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시어도어 래브 지음, 강유원.정지인 옮김 / 르네상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1장 중세 서구의 통일성들


# 중세 유럽인들의 삶에 기본적인 동일성을 부여한 요인들

1. 교회 : 교황(사제)의 높은 권위와 지역에 뿌리내린 교회(수도원)들이 예배와 축제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 부여하는 통일성

2. 전쟁 :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춘 영주의 군사적 보호 아래 일정한 생산물과 노역을 보답으로 제공하면서 살고 있는 지역민들

3. 농노의 예속상태 :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그 대가로 보호와 기본적 생존을 보장받는 권리와 의무 관계

4. 도시 구조 : 농촌에 비해 더 많은 경제적·정치적 권리, 특권을 가진 수공업 길드들,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무역상·상인들

5. 정치 형태 : 사회질서의 최상부에 (신에게 통치권을 부여받은) 한 명 또는 소수가 자리잡고 있는 피라미드식 위계 모형

6. 교육제도 : 3학(문법·논리학·수사학) 4과(산술·기하·음악·천문학)로 구성된 대학 커리큘럼과 식자들의 공용어인 라틴어

※ 존재의 대연쇄 : 중세 유럽인들의 삶을 포괄하는 사유


2장 다시 만들어진 유럽: 르네상스를 향하여


# 중세 유럽인들의 삶에 균열을 가져온 사건들

1. 종교 : 보니파키우스 8세(재임 1295~1303)의 간섭에 저항한 군주들의 조치는 아비뇽 유수로 이어지고 곧 교황의 권위와 군주의 통치권을 구분하는 이론적 논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2. 전쟁 :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잉글랜드의 보병과 궁수들이 프랑스의 정예 기병대를 격퇴하면서 중세의 전쟁 수행 방식은 수명이 다해갔으며, 화약의 사용은 이에 종지부를 찍었다.

3. 질병 : 흑사병의 도래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붕괴되고 산업·상업분야의 변화가 촉진되었으며, 고용구조, 사회계급 간의 관계 등도 과거와 결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4. 인문주의 : 고대 원전 연구,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의 대결, 자연에 대한 관심, 중세 변증법과 다른 논리학 체계, 가까운 선례가 아니라 머나먼 과거에 의지하려는 욕구 등이 생겨났다.

5. 시각예술 : 두치오, 치마부에, 조토 등 사람들이 화가의 이름을 알기 시작했고, 상징적 재현보다는 명확히 표현된 풍경 묘사, 3차원적으로 표현된 인물, 강렬한 감정 등이 중시되었다.


3장 르네상스 문명


# 르네상스 시기를 특징 짓는 요인들

1. 화약 : 비교적 싼 비용으로 장비를 갖출 수 있는 포수는 기사나 장궁병보다 쉽게 훈련이 가능했고 따라서 군대 규모와 군비 지출, 그리고 거기서 야기되는 인명 손실이 급격히 증가했다.

2. 새로운 국가 체제 : 권력의 중앙집중화, 광범위한 관료체제화, 급속한 조세인상, 전쟁수행 능력의 엄청난 확대, 전통적으로 독립적인 권위를 누렸던 계급들의 편입 등이 진행되었다.

3. 엘리트 문화 : 중세 귀족은 군사적 역할을 가능하게 한 장비와 용맹으로 공동체를 뒷받침했지만, 점차 세련된 문화적 성취, 지성과 취향, 스타일의 우월함이 위신의 원천이 되었다.

4. 해외 정복 : 아시아와 대서양 너머로 활동공간이 확대되면서 자기규정적 집단성을 나타내는 말로 '유럽'이라는 단어가 '기독교 세계'를 대체했고, 야만인에 대한 혐오가 크게 증가했다.

5. 자본주의 : 시장 경제와 노동분업, 새로운 금융제도의 확산, 지속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과 태도 함양,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도시 부르주아지의 성장 등이 나타났다.

