 위해 일하고 있는 모습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비해 베를린 시민의 시위나 파업은 국가 관념이 없는 경박한 무리들의 소동으로 비쳤다. 공화제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곳을 찾은 군인들의 평균적인 인상이었다. '이 패전은 독일 제국의 군대가 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을 싫어하는 국민적 분위기가 바로 패전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그것이 그들의 해석과 결론이었다. 도조 또한 그러했다. 독일 패전의 계기가 된 것은 서부전선이었는데 그런 분석도 이 시점에서 파악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명령과 시달은 적확했지만 개개 전투부대가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으며, 전투부대의 전의 상실은 국민의 염전厭戰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도조 또한 그런 결론을 평생 바꾸지 않았다."(82)


"1931년 8월 1일, 도조는 참모본부 총무국 편성동원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9월 18일, 이시하라 간지의 모략이 중심이 된 만주사변이 일어나고부터 참모본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다. 현지군에 명령을 시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 육군의 힘이 커졌고,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장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도 문제시되었다. 도조에 한정할 경우,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궤적을 따져보면 이 사변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의 배치나 행동이 천황의 재가도 없이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대권 침범'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도조는 그런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도조의 행위는 참모본부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1886~1968) 등과 함께 육군대신 앞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전부였다. 그 내용은 '국가적 문제에 관한 한 정계의 움직임 따위에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소신을 팔방에 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27-8)


"1935년 7월, 군 중앙에서는 새로운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야시 육군상과 마사키가 인사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청년 장교들은 마사키 편에 가담했다. 그들은 군 내부에 〈천황의 대권을 침범한 자는 나가타와 하야시〉라고 알렸고, 하야시는 나가타의 로봇이기 때문에 원흉은 나가타라고 공언했다. 7월 15일, 마사키의 파면이 결정되었고, 황도파 중진은 군 중앙에서 사라졌다. 청년 장교들의 분노는 정점에 달했고, 나가타의 주위에서는 테러 위험이 있으니 외유라도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8월 12일, 도조는 '나가타 육군성 군무국장 칼에 찔려 사망'이라는 호외를 접하게 된다. 사건 후 2주일쯤 지나 도조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비밀 명령은 받았다. 나가타의 참살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하야시는 〈내가 나가타를 죽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도조를 도쿄로 불렀다가는 나가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만주로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152-4)


"나가타가 쓰러지던 날, 사건의 일부를 지켜보았던 무토는 도조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참살의 모습, 육군성과 참모본부 소속 장교들의 동향 등등. 무토는 (살해범인 황도파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붕대를 감아주면서 은밀히 격려한 국장이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도조의 가슴에 확실히 새겨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벗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아이자와를 호의적으로 변호했다는 말을 듣고 도조는 옛 친구에게 모멸의 말을 퍼부었다." "훗날 도조가 아카마쓰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무토와 함께 나가타의 유지遺志를 이어가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간 놈이라 해도 대낮에 그것도 육군의 심장부에서 군무국장을 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건군 이래 유지해온 군기가 짓밟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군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일은 우리의 손으로 단행할 수밖에 없다.〉"(155-6)


"당시 관동헌병대사령관은 관동국 경무부장을 겸임하여 만주 전역의 경찰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국 정부와 철도경호대를 통제하는 권한도 부분적으로 갖고 있었다." "도조의 전임자들은 이 조직도를 애매모호하게 내버려두었다. 너무 분명하게 하면 만주가 일본의 괴뢰국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항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경일체화가 가장 바람직하다.〉 도조의 주장에 관동군 참모들이 화답했다." "이윽고 만주국 안에서 도조의 이름은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만주국의 일본인 관리들과 관동군 참모들은 믿음직한 실천력을 갖춘 사령관을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반면에 만철滿鐵이나 협화회協和會 그리고 본토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좌절하여 신천지를 찾아 만주로 온 지식인들은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도조를 질서라는 이름을 빌린 강압의 장본인이라 하여 두려워했다."(158-60)


