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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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인간 활동의 다양성과 관련된 다섯가지 주제

1. (문화 혹은 삶의 방식의) 발산과 수렴

2. (에너지 소비량을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가속적 변화

3. (인위발생적인 영향에 반응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4. (인간 본성의 고정성과 보편성으로 표현되는) 문화의 제약

5. (한 집단이 다른 집단들에 영향을 끼치는) 주도권의 이동


제1부 빙하의 자식들


인류의 전 세계적 확산과 문화적 발산의 시작─약 2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


"대양을 항해해 오스트레일리아와 '가까운 오세아니아'에 처음 닿은 주역은 (지구 여행자로서의) 인류였다. 훗날 인류는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함으로써 지구상 거주 가능한 전체 영역 중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을 추가했다. 여행하는 인류가 태평양의 세 외곽 지역인 하와이, 이스터섬, 뉴질랜드에 도착한 1000년 전쯤, 육지를 걷고 바다를 건넌 인류는 마침내 지구적 종이 되었다. 이야기를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호미닌의 초창기부터 인류가 아프리카 외부에 출현한 무렵까지는 세계의 4분이 1만이 정기적 거주 영역이었다. 호미닌의 역사에서 채 2퍼센트도 되지 않는 지난 5만 년 동안 인류는 숨가쁘게 이동해 나머지 4분의 3을 거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발길을 멈추고 한숨 돌릴 무렵, 우리는 우리가 외로운 인간 종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여행 중에 마주친 다른 호미닌 집단들은 사라졌다. 우리의 지구적 위치는 마치 크리스마스 할인 행사처럼 다양성을 대폭 줄인 생물학적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28-9)


# 호미닌Hominin : 우리와 우리의 모든 화석 조상을 포괄하는 용어


"뇌 크기가 중요한 이유는 개체들이 속한 사회적 공동체의 크기를 추론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생 비인간 영장류의 공동체 크기와 뇌 크기에 관한 연구는 뇌 크기와 사회 집단 크기 사이에 강한 통계적 관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뇌가 클수록 개체들이 속한 사회적 공동체도 더 크다." "뇌/집단 크기 그래프의 선을 호미닌과 인류의 뇌 크기를 포함할 정도까지 연장할 경우, 우리와 같은 뇌 크기를 가진 한 영장류 공동체의 예상 구성원 수는 150이다. 이 숫자는 생물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와 함께 뇌 크기와 집단 크기의 관계를 처음으로 검토한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이름을 따서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사회적 뇌 가설은 사회적 복잡성에 관한, 즉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의 역사, 의도, 그리고 상호 작용할 때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는 능력에 관한 가설이다." "수렵 채집민 집단부터 산업 세계까지 규모가 제각각인 사회들의 근저에는 공히 던바의 수가 있다."(38-40)


"인류의 진화는 순환 과정들과 그 사이사이에 발생하는 화산 폭발 같은 사건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여러 지리적 규모─지구, 대양, 대륙, 지역 규모─로 전개된다." "기근의 위험을 줄이고 지역의 선택압에 대응하는 데는 두 가지 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동과 공유다." "환경이 어떻든 간에 이동은 생존과 성공에 필요한 핵심 전술이다. 그러므로 수렵 채집민의 경관을 대표하는 요소는 영역보다는 오솔길과 여정이다. 홀로세 동안 저위도와 중위도에서 농경을 채택했을 때, 이동성 상실은 중대한 변화였고 당연히 인구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인류가 구사하는 둘째 전술은 사회 관계망 구축이다. 인류가 음식과 자원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오솔길은 개인의 시공간 범위를 익숙한 유전적 친족 너머로 넓혀주는 교역로, 노랫길, 혼맥이기도 하다. 지역 간 교환망과 친족 관계망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 '친족화kinshipping'라고 하는데, 이는 유전적 친족 관계에 기반하지 않는 관계를 맺는 우리의 능력을 의미한다."(41-2)


# 노랫길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지리적 정보, 중요한 지식, 문화적 가치 등을 노래로 만들어 기억하고 후세에 전달한 구전 전통


"빙하 시대의 모든 사람은 거의 똑같은 수렵 채집 경제를 영위했고, 전체 양분 중 상당한 양을 사냥을 통해 얻었다. 포식은 한 가지 점에서 정신에 이롭다. 포식은 예측 능력─사냥감과 경쟁 포식자의 움직임을 미리 짐작하는 능력─을 증진한다." "사냥꾼의 핵심 능력인 예측은 상상과 비슷하다. 상상이 눈앞에 없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면, 예측은 아직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우리 종이 화석 기록에 등장할 무렵, 우리 조상들은 이미 200만 년 넘게 사냥에 탁월한 유인원으로 지내온 터였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거나 호모 사피엔스와 조상을 공유하는 종들은, 비록 자신 있게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성기긴 하지만, 적어도 200만 년 중 상당한 기간 동안 장식용 물건을 모으고, 안료를 사용하고, 열심히 도구를 만들어온 터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위대한 예술을 창작하고 위대한 생각을 떠올릴 만큼 비옥한 상상력을 갖춘 삶으로 도약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75-6)


