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덴 대공세 1944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막
앤터니 비버 지음, 이광준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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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독일군의 전선은 붕괴 직전이었지만, 연합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로 진격을 늦춰야 했다. 프랑스의 철로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기에 매일 1만 톤의 연료, 식량, 탄약을 미 육군의 "레드 불 익스프레스" 특별 보급대의 트럭으로 노르망디에서 실어 날라야 했다. 9월 초에 확보한 전선까지의 거리는 셰르부르에서 500킬로미터에 달했고 왕복 3일이나 걸렸다. 파리 하나만 탈환하는 데도 하루 1500톤의 물자가 필요했다." "엄청난 규모의 물자 수송 과정에서 9000대의 트럭이 폐차되었다. 특별 보급대는 프랑스를 가로질러 최일선까지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9병력수송사령부는 수송기만이 아니라 폭격기까지 동원해 제리캔(기름통)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항공기들은 3갤런의 연료를 사용해야 일선에 겨우 2갤런을 갖다줄 수 있었다. 급박한 물자 수송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트베르펜 항구를 확보해야 함에도, 몽고메리는 라인강을 건너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31-2)


"1944년 9월 16일, 히틀러는 볼프샨체에서 오전 상황 회의가 끝난 후 별도의 회의를 소집해 측근들을 놀라게 했다.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일기에 따르면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서부 전선에 중화기와 탄약 그리고 전차가 부족하다고 말하려고 하자 〈총통이 가로막았다. 총통은 '안트베르펜 항구를 최종 목표로 하는 반격을 아르덴에서 실시한다. (···) 새로운 국민척탄병사단과 새로 창설한 기갑사단, 동부 전선에서 온 기갑사단을 합쳐서 총 30개 사단으로 공격군을 편성한다. 영국군과 미군의 틈새를 돌파하여 또 한번의 됭케르크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러시아와의 동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구데리안은 동부 전선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반대 의견을 냈다. 요들은 제공권을 연합군이 갖고 있기에, 네덜란드와 덴마크 그리고 북부 독일에 낙하산부대가 침투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1월 1일까지 1500대의 항공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42)


"히틀러는 결코 협상은 없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괴링은 총통을 설득하여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의 동맹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곧 와해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동부와 서부, 양 전선에서 소모적인 방어전을 펼치느니, 차라리 마지막 대공세를 취하는 것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요들은 〈방어전을 펼치면 패배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차라리 모든 것을 걸고 절망적인 도박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32개 사단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막강한 힘에 눌렸다. 히틀러는 두 개의 기갑군으로 안트베르펜까지 밀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부의 연합군을 분리시켜서 캐나다를 전쟁에서 발을 빼게 하고, 영국군까지도 〈제2의 됭케르크〉로 밀어 넣어 루르 지방의 군수 산업을 위협하려는 연합군의 게획이 좌절되리라 믿었다."(104-5)


"히틀러가 예상했던 연합군 내부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 육군 참모총장 앨런 브룩 원수와 몽고메리는 연합군의 진격 속도가 더딘 것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브룩은 몽고메리가 이 문제에 불평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정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군대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사이에, 서북 유럽에서의 전쟁은 완전히 미국의 독무대였다. 그래서 지상군에 단일 지휘관이 있어야 한다면, 몽고메리가 아닌 브래들리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몽고메리가 〈아르덴 북쪽에서는 자신이 지휘권을 맡아야 하고, 남쪽의 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계속 우길 때에도 브래들리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브래들리는 나중에 아이젠하워에게 만약 제12집단군이 몽고메리의 지휘를 받게 된다면, 자신은 지휘관으로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125-8)


"아르덴 대공세를 둘러싼 논란은 연합군이 이 공세를 눈치 챌 것인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러 첩보를 종합해보면, 독일군의 의도를 눈치 챌 만한 정보가 흩어져 있었는데도, 대개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듯이, 고급 장교들이 자신의 편견에 부합하지 않는 첩보들을 흘려들은 것이 문제였다." "연합군은 붉은 군대의 동계 공세에 대비해서 전력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에 독일이 감히 전략적인 대공세를 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절대로 이런 도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룬트슈테트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연합군은 히틀러가 군권을 얼마나 강하게 장악하고 있는지 과소평가했다. 고급 장교들은 항상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게도 만들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독일이 연료와 탄약, 그리고 병력 부족으로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129-31)