"군인으로 마감했을 도조의 경력은 2·26 사건 때문에 다시 씌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월 9일, 천황은 외무상 히로타 고키(1878~1948)에게 내각을 꾸리라는 명을 내린다. 육군상에는 일찍이 조슈벌의 영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 데라우치 히사이치(1879~1946)가 임명되었다." "천황의 뜻을 받은 데라우치는 군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 내부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3월사건과 10월사건 당시의 관련자부터 황도파 장교에 동정적인 장교까지 총 3천 명에 이르는 숙군 인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군 내부에는 파벌투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어떤 비합법 활동에도 가담하거나 공명한 일이 없는 충실한 군인만 남게 되었다." "2·26 사건 후에 진행된 일련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도조 같은 군인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게다가 도조에게는 또 하나의 요행이 있었다. 육군의 서열로 말하면 도조는 수십 번째 자리였는데 숙군 인사로 단숨에 10번대로 뛰어올랐던 것이다."(165-7)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충돌이 벌어진 후 중국에서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만주국에서도 중국인의 저항이 시작되었으며,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중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동군은 더욱 확실한 강경론의 근거를 발견했다. 도조는 격문을 돌렸다. 〈이 사변의 주요 목적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배일 정책의 쇄신, 둘째는 공산 세력 방비, 셋째는 북지의 경제 개발이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면 제국의 안전은 없다.〉 목표를 설정한 후에는 실행만 있을 뿐, 관동군은 독자적으로 '시국처리요강時局處理要綱'을 결정했다. 무력 발동의 철저화로 난징 정부 응징, 북상하는 중앙군 격멸 등 5개 방침을 내걸고, 결국은 〈지방정권을 수립하여 만주 접경 지역의 명랑화를 도모하고 대소전을 준비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 명기했다. 지난해 말 내몽골에 괴뢰정권을 만들려다 실패한 쑤이위안 사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178)


# 쑤이위안 사변 : 1936년 11월, 내몽고의 독립지도자 덕왕(德王)이 관동군의 원조를 받아 쑤이위안 성에 침입했다가 중국군에게 격퇴당한 사건


"뻔질나게 소련 국경 시찰에 나서고 있던 도조에게 육군차관 취임 소식이 전달되었을 때 그의 표정은 일순 어두워졌다. 부관 이즈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물장사 교육은 받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이래 전쟁 이외의 것은 배운 적이 없다.〉 '물장사'란 정치가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군인은 결단을 존중하고, 그다음에는 용맹하게 나아가 목표를 달성할 따름이다. 〈하지만 명령이라면 하는 수 없지.〉 도조는 한숨을 쉬었다." "1938년 5월 하순, 도조는 가족을 데리고 신징역에서 만철 특급 '아시아호'를 탔다. 이것은 군 중앙에서 쫓겨나 구루메로, 그리고 예비역으로 편입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 관동군헌병대사령관과 관동군 참모장으로, 그때마다 육군의 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하여 되살아난 군인의 새로운 장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날 신징역에 몰려든 인파는 '도조가 만들어진 시대'에서 '도조가 만들어가는 시대'로 바뀌는 전환점을 지켜본 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196-8)


제2장 낙백落魄 그리고 승룡承龍


"〈장제스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철회한 다음 1938년 안에 지나사변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고노에 수상은 육군상 이타가키에게 중일전쟁의 조기 해결을 호소했다. 군사작전에서 정치적 해결로 전환해야 한다는 설득에 이타가키의 감정은 흔들렸다. 이타가키의 이런 태도가 도조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는 그때마다 대신 집무실로 들어가 못을 박았다. 〈고노에 주변의 학자나 평론가라 칭하는 무리들이 육군성을 통하지 않고 육군에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치가 통수를 침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군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육군성의 의사란 중일전쟁을 처리하면서 국가총력전에 대비하여 군비확충을 도모하고, 대소련 전쟁과 남방에서의 대영미 전쟁에 대처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 대처한다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서 영미자본을 배척하고 있는 까닭에 언젠가 충돌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04-5)