"예술가들은 사유의 두 종류, 즉 종교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를 엿보게 해주는 사료를 남겼다. 현대의 통념에는 뜻밖일지로 모르지만, 종교는 회의론─물질의 유일무이한 실재에 대한 의심, 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전부냐는 의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재, 비록 감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실재를 발견했을 때, 영혼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 어렴풋이 인식했을 무렵, 영혼 영역은 미묘하고 놀라운 개념이었다─물질계의 제약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삶에서 무한히 변경할 수 있고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자유로 나아가는 약진이었던 것이다. 생활 환경은 시를 자극하고, 경외감을 자아내며, 불멸성에 대한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불꽃은 꺼지고, 파도는 잠잠해지고,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돌은 산산이 조각나지만, 영혼은 계속 살아간다."(83-4)


"네안데르탈인 매장지들은 불굴의 사유를 드러낸다. 단순한 매장은 청소 동물의 접근을 막고 시체 썩는 냄새를 가리기 위한 물질적 관심의 증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례에 따른 매장은 오늘날의 문화들도 여전히 규정하기 어려워하는 삶과 죽음 개념의 증거다. 특정한 경우─불가해한 혼수상태와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고통스러운 빈사 상태─에 우리는 삶과 죽음이 차이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음 자의 개념적 차이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구별하기 시작한 약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장례는 삶을 축성했다. 그것은 곧 삶이란 경외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이었다. 최초의 장례는 그저 삶을 소중히 여기는 본능을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으며, 그후로 줄곧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반을 이루어왔다." "초기 무덤들의 부장품은 내세가 현세의 연장일 것임을 함축하고, 영혼의 생존보다는 지위의 생존을 확인해준다."(94-5)


"사제와 비슷하게 신성한 의복을 입거나 동물로 변장한 채 환상적 여행을 하는 인물형은 육체적 힘 외에 새로운 종류의 권력자들이 부상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가까운 과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례들에서 그런 변장은 보통 사자 또는 신령과 소통하려는 노력, 즉 '내세'에 접근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동물로 변장한 채 춤추는 그들은 틀림없이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영혼과 접촉하는 누군가의 호의를 얻고자 선물과 존경, 봉사, 복종을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샤먼은 권위의 강력한 원천, 즉 가부장 남성이나 우두머리 남성을 샤먼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혁명의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동굴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무력 계급과 나란히 지식 계급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빙하 시대 사회들은 영혼과 소통하는 엘리트를 선택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강한 자들이나 특권층으로 태어나는 자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정치적 혁명이라 부를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100-1)


제2부 점토와 금속으로


농업의 출현부터 '청동기 시대 위기'까지 발산하는 문화들─기원전 1만 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


"대륙을 횡단한 새로운 규모의 접촉을 가리키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일부는 농업노동의 1차 생산물인 작물 그 자체다.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작물화된 밀이 농경 공동체들을 통해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전해졌다. 그 증거가 카자흐스탄 발하슈호 위쪽 중가르산맥 비탈에 있는 선사 시대 야영지에서 발견되었다." "초기 작물들이 진화적 고향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출현한 시기는 유라시아 곳곳의 독특한 문화적 맥락에서 가장 이른 금속 및 야금술이 출현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두 현상 모두 기원전 제3천년기에 되풀이해 나타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간혹 더 일찍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가보家寶와 도처에서 보낸 선물이 들어 있는 엘리트층의 무덤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연결망을 추적하는 데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무렵의 묘지에서 발굴한 인간 유골들의 화학 성분에 작물을 소비한 증거가 담겨 있는 것이다."(153-5)


"호모 사피엔스가 초목이 있는 대륙들 각각의 남단에 도달했을 무렵, 세계 기후는 가혹한 빙하기와 기온이 급격히 낮아진 신드리아스기를 지나 온난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뒤이은 수천 년에 걸쳐 개척 삼림지가 지난 한랭기에 최대로 확장되었던 개활 초지와 툰드라 경관을 차츰 잠식해나갔다. 그후 더 풍부하고 더 넓고 더 다양한 삼림지가 개척 삼림지를 대체했으며, 전체가 나무로 덮인 경관이 꾸준히 확장된 결과 가장 추운 주변부, 가장 건조한 내륙, 가장 높은 고원만이 나무가 없는 개활지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온난해지는 경관 곳곳에서 우리 종은 대개 생태계들의 경계 면을 따라 놀랄 만큼 다양한 생물군계들을 퍼뜨렸다." "그 추세는 이따금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 중단되었는데, 해당 지역들에서 그 사태는 '문명의 붕괴'로 해석되고 서술되었다. 현저한 기후 변동이 사회 조직의 심대한 변화와 정치적 조직화 및 통제 제도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인다."(157-8)