6. 과거 지향 : 중세를 배척하고 머나먼 과거에서 모범을 찾는 태도, 개인의 개선과 더불어 공공선을 추구하는 미덕 등은 교육, 문학, 예술, 종교, 정치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7. 종교개혁 : 성경과 교부로 돌아가자는 신학자들의 요구는 과거 지향적 태도와 일맥상통했으며, 특히 루터와 그의 계승자들은 중세의 외피를 제거한 순수한 기독교를 재창조하고자 했다.

8. 세속화 : 관찰과 수학적 논의를 전개한 갈릴레오, 왕권의 세속화를 옹호한 마키아벨리, 신성함의 역할을 제한한 데카르트 같은 인물의 등장으로 종교적 심성과 권위는 서서히 쇠퇴했다.


"1600년 경 '국가'라는 단어가 일상 용어로 등장하면서, 국가는 국민과 정부 어느 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비인격적 존재로 규정되었다(같은 시기에 사업체들도 이와 유사한 비인격성이 덧붙여졌다).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개별적인 탐구 영역으로 분리했지만, 유럽 전역에서 등장한 그의 계승자들─특히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프랑스의 장 보댕, 네덜란드의 휘호 흐로티위스, 그리고 영국의 토머스 홉스─은 그보다 더 많이 나아갔다. 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의 구체적인 이익을 대체한 자연법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그 인격적이고 신성한 토대를 분리해낸 지리적·역사적 분석을 구상해냈다. 독점적 왕조주의─국가는 통치하는 왕가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으로,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의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국가의 비인격성은 정치가들의 사유에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73-4)


"귀족을 길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여기서 중요한 과제는 복속시키는 것보다는 흡수하는 것이었다. 군주는 수 세기 동안 지방을 지배해온 귀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다면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필요한 건 복종이나 마지못해 하는 협조가 아니라 진정한 동반자 관계였다. 통치자는 시골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영토 전체에 걸쳐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의 효율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조짐은 중세 말기 잉글랜드에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가들이 무급 행정직책을 맡고 의회에 참석함으로써 국가 통합을 돕고 그럼으로써 중앙정부의 의사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 동반자들은 17세기 중반에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분명히 알려준 혹독한 내전을 치르고서야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78)


"영토를 기반으로 한 정체들이 견고화된다는 사실 자체는 그 정체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체계화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험적으로 시작된 외교적 관계와 절차의 정교한 네트워크가 유럽 전역에서 확립되었다." "이 과정을 가장 예리하게 관찰한 이들 중 하나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정치적 유산》에서 군주들은 언제나 협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은 주목할 만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외교의 바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했다. 1648년의 조약들에서 유럽의 영토국가들 상당수는 처음으로 그들의 두드러진 차이점들을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단번에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국가 형성에 성공했을 때에만 그들은 코앞에 당면한 구체적인 갈등의 해결─이는 이해당사자들이 기껏해야 둘이나 셋이었던 이전의 모든 평화주의의 목표였다─을 넘어서 대규모 국제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80-1)


"귀족들이 새로운 자기상을 만들어냈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화약전이 야기한 변화하는 요구에 맞춰가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변화들도 있었다. 미적인 감수성이 세련된 신사의 표식이 될 수 있었다면, 관리자로서의 기술 역시 그러했다. 문서기록이 늘고 복잡한 시장이 번성함에 따라, 대지주들이 성공적으로 재산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알아야 하는 것뿐 아니라 수리능력도 더욱더 필요해졌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교육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전례 없는 숫자로 아들들을 대학에 보냈다. 동시에 귀족들은 상당히 폭발적으로 도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관심사들을 좇았다. 이전에는 귀족들이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의 문화와 권력 중심지 가까이에 그렇게 많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교 '시즌'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87-9)


4장 위기에 처한 문명


# 르네상스의 이상들을 파괴한 일련의 사건들

1. 해외 진출 : 인구 증가와 경제 위기가 맞물리면서 해외진출이 가속화되었고, 새로 만난 미지의 땅과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진리들에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2. 무력충돌 : 영토로 규정된 중앙집권국가 개념이 구체화되면서 국가가 강대해지고, 이에 따라 군대 규모와 살상력이 증가하면서 정부와 신민, 국가 간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3. 종교전쟁 : 루터의 개혁으로 촉발된 종교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극도로 훼손하면서 유럽대륙을 무차별적인 학살로 몰아넣었고, 이단 배척의 희생양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4. 자연철학 : 천문학과 물리학, 해부학 등에서 나타난, 실험을 중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불온한 사상 취급을 받았으며, 한 세기 이상 낡은 관념들과 공존하면서 회의와 혼란을 심화시켰다. 


