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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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918~1941


"적백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된 군사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가 발전시킨 연속적인 작전에 관한 전략적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토대는 1920년 폴란드를 상대했던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1918년 프랑스를 상대했던 독일군의 공격 실패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빠르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까지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자, 보다 큰 규모인 종심 작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종심 작전의 핵심은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방어선을 최대한 종심에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적이 적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재구축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28-9)


"1930년 중반의 소련은 기계화 부대의 장비 생산, 계획, 야전 배치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붉은 군대가 독일에 비해 기계화 전쟁의 이론적 개념과 실질적 경험 모두에서 상당히 앞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1939년에 이르자, 그동안 소련군이 누려 왔던 장점들은 사라졌고, 붉은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변화를 유발한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스탈린이 소련군 지도부에 가한 대숙청이었다." "군 숙청에서 특이했던 것은 과거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언제나 행해졌던 공개 인민재판도 없이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6월 12일,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이자 2개 군관구 지휘관인 투하쳅스키와 그의 동료 장교들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4년간, 독일의 침공이 임박할 때까지 소련 장교들은 걸핏하면 사라져 버렸다. 대략 75,000~80,000명에 이르는 장교들 가운데 적어도 30,000명이 투옥되거나 체포되었다."(32-4)


"제1차 핀란드 전쟁(1939~1940)으로 인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축출되었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더욱 고립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관계에 핀란드 전쟁이 끼친 영향은 양측 모두에서 심대했다. 실수투성이의 과감하지 못한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통해서 핀란드를 도와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때늦은 행동은 히틀러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불편할 정도로 지척인 곳에 독일군이 배치되었음을 의미했다." "1940년 7월 하순에 소련이 루마니아로부터 오늘날 몰도바인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 지방을 강점하면서 (독일 정부의 불편한 감정 역시) 더욱 심해졌다. 소련이 취한 이 마지막 행동은 루마니아의 독일에 대한 석유 공급에 위협적으로 비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불안한 평화는 급속히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49-50)


"1941년 4월까지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소련 정보 부서에서는 독일의 공격 준비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독일의 공격 징후를 보여주는 증거가 증가하였음에도, 스탈린과 소련 외교관들은 최고의 평화 시기를 구가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평화적인 정치 행보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에 스탈린은 〈특별한 전쟁 위협에 대한〉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 특별한 대비 태세는 전쟁이 임박해서야 발동할 계획이었다. 1941년 봄이 분위기에서 이 대비 태세는 외교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도, 부분적인 동원령이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심중에 동시에 존재했던, 즉 1941년까지 유지되었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전쟁 발발 시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한 방어 조치를 취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괴리가 혼란을 초래했고, 1941년 붉은 군대가 겪을 파멸적인 패배의 길을 마련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53-4)


"1941년에 스탈린이 걱정하던 상황 중 하나는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보다 독일 측 영토로 밀려 들어간 돌출부에 대한 점령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백 내전 당시 매우 효과를 보았던 유동적인 방어를 포기하고, 국경 전면을 따라 경직되고 연속적인 방어를 계획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9년에 점령한 지역에 20개의 요새 구역을 설치하기 위해 구(舊) 폴란드-소련 국경의 전쟁 전 방어 계획 중 일부를 포기했고, 일부 지역에서 지뢰, 가시철조망 및 야포를 제거했다. 이곳들은 특별 군관구로 명명되었다. 1941년 봄의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새로운 방어선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전방의 소총병 전력은 전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독일 측을 자극하는 어떠한 행위도 피하기 위해 일선 국경은 내무 인민 위원회 보안 병력이 매우 낮은 밀도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 일선 방어선은 6월 22일에 병력을 증강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62)


"어떻게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 보면,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충분히 많았다.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일견 파멸적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보편적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했던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어쨌든 스탈린이 히틀러를 오판한 최초의 유럽 지도자는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서부에서 영국을 패배시키기 전에는 동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어쩌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72-3)


