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1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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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권력구조의 문제


제1장 바이마르공화국의 형성에 대하여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의 길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귀족과 독일 부르주아층의 결합을 거쳤다. 그리하여 1870/1871년의 승리는 혁명의 정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결산일 뿐만 아니라 독일적 정치발전과 서방적 정치발전 사이의 분열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민족적 성공들은 민주적 이상의 빛바랜 광채보다 통일의 사상과 성공의 경험으로부터 더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자유주의자 다수를 비스마르크 지지자로 만들었다. 민족적 이데올로기 앞에서의 시민적 자의식의 이 내적 붕괴는 독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단절을 표시했다. 봉건적 사회구조와 강력한 관료제에 기초한 〈민주적 장식물로 치장한 군주적 국가〉는 이제 시민을 안전하게 길들일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의 헌법조작,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들, 프로이센 지배의 군사정치적 및 정신적 전통을 통하여 대의제적·민주적 발전은 저지당했고 세기 전반기의 징후들 역시 뒤로 내던져버려졌다."(50-1)


"1918년의 혁명은 양면성─패전의 비참함과 〈응급처방이자 전술적 방편〉으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불충분함─을 가진 사건이었으며, 공화국은 국가질서를 전혀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고 강력한 봉건적 및 관헌국가적인 기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요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대두하였으며 그 존재가 독일제국의 패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약체성은 이중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과 젊은 국가의 역사적 기초에 대한 의식의 심화가 어떤 시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활발한 반대세력들은 겉보기에만 그리고 단기간에만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혁명이 일어났던 몇 주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의 선전을 벗어나지 못한 정치적으로 피동적인 대중을 곧 다시 장악하였다."(64-5)


"급속히 재강화되는 대산업, 10만 병력으로의 감축 뒤에 팽팽하게 자율적으로 조직화된 제국군대, 새로운 질서에 의해 거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관료의 중단되지 않은 권력, 곧 다시 화해불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전락하는 정당들,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대변하는 실질적으로 강화된 집단들, 사려 깊게 보호되고 섬세하며 모든 신분상의 하락을 배상하고도 남는 위신에 대한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욕구, 특히 순수한 민주적 타협을 거부한 군주적-보수적 및 민족주의적 반대운동들의 세력 및 영향력 강화: 이 모든 원심적인 세력들이─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공화국의 권력분배를 문제 삼았고 무의식적이지만 상당히 효과적으로 끊임없이 발호하는, 위기의 순간들에 위험스럽게 발생하는 아주 상이한 상대들의 연합으로 결합되었는데, 약한 민주주의 국가는 이들에 대해 충분한 방어수단도, 효과적 통합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78-9)


제2장 의회민주주의에서 대통령제 국가로


"전후 몇 년간의 난제들에 직면하여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부 부처 관료들의 반의회적 활동들에 도움이 된, 각료에게 폭넓은 전권을 양도한 결정은 입법부를 상당한 정도로 약화시켰다." "의회적 공화국의 민감한 구조와 그것을 지탱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들이 흔히 정부형성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초래했기 때문에 곧 성과 없는 연정협상 대신에 그들의 전문지식, 사회적 처지 및 정치적 태도 덕분에 관료층의 신뢰를 보장받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를 세우려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헌법이 그것에 허용한 권력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제국의회는 통제기관으로서 더욱 강하게 공격을 받았다. 경제적 관계들의 복잡화로 국가가 경제에 점점 더 간섭을 확대하고 정당은 이익단체들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권력은 입법부로부터 국가관료 및 사적 관료의 수중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의회는 더 이상 아무런 통제를 행사할 수 없었다."(86-9)


"의회적 정치구조를 파괴하고 비스마르크-빌헬름적 관헌국가를 복구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분화된 정당구조 덕분에 정부 형성은 연정의 틀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불안정한 타협의 기초 위에서 사람들은 의회적으로 약한 내각, 대다수의 경우에 심지어 단지 관용받는 소수내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부의 결성은 의회 다수당을 통한 당연한 권력 인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별로 안정적이지 못한 연립정부를 창출하기 위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힘겨운 협상을 의미했다. 그러한 협상에서는 실제적인 연정강령뿐만 아니라 장관 자리의 분배도 중요하였다. 야당이 여당을 교체하거나 그 거꾸로 교체하는 관습은 의회의 다수파 구성 상황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동시에 계속적인 연정구성의 어려움들은 정부의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요와 더불어 이미 일찍부터 정부 구성에서 제국대통령의 기능을 강화시켰다."(90)