"거의 200가지 이해의 당사자들을 대표하는 109명의 공식적 대표자들이 독일 북서부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모여 5년간 꾸준히 협상한 끝에 1648년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외교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참가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남아서 새로 그릴 지도에 골몰하며 몸소 그 절차들을 궁리해낸 것만으로도, 기본적으로 외교의 체계와, 그리고 이후 몇 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하게 될 국제적 합의의 기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빈틈없는 대표자─시에나의 거물급 금융 가문의 일원이자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된 키지 추기경─가 협상에 참석하고 있었음에도, 교황청은 그 최종적인 조약이 교회의 이해에 불리한 것으로 파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파기는 가톨릭 신자들에게조차 무시당했다. 이것은 전쟁의 참상이 막을 내렸다는 것뿐 아니라 종교적 증오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의 신호였다."(144-5)


"독단적인 중앙정부가 지방과 지역의 권리를 짓밟는 일은 국제관계에서 일어난 화염과 맞먹는 수준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들을 초래했다." "인쇄술은 신문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낳음으로써 기존 권위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을 유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른바 '국가의 비밀arcana imperii'이라는 정부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업상 비밀에 대한 통치자들의 독점권을 훼손하였다. 신문은 새로운 모임의 장소와 연결됨으로써 특히 더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럽에 새로이 들어온 산물인 커피의 소산이었다. 커피숍은 신문이라는 17세기의 발명품을 급속도로 확산시켰고, 거의 항상 신문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전례가 없었던 공공의 장소와 공적인 담화가 생겨나는 첫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이는 '공적 영역'이라 일컬어진 새로운 것으로 결국에는 사회적 관계들을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키게 된 강력한 정치적 효과들을 지니게 된다."(147)


"성경과 초기 교부들에게로 돌아가려는 루터의 시도와 함께 시작된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막대한 불안을 초래했다. 또 인쇄술의 발명은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들이 가져온 효과의 가속화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에 따른 소요들에 대한 한 반응이 고대 사상의 또 다른 조류인 회의주의로 돌아가려 한 것이었음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서로 적대하는 세력들이 상호배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진리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그러한 주장들의 본질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하게만 보였다. 그 결과 16세기는 회의주의자들의 황금기가 되었다. 종교개혁 직전에 나온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부터 몽테뉴의 설득력 있는 탐구들을 거쳐 셰익스피어의 광대들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이르기까지 의심하는 자와 바보처럼 보이는 자들이 지혜의 횃불들로 떠올랐다." "스토아 철학의 부흥 역시 그 시대의 불확실성에 맞서는 방어물로서 의도되었다."(152)


"16세기에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회화와 조각의 주도적인 양식에도 그 위기의식이 반영되었는데, 그 양식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15세기 동안 예술가들은 페트라르카가 인도하는 대로 고대를 모방하면서 원근법과 자연세계의 묘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1500년대 초에 이르면 전성기 르네상스의 표본인 라파엘을 연상하게 되는 고요함을 담아낼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520년에 라파엘이 세상을 떠난 후, 점차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왜곡이 나타났고, 고통 받는 인물들과 소용돌이 치는 듯 불안정한 구성에 새로이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켈란젤로의 노예들은 대리석의 구속에서 해방되려 몸부림치고, 파르미지아니노의 인물들은 불가해한 몸짓과 기이한 자세를 부여받았으며, 티치아노의 후기 걸작들의 제재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며, 엘 그레코의 구성은 당황스럽고 인물들은 길게 늘여져 있다. 이 모든 것이 회의는 커져만 가고 해답은 여전히 포착되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조짐들이었다."(164-5)


