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 - 헬무트 폰 몰트케부터 아돌프 호이징어까지
게하르트 P. 그로스 지음, 진중근 옮김 / 길찾기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1 도입


2 전술-작전-전략의 정의


"전술은 일반적으로 계획적, 계산적 또는 목표지향적, 단기 및 중기의 행동으로 이해되었던 반면, 전략은 장기적으로 구상된 목표달성 또는 유리한 상황조성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최초에는 오로지 전술만 존재했다. 고대부터 전술은 명확하게 정의된 군사적인 전문용어였다. 전술에는 행군과 진지구축, 군을 집결시키고 병력을 회전장에 배치하는 능력이 포함되었다. 유럽군대의 복잡한 발전과정에서 대대나 연대의 기동과 같은 단순한 전술과 대부대의 전술을 구분하고자 하는 관념들이 근대 초기에 최초로 등장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발전한 대규모 육군으로 인해 18세기 말경 유럽의 군사사상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게오르크 하인리히 베렌호르스트, 헨리 로이드, 하인리히 폰 뷜로브, 앙투안 드 조미니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당대의 군사학자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전쟁수행에 관해 연구하면서 군사학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7)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군사적 사고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전략적 측면에서 처음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일종의 순수 군사적 관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정치 우위에 바탕을 둔 전략개념만은 배제되었다. 대몰트케가 바로 그 시초였다. 대몰트케는 정치가 전쟁 개시와 종결만 통제하고 그 외의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대몰트케와 그의 후임자들은 전쟁수행을 순수 군사적인, 비정치적인 행위로 이해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야 비로소 독일에서도 '참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은 정치 우위의 대전제 아래 정치와 전쟁수행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시켰고 동시에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을 결합시켰다. 그 모두를 포괄하지만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는 개념이 바로 정치적 개념이다."(39)


"독일에서는 대규모 육군의 출현과 함께 이미 18세기 말경부터 작전을 부대의 기동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1789년 프리드리히 마인네르트는 '전쟁에서의 작전은 적을 격파할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 또는 사용하지 않는 전쟁에서의 모든 행위이며 (···) 그 핵심은 바로 기동술'이라고 기술했으며, 게오르크 벤투리니는 작전이 기동술에 속하며 육군이 어떻게 기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 연구에서 정의한 가설로서 작전을 정의하면 작전이란 독립적인, 지리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적의 움직임을 지향한, 세계대전 시대에서는 통상 육·해·공군의 합동 하에 전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최초에는 전략적 행동으로 개시되어 종국에는 전술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작전적 사고는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 단일 전역에서의 대부대의 지휘와 전개에 관련된 시간, 공간과 전투력과 같은 특정한 요인 또는 상수에 대한 고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41-4)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첫 번째 주제는 '시간'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모든 지리적 공간은 시간뿐만 아니라 형체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군사지리적 조건을 작전계획과 실행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장군참모장교들은 공간을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인류지리학적 관념에서 종교적, 사상적인 환경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총체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작전적 수준의 공간과 전술적 수준의 지형 분석은 모든 군사적 상황평가의 출발점이다. 여러 자연환경과 사회기반시설, 기상학적인 요인들은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군사적 결심수립과정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상황평가 시 한 국가의 경제력, 인적자원의 능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변수인 군비 문제와 달리 물리적-물질적인 전투공간의 형체는 진지구축이나 요새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이다."(48-9)


"이제는 한 국가의 지리전략 상황이 자연과학적인 공간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영원불변한 요인이 아니다. 인간이 건축을 통해, 이익을 위해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이익은 정치적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공간은 교통의 요지 또는 문화교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위협적이며 부정적일 수 있다. 총참모부는 오래 전부터 군사적 관점에서 공간을 평가한 결과, 양면 또는 다면전쟁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지리적 패권을 추구했는데, 이는 독일이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회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조성된 전략적 전쟁수행의 기초이자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내선의 강점을 만들어냈고 이를 정확히 실행에 옮겼다."(49-50)


"그러나 (두 적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내선에서의 전쟁수행은 시간적 요인에서 매우 큰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다. 두 적국 중 어느 하나가 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반드시 다른 하나를 속전속결로 격멸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만일 조건을 충족하는데 실패한다면 곧바로 상황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기 대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간과 시간의 밀접한 연관성과 이 둘을 별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모든 군사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전술적, 작전적 또는 전략적 본질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또한 군사적으로 시간 개념은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간적인 개념상 전쟁이 촉발되기 이전의 과정은 동원기간과 최후 통첩의 순이었으며, 냉전 시대에는 이 과정들이 정치적 반응시간으로 축소되었다. 시간은 그밖에도 심리적, 물리적 전투력과 화기, 차량, 물자들의 사용 가능성을 제한한다."(53)