"이론적 토론은 항상 재삼재사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당국가적인 실제 사이의 차이를 물고 늘어졌으며, 이 대립들을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분별없이 동일시했다." "의회적인 정당국가를 둘러싼 징후적 논쟁은 이미 세계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기 오래전에 상당한 규모에 달했다. 한 유명한 법학자의 1927년 베를린에서의 총장 취임 연설은 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 권위주의적 국가론의 초안이 구체화되었으며 이것을 대통령제 정부 그리고 특히 파펜 실험의 문필적 및 정치적 지지자들이 수용할 수 있었다. 정당국가에 대한 이 비판 역시 정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위탁에 결속된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의 의원에 대한 〈순수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칼 슈미트가 동일한 이름의 글에서 (극복해야 할)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기초〉라고 일컬었으며, 그것이 1919년 독일헌법도 완전히 지배했다."(98-9)


# 정당정치 내의 의원들이 토론이 아니라 파벌들의 결정─책임지지 않는 익명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적) 정당국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


"반동적-군국주의적 및 민족주의-권위주의적 집단들의 비타협적 태도 못지않게 파국적이었던 것은 여기서 새로운 헌법의 구속력 없는 자유주의를 내키지 않아 했고 혁명사건들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단초들을 배신당한 것으로 믿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대중들의 실망으로 인한 냉담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의회는 극단적인 좌·우 급진정당들을 얻었으며 그 강세는 곧 집단들의 자유로운 대결과 건설적인 야당의 여지를 거부했으며 의회적 메커니즘을 결국 치명적으로 마비시켰다." "〈순수하지 못한 다수〉로의 그들의 성장은 의회를 완전한 마비와 지속적 자기해체의 상태로 빠지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초의회적이고 권위적인, 민주적 헌법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결국 파괴하는 조치들만이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바로 이것이 결국 민주적 틀을 파괴했고 집단들의 끝없이 고조된 적대상태를 갑작스런 폭력적 종말로 몰고 갔다."(108-9)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헌법결정의 도입과 확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명한 제48조는 계엄입법과 비상사태입법의 전통에 접속하였다; 그것을 헌법으로 삽입한 것은 국민의회에 의해서 많은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민주적 성향의 의원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당시 국가의 내·외적 상황에 직면하여 가결되었다." "여기서 제국대통령의 예외권과 비상령권의 삽입은 분명히 (민주주의자였던) 에버트의 인물에 맞추어져 있었고 결코 헌법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헌법의 온전한 보존과 헌법적 질서의 재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제48조의 적용도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권위주의적 해결책의 가장 용감한 지지자들조차도 이 조항이 언젠가 매년 계속하여 정부의 모든 시도들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계산하지 못했다."(116-8)


# 힌덴부르크 제국대통령 선출 이후 권위주의적 대통령군주제의 기반으로 해석·활용되었다.


제3장 민주적 공간에 있는 정당들


"유일하게 의회정치를 가능케 했던 정당들의 연정(聯政)은 점점 더 이익단체들과의 연결 및 그들 조직의 진입을 예상해야 했고, 이는 정당들의 내부구조와 기능적 배치를 계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공화국의 정당구성이 전체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은 채 과거 붕괴되었던 군주제 상태에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국가가 지속적 안정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가정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빌헬름 국가의 정당들은 갑작스럽고 결코 예상하지 않았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위치, 즉 임시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첫 번째 책임자라는 아주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내외적으로 경직화 경향, 즉 군주제적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당과 의회가 맡았던, 소극적이고 찬반에서 거의 무의미한 역할에 부응하는 외형과 내용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143-4)