"1590년대부터는 바로크 예술가들이 방향을 바꾸어 강한 힘과 감정으로써 감상자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그들도 여전히 고대세계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제 그들은 매너리스트들의 망설임과 당황은 뒤에 남겨두고 대신 자신감과 장엄함을 뿜어냈다. 그들의 강점은 격앙된 극적 순간의 묘사였다. 거대한 캔버스와 장관을 이루는 건물들, 화려한 색채, 그리고 강렬한 인물들은 경외감과 묵종의 상태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휩쓸어버렸다. 이 양식은 무엇보다도 바로크의 독단성과 현혹시키고 영감을 줄 수 있는 바로크의 위세를 좋아했던, 절대주의 군주들과 반종교개혁 교회의 후원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1500년을 전후한 결정적인 몇십 년 이후, 정치적 변화와 다른 종류의 변화들이 초래한 문제들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안정과 확실성을 회복할 수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가정들과 기대들로 넘어가야만 했다."(165-7)


5장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 164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전환기의 양상들

1. 정치 영역 : 지역 자치체들과 중앙정부 사이의 갈등이 중앙정부의 승리로 일단락되면서, 국가는 국민 생활 전반을 보호, 통제하게 되었고, 범유럽적인 국제적·군사적 체제가 모색되었다.

2. 정신 영역 :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치유하고, 운명을 지배하는 감춰진 세상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혹은 신적인 존재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공식적인 믿음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3. 문예 영역 : 본질에 대한 강조와 진지한 야망이 위트와 가벼운 대화로, 위엄 있는 종교적 회화가 차분한 전원풍의 회화로, 처벌과 억압보다는 격려하는 교육으로, 그 양상이 변모해갔다.

4. 과학 영역 : 당대에 만연한 회의와 불확실성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자신들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결정적인 주장을 하고 그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국가 건설 과정은 대체로 중세 초기부터 왕들과 군주들이 맞서 싸운, 가장 중요한 권위의 원천이었던 귀족과 도시, 그리고 교회라는 세 세력 모두를 상대로 진행되었다. 정부들은 17세기의 마지막 30년 정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구체화된 그 연합의 가장 주목할 점은 귀족과 중앙의 동반자 관계가 강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중앙정부들이 영토 전역에 미치는 통제력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의지한 가장 중요한 행정가들은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고 이제는 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행정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이런 관계는 유럽의 모든 수도에서 뚜렷이 드러났는데, 잉글랜드의 향신이든, 아니면 프랑스의 문관과 무관 귀족이든 요점은 동일했다. 지역에서의 권리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정부에 봉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았던 것이다."(176-8)


"누군가가 이러한 정치구조를 '앙시앵 레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음 25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유지되었던 바로 그 체제였다. 세습귀족은 몇 세기 동안의 투쟁을 거친 후에 정부와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간간이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공격뿐이었다. 경제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상업적 성공은 귀족계급으로 진입할 기회도 제공했다." "서구의 도시들이 17세기 중반의 위기 이후 자치를 위한 투쟁을 그만두고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앙집권정부에 통합되어 들어간 것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정책을 만들 수 있었고, 정체들은 사회의 중요한 부문으로부터 세금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교회들까지 비종교적인 이익에 굴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구조가 자리 잡았음을 확증해줄 뿐이었으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들이 보았다면 몹시 놀라고 또 기뻐했을 것이 분명한 구조였다."(179-80)


"이 패턴의 중요한 예외가 바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이다. 그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고, 최초로 러시아 해군을 창설했다. 가문의 세습이 아니라 정부 관직을 귀족의 표식으로 만들었으며, 교회를 왕실의 통제 아래 두었고, 외국인을 싫어하는 러시아를 개방하여 수많은 서구의 공학기술자와 건축가, 병사와 예술가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또 그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이 복잡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의 권력을 부과하여, 러시아는 그 이후로 줄곧 관료의 포화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손댈 수 있는 거의 모든 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쳤다. 그 개혁들이 가져다준 모든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들은 러시아 사회에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을 초래했다. 그 긴장들이란, 이를테면 서구를 환영헤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변화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희망은 언제나 좌절되고 말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184-5)


