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3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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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B. 권력공백의 단계 : 파펜-슐라이허 시기


제7장 "신국가"


"브뤼닝의 실각과 함께 권력은 힌덴부르크를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종식을 의미했다. 1930년 이후 대통령정부라는 개념은 헌법적 현실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우리가 그의 정부에 건 기대들을 어떻게 평가한다 하더라도─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의 지배의 의회민주주의적 작업방식을 확고히 지켰다. 브뤼닝의 후임자인 파펜이 당시 자신의 정부가 권위적인 유형의 브뤼닝 정부를 단순히 지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되돌아보면 파펜 스스로가 그의 정부와 브뤼닝 정부 간의 〈결정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펜의 반응은 새 선거를 통하여 마지막 남은 잠재적인 민주적 다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선거가 얼마나 과격한 결과를 낳을지는, 당시의 정치적 사정을 보든 주 의회 선거의 경과를 보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15)


"파펜 정부의 형성과 형태는 독일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거의 철저했다. 거기에는 중간계급과 노동자층 대표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화국으로부터 빌헬름 제국 시기의 귀족-관료적 정권으로 그리고 경제적 권력 집단들로의 후퇴를 입증했다. 좌파들의 신문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귀족내각〉, 〈반동적 집중의 내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던 반면에, 중간정당들의 반응 또한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국가당은 헌법정신에 거슬러 구성되었고, 극우정당들이 공식적으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극우정당들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내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독교 사회당 역시 분명히 거리를 두었고 적어도 나치당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함께 지도록 요구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그들이 새 제국정부의 형성과 목표 설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고집했다."(23-4)


"슐라이허가 기존 권력구조의 틀 내에서 나치당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에, 파펜 주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개혁, 곧 권위주의적 국가의 창출을 위해 그러한 조치들을 이용하고자 애썼다." "그 핵심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판에 의거하여 〈입헌적인 [즉, 영향력이 없을 정도로까지 제한된] 의회주의〉를 통해 국가질서의 정치적·헌법적 기본 특징들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요구는 헌법 제54조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는데, 이에 따르면 정부는 제국의회의 신임을 필요로 했고 불신임 표결의 경우에 물러나야 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적 반(半)절대주의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즉, 의회의 통제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노출된 국가수반은 내각을 자신의 〈초당적인〉 통찰력으로 선택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정부를 모든 당파적 이해관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했다."(26-9)


"〈신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권위관계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군주제적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접목하여 나치의 지도자 개념에 맞서 〈혁명적-보수적〉 지배 개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힌덴부르크가 부분적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그 때문에 포괄적인 헌법 개혁을 통해서 〈정당들과 사회세력들의 놀이 공으로서 이리저리 차이지 않고 그 위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강력하고 초당적인 국가권력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질서는 〈지배의 헌법적 생존조건들〉로부터가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조건들로부터 그 정당성의 기반을 얻었다. 그것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니며〉 제한되어서는 안 되었고 〈신에 의해서만 책임을 지므로 본질적으로 절대적이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지는' 반면 (신이 보낸 인물인) 지배자는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37)


제8장 프로이센, 파펜의 쿠데타


"프로이센은 1919년 이래 짧았던 두 번의 예외(슈테거발트 내각과 마르크스 내각)를 제외하면 사민당 주도의 바이마르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전보다 더 정치적 타협 준비가 되어 있는 사민당이 〈부르주아 블록〉 내에 계속 머물렀고, 중앙당이 철저한 민주정치를 더욱 결연하게 주장했던 바로 이 순간의 프로이센 정치 상황은 제국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인 권력 이동이 바이마르 질서의 가장 중요한 이 토대(사민당 주도의 연정구조)를 고립시켰다." "브뤼닝의 실각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중요한 부분 문제인 프로이센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적 결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우적 파트너와 독일민족인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는 파펜 내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거대한 지방정부(프로이센)를 신속히 제압하여 자신의 권위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82-3)


