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나날과 <논리철학논고>의 탄생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문제와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는 네 겹으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과 그 책의 의미, 한 인간과 그의 사상, 한 문화와 그 문화의 주요 관심사, 한 사회와 그 사회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그 사회란 로베르토 무질이 자신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 1권에서 매우 감각적인 냉소를 담아 포착해 낸 바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25년에서 30년 사이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던 빈 사회를 일컫는다. 그 문화란 아직 유아기에 있거나 언뜻 그렇게 보이는 20세기 문화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어 코코슈카,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1900년대 초반의 '모더니즘'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빈의 으뜸가는 철강 부호이자 예술 후원자의 막내로 태어나 넥타이와 가족의 재산을 벗어 던지고 톨스토이적인 검소함과 금욕의 삶을 택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끝으로 그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이다."(14-5)


"학술적인 기준으로 볼 때 우리의 목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를 제각기 나머지 주제들을 숙고하고 연구하는 거울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퇴와 몰락 과정에서 드러난 핵심적인 취약성들은 그곳 시민들의 생활과 경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가장 추상적인 분야까지 포함하여 당시의 사상계 및 문화계 전역에서 활동하던 예술가와 작가들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관심사들을 형성하고 조건 짓게 되었다. 그 결과 카카니아─(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실' 그리고 '똥의 나라'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 표현─적인 환경의 문화적 산물들은 그것들이 창작된 사회, 정치 및 윤리적 맥락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조명해 줄 수 있는 어떤 전형적인 특징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앞으로 주장하겠지만, 바로 그런 특징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가장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15)


"우리가 《논고》의 출판을 철두철미하게 철학적 논리학의 역사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만 간주한다면, 그 책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통째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고 만다. 분명히 논리학, 언어 이론, 그리고 수리철학 내지 자연과학의 철학에만 전력투구하는 듯이 보이는 70여 쪽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다섯 쪽의 결말 부분(명제 6.4 이후)에 느닷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유아론, 죽음, 그리고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 '세계의 의미'에 관한 독단적인 논제들과 연달아 부딪히게 된다. 논리철학적인 예비 작업과 막판에 등장한 이들 도덕 신학적인 금언들에 각각 할당된 지면이 완벽한 불균형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유혹은, 그 마지막 명제들을 그저 부수 의견이라 치부하고 마치 어떤 법정 판결의 말미에 겉치레로 제기되는 건성의 추가 조항인 양,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었다."(30)


"그러나 우리가 케임브리지에서 오스트리아로 지역을 옮겨 그곳에서는 《논고》가 흔히 윤리적인 논문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서 제기한 의문은 그야말로 생생한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과 가장 친했던 오스트리아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문제를 놓고 고심할 때, 그 문제는 언제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키르케고르의 모습을 곧장 떠올렸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눈에 《논고》는 단지 윤리에 관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었다. 《논고》는 윤리의 본성을 보여준shown 윤리적인 행위deed였던 것이다." "엥겔만은 다른 모든 종류의 지적인 토대로부터 윤리학을 떼어 내고자 하는 시도가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사유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윤리학은 '말없는 신념'의 문제이고,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관심사는 바로 그 근본적인 개념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30-1)


2 역설의 도시, 합스부르크 빈


"구舊 빈의 온갖 이중성과 역설 중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수도였던 이 도시가 '통상적인 이름조차 없던'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이다! 항상 그렇듯 무질이 최고의 해설을 제공한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 그 나라는 제국-황실이자 제국과 황실이었다.  (···) 국가 제도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였지만, 그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다.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지만, 삶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시민은 아니었다. 부여된 자유를 매우 엄격하게 행사하는 의회가 존재하지만, 정작 의회의 문은 대개 닫혀 있었다. 하지만 '긴급 공권력 사용 법안'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 법안을 이용하면 의회 없이도 일처리가 기능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절대주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순간마다 군주는 이제는 다시 의회 정치로 복귀해야만 할 때라고 선포했다.〉"(50-1)


"누구든 19세기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연구하고 나면, 역사를 이해하는 한 가지 설명 양식인 헤겔주의 변증법의 매력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특정한 한 상황이 그 반대의 상황을 낳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의 행정에 효율을 기하려는 노력은 그 반작용으로 헝가리와 체코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은 뒤이어 그 민족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슬라브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는 차례로 독일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이번에는 다시 반유대 정책을 낳았으며, 그에 따른 유대 민족의 당연한 반응으로 시온주의가 등장하였다. 얼핏 보아도 이 정도면 머리에 현기증이 나기에 충분하다.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Hausmacht 이념─합스부르크 왕가는 하느님이 부리는 지상의 도구라는 생각─은 군부와 국가 재정에 관한 황제의 절대적인 통제권에 집중되어 있었다."(56)


"빈 부르주아 사회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해 줄 어떤 단일한 요인을 추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빚어진 자유주의의 실패이다. 아마도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 자유주의가 사산아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합스부르크가 자도바 전투에서 완패한 후 비스마르크의 처분에 따라 그저 우연히 권력을 쥐게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그 기반이 너무나 미약했으므로, 1890년대에 이르자 모든 힘이 바닥났고, 빈 정계를 지배하고 나선 신흥 대중정당들의 약진에 밀려나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구질서의 일부가 되지 못했던 중산층에게, 탐미주의는 사무에 절어 사는 그들이 삶에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따라서 세기의 전환기에 빈의 탐미주의와 대중적인 정치 운동은 자유주의의 쌍둥이 고아로서 나란히, 그러나 각기 독립적으로 등장하였다."(70-1)


"빈의 이력에서 아마도 가장 기이한 역설은 나치의 '최종 해결책'과 시온주의자들의 유대 국가 정책이 모두 그곳에서 생겨났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르츨의 시온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의 반유대주의의 소산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유대교로부터의 탈출이 실패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헤르츨의 유대 국가 창도의 직접적 발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관람하고 얻은 '경험'이다. 그 오페라가 상연되는 동안 비합리적인 민중 정치학의 진리는 섬광 같은 직관으로 그에게 선명히 다가왔다. 유일한 해답은 유대인이 손님이나 침입자 신세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다. 헤르츨에게 그 일은 바그너의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을 예술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번안하는 작업에 해당했다."(87-91)