"전투, 회전 그리고 전쟁에서 수적인 우세는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지휘와 보급의 문제들이 무시되고 있다. 모든 군지휘관들은 결정적인 지점에 국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수적으로 열세한 쪽이 적의 우세를 상쇄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책이 있다. 양호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의 이점을 활용하거나 국지적인 아군의 수적 우세를 달성하여 적의 일부를 격멸하는 것이다. 이 두 방안은 중장기적으로 전투력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방식 측면에서 수동적인 방어는 주도적인 공격에 비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방책은 바로 월등히 우수한 교육 훈련과 지휘능력을 통해 상대보다 질적 우위를 달성하는 방법이다. 즉 복잡한 작전들을 신속히 공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질적 증강도 현실(수의 법칙)적인 표준화된 힘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57-8)


"공간과 시간 요인은 세계대전 시대에 독일 군부의 작전적-전략적 계획수립과 인적, 물적 전쟁준비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독일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전투력이라는 요인과 함께 이들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영역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원칙을 형성했다. 독일이 유럽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독일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 변수들을 상수로, 더욱이 특별한 경우에는 결정적 요소로 인식했다. 장군참모장교들은 지리적 조건과 정치로 인해 초래된 이러한 요인들을 변경시킬 수도 없었고 영토 확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적국에 비해 열세에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인적, 물적으로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로 예견된 양면전쟁에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가둘 수 있는 군사적인 방책을 발전시키는 일뿐이었다."(58)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몰트케는 체계적인 군사이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실용주의자이자 이론의 실천가일 뿐이었다." "몰트케는 작전의 개념을 대부분 전장에서 부대의 기동과 연관해 사용했다. 그의 글에서는 작전이 육군의 기동으로 정확히 대체될 수 있었다. 또한 작전계획, 작전선과 작전목표 등의 관련 용어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몰트케는 작전목표를 때때로 전투목표와 동일하게 적 부대, 즉 싸워야 할 대상의 격멸로 인식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을 정치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 몰트케는 전략을 전쟁 개시단계로부터 종결단계까지 최초부터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행동'으로 인식했다." "몰트케는 전쟁을 정치적인 전쟁개시와 종식단계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순수 군사적인 전쟁단계로 구분했고 작전은 후자에 포함시켰다. 즉 작전이란 통합된 전쟁행위, 전역으로서 총참모장이 계획하고 군사령관들에게 지참으로 하달되는 것을 의미했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전투의 수단인 전술이 결정했다."(60-2)


"몰트케는 전략을 임기응변의 시스템으로 이해하여 군 지도부에게 최악의 조건하에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반응할 것을 요구했다. 즉 작전적 사고 차원에서 일반화된 교리들과 그로부터 도출된 규칙들은 실제 전쟁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군지휘관들은 이론적인 지식과 더불어 전쟁사를 배워서 얻은, 자신의 인생을 통한 군사적 소양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실제에서 자유롭게 응용하고 술(術)적으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케에게 작전적 지휘는 결국 부분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일종의 술(術)이었다. 또한 몰트케에게 있어 작전적 수준의 지휘관의 필수조건은 정신적인 유연성, 신속한 상황파악능력 그리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몰트케는 분명히 작전의 범주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이론적인 작전적 사고모델을 도입하거나 명확한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62-3)


"1857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몰트케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병력의 문제에 직면했다. 프로이센군은 개혁 이후에도 수적으로 적국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속적으로 거대화되어가는 육군을 어떻게 기동시키고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몰트케가 찾아낸 해법, 즉 독일군 장교들의 전유물로 이어져 온 '분진합격, 즉 분산해서 기동하고 집중해서 적을 쳐라'라는 슬로건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이 전법은 몰트케가 창조해 낸 혁신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당시에 주어진 상황에 부합하는 그러한 전투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전법을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쾨니히그래츠와 스당이었다. 몰트케는 육군을 다수의 거대한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고, 가능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통로로 이들을 분산, 기동시켜 회전이 벌어질 장소에서 적시에 결전을 위해 집중시키고자 했다."(66-8)


"육군을 다수의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면서 새로운 부대 지휘 방식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흩어진 채로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야전군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19세기의 통신 환경에서는 단 한 사람의 총사령관이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전진중인 야전군들을 현지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케는 대부대급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임무 달성을 위한 폭넓은 독단 활용을 보장해 주기로 결심했다." "책임은 상급지휘부에서 감수하는 동시에,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지휘개념, 즉 지휘의 분권화를 채택했다. 몰트케는 개별적인 책임의식, 즉 책임의 분권화를 증대시켜서 수직적인 지휘구조와 지휘수준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작전적 사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제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에 관한 공동의 사고로 이어진 통찰에 의해 부대지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71-2)


# 몰트케식 사고의 원칙

1. 대규모 육군을 독립된 야전군 단위로 편성한 후에 철도를 통해 신속하게 기동한다.