"이타가키는 곤혹스러웠다. '저 사람은 폭탄과 같은 자다.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고집할 따름이다. 더구나 타협을 싫어하는 편협한 사내다'라는 생각으로 이타가키와 다다는 노골적으로 도조를 경원하기 시작했다. 11월 들어 참모본부와 육군성의 장교들은 '1938년 가을 이후 전쟁 지위에 관한 일반 방침'을 협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참모본부 전쟁지휘반장 호리바 가즈오가 사변 해결을 위해 장제스의 입장을 애매하게 해두자고 말하자, 도조는 〈장제스를 즉시 하야시킬 것을 명문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리쳤고, 이에 다다와 이타가키를 따르는 장교들은 격분했다." "이쯤 되자 고노에는 도조에 대해 불안감을 가졌다. 각료회의에서 태도를 바꾼 이타가키의 배후에 직정적인 차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고노에는 도조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와 그 주변에 있는 지식인들이 도조를 사갈시하고, 도조도 그들을 경멸하게 되는 바탕이 이렇게 형성되고 있었다."(206-7)


"1940년 11월, 도조와 무토는 육군성 전비과장 오카다 기쿠사부로를 불러 일본과 미국의 전력을 대비하는 자료를 만들라고 명했다. 2개월 후, '남방 처리의 상정想定에 기초한 제국의 물적 국력 판정'이라는 제목의 문건이 도조 앞으로 배달되었다. 〈제국의 물적 국력은 대영미 장기전 수행을 고려할 때 불안함을 면하기 어렵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보고서에는 대영미 전쟁 3년째부터 물량 감소와 함께 선박문제의 중대화, 석탄 반출의 감소에 따른 모든 생산의 마비, 경공업 자원의 부족이 예상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숫자일 뿐이며, 황군의 사기와 규율을 생각하면 한 마디로 패전할 것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카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조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 미국에는 나라의 중심이 없다. 반면 우리 제국에는 3천년에 이르는 국체가 있다.〉 도조는 이 보고서를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상층부에만 알렸다. 전력 비율만을 보고 정책 결정을 주저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232-3)


"1940년 12월, 1941년 1월과 3월에 단행된 인사이동에서 도조는 노골적으로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측근을 데려다 앉혔다. 이시와라를 예비역으로 내쫓은 아나미는 차관 생활을 충분히 오래했다며 스스로 도조의 곁을 떠나 제11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조에게 실망한 나머지 쌀쌀한 태도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 자리에 기무라 헤이타로(1888~1948)가 앉았다. 도조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자신의 의견은 좀처럼 털어놓지 않는 남자였다. 헌병대를 직할하는 병무국장에 다나카 류키치, 인사국장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했다. 헌병과 인사 담당 자리를 도조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아첨꾼으로 채웠던 것이다. 군 내부와 군 외부의 정치적 절충, 정책 결정의 요지인 군무국에도 자신의 입김이 미치는 장교들을 들여보냈다." "육군상 취임 후 9개월째인 1941년 4월, 도조는 어렵사리 자신의 수족을 확보했다. 결국 육군성은 편협한 도조 인맥 집단으로 바뀌었다."(240-1)


"국책 결정의 최고기관은 어전회의다. 국책 결정 과정을 보면, 육군·해군·정부·외교당국이 토의를 거쳐 안을 만들면 그것을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에서 승인한 후 어전회의에서 추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현재 『스기야마 메모』를 통해 당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데, 이 책의 행간을 잘 살펴보면 연락회의와 어전회의 모두 '자구字句 다듬기'에 대부분의 노력을 허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소전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 7월 2일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 요강'을 결정했다. 전문은 8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용은 실로 중대했다. 이 요강은 남방진출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영미전을 불사〉할 것이며, 북방에서는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여 북방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남진론과 북진론의 체면을 세워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안이었고 자구를 둘러싼 해석도 다양했다."(267-8)


"당시 어느 나라에서나 외교와 군사 책임자 사이에는 항쟁과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최고지도자가 선택을 하고 국책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수상의 권한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작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은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치 쪽의 최고지도자는 여기에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정보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의 권한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들은 용병用兵에서는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편성, 장비, 병력수를 관할하는 것은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이었다. 그 구분이 애매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통제하는 기구가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육군성과 참모본부 사이의 의견 충돌, 해군성과 군령부 사이의 의견 상극은 각각 같은 집단 내부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가능했다. 그러나 육군과 해군 사이의 의견 대립은 역사적인 대결의식과 이해관계과 뒤얽혀 복잡했다."(295-6)