독소 전쟁 제1기 1941.6~1942.11


"1941년 6월 22일, 독일 공군은 해뜨기 전에 폭격기 500대, 급강하 폭격기 270대, 전투기 480대를 동원해 전방 지역의 소련 비행장 66곳을 공격했다. 붉은 군대 공군은 개전 첫날 오전에만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그 후 수일간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붉은 군대의 조직과 지휘 체계 모두 순식간에 붕괴돼 버렸다. 전쟁 첫날,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인 볼딘 중장이 수많은 독일 전투기들을 뚫고 바아위스토크 외곽에 위치한 제10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사령관 골루베프 중장은 두절된 유선 전화와 전파 방해로 마비된 무전망으로 반격 명령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6월 23일, 골루베프 중장이 전쟁 이전에 수립된 작전 계획을 따라 얼마 남지 않은 예하 부대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제10군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완전히 전멸했다."(79-81)


"공황 상태에 빠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6월 26일에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독일 제3기갑집단의) 1,000대 가량의 전차가 민스크를 북서쪽에서부터 포위하고 있다······.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제20기계화군단과 제4공수군단이 슬루츠크에서 시도한 최후의 반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30일,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은 민스크 서부에서 소련 제10군, 제3군, 제13군 주력을 가두는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로써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으며, 이어 이루어진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의 처형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민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417,000명의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경우 포위망을 빈틈없이 구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소련군이 중장비를 포기하고 독일군 포위망의 허술한 부분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83-4)


"전쟁 초기에 소련에는 강력한 중앙 통제 조직이 없었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져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일 전황 보고 자리에도 불참했다. 침공 당일인 6월 22일 오후 늦게야 수상 겸 외무 인민 위원 몰로토프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독일의 침공을 발표했으나, 그 또한 전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7월 3일이 돼서야 스탈린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고, 국민들에게 게릴라 저항과 침략자들에게 유용한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철수시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다." "게다가 전쟁 초반의 패배로 사단, 군단, 야전군의 평균 전력이 크게 감소해 더 이상 복잡한 지휘 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지휘·통제 능력의 부족과 전차와 대전차포 같은 특수한 장비의 부족은 붉은 군대의 조직 체계를 극히 단순화하도록 만들었다."(95-7)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인민 위원회는 수개월 만에 집단, 혹은 〈제파(梯波)〉 단위로 새로운 군을 편성하는 데 돌입했다." "1941년 12월 1일에 소련의 동원 체제는 동부에서 서부로 배치한 97개 사단들 외에도 194개 사단과 84개 독립 여단을 신규 편성할 수 있었다. 신규 편성된 사단 중 10개 사단은 〈인민 지원 사단〉 또는 도시 노동자로 편성한 사단으로, 대개의 경우 군인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군사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독일은 전쟁 발발 전 소련군의 전력을 약 300개 사단으로 추산했으나, 12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현역 사단은 그 두 배에 달했다. 초기 전투에서 소련은 100개 이상의 사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1년 가을과 겨울까지도 소련군이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인 것은 그들이 너무 황급히 편성됐고, 지휘관과 부대 모두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원 사단들이 이렇게 싸운 결과 독일측은 적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101-4)


"1941년 7월 말, 독일군은 그들이 감행한 작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거둔 눈부신 승리 덕분에 빈약한 보급 지원 능력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월 30일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 집단군에게 휴식과 보충을 위해 사실상 진격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옐냐에 있는 데스나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던 제2기갑집단은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부터 7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빈약한 도로망은 차량의 기동에 장애를 초래했으며, 결국 도보로 행군해 온 후속 보병들만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전차 부대의 진격을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보병들은 군화가 부족했고, 참모장교들은 겨울 피복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3개 집단군은 6주 간의 전투에서 179,500명의 인명 손실을 냈으나, 보충된 인원은 47,000명에 불과했다. 독일 국방군에게 남아돌았던 것은 다음 작전의 목표뿐이었다."(108-9)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은 북쪽으로는 칼리닌, 남쪽으로는 칼루가를 탈환하고, 일부는 이미 포위된 일련의 독일군 방어 거점들을 공격했다." "이때 히틀러는 그 유명한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2년 겨울에 이것이 성공하자, 히틀러는 전쟁 기간 내내 무조건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몰랐던 것은 스탈린이 지나치게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1941~1942년 중부 집단군에만 전력을 집중했다면 중부 집단군을 격파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1942년 1월, 스탈린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었으며 낙관적이었다. 11월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2월의 공세로 분위기가 반전되자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반격 목표를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의 상당수를 포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주코프의 생각이 옳았다. 소련군은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야심찬 포위 작전을 감당할 병력과 능력이 없었다."(129-31)