"프로이센 내각은 파펜에게 내정 간섭의 법률적 계기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파펜의 간섭의 근거는 무엇보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 쿠데타를 헌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이었다. 우익이 활용했던 그 오래된 전술, 즉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와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를─실제 의미와는 상관없이─동일시하여 사민당을 포함한 모든 연정을 〈볼셰비즘적〉이라고 비난하는 전술은 파펜과 힌덴부르크의 마지막 의구심을 잠식시킴으로써 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관건은 극단적으로 분열된 의회가 정상적인 후속 정부를 구성하지 못할 경우 정부 운영의 문제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주장이, 의회 소수파인 〈민족적 야당〉이 폭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정부 교체의 〈국가 정치적〉 근거를 다시 한 번 더 제공해야 했다."(85-90)


"프로이센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파펜은 평소의 방식대로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된 협의를 〈이것은 결국 국가이성의 활동이다〉라는 말로 끝냈다. 이로써 결국 법치국가 사상에 대해 권력국가 사상이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주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제국의 간섭〉은 결코 은밀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동원된 제국군대에 의해 지원받았고, 독재의 계관법률가 칼 슈미트에 의해 법정에서 변호되었다. 〈헌법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2개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규정을 반대하는 데 〈국가이성〉이 동원되었다. 반 년 뒤 파펜은, 슐라이허와 함께 연합하여 행한 쿠데타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쿠데타의 명수를 만났다. 하지만 히틀러의 부총리로서 파펜은, 히틀러가 자신을 위해 헌법 전체를 폐지하는 데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었다."(100-1)


"쿠데타는 진정한 내전상황을 초래했다. 한편에서는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에게 충성하는 제국군대가 서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기관으로서 프로이센 경찰과 아울러 바이마르 연정 정당, 제국기치, 그리고 총파업이라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 수단을 갖고 있는 노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각자 고유한 목표에 기초한 이 전선 사이에는 또한 나치 전투조직과 공산주의 전투조직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경찰지도부, 특히 베를린 경찰지도부가 저항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저항 의지를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데 있어서 제국군대에 대한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존경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속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혁명적 저항에 대한 혐오가, 관헌국가로부터 전수된 이러한 혐오에 근거한 일련의 금기사항들이 위와 같은 존경심과 더불어 한 역할을 하였다."(113)


"제국기치의 한 회원의 말을 믿는다면, 조직을 강화하고, 모든 반(反)공화주의적 노력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영구적인 공화국 긴급 보호 상황〉 선언에 전력투구할 강한 세력이 제국기치 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장은 대단히 불충분하였다. 그리고 결정권은, 7월 20일 헌법에 근거한 항의로 대항했지만,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지닌 자신들의 직책에 따른 의무인, 구체적인 정치적 책임의식을 지니고서 대항하지 못했던, 너무 조심스런 집행부와 공화주의적 장관들, 정당집행부, 노조집행부에게 있었다." "독일사민당의 최고결정기구는 7월 20일 사건 4일 전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헌법의 법적 기초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합법성 유지가,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헌법 적대세력에 의해 합법성이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에 맞는〉 유사합법성으로 전환되는 곳에서는 그 한계를 갖기 마련이었다."(116-7)


제9장 파펜 내각의 고립


"프로이센에 대한 작전은 파펜 시대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후, 7월 31일 선거가 반대 진영의 압도적인 다수 득표와 함께 대통령 내각의 자화자찬격 정부 계획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은 순간 환상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파펜이 제국의회 해산과 선거 일정의 최대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출발을 위해 벌었던 8주의 기간은 이날로 막을 내렸다. 모든 정당이 기대와 우려 속에서 기다렸던 선거 결과는 성공적 작전의 주역들이 희망했던 명예 획득을 저해하였다." "프로이센 작전은 공화국 지지파의 약점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나치당의 권력 장악 기대감을 강화하였고 전체주의 운동권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결정적 선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며칠 동안 〈신국가〉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운 프로이센 장악은 강화된 국가 권위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한 민주적 정당들의 외면을 확고하게 한 동시에 반항적인 나치당에게 그들의 권력 장악 구상을 위한 좋은 사례를 제시하였다."(127-8)


