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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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없다


"(인종 스트레스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우리[백인 집단]는 인종주의 체제와 우리를 연관짓는 모든 시도를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당한 도덕적 모욕으로 여긴다. 아무리 적은 인종 스트레스라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암시하기만 해도 대개 일군의 방어적 반응을 보인다. 그런 반응에는 분노,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과 논쟁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같은 행동이 포함된다. 우리 백인은 이런 반응으로 도전을 물리쳐 균형을 회복하고, 인종적 편안함을 되찾고, 인종 위계에서의 우위를 유지한다. 나는 이 과정을 '백인의 취약성'으로 개념화한다.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이지만, 이것을 낳는 것은 백인이 우월하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식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다. 실은 인종을 통제하고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24-5)


제1장 백인에게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딪히는 난제들


"백인을 상대로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혹시 우리 모두가 같은 대본의 대사를 외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뻔한 반응을 접하곤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같은 대본을 들고 있는 셈인데, 우리가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백인 대본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적이고도 독특한 존재로 본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특수한 문화적 렌즈를 통해 지각과 경험을 이해한다." "우리는 서구 문화를 규정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특정한) 문화적 준거틀을 탐구하기가 유독 어려울 수 있다. 바로 개인주의와 객관성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주의는 우리가 심지어 우리의 사회 집단 내에서조차 저마다 독특하고 서로 다르다고 본다. 객관성은 우리가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 때문에 백인은 자신들의 집단적 경험을 탐구하는 데 유독 어려움을 겪는다."(35)


제2장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인종은 인종 간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백인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하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다. '백인'이라는 용어는 1600년대 말에 식민지법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은 1790년경 인구조사에서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종을 말할 것을 요구했고, 1825년경 이른바 혈통의 등급에 따라 누구를 인디언으로 분류할지 결정했다. 1800년대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옴에 따라 미국에서 백인 인종 개념은 더욱 공고해졌다.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백인성은 대단히 중요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합법화된 인종주의적 배제와 폭력이 새로운 형태로 게속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시민권─그리고 시민권에서 비롯되는 다른 권리들─을 가지려는 사람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분류되어야 했다. 비백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법원에 자신을 다시 분류해달라고 청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법원은 어떤 사람이 백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48-9)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고 누구나 차별을 하지만) 어느 인종의 집단적 편견이 법적 권한과 제도적 통제력의 지원을 받을 때, 그것은 인종주의로, 개인 행위자들의 의도나 자아상과 무관하게 기능하는 광범한 체제로 변화한다." "미국 여성의 참정권 투쟁은 제도적 권력이 어떻게 편견과 차별을 억압 구조로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누구나 편견을 품고 차별을 하지만, 억압 구조는 개개인을 훌쩍 넘어선다. 미국 여성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남성을 상대로 편견을 갖고 차별을 할 수 있었지만, 여성 집단으로서 남성의 시민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 남성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여성의 시민권을 부인할 수 있었고 실제로 부인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모든 제도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남성이 그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길뿐이었다. 여성이 스스로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54)


"백인 개개인은 인종주의에 '반대'할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백인 집단에게 특권을 주는 체제로부터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웰먼은 인종주의를 〈인종에 근거하는 이점의 체제〉라고 간명하게 요약한다. 이런 이점은 '백인 특권'이라 불리는데, 이 사회학 개념은 같은 환경(정부, 공동체, 직장, 학교 등)에서 백인은 당연시하지만 유색인은 백인과 비슷하게 누릴 수 없는 이점을 가리킨다.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인종주의가 백인에게 특혜를 준다는 말은 백인 개개인이 장벽과 싸우지 않거나 장벽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인종주의의 특정한 장벽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종주의는 그 정의상 역사적으로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제도적 권력의 체제다. 인종주의는 유동적이지 않으며, 소수의 유색인 개인들이 가까스로 두각을 나타낸다고 해서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59-60)