"우리는 네 지역─이집트의 나일강 중하류, 인더스강과 하라파 지역, 메소포타미아, 중국의 황허강 유역─을 발상 문명이나 위대한 문명이라 부르고, 전통적인 문명사를 서술할 때면 으레 네 지역부터 묘사한다. 네 지역을 함께 고찰하면, 공통의 생태적 얼개─점차 온난해지고 건조해지는 기후, 상대적으로 건조한 토양, 계절에 따른 강의 범람에, 따라서 관개에 의존하는 물 공급 방식─안에서 어떻게 끊임없는 발산이 문화적 간극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다." "목축과 비교해 농업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더 치열한 경쟁을 수반했다. 토지를 둘러싼 분쟁과 전쟁은 통치자의 지위를 강화했다. 늘어난 전쟁과 부 역시 가부장과 원로가 아니라 더 강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최고위직을 쟁취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식량을 저장하고 지켜야 필요성도 통치자의 권한을 강화했다." "(식량 부족이 주기적으로 닥치는 시대에) 국가는 비축 기관으로서 재화의 재분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근 구제를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74-7)


"이집트에서는 신성한 파라오의 말이 곧 법이었다. 법을 성문화하려는 욕구는 결코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가 도덕률을 규정했으며, 국가는 도덕률을 쉽게 변경하거나 뒤엎을 수 없었다. 기원전 2천년경 새로운 내세 관념이 등장했다. 그 이전 무덤들은 내세로 들어가기에 앞서 대기하는 방이었으며 세계는 내세의 삶을 실습하는 곳이었다. 기원전 2천년 이후에 지은 무덤들의 벽화는 신들이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무덤은 내세를 위한 도덕적 준비를 마친 이후 심문을 받는 장소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은 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이른 법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제정된 이유일 것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우르의 법률은 조각조각 남아 있다─본질적으로 벌금 목록이다." "기원전 18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함무라비 법전은 우리가 아는 법, 즉 예로부터 물려받거나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의 명령을 영속화하는 수단이었다."(178-9)


"기록에 남은 중국의 초창기 왕권 전통 역시 왕의 지위와 수자원 관리 및 식량 분배 사이에 연관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설상의 토목공학자인 우禹임금은 〈물길을 다스리고 큰 수로들로 흐르게 했다〉는 공적으로 칭송받았다." "(상商 왕조의) 왕은 갑골로 점치는 활동을 넘겨받음으로써 마술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능─미래를 예언하고 신의 뜻을 해석하는 기능─을 국가로 이전했다. 점복의 결과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이제 점술가의 소관이 아닌 세속적(비종교적) 기능이 되었다."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 서부에 속하는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 세계는 도시 배치와 건물 설계에서 현저한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위계적으로 나뉘는 주거 공간들은 계급 구조를, 또는 더욱 엄격한 카스트 구조를 암시한다." "그렇지만 하라파 유적들에 호화로운 무덤이 없으며, 왕의 구역이나 장신구가 없다는 사실은 이 사회들이 공화정이었거나 사제들이 운영하는 신 중심의 신정神政이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자극한다."(182-6)


"국가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원전 1000년 무렵, 그 이전 1000년 동안 실패한 국가들이 유라시아의 경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장려한 축에 드는 제국들이 해체되었고, 가장 복잡한 여러 문화의 역사가 수수께끼 같은 참사로 인해 갑자기 단절되었다. 미로 같은 궁전에서 통제하던 식량 분배 중심지들은 폐쇄되었다. 교역도 중단되었다. 정착지와 기념비적 건축물이 버림을 받았다. 하라파 문명은 사라졌고, 크레타와 미케네 문명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히타이트의 흔적은 지워졌다. 중국의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굴복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카드 군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기네 언어를 퍼뜨렸다. 수메르어는 일상 언어에서 순전한 의식용 언어로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수메르의 도시들은 허물어졌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고지와 사막에서 온 침략자들이 자기네 왕의 통치에 위엄을 더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들에 담겨 보존되었다."(206)


제3부 제국들의 진동


기원전 제1천년기 초반의 '암흑시대'부터 기원후 14세기 중엽까지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 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2000년 주기로 나타나는 '할슈타트' 태양 대大극소기는 기원전 제4천년기와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 찾아왔고,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다시 찾아와 소빙하기를 불러왔다. 이러한 기후 진동이 인간사의 배경을 이루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태양의 복사량이 감소하면서 북반구가 냉각되었고, 빙산이 북대서양으로 이동했으며, 시베리아 고기압이 형성되어 한랭 건조한 겨울바람이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의 남쪽으로 매섭게 불어닥쳤다. 거대한 인도양-태평양 연안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여름 계절풍이 감소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엘니뇨로 인해 강우량이 증가했다. 아메리카는 강우량이 증가해 고통을 받은 반면, 유라시아 남부는 가뭄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해 고통받았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는 갈수록 가물어가는 추세에 기원전 1225년부터 1175년까지 지진이 잇따른 것으로 추정된다."(213-4)