"1932년 7월 31일의 선거는 내정적 정쟁(政爭) 중지와 집회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유혈충돌로 분출된 극도의 긴장과 흥분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전반적으로 선거 결과는 모든 진영에 실망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비해 증가된 투표율에서 나치당은 그들의 제국의회 의석을 충분하게 배가할 수 있었으며 주 의회에서 차지했던 규모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얻었던 득표 이상을 많이 넘어서지는 못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조건 아래에서 나치가 이룩한 확장의 최종점은 이미 도달했던 것이다. 독일 유권자의 62.8%가 이 시점에조차 나치 지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던 반면 나치가 도달한 상한선은 37.2%였다. 나치당은 사민당이(독립사민당 없이)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시 단독 지배권을 주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얻었던 득표율보다 낮은 지지를 얻었다."(137-8)


"한편 부르주아적 중도진영은 사라졌으며 〈민족〉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공고화 이후 나치당의 더 이상의 팽창이 어려워 보였던 반면에, 그 양 진영 사이에 중앙당은 동요 없이 서 있었다. 이처럼 정당 진영의 경화와 포화상태 속에서 정당의 종식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거나─논의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유리한 타협을 가능하게 하였을 자기 진영의 성장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채 서로 맞섰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무엇보다 대통령 내각의 막대한 패배였다. 그의 유일하고 안전했던 의회 내 기둥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과 독일인민당은 대폭 약화되어, 정부는 중앙당과 나치당 협력에 의해 문제 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 유리한 과반수는 파펜 정부를 헌법상 정식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막을 수 있는 길로서는 파펜과 히틀러의 협력 아니면 제국의회의 해산,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141-2)


"〈히틀러의 권력 요구를 제어하고〉 그의 대중 운동을 〈긍정적인〉 민족주의 안에서 강력하고 제국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대통령 내각으로 이끈다는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계획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7월 31일은 새로운 단계를 열었으며 그 결과는 히틀러를 전문가들이 보증하는 정부의 총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슐라이허가 볼 때는 상황이 아직 그런 조치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즉, 제국군대와 국가 기구는 온전해 보였고,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의 입지는 신뢰할 만한 제어력과, 대통령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야망에 대한 균형추를 보증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는─제 3단계로서─나치당을 분열시키는 대안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1932년 7월, 8월 슐라이허가 추진한 계획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제국군대의 권력 토대가 충분치 않았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144-5)


"8월 30일 파펜, 가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노이데크에서 새롭고 대폭적인 경제 및 제도 계획에 관해 논의했다. 이 기회에 최종적으로 의회해산 명령이 결정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선거를 수개월 연기하며, 그동안 비상명령을 통한 대규모 제도 개혁을 실시하는 계획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하지만 뢰베 대신에 괴링이 제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사민당이 의장단과 모든 서기직으로부터 배제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신임 의장이자 의회에 적대적인 〈운동〉의 대표인 괴링은 의회와 대통령 내각을 반목시키고, 의도된 의회해산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이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입증된 제국의회의 다수 확보 능력과 업무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나치당의 전술적 능력을 과시하였다. 이틀 후 연립내각 협상의 지속을 알리는 중앙당과 나치당 공동성명이 뒤따랐다. 이제 정부는 거의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사방으로부터 동시에 위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159-60)


제10장 파펜에서 슐라이허로


"1932년 11월 6일에 선출된 제국의회는 새로운 연립 가능성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부정적 다수(의석의 50.7%)는 옛 브뤼닝 블록에 대응했다. 이제 사민당에서 인민당까지 〈대연립〉(38.2%)도 하르츠부르크 전선도(42.3%) 정부 구성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상황 내부에서 중심축의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중앙당-바이에른인민당과 나치당 사이의 연립을(48.8%) 불가능하게 했고, 민족인민당은 7월 31일에 잃었던 핵심적 위치를 되찾았다." "부르주아 정당들의 4년에 걸친 감소 또한 이제 멈췄다. 극히 명백히 여기에 책임이 있었던 것은 7월 선거에 비해 낮은 투표율(80.6% : 84.0%)만도 아니었고, 또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투표로부터 추적당한 주민들의 싫증도 아니었다. 정치적 발전의 가능성 있는 전환점은 나치당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신화가 일격을 맞았음─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배 요구에 대한 거부─을 알려주었다."(190-2)