2.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분산된 대부대를 현지 지휘관들이 자율적으로 지휘한다.


"독일제국의 적국들이 대동맹을 결성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일제국에게 불리한 정세가 유지되자 몰트케와 후임자들은 1914년 전쟁 발발까지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정부에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총참모장들은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사례를 프리드리히 대왕에서 찾아냈다. 그는 1756년 작센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7년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는 적대국들이었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에 관해 '정말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정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을 결정해야 한다'며 정치의 의무를 강조했다. 몰트케와 발더제는 1875년, 1887년과 1890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위협적인 양면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존망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트케와 발더제의 군사적인 논리를 철저히 거부했다."(86-7)


"1871년의 국민전쟁은 속전속결을 지향하는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투철한 애국심으로 동원된 국민이 전쟁의 행위자였던 국민전쟁이 작전적 조치로 이행되었던 결정적 회전의 효과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비대칭적인 소규모 분쟁의 증대를 초래했다. 따라서 국민전쟁은 아무리 탁월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도 속전속결을 보장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총참모부는 이러한 진실을 시종일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다." "총참모부는 독일-프랑스 전쟁 경험과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양면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작전적 기동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장차 벌어질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협, 즉 국민전쟁의 양상을 끝내 무시하고 말았다. 그들이 배제하지 않은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소모전쟁이었지만 총참모부에서는 그러한 소모전쟁은 위정자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93-4)


5 양면전쟁, 다모클레스의 칼


"슐리펜은 1891년 총참모장 취임 직후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임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작전적-전략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슐리펜이 생각한 양면전쟁에 대한 전략적 전제조건은 지리한 소모전으로는 독일에게 승산이 없다는 점이었다. 슐리펜은 베른하르디, 골츠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진지전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했고 이를 대단히 우려했다. 소모전 상황에서 적국이 해상 및 육상을 봉쇄한다면 경제적인 혼란이 불가피해지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국내정치적인 위험을 동반한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슐리펜은 이러한 위험 때문에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고 장차전을 가능한 한 신속히 종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적국의 봉쇄가 효과를 발휘하기 전에 적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의 핵심은 바로 속전속결이었다."(111)


"슐리펜은 전임자들처럼 양면전쟁과 같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수세적으로 풀기보다는 오히려 공세적으로 단칼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없는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낸 유일한 해법이 바로 공격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슐리펜은 공세적인 작전수행을 더 강하게 주장했고 이렇게 공격에만 편중된 현상은 빌헬름 2세 시대에 독일을 지배했던 시대정신, 즉 정치적인 문제를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치적 방침에도 철저히 부합되었다. 수많은 정치, 군사, 경제 지도자들은 정열적인 젊은 빌헬름 2세 황제와 결탁하여 종래의 현상유지, 현실안주의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공세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세계 패권을 지향하는 방책을 택했다. 제국의 정치와 군사 엘리트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양면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111-2)


"대몰트케와 마찬가지로 슐리펜은, 화력 면에서 방자의 우세와 특히나 독일군의 수적 열세를 고려할 때 성공적인 섬멸회전을 위한 방책은 단 하나, 지속적인 포위작전을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섬멸회전을 달성하기 위해 포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했고, 그러한 포위가 슐리펜만의 작전적 사고의 두 번째 핵심이었다. 시간적 압박 속에서 섬멸적 회전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포위를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작전적 수준의 기동전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동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섬멸회전과 포위라는 두 개의 축이 존재할 수 있었고, 중점형성과 기습도 달성할 수 있었다. 기동이라는 요소를 빼고서는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대몰트케처럼 슐리펜도 대규모 육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기동에만 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작전적 포위는 기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적의 전방과 측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했다."(117)


"1906년 2월 슐리펜은 자신의 후임자 소몰트케에게 '대프랑스 전쟁'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넘겨주었다. 이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상 양면전쟁을 위한 슐리펜의 계획이 아니라 오로지 프랑스와의 전쟁만을 위한 전역계획이었다." "동시에 사실상 주관적인 관점에서 후임자 소몰트케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를 권유하는 유언장이었다. 왜냐하면 소몰트케는 원칙적으로 슐리펜의 기본적인 구상─서부에 중점을 형성하고 프랑스군의 요새지대를 우회한 후 신속히 섬멸한다─에는 동의했지만 포위에 대한 교조적인 집착은 거부했으며 포위가 효과를 발휘하기에 앞서 정면에서 적을 강력하게 고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슐리펜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역작이 소몰트케 때문에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 앞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후임자에게 자신의 작전적 기본구상을 다시 한 번 문서로 상기시켜 호소하기로 결심했다."(131)


# 슐리펜 독트린

1. 수세적이고 피동적인 전쟁을 거부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세적인 전쟁을 수행한다.