"12월 16일 오전 5시 20분, '공격 개시' 10분 전에 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이 포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미군은 축축한 눈의 냉기를 피해 16시간이나 되는 밤 동안 농가, 나뭇꾼들의 오두막, 헛간, 외양간 등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지평선 위로, 여름날 번쩍이는 번개 같은 섬광을 본 보초는 동료들을 깨우기 위해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와 터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침낭에서 나온 병사들은 장비와 철모, 무기를 든 채 상태에 빠졌다." "히틀러는 예전처럼 보병사단이 앞장서서 전선을 돌파하게 하고 그다음에 값비싼 기갑사단이 뫼즈강의 다리를 향해 진격하게 했다. 아들러호르스트에 도착한 첫 번째 보고는 가히 용기백배할 만했다. 요들은 히틀러에게 〈기습 공격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기습 공격은 성공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이 기습 공격이 적군을 거의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였다."(149-50)


"바스토뉴에 있는 미들턴 장군의 제8군단 사령부는 독일군의 공세 규모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슈파에 있던 미 제1군의 호지스 장군은 독일군이 루르 댐으로 향하는 제5군단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국지적인 양동 작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추측했다. 호지스 장군은 미군이 '폭명탄buzz-bombs'이라 부르는 V-1비행폭탄이 머리 위로 계속 날아가 리에주를 폭격하는데도, 여전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그날 저녁 V-1비행폭탄이 안트베르펜 극장에 명중하는 바람에 300명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죽고, 200명이 다쳤으며,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로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호지스 장군은 제2보병사단의 북상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전 9시 15분, 룩셈부르크의 제12집단군 사령부 브리핑에서는 G-3 작전 참모조차, 아르덴에서는 아무 특이 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 시간 브래들리 장군은 아이젠하워와 병력 보충을 의논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향하는 중이었다."(160)


"독일군이 내린 명령을 감청한 뒤에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깨달았다. 아이젠하워는 모든 예비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베델 스미스, 스트롱, 영국군 작전 참모본부의 존 화이틀리 소장에게 세부 작전 계획의 준비를 명령했다. 세 사람은 참모장실 바닥에 대형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섰다. 스트롱 장군이 독일군의 의장용 검으로 바스토뉴를 가리켰다. 이 마을이 아르덴의 중심부였다. 뫼즈 강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모두 이곳을 관통하기에 독일군의 뫼즈 강 진격을 막을 요충지라는 점에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네덜란드 작전(마켓가든 작전을 가리킴)을 끝내고 랭스에서 휴식 중인 미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을 즉시 예비전력으로 편성했다. 이 병력이 동쪽에서 오는 만토이펠의 기갑군 선봉대보다 바스토뉴에 먼저 도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스트롱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자 출동 명령이 부대에 즉각 떨어졌다."(179-80)


"제101공수사단은 아직 병력이 모자랐고, 장비도 보충되지 않았다. 3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네덜란드 전투에서 잃었지만 무르멜롱르그랑에 있는 동안 충원된 보충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규율 위반, 주로 싸움이나 부사관을 때려서 영창에 있던 병사들까지 중대로 돌려보내야 했다. 장교들은 군대 병원에 가서 거의 치료가 끝난 병사들에게 스스로 퇴원할 것을 요청했다. 반면 정신적으로 심하게 불안정한 병사들은 그대로 놔두라는 지휘관들도 있었다. 지난 열흘간 전투피로증으로 자살한 병사가 여러 명 있었다. 심지어, 사단 참모장도 45구경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제82공수사단은 네덜란드 전투에서 손실을 본 후, 보충병이나 장비를 보충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제101공수사단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특히 겨울철 방한복이 그러했다. 밤이 되면 병사들이 모자란 것을 얻거나 훔치러 다니자 병참 장교들이 그동안 모아놓았던 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195-6)


"한편 독일의 기갑교도사단 그리고 제26국민척탄병사단이 북쪽 방어선을 뚫고 바스토뉴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제47기갑군단은 교통 체증 때문에 바스토뉴로의 진격을 서두를 수 없게 되자 단단히 화가 났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 일정표를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어버린 쪽은 미 제28보병사단의 용감한 중대들이었다.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남북으로 뻗은 능선에 낸 도로를 따라 하이너샤이트, 마르나흐, 호싱겐 같은 마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도로의 교차로를 방어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인츠 코코트 소장은 나중에 〈호싱겐에서의 방어는 제26국민척탄병사단 전체의 진격을 지체시켰다. 결과적으로 기갑교도사단은 하루 반나절이나 늦어졌다〉고 인정했다. 기갑교도사단장도 호싱겐에서 12월 18일 아침까지 버텨준 K중대의 방어 때문에 결국 〈바스토뉴 지역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고백했다. 이 점이 촌각을 다투었던 바스토뉴 전투에서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210)