제3장 시민권 운동 이후의 인종주의


"이른바 색맹 인종주의는 문화적 변화에 적응하는 인종주의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다. 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리가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한다면 인종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생각의 근거는 1965년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행진하던 중에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에 포함된 한 문장이다." "마틴 루서 킹 연설의 한 문장─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문장─ 이 특히 백인 대중의 이목을 끌었는데, 킹의 표현이 인종 갈등 문제에 간단하고도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하는 방법으로 인종주의를 끝내는 해법이었다. 그리하여 '색맹'이 인종주의의 해결책으로 홍보되었고, 백인은 자신이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설령 보더라도 자신에게 인종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인종을 인정하는 사람이 곧 인종주의자라는 것이다."(85-7)


"회피적 인종주의aversive racism는 스스로를 교양 있는 진보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드러낼 가능성이 더 높은 인종주의의 한 형태다. 이것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데, 인종 간 평등과 정의라는 의식 수준의 신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유지할 만한 방식으로(〈나는 유색인 친구가 많다〉, 〈나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인종주의를 자행한다는 점에서, 회피적 인종주의는 미묘하지만 교활한 형태의 인종주의다." "가령, 한 친구는 자기가 아는 (백인) 부부가 얼마 전에 뉴올리언스로 이사했는데 겨우 2만 5천 달러에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물론 그들은 총도 사야 했고, 조앤은 집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부부가 흑인 동네에서 집을 샀다는 뜻임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경멸감을 대놓고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무서운 흑인 공간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90-1)


"어린이와 인종에 관한 많은 연구는 백인 어린이가 일찍이 취학 전부터 백인 우월의식을 키운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백인이 유색인보다 낫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기 때문이다. 다수의 백인 청소년이 인종주의는 과거의 일이며 자신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도록 배웠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다수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 우리가 탈인종 시대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96-7)


제4장 인종은 백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사회에서 정상적이거나 중립적이거나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사실상 모든 상황 또는 맥락에서 나는 인종적 소속감을 느낀다. 이 소속감은 나와 늘 함깨해온 뿌리 깊은 느낌이다. 소속감은 나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의 일상적인 생각과 관심사, 삶의 지향과 기대지평에 영향을 준다. 내게 소속 경험은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상, 인종주의는 나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책임을 면할 자유 덕택에 유색인은 하루 종일 누리지 못하는 인종적 안도감과 정서적·지적 여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 유색인에게 이런 혜택이 없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소수이고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오히려 백인이 수적으로 소수다). 유색인이 백인 우월주의 문화─유색인이 설령 보이더라도 열등한 존재로 보이는 문화─안에서 인종화되기 때문이다."(106-9)


"백인 연대란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한편 다른 백인이 문제 있는 인종적 언행을 할 때 그것을 추궁해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를 말한다. 교육 연구자 크리스턴 슬리터는 이 연대를 백인의 〈인종적 유대〉로 묘사한다. 크리스턴에 따르면 백인은 자기들끼리 교류하면서 〈유색인 집단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정당화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모종의 경계선을 긋는, 인종 관련 쟁점들에 대한 공동 입장〉을 확인한다. 백인 연대는 백인 위치의 이점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한 침묵과 백인 우월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인종적 단결을 유지하겠다는 암묵적 합의를 둘 다 필요로 한다. 백인 연대를 깨는 것은 곧 대열을 깨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농담에 대한) 나의 침묵은 인종 위계와 그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제지받지 않는 모든 인종주의적 농담은 우리 문화 안에서 인종주의를 더욱 퍼뜨린다."(113-5)


"백인의 인종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일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우리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백인 스스로 인정하도록 이끄는 것마저 힘겨운 과제다." "예컨대 나는 백인이 〈나는 그저 피부색 때문에 특권을 가지고 있다〉라고 오만하게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런 발언은 특권을 마치 요행인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여하거나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우연찮게 얻은 무언가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제우스 레오나르도는 백인의 특권을 무지의 산물로 보는 이 견해에 도전하면서 〈백인의 인종 헤게모니로 일상생활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지배의 과정으로, 또는 백인 주체가 유색인에게 강제하는 법과 결정, 정책으로 그 헤게모니를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특권을 백인이 그저 건네받은 무언가로 보는 것은 능동적·수동적으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유지해야만 하는 인종주의의 체제적 차원을 가리는 것이다."(123-4)


