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2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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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A. 권력의 상실 과정 : 브뤼닝 시대


제1장 브뤼닝 정부의 성립


"의회가 지배하는 마지막 다수파 정부─사민당의 뮐러 내각─는 1928/1929년에 오랜 협상 끝에 그리고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출범하였으며, 수많은 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연립정부들보다 더 오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공화국의 구조와 메커니즘의 민주적 건설의 태만함 등은 더 없는 부담이 되었고, 그 결과 공화국은 비록 뜻밖인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 최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새로운 정치형식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고, 전쟁 이전 시기의 안정된 사회에 대한 기억과 냉정한 현재에 대한 맹목적 실망이 너무 생생했다. 따라서 모든 위기현상이 전후문제라는 보다 더 큰 연관관계 속에 있다면, 그 현상은 대중을 타협으로 애써서 균형을 이룬 정당정치에 대한 분노로, 또 복잡하지 않은 강력한 질서, 결단력 있고 권위주의적인 지도부 등에 대한 강한 기다림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16-20)


"유럽의 동반자가 될 당시의 적대국가들과 끈질기면서도 평화적인 논쟁에서 공화국의 외적인 해방과 내적인 공고화를 위한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의 수단인 〈화해정책〉은 새로이 시작되는 경제위기의 인과관계에 빠져들었다." "슈트레제만의 죽음은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결합되었다. 이 세계사적인 사건은 수출시장에서 독일의 상황에, 외국자본의 회수에, 산업상황에, 실업의 증가와 농업의 판매위기에 동시에 뚜렷이 악영향을 미쳤다. 전면에서 이익단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29년 3월에 새로이 형성된 농업의 〈녹색전선〉 또한 의회 안팎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는 이미 1929년에 현저한 조세수입 감소를 기록해야만 했고, 절약에 대한 호소가 제기되었다. 1929/1930년 겨울엔 연립정부 내의 사회주의파와 자본주의파의 갈등이 번번이 일어났다. 이는 슈트레제만이 죽기 하루 전에 독일인민당과 사민당 사이에 타협을 달성한 후였다."(21-2)


"실업의 증가가 점점 더 거대한 사회적 부담금을 필요로 하였지만, 경제적 위기현상들이 조세수입의 감소에 반영되었을 때, 이제 갈등은 새로이 대연정의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하였다." "독일인민당은 근본적인 개혁, 즉 사회적 부담금의 축소에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보았다. 이에 반해 사민당은 재정적인 치유를 무엇보다도 실업보험의 희생으로─바로 지금─실행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지지하였다. 사민당은 부담금의 증액 (피고용인이 항상 절반을 부담)과 보험부담금의 유지를 요구했다. 근본적으로 한편에서는 〈부담금 축소〉, 다른 한편에서는 〈부담금 증액〉이라는 투쟁구호와 함께 실업자의 보조 전반에 대한 요구권을 둘러싼, 말하자면 독단적인 〈자율경제〉에 맞서서 어렵게 달성한 노동자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인정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전선도 점차 정당정치적으로 명확히 특징지어졌으며, 대연립을 가로질러 진행되었다."(24)


"오락가락하는 사민당과 특히 〈비타협적인 노동조합들〉의 책임은, 향후 정치적 형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행사가능성이 의회주의 정부 형태의 타도와 더불어 완전히 가로막힐 위험성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립의 붕괴를 감수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구성원의 의지에 구속된 그리고 그 통일성의 유지를 위하여 투쟁하는 한 정당의 딜레마에 근거를 둔 〈비극적인〉 책임이었다." "그 결과는 가장 강력한 민주정당 및 제국의회의 완전한 자기배제였다. 반 년 후에 제국의회는 이론적으로도 대연립정부를 구성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이익정책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수주의적인 원칙들이 타협능력이 있는 현실주의를 이긴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당 전략의 실패를 의미했으며, 사민당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패배였다." "1930년 3월 27일은 〈사민당과 독일민주주의 전체의 암흑의 날〉이 되었다."(38-9)