"기독교가 유럽을 정복한 이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신앙의 체계에서 막대한 변화의 첫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처음으로 종교적 신앙 자체가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로의 이 놀라운 도약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이후 몇십 년 동안까지도 욕설로 남아 있었다(홉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던 중상이었다). 그러나 17세기의 후반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것에 관한 다양한 조짐들이 나타났다." "좀 더 개괄적으로 보자면, 30년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열광'과 열정에 대한 반응이 이전의 회의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일부 관심사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데카르트조차도 인식에 관한 탐구를 신이 아니라 정신에서 시작했으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식과 사고의 안내자로서 신앙보다는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 용인할 수 일이 되었다."(203-4)


"17세기가 끝날 무렵, 특히 천문학과 물리학의 진보를 정점에 올려놓은 뉴턴의 역작이 출간된 1687년 이후에는 새로운 조건들이 실효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 과학에 부여된 권위는 르네상스의 가정들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과학의 성취들이 이른바 '책들의 전쟁'에 결정적인 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날카로운 언어로 씌어진 논문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고대와 근대의 상충하는 장점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글들에 담긴 맹렬함은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고수하려 했는지, 그리고 새로운 것의 옹호자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진보를 추구했는지 잘 보여준다. 거기에는 르네상스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대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필사적인 마지막 시도가 걸려 있었다." "뉴턴 이후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보라는 꽤 다르고 근대적인 개념이 제안되기 시작했다."(208-9)


"르네상스의 종말을 측정하는 척도로 두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태곳적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가정들, 즉 전쟁을 바라보는 태도의 새로운 전환과 공적인 영역에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의 극적인 후퇴를 꼽을 수 있다. 즉 사람의 가장 훌륭하고 용맹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라는 가정과, 공적인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방법은 초자연적인 통찰을 통하는 것이라는 가정 말이다. 한층 더 강력하게 표현하자면, 르네상스의 응집력을 해체한 두 가지 주요 동력은 30년전쟁과 과학혁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간 것은 바로 전자에 대한 급격한 반감과 후자에 의해 자극된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 마침내 반전의식이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과학자들의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주장들이 권위나 신성함에 대한 의지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213-4)


6장 예술, 예언, 그리고 르네상스의 종말


"화약은 개인의 허장성세를 말 그대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30년전쟁을 단순히 여러 전쟁들 중 하나일 뿐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고 치부하지 않으려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그 전쟁이 극단적인 잔인함과 폭력의 상징이었으며, 수 세대에 걸쳐 인간의 악행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었을 정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나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그 무엇도 그 맹렬성과 잔인함과 파괴력에 필적하지 못했다. 1차세계대전의 전운이 몰려오고 있던 무렵 독일의 장군 헬무트 폰 몰트케가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암시하고자 했을 때, 그는 (섬뜩하게도) 그 전쟁이 30년전쟁을 4년이라는 기간에 몰아넣은 것과 같을 거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야기한 외상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의 광포함이 심화되면서, 영웅주의에 대한 대안이 새로운 관심을 끌었고, 유럽의 기성사회 내에서 처음으로 반전정서가 존중 받게 되었다."(216-7)


"이 변화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설명하려면, 유럽 미술에서 가장 흔한 제재들 중 하나인 군주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된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군사적인 복장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왔고, 또 언제나 다른 어떤 모습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를 더 좋아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포즈는 무장을 갖추고 말을 탄 모습으로, 이는 로마 시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명한 조각상에서 따온 포즈였다." "17세기에도 말 탄 모습의 초상화가 누린 인기의 기세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새 그 전통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판 블루먼의 '말보로와 그의 장교들'의 시기에 이르면 그것은 상례가 되었고,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조차도 그 알레고리적 효력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된 장르에서 일어난 이러한 확신의 상실은, 30년전쟁기에 처음으로 완전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전사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초래한 희생이었다."(217-8)