3 카를 크라우스와 빈의 마지막 나날


"《나의 투쟁》의 저자에게 빈이 '가장 고되지만 빈틈없는 학습장'이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카를 크라우스에게 빈은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크라우스는 빈을 휘젓고 있는 비인간화의 힘을 슈니츨러나 무질보다 좀더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는 달리 단지 증세를 진단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목숨을 건 수술만이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의 히브리인들처럼 빈 사람들은 정도를 벗어나 방황하고 있었고, 크라우스는 그들의 독선을 질책하기 위해 보내진 예레미야였다. '빈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빈적인' 이 예지자의 무기는 논쟁과 풍자였다. 빈 사람들에게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으며, 그중에서도 문학, 연극, 음악이 특히 그러했는데, 이런 주제들에 대한 빈 사람들의 취향은 (크라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 이중성을 반영하고 있었다."(102)


"여성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개념은, 그가 존경과 거부를 동시에 표명했던 오토 바이닝거의 작업과 나란히 대비해 가면서 이해해야 한다." "바이닝거에게 '남성의 관념'은 완벽한 합리성과 창조성이다. 반면 남성과 정반대인 '여성의 관념'은 성적 희열을 희구하는, 원리상 충족될 수 없는 매우 음탕한 충동이다. 여성성의 본질은 '대모신magna mater'의 고대 신화 속에 표현되어 있다. 대모신은 우주적인 미완의 생식력을 뜻하며,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비합리성과 혼돈의 원천이다. 여성의 성기가 신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처럼, 그 성적인 관념도 여성의 영혼을 구성하는 자체 가동의 사유이다." "바이닝거는 인간의 역사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성과는 남성적 원리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예술과 문학과 법률 제도 등은 이러한 남성적 원리에서 샘솟은 것이다. '불멸의 여성성'은 우리를 진보와 발전으로 이끌기는커녕 역사상에 나타난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모든 사건과 경향에 책임이 있다."(109-11)


"한편, 여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생각은 (바이닝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달라고의 생각과 비슷하다. 여성의 감정상의 본질은 음탕하지도 않고 무정부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히려 부드러운 환상에 가까우며, 인간의 경험에 내재해 있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의 무의식적인 기원으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거기에 모든 영감과 창조성의 원천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성 그 자체는 단지 하나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으며, 남성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보는 여성해방주의자의 그림 자체는 바이닝거의 견해만큼이나 왜곡된 것이며, 바로 문명의 기원을 근절시켜 버리려는 시도인 것이다." "크라우스에게 남자와 여자의 조우는, 이성이 환상의 수원水原에서 풍요를 공급받게 되는 '기원'이다. 이런 조우의 산물이 바로 예술적 창조성과 도덕적 고결성이며,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113-5)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무의식은 크라우스가 생각하는 개념과 정확히 반대된다. 프로이트의 이드는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충동들이 뒤섞여 들끓는 덩어리로서, 이성이 기껏해야 견제 정도밖에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는 욕구불만의 소산이며 그러한 충동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었다. 크라우스에게 이런 식의 설명은, 개인과 사회가 가진 건전한 모든 것들의 원천인 창조적 환상과의 연관성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신화는 그것이 바꾸어 놓고자 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고, 그 신화 자체가 그것이 치유하고자 했던 질병의 또 한번의 발병인─〈정신분석학은 그것이 정신질환의 치료법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정신질환이다.〉─셈이었다. 사실상 정신분석학은 빈의 중산층을 괴롭힌 정신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 그런 문제들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117)


"카를 크라우스의 삶과 저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사실적 담화의 영역과 문예의 영역 사이의 '창조적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성격이나 품행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좋은 발상의 효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만이 교조주의자가 될 여지가 있다. 그것은 크라우스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크라우스는 이성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논쟁이 지니는 인격적 본성의 근거를 형성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은 그런 발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표현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자신들의 논점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효과만을 추구하는 작가들을 향했을 뿐,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같은 탁월한 표현파 예술가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고결한 인간들, 인품을 갖춘 탁월한 작가들은 어떤 사조에도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137)


"말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작가는 그 재능만큼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고결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 인간과 그의 작품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가의 사례가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그는 독일어에는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문예란을 독일에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하이네가 기법의 명수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비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크라우스의 견지에서 볼 때 기법은 이성과 계산의 산물이며, 따라서 언제나 수단에 그쳐야 한다. 그러나 하이네는 그런 기법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하이네가 예술 및 도덕의 담론과 사실의 담론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분별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크라우스는 그러한 '창조적 분리'의 실패는 사실적인 것의 위조로 이어지고, 결국은 미적이고 도덕적인 것의 타락이나 왜곡으로 귀결된다고 선언하였다."(137-9)


4 사회 비판과 예술 표현의 한계


"189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던 회화 양식은 자연주의naturalism와 관학주의academicism 그림들이었다." "1897년에 구스타프 클림트는 열아홉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예술원을 자퇴한 후 '분리파'를 결성했다. 클림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23년 전에 프랑스의 인상파를 통해 점화된 예술의 혁명이 마침내 오스트리아에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화가의 목표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20세기는 그 시대만의 양식을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그 운동의 구호는 〈시대는 그에 맞는 예술을, 예술은 그에 맞는 자유를〉이 되었다. 클림트가 이 운동에 제공한 것은, 그림이란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고착된 견해가 아니라 다만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향도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비교조적인 접근은 이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자유에,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정신을 반영하게 될, 이른바 '새로운 예술'에 그야말로 본질적인 것이었다."(146-7)