# 1930년 3월 브뤼닝 정부 출범


제2장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불만은 공산당보다 나치당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나치당의 상승은 즉각 가시적으로 사민당을 축출하고 중도우파의 지탱가능한 연립을 안정시키려던 힌데부르크(바이마르공화국 2대 대통령)-브뤼닝 계획의 파탄을 의미했다. 이미 후겐베르크─브뤼닝 내각 초기부터 제국의회의 해산공작을 벌였던 독일민족인민당의 당수─의 국민발의를 위한 선동은 당에 위신과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점차 〈이행정책〉에 불만을 품은 경제계의 재정적 후원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 전복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활동능력과 연립능력을 갖춘 옛 제국의회의 파괴에 뒤이었다. 적어도 여러 지역 선거의 결과들은 이 운동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운동은 독일민족인민당의 약화와 중도정당의 감퇴에 모든 주에서 나치당의 놀라운 성장을 대비시켰던 반면에, 공산당도 부분적으로 사민당을 제물로 삼아 득표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92-3)


"브뤼닝의 독자노선은 점차 국내정책이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재정개혁〉에 지향되어 있었으며, 그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이 문제보다 하위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들을 여러 차례의 선언을 통하여 국내정치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모든 합헌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제국의회의 배제와 해체에 직면한 모든 민주적인 정당들의 경고와 염려, 명백히 저돌적으로 성장하는 나치적 급진주의의 파괴적 선동에 대한 언급,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독일무대의 흥분과 무분별이 반영된 새로운 제국의회의 완전한 활동불능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브뤼닝의 사고와 계획 속에서 가차없는 정부령을 통하여 자신의 재정경제적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과 계획들의 배후로 밀려난 듯했다." "브뤼닝은 자신의 확고한 개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에 반대하여 또는 의회 없이 예전에 종종 위협하였던 권위주의의 길로 나아갔다."(97-8)


"1930년 7월 15일에 브뤼닝은 정치적 협상 가능성 및 타협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재정적 조치들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제국의회의 논쟁을 개시했다." "7월 16일의 표결에서 정부는 공산당, 사민당, 나치당 등 야당과 독일민족인민당 다수파의 반대로 193 대 256으로 패배하였다. 뒤이어 브뤼닝은 정부가 (재정) 보전안에 대한 협상의 지속에 전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즉시 대통령의 비상령을 선포하는 길로 나아갔다. 정부가 형성된 후 독일민족인민당 우파를 끌어들이려던 정부의 희망이 거의 충족되지 못하고, 정치적 타협이라는 민주적인 길을 포기한 후, 이 길은 이제 외관상으로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사민당이 비상령을 무효화시키자는 안을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과 연결시켜 제출하자, 7월 18일의 격렬한 논쟁과 브뤼닝의 새로운 패배가 이어졌고, 이어 브뤼닝은 대통령령을 통해서 제국의회를 해산하였다."(99-100)


"브뤼닝은 1930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우연적인 다수(Zufallsmehrheit)의 저항에 반의회 투쟁으로 대답함으로써, 그리고 흥분한 국민들에게 그러한 상태에서 조기선거라는 거의 도발적인 (무리한)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고려해왔던 경제정책을 (어쩔 수 없이) 일관성 있게 수행하고 있다는 전술적 의구심과 모든 정치적 고려를 일거에 희생시켰다. 이제 그는 선거를 통하여 의회에서 안정된 기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민주적인 의회로 인한 계획들의 위험과 교환하여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위험을 얻었다. 그 영향 면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이 더 큰 위험은 이제 정치적 지평선을 점점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바이마르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잘 계획된 모든 경제적 조치들을 환멸스럽게 만들게 될 것이었다. 이제 원칙적으로 반공화국적인 나치당이 거리와 의회에서 제일의 정치적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109-10)


제3장 공황기의 정부


"1930년 9월 14일의 선거에서 제국의회 의석수의 증가로 인한 의회 신참자들의 대거 진입을 포함하는 의회에서의 엄청난 세력관계 변화는 오직 극단적인 정당들, 특히 나치당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나치당이 9배로 늘어난 원내교섭단체가 되어 제국의회로 들어왔을 때, 이미 선거운동에서 결코 소박하지 않은 대담한 당의 기대치는 초과 달성되었다. 나치당은 민족적 보수주의자들 대신에 대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중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소부르주아층 및 농민층에 속하면서, 심리적으로는 감성적이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왕조적·권위주의적 영광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브뤼닝은 이 선거가, 예상했던 나치표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고, 향후 4년 이내에 활동능력이 있는 의회의 권력배분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황과 곤궁에 처한 정부가 극복되고 좌우의 열병에 가까운 급진적인 운동이 고갈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144-5)