"당연하지만 전투도, 승리를 미덕과 동일시하는 것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각 개인들조차도 한 가지 생각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루벤스는 《평화와 전쟁》을 그린 후로도 오랫동안 영웅적인 초상들과 군사적인 공예품들을 계속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도 '브레다'를 그렸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표현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에스파냐 궁정의 가정적인 장면들에 점점 더 집중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이 변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념적인 성격이 약해진 17세기 말과 18세기라는 시대가 전쟁과 그 의미를 훨씬 더 사실적이고, 모호한 뉘앙스를 곁들인 균형 잡힌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789년 이후에 다시금 강렬한 열정들이 전쟁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 또다시 영광과 잔인함이 전쟁의 지배적인 이미지로서 인정받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246)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면, 우리는 17세기의 어떤 소책자에서나, 1650년부터 1666년까지 매년 재림과 종말, 메시아 출현, 또는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666년에 대한 것이 특히 흔했는데, 또 다른 인기 있는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13장 끝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666이라는 숫자에 1천을 더하는 것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여겨졌고, 그리하여 1666년이라는 당대와 연관된 햇수를 찾아낸 것이다."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자신이 비전을 보았다고 주장한 이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유럽의 모든 지역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점과 권위층과 마찰을 빚는 그들의 경향, 그리고 때때로 그들이 떨친 국제적인 명성은, 그들이 그 시대의 문화 내에서 대표하고 있던 현상의 중요성을 입증해준다."(251-3)


"사람들이 예언가들에게 이끌린 것은 정확한 예측을 기대해서가 분명히 아니었다. 예를 들어 퀘이커 교도이면서 비전을 통해 예언했던 제임스 네일러는 10년이 조금 더 되는 동안 44편의 예언 책자들을 펴냈지만, 그의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리고 당국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가 말한 구체적인 내용들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발휘한 최면적인 효과였다. 1650년에 그가 어떤 교전이 있은 지 얼마 후 설교를 했을 때,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던바의 전쟁터에 있었을 때보다 제임스 네일러의 설교를 들었을 때 더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카리스마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서 힘을 지녀왔던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지옥불이, 그 메시지의 신비적이고도 묵시록적인 내용이 왜 그렇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예언 자체가 이 세계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254)


"점성술과 메시아 신앙 그리고 예언이 한 지점에서 만난 결과, 1652년과 1654년에 불길한 예언들이 번성한 것은 묵시록적 열광에 대한 당대의 개방성에 자극된 것이 분명하다. 1654년의 일식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논평이 그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 저자는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홍수 사이에는 1,656년이 흘렀기 대문에 그리스도의 탄생 후 1,656년이 흐른 뒤에 새로운 홍수(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 된)를 예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식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언들과 불길한 전조들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런 현상에 대한 오래된 전통적인 믿음과 1640~50년대의 격변들과 불안감들을 감안하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놀라운 것은 그러한 강박관념이 사라진 엄청난 속도였다. 이 방향전환이야말로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끝났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 중 하나다."(260-1)


"이 방향전환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에는 점점 더 합리적인 논변만을 고집하던 철학자, 법학자, 성직자, 의사들이 비판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고, 과학의 입지 상승과 자연에 관한 과학의 새로운 이해 때문이라는 설명, 그리고 군사적·정치적·사회적 격동이 진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중 마지막 설명이 가장 이치에 맞다. 세기 중간의 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서구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점성술과 예언의 힘도 쇠퇴했다. 그것은 진지한 예언들의 상당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런 예언들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더 이상 급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분명했다. 야수들의 해라던 1666년은 1652년과 1654년의 일식들에 비해 더 큰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방대한 문화적·사회적 현상 하나가 몇 세기 동안 번성하다가 그만큼 갑작스럽게 황급히 후퇴한 것이다."(261-2)


7장 혁명과 근대


"1700년을 전후하여 유럽인들이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야망들은 종종 '계몽의 프로젝트'라는 말로 요약되며, 이는 두 가지 추구를 포괄한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통제의 추구이며, 다른 하나는 그 정도가 더욱 확대된 사회적 평등의 추구였다. 이 두 목적은 모두 사실상 그 시대가 가장 열중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들은, 때로는 근대라는 개념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더욱 설명적인 명칭을 붙여줘야 마땅한 더욱 큰 기획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볼 때 1700년경부터 1900년경까지의 세월은 혁명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제일 낫다." "1700년경부터 시작된 두 세기 동안 유럽 사회는 고대에 대한 존경을 털어내버렸고, 전쟁의 영광에 의혹을 제기했으며, 초자연적인 것의 권위를 제한했고,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권위와 교회의 역할에 관한 여러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이때 유럽을 완전히 집어삼킨 혁명의 물결은 여섯 가지 주요 요소를 갖고 있다."(269-70)


# 혁명 시대의 주요 요소

1. 정치혁명 : 미합중국을 탄생시킨 독립전쟁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여러 독립 정체들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쳐 수립되었으며, 어느 정부든지 국민의 요청에 한층 귀기울였다.