2. 양면전쟁을 '내선'을 이용한 순차적인 두 개의 단일 정면전쟁으로 분리하여 시행한다.

3. 우선 서부에서 중점을 형성하여 공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동부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한다.

4. 강력한 우익으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를 신속히 돌파하여 프랑스군의 요새 지대를 크게 우회, 프랑스군을 포위한 후 신속한 섬멸회전을 실시한다.

5. 서부에서 승리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전투력을 동부로 전환, 동부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는 부대와 합세하여 적을 격멸한다.


"영국의 역사가 휴 스트라챈이 지적한 대로 총참모부는 작전적 기동전을 시행하기 위한 군수지원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무시했다. 또한 비망록과 전쟁연습들에서 알 수 있듯이 슐리펜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적인 회전 이후 전쟁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험천만한 국민전쟁과 소모전쟁 양상이 벌어지면 독일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데 모든 군사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따라서 회전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수많은 독일 군사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심리적, 정신적 요인에서만 찾으려 했다. 용감무쌍한 공격정신, 즉 투철한 '옛 게르만인의 용맹한 돌격정신'으로 무장하고 전장에서 종횡무진 돌진할 수 있는 확고한 필승의 신념과 총검만으로 지리전략적인 상황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39)


"1914년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이 아닌 소몰트케 계획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 소몰트케가 중점을 변화시킨 이유는 원칙적으로 작전적 차원에서 슐리펜과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전쟁 이전에 오로지 단 하나의 작전계획, 즉 벨기에를 통한 거대한 포위작전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다양한 작전적 대안들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소몰트케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포위 이외에 다른 방책들도 충분히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총체적으로 소몰트케는 기동전 수행 개념 측면에서 전임자 슐리펜보다는 숙부의 작전적 사고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쟁 발발 직전의 철도 운용계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철도를 활용하여 전개 속도를 가속시키려 노력했다. 정치적으로 전쟁 발발이 확실해질 때까지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을 주둔지역에 그대로 대기시켰다. 전쟁이 발발하면 철도를 통해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조치였다."(144-5)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서부에서 기습 효과를 상실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기관총과 현대적인 화포 때문에 전술적으로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우세했으며 독일군의 기동속도가 적을 포위하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적군을 포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독일군의 기동속도는 매우 빨랐다. 실례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제1군의 장병들은 3주 남짓 되는 기간 동일 1일 평군 23km 이상 전진했다. 슐리펜의 계획대로라면 동원령 발령 31일째에는 아미앵-라 페르-르텔 선까지 진출했어야 했지만 독일군은 그 선을 넘어서 이미 파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를 고려하면 이러한 진출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고속 행군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파괴된 철도망을 복구하는 문제들과 더불어 군수분야에도 많은 취약점들이 노출되었다. 식량 문제로 인해 벨기에 주민들과의 마찰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독일군은 벨기에 주민들에게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58-9)


"또한 여기서 작전적 사고의 결정적인 취약점이 노출되었다. 전쟁 이전 지도 위의 군사작전에서는 마찰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총참모부는 백만 육군을 실제 전장에서 지휘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한 총사령관이 전신과 전화로 계획대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다는 슐리펜의 신념과 장군참모장교들의 탁월한 지휘능력에 대한 믿음은 현실의 전쟁에서는 망상일 뿐이었다." "전시 독일제국의 지휘구조적인 문제의 핵심은 바로 황제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빌헬름 2세에게 있었다. 황제는 헌법에 의거한 해군과 육군의 최고통수권자였다. 하지만 그는 군사 분야의 지식이 박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통수권을 행사하고 총체적인 전략지침을 하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황제는 군대의 분위기가 만연한 궁정에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했고 참호 속 병사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비애를 전혀 알지 못했다."(160-1)