제5장 좋은/나쁜 이분법


"시민권 운동 이후로는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인 것과 인종주의에 가담하는 것이 양립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좋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인종주의에 가담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인종주의자라면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인종주의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패러다임 안에서는 나에게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곧 심한 도덕적 타격─일종의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 타격을 받을 경우 나는 나의 인격을 변호해야 하고, 나의 행위를 반성하는 일보다 인종주의자 혐의를 벗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좋은/나쁜 이분법은 백인이 인종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역학을 논의하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인종주의에 계속 가담할 수밖에 없다."(133-5)


"인종주의와 관련해 사실상 모든 백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방어적 태도의 근간에는 이처럼 인종주의를 불친절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의도적인 개별 행위로 한정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가 있다." "좋은/나쁜 이분법은 분명 인종주의의 구조적 성격을 가리고 그것을 직시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 우리의 행위에 끼치는 영향도 문제다. 백인으로서 내가 인종주의를 이분법으로 개념화한 다음 나 자신을 '비인종주의자' 편에 놓는다면, 어떤 행위를 추가로 요구받겠는가?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도 요구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종주의를 나의 문제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인종주의를 우려하지 않을 것이며, 더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세계관에 서 있을 경우 나는 인종주의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역량을 키우거나 나의 위치를 활용해 인종 불평등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136-7)


"백인에게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같은 주장들─좋은/나쁜 이분법에 뿌리박은─을 듣고 또 듣곤 한다. 나는 이 주장들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누는데, 둘 다 백인을 좋은 사람, 따라서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범주는 색맹을 주장한다. 〈나는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그리고/또는 인종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따라서 내게는 인종주의가 없다.〉 두 번째 범주는 다양성을 중시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유색인을 알고 있다[그리고/또는 유색인과 가깝게 지내왔다. 그리고/또는 유색인에게 대체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게는 인종주의가 없다.〉 두 범주 모두 근본적으로 좋은/나쁜 이분법에 의존한다. 내가 이런 주장들을 두 범주로 나누긴 하지만, 이것들은 맞바꿔서 사용될 수 있고 흔히 그렇게 사용된다. 꼭 타당한 주장일 필요는 없다. 그저 발화자를 좋은 사람─인종주의가 없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논의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142)


제6장 반反흑인성


"우리는 백인이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흑인이 열등하다는 메시지도 끊임없이 유포된다. 그러나 반흑인성은 우리 모두가 흡수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 그 이상이다. 반흑인성은 우리의 백인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백인성은 언제나 흑인성에 기반해왔다. 아프리카인 노예화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인종이나 백인종 개념이 없었다. 열등한 흑인종을 따로 만들어내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백인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백인종 개념은 흑인종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백인은 흑인을 필요로 한다. 흑인성은 백인 정체서을 만들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백인의 집단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백인 개개인은 이런 감정을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조금만 도전을 받아도 이런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올라오는지를 느끼면서 자주 놀라곤 한다."(164-5)


"우리는 특히 '건방진' 흑인, 감히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보는 흑인을 증오한다. 대대로 전해지는 메시지는 흑인은 태생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없다는 백인의 믿음을 강화한다." "캐럴 앤더슨은 저서 《백인의 분노 White Rage》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백인의 분노를 촉발하는 방아쇠는 다름 아닌 흑인의 전진이다. 문제는 단순히 흑인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야망, 추진력, 목표, 열망, 그리고 완전하고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흑인성이다. 복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흑인성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진실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흑인 남성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전진이었고, 따라서 궁극적인 모욕이었다. 놀랄 것 없는 결과일 테지만, 뒤이어 투표권이 심각하게 축소되었고, 연방정부가 일시 정지되었으며, 다른 선출직 관료들이 놀랍게도 공공연하게, 공식적으로 한 차례 이상 대통령직에 무례를 범했다.〉"(171-2)