"가령, 사회의 가장 약한 부류인 〈노동자 계층의 삶의 원칙〉으로서의 철통같은 조직, 수와 조직 면에서 뛰어난, 거의 군대와 같은 결합을 통한 대중의 구조화를 자랑했던 사민당의 전통적 형태들과 탄탄한 결속은 흔들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러한 이질화 과정과 이에 수반한 지도부의 마찰, 그리고 독립사민당(USPD), 스파르타쿠스동맹 및 공산당의 이탈을 가져왔던 극좌파에서의 분리경향 등에 맞서서, 곧바로 사민당 중도파의 조직적 이념적 경직화가 시작되었다. 중도파는 과거 투쟁에서 전수되었던 조직의 내부 원칙에 의존했고, 또한 지도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외부와 관련한 당의 전술과 당 내부의 통합과정에서도 단호하게 전쟁 전의 전통에 의존했다." "특히 〈반동적〉 제국군대에 대한 불신은 처음부터 공권력 중 군대와 같은 권력요소에 대해서 본질적인 영향력 행사를 방해했고, 이 요소가 결국 우익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144-6)


"바이마르 국민의회에서 계속된 경향, 즉 사민당 의원들 중 절반 이상이 노조 경험을 갖고 있고, 그들 중 3분의 1 이상에게 노조관료가 본업이었다. 설사 그들이 정식으로 당 경력에 연결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주 의회, 지자체 의회 그리고 작은 행정기구에서 일했다 하더라도, 당과 노조간부들의 권력과 정치양식은 꼼꼼한 관료지배의 빛과 그림자 모든 면을 지니면서 의회활동, 즉 당의 의회주의적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고 제국의회 원내교섭단체의 전술적 활동을 현저하게 제한했다." "사민당 의원들은 사적 관계를 통해 당 지도부와도 확실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사민당 원내교섭단체의 행동과 주도권은 자주 당론과 의회 외부에서 활동하는 다른 기관의 결정을 선도했다. 거기에 계속적으로 현실적인 개혁적 방향으로 기울었고, 자신들의 조합원들이 사민당 지지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회주의 계열 노조들의 영향이 첨가되었다."(152-3)


"긴장의 해결방식과 기존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사민당의 입장은 다른 민주정당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현실노선을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주의의 참여 하에서 구성된 바이마르 연정의 안정과 유지─이것은 바이마르의 기회였다. 이것 대신 우리는 전통적 야당의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하고 당 구조 및 당의 이데올로기적·마르크스적 이상을 새로운 과제에 적응시키는 데 머뭇거리는 사민당의 완고한 망설임을 기록한다. 이는 또한 우파 및 극좌파의 모든 접촉시도를 반대한 민감성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었던 유권자 계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부동성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해야 할 시점에서 우유부단하고 이중적인 그리고 결국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결정했다." "이로써 나치가 승리하기 오래전에 이미 공화국 최후의 보루로서의 그들의 권력은 거의 저항 없이 차례로 무너졌다."(161)


# 주요 우파 정당들

1. 독일민족인민당(DNVP) : 반反혁명·반反공화주의 세력들을 주축으로 결집된 정당

2. 독일민주당(DDP) : 공화국의 안정과 자유주의 구축을 우선시한 부르주아 정당

3. 독일인민당(DVP) : 국내정치보다 강대국과의 외교정책을 중시한 부르주아 정당

4. 중앙당 : 반反극단·반反권위주의적 태도로 타협자세를 유지한 가톨릭 기반 정당


"중앙당이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주 안정적으로 그룹화되고 마지막까지 사회적으로 다채로운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남았던 반면,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뿐만 아니라, 온건한 보수주의적-기독교적 우파와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변형과 해체 과정의 소용돌이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큰 흐름은 사민당의 조직 자체는 흔들지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 활동은 마비시켰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이러한 역동성의 양극점이 되었다." "〈독일중간계급 제국당〉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유사 정당들〉 역시 바이마르 정당체제의 이러한 위기적 전개의 테두리에서 일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파괴적 효과는 의회소속 정당들의 통합관심을 여론과 유권자의 영역에서 민감하게 교란시켰고─정치적 대립을 화해할 수 없는 개별 이해들의 적대감과 증오의 태도로 변형시킴으로써─다수당을 구성하기 위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179)