"서부에서 독일의 공세가 실패하면서 속전속결을 지향한 전략적 개념은 붕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에서 제8군을 지휘하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군부 핵심세력권 밖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는 모든 예비와 주력을 집중해서 1914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러시아 나레브군의 측방을 공격, 완전히 포위망에 가두고 섬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탄넨베르크의 영웅'과 탄넨베르크 회전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이 회전을 칸나이와 견주어 그 의미를 부각시키며 아직까지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 진정한 슐리펜의 후예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로써 군사적으로 러시아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러시아의 증기기관'은 멈춰섰다." "탄넨베르크의 승리는 오랫동안 정신사(精神史)적인, 그리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잠재되어 있던 독일 장병들과 지휘부의 이러한 우월감이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57)


"독일에서 돌파사상은 오랫동안 경시되었다. 돌파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성공적인 기습과 더불어 명확한 인적, 물적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그러한 선결조건을 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 중장은 수적 우위에서 시행하는 공격형태가 바로 돌파이며 이것으로는 결정적인 작전적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돌파는 오로지 차후의 포위작전을 위한 여건조성 차원의 전투라는 의미만 부여되었다. 따라서 총참모부는 돌파를 항상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군 총사령부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다시금 기동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돌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독일과 동맹국들은 1916년 말이나 1917년 초반까지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월등히 우세한 자원력을 보유한 연합국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다."(178-9)


"1918년 1월까지도 서부전선에서의 돌파 시도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에 루덴도르프에게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전술적 돌파 없이는 차후의 작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돌파지점의 선정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심각할 정도로 기동성이 저하된 독일군에게는 차후 작전의 방향을 결정짓는 문제였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접합점, 즉 두 군대의 전투지경선인 생캉탱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둘을 분리시키고 영국군의 남측방을 공격해서 섬멸할 수 있다는 논리는 타당했다." "마침내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미하엘'Michael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서 독일군은 당시까지 서부전선에서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던, 전술적 수준에서의 큰 승리를 이뤄냈다. 하지만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 수준으로 확장하지는 못했다. 결국 연합군은 전선을 지켜냈고 예상대로 종심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던 독일군보다 더 신속히 예비대를 투입하여 그들의 공세를 저지했다."(185-6)


"특히 루덴도르프는 작전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 작전적 중점을 솜 강 북부에서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공격 진출 속도가 더 양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영국군을 격멸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규모 회전에 돌입해야 했다. 중점형성의 대원칙에 완전히 위배된 것이었다. 격렬한 회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작전적 수준을 경시하고 전술에만 집착했던 루덴도르프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1918년의 공세에서 육군 총사령부는 1917년의 방어회전 때보다 더 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전술적 수준의 지역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7월 중순경 반격을 개시하자 이를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1918년 독일 육군은 이른바 '블랙데이'Schwarz Tag 이후 8월 8일에 철수를 시작했고 11월 11일 휴전이 조인됐다. 독일은 마지막 해에 승리를 통한 강화라는 카드에 모든 것을 걸고 프랑스 지역에서 대규모 회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87-8)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의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전략적인 전력 비교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인 능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했더라면 독일은 패권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는 결국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패권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군부 엘리트들은 이러한 인식을 거부했고 근본적으로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치와 동떨어져 오로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에만 매달렸다. 나아가 정치 우위의 원칙에 따른 전략개념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세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통해 월등히 우세한 적국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 엘리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보유에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허용된 10만 명의 육군만으로도 단지 일부 전술적-작전적 요소들만 새롭게 개선하면 독일의 패권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199-200)


"카프의 쿠데타Kapp-Putsch가 벌어지자 1920년 3월, 라인하르트는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 한스 폰 젝트 대장이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젝트의 지휘 아래에서 군은 위정자들의 영향력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이른바 '국가 내부의 국가'Staat im Staate, 즉 핵심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젝트는 제국 육군을 '현대 육군의 표본'으로서 지휘자의 군대, 엘리트 군대로 만들고자 했다. 참모조직에 장교의 보직 비율을 높이고 병사들이 차상급 지휘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로 교육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구제가 폐지될 미래를 미리 준비했다." "한편 젝트는 재임기간 중 비밀리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소련 영토 내에서 항공기 조종사 훈련 및 화학무기와 전차부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시행했다. 외형적으로 제국군은 연합국들에 의해 국경수비대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다시금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현대적인 강력한 군대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202-3)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들이 결정되기 이전이었던 1919년 2월에 이미 젝트는 훗날 자신의 핵심적인 구상, 즉 최정예 '작전군'Operationsheer의 개념을 담은 초고를 완성했다.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작전적 사고를 철저히 고수했고 또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격전술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전문적이고도 목표 지향적인 전술적 수준의 전쟁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기동을 통해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의 작전적, 전술적 관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젝트는 진지전을 배제하지도 않았고 전쟁 이전의 교범들과는 달리 방어와 '매복' 전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기동전이었다. 다시는 진지전 양상이 벌어져서는 안 되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자는 견고한 방어보다 오히려 기동성을 극대화한 공세를 취해야 승산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확고한 소신을 피력했다."(204-5)