제7장 백인의 인종적 방아쇠


"대부분의 백인은 인종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대학에서 단 한 차례 강연을 듣거나 직장에서 요구하는 '문화적 역량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인종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도전을 마주하는 유일한 경험일 것이다." "혹시라도 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인종주의와 백인의 특권을 직접 거론할 경우에는 대개 분노, 퇴장, 무감정, 죄책감, 논박, 인지부조화 같은 반응(이 모든 반응은 진행자가 인종주의를 직접 거론하지 못하도록 막는 압력을 강화한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른바 진보적인 백인은 분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에 대한 수업을 이미 들었다〉거나 〈이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빠져나갈 것이다. 이 모든 반응은 백인의 취약성─인종적 격리가 지속되어 사회심리적 체력이 약해진 결과─을 구성한다."(179-80)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사회화의 결과로서 행위자들의 반복적인 실천, 즉 그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나머지 사회환경과 주고받는 반복적인 상호작용이라고 말한다. 아비투스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내면화된 의식뿐 아니라 그 지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까지 포함한다." "백인의 취약성이란 아비투스에 최소한의 인종 스트레스만 받아도 참지 못하고 여러 방어적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다. 이런 움직임으로는 분노와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 논박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등이 있다." "백인이 익숙하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중단될 때 백인의 취약성은 균형을 회복하고 도전으로 인해 '상실한' 자본을 되찾아온다. 이 자본은 자아상과 통제력, 백인 연대를 포함한다. 백인이 불균형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는 균형을 깨뜨린 원인에 분노하기, 죄책감이나 '상한 감정' 같은 감정적 무력화를 차단하기 그리고/또는 드러내고 탐닉하기, 이 반응들 조합하기 등이 있다."(181-7)


제8장 그 결과: 백인의 취약성


"백인이 인종과 관련해 도전받을 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자기방어 담론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담론을 통해 백인은 스스로를 부당한 대우와 혹평, 비난, 공격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는 발화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으로 설정하는 동시에 발화자의 사회적 위치가 갖는 진짜 권력을 가리는 기능을 한다. 또한 사회적 권력을 덜 가진 사람들의 불편함을 비난하고 그런 불편함을 위험한 것으로 그릇되게 묘사한다." "백인은 스스로를 반인종주의적 노력의 희생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신은 백인성의 수혜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백인은 자신이야말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주장함으로써─백인의 위치가 도전받는다는 이유로, 또는 유색인의 시각과 경험에 귀 기울일 것을 백인에게 기대한다는 이유로─이런 대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시간과 관심 같은)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다."(193)


"분명히 말해두겠다. 인종 위치에 대한 도전을 견디는 백인의 역량이 부족하긴 하지만─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취약하긴 하지만─우리의 반응의 영향은 전혀 취약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제도적 권력과 통제력을 활용하는 까닭에 매우 강력한다. 우리는 도전받는 순간에 우리 위치를 보호하기에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이 권력과 통제력을 행사한다." "또 분명히 말해두건대 '백인의 취약성'은 아주 구체적인 백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백인의 취약성은 단순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거나 우는소리를 하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이것은 '지배의 사회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우월의식과 이 우월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다. 이 용어는 불만을 토로하는 집단이나 그 밖에 다른 까다로운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예컨대 '학생의 취약성'은 성립하지 않는다)."(197-8)


제9장 행동으로 나타나는 백인의 취약성


# 백인의 취약성의 기능

1. 백인 연대를 유지한다.

2. 자기반성을 차단한다.

3. 인종주의의 현실을 대수롭지 않아 보이게 한다.

4. 토론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

5. 백인을 피해자로 설정한다.

6. 대화를 장악한다.

7. 편협한 세계관을 보호한다.

8. 인종을 논외로 한다.

9. 백인 특권을 보호한다.

10.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초점을 맞춘다.

11. 백인을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모은다.