"이렇게 병립한 기관 위에 있는 것이 천황이었다. 천황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교육을 받았다. 국책의 최고결정권은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와 어전회의에 있었지 천황에게도 수상에게도 결정권이 없었다. 더욱이 다수결로 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의안議案을 철저하게 검토하기보다는 반대논리를 억압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결정의 내용보다도 불투명한 의견의 일치를 기꺼워했던 것이다. 이런 회의에서 수상의 임무란 출석자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뭔가 정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정치형태였다. 국책의 결정이란 자구 다듬기 흥정에 지나지 않았고, 최대공약수적인 타협에 의해 무미건조한 작문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런 애매함을 제거하는 것은 사태의 진전─여기서는 일미교섭의 최종 결렬─이었다. 이것이 전시하에서는 한층 명확해진다."(296)


"10월 17일, 입궐하라는 말을 전해 들은 도조는 얼굴을 찌푸리며 일미교섭 관련 자료와 중국 철병에 이의신청을 하는 상주문을 가방에 쑤셔 넣고 자동차에 올랐다. 〈상당히 엄한 질책이 있을 것 같군.〉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카마쓰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대에게 내각 조직을 명한다. 헌법의 조규條規를 준수하도록 하라. 시국이 대단히 중대한 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육해군은 한층 긴밀하게 협력하도록 유의하라. 잠시 후 해군대신을 불러 이 뜻을 말할 것이다.〉 천황은 눈길을 떨구고 있는 도조에게 이렇게 대명을 하달했다." "이 무렵 육군성에도 '도조에게 대명을 하달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무토와 사토를 비롯한 장교들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고, 천황이 전쟁을 결의한 것 아니냐며 긴장했다. 그러한 긴장과는 별도로 정책 결정집단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육군에 조각의 명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간 충족감을 주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307-8)


"육군성 중추인 도조와 무토가 진지하게 일미교섭에 임하고 있다는 소문이 육군 내부에 퍼지자 공공연하게 테러를 얘기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 (전쟁) 강행론과 연기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도조는 세 가지 안을 제시했다. 제1안은 〈전쟁을 하지 않고 와신상담한다〉, 제2안은 〈즉각 개전을 결의하고 작전 준비를 진행하여 전쟁으로 해결한다〉, 제3안은 〈전쟁 결의 아래 작전 준비와 외교를 병행하되 외교를 성사시키도록 힘쓴다〉." "마침내 11월 2일, 16시간에 걸친 연락회의 끝에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낸 도조는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일단 결론이 났다. 12월 1일까지 외교에 임한다. 물론 전쟁준비도 진행한다. 외교와 작전을 함께 진행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결론을 분석해보면 큰 틀은 9월 6일 어전회의 결정을 답습한 것에 불과했다. 세부사항에서만 일본 쪽이 양보했을 뿐이다. '이래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양보에 도조는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322-34)


"16일부터 5일간의 예정으로 제77차 임시제국회의가 시작되었다. 외교 연설에 나선 외무상 도고 시게노리는 일미교섭 타결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연설 구석구석에는 자제한 흔적이 분명해 보이는 내용이 있었는데, 의회 내의 분위기는 그것을 연약하다고 비방할 정도로 격렬했다. 만장일치로 가결된 도조 내각을 격려하는 〈국책 수행에 관한 결의안〉에는 〈세계의 동란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여러 적성 국가들은 제국의 진의를 곡해하고 있으며 그 언동은 더욱 격앙되고 있다. 은인자중하는 데에도 한도가 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결의안의 제안 설명에 나선 정우회 소속 시마다 도시오(1877~1947)는 일미 개전을 권유하는 듯한 어조로, 〈국민의 기분은 억눌릴 대로 억눌려 있으며, 그들은 어떻게든 이 중압에서 벗어나 태양을 보아야만 하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며 사자후를 토했다. 몇 번이나 박수가 쏟아졌다."(340-1)