선거결과는 나치의 팽창에 맞선 민주적 정당들의 증가된 대항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치당의 후퇴 운동은 며칠 후에 작센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및 뤼벡의 시장선거에서 계속되었으며, 모든 선거 단위에서 가시적으로 된 충분히 가능성 있는 현상이라는 점은 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 대학생들의 선거행위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특히 나치당 내부의 분위기와 고려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식이었다. 히틀러의 완전한 권력 요구는 이제 특히 나치당의 당지도부에서 파괴 현상과 분열 현상을 야기한 심각한 부담에 직면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처음에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이어서는 슐라이허의 새로운 그리고 최종적인 길들이기 시도를 야기한 상황이었다. 너무도 명백히 나치당의 팽창 능력에 한계를 보여준 마지막 선거의 결과는 길들이기 구상의 반대자들을 나치의 권력의식 및 그 조직적인 토대에 대한 새로운 과소평가로 오도했다."(209)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및 카스와의 협상이 실패한 뒤) 먼저 파펜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파펜은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태도가─8월 13일 이상으로─진정한 국가비상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제국의회에 반대하고 거의 무한정 확장된 헌법 제48조로써만 통치하던 힌덴부르크는 이제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이 그러한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까지 정부를 유지시키고 그의 총리직 아래서 모든 저항에 맞서 필요할 경우 정부의 계획을 폭력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반항적인 제국의회의 배제, 모든 정당들 및 반(半)정치적인 조직들에 대해 제국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 그리고 국민투표나 〈새로 소집된 국민의회〉를 통하여 허용된 헌법 개혁 등은 후겐베르크 측에 의해서도 강하게 영감을 받은 제안이었고, 이를 위해서 파펜은 〈만일의 경우 바이마르 헌법의 중단〉을 감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235-6)


"슐라이허는 독일민족인민당에 의해서만 담지된 그토록 협소한 내각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업적, 즉 국방부장관의 초당적인 역할을 위험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권력도구를 폭력적인 복고정책을 위해서 투입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는 의문의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한 폭력 행위가 위험스러워 보이게 한 〈제국군대의 내적 분열〉을 고려했음에 틀림없었다." "슐라이허는 다시 한 번 〈제국군대의 신뢰〉에서 나오는 전권적인 주장으로 정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늙은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또 정치적 위기의 이성적인 중재를 위한 최후의 기회를 허비할 수도 있는 총리를 해임했다. 그와 함께 가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광범위한 개혁안들은 외관상 명백히 포기되었지만 〈새로운 국가〉라는 이상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240-2)


"슐라이허의 관념들은 도달가능한 모든 정당들과 집단들의 접근과 협력에 지향되었으며, 파펜 식의 원칙적인 개혁 선전을 포기했다." "그는 의회의 일시정지(새로운 선거 없이)를 생각했다. 제국기치와 철모단은 통일적인 제국전사연맹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해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들은 하나의 단일 노동조합으로 통합되고, 나치당은 완전히 금지되어야만 했다." "이 계획 또한, 사민당 중앙위원회가 어떠한 협정도 거부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사민당은 공산당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화된 장군에 대한 불신을 공화국의 파탄에 대한 인식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두 가지 요인들을 경시했는데, 이들은 결국 일차적으로 그의 실각과 〈길들여지지 않은〉 나치당의 승리를 초래했다. 그 두 가지 요인이란 그의 달갑지 않은 친구이자 그의 등 뒤에서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파펜과 자신의 모든 계획을 지원했던 독일민족인민당의 이탈이었다."(256-7)


제11장 "집권"으로 가는 길


"사건은 많았지만 결과는 적었던 1932년 말, 정치적 장면은 제국대통령 관저를 둘러싼 중재자들과 책략가들의 바쁜 활동으로 결정지어졌던 권력 공백의 징후 속에 있었다. 그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짧은 파시스트적 간주곡 이후의 그들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적 통일전선과 민주주의·의회주의적 결집의 구호들 사이에 끼여서 노동조합의 실용주의적 요구의 압박을 받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기반과 행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중앙당은 카스의 잃어버린 핵심적 지위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폭넓은 우익 정부의 구상을 위해 좌익과의 연대를 대폭적으로 희생시켰다. 독일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사망했고, 중도 우익은 완전히 분열했으며,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주의의 독일 민족주의 부류는 파펜의 전복으로 새로운 내적 갈등에 빠졌다. 나치들은 마침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인할 수 없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259)