제4장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발흥


"의회 메커니즘을 결국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 두 정당은─각자 자기 나름대로─1918년 혁명과 관련된 문제 덕분에 형성되고 프로필을 얻게 되었다. 독일공산당(KPD)은 혁명이 의회적인 경로로 들어서고 바이마르공화국의 타협안이 소련식의 발전 과정에 의도적으로 대립적인 방향을 취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서 평의회 혁명가들은 다수파사민당(MSPD)의 길에서 이탈해나갔다. 나치당(NSDAP,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소속당)은 이에 반해 혁명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이 사건은 보수적-군주적 집단에 의해 역사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특수집단들은 일반적인 야당적 태도를 넘어서서 우선 혁명과 패전의 결과로서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어떤 전술적 타협에도 반대하는 반(反)혁명적 활동을 전개했다."(183-4)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의 형성 과정과 내정적 위치는 일정한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것은 조직형식을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이들은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명령구조로, 의회적 타협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획일화된 독재 방식으로 맞서고, 연정과 야당의 위치를 주고받는 게임에 기초한 민주적 연속성을 애초부터 봉쇄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내부 운동과정은, 이것은 자유로운 국가 내의 사회 유동성의 정치적 표현인데, 정치적 자유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 합법적 표현 형식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역동적인 정치적 발전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민주적 의미에서 다수당 연정이나 야당연합의 형성에 지속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의회정당들의 한계를 넘어서 의회를 초월한 영역으로 치달아, 결국에는 완전히 전체주의적이고 어떤 화해도 거부하는 정치적 구원종교의 영역에로 흘러들었다."(184-5)


"1919년 창설된 코민테른은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면서 무엇보다 서방에서 실패한 혁명 대신 러시아 혁명의 영광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독일공산당은) 명백히 모스크바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당 노선의 고립된 성격이 이러한 제한을 통해 그만큼 더 첨예하게 바이마르공화국의 내정적 역동성 한가운데서 드러난다. 이 성격은 1928년 이후 당의 성장, 곧 영향력 증가와 유권자의 바람이 갖는 일정한 고유 비중을 통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명령과 복속 구조는 이러한 최악의 경우에조차 견지되었고, 대중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간부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은 원격조종되었고 종교와 비슷한 형태의 기대내용들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호전적인 나치조직과의 경쟁에서 더욱 강화된 바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반란시도들이 실패하고(1918~1923) 의회제공화국이 안정화되면서 공산당은 합법적 영향력을 통해서 대중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었다."(194-5)


"극단적 저항운동으로서 나치즘은 국민의 정치·사회적 구성에 대한 생각에서만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반(反)자본주의적 논리와 혁명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질서, 관료적 관헌국가를 전복하기보다는 그것의 보다 철저한 조직화와 계서적이고 명령추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기반 및 권력확장을 지향하는 일련의 주장들을 가지고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나치당은 단순한 반항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적개심운동'으로서 시작했다. 군사적 패배와 〈과다한〉 민주적 변혁으로 비로소 정치화된 소수의 실망자들이 그 핵심을 형성했다. 1930년 이후 대중정당의 조직화된 지지층, 특히 간부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자기 신분과 가족 내에서 스스로를 국외자로서 느꼈으며 노이로제가 될 만큼 자존심이 상했고, 균형감각을 갖지 못하고 적응을 잘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밖에도 괴벨스 현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된 프롤레타리아화한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01-2)


# 나치운동의 세 가지 뿌리

1.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반反의회주의 감정에 기반한 저항

2. 경제적·사회적 위신의 하락을 두려워한 '중간계급의 공포'

3. 청소년의 세대 문제와 낭만주의의 반항적 분위기 이용


제5장 정치적 공간에서의 급진운동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거의 모든 공공생활 영역의 논의를 지배하였던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위기'라는 표어는 특히 전통적인 정당의 본질과 기능을 겨냥한 것이었다. 민주적 정당들의 운동능력, 수용능력 그리고 재생능력이 거의 사라져 간 대신에, 낭만적·유기체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대표체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커졌다. 즉, 정당 대신에 '운동' 혹은 '연맹', 사회 대신에 '공동체', 민주적 조직 대신에 권위주의적 종자구조, 의회주의적 조정 대신에 혁명적 투쟁, 자유로운 결정 대신에 무조건적 복종, 다원주의 대신에 완전한 통합 등이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잡아갔다. 그 배후에는 특히 '낡은 것'의 지배적 계서제(階序制)에 대한 전반적 저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저항은 세대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초시대적 성격을 지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정도가 특히 강했다."(239-40)


# 종자구조(從者構造, Gefolgschaftsstruktur)

'종자'(Gefolgschaft)란 본래 영주, 군주 혹은 귀족과 종자 사이에 신뢰와 복종에 기초한 관계로, 게르만 법률의 본질적 요소인 commitatus 및 이로부터 파생된 모든 현상들을 지칭하는 용어. 나치는 이 개념을 독일사회의 모든 영역, 특히 노사관게에 도입하여 지도자-종자의 도식을 발전시켰다.