"12월 23일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미군 지휘관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러시아 고기압대가 동쪽에서 밀려와 하늘은 수정처럼 맑아졌지만 기온은 더 떨어졌다. 〈시계, 무한대!〉 항공 관제관도 들떠 있었다." "룩셈부르크 시민들처럼 브래들리의 참모들도 거리로 나와 실눈을 뜨고 눈부신 하늘 위에 떠 있는 연합군 중폭격기들의 비행운을 바라보았다. 폭격기들은 트리어와 그곳의 보급품 야적장을 폭격하러 가는 중이었다. 폭격기를 올려다보는 참호 속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투폭격기 편대가 세찬 강물에 비친 생선비늘마냥 반짝이며 머리 위를 날아갔다. 연합군의 항공 지원은 뜻밖의 이점까지 가져다주었다. 전투폭격기가 주변에 있으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까 겁을 먹은 독일군 포병들이 포격을 할 수 없었다. 〈적기가 나타나자마자 아군 포격이 50~60퍼센트 줄었습니다.〉 모델 원수의 포병 사령관이 보고했다."(303-4)


"12월 24일 일요일, 푸른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이 〈서부 개척 시대의 마차 대열처럼 자기 위치를 굳건히 지켰기에〉 브래들리의 전술 사령부에서는 바스토뉴 방어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참호 속의 병사들을 덜덜 떨게 만든 혹한에도 불구하고 바스토뉴 방어선의 병사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낙하산병들이나 제10기갑사단 병사들은 패튼 장군의 병력에 의해서 곧 포위망이 풀릴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자신들이 구출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쾌청해진 날씨와 함께, 병사들은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온갖 종류의 연합군 항공기들을 올려다보았다. 전투기들이 독일군 차량 대열에 폭격하는 소리,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는 이 기간 독일군의 집결지를 폭격하여 적의 공세를 분쇄하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존재임을 입증했다. 바스토뉴에 있는 관제사들이 폭격기들을 표적으로 유도했다."(323-5)


"독일 공군이 마그네슘 신호탄을 바스토뉴 상공에 떨어뜨리면서 짧았던 크리스마스 밤의 평화는 끝났다. 몇 시간 후 재개된 공격은 독일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제15기갑척탄병사단은 전투를 계속할 만한 전차가 더 이상 한 대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어두워진 후, 정찰대대 소속 잔여 구축전자의 지원 아래 절망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502낙하산보병연대의 바주카포 팀이 독일 지휘관 차량을 포함한 절반 이상을 근거리에서 기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동남쪽에서는 기갑교도사단의 제901기갑척탄병연대 돌격대가 공격에 나섰다가 고립되어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다. 이 연대는 남은 예비 병력이 없어서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용 병력이 남김없이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코코트는 더 이상의 공격을 중단했다." "코코트는 〈대공세는 엄청난 희생만 초래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마을 몇 개를 점령한 것으로 끝났다〉라고 기록했다."(343-7)


"만헤이와 그랑메닐 근처의 전투에서 아직도 미 제1군의 근심덩어리로 남아 있는 독일 제2친위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를 제외한 다른 기갑사단들은 독일 전선 돌출부인 벌지의 서북쪽 측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독일 제116기갑사단은 마르슈 동쪽을 뚫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덴부르크 소장이 기록한 대로 〈이 전투에 투입된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거의 전멸했고〉 제60기갑척탄병연대의 바이어 전투단은 고립되었다. 소수의 병력과 차량만이 겨우 탈출했다. 그날 밤,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히틀러에게 대공세가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B집단군도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후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히틀러는 이 건의를 묵살하면서 바스토뉴를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맑은 날씨가 시작되자 미 전투폭격기들이 생비트를 초토화했다. 일명 '도시 전체를 길거리에 나앉히기' 전략은 도로를 온통 파편투성이로 만들어서 독일군 수송대가 도로를 아예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생각이었다."(351-3)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가 남긴 망령인, 괴링의 마지막 도박은 '보덴플라테 작전'이라고 불렸다. 날 수 있는 모든 항공기를 총동원해 연합군의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에서 모두 파괴한다는 작전이었다. 비록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해 전날 오후 작전 회의에서 브리핑을 받은 장교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날 조종사들은 일절 음주를 금하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의 지상 공격인 반자이 돌격을 연상케 하는 이튿날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모두 회의적이었다." "작전은 하다못해 부분적인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독일 공군은 전투기 271대가 파괴되었고 65대가 손상을 입었다. 조종사들의 피해는 정말 처참했다. 모두 143명의 조종사가 죽거나 실종되었고 7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1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치에는 3명의 비행단장, 5명의 비행전대장, 14명의 비행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보충할 인력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389-93)