"부르주아층을 선거에 끌어들인 구호들은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모든 부르주아 정당 및 우익정당들의 위협물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산당의 득표증가로 귀결되었고, 중도파의 결집은 근본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결국 〈책임 없는 자들의 승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비투표자들에 대한 호소로 5백만 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은 주로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증가하는 실업자 외에도 벌이가 나쁜 단기노동자들과 사무직원, 소기업가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여기에 소시민적 중간계급, 농민층, 청년들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축과 내적·외적인 안전을 상실하였다." "본래 '신생정당들'은 청년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 (직접적인) '행동'이라는 비합리적인 철학 그리고 청년운동의 저항 이데올로기 등을 제공하였는데, 이들은 이제 정치적인 능동성으로 바뀌었다."(149-50)


"나치당은 1930년 11월 30일 브레멘에서 9월 14일에 비해 득표수(25.5%)를 거의 2배로 늘렸다." "브뤼닝은 28개 법안을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 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어 각 정당 간의 협의─그가 제출한 프로그램의 입법적인 측면에 대한 정규적인 의회의 논의─후에 아마도 다수의 동의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 12월 3일에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이미 이틀 전에 헌법 제48조를 근거로 하여 〈경제와 재정의 안정〉에 관한 포괄적인 비상령을 발동시켰다. 1930년도 예산을 법령으로 (7월 26일) 강제로 통과시킨 데 이어 1931년의 예산도 비상령으로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는 총 104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1930년에 비해 (수입과 지출을 합쳐) 총 11억 5천 2백만 마르크의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보전정책에도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판매 위기와 실업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었다."(171-5)


"1931년 7월 1일 이후 국가 간의 모든 채무지불의 1년간 유예를 제안한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Hoover-Moratorium)은 배상의 역사에서 사실상 결정적인 한 장을 의미했다. 독일은 모든 지불을 1년간 유예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계획은 특히 상호 채무관계에 가로막혔던 유럽의 구매력과 수입능력의 회복에 대한 미국의 관심에 사실상 상응하는 경제적 관점들이 깔려 있었다. 그 계획은 여전히 강하게 결합되어 있던 미국 자본이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독일 신용능력의 붕괴를 최후의 순간에 막으려 했다. 주식시장은 후버 선언의 출판에 주가 상승으로 답했다. 유럽 최대의 배상채권자인 프랑스의 저항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했으나, 힘든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매우 넓게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정책도 위기의 정치적 결과를 극복하지는 못했다."(207-9)


제4장 대통령 내각과 〈민족적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공화국의 모든 반대자들은 〈하르츠부르크 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장교단과 방위단체 출신의 반공화주의자들과 왕조주의자들은 정치지도자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 외부 권력의 대표자들을 지지하였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제 중요한 이익단체들과 함께 기존의 부르주아적·사회민주주의적인 타협질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환영받기도 했던 브뤼닝의 권위주의적 임시처방책에 대해서도 결단코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독일민족인민당, 나치당, 철모단, 전국농업연맹(Reichslandbund), 여러 경제단체들, 독일인민당, 경제당, 전독일연맹, 그리고 여러 귀족가문들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건설적인 개혁안이나 혁명계획을 위한 공통분모 혹은 정치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뒤이은 파펜과 슐라이허 정부의 영향 아래 있었던 '권력공백'의 단계는 이미 이 순간에 두드러졌던 것이다."(216-8)


"후일 후겐베르크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하르츠부르크 자체는 (현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의 선포이자, 〈민족적 반대파〉 연합이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했으며) 특히 우익반대파가 공동의 대통령후보를 합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서도 후겐베르크는 분명 여전히 히틀러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천재적인 동맹자들, 〈민족적 부르주아지〉 및 경제계의 대중선동적인 나치의 활동에 대한 거부감을 힘닿는 대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서 그는 순진한 자의식에서 추가적인 독일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거기서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다른 한편에서 독일민족인민당 및 나치당과 더불어 독일민족인민당과 중앙당 사이에 있는 많은 정당들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평행선 속에 설정될〉 수 있는가였다. 그렇지만 나치당은 하르츠부르크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자신의 노선을 조종했다."(221)