"분리파 건축가와 설계자들은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열광적으로 수용하였으며, 훗날 철저한 가능성의 추구를 신조로 삼게 되는 사람들만이 이들에 필적하게 된다.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수용한 건축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오토 바그너였다. 한때 예술원에서 건축학 교수를 지낸 적이 있던 그는 1899년에 분리파에 합류하였다. 초창기에 바그너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역사적인 양식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당대의 건축 설계의 원천이 다름 아닌 당대의 사회생활과 문화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스텔 풍으로 채색된 부드러운 외관을 띤 그의 건물들은 곡선보다 직각을 강조했다. 말도 많던 카를 광장 지하철 역사를 설계할 때도, 곡면을 일부 채택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직각의 형태들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물의를 일으킨 우편저축은행 청사 역시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건물이었다."(150)


"분리파 회원들은 그 사회의 기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격한 도전을 벌였지만, 예술을 삶에 좀더 밀착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국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탐미주의는 단지 치장에 관한 당대의 견해를 변화시키는 정도만 성공했을 뿐이다. 그들은 몇 가지 증상을 치유했지만, 질병 그 자체를 고치지는 못했다. '젊은 빈'의 경우도 그랬지만 분리파 회원들 역시 마땅히 그 사회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비롯된 그들의 모반 또한 그 사회의 기존의 여건 안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무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빈'이 지닌 가치관의 피상성을 폭로하는 작업을 크라우스가 직접 떠맡았던 것처럼, 분리파에게 닥친 슬픈 현실, 즉 그들 역시 기성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아돌프 로스의 몫으로 남았다."(153)


"로스는 건축과 설계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장식에 맞서 싸우는 전쟁을 선포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성서로까지 추앙한 논문 〈장식과 범죄〉에서, 로스는 실용적인 물건들에 덧씌운 모든 형태의 장식을 비난했다. 그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실제로 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동시대 사람들의 타락상을 읽어 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군주국 중산층의, 소위 '훌륭한 취향'은 그들이 세련된 야만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로스는 정부가 응용 예술을 가르치는 예술원의 설립을 후원하면서부터 이중 군주국의 정치적 쇠락이 시작되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사물을 더는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만이 그토록 장식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건전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는 용도가 우선이며, 장식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했다."(153-4)


"빈 대학의 음악 교수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에 따르면, 음악은 결코 '음악적 관념'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지지 않는다. 〈주선율 또는 주선율들이야말로 음악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다.〉 작곡이란 〈인간 유기체와 소리 현상을 모두 지배하는 어떤 기초적인 법칙들〉에 따라 주선율들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그런 법칙들 중에서 으뜸인 것은 주선율을 전개하고 변주할 때 적용하는 '화성 진행의 근본 법칙'이다. 그것은 작곡의 논리적 기반을 공급한다. 따라서 작곡가는 일종의 논리학자라고 볼 수 있으나, 그의 연산은 어떠한 상위 언어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음악 자체의 바로 그러한 본성 때문에 작곡가가 만든 것을 말로 기술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음악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선율의 화성구조를 미학적으로 분석할 때만 답을 발견할 수 있다."(166)


"쇤베르크는, 바그너가 지도 동기leitmotif를 사용함으로써 한슬리크가 음악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작곡의 논리'에 나름대로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한슬리크는 지도 동기를 불필요한 꾸밈이라며 무시해 버렸다.)" "그는 바그너가 무대 위의 연기와는 별개로 악보 내부로부터 오페라를 통합하려는 최초의 '의식적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음악에 위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쇤베르크는 바그너,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이 화성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슬리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한 측면은 그들이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한 것이었지만, 작곡의 구조는 마땅히 음악적인 것이어야 했다. 여기서 쇤베르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 질병의 진정한 치료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화성 이론뿐이었다. 한슬리크의 어휘를 빌자면, 수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작곡의 논리'였다."(167-8)


"회화에서 코코슈카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클림트가 있어야 했고, 건축에서 아돌프 로스가 있기 이전에 오토 바그너가 있었던 것처럼, 쇤베르크가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도시 빈에는 이번에도 역시 그러한 과도기적인 작곡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였다." "말러가 쇤베르크에게 남긴 유산은, 소리의 문제에 있어서 '진실성'이 '인습'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작곡가는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한다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 생각을 충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작곡가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엄격한 훈련의 대상으로 삼을 때만 비로소 그 길을 열 수 있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말러에게는 자기표현과 자기 훈련이 모두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의 비범한 일생의 역작들이 설명된다. 모든 진실한 음악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그의 혁신적인 환상은 그의 음악적 관념들이 솟는 원천이었다."(171-3)


"〈세계는 오로지 우리의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에른스트 마흐는 주장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오로지 감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진다.〉 이어서 마흐는 물리학이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감각 자료들sense data을 연결하고 상호 관련시키는 일종의 속기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호프만슈탈에게 시의 목표는 자아와 세계 간의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바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호프만슈탈이 보기에는 만일 마흐의 생각이 옳다면 분명히 시인은 자신의 시구 안에서 과학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실재reality'를 표현하게 되는 것 같았다. 과학자는 감각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수학을 이용하는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 감각들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가능한 한 철저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직접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인 것이다."(194-5)


"개념과 이미지는 진리의 주관성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호프만슈탈이 마침내 정주하게 된 예술의 도구는 바로 종합예술이었다. 그것은 모든 분야의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여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필적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즉 시와 극, 그리고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청중들에게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호프만슈탈은 미적으로 완벽한 그림들을 통해 세계를 포착해 내려는 시도를 접은 대신,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현실적 경험을 전달하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인상들을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과 도덕의 본질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생각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모시키는 데 목적을 둔 매체를 채택했다. 이 과제는 단지 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으며, 아마도 오페라적인 풍유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200)


"무질은 프라하 출신은 아니었지만 인간 심연의 그 무엇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역시 전쟁 이전부터 릴케, 카프카와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관학교 시절을 다룬 자전적인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그의 소설은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무질은 그런 학교들에 만연되어 있던 동성애 문제를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문제는 소설의 핵심이 결코 아니었다. 소설은 퇴를레스가 학교 당국에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설명해야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을 때 대단원에 도달한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무질의 인생과 저술 양쪽에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문제였다."(202-3)