"나치는 권위주의적 정치공동체의 이상에 가장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을 만들어 냈으며, 모든 본질적 특징들을 통일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는 합리적 논리를 비합리적 비전에 기초한 신념공동체(신앙연합체)의 신비로운 연대감으로 대체하고, '지도자' 속에 체현된 '일반의지'를 통하여 무미건조하고 역겨운 일상정치를 조화로운 '민족공동체'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조직원리들이었다. 여기서 '낡은 것들'에 대한 청소년─청소년은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좌파'단체들이 그랬다) 혹은 혁명에 대한 책임(그 '민족적' 반대파들이 그랬다)을 덮어씌웠다─의 저항은 조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슬로건들은 급진정당들의 (젊은) 연령 구성으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이 슬로건들은 '상대화 경향이 있는 지식'보다는 교양에 희의적인 '행동'을 중시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교 및 대학생의 활동영역에서도 일찍 호응을 얻었다."(246-7)


"활동적인 전쟁세대 및 전후세대, 〈특히 참전자들〉의 모집에서 외관상 군대와 유사한 대형과 엄격한 기술적 구성으로 반대파의 준군사조직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경쟁자가 된 것은 지도자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에 충실하고 헌법을 보호하는, 심지어 외국에 지부를 두기까지 한 대중조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반공화주의적 정당들과 그 준군사단체들의 파괴활동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또한 해체되던 종파 집단 및 단체의 민족지상주의적·권위주의적인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이 단체들은 역설적으로 제국기치(참전자 및 공화주의자연맹)가 지켜낸 상태를 극복한 후에 본래 실천하고자 했던 규정을 넘어서 낭만적·영웅주의적인 지도자 국가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인지대(Nienandland)로, 민족공동체라는 초민주적 독재의 비전으로 나아갔다." "이 소수파는 결국 (공화국) 말기에 정당정치의 개편으로 〈민족적 반대파〉에 흡수되었다."(268-9)


"제국기치는 공식적으로 350만 명의 회원이 속했으나, 시대의 민주주의에 걸맞은 어떤 것을 갖지 못했다. 이 조직의 존재는 정치적 반목의 격렬함과 국내정치에서 공화국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치 돌격대(SA)는 (제국기치가 해체되면서) 점차 비워진 공간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돌격대는 거리에서도 나치당의 권력성장이 존중받도록 배려했고, 폭력과 테러로 시민을 협박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집회, 행진, 가두투쟁 등 공공영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강력한 반(反)제국기치 세력이 된 돌격대는 오랫동안 철모단의 대중운동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도 결국 당군대(黨軍隊)는 〈민족적 반대파〉의 모든 연합단체들과 전사단체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과 더 구체적인 목표를 관철시켰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나치당의 〈물리적〉 권력도구로 조직하여 투입하고자 하였다."(269-70)


제6장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는 국내정치를 형성하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민족주의 사상에 빼앗겼으나, 사회주의의 발전에 그 흔적을 남겼다. 19세기는 민족주의 사상이 특히 서방 민주주의의 경험과 제안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게 차단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전쟁의 패배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로부터 국내외 정책에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단 과정은 독일인들의 저항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거대한 정치적 흐름들 사이의 논쟁을 민족주의적 고립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이 흐름들은 중재되지 못하고, 따라서 거의 불가피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서로 충돌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한 배상이행 정책의 대표자들조차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공개적 고백으로부터 국제관계의 냉정한 평가로 물러섰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공화국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284-5)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 최대의 정치적·세계관적 관철능력을 발전시켰는데,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이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전체주의적 행동계획과 구성계획을 통해서 민주적 사회의식 및 국가의식을 파괴하는 데서 차지하는 전술적·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전체주의적 운동이 적과 동지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사회적, 정신적, 종교적으로 위기의식에 휩싸인 당대인들에게 제공한 것은 〈속죄양의 철학〉이라는 편안한 탈출구였다. 이는 불쾌감과 실패, 공포와 분노의 근거를 잘 묘사하여 손쉽게 특정의 소수 그룹에 뒤집어씌우려는 아주 오래된 심리적·의식적인 욕구였다. 모든 박해의 기반이 된 이 욕구는 결국 위기의 탈출구로,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사람의 수중에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실망, 적응의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의 부정,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비이성적 공격성 등은 증오감으로 귀결되었다."(289-90)