"이러한 군 지도부의 노선을 거부하는 세력의 대표자로는 요아힘 폰 슈튈프나겔이 꼽힌다. 그는 장기간의 지연전투를 통해 천천히 적군의 전투력과 물량을 '소진'시키면서 적군의 정신력을 약화시킨다는 구상을 했다." "슈튈프나겔은 이를 위해 극도로 증폭된 적국에 대한 국가적 증오심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야말로 테러나 사보타지보다 더 중요한 국민전쟁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이마르공화국이 다시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반(反)독일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청소년들에게는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시켜야 하며 국민들에게 해방전쟁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자각시켜서 온 국민들이 조직적으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인들을 전투 행위와 결합시키는 것은 새로운 전쟁관념이자 그에게는 당연한 논리였고 성공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처에서 현실로 나타났다."(213-4)


"1930년대 중반, 기동전을 지향하는 최종적인 결정으로 중점형성과 포위, 그리고 이와 결부된 돌파와 기습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군부에서는 장차전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해서 방어작전에 비중을 더 둔 것은 사실이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적 영토에서의 공세, 즉 신속한 섬멸전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대령은 적국의 방위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이전에 재빨리 선제공격을 실시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적군의 측후방으로 공격을 실시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그러한 우회공격에 앞서 돌파가 먼저 시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작전적 포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장차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수 정예군이 아닌 현대적인 대규모 육군이 더 적합하며 미래의 전쟁은 틀림없이 기동전의 양상을 띠게 되리라고 언급했다."(234-6)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몇 년 동안 베른하르디는 향후 기동전을 위한 전차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제국군은 전차 보유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 저널리즘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프랑스는 전차를 보병의 지원수단으로 인식하고 기동성이 둔하지만 장갑이 두꺼운 중(重)전차를, 영국은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잇는 경량화된 중(中)전차를 선호했다. 1927년, 구데리안은 전차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기술했다. 그는 영국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보여주었듯 현대적인 방어무기체계의 화력효과가 상승함에 따라 신속한 결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병과 기병의 돌파력은 충분치 못하게 되었고 이제 전차와 항공기가 그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공군과의 협력 하에 독립적인 작전능력을 보유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차량이 집중 편성된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말했다."(237)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1939년 전쟁 발발 당시 육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부대마다 기동성과 무장, 교육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독일 육군의 157개 사단 중 16개 사단만이 완전히 차량화되어 있었다. 단지 이러한 극소수의 '엘리트' 부대들만 첨단 장비를 갖추고 교육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따라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90% 정도의 부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도보나 말을 이용해야 했으며 일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낙후된 무장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오늘날까지 독일 국방군은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완전히 기계화된 전격전 군대'로 각인되어 있지만 이는 완전히 날조된 나치 선전의 결과물이었다." "이에 육군 총사령부는 강도 높은 교육훈련 혁신을 주문했다. 지휘관에 대한 교육과 야전부대의 훈련 중점을 제병협동전투능력 강화와 공격령 증강에 두었다." "교육훈련에서는 목표치를 달성했지만 전쟁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특정 장비, 물자의 부족은 해결하기 어려웠다."(270-1)


"1940년 5월, 훗날 '지헬슈니트'로 알려진 계획의 중심에는, 슐리펜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 신속하고도 기습적인 전쟁종결을 지향하는 섬멸회전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예상대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마치 1914년의 소몰트케 계획을 재현하듯 연합군의 눈을 속여야 했다. 그러면 독일군의 주노력이 벨기에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신한 연합군은 주력을 벨기에로 투입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벨기에를 공략하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최정예 기계화부대들은,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아르덴 삼림지대를 거쳐 스당으로 진격해 들어가야 했다. 지난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지역에서의 기동을 고려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만슈타인은 그 일대에서 돌파에 성공한다면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 솜 강 하구 방면으로 진격하여 벨기에 지역에 위치한 연합군 주력을 포위하는 거대한 섬멸회전으로 전쟁을 종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74-5)


"1914년의 소몰트케처럼, 당시의 총참모부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전방 지휘관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스당 돌파에 성공한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 할더는 더 신중해졌고 반대급부로 히틀러는 점점 더 깊이 작전지휘에 개입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임무형 지휘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기갑사단장들과 '고집불통'의 집단군 사령관의 반동적인 행동도 문제였지만 총참모부가 자신들의 고유영역인 작전적 지휘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가장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롬멜과 구데리안 같은 장군들은 출중한 작전적 능력을 갖추었던 인물들인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육군 지휘부와 장군들 간의 내부 권력투쟁 때문에, 그리고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어떻게 상이한 공격속도를 조절해야 할 것인가'라는 작전적 차원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 간과되었다. 이러한 태만의 결과 육군 지휘부는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278-9)