5 언어, 윤리, 그리고 표상


"19세기 후반까지 언어철학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이차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긴 안목으로 보자면,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마누엘 칸트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뒤이은 백 년의 세월 동안 그의 '비판' 계획에 담긴 여러 함축들은 점차 독일의 철학계와 자연과학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과적으로 언어의 문제들이 철학의 큰 그림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철학적 인식론이 최우선적으로 다룬 논제는 '감각지각'과 '사유'였다. 그것들은 최우선적이고 독립적인 경험의 요소들로 간주되었고, 반면 언어는 그렇게 형성된 지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부차적인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칸트가 지식에 '구조'를 부여하는 '판단 형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지금까지 언어와 문법에 부수적인 역할만이 할당되어 온 것에 대한 암묵적인 이의 제기였던 것이다."(208-9)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판단의 논리적 혹은 언어적 형식은 진정한 '경험'의 형식이기도 했다. 지식은 단지 형식 없는 전前개념적인 감각 입력, 즉 인상들의 개념적 해석에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그 자체로 인식적인 구조와 더불어 나타난다. 그 구조는 오로지 판단 형식들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그러한 형식들 자체는 오로지 논리적 문법의 표준 형식들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처럼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날것 그대로의 감각 인상raw sense impression에서 시작하는 대신, 이제 우리는 경험의 기본 자료란 구조화된 감각적 '표상들Vorstellungen'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언어와 사유의 공통 형식들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의 감각 경험, 즉 표상들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이성의 한계 혹은 범위는 또한 암묵적으로는 표상과 언어의 한계 혹은 범위이기도 하였다."(209)


"마우트너의 유명론적인 '언어비판'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그의 주변에서 민중Volk, 정신Geist 등과 같은 어마어마한 추상적 어휘들을 사용해 가며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주술을 목격하게 된 데 따른 반발심이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좀더 단순하고 구체적인 어휘들을 이용해 추상적인 어휘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문제에 관한 러셀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그가 사회주의에 대해 가진 초창기 관심과 '국가'와 같은 거창한 정치적 추상체들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에서 자극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한 유명론을 견지한 마우트너에게 '개념'은 '개체'의 묶음을 명명하거나 기술하기 위해 채택된 단어들일 뿐이다. 따라서 일반명사는 진정한 '존재자entity'의 이름이 아니라 개체들의 집합의 이름, 혹은 기술description이다. 마우트너는 개념이란 어휘나 말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결국 개념은 사유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210)


"마우트너를 무엇보다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추상명사나 일반명사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일반인들의 경향이었다. 그는 추상체를 구상화하고자 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향이야말로 사변적인 혼란의 원천일 뿐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불의와 사악함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과학에서는 힘, 자연의 법칙, 물질, 원자, 에너지 등과 같은 오도된 개념들이 그런 종류의 것들에 해당한다. 철학에서는 실체, 대상, 절대자라는 개념이, 종교 사상에서는 신, 악마,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개념이,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는 인종, 문화, 언어 등의 개념과 더불어 그것들의 순수성이나 모독에 대한 강박관념이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구상화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래서 마우트너는 형이상학과 독단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며 또한 불관용과 불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211-2)


"언어는, 사람들이 '행위'할 때 그들 사이의 매개자가 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양이 대륙을 갈라놓으면서도 동시에 합쳐 놓듯이, 언어 또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동시에 장애물인 것이다. 〈언어는 고독한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오로지 인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그 낱말들로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 그대로 언어는 그 본성상 애매한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말은 부단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 전체도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에 있다. 어떤 것도 그대로 있지 않다."(219)


"언어비판이 향해 가는 종착점은 메테를링크의 신성한 침묵이다. 이른바 〈우리가 진정으로 말해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침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마우트너가 따라간 길의 종착점이다. 그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에크하르트와 쿠사누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만일 어떤 지적인 독자가 회의주의적 개념, 이른바 실재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단지 여러 가지 부정적 진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은 긍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지식이다. 철학은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언어비판이다. 그러나 언어비판은 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노동이다. 인간은 일상의 언어를 활용하든 철학적인 언어를 활용하든 세계에 대한 은유적인 기술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225)


"에른스트 마흐만큼 자신이 속한 문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지식을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마흐의 견해는 그의 모든 사유의 근거가 되는 토대를 형성한다. 모든 과학적 노력의 과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감각 자료를 기술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흐는 감각 자료를 좀더 중립적이고 어물쩍한 어휘인 '원소element'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단순성 혹은 경제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마흐의 관점은 철저한 현상론자의 관점이다. 세계는 감관에 나타나는 것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꿈은 다른 어떤 원소들의 집합과도 다를 바 없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가 된다. 왜냐하면 '외적' 경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내적' 경험도 경험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개념, 관념, 표상도 모두 '원소들'의 집합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종적 개념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마찬가지로 감각 자료로 환원된다."(227-9)


"마흐는 물리 이론이란 경험을 단순화하는 감각 자료의 기술들이며, 과학자는 그것을 통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수학의 기능은 그 자체가 지닌 조직화의 힘을 통해 감관이 지각한 것을 단순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더 유용하다거나 덜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은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론의 본성이란 감각들을 판단한다기보다 그것들을 기술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은 과학의 본질적 특성, 즉 경제성을 거스른다. 뉴턴 물리학에서 나타나는 '절대' 공간, 시간, 그리고 운동이라는 개념은 그저 불필요할 뿐이다. 〈이 절대 시간은 그 어떤 운동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측량될 수 없다. 그것은 따라서 실천적인 가치도, 과학적인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무익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232-3)