"나치즘은 민족지상주의적·전체주의적인 정당으로서보다는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위신 요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중간계급 선박의 이른바 조난구호자로 나섬으로써 대중운동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신분제적 감정의 영역, 즉 사회의식의 영역에서 긴장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상황, 더 대규모의 경제정책적 융합 및 기능적 종속 경향 등의 압력 아래 있었다. 이 계층은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협에 대항하는 보루, 경제적 상태와 사회 이데올로기적 요구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의 해소책, 신분제적 특수 존재─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위기에 책임이 있는 실망스러운 민주주의를 넘어─의 구제자를 찾았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들이 관찰했듯이, 그런 추동력으로부터 성장한 것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 전투적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이 계층의 지속적인 몰락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되었다."(300-1)


"이제 가장 급진적인 반대파 정당이자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반공운동 조직인 나치당을 선택한 사무직원, 부르주아지, 농민 등은 아직 거의 초안도 잡히지 않은 나치국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우선 현존하는 국가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민족주의적 혹은 신분제적이고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적인 구호 혹은 계급투쟁에 적대적인 구호를 동원해서 달성했건 간에, 나치당은 중간계급의 거대한 정당이 되었다. 나아가서 나치당은 새로운 (비)투표자, 자포자기에 빠진 실업자들과 본능적 확신에 찬 기회주의자들에게도 손을 뻗칠 수가 있었다. 나치당은 특히 그 경제적 토대를 빼앗긴 계층의 위신 욕구를 채워 줄 신분제적 질서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민족적〉(national)이란 이 중간계급적 의미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을 뜻했고, 〈사회주의적〉이란 반(反)금권정치적인 것을 의미했다." "신분제 원리는 평준화 위협에 대한 균형추로서 사무직원들과 관리계층에게도 유인력을 가졌다."(315-6)


제7장 관료제 문제


"왕조적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직업공무원 계층은 귀족과 더불어 신분제 국가의 붕괴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으며, 인민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회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집단을 의회민주주의와 결합시키는 일은 그들의 강력한 신분제적 결속으로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비스마르크 시기에는 프로이센 내무부장관이었던 푸트카머의 조치를 통해 공무원제도의 절대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어 전통적으로 계몽된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봉건제에 적대적이었던 이 계층의 태도는 카스트의 계서제적 폐쇄성으로 대체되었다. 또 이 카스트는 종종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습관과 세계관이 동일했고, 특히 보수적 당국의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통일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결정권을 갖는 군주는 엄격하게 조직된 행정 계서제의 꼭대기에 있었다." "〈공무원 계층의 탈정치화〉 요구는 바로 이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328-30)