"1931년 11월 25일, 한 나치 이탈자에 폭로된 〈복스하이머 문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그것을 실행할 계획을 작성한 것이었다." "이 문서는 현존하는 국가질서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타도된 뒤에 나치의 집권이 오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어 〈나치 돌격대, 지역방위부대들〉 또는 유사한 조직들은 유일한 질서의 담지자로서 〈공석이 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각 내각의 기능을 넘겨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 반역사건의 법적인 추적은 제국고등검찰과 제국대심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국정부가 마지막 시간에 급진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려는 실천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 또 정치적 측면의 판결을 정치적으로 매우 오락가락하는 사법부 관료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서 바로 지금 우파와의 연립 탐색, 즉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를 둘러싸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253-7)


"그 사이에 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 파멸적인 영향은 공적·사적인 생활 전체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국제관계의 수정을 위한 브뤼닝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 지불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열었다. 후버 모라토리움은 일시적인 비상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것은 최종적인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빠르게 성장하게 한 전기를 마련했다." "브뤼닝의 올바르고 진정한 긴축재정 정책이 외국에서 얻은 신뢰는 경제적·군수기술적인 문제들의 이성적이고 전체적인 규정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협상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은 독일 내에서 그의 낮은 인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결국 배상회의가 1932년 4월과 7월로 연기되자, 군축회의의 결의안은 심지어 1932년 12월까지 지연되었다. 이 결의안은 결국 그의 후임자들과 이어서는 히틀러가 세밀한 계획과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을 따서 자신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260-1)


제5장 제국대통령 선거


"힌덴부르크는 단호하게 자신의 고유한 목표로서 모든 정치적 노력의 중심을 우파정부 건설에 옮겨 놓았다." "재선에 나서기로 결심한 힌덴부르크의 최종적인 결론은 특징적인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파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나의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늦어도 5월에는 치러져야만 할 프로이센 선거 이후에 집중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협상들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제 정부를 우파로 이동시키고 〈집중정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브뤼닝 체제의 가장 중요한 지역기반인 프로이센 정부를 교체하는 것 또한 말하자면─완전히 〈민족적 반대파〉의 의미에서─제국대통령궁의 정치적 계획 일정에 포함되었다. 공화주의적 기관들의 권력 상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될 사건들은─이는 브뤼닝의 실각과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폭력적인 작전이다─그러한 계획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지 직접적인 깜짝 작전의 결과는 아니었다."(291)


"적어도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와 대결하여 명백한 승리를 거둔 것은(49.6% : 30.1%) 민주적 결집후보의 첫 번째 목적을 충족시켰다. 이는 또한 점차 커지던 나치의 권력 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한계를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었고, 나치 지도부의 고조된 분위기를 당의 상황에 위협적인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뜨렸다. 뒤스터베르크가 재기불가능할 정도로 패배한 것(6.8%)은 〈민족적 반대파〉 내부의 경쟁관계를 명백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후겐베르크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철모단 그리고 그 밖의 〈민족적 단체들〉은 의문의 여지 없이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나치당의 매우 영향력 있는 급진적 선동에 빼앗겼다." "나치의 득표수는 1930년의 제국의회 선거와 뒤이은 지방선거에 견주어서 추정해보면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본래 당이 기대했던 수준에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관찰자들의 추정보다도 약간 뒤처져 있었다."(326)


"헌법은 제1차 선거에 대해 절대다수를 요구했으나, 힌덴부르크는 간발의 차로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헌법의 여러 규정에 따라 제국대통령의 제2차 선거는 4월 10일로 예정되어 되었다. 우파의 다른 매력적인 통일후보자를 얻으려는 시도들과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노력들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쟁관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얼마 후에 곧 자신은 히틀러를 선택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신뢰의 파괴에 대해 좌파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슐라이허도 몹시 화가 났다. 슐라이허는 아마도 히틀러를 쳐부수기 위해 황태자의 입후보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선거에서 히틀러(36.8%)는 힌덴부르크(53%)에 맞서 더 높은 득표의 증가를 달성(6.6% : 3.4%)했으나, 수많은 선거연설에서 표현되었던 2천만 표에서 3천만 표의 기대는 명백히 성공하지 못했다."(328-32)