"80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 전체에서 전투가 격화되면서, 전투는 개별 부대의 영웅적 활약과 혼란스러운 기동 전투, 그리고 양측에 단순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소련군은 보통 농촌 지역을 장악했고, 독일군은 주요 거점 도시들과 마을, 교통선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1942년 4월 모스크바 반격 작전이 끝날 때까지도 전쟁 결과를 낙관하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잘못된 결론을 얻었으며,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 능력 밖의 목표를 노렸기 때문에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홀름, 데먄스크, 뱌지마 남쪽에 포위된 독일군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중 보급 능력은 히틀러가 공군의 보급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은 1년 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133-6)


"독일군은 (소련의 겨울과 모스크바의 반격에 희생양이 되기 전에) 병력과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군대의 사기였다. 전쟁 첫해에 살아남은 고참병들은 자신들이 낯선 환경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처절한 사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인간적인 적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탈영이나 항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동기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으려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을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초급 장교와 사병들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익숙해지면서 더욱더 슬라브계 〈열등 인종Untermenschen〉들에게 잔학 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독소 전쟁을 통해 소련이 이데올로기보다 애국심을 강조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소련식의 정치 및 사상 교육을 강화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145)


"1942년 4월 5일자 총통 지령 41호에서 히틀러는 육군의 작전 계획, 즉 〈청색 작전Operation Blau〉에 자신의 계획을 일부 첨가했다. 1942년 공세의 주목표는 캅카스 지역이고, 두 번째 목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독일군의 목표를 나누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스탈린을 돕는 꼴이 되었다." "독일 야전 지휘관들은 철도망이 복구될 때까지 연료와 수송 수단의 부족에 시달렸다. 8월에 A집단군이 마이코프의 소규모 유전 지대를 점령했을 때, 이미 이곳은 소련군이 체계적으로 모든 유정과 정유 시설을 파괴하고 철수한 뒤였다. 독일군이 철도 종점으로부터 더 멀리 진격할수록 독일군의 전력은 점점 더 소모되어 갔고, 동시에 광대한 영역에 넓게 퍼지게 되었다. 1941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고, 진격을 거듭할수록 목표는 불확실해졌다. 돈 강 동쪽에는 특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자연히 스탈린그라드에 주목하게 되었다."(151, 162-3)


"스탈린그라드의 소련 방어군은 놀라운 인내력을 보이며, 막대한 사상자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싸웠다. 전투 초기에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공군과 화력의 우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추이코프는 최대한 독일군에 근접해서, 독일 지휘관들이 아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해 항공 지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몇 주에 걸쳐 붉은 군대의 소규모 보병과 전투 공병들이 독일군에 근접해 싸웠는데, 보통 도로 하나, 심지어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대치했다. 수색과 매복을 거듭하는 동안 전투는 미터 단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히틀러는 11월 2일 완강히 저항하는 방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시가전에 투입되지 않은 사단의 전투 공병 대대들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측은 몇 블록 안 되는 폐허 더미를 둘러싸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으나, 이때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65-6)