2. 산업혁명 : 새로운 생산품들,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자원들을 조직적으로 운용하는 공장제도, 전례 없는 막대한 자본 축적은 새로운 경제적 삶이 향상되라라는 희망찬 기대를 낳았다.

3. 통신혁명 : 광범위한 운하 연결망 건설은 수송 속도를 높여주었고, 증기 동력의 활용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여행 형태를 바꾸었으며, 전보와 전화는 먼 거리를 즉각 연결해주었다.

4. 사회혁명 : 대규모 인구 이동을 수반한 도시의 엄청난 성장은 소비사회를 탄생시켰고, 중간계급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에게도 자유재량을 부여해주는 등 그 변화는 극적이고 폭넓었다.

5. 국제관계 혁명 : 유럽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탐험과 해외 정착은 그 범위를 훨씬 더 확장하여 제국주의로까지 치달았으며, 그 과정에서 전지구적 경제권이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 

6. 문화혁명 : 문해력을 갖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교육 저변이 유럽 인구의 모든 계층으로 확대됨에 따라 문화향유층이 늘어나고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흐려졌다.


"서구세계를 휩쓴 정치혁명들에 핵심적이었던 것은, 그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산물이었던 야심찬 사회이론들과 이데올로기들과 프로그램들이었다. '이즘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유력한 저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거대한 운동들이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는 더욱 폭넓은 대중에게 변화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의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생시몽,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나 논평가들의 저술만이 정치적 풍경 변화를 도왔던 것은 아니다. 선전의 새로운 형식들─신문과 연설과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된─도 열광과 집단적 감정을 선동하는 데 일조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대규모의 인력과 여론 동원력을 지닌 국가는 개인 정체성의 초점이 되고, 공동의 진보와 영광을 향한 장대한 계획들의 초점이 되었다. 국가주의적 안건들의 열광적 추구, 특히 그 외적 형태인 제국주의는 그 시대의 한 특징이었다."(272)


"1789년이라는 다사다난한 해는 문화혁명의 가장 완벽한 예를 하나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바스티유 감옥 습격일인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날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날짜를 이틀 전인 1789년 7월 12일로 잡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날 약 3천 명에 달하는 또 다른 파리인들 무리가 상당히 다른 공공시설에 침입했다. 바로 오페라 극장이었다. 오페라처럼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예술─악기 연주와 성악, 문학, 춤, 건축, 의상 디자인까지 결합하는─이 19세기의 가장 중심적인 표현양식 중 하나로 꽃을 피웠다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페라는 17세기에 바로크적 야심을 반영하면서 시작되었고, 18세기 내내 주로 귀족들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민중은 오페라 극장을 당시 인기를 누리던 장관 자크 네케르의 해임에 대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장소로 여겼던 것이다."(278-80)


"이 시대 역시 종말을 맞았다. 귀족의 특권을 종식시키고, 참정권을 확대하고,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라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그리고 경제적 변화의 결과들이 자리를 잡고, 지구적 관계와 제국주의적 야망에 생긴 변화들이 새로운 국제관계의 풍경을 창출해내고, 여성해방운동(이제는 1879년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 불러일으킨 충격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운동이 점점 더 큰 힘을 받게 되면서, 그리고 전통적 윤리와 기독교에 대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공격에서부터 미술의 근본원리들에 대한 인상파의 문제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혁신들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막대한 압력이 축적되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30년전쟁과 17세기 중반의 사건들, 그리고 1800년을 전후한 수십 년 동안의 혁명적 격동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막대한 경기침체, 그리고 이제 지구적 문명이 되어버린 세상을 휩쓴, 수 세기 동안의 문화적 가정들의 전복에 비하면 사소해 보인다."(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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