"대개 20세기의 과학은 마흐의 '기술記述'보다는 헤르츠의 '모델'을 더 선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흐의 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은, 예를 들면 '관찰 가능한 것'의 우선성에 관한 양자 물리학자들의 논증들(예를 들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논증들) 속에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불편한 관계가 플랑크에게는 곧 과학 공동체로부터의 도편추방의 시대를 의미했다. 자신의 작업이 헤르츠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인정한 볼츠만은, 마흐와 오스트발트를 비롯해 그들의 추종자들이 쏟아붓는 가혹한 비판을 견딜 수 없었다." "1906년경 형이상학에 맞서던 그간의 투쟁은 생기를 잃은 채 독단적인 경험론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모든 가설적 구조들은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의 과학계에서 이런 태도가 대체로 사라지고 없다면, 그것은 헤르츠의 후계자들 덕분이다."(246)


# 헤르츠의 모델 : 수학적인 공식이 물리학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골격을 제공하고 물리적인 실재에 논리적인 구조를 부여한다는 사실, 그런 구조나 모델의 구성 요소들이 지각으로부터 도출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관찰된 사건들의 가능한 배열들에 대응한다는 관점


"(어떤 이론적 표상의 영역을 그 내부로부터 보여주는) 헤르츠의 방법은 특정한 표상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더 일반적인 원리들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당 이론에서 의미 있게 표상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의 총합을 규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칸트의 비판 계획이 가지는 본격적인 철학적 위력을 인정할 줄 아는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야말로 헤르츠를 선호하게 된 중요한 요점이었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요한 야심 가운데 한 가지 역시, 외재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이성'의 전반적인 한계 영역을 그 내부에서부터 보여 주는 방식으로 구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칸트는 (합리적으로 말해서) 형이상학의 의문들이란 그렇게 구획된 이성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거나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결국 형이상학은 '알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꼴이라는 사실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247-8)


"'이성의 한계' 이론을 좀더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계Schranken와 한계Grenzen에 대해 칸트가 행한 구분을 주목해야 한다. 칸트는 〈(연장된 존재들 내에서) 경계란 언제나 어떤 한정된 장소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곳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한계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양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는 한에서 그 양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不定的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인간의 이성은 경계가 아니라 한계를 수용한다. 즉 이성은 실제로 무언가가 이성과 상관없이 존재하며 이성이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음은 수용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이성이 자신의 내적인 진보에서 완결을 보게 되리라는 주장은 수용하지 않는다.〉" "수학과 물리학이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의 수는 경계 지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견은 현상으로 한계 지어져 있다."(251)


"쇼펜하우어 자신이 칸트주의적인 견해를 넘어섰다고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요점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순수한 사변적 이성의 영역을 '표상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객체o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전前칸트주의적인 독단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체su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즉각 피히테 식의 관념론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지각의 심적 이미지로서의 표상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표상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추상적인 개념들, 이른바 종種, 혹은 집합 개념의 표상이나 예술의 대상인 플라톤적인 이데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주체를 세계 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본 것이다." "객체는 오로지 그것들이 알려지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주체는 오로지 인식자인 한에서만 존재한다."(258-60)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도덕성의 기반이 순수한 선험적 개념이 아니라 경험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실재하며,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의지를 움직일 수 있다. 선험적이고 개념적인 어떤 것이 의지를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의지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자극받아 작용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강력한 논증을 통해 합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덕스러운 것이 완전히 합치한다는 칸트의 생각을 혹평한다. 쇼펜하우어에게 합리성은 윤리적으로는 중립적인 의미를 띠며, 따라서 덕스러운 것도 사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이 훨씬 더 다양한 유형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능력을 뜻할 뿐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을 이용해 주변 환경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사유 능력의 결과, '인간은 자유롭다'고 이야기된다."(262-3)


"칸트적인 사유에 남아 있는 스콜라주의의 잔재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공격은 도덕성을 감정과 의도에 직접 의존하게 만드는 수순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칸트가 구분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었던 사실과 가치의 영역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는 더욱 확고하게 분리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다리를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는 인간만이 진정으로 도덕적이다.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도덕성은 비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사람들 각자가 신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절대적인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적인 인간의 목적은 '부조리 속으로의 도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 유한한 인격체는 자기 자신을 무한한 자에게 전적으로 위탁하게 된다. 이런 관계 하에서라면 친구나 동료 인간은 불필요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265-6)


"개인이 오직 하나뿐인 책임의 담지자이며, 종교와 도덕적 경험의 오직 하나뿐인 주체이다. 이런 개인이 질식할 것만 같은 군중 속에서 길을 잃었으며,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암울한 상황에 주목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보았다. 케리케고르는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맞서 방대한 논쟁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그가 말한, 소위 간접적 의사소통의 본질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간접적 의사소통, 혹은 '반성의 수단으로서의 의사소통'은 소크라테스의 양식에 의거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산파술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앎의 문턱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스스로 그 문턱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사변은 '객관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지만, 기독교는 주관적인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주관적인 진리라는 개념은 키르케고르의 모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다."(268-70)


"19세기 말에 그러한 결론을 가지고 일반적인 대중 독자층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소설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였다. 그의 작품과 키르케고르의 저술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들의 개념과 '간접적 담화'와 '삶의 의미'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에 근거하며, 예술을 '감정의 언어'라고 보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말은 이성적 사유의 매개체였다. 따라서 톨스토이에게 예술은 도덕적 교훈을 널리 퍼뜨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도덕적 삶에 관한 톨스토이의 견해를 자세히 보면,그는 키르케고르보다는 쇼펜하우어와 일치하는 면이 더 많다. 톨스토이의 경우, 만일 도덕성이 사회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며 인간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감정의 전도체이다."(272)


"칸트의 비판철학으로부터 톨스토이의 우화에 이르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완전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그 안에는 쇼펜하우어가 착수하고 키르케고르가 완성한 어떤 논리적인 발전이 존재한다." "행위의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성의 한계를 구획하려는 시도로 시작한 이 작업은 가치의 영역에서 이성의 타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부인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러므로 이성의 범위에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가치, 도덕, 그리고 삶의 의미가 오로지 합리적인 사유의 경계선을 넘어서 있는 정서의 영역 안에서 간접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에 관계된 모든 사람은 사상가, 예술가, 그리고 사회비평가들로 이루어진 빈의 한 세대 전체에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산하였다. 그 세대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관으로부터 아예 자신들의 계층 전체가 소외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276-7)