"수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소련은 국민과 그 군대의 희생에 힘입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희생이 뒤를 이었다. 1942년 말이 되자 인명손실은 무려 11,000,000명에 달했다. 의도된 것이건 우연이건 간에 이런 희생은 성과가 있었다. 1942년 말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싸우는 법을 체득했고 종종 훌륭하게 싸웠다. 이들의 희생은 스탈린이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자들이 사용할 무기를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도록 산업 동원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육군의 예리한 검인 〈전격전〉은 이미 1941년 모스크바의 문턱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그 명성에 상처를 입었고, 1943년 쿠르스크에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살아남은 각급 제대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종종 그들의 〈독일 스승들〉만큼 뛰어난 살인 기술을 터득했다. 이렇게 독일은 점차 소련이 결정하는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167-8)


독소 전쟁 제2기 1942.11~1943.12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내내 바실렙스키는 N. I. 보코프가 이끄는 소규모의 참모장교단을 유지하면서, 동부 전선 중앙부와 상단에서 동시에 시행되는 야심찬 동계 반격을 구상했다. 9월 13일에 보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최돌출부 양 측면에 있는 약체 루마니아군 전선을 공격해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차단한다는 요지의 브리핑을 스탈린에게 올렸다." "주요 공세 2개의 첫 번째는 작전명 〈우란Uran(천왕성)〉으로, 스탈린그라드 일대의 추축군 격멸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 토성 작전으로 연결하여, 소련 남부 전선 전체의 독일 A 집단군과 B 집단군을 포함한 추축군 모두를 사정권에 두었다. 동시에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주코프의 지도하에 공세에 나서, 르제프 돌출부에 있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고 남부 집단군으로부터 병력을 끌어와 독일군의 중부 전선과 남부 전선에 공히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계획이었다."(172)


"북쪽에서도 스타브카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위협적인 르제프 돌출부 일대의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주코프가 입안·감독하고 작전명 〈마르스Mars(화성)〉라고 명명된 이 공세는 M. A. 푸르카예프 대장의 칼리닌 전선군과 코네프 상장의 서부 전선군이 르제프 돌출부의 양 측면을 강타하기로 되어 있었다. 목표는 독일 제9군을 돌출부에서 섬멸하고 뒤이어 스몰렌스크로 쇄도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 공세는 남부 전선의 작전에 도움을 줄 목적의 양동 공격이었다는 왜곡된 설명이 붙여졌지만, 규모나 작전 범위, 전투의 치열함으로 볼 때 이 공세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패퇴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고, 작전 초기에는 천왕성 작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화성 공세에 나선 소련군을 완벽하게 물리쳤으며, 중부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야심찬 대규모 공세를 꺾어 놓았고, 주코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180-2)


# 스타브카Stavka : 소련 국방 인민 위원회(GKO) 산하에 조직된, 독소 전쟁 당시 최고 사령부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적이라는 명성 이상을 상실했다.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명령한 데다 악천후 속에서 두터운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군은 극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부상병만이 돌아오는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6군의 전멸 양상은 이전에 있었던 소련군의 포위 소멸 때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소련군의 경우는 충분한 기간 요원과 지휘관을 탈출시켜 새롭게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독일 제6군은 완전히 파멸되었으며, 147,000명의 전사자와 91,0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500,000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 2개월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소련군의 차후 동계 공세는 산술적인 영향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1942년 겨울도 1941년과 같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즉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여 아슬아슬한 외줄에 매달려 전략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침으로써 전선이 과도하게 확장된 것이다."(186-7)


"아마도 1942~1943년에 서방 연합군이 소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야는 항공전이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2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400대의 독일 공군기가 러시아 전선에서 지중해로 이동했다. 실제로 지중해 전역에서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의 공군기 손실은 2,422대에 달했고, 이것은 독일 공군 전체 전력의 40.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때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헛된 보급 임무 외에도 수송기 조종사들은 2회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병력과 장비를 보급하고 증강하는 과중한 임무에 시달렸다." "6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3회의 주요 항공 보급 작전에서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즉 항공기의 손실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귀중한 조종사 양성 교관들까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항공 수송력이 없어지면서 훗날 공수 작전과 항공 보급 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197)