"청동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 스텝 지대에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스텝 전사가 말이 끄는 전차 전사에서 기마 전사로 바뀌었다. 둘째, 페스트의 독성이 강해지고 전염 경로가 늘어났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흑해 북쪽 스텝 지대에서 중앙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듯한 새로운 전사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가 출현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기존의 장궁과 달리 말을 탄 채로 쏠 수 있는 짧은 복합궁을 휴대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유라시아 스텝에서 최초로 출현한 전사단의 문화였으며, 훗날 훈족과 튀르크족, 몽골족이 스키타이족의 뒤를 따를 터였다. 매 세기마다 기마 유목민이 등장해 유라시아 남부 가장자리에 자리한 고대의 주요 문명들을 습격하고 정복할 터였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태양 극소기에 흑해부터 몽골까지 스텝과 사막 지대에 습한 서풍과 겨울철 눈을 가져온 더 한랭한 기후에서 스키타이족을 시작으로 전사 사회들─더 정확히 말하면 말들─이 번성했다."(216-8)


"생산 비용이 많이 드는 청동은 엘리트 개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에 반해 철은 '민주적 금속'이었다. 철 광상은 널리 분포했고, 철 생산에는 멀리서 구해야 하는 값비싼 구리와 주석 광석이 아니라 보통사람도 구할 수 있는 나무와 칼슘만이 필요했다. 공기 주입과 융제라는 비결을 숙달하고 나자 괴철로를 조작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괴철로의 결과물은 가단성 물질이었는데, 아마도 잘 단조된 청동보다 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철은 목탄으로 가열했다가 공기 중에서 냉각시키는 뜨임tempering 처리를 통해, 또는 물에 담가 급랭하는 담금질과 다시 열을 가해 탄소를 스며들게 하는 침탄 처리를 통해 강鋼의 등급으로 변형할 수 있었다. 이 기술혁명은 주석이 몹시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을 쉽게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 결과 무기 생산이 대폭 확대되었지만,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농업용과 목공용, 철공용 도구가 강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20-2)


"청동기 시대 궁전들이 붕괴됨에 따라 비교적 자율적인 교역과 상업이 철 생산법 못지않게 멀리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교역은 궁전 계획 경제의 헤게모니적 명령이 아니라 그 자체의 논리를 따랐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대에 시장이 탄생했을 것이다. 분명 상인들은 자기 생각과 목적대로 상품을 운반했다. 적과 해적을 피하기 위해 교역은 신중하게 진행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토기와 금속 제품을 운반한 단거리 지역 사업에 대한 기록은 상품 교역이 엘리트층 이하 가구의 수요를 채워주었음을 시사한다. 초기 철기 시대에 등장한 이런 교역 중 일부는 근동 지역을 종횡으로 오가는, 점점 증가하는 낙타 대상隊商들이 담당했다. 이에 더해 교역의 상당 부분은 해상 교역이었다. 교역은 작고 자율적인 정치체들을 낳았는데, 그중 일부는 공화정과 유사한 상업 도시 국가였고, 다른 일부는 군소 왕국이었다." "이 교역로들은 구세계의 대부분을 연결한 세계 체제를 형성했으며, 포식성 제국이 다시 등장하도록 자극했다."(224-5)


# 기원전 1000년~기원후 1350년의 사회·정치 조직의 여섯 가지 형태(이언 모리스)

1. 수렵 채집 가족

2. 목축 부족

3. 목축 제국

4. 농경 촌락

5. '저가低價, low-end' 국가

6. '고가高價, high-end' 국가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후 1350년 사이에 수렵 채집 가족들의 영역은 꾸준히 줄어들었는데, 농경민이 수렵 채집민을 자신들이 원하지 않거나(시베리아처럼) 아직 도달하지 못한(오스트레일리아 해안처럼) 생태적 적소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목축 부족이 점유하던 영역도 줄어들었는데, 스텝 지대의 광활한 영역들이 목축 제국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75년까지 농경 촌락들은 수렵 채집 가족들을 밀어내면서 점유 영역을 늘려갔지만, 그 이후 더 빠르게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농경 국가들은 대부분 농경 촌락을 희생양 삼아 전 기간에 걸쳐 영역을 엄청나게 넓혔지만, 저가 국가들과 고가 국가들 사이의 균형은 크게 변했다. 기원전 1000년에는 고가 국가가 없었으나 그후로 기원후 175년까지 별개의 두 가지 패턴이 전개되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는 저가 국가들이 농경 촌락들을 삼키면서 성장했고, 유라시아에서는 고가 국가들이 저가 국가들을 대부분 쓸어버렸다."(313-4)