"11월 26일, 노무라와 구루스는 미국 측이 제시한 〈평화해결요강〉, 이른바 '헐 노트'를 읽어가면서 온몸을 떨었다. 10개조 항목 모두 반년에 걸친 일미교섭의 경위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3항과 제4항이 그러했다. 〈(3)일본국 정부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모든 육해군 병력 및 경찰력을 철수할 것, (4) 미국 정부 및 일본 정부는 임시 수도를 충칭에 둔 중화민국 국민정부 이외에 중국에서 그 어떤 정부 또는 정권도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지하지 말 것.〉" "'헐 노트'를 본 도조의 감정은 상당히 격해졌다. 도조에게 가장 굴욕적인 것은 앞선 지도자들이 쌓아올린 빛나는 업적을 자신의 시대에 와해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자신의 시대에, 그것도 자신의 책임 아래 행하는 것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28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도 도고 외무상이 '헐 노트'의 전모를 소개하자 각료 전원이 격앙하여 개전도 부득이한 일이라고 말했다. 마치 이런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349-51)


"12월 6일, 선전조서宣戰詔書를 채택하고 귀가한 도조는 심야에 홀로 남아 통곡을 쏟아냈다. 공식 절차를 마친 이 날, 그는 새삼 무거운 책임에 공포감을 가졌던 것이다. 2천 6백 년의 국체를 등에 짊어진 무거운 책임, 그는 화가 나 미국이 증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정당한 말〉을 부당하게 우롱하는 미국을 증오하겠노라고 생각했다. 군인의 투쟁심을 지탱하는 것은 적에 대한 증오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인데, 지금 그의 투쟁심은 한 점에 집중되었고 곧 구심작용을 일으켜 충성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도조의 사고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대명강하大命降下에 즈음하여 백지환원의 조건이 떠올랐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그는 자성自省 능력을 잃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음의 빚이었다. 천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지난 50일, 지금부터 이어질 장기전쟁은 그에게 부채를 청산할 싸움이 될 터였다. 충실한 신봉자는 결국 무작위無作爲의 모반자가 될 터였다."(359-60)


제3장 패배의 궤적


"도조가 의회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그 협력자들이 장소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잘못된 동아해방사상을 고취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의 관심은 깊어졌다. 특히 인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도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공감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 유럽의 아시아 지뱅의 상징인 인도 해방이 지식인의 감각에 어필했던 것이다. 종합잡지에서도 급속히 대동아공영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38년 4월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문화인도 반강제적으로 징용되었는데, 그런 문화인이 남방전선에 종군하여 동아해방과 관련된 보고서를 보내왔다. 이 작품들의 모티프 중에서 인도가 상징적으로 언급된 것은 이런 필연성 때문이었다. 때마침 일본에 와 있던 인도의 독립운동가 라스 비하리 보스(1886~1945)도, 베를린에 망명해 있던 독립운동의 투사 수바스 찬드라 보스(1897~1945)도 그 호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일본과 인도가 제휴하여 독립을 위해 전진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385)


"적자의 대표로서 그는 천황에게 올리는 중간보고와 결과보고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각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리하여 도조 내각은 상주가 많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도조 자신도 '상주벽上奏癖'에 빠진 사람처럼 상주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상주 방법도 이전 내각과 달랐다. 도조 이전의 내각은 결론만을 상주했지만 도조 내각의 관료는 그 과정도 함께 상주했다. 물론 원칙적으로 천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잇달아 상주를 한 다음 천황의 표정을 살펴서 가부를 감지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다시 상주할 수가 있었다. 더욱이 도조는 짓궂게도 정서한 것을 천황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붉은 줄이 그어진 초고를 그대로 상주했다. 〈이렇게 중간보고를 하는 것이 상하가 진실로 하나라는 징표, 천황께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징표이다. 만약 정서한 것을 보여드린다면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391-2)