"1942~1943년의 기간은 상당한 양의 〈무기 대여법〉에 따라 원조 물자가 소련에 도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소련의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랜드리스 물자의 총량이 소련 생산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랜드리스 덕분에 소련의 생산 능력은 급속히 재건되었다. 서방 연합군은 천연자원 외에도 34,000,000벌의 군복과 14,500,000켤레의 군화, 4,200,000톤의 식품을 제공했으며, 11,800량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도 제공했다." "특히 원조된 트럭들은 소련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즉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을 돌파하고 나서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데 있어 재보급과 기동 집단의 전력 유지에 필수적인 문제점을 해결했다. 트럭이 없었다면 1943~1945년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공세는 얕은 돌파만 달성하고 곧 공세의 탄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이 곧 방어선을 재건해서, 소련군은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198)


"1943년 봄, 돈바스와 하리코프 일대에서 거둔 만슈타인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심한 소모전을 거친 독일군은 암울한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유연 방어 전략을 거부하고, 1916년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이 시행했던 완강하면서도 인명 피해가 많은 고착 방어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 방어 개념은 충분한 보병 전력과 함께 대량의 가시철조망, 대전차 지뢰와 방어 구역을 요새화하는 다량의 물자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었다. 두 번째로, 히틀러는 방어에 임하는 부대에 소련군의 주 진격 축선 양측으로 이동하여 방어 전력을 증강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개념은 독일 방어 병력이 소련군의 집결을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의 주 공격로를 예측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간섭은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에 큰 획을 그었던─즉 지휘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달성할메 있어 방법적 선택의 독립성 보장─상징에 크나큰 오점이 되었다."(200-1)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 탈주병들과 정찰 보고서를 통해 독일군이 몇 시 몇 분에 공격을 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프로호롭카 점령을 놓고 격전이 벌어지던 7월 12일 무렵,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서방 연합군을 맞으러 보낼 것을 명령했다. 폰 만슈타인은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승복했다. 그로써 비록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독일군이 재개하려고 했던 모든 공세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소련군의 공병과 짜임새 있는 대전차 방어 준비, 우수한 정보력, 새 전차군의 기동성 있는 운용으로, 전격전의 주역인 독일군은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결과는 그때까지 독일군이 시도했던 전략적 공세 가운데 적의 방어선을 뚫고 전략적 종심 돌파를 달성하기도 전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217-9)


"독일군은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소련군의 공세를 꺾을 계획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련군이 아닌 독일군이 지쳐 있었고, 전선이 지나치게 늘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저지하고 제1 전차군 소속 3개 여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다음 날 제5 근위 전차군이 증원 병력을 파견했고,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소련의 2개 전차군은 8월 28일 코네프의 보병들이 하리코프 시가지를 점령할 때까지 엄호를 위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보고두호프 일대의 전차전을 포함한 루먄체프 공세를 소련군은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이라 부르고, 독일군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이라 부른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의 종말, 즉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주도한 마지막 전투였음을 뜻한다. 동시에 소련군의 하계-추계 전역의 시작이기도 했다."(222-3)


독소 전쟁 제3기 1944.1~1945.5


"1943년 12월 초 스타브카는 세 번째 겨울의 작전 계획을 발표했는데, 북에서는 레닌그라드로의 접근로, 중앙에서는 벨로루시, 남쪽에서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제1, 제2, 제3,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관여하였다. 공세는 1943년 12월 말에서 1944년 4월까지 번갈아 가며 이어졌는데, 초기에는 차례로, 나중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스타브카는 계획된 공세의 목표를 한동안 은폐한 채 중요한 포병과 기계화 부대들을 한 전선군에서 다른 전선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사이 파르티잔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쪽이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는 쪽이건 독일군의 후방 지역을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5회의 초기 공세로 2월 말에 드네프르 강의 독일 방어진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강을 이용한 방어진이 없어지자 만슈타인은 이제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지에서 완패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241-6)