제10장 백인의 취약성과 관여의 규칙


"서구 사회에서 자라는 백인은 백인 우월주의적 세계관에 길들여진다. 그 세계관이 우리 사회와 제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했든 말든, 당신이 다닌 교외 백인 학교의 복도에 다양성의 가치를 칭송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든 말든, 당신이 외국 여행을 했든 말든, 당신의 직장이나 가정에 유색인이 있든 없든, 어디서나 우리를 사회화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힘을 피할 수는 없다. 의도나 의식, 동의와 거의 또는 전혀 무관한 메시지들이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유포된다. 이 점을 이해하고서 대화를 시작하면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우리의 인종주의가 드러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우리에게 인종주의적 패턴이 없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 애쓰는 일보다 우리의 인종주의적 패턴을 멈추는 일을 훨씬 더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인종주의적 패턴을 가지고 있고, 유색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224-5)


제11장 백인 여성의 눈물


"인종 간 교류에서 백인 여성의 눈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백인 여성의 고통 때문에 흑인 남성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우리 백인 여성은 이 역사를 동반한다. 우리의 눈물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이 역사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백인이 이 역사에 무지하거나 둔감하다는 사실은 백인의 중심성과 개인주의, 인종적 겸손의 부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인종 간 교류에서 선의를 가진 백인 여성의 눈물은 겉보기에 무해하기 때문에 백인의 취약성의 더 유해한 형태들 중 하나다. 이런 교류에서 우리가 우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의 인종주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는 이유로 울 수도 있다. 무의식적인 백인 인종주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피드백을 도덕적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기분 나빠한다."(229-30)


"백인이 죄책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백인 여성이 인종주의의 어떤 측면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나면 모두의 관심이 즉시 그녀에게로 쏠린다. 인종주의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워크숍 참석자들 전원의 시간과 에너지, 관심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녀가 관심을 받는 동안 유색인들은 또다시 관심에서 밀려나고 그리고/또는 비난을 받는다." "반인종주의 전략가 겸 워크숍 진행자인 레이건 프라이스는 비판적 인종 학자 킴벌리 크렌쇼의 저술에 쓰인 비유를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응급처치 요원들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보행자를 친 운전자를 위로하러 달려가고 그동안 보행자는 피를 흘리며 거리에 누워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렇듯 백인은 흔하지만 매우 전복적인 방식으로 인종주의의 관건을 백인의 고뇌, 백인의 고통, 백인의 피해자화化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232-4)


제12장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백인이 내게 인종주의와 백인의 취약성과 관련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을 때, 나는 먼저 이렇게 되묻는다. 〈어떻게 당신은 교양 있는 전문직 성인이면서도 인종주의와 관련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죠?〉 이것은 솔직한 질문이다. 주변 어디에나 정보가 있는 마당에 우리는 대체 어떻게 모르는 걸까? 유색인이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에게 말했는데도 말이다." "나의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당신 스스로 주도해서 찾으세요.〉 백인성의 길들임─인종주의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인종주의를 저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훌륭한 조언이 너무나 많다. 유색인이 쓴 조언서도 있고 백인이 쓴 조언서도 있다. 그런 조언을 찾아라. 백인성의 무관심과 결별하고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246-7)


"차라리 나는 '덜 하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종적으로 덜 억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유색인의 인종 현실에 열려 있고 관심을 보이고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인종과 진실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다양하게 맺을 수 있고, 내게 인종주의적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인종주의적 패턴에 방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백인의 침묵과 연대를 깨고, 인종주의로 인한 유색인의 고통보다 백인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행태를 멈추고, 죄책감을 넘어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덜 억압적인 패턴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유색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해방과 정의감을 위해 백인 정체성을 덜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256-7)


"어느 유색인으로부터 내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피드백을 받을 때, 나는 다른 유색인에게 가서 내가 좋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 행동은 내가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는 데 동의하도록 그 유색인을 압박하여 다른 유색인이 아닌 나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형평성 상담가 데번 알렉산더는 유색인을 압박하는 가장 유해한 형태라고 할 만한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바로 인종주의를 부인하고 방어하는 백인의 태도에 순응하고 백인의 취약성과 결탁할 수 있도록 유색인에게 자신의 인종 경험을 축소하라고 압박하는 형태다. 달리 말하면, 우리 백인이 유색인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그 고통을 우리와 공유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형태다. 이 순응 요구에 따라야 하는 유색인은 매우 부당한 비진실성과 침묵을 견뎌야 한다." "결국 백인의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인종 질서와 그 질서 내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탱하는 것이다."(261-2)


※ '인종'을 '젠더'로 변환해서 현재 한국사회를 고찰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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