"어쨌든 힌덴부르크는 주로 1925년에 그에 반대했던 집단들의 힘으로 재선되었고, 따라서 그의 재선은 이제 압도적으로 정반대되는 기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25년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1918/1919년의 바이마르〈체제〉를 반(反)공화주의적으로 바로 잡아줄 것을 기대했다면, 1932년의 투표는 명확한 다수가 안정된 민주적 상황 그 자체의 유지와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었건 간에 말이다." "이 선거는 공화국의 마지막 승리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공화주의자들을 때려눕히며, 이제 그 반대자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부를 순치시키려 했을 때, 힌덴부르크는 중요한 모든 과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화는 시시각각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한 민족의 정치적 판단력의 상징적인 이미지로까지 되었다."(333-5)


제6장 브뤼닝의 실각


"1932년 4월 13일, (제국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을 겸임했던) 그뢰너는 친위대와 그에 속하는 모든 참모부와 시설들, 돌격대 예비대, 자동차 돌격대, 해양 돌격대 및 기수 돌격대, 항공단, 위생단, 지도자학교, 돌격대 병영, 병기창들에도 관계된 돌격대 금지를 공표했고, 이어 4월 14일 경찰조치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가택수색과 광범위한 압수뿐만 아니라 나치본부인 뮌헨의 〈갈색의 집〉의 임시점거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경과는 나치 측에서─괴벨스의 메모가 보여주듯이─준비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슐라이허 측의 즉각적인 대적행위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추정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돌격대 부하들에게─그는 그 수를 40만이라고 계산했다─새로운 합법적인 전술을 호소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을 〈이제부터는 단지 당 동지들이라고만〉 표현했으며 박두한 주 의회선거를 〈복수의 날〉로 일컬었다."(349-50)


"슐라이허가 그뢰너와 결별한 결정적인 요인은, 방위단체들의 탈정치화를 통하여 우익을 안전하게 포섭하는 문제와 내정적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가 통제하는 군사력 강화를 성취한다는, 그가 선호하던 계획이 내무부의 돌격대 금지를 통하여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모든 〈군사적이고자 하는 조직들〉에 대해 유보적이었고 특히 철모단의 점증하는 정치화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현실정치적인 주의력은 나치당의 상승에 집중되었다. 그는 국방정책에 대한 나치당의 긍정적인 태도를 제국군대에 적대적인 급진적 좌익에 대한 균형추로서 계산에 넣고, 그들의 쿠데타 의도를 온전한 제국군대를 동원하여 중지시키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의 행진을 세계경제 대공황 동안의 책임을 통해서─그리고 고령의 힌덴부르크가 그러한 실험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보장해주는 한─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361-3)


"그의 협력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뢰너의 돌진〉을 통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졌던 이 기본구도를 슐라이허는 이 몇 주뿐만 아니라 다음 몇 달간 확고히 견지했다." "슐라이허는 정부의 기반을 우측으로 넓히려는 노력이 〈그의〉 총리인 브뤼닝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희망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치당과의 교감을 넓혀 갔으며 이제는 그뢰너뿐만 아니라 브뤼닝도 실각시키는 쪽으로 일을 꾸몄다. 〈우리는 슐라이허 장군으로부터 위기는 계획한 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괴벨스는 이렇게 들떠서 승전가를 구가하였다. 브뤼닝의 실각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제 누가 의회적으로 묵인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의 해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거둘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개혁가들인가 혹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전체주의자들인가에 있었다."(363-5)


"한편 4월 24일 주 의회 선거 결과 (사민당 지도부가 명명한) 〈나치공산주의자들〉이 의석의 절대다수인 52%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다수파 형성이 결국 봉쇄되었던 동안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수많은 불신임안과 선동안─한편으로는 볼셰비즘에 대항한,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대항한 수없이 인용되었던 방어벽으로서─으로써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동의 의회 내 승리를 거두었다. 나치당은 정부와 공산당을 반목시켜 이용했고, 공산당은 다시금 민주주의 세력의 모든 유보에 대해서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으로의 길은 바로 파시스트적 중간정권을 거쳐 간다는 천편일률적인 기대로써 대응했다. 이제 독일의 모든 의회들에서, 새로운 권력분배의 긍정적 이용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열어 놓지 않은 채 민주적 메커니즘의 기능능력이 마비되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인수를 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일관된 부정성, 즉 권력공백이었다."(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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