"1월 12일 금요일, 보덴플라테 작전의 실패를 용서받은 괴링이 쉰 두 번째 생일을 축하받기 위해 히틀러에게 불려갔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날은 다른 이유로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5시, 이반 코네프 원수가 지휘하고 있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엄청난 선제 포격에 뒤이어 비스와 강 서쪽의 산도미에서 독일군 교두보를 공격했다. 소련군의 포격은 기갑척탄병 장교가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소련의 전차부대는 〈가자! 파시스트의 소굴로!〉 〈복수! 그리고 독일 놈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을 전차 포탑에 써놓았다. 이튿날에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바르샤바 남쪽에서 공격했다. 또 다른 두 전선군은 동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구데리안은 결코 상황을 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산드라처럼 그의 경고는 무시당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 전역에 걸쳐 670만 명을 동원했다."(430-1)


"1월 15일, 히틀러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주코프와 코네프의 전차군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의 방어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슐레지엔 산업 지역은 풍전등화였다. 이후, 총통이 베를린 밖으로 나간 것은 오데르 전투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날 해 질 무렵 야간 전투를 대비해 강화된 미 제2기갑사단의 2개 전투부대가 우팔리즈 전방 1킬로미터 남짓한 곳까지 진격했다. 그 후 적정을 살피려고 정찰대를 내보냈지만 새벽 1시쯤 시내로 들어간 정찰대는 독일군의 낌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찰대는 우르트 강 동쪽으로도 갔지만 적은 그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르덴 대공세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영국의 한 연대가 독일군은 이미 훈장마저 바닥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훈장 대신 룬트슈테트 원수의 서명이 된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사단에서는 이런 식의 포상이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군단 사령부로 보고하는 내용이 감청되었다."(438)


"아르덴 전투는 미군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영국에게는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몽고메리의 기자회견이나 런던 언론들의 몽고메리 띄우기는 미국 내에서 특히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장서들 사이에서 영국에 대한 경계심만 한층 부채질했다. 그러한 야단법석은 알렉산더 원수가 테더 공군 사령관의 후임이 되어 연합군 부사령관이 되기를 바랐던 처칠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그렇게 되면 영국이 〈지상 작전의 통제권을 갖게 되는 것〉이었기에 마셜은 단호히 반대했다. 처칠도 깨달았겠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라인 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는 동안 몽고메리는 곁다리로 밀려났다. 영국의 의견은 대부분 묵살되었다. 연합군 위원회에서의 영향력 또한 거의 사라졌다. 11년 뒤에 있을 수에즈 위기에서 영국의 배신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분노는 상당 부분 1945년 1월 그가 겪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그 원한은 아이젠하워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않았다.)"(451)


"볼프샨체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지 정확히 1년 뒤인 1945년 7월 20일, 카이텔 원수와 요들 상급대장이 아르덴 대공세와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합동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예비 병력을 서부 전선이 아닌 동부 전선에 투입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후세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 〈아르덴 대공세로 전쟁을 연장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쟁범죄인지는 연합군 법정이 판단하라. 어떻게 판단하든 우리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5, 제6기갑군을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한 결정이, 결국 1월 12일 비스와 강 교두보에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비스와 강에서 오데르 강을 향한 소련군의 진격이 성공적이었던 비결은 히틀러가 아르덴 대공세를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했다."(449)


"히틀러는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독일 장군들은 아르덴 대공세 개시 1주일 만이 이미 실패했다고 깨달았다. 기습은 일단 성공했지만, 정작 중요한 미군의 전의 상실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독일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는 동부 전선의 잔인한 전투 행테를 서부 전선으로 전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나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략을 보더라도 전면전의 충격이 처음 예상처럼 국가 전체의 공포나 붕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포위된 상태에서 굴복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덤비는 처절한 저항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독일군이 제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호각을 불면서 공격을 해도, 고립된 중대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끝까지 중요한 마을들을 지켜냈다. 이러한 희생이 증원군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나아가서는 히틀러의 야욕을 무너뜨리는 디딤돌이 되었다."(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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