"남부에서는 크림 반도의 탈환을 위한 또 다른 공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이유는 크림 반도가 루마니아 유전을 겨냥한 폭격기의 기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저항은 거칠었지만, 2년 전 소련군의 저항만큼은 아니었다. 5월 6일에서 10일 사이 여전히 소련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해상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원래 150,000명에 달하던 제17군 병력 가운데 40,000명 이하가 크림 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소련군은 남부의 거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온통 남부 지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련의 6개 전차군이 모두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다음 하계 공세가 남부에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탓에 다음 여름 소련군이 중부 집단군을 노린 웅대한 공세를 펼쳤을 때 독일은 경악하게 되었다."(248-9)


"스탈린이 1812년의 영웅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세는, 1944년 여름에 계획된 5개의 공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시각에 대해서는 독일과 소련의 기록이 다소 상이한데, 이것은 소련군의 공격이 시차를 두고 일어난 탓도 있다. 1944년 6월 19~20일 밤, 잔존한 파르티잔들이 중부 집단군 후방의 철도 교차점, 교량, 기타 중요한 수송 거점에 공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많은 경우 소련 파르티잔의 공격을 꺾어 놓기는 했지만 수천 개소에 달하는 수송 거점들이 망가졌고, 그 결과 추후 퇴각과 보급뿐 아니라 부대 간 이동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6월 21~22일 밤이 되자 독일군 후방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고, 소련군 수색 대대들은 드문드문 있는 독일군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며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고 있었다. 주공은 사실 23일에 실시되었는데, 수색 부대들의 성공으로 많은 경우 긴 시간의 준비 포격 없이 공세가 개시되었다."(264)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과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의 결과로 소련군은 네만 강을 건너 동프로이센 경계까지 진격했고, 중부와 북부 폴란드에서는 비스와 강과 나레프 강을 건넜다. 바르샤바와 리투아니아에서의 독일군의 반격을 예외로 하자면, 소련군의 진격을 멈춘 것은 독일군 때문이 아니라 병참선의 지나친 신장(伸張) 때문이었다. 이 2개월간 독일이 겪은 인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중부 집단군은 거의 450,000명을 잃었고, 양 측면에서의 보충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888,000명에서 445,000명으로 줄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100,000명 정도가 사라졌다. 3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사단들의 인적 손실도 컸던 데다가 소련 기계화 부대의 진격이 30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독일 집단군 가운데 한때 가장 강했던 중부 집단군이 와해되었다. 북(北)우크라이나 집단군도 심한 손실을 입었고, 이제 붉은 군대는 독일 본국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275)


"전반적으로 1944년 여름과 가을은 독일군에게는 영락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하계 공세만으로도 추축군은 465,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6월 1일에서 11월 30일 사이, 모든 전선에서의 독일군 손실은 1,457,000명이었는데, 이 중 동부 전선에서의 손실이 903,000명이었다. 기갑 부대는 제쳐 놓고라도 차량도 그리 많지 않은 독일군은 이 기간 동안 254,000필의 말과 다른 견인용 동물을 잃었다. 1944년 말에는 헝가리군만이 독일군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북쪽의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 헝가리의 도나우 강까지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의 서부 국경에 가까이 오면서 독일군은 포위되고 고립되어 갔다." "이제 어느 군대가 1945년에 어디까지 진주하느냐가 전후 유럽에서의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명백한 사실이 베를린을 향한 차기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동시에 소련은 서방 연합국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296-7)


"2개월도 지나지 않아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독일군 방어진이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서쪽으로 70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베를린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밀고 갔다. 이 과정에서 독일 A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2월과 3월, 독일군이 베를린 방위를 위해 오데르 전선을 강화하자 소련군은 다시 측면에 신경을 써서 바익셀 집단군을 연신 두들겼고, 남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를 제거했다(이 전략 예비대는 사실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였다). 4월 중순, 소련군은 슈테틴에서 체코 국경의 괴를리츠에 이르는 오데르-나이세 선에 도달하였고, 빈 북쪽의 체코 국경에서 그라츠 외곽까지 뻗어갔다. 1944년에 그랬듯이, 소련군이 지나간 곳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 줄 공산 정권의 핵심들이 들어왔다." "이제 소련군 6,461,000명이 가장 중요한 축에 집중될 수 있었다. 전체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의 다음 목표는 베를린이 될 것이었다."(324)