"도조는 1942년 4월에 치러질 선거에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에서 추천한 의원이 다수 당선될 것이며, 그들이 전쟁협력을 위해 손발이 되어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현역 장관이 내무상으로서 선거를 담당하는 것은 군기를 파괴하는 일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이 때문에 그는 표면에서 몸을 감추었다. 그 대신 도조의 뜻을 전해 들은 아베 노부유키가 총재로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를 움직여 퇴역한 군인을 입후보자로 내보냈다." "4월 30일, 이러한 간섭 속에서 치러진 익찬선거에서 추천 후보자 467명 중 381명이 당선됨으로써 당선율은 80퍼센트를 넘었다. … 도조를 등에 업은 익찬정치회는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거국적 정치력을 결집함으로써 대동아전쟁 완수에 매진할 것을 기약한다〉,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여 세계신질서 건설을 기약한다〉 등 4대 강령을 내걸었다." "도조는 의회를 마치 육군성 내부의 부과장회의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공갈을 일삼았다."(396-9)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유력자들은 도조에게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고노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를 찾아가 도조에 대한 생리적 반발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재계, 정계, 일반 사업계가 이 내각에 반대하고 있으며, 이 이상 도조 내각이 계속된다면 앞날을 낙관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도조를 비판하는 분위기는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참모본부의 젊은 참모들 역시 도조의 육군상 겸임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세계의 뉴스는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 이래 일본의 대본영 발표를 일소에 부쳤지만 도조와 그 주위에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하순에 열린 '결전의회'에서 도조는 일본이 진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육해군의 대립과 국민의 혼선, 특히 국민의 혼선이 걱정된다고 단언했다. 지도자의 책임을 전가하는 궤변이었다."(434-6)


"이제 전장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당시(1943년 7월) 선박의 할당량은 육군용 118만 3천 3백 톤, 해군용 167만 7천 1백 톤, 민수용 273만 9천 6백 톤이었다. 민수용은 국민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3백만 톤을 밑돌고 있었다. 그러나 육해군의 할당량은 종전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일본이 국민생활을 무시하고 물량소모전에 휘말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의 작전이 실패하고 전투에 질 때마다 민수용 할당량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생활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국무는 통수에 간섭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는 한, 통수의 요구에 응하여 선박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의 대립은 머잖아 숨길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터였다. 게다가 통수의 책임자는 전황이 호전되지 않자 내심 초조해하면서도 국무 쪽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통수권'이라는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상세한 전황은 통수 사항에 관련된 것이라 하여 설명하지 않았다."(459-60)


"1944년 1월 21일부터 시작된 의회에서 행한 도조의 시정연설은 전황에 대한 자화자찬이 사라지고 형용구形容句만이 개미행렬처럼 이어진다. 〈한 사람이 능히 열 사람을 죽이고야 마는 황군 장병 앞에 불령하게도 도전해오는 미영군의 앞길은 암담하기 짝이 없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만 최후의 패배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선 장병의 용전감투勇戰敢鬪에 호응하여 일억 국민은 더욱 분기해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대동아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씀드릴 것까지도 없이 전쟁은 필경 의지와 의지의 싸움입니다. [······] 최후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승리를 굳게 믿고 끝까지 투지를 잃지 않는 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최후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정말이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도조가 볼 때 제국에 패전이라는 말은 없었다. 의식과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목전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셈이다."(485-6)


"2월 18일 밤, 트럭 섬의 수비대가 궤멸했다는 보고가 도조에게 전해졌다. 도조가 크나큰 충격에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비서관들에게도 분명하게 보였다." "잠시 후 관저의 거실에 육군성 간부 세 사람이 모였다. 그들에게 도조의 결의가 전해졌고, 결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사전 공작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황의 약화는 통수의 실수 때문이고, 이래서는 정치가 통수에 휘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항공기와 선박 증산에 힘을 쏟아도 그것을 잇달아 잃어버리는 것은 왜인가. 이러한 사태에 이른 이상 국무와 통수의 합체로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헌법 공포 이래 일찍이 없었던 중대사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런 조치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인격을 육군상 도조 히데키와 참모총장 도조 히데키로 구분하여 성의껏 집무에 몰두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인격을 이분하는 것, 그것이 도조가 스스로를 납득시킨 논리였다."(487-9)