"1940년 7월 22일, 히틀러는 영국과의 '평화 협상'이 무산되자 '러시아와의 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이에 이미 작성된, 영토방위의 수준을 뛰어넘은 구상안들이 제시되었고 며칠 후에 이 계획들은 히틀러가 지향한 '생활권 전쟁'이자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표'와 완전히 결합되었다. 히틀러에게 '생활권'은 전략적 차원에서 영국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소련을 제압한다면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미국의 전쟁개입을 억제하고, 미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던 일본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장기간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식민지를 획득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대 소련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소련군을 격멸하는 예방적 차원의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 침공은 오늘날까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방전쟁이 아니라 패권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이자 동부에서 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인종,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쟁이었다."(280-1)


"작전을 우선시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다 .독일군은 종래까지 수행한 작전의 범위를 능가하는 공간에서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 공격의 성공여부는 광활한 공간에서 30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약 50만 대의 차량, 30만 필 이상의 말에 대한 원활한 보급에 달려 있었다. 환경적 조건도 동쪽으로 갈수록 넓게 펼쳐지는 지형, 불비한 도로망, 빈약한 사회간접시설과 혹한의 기후 등 중부 및 서부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특히 전체적인 군수 부대들은 다모클레스의 칼이 머리 위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과중한 시간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총참모부는 전역 기간 중 예상되는 보급의 문제점들을 인식했지만 단기간의 '전격전'으로 계획, 예측했던 터라 그런 문제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었다. 작전가들은 군수분야의 문제들로 인해 작전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위협적인 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다."(291-2)


"총참모부는 '러시아 영토,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총참모부는 소련을 속전속결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련의 잠재력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고전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나치의 선전으로 탄생한 '전격전 군대'라는 독일군의 이미지는 러시아 전역에서 산산 조각나버렸다. 당시의 육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의 행군능력이 공격 속도를 결정한, 이른바 보병과 우마차의 군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동성이 부족했던 포병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던 슈투카와 전차는 긴 창의 날카로운 끝을 형성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하나였지만 두 부류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가 러시아 전역에 투입되었고, 작전의 마지막 몇 개월간 입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은 당시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으며, 마침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302-5)


9 핵 시대의 작전적 사고


"오랫동안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 종식은 단지 패망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5년 5월 8일 독일 연방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독일도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며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독과 서독이 과거 문제를 청산하는 방식도 각기 달랐다. 동독은 소위 '파시즘적인 국방군'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군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구분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애초부터 인종 말살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상적인 이유, 특히 파시즘을 극도로 적대시했던 사회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반면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국방군과 나치체제를 별개로 규정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친위대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패전의 책임은 고스란히 히틀러에게 떠넘겨졌고 국방군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346-7)


"주요 작전 전문가들이 암트 블랑크와 새로이 창설된 연방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단기간 내에 강력하고도 작전적 수준의 방어에 적합한 독일군의 창설을 기대했던 서방 연합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한 자질을 겸비한 군지휘관이 필요했고 따라서 과거 국방군 출신이면서 작전적 측면에서 숙달된,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육군의 인적, 지휘구조상 그러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은 바로 장군참모장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고위 계층에 있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각기 직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동부 전역에서의 범죄적인 전쟁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비정치적인 군사 전문가들로서 나치체제에 동조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초 '결백한 국방군'과 '범죄적인 나치체제'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자 이러한 장교들은 더 쉽게 연방군에 편입되었다."(353-4)