"공무원 계층이 국가의 기본적 제도로서 어떻게 헌법의 전체적 연관관계 속에 편입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관료계층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핵심집단이 민주주의 본래의 문제점들에 거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집단의 경향과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점들을 행정기술적 과제로 환원시키고, 과도한 전문화를 통하여 법을 〈법학적 대수표〉(Logarithmentafel)로 만들어 입법부를 회피하는,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활을 명령에 끼워 넣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의회의 통제와 내각 상급자들의 취약함은 주로 이러한 기술적 사고방식을 강화시켰는데, 이 사고방식은 다양한 정치적 음모, 심지어는 〈관료의 사보타지〉에 공간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또 기술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 질서의 권위주의적 국가상, 즉 계서제로 등급화된 관헌국가의 형식적 신격화가 사회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유동성이 있는 국가 구상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336-7)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 문제와 관련하여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표제어로 종합된 현상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애매한 개념은 사법부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명료하다는 것은 기준들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상징한다." "본래 사법부는 직접적인 국가기구이자 관료적인 실행기구라는 이중적인 기능 덕택에 애매한 중간입장을 취했고, 여론 형성과 조정에서 특히 효과적인 심리적 도구로 작동했다." "모든 법질서는 그 형성으로 인해 관련 공동체에서 권력의 배분에 직접 영향을 미치므로, 모든 법체계에서 사법부는 남용될 수 있다. 이것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현저했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특히─전문적인 특수화 경향과 학문적 법률가 신분의 사회적 폐쇄성 경향 속에 각기 포함된─재판관 권력의 증대였다. 완고한 인사정책은 정치적 과정과 헌법의 발전 속에 표현된 법 개념의 약화와 해체를 더욱 심화시켰다."(348-50)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정치평론가들은 검은 제국군대의 불법적 기구들 및 그밖의 군국주의적 우익급진주의 현상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이 반역으로 처벌받았던 반면에, (반란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의 재판(Feme-Prozess)에서 (바이에른의 우익정권 내지 히틀러 반란사건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치 장교들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반역죄 재판에서 히틀러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 재판 자체의 실행, 주심에서 제국재판소 검찰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만 등은 사법관료 수뇌부의 정치적 취약성 혹은 약점을 증명했다." "그러한 현상들의 정치적 영향은 결국 극히 무의식적으로도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판결들은 증오심에서 부당하게 취급된 사람들, 회의적인 경멸과 권력현실적인 사법부의 평가를 통해서 이득을 본 자들로 채워져 있다."(354-5)


제8장 경제정책적 권력구조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적 권력구조는─정당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 행사와 정치적·경제적인 인적 연합체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관료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각종 정부 위원회들의 복잡한 연결과─경제정책의 협상과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도 〈전문가 이데올로기〉로 위장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은폐된 그리고 관료적이고 〈전문가적〉으로 정당회된 직접적인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정치적 공간에서 찾아내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민주적 기구들에 의한 최소한의 통제도 빼앗긴 상태였다. 정치에서 이익정치로, 그리고 이익정치에서 정치로의 이 지속적인 변화는 집중 과정, 즉 (연합철강이나 IG 파르벤 같은) 독점적 카르텔 및 콘체른의 형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중 과정은 정치적·경제적 연결 과정들을 떠받쳤고, 여기에 과두제적 성격을 부여했다."(387-8)


"카르텔과 콘체른 체제는 모든 경제생활을 자신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과두제적으로 구조화된 조직들과 영향력 있는 이익적 결합들의 네트워크로 덮어씌웠다." "이에 대한 실질적 조치들은 매우 약했으며, 특히 민족정책적 관점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다. 만약 광범위한 반(反)트러스트 입법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말할 수 없었다면, 여기에 기여한 것은 공산당과 부분적으로는 사민당 측에서 자본주의의 이러한 〈최후의 과잉〉이 지닌 불가피성에 대한 결정론적 확신이었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민당 온건파에게서는 희망적인 견해가 발전될 수 있었다. 즉, 이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원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사민당의 지도적인 경제이론가는 1927년에 현존하는 경제에서는 모범적인 민주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89-90)


"〈독점 자본주의〉의 경제적·합리적인 자기 정당화는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경제적인 반론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이나 정치 일반과 관련된 반론에도 완고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합리화운동의 전반적인 틀 속에서 카르텔 운동과 콘체른 운동이 갖는 경제적 효율성에서 출발하였고, 다음에는 이윤, 임금, 가격 등이 발전과 인구에 대한 배분을 고려하였다. 반면에 이 자기정당화는 그것이 정치권력의 배분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무시하였다. 세계경제 대공황의 발생과 전개과정은 여기서도 경제와 정치의 밀접한 결합을 보다 더 분명하게 조명해 주며, 결국 경제 체제에 비해 정치 체제가 허약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이 경제 체제는 구조적·주기적 원인으로 발생한 각종 어려움들을 정치 수준으로 이동시켰고, 아래로부터, 즉 해고된 노동자들, 사무직원들, 소상점주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실업으로부터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을 흔들리게 하였다."(392-3)