# 2월 21일, 참모총장 취임


"도조는 참모총장으로서 〈필리핀을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총결산 지역으로 삼아 육해군이 동시에 정면작전을 펼치고 또 항공기를 철저하게 집결·운용함으로써 공륙총합결전空陸總合決戰〉에 나선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다른 한편, 3월에서 4월에 걸쳐 육군은 제31군을 편성하여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지휘 아래 두고 캐롤라인, 마리아나 작전을 위해 대기하라고 명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군 총사령관이 국가존망의 위기가 임박했다는 내용의 격문을 뿌렸는데, 말 그대로 긴박한 상황에서 배수의 진을 친 작전이기도 했다. 도조가 분주했던 것은 이 작전에 열중했기 때문이 아니다. 군수상軍需相으로서 잇따른 항공기와 선박의 손실을 채워 넣기 위해 증산에도 책임감을 가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치 '도조 혼자 치르는 전쟁'이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전 계획, 항공기와 선박 생산, 국민 감시, 국내 전시체제 정비, 의회와의 절충 등 그의 일정은 분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501)


"마침내 반反도조 세력이 거국일치 내각을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기도를 통해 천황에게 상주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접한 도조는 그에 앞서 사의를 고하기로 결심했다. 7월 18일, 도조는 사의 절차를 밟아 행동을 개시했는데, 거기에는 물러나겠다는 뜻을 들은 천황이 〈좀더 정권의 자리에 앉아 전쟁완수에 노력하라〉며 도조의 사의 번복을 촉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감춰져 있었다." "도조가 궁중에서 돌아와 호시노에게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이때 천황은 특별한 언급 없이 〈그래?〉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맞다면 천황도 도조의 사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천황을 향한 도조의 호소는 실패하고 말았다." "오전 11시 40분, 도조는 궁궐에 들어가 각료 전원의 사표를 제출했다. 이렇게 도조 내각은 무너졌다. 전쟁에서 이겨 국민의 환호 속에서 이 자리를 떠나기를 바랐던 그의 취임 이래의 꿈은 이 순간 허망하게 사라졌다. 이것이 2년 10개월에 걸친 재임 기간의 결말이었다."(543-4)


제4장 세뇌된 복역자


"1945년이 밝았다. 설날 특집으로 꾸며진 신문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연두의 여론을 좇아 폐하께서 전선 장병에게 야전식량을 보내주시다〉, 〈오키나와를 맹공격한 특공대의 핵심 야마모토 비행대에 표창장을 수여해달라고 상주〉와 같은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천황의 자비, 천황을 위한 죽음을 맹세하는 충절이 강조되었다." "1월 18일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본토결전 즉응태세 확립과 전군의 특공대화化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을 향한 허풍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을 비롯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세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국체 2천 6백 년의 파괴자로서 굴욕을 감내하고 패전을 받아들일 것인가, 전황 악화를 뒤집을 무기를 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대중요법으로 위기를 넘어설 것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세 번째 길을 걷는 것이었고, 고이소는 이 길을 선택했다."(559-60)


"4월 5일 소련은 일소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통고해왔고, 이에 호응하여 미군의 공격은 한층 치열해졌다. 이날 고이소 내각은 국면을 타개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총사직했다." "4월 7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했는데, 이 내각은 성전을 완수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상 추대를 위한 증산회의에서 도조에게 야멸찬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 정치 쪽에 서면 그들은 '성전완수'라는, 가장 무난하고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할 따름이었다.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 이 국면에서는 '치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책을 공공연히 채택할 용기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 대신 도조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함으로써 그들은 어렵사리 자기를 만족시켰다. 그것은 육군에 대한 원한을 도조라는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565-8)