# 암트 블랑크Amt Blank : 연방군 국방부의 전신


"과거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이 존재했던 유럽의 중심부였지만, 분단된 동, 서독은 서로 대치하게 된 양 진영의 첨단이자 외곽지역으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은 독일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지배하에서, 연합국이 전시에 사용할 공간일 뿐이었다. 이제 독일은 북대서양을 전략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미국인들의 전초기지였고 이러한 위협적인 상황 때문에 서독의 작전가들은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이로써 슐리펜 시대로부터 발전되어온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던 지리전략적 전제조건이 의미를 상실했다. 서독의 작전가들에게 양면전쟁의 위협은 사라졌고 시간적 압박 속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추구했던 속전속결과 신속한 공격 방법은 더 이상 연구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 상황에 부합하는 작전, 즉 서방 동맹국들의 월등한 잠재력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하고 독일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방어작전 구상에 몰두해야만 했다."(355-6)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이 좌초되면서 서독은 호기를 맞이했다. 독립적인 주권 행사도 가능했고 NATO 내부에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지위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연합국 장교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독일군 장교들은 전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미국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독일의 작전적 구상과는 완전히 상이한 전쟁계획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라인강선에서 지연전을 개시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대규모 반격을 실시하여 상실된 지역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핵무기로 러시아군을 무력화시킨다는 복안이었다. 독일은 그 계획을 수립한 미 공군과 미국 정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독일은 미국의 핵전쟁 계획에 대한 전말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핵무기 투입에 관한 어떠한 정보를 받을 수도, 접근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독일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362)


"동독의 사정은 달랐다. 과거 국방군에서 복무했던 고급장교들은 새로이 창설될 동독군의 전술적-작전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원칙에 따라 군대를 건설하고 군사(軍事)와 프롤레타리아 사상이 결합된 이상적인 징병제도는 실현 불가능했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유능한 간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독 공산당은 창군 단계에서 우선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국방군 출신의 장교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인민군'을 창설하고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은 국방군의 하급장교 계층에서 지도자를 선발했다. 과거 나치당이 장교단의 귀족화를 철폐하고자 의도적으로 장교단의 문호를 개방했을 때 임관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장교들 중 대다수가 병사 출신으로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작전적 제대를 지휘해본 자들은 매우 드물었다."(362-3)


"시종일관 소련군 지도부는 재래식 전쟁으로 유럽의 정치적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공군의 지원 아래 기갑 및 기계화부대들이 적의 전술적 방어지대를 돌파하고 이어서 신속히 종심으로 진출하여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 바로 소련군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교리를 이행하기 위해 소련군은 1946년부터 차량화에 박차를 가했고 원활한 제병협동을 강조하여 종래까지의 기계화군단을 기계화사단급으로 재편했다. 또한 기동성과 화력을 증강하여 타격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는 많은 부분에서 서방의 사단편제와 유사했다. 소련군 지도부는 증강된 기동성 덕분에 더욱더 단기간의 속전속결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인민경찰과 훗날 동독 인민군은 과거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거부했지만, 소련군과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가 유사했기 때문에 창군 초기의 동독군 장교들은 큰 혼란 없이 이러한 과정을 수용할 수 있었다."(364-5)


10 끝맺음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는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적 사고는 원거리에 위치한 대규모 육군을 전술적-작전적 수준에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 위해 탄생했다. 슐리펜 시대에 와서는 작전적-전략적 수준에서 열세에서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위 궁여지책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작전은 전술로부터 생겨났으며, 기동, 공격, 속도, 주도권, 행동의 자유, 중점형성, 포위, 기습, 섬멸과 같은 제원칙들이 결합된 일종의 대부대급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전이 전술과 전략의 매개체로서 한편에서는 작전적-전략적, 다른 한편에서는 전술적-작전적 차원을 모두 공유하고 있지만 독일군은 이러한 작전을 작전적-전략적 수준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즉 독일군 총참모부는 작전적 지휘만을 중시하고 결국 전략적 상황을 간과했다.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대부분의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잠재력에 부합하는 현실 정치적인 해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398-9)


"이러한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장교들에게는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읽고 정치 그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도 없었고 그러한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의 본질은 바로 정치적 사고이다. 그러나 장군참모장교들은 군사우위의 원칙에 따라 정치를 군사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했다. 평시에 장군참모장교들은 민간 정부의 결정에 종종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를 수용하기도 했지만 '문민정부의 정치'에 대해 매우 무관심했다. 전시에는 클라우제비츠의 논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과업에 간섭하려는 정치권을 무시했다. 제정시대 군부의 국내외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념은 군주와 정부의 구상과 일치했다. 그들의 목표는 유사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강한 패권국가의 지위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과 패전 이후)까지도 독일과 유럽에서 군사력 사용은 합법적인 외교정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399)


"독일의 작전적 사고에 구조적인 결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바로, 총체적인 전략이 자신들의 잠재력에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군수분야의 문제로 인해 전쟁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사 독트린의 본질은 범죄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독일의 작전적 독트린은 충분한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기반 없이 대륙국가로서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 시도였다. 이렇듯 군사적 충돌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결국 불충분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했던 세계대전 시대의 독일의 군부와 정부 엘리트들의 무능함에 기인한다. 독일의 작전적 사고는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제국의 존망을 좌우하는 고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결코 승리를 위한 해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고육지책'이자 '궁여지책'일 뿐이었다."(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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