제9장 제국군대


# 제국군대(Reichswechr)의 세 가지 뿌리

1. 베르사유 조약이 가한 압도적인 구속력

2. 1918년/1919년 독일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

3. 제크트 장군


"독일 정당들 중에서 비무장 화해정책을 가장 선호하였던 사민당이 1919년 당시 재임 중이던 바우어 내각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평화군을 위한 예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평화조약에 서명한 지 불과 일주일 후에 새로운 제국군대의 재건을 위한 첫 조치를 취한 것도 바로 이 내각이었다." "새로운 군대가 납세자들의 희생으로 군사적으로 쓸모없이 단순한 병사놀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베르사유 조건의 틀을 넘어서야만 했던 것이다." "사민당의 상대자들은 정부에 결여되어 있던 것 모두─명확한 목표 설정, 단호함, 결연함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주민계층의 후원─를 예전에 제국장교단의 형태로 더욱더 많이 보유하였다. 제국장교단은 1918년 11월의 붕괴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으며, 특히 〈임시 제국군대〉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증명되었다."(418-9)


"프로이센-독일제국에서 장교단은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① 위신에 맞게 사회계서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위치한 군국주의화된 사회질서와 ② 개인적 충성에 기초한 왕조와의 유대라는 두 가지 중심축에 의거했다." "그 질서 속에서 장교단은 〈제1신분〉, 즉 특권적인 엘리트였다. 게다가 장교단은 나머지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군국주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 체제는 이미 프로이센 왕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국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압력 아래서 장교단은 공격받았던 왕조와 밀접히 결합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이센-독일 군사체제의 두 번째 접점이 형성되었다. 장교단은 자유주의자들의 헌법선서 요구에 맞서 병사들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왕조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 유대를 강력히 장려하였다. 이는 주로 귀족적인 장교단 내에서 여전히 생생한 봉건적 미래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421-3)


"(군부가 주도한 카프쿠데타의 실패는) 곧 제크트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제크트는 이제 군지휘부의 책임자 자리를 찬탈했고, 제국군대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대기주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서 첫 조치로서 광범위한 정치적 야망을 동시에 포기하면서 전통적인 지침에 따른 군대의 건설이 주목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현존하는 정권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에서 정권은 군지휘부에 있는 장교단을 승인하는 한편, 군대의 재건에 자유재량권을 보장해주었다. 정부는 군정책 영역에서 이렇게 보장된 자율성에 대한 대가로 장교단으로부터는 공식적인 충성선서를 받았고, 또한 정치적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제국군대는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났으며,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장교단과 국가 사이의 이익 유대를 재건시키려는 시도는 중단되고, (일종의 휴전협정 같은) 임시변통적인 해결책으로 대체되었다."(434-5)


"(군사문제에서 의회를 배제하고자 했던) 제크트의 목표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지휘부 사령관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국가법적인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그는 〈명령권〉(Befehlsgewalt)과 〈지휘권〉(Kommandogewalt)에 대한 어느 정도 세련된 구별법을 이용하였다. 즉, 후자(지휘권)는 육군지휘부 책임자에게 속하는데, 이는 제국군대의 모든 부대와 기관에 대한 최고명령권 및 장교인사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포함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전자(명령권)는 장관의 소관사항이나 본질적으로는 행정권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처럼 국방부를 〈명령실행 참모부〉와 행정당국으로 나누려는 노력은 제크트의 요구로 그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그에 의하면 육군지휘부의 사령관은 〈어떠한 정치적 속박도 없이 무조건적이고 단독으로···〉 제국군대의 이익을 대표해야 하는 반면에, 국방부 장관은 〈무엇보다도 군부대의 정치적 혼란을 멀리할 수 있어야만〉 했다."(439-40)


"국방부장관 지위의 약화는 군지휘부의 책임자가 내각회의에 참석하고 특히 제국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서 강력해져 거의 군주제적인 부가물로서 제공되었던 대통령의 지위는 일찍이 제국 군지휘부의 주목을 받았고, 또 여기서 장교단의 의도대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듯했다. 따라서 제국군대를 특히 대통령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군사영역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서서 대통령에 이르는 직무상의 위계체계에서 이른바 〈직접적인 군사적 보고의 길〉이라는 특별한 통로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국방부장관과 총리를 우회하여 직접 대통령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은 공식적으로 군사적 기술적인 문제의 논의에만 이용되었으나, 진행 중인 사안이 중요할 경우 장관에게 알리지 않고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금방 명백해진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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