"구세계에서 가장 큰 축에 드는 국가들은 기원후 175년 한참 전에 저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턱에 이르렀다." "유라시아 제국들은 각기 다른 정도로 고가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고가 모델은 귀족층을 효과적으로 우회하여 정부와 농민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저가 모델과 구별되었다. 이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국가일수록 엘리트층과 농민층을 가르는 구분선을 없애는 한편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고 그 대가로 왕에게 납부하는 세금과 징집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행정관과 사령관으로 복무할 부유하고 교육받은 남자들이 여전히 필요했고 기원전 1000년보다 기원후 175년에 최고 부유층이 훨씬 더 부유하긴 했지만, 이제 귀족층의 권력은 대개 왕의 호의에 달려 있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고가 국가에서는 조세가 지대보다 우위였으며, 기원후 1세기 중국처럼 반대로 지대가 조세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 국가는 다시 저가 국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336-9)


"고가 국가는 모든 종류의 조직을 재편했다. 큰 제국은 모든 종류의 서비스가 집중되는 큰 도시를 필요로 했다. 수많은 인구를 먹이기 위해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언제나 굶주린 수도에 식량을 공급할 마케팅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큰 제국은 농산물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식량을 두루 운반할 수 있도록 도로와 선박, 항구를 개선해야 했다. 새로운 교환 수단도 필요했으며, 그런 이유로 지중해 동부와 중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주화가 발명되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신용 거래와 은행업 수단을 발명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따라서 교육이 확대되었다. 지중해에서는 단순한 알파벳이 까다로운 음절 문자를 대체했다. 다만 아테네와 로마에서 알파벳을 배운 남성은 열 명에 한 명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값싼 도구와 무기가 충분히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철이 청동을 대체했다. 필요가 혁신과 성장을 촉진했다."(340)


"11세기 중국의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1000년 전 로마의 조직만큼이나 크고 복잡했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데 반해, 유럽과 중동, 인도의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바이킹, 튀르크인, 아프간인의 공격에 허물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1100년에 송나라가 산업 혁명 직전까지 갔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송나라 최대 도시들에서는 주요 연료를 나무에서 석탄으로 바꾸고 있었고, 직물 제조업자들은 훗날 18세기 유럽에서 재발명된 방적기와 매우 비슷한 수력 방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적 도약이 흔들린 이유는 커다란 물음이지만 대체로 운 좋은 위도대와 스텝 지대 사이에서 계속된 분규에 있을 것이다. 17세기에 전장에 효과적인 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농경 제국도 유목민을 실제로 제압하지 못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농경 제국이 성장할수록 유목민의 먹잇감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옛 공식은 여전히 유효했을 것이다."(350)


"지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에 따르면 〈[말을 가축화한] 시대와 콜럼버스를 비롯한 항해자들을 대양으로 보낸 사회들이 발전한 시대 사이에 대략 4000년이 흘렀으며, 그 시간 동안 그 이전과 비교해 중요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견해다.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350년까지 도시, 국가, 종교 집단, 교역의 규모는 열 배 증가했다. 이 변화가 없었다면 스텝 지대를 닫을 수 없었을 것이고, 대양들을 열 수 없었을 것이며, 근대 세계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순전한 농경 환경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고, 세계 조직의 중심축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유라시아에서 이런 대사건들이 펼쳐지는 동안 지구의 대다수 지역들로 농경과 저가 국가가 확산되었다. 기원전 1000년에는 열 명 중 한 명만이 정부 치하에서 살았던 반면, 기원후 1350년에는 적어도 열 명 중 아홉 명이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352-3)


제4부 기후의 반전


전염병과 추위 속에서의 확산과 혁신─14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아시아를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장에 직접 연결하는 대양 횡단 교역을 개척한 유럽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인들에게는 이따금 폭력으로 얻는 단기 이익보다 현지 상인 및 제조업자와의 장기동맹과 협력이 훨씬 더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주로 아시아 내부의 가격 패턴에서 수익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예컨대 은과 구리의 가격은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중국에서 더 비쌌으며, 금의 가격은 인도에서 높았다. 유럽인들은 다른 상품을 운송하고 거래해서 얻은 수익을 정화正貨에 투자해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1639년은 최고의 성공을 거둔 해였는데, 일본이 다른 유럽인들이 교역을 금지하고 네덜란드측에 일본산 은을 거래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정화는 유럽인들이 중국과 인도에서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74-8)