"슐라이허는 (상호대립을 상쇄하고 미미한 정부의 지반을 확대하기 위해) 파펜의 프로이센적 해결안을 고수하는 동시에, 의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보험의 사안을 지지하며 노동조합과 협상했지만, 독일 산업의 제국협회 요구에 대해서도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를 거부했지만, 대통령 내각은 그의 〈초당파적〉 노선이 정당정치적 이해를 통해 방해받지 않도록 할 것임을 장군이자 제국 국방부장관으로서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실각 2주 후인 12월 16일, 파펜은 귀족클럽의 연례집회에서 명예 손님으로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좌절된 개혁 계획을 슐라이허의 균형 전술에 대해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파펜은 스스로가 집권해 있던 1932년 8월과 11월에는 히틀러에 대한 모든 양보를 거절하고 슐라이허의 계획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병든 개인으로 강등된 그는 스스로 히틀러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했다."(260-8)


"브뤼닝의 실각 이후, 이제 86세인 힌덴부르크는 사실상 〈측근〉(Kamarilla)이란 슬로건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을 만큼, 그의 최측근의 영향력에서만 자문을 받았다. 4명의 충복 중 새로운 별이 파펜이었던 반면에, 슐라이허의 영향력은, 분명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마이스너와 무관하지 않게, 눈에 띄게 줄었다." "파펜에 대한 재신임이 힌덴부르크의 희망사항에서 첫 순위를 차지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치당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정부를 공격하는 방식은) 파펜의 첫 임용을 이끌었던 생각이었고, 브뤼닝의 배제를 초래했던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나치 문제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분열적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이러한 관념 때문에 일찍이 브뤼닝의 해결 노력이 저지되었다. 그것은 히틀러와 싸워야 할지 그를 등용해야 할지 선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었고, 그가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나치당을 그의 〈민족주의적인〉 친구들의 진영으로 이끌고자 하는 기대이기도 했다."(290-1)


"슐라이허의 억제책은 우익단체들과 경제계들에게는 실망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종국적으로 히틀러 군대 쪽으로 옮아갔다." "장군은 황태자가 정상에 서 있는 군주정의 복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파펜의 실패 후에 슐라이허를 바라보며 가졌었던 기대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나치 지도부는 나치적 혁명에 뒤이어 군주정적 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전적으로 열어 놓았고─빌헬름 2세의 귀환을 거부했던 브뤼닝과는 다르게─파펜이 실제로 힌덴부르크를 그러한 해결에 관하여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아 보였다.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교각으로서의 온순한 나치, 그것은─무솔리니의 해법을 바라볼 때─이제 바이에른의 군주정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외교계의 계산 속에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고려되었던 생각이었으며, 또한 대기업 후원자들의 희망을 움직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은 후에는, 그러한 희망이 곧바로 무시되었다."(305-7)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와 히틀러 사이에서 남의 자리를 맡아주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도 1933년 1월 30일의 국민투표도 아니었다." "불분명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던 제국군대의 권력 지위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저지시킬 능력이 없었다." "반 년 뒤에 이미 효력 있는 안전장치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민주주의의 담지자들은 배제되었다. 즉, 정당들, 의회, 주, 노동조합들, 경제, 언론과 문화가 〈획일화〉의 궤적을 따라 사라졌던 반면에, 제국군은 확실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적 민주주의의 껍데기뿐인 연속성은 1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는 힌덴부르크가 사망했고 군대는 1934년 6월 30일의 학살─에른스트 룀 숙청─을 재가했으며, 아무런 저항 없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바쳤다. 나치 지배가 공고화되었던 이 시기의 끝에 히틀러의 무제한적인 단독 통치와 그의 전체주의적 기구들이 확립되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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