"(종전 후) 연합군은 요코하마에 임시청사를 두고 일본 통치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일본 측 공사 스즈키 다다카쓰(1895~1987)의 저서에 따르면 총사령부는 분명히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범 문제를 중시하고 있었다. 미국 국내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필요한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도조가 자결을 각오한 것 같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소문은 육군성에까지 전해졌다. 물론 이 소문에는 도조 정도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결해야 마땅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환영하는 목소리마저 있었다. 그러나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이 소문을 불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천황을 면책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0일, 시모무라 사다무(1887~1968) 육군상이 관저 귀빈실로 도조를 불러 자결할 생각을 그만두라고 설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589-91)


"9월 11일, 미군 헌병대가 도조를 찾아왔다. 나중에 도조가 스가모구치소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소파에 앉아 왼손에 권총을 쥐고 동그라미 표시를 한 곳을 셔츠 사이로 확인한 다음 고가가 남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왼손잡이인데다 발사 순간에 권총이 위로 들리는 바람에 탄환은 심장을 빗겨갔다." "다음날부터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도조의 자결 미수 소식을 냉담한 어조로 전했다. 여기에는 역시 이 무렵에 자살한 스기야마 겐 부부의 훌륭한 할복자살과 비교할 때 〈무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없다〉거나 〈연극일 것이다〉라는 냉소, 무시, 조롱이 담겨 있었다. 도조의 주변에 있었던 자들은 도조가 평소에 〈물러날 때와 죽을 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어왔었다. 그들은 도조가 말만 그럴싸하게 했을 뿐 실제로는 의지가 약해 철저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행동의 규범을 갖지 못한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실태失態로 간주했다."(595-9)


"1946년 2월, 검사 존 피헤리는 도조에게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여 질문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기습공격 책임을 도조에게 떠안기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도조는 12월 8일자 일기에 쓴 '자계自戒'를 지켰다. 그는 천황의 권한을 묻는 질문이 나오면 완강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체념한 상태였으며, 종교서를 읽으면서부터 머릿속에 '다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대답하는 것 그 자체에 새삼 도취되었고, 그것을 '다른 세계'와 현실을 연결하는 가교로 삼았다." "만약 구치소가 아니라 자택에 있었다면 도조는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946년 봄 도조에 대한 증오는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상은 이렇다〉는 그때까지 감춰져 있던 전쟁 전과 전시 하의 사실을 반은 과장되게 전하면서, 군인이 악인이며 그 정점에 도조가 있다는 식으로 방송했다."(610-4)


"개인 변호가 이타가키에서 가야로 넘어갈 무렵, 수석검사 키난이 미국인 기자에게 천황에게는 전쟁 책임이 없다고 발언했다. 이 뉴스가 세계 각국에 타전되었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키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황 및 주요 실업가를 전범으로 간주하여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장기간 조사할 결과 이런 의견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물론 이것은 키난의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법정이 시작된 후부터 키난은 자주 미국을 드나들며 본국 정부와 협의를 해오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재판과 도쿄재판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과 미국 정부가 태평양전쟁 후 미소 냉전 구도 하에서 일본을 우산 아래 둘 것을 염두에 둔 협의였다. 미국 정부는 천황을 법정에 끌어들이거나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일본 국민을 자극할 것이라는 방침을 맥아더에게 전했고, 키난에게도 그런 방향에서 법정을 이끌 것을 요청했다. 키난은 그 방침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였다."(633-4)


"도조 히데키를 포함해 교수형을 언도받은 A급 전범 7명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3일, 연합군총사령부는 A급 전범용의자 19명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군사재판을 중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다와 혼다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17명이 스가모구치소에서 출소했다. 그들의 출소는 그렇게 놀라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들의 사회복귀가 앞서 7명의 처형과 교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도 일곱 명의 처형 소식을 전했는데, 그들의 죽음으로 군국주의가 일소되었다는 식의 보도였다. 알리바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증오와 모멸에 가득 차 일곱 명을 비방하는 무절조無節操한 논의도 있었다. 일곱 명을 비방하는 것이 모든 것을 면죄하는 듯한 의도적 논조는 무반성적이고 무자각적인 국민심리를 배양할 따름이었다. 머잖아 일곱 명 중에서 도조만이 '보통명사'로 전화轉化하는 것은 그런 배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681-2)


# 1978년 가을, 7명 모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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