"노예의 이탈과 그에 얽힌 분쟁에서 발생한 손실이 아프리카인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유럽인은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이 인구를 잃고 야만 상태로 전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세기에 노예 항구 너머의 내륙까지 처음 들어간 탐험가들은 뜻밖에도 질서 정연하고 번창하고 인구가 많은 공동체들을 발견했다. 몇 가지 조건이 노예 무역이 인구에 끼친 영향을 완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인구 밀도가 꽤 높은 지역들에서 노예를 데려왔고, 같은 장소에서 계속 데려온 것이 아니라 노예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내륙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데려오곤 했다. 그리고 남성에 편중해 수출했기에 그 반대인 경우보다 출생률에 끼친 영향이 적었다. 게다가 신세계에서 들어온 식물들, 특히 카사바 덕에 노예를 가장 많이 공급한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서 주기적인 기근이 완화되었다."(400)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서양, 특히 유럽의 '과학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이 용어의 두 단어 모두 미심쩍다. 자연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식, 즉 관찰에 근거하고 이전까지 비주류였거나 실행하지 않은 방법으로 확증하는 방식은 하룻밤 사이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성격이 혁명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이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키는 '혁명'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과학이 세속적 학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거니와 과학자가 성직자를 대체하지도 않았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관념은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전에는 대담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성과 실험으로 도출한 데이터와 계시를 받아 선포한 진리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16세기 초부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전 세계적 문화 교류의 원인이자 결과인─에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근대 과학이 출현했다."(430-1)


"19세기 초에 이르러 전통과 혁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섞인 새로운 감성, 나아가 이성의 노예가 되는 데 저항하고, 감정을 존중하고, 자연에 감응하고, 인간성을 넘어 야생성과 야만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성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 감성은 개인의 정서와 창조적 자율성을 고양시킨 예술 및 문학과 관련하여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성은 감정이라는 완충제에 부딪혔고,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고 낭만적 숭고라는 이상을 좇는 사람들에 의해 견제 받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 직관, 영감에 더해 심지어 정념까지도 자유롭고 가치 있는 행동의 길잡이로 재평가했다. 그들은 인간의 소산보다 자연의 소산이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림 같은 경치를 찾아 그들은 산을 오르고, 화산을 들여다보고, 전 세계의 섬과 황무지 숲, 내륙 벽지를 탐험했다. 그들에게 자연과의 조우는 비이성적이거나 초이성적인 열정에 대한 이끌림과 불가분한 것이었다."(450)


"근대 초 서반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상인과 자본, 교역 허브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는 쇠퇴의 징후를 보인 반면에 리스본, 암스테르담, 런던은 새롭게 대두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특징인 해상 제국들은 느림보 거인이었다.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관절 연결이 부실했고, 변방을 향해 기운 없이 손끝을 뻗고 있었을 뿐 기다란 팔다리를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비틀거리거나 무너졌다. 1763년 프랑스는 신규 정착민이 부족해 북아메리카에서 지상 제국을 만들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1802년 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의 주요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착민을 몰아냈다. 그 무렵 에스파냐 제국과 네덜란드 제국은 유럽 내 전쟁으로 약해지기 시작했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결국 허물어졌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을 대부분 상실했다."(459-65)


"근대 초는 정부의 3대 기관 중 하나로 법률 제정을 담당하는 입법부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14세기와 15세기에 잉글랜드 군주들은 나머지 서양의 추세와 비슷하게 칙허장을 통해 법률을 도입했지만, 의회 의원들도 논쟁과 청원서를 통해 입법을 발의할 수 있었다. 법률을 제정하고 폐지하는 대의 기관의 역할이 확대된 것보다 더 근본적인 전환은 주권의 개념 자체가 변한 것이었다. 중세의 주권은 정의를 선언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로 규정할 수 있지만, 16세기 들어 주권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갈수록 법률을 제정할 절대적 권리로 이해되었다." "대개 인권을 빼앗은 사례를 계기로 논의되긴 했지만, '양도 불가능한 인권'이 있다는 생각이 차츰 계몽적 담론으로 스며들었다." "그런가 하면 개인주의─개인의 권리가 사회 집합체의 권리보다 선행하고 우선한다는 이념─가 갈수록 유기적인 '사회 계약' 개념과 경합을 벌였는데, 이에 따르면 개인들은 통치자 또는 국가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었다."(479-81)


"18세기 후반기 들어 유럽의 아시아 고립 영토들은 정복을 통해 내륙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양은 19세기 이후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산업화를 이루어 화력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 덕에 서양은 수송의 속도를 높이고 열대 지방에 적합한 물자와 약물을 갖출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생존에 가장 적합한 장기 전략은 '토착민처럼 생활하기'였다. 동양에 상인으로 도착한 네덜란드인은 레이스타펄[식민지 시기 네덜란드인이 채택한 인도네시아 요리]을 먹는 지주로 변모했다. 아메리카에서는 정착민과 그 후손의 독특한 '크레올' 정체성이 생겨났다. 18세기 화가들이 혼성 문명의 인종적·문화적 이종 혼합을 자랑스레 드러낸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에서는 인종 배경에 제각각이면서도 공통의 정체성을 지닌 개인들로 이루어진 엘리트층이 출현했다. 영국 식민지들에서도 새로운 '아메리카인' 정체성이 형성되어, 식민지와 모국을 갈라놓은 1776년의 반란을 자극했다."(489-90)