"헤르츠와 볼프만은 물리과학의 논리적 명료화와 체계적 이론의 경험적 적용이 실제로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bildiche Darstellung을 제공하는지 보여 주었다. 여기서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어구는 마우트너가 의미했던 '은유적인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이른바 수학적인 모델을 가리킨다. 그것은 제대로만 적용된다면 세계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지식을 산출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칸트의 근본적인 반형이상학적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른바 물리 이론에 담긴 언어의 한계를 전적으로 '그 내부로부터' 구획함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해 왔다. 따라서 헤르츠와 볼츠만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적 견해에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말해 그들의 도움으로 과학 이론의 기술적記述的인 언어가 어떻게 물리학의 사실적인 탐구에서 '표상적인' 용법을 획득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의 합당한 후속 단계(언어 비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279-80)


6 다시 생각해 본 《논리철학논고》


"앞선 장에서 우리는 당대 합스부르크 빈 사회의 교양을 갖춘 모든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후기 칸트주의의 비판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보여 주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는 1) 빈에서는 전반적인 철학적 '언어비판'의 필요성이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쓰기 15년 전쯤부터 대두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2) 그러한 포괄적인 언어비판을 처음 시도했던 마우트너의 이론적 결함이 한 가지 해소되지 않는 매우 구체적인 난점을 남겼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헤르츠와 볼츠만의 물리학을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학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단일하고도 일관된 설명 속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난점이 극복될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우리의 분석을 통해 도달한 가설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몰두해 있는 문제이자 《논고》의 집필이 지향할 목표를 결정해 준 문제란, 바로 그 '일관된 설명'을 찾는 문제였다는 것이다."(284-5)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자체에 관한 글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었던 것 같다. 음악의 쇤베르크와 회화의 코코슈카처럼 그는 직업주의를 중시하지 않았고, 그저 무신경하게 자기 자신을 독학으로 공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그에게 감명을 준 몇 안 되는 철학 저술가 중 한 명은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였다. 18세기에 괴팅겐 대학교의 자연철학부 교수였던 리히텐베르크는 크라우스의 존경을 받았고 마흐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금언체 양식의 철학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 점에서 보면 《논고》에 담긴 금언들 역시 단지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리히텐베르크는 이론물리학과 언어철학 양쪽에 모두 저술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 기저에 깔린 정신은 (폰 브릭트가 말한 대로) '비트겐슈타인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인다."(297)


"공학도 비트겐슈타인은 마우트너 같은 사람의 철학적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표상적인' 언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물리학에서, 마우트너에게 은유적인 기술을 뜻했던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표현을 헤르츠적인 의미로 극단적으로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통해 자연현상을 의미 있게 표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얘기하는 똑같은 원리들이 기계를 제작하는 데도 실제로 적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열렬한 헤르츠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역학에서 그림, 즉 '모델'의 형태로 공적 용법의 표상Darstellungen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역학이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분과로 간주될 수 있다는 확신은, 물리학자가 역학의 현상을 나름대로의 '모델'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상에 부여하게 되는 수학적 구조의 귀결이었다."(302-3)


"더 나아가 그러한 표상은 그 자체의 수학적 형식에 의해 그 적용 범위가 대체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자기한계적self-limiting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최소한 한 분야의 언어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역학의 언어로서,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다시 말해 세계의 '표상'을 수학적인 그림의 형태로 제공하기에 충분한 일의성과 올바른 구조를 갖춘 언어이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 그에 상응하는, 그러나 완벽하게 포괄적인 '언어의 수학'을 확립할 수만 있다면, 마흐나 마우트너처럼 역학적 개념의 심리적·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대신에, 헤르츠가 역학의 수학적 구조를 고려하여 역학을 철학적으로 안전한 기반 위에 올려놓고 결과적으로 역학 비판을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언어의 본성과 한계를 '그 내부로부터' 설명해 줄 '언어비판'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303-4)


"비트겐슈타인이 자연스럽게 프레게와 러셀의 작업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던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왜냐하면 러셀의 초기 저술들에 나타난 철학적인 기획은 일반화된 형태로 헤르츠 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정의된 형식적 모델에 입각하여 명제들의 진정한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명제 계산법propositional calculus'에 도달하였다. 그로부터 귀결된 형식주의는 실제 세계의 '대상들'을 한데 묶어 '사실'로 만들어 내는 상응하는 구조들을 언어의 내부적인 구조가 어떻게 표상하는지 보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명제의 참된 논리적 형식은 종종 자연 언어의 오도된 문법적 외관에 가려져 있으며 그러한 참된 형식은 《수학 원리》에 담긴 논리적 기호들로 표현될 때 가장 잘 포착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근본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305)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명제들은 어떤 상황이나 대상들의 배열(더 일상적으로는 '사실fact'이라고 불리는)에 대해 우리가 구성한 표상들이다. 명제는 그러한 사실의 정확한 재현물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사실의 본질적인 측면, 다시 말해 이름들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들과 관계사들에 의해 표상되는 대상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원리상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대상들에 관해, 그것들을 명명하고 그것들의 배열을 기술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다. 이름 혹은 기호들 간의 확정적인 관계가 바로 명제의 뜻sense이다. 〈모델이 표상하는 것은 그것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델이 기호들에 관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름 혹은 기호가 지칭하는bedeuten 대상들이 실제로 그렇게 배열되어 있다면, 그 명제는 참이고 그 모델은 옳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고 그 모델은 옳지 않다. 어느 경우든 〈한 모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을 실재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310-1)


"따라서 두 가지 점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모델 이론에 본질적이다. 하나는 진리대응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언어 사용을 허용하고 정당화해 주기에 충분한 '동형성Verbindung'이 언어와 실재 사이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언어의 논리적 구조는 우리가 대상들의 특정한 배열이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해 준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체계 안에서 '진리표truth table'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진리표는 어떤 모델이든 그 모델의 선험적인 진리 가능성들을 확립한다. 한 명제에 들어 있는 기호들에 가능한 모든 '진릿값truth value'이 부여되고 나면, 그중에서 어떤 것이 참인 가능성들인지 결정될 수 있고, 그 명제의 뜻, 다시 말해 그 기호들 간에 성립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되는 관계가 무엇인지 주어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어떤 한 모델이 논리적 공간에서 어떠한 상황을 나타내는〉 방식이다."(311)