"베를린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한때 무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잔존 병력을 박살냈으며, 48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에서 361,367명의 전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를린 작전이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고 베를린을 점령한다는 목표는 17일 만에 완수했다. 소련은 그 이후로 이 작전을 거의 공식적으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개의 전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 왔다. 300킬로미터 구간에서 3개의 전선군이 6개의 돌파구에서 거의 동시에 공세를 취하여 독일 예비대를 묶고, 독일군의 지휘와 통제를 혼란시키고, 경우에 따라 작전적, 전술적 기습까지 이루었다. 베를린 작전은 다른 측면에서도 교훈적이었다." "다소 도시화된 베를린과 그 주위의 숲이 많은 지형에서의 전투는 소련 입안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공격 측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 경험과 교훈은 전후 소련군의 개혁에 기초가 되었다."(343-4)


"1945년 봄에 실시된 작전들의 군사적 결과는 명확했다. 한때 자부심 강하고, 일견 불패일 것 같던 독일 육군의 잔존 부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하자 격파되었다. 나치 독일은 전례 없는 폭력과 파괴를 동원한 전쟁의 토대 위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벽히 무너졌다. 베를린 작전의 어마어마한 범위와 크기는 이전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이 작전은 섬뜩할 정도의 소련군 인명 손실을 가져왔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수도도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여러 독일 참전자들이 느꼈듯이 동부 전선의 전쟁이 완전히 전율로 가득한 것이었다면, 서부 전선의 전쟁은 품위 있는 여흥이었다." "그렇지만 서방은 전쟁의 승리에 뒤따른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소련의 권리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몇 년 안 가서 전쟁의 참혹함은 냉전의 험악함으로 바뀌었고, 서방이 갖는 소련에 대한 의심이 소련 인민의 유례없는 고통과 승리를 가려 버렸다."(347-8)


"소련의 대단히 숙련된 교전 기술에 대한 공로는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 전체에게 되돌아갔다. 공산 정권은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며 승리를 일궈 낸 정권으로서 유례없는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정권에 냉담했던 국민들은 침략자에 대한 투쟁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순수성보다는 애국심을 강조하여, 자신들과 전체 국가의 생존을 동일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병들이 공산당이나 콤소몰에 가입하는 것이 매우 쉬워졌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군과 전체 국가에 널리 퍼졌다.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이 독일군을 몰아낸 일과 1941~1942년의 참혹함을 다시 겪지 말자는 결의로 하나가 되었다. 전후 소련 경제는 이미 전쟁을 겪으면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다시금 가장 소중한 자원들을 국가 방위를 위해 할당해야 했다."(363-4)


"보다 일반적으로, 독일 침공은 침략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정당화되어 온 걱정을 강화시킨 셈이 되었다. 대조국 전쟁은 그 결과 주어진 황폐, 고통과 함께 역대 소련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에 덧칠을 했다. 전후 소련 정부는 침공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기 위해, 충격 완화의 역할을 하는 위성 국가들을 다루는 정교한 체계를 구축했다.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이 소련의 방위와 경제에 도움을 주었을런지는 몰라도, 반항적인 인민들은 계속해서 소련 정권의 치안에 대한 관념을 위협하였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전초 국가가 서방과의 냉전에 쓸 만한 희생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소련 경제에 부담만 가중시켰다." "돌이켜 보자면, 승리의 과실을 지키고 미래에 침공받지 않으려는 결심은 소련 정부에 위험한 짐이 되었다. 이 결단은 막대한 군사 지출과 잘못된 방향의 대외 정책과 함께 소련 경제를 파멸로 내몬 장본인이었고, 소련이라는 국가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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