"18세기에 유럽인은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이를 '야만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기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며 토착민 자녀를 강제로 빼앗았다. 유럽인은 유연성과 가변성을 지닌 토착민 아이를 교육해 '문명화'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토착민 아이를 선교 유치원에서 가르친 경험은 교육이 식민주의에 필수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문명화' 사명은 '타자화된' 아이를 규율하고 식민지 사회권력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그 교육은 삼중의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는 식민지 관료제의 하층에서 일할 수 있도록 식민 본국의 기본적인 언어를 교육받은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표, 둘째는 기독교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목표, 셋째는 어쩌면 대중을 더 많이 개종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 토착민 선교사를 양성하는 목표였다. 식민지 교육은 아동기부터 균일한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정체성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여성을 참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젠더화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495-6)


제5부 대가속


온난해지는 세계에서 빨라지는 변화─1815년경부터 2008년경까지


# 대가속 : 인류의 능력과 영향력이 갑작스레 증대되면서 일어난 변화


"20세기 초만 해도 과학은 우리 인간이 생물권을 바꾸고 있다는 급진적인 관념을 정당화하기에는 아직 너무 부정확했다. 그러나 현대 환경 운동, 생태학과 환경 과학 같은 새로운 연구 분야들이 부상한 이후인 20세기 후반기 들어 그 관념이 주목을 받았다. 북아메리카 오대호에서 종의 변화를 연구하던 미국 생물학자 유진 F. 스토머는 1980년대 초에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용해 자신이 관찰하고 인류의 엄청난 영향을 표현했다. 인류세 관념은 기후학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에 사용한 이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다는 증거를 들어 크뤼천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즉 광범한 석탄 연소를 처음으로 부추긴 기계가 개발된 약 200년 전부터 인류가 생물권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본다. 〈인류세는 18세기 말부터, 즉 극빙極氷에 갇힌 기체를 분석한 결과로 알 수 있듯이 지구에서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크뤼천은 썼다."(504-6)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면 할수록 다른 종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생물의 멸종률은 지난 500만 년의 멸종률보다 1000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바츨라프 스밀은 인류의 자원 소비량 증가세와 다른 대다수 종들의 자원 소비량 감소세가 현저히 대비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그는 19세기 초에 인류의 생물량(모든 인체에 포함된 탄소의 총량으로 측정)이 모든 야생(가축이 아닌) 포유류의 생물량을 넘어섰다고 추정한다. 1900년경 탄소를 기준으로 육생 야생 포유동물들의 생물량은 약 10메가톤, 인류의 생물량은 약 13메가톤이었다. 2000년, 육생 야생 포유동물들의 생물량은 대폭 감소한 5메가톤이었던 반면, 인류의 생물량은 크게 증가한 약 55메가톤이었다." "(여기에 가축의 생물량 120메가톤을 더한) 수치들은 2000년경 인류와 가축이 육생 포유류 전체 생물량의 97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545-6)


"근대 후기 세계의 첫째 기둥인 대중 사회는 자신의 운명을 대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유동적이고 강력한 집단인 '대중'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중'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고대 이집트에서처럼, 또는 근래까지 중국에서처럼 천년왕국적이고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와 통치자에게 종속되어 있었거나, 정주 지역을 침공한 스텝 제국처럼 이동 생활을 하는 제국들의 일부였다. 두 경우에 자율성을 박탈당한 대중은 보통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18세기 유럽에서 인구 혁명이 일어난 이후, 대중은 분열을 일으키는 장거리 이주에 참여할 필요 없이 경계가 정해진 국가의 공간 안에서 강력한 행위자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서히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되었다. 1789년과 1830년 프랑스 혁명은 결코 '대중 혁명'이 아니었지만, 1848년과 1870년 프랑스 혁명뿐 아니라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대중은 중대한 역할을 했다."(554)


"근대 후기 세계를 지탱하는 둘째 기둥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탄생한 근대 국가다. 근대 국가는 그 성격에 내재하는 전체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도중에 여러 외양으로 공고해지고 때로 물러졌는가 하면,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다수의 형태로 조금 변경되거나 크게 변형되었다. 갖가지 특징─거의 완전한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성문화와 헌법, 삼권분립─과 지난날 더 넓은 세계로 투사했던 제국의 권력을 가진 근대 국가는 전례 없는 힘의 구현체였다. 근대 국가는 권위의 다른 원천들을 대체했고, 국경 내에서 폭력을 독점했으며, 인구와 자원을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근대 국가의 권력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대부분의 문화적·지적 생산물에 그 흔적을 남겼다. 초기에 학자, 작가, 화가, 음악가는 근대 국가의 창설과 성취를 찬양했다. 그후 다른 지식인들은 근대 국가의 성격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에 대항하는 여러 유토피아를 구상했다."(556-7)