"비트겐슈타인에게 결국 언어와 세계의 관계 그 자체는 다른 모든 비사실적인 숙고의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명제들은 모델화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명제는 동시에 자신이 실재를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기술할 수 없다. 그러지 않고 그것을 굳이 기술하려고 한다면,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 되어서 결국에는 무의미해지고 말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모델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모델은 사물들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방식을 모델화하였고, 따라서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델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은 모델 그 자체의 본성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이다. 모델은 사실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감히 표상할 수 없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318-9)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착수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비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논리학과 과학에는 일상적인 기술적 언어 안에서 수행하는 적절한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수학적 모델에 어울리는 세계의 표상을 산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 가치,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들은 이 기술적 언어의 한계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간접적'이거나 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적 통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첫째 부분은 헤르츠가 물리과학의 언어에서 모델과 표상에 대해 시도한 분석을 확장함으로써 성취되었고, 그는 이러한 확장을 위하여 프레게와 러셀의 명제 계산을 그 기본 골격으로 활용하였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둘째 부분은 부정적인 방식 외에는 말로써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319-20)


"사실의 세계에 가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수수께끼란 없다. 세계의 의미는 사실적인 것의 바깥에 있다. 이러한 가치와 의미의 영역에는 명제도 없고 사실도 없다. 오로지 역설과 시가 존재할 뿐이다. 크라우스의 말처럼 〈해결책 없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오직 그 자가 예술가다.〉 논리학이 어떻게 세계를 표상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세계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함께 '신비로운 것'을 구성한다. 두 영역 모두, 명제들이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영역들이다. 따라서 '보여 줌'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계와 논리가 맺는 관계,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과 세계의 뜻, 혹은 의미가 맺는 관계가 그것이다. 이런 측면을 명제들의 논리적 구조 내부로부터 보여 주는 일의 미덕은, 그럼으로써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이 과학적으로 단호히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324)


"이성과 환상을, 물리학자의 수학적 표상과 시인의 은유를, 직접적인 기술적 언어와 '간접적 의사소통'을 분리시킴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했다. 모델 이론은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이론의 수학적(논리적) 기반은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그것들의 한계를 보여 주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과학적(합리적) 탐구의 한계를 결정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모델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삶의 의미'는 문제라기보다 수수께끼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해결하거나 답해야 할 질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델 이론은 삶의 의미가 이성의 범주들을 통해서는 논의될 수 없는 주제라는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확인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삶의 의미는 더는 학문적인 질문이 아니었다."(331-2)


7 인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후기 철학


"빈학파의 논리실증주의가 모양을 잡아 가고 있던 1920년대 중반의 매우 중요한 시기에, 그 학파에 관여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모두 비트겐슈타인과 《논고》의 권위를 깊이 존중하였다. 그렇지만 정작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방관자인 채로 남아 있었고, 점차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30년대 초에 이르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간주하고 있는 생각과 주장들로부터 스스로 완전히 결별하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논고》에 담긴 은유들을 〈뚫고, 올라가, 넘어서서〉 마침내는 그것들을 '정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애초에 언어에 관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바로 그 난점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의 난점들은 해결하지도 못하고 내버려 둔 채,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철학적 학설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한 《논고》의 논증을 전혀 새로운 주장의 원천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361-2)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뉴턴 식의 역학이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말해 주는 것은 이것이다. 즉, 그런 이론은 우리가 실제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흐가 흄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칸트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흄에 대한 칸트의 반격을 재연하면서, 다만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언어적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용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었던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라는 결정적인 착상은 미혹일 뿐이었다. 언어적인 영역과 세계 사이의 관계들, 이를테면 의미, 사용, 혹은 언어 사용에 수반되는 일종의 사용 설명서 같은 것들은 형식적 정의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단지 '터득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364-5)


"난파 중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와 문화 속에서 자란 중부 유럽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이러한 철학적인 개혁은 신선한 공기를 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대략 《논고》의 5분의 4는 굳이 명백한 오해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직설적이고 근엄한 실증주의적 표어들의 원천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젊은이들이 독해한 바대로, 그 책은 웅장하고 매우 전문적이었으며 외형상으로는 미신에 대한 최후의 탄핵 선고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단 실증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나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다른 어떤 빛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1929년 이후로 철학에 복귀하여 이전과는 대조되는 두 번째 철학함의 국면으로 점차 접어들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새로운 방식은 실증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초기의 실증주의적 입장을 새롭고 심도 깊은 기반 위에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비추어졌다."(366-7)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그 이전부터도 《논고》가 실증주의적이기는커녕 정확히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를 바랐다. 빈의 실증주의자들이 '중요한' 것을 '검증 가능한' 것과 동치로 보고, 모든 검증 불가능한 명제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을 때, 《논고》의 결론부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만이 홀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분명히 주장되었다(비록 소귀에 경 읽기인 셈이기는 했으나). 《논고》는,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로 포착해 내기에 부적절한 것들 안에서만 '더 높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명제'로 '그릴' 수 있는 '사실'이란 우리의 도덕적 복종이나 미적 승인에 관한 그 어떤 본질적인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택한 침묵은 실증주의자들의 것과 같은 조롱의 침묵이 아니라, 존경의 침묵이었다."(367-8)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더는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에 있지 않았고 '명제'와 '사실' 사이에 상정되는 구조적인 유사성 같은 것에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물리학 내에서라면,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을 제공해야 할 특별한 이유들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을 '사실의 그림들'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덜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것들 대신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는 상이한 표현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실천적인 규칙들, 그러한 규칙들이 적용하는 언어게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언어게임들에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더 폭넓은 차원의 삶의 형식들을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초월적인' 문제의 핵심은 더는 언어적 표상의 형식적인 성격 안에 놓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것은 '인간의 자연사' 속의 한 요소가 되었다."(373)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더욱 심오한 문제들은, 심지어 수학에서조차, 수학적인 계산의 내적 정연함이 아니라 그런 계산이 외재적인 적절성을 획득하게 되는 규칙 순응적인 행동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특정한 발화의 '의미'는 바로 그 표현들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규칙 순응적이고 기호 사용적인 활동('언어게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차례로 그러한 기호 사용적인 활동들은 더욱 폭넓은 활동의 패턴들(즉 '삶의 형식들')로부터 그 유의미성을 이끌어 낸다. 삶의 형식은 그러한 활동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활동들은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삶의 형식'이 '언어게임'을 위한 합당한 맥락들을 창조하는 그 모든 다종다양한 방법들과, 그럼으로써 그 언어게임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경계를 어떻게 정하게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된다."(375)



8 직업주의와 문화: 현대 사조의 자살


"후기 합스부르크 빈이 (크라우스가 표현한 것처럼)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비트겐슈타인 세대의 지적인 청년들에게 그곳이 가혹한 시험대였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이중 군주국,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 이교도인 투르크족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300년 전에 형성된 이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에 인접한 상태로 조용히 화석화되어 온 포 계곡에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길게 뻗은 엄청나게 넓게 펼쳐진 영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1800년 이전에 프란츠 황제가 처음으로 이룩했고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요제프가 영구화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 등 모든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통제의 전체적인 친근한 발판들이 갑작스레 해체되어 버렸고, 이에 따라 빈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 나간 자신들의 공화국을 위해 1920년대의 유럽에서 자신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401-2)


"실용주의적인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찾아온 사회 정치 운동의 건설적인 가능성들을 잘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제도와 사회적 관행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한 그들은 더는 소외의 원인을 (특히 키르케고르적인 형태의 극단적인 소외의 원인을) 이전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생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성인들이 수행해야 할 적극적인 활동들이 많았다." "헌법의 뼈대를 갖추어야 했고, 의회를 세워야 했으며, 효과적인 사회민주주의 체계가 순조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합스부르크의 극단적 보수주의라는 사회 전반의 장애물은 마침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실용주의자들은, 지금은 미래를 지향하고 건설적인 일들을 찾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흐의 역사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실증주의는 그 형이상학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호소력을 지녔다."(403-4)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진 1920년의 사람들에게 《논고》에 담긴 언외言外의 요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적 개인주의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을 놓고 볼 때, 그 책에서 중요하게 보인 것은 오로지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 이를테면 그 책에서 소개한 형식적인 기법들, '그림들'의 체계로서의 언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진리표 그리기 방법뿐이었다."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실증주의와 실용적인 기술적 문제들을 지향하는 자연스러운 전환이 목격되었다. 삶, 사유, 예술의 모든 영역이 새로운 부흥을 요청했다. 중요한 것은, 활용 가능하고 효과적인 최신의 과학적 기법들을 건설과 개혁이 위대한 과업에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그야말로 이론과 지적 활동의 핵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서 얼토당토 않은 호소력을 발휘하게 되었다."(410)


"1920년대에 성취한 예전 취향과 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은 자연과학과 여타의 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한 기술적 혁신을 자극하였다. 예전의 합스부르크 영토와 독일과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낡은 독재 권력이 힘을 상실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시와 문학, 회화와 영화 제작, 음악과 건축 등의 분야들이 강렬한 기법상의 실험 단계로 돌입하였고, 그러는 동안 예술가와 작가들은 이전까지 향유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때 이후로도 (특히 러시아에서는) 향유하지 못하게 되는 고도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당시는 모든 예술의 분양에서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적 언어나 음악이나 회화가 과연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표상할 수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전쟁 이전의 모든 비판적 의심들은 파기되었다. 실증주의적 태도는 행동을 낳았다. 해야 할 일은 단지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진척시키는 것뿐이었다."(413)


"문화 할거주의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이제 예전의 낡고 진부한 정통적 관행들은 말끔히 잊혀졌다. 그러나 크라우스적인 '고결한 인간들'이 각기 스스로 판단해 선택한 매체와 절차를 통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환상을 펼쳐 갈 수 있는 문화적 민주주의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예술의 전문 직업화 또는 결국은 낡은 정통적 관행 대신에 새로운 정통적 관행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새로운 직업적 정통성의 관행은 특별한 일련의 기법들을 통해 규정되었다. 이제 직업적으로 훌륭한 행동이란 자신이 특별한 스타일이나 방법을 숙달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1890년대의 탐미주의는 약 30년이 지난 후의 매우 다른 환경에서, 그리고 매우 다른 인식론적 토대에서, 예술의 전문 직업화 속에 사회학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화가는 화가는 화가이고, 음악가는 음악가는 음악가이다.〉)"(415-6)


# A painter is a painter is a painter while a musician is a musician is a musician.


"음악에서건 건축에서건, 1914년 이전에 쇤베르크와 로스라는 '비판적' 세대가 수행한 기술적인 혁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형식화되었고,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지나치게 장식적인 양식만큼이나 인습적인 것이 되어 버린 강압적인 반장식적 양식의 기반이 되었다." "시와 문학, 회화와 조각, 그리고 심지어는 물리학과 순수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각 경우마다 이를테면 공리화, 혹은 도약률sprung rhythm, 조작주의, 혹은 비구상 예술 등의 새로운 기법들은 처음에는 19세기 후반으로부터 떠넘겨진 예술적이고 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입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고도 합당한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현대 시인, 추상 미술가, 철학적 분석가 등 새로이 전문 직업화된 학파들이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 버림으로써, 결국에는 도리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423)


# 도약률sprung rhythm : 하나의 강세가 넷까지의 약한 음절을 지배하며, 주로 두운, 중간운 및 어구의 반복에 의하여 리듬을 갖추는 일종의 운율법


9 후기: 소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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