"근대 후기 세계의 셋째 기둥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과학과 기술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꿈꾼 '학문의 진보'는 국가 기관과 민간 기업에 힘입어 빅토리아 시대에 실현되었고, 수차례 '과학 혁명'을 거쳐 21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지식과 예술의 생산에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제지 기술과 인쇄 기술은 세계 출판업의 중심을 영국으로 옮겨놓았다. 1980년대 중반에 도래한 전자 기술은 종전까지 인쇄물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었던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아무나 어떤 종류의 정보든 공표할 수 있고, 세계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지난날 예술 작품 복제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던 '아우라'는 기술적 복제로 인해 사라졌다. 지금은 예술 작품이 (심지어 원작과 똑같이) 복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소비자 수십억 명에게 팔릴 수도 있다."(560-1)


"근대 후기 세계의 넷째 기둥은 세속화다. 네 기둥 가운데 세속화는 세계적 수준에서 문화적·정신적·지적·예술적 산물에 가장 미묘한 영향을 준다. 대중, 근대 국가, 과학과 기술은 모두 '예술과 문학'이 없는 지역에서도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현존 또는 부재는 모두 정신적·지적·예술적 산물의 핵심 요소다. 예술은 인간 세계와 영원한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변성과 영원성의 충돌을 끊임없이 묘사했으며, 그런 묘사를 통해 예술적 실천을 정당화하고 가장 깊은 의미를 표현했다. 이렇게 가변성의 조건과 거룩한 장소의 근본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세계관은 예술의 신성한 차원을 옹호한다. 그런 세계관은 인간이 존재의 신비에 반응할 때 '신성한 영감'을 받는다고 암시한다. 이런 이유로 1789년 이후 이른바 '무신론으로의 전환'은 인류의 모든 지적·예술적·정신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혁명이 물려준 '뒤집힌 세상'에서 신에게는 인간의 산물이라는 딱지가 붙었다."(564-5)


"기술, 국가, 대중에 대한 숭배는 세속화 과정의 완결과 맞물려 무솔리니, 히틀러, 레닌, 스탈린 치하의 국가와 같은 '현대 독재정'을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 1870~1945년의 암흑기 이전과 이후에 지식인들이 다른 세계, 즉 과거와 미래의 유토피아를 이상화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19세기는 지적 추세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대부분의 '대중'이 구체제의 신앙심을 고수하긴 했지만, 이제는 신을 대신할 존재를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식인들은 이를테면 니체가 구상한 '초인'이나, 막스 슈티르너의 '슬픈 프로메테우스' 같은 절대적이고 구속받지 않은 개인주의자를 제시했는데, 이런 인물형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때로는 초인을 희화화하는 소설 속 세상과, 현실에서 초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제안하고 만들어내고자 하는 잔혹하고 로봇 같은 국가─적을 학살하고 반대파를 말살해 구현하려는 유토피아─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574)


"견고한 부르주아지가 지배한 시장은 세계를 주도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위반'을 허용했고 지금도 허용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예술가는 부르주아지를 즐겁헤 하려면 그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보수주의, '반동', 구체제에 대한 온건한 향수가 남아 있긴 했지만, 학교와 대학, 학술원, 그 밖의 국영 기관에서는 전위 예술 운동이 융성했다. 전위 예술가들은 제도화된 사상 학파들과 경쟁하기를 원했다. 전위 예술가들, 그리고 근대의 새로운 산물인 '비평가'들은 다다이즘부터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운동에 '-주의(이즘)'로 끝나는 이름을 붙였다. 비평가들은 문화 생산 과정에서 공중과 예술가 사이의 중재자가 되었다─다만 비평 활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들의 운동은 대개 정치적 중립 지대에 고립되었다." "예술가들, 그리고 '자유로운' 지식인 일반의 절대적인 '무정부 상태', '자유', '특이성'은 시장의 요구였으며, 그런 지식인들이 생산한 '상품'을 홍보하고자 '기벽'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동원되었다."(575-6)


"오늘날 포스트모던 세계에는 더이상 전위 예술이랄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수용 가능하고 또 실제로 수용되며 시장 자체가 극히 다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자신의 사망 소식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기술은 그런 수완을 확장할 뿐 전혀 제약하지 않는다. 더욱이 개인 발언자와 발화된 메시지의 내용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그 발언에 내재하는 진실의 가치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발언하는 사람이 실제 발언 내용보다 한없이 더 중요하다. 이는 근대의 성숙기뿐 아니라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수법이다. 근대 초기에는 이단자가 누구든 간에 이단이 문제였던 반면, 근대 성숙기에는 검열이 약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사상 '필터링'이 도입되었다." "유명 인사의 축성을 받지 못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다."(578-9)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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