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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ㅣ 문제적 인간 8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평점 :
머리말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다른 누구보다 분명하게, 또 더 공정하게 보았다. 그는 인간, 모든 인간이 문명의 딜레마와 직면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문명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개인이 충동을 통제하고, 소망을 부정하고, 욕정을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 환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프로이트의 지혜로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문명이 부과하는 속박 없이 살 수 없지만, 그런 속박 안에서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 수도 없다. 좌절과 불행은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과되는 측면이 그 금지하는 면이다. 교육은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 요청하지 말아야 할 것, 심지어는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며, 이런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절대 인기 있는 예언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10)
들어가는 글_스핑크스의 정복자, 오이디푸스
1부 무의식의 탐험가 1856~1905
1장 앎의 의지
"1860년대 말 제국 내각은 교양 있고 헌신적인 중간계급 관료와 정치가들이 지배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들을 '부르주아 내각'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이 부르주아 내각과 그 뒤를 이은 내각들의 체제에서 정부는 교육과 결혼에 대한 통제권을 세속 당국에 넘겼으며, 종파 간 결혼의 길을 열었고, 인도적인 형법을 도입했다. 이렇게 정치적인 자유주의로 진입한 뒤 오스트리아의 상업과 금융, 산업, 운송, 통신은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는 산업혁명이 늦게 찾아왔지만, 어쨌든 오기는 왔다. 그러나 1873년 5월 9일 '검은 금요일'의 주식 시장 붕괴로 모든 것이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 사태는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성취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량 파산과 은행 붕괴는 경솔한 투기꾼, 운 없는 예금자, 불행한 사업과, 장인, 농장주를 궤멸시켰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희생양을 찾고자 했던 오스트리아인은 아무런 억제 없이 반유대주의를 분출했다."(53)
"시온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대안은 아직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해방된 많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에, 또 흔히 말하듯이 그것이 유대인에게 좋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에 관해 비관적이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정치적 만병통치약에 관해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 있는 부르주아로서 오만한 귀족에게 짜증이 났다. 억압적인 성직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로마 교회와 오스트리아의 그 앞잡이들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책에 등장하는 모든 반유대주의자에게 상상의 복수를 하는 정교하고 유쾌한 상상을 만들어냈다. 반유대주의가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새로운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오랜 원수인 로마가톨릭을 결코 잊지 않았다."(56-7)
"이 수십 년 동안 빈은 동유럽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난처였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나오는 신호도 종잡을 수 없기는 했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더 나빴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 침공─모든 유형의 반유대주의자가 그런 식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으로 인해 빈의 동화된 유대인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절에 베를린이나 런던 등 다른 곳의 유대인도 비록 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개한 동유럽 출신의 가난에 찌든, 그리고 종종 정신적 외상까지 입은 난민들에게 느끼게 되는 약간의 동정심이 그들의 습관이나 외모에 대한 방어적인 거부감에 눌려버리곤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 또한 그런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부의 곤궁한 마을 출신인 많은 이민자들의 복장이나 언어나 몸짓이 빈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쾌했다. 그들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이국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매혹적으로 느낄 만큼 이국적이지는 않았다."(59-61)
"1873년 6월에 김나지움을 뛰어난 성적을 졸업하기 전부터 프로이트는 자신이 가장 간절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자연은 인간 본성임을 인식했다. 그는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지식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자연물보다는 인간사를 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기질을 조숙하게 입증했는데, 이런 편지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꼬치꼬치 캐묻는 탐구심과 심리적인 인식으로 가득하다. 그는 열여섯 살이 되던 1872년 9월에 에밀 플루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연과 운명이 우리 주위에서 짜 나가는 실들의 두툼한 질감을 파악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 프로이트는 어렸지만 이미 단순하고 피상적인 소통은 매우 수상쩍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72년 여름 에두아르트 질버슈타인에게 불평을 했다. 〈네가 나한테는 네 경험 가운데 몇 가지만 골라서 알려주고, 네 생각은 전적으로 너 혼자만 간직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72-3)
"실증주의는 체계화된 학설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탐구 방식을 대하는, 널리 퍼져 있는 어떤 태도였다. 그 지지자들은 자연과학의 프로그램과 그 발견과 방법을 사적이든 공적이든 모든 인간 사상과 행동 연구에 도입하기를 바랐다. 19세기 초반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실증주의 제창자였던 오귀스트 콩트가 사회 속의 인간에 관한 연구를 믿을 만한 기초 위에 올려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물리학'으로 규정한 것은 이런 정신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8세기 계몽주의 속에서 태어나, 형이상학을 거의 신학만큼이나 단호하게 배격한 실증주의는 19세기에 물리학, 화학, 천문학, 의학이 거둔 극적인 승리와 더불어 번창했다." "프로이트는 1932년에 (실증주의 스승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정신분석은 〈과학의 한 조각이며, 과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면 된다〉고 요약했다."(88-90)
2장 무의식의 탐사
"사실 위대한 합리주의자였던 프로이트도 미신, 특히 숫자와 관련된 미신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51세에, 또 나중에는 61세나 62세에 죽을 운명이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는 이런 운명의 숫자들이 자신의 필멸성을 일깨우며 쫓아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그가 1899년에 할당받은 전화번호 14362도 그 증거라고 보았다. 43은 그가 43세에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을 보여주며, 마지막 두 숫자 62는 그의 수명을 가리키는 불길한 경고라고 확신했다. 프로이트는 한때 미신이 적대적인 소망, 살인하고 싶은 소망의 위장이며, 자신의 미신은 불멸을 향한 억눌린 욕망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분석 뒤에도 프로이트는 작은 비합리성에서 완전히 놓여나지 못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의 〈유대인다운 특징을 보여주는 신비주의〉라고 부른 것의 이런 잔여물 때문에 (생물학에 수학을 도입하려는) 플리스의 황당한 이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134-5)
"프로이트는 심드렁한 태도로 계속 최면적 암시를 이용하여 환자의 증상을 완화해주다가, 1892년 겨울 그의 치료가 성공을 거둔 사례를 기록한 짧은 사례사를 발표했다. 프로이트는 나중에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신경 관련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서 먹고살고 싶으면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신경쇠약을 치료하는 관습적인 방법─전기 치료를 말하는데, 그도 환자들에게 시도해보았다─이 최면보다 훨씬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90년대 초에 〈전기 장치를 치워버렸는데〉,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무렵 프로이트의 편지는 훨씬 광범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성적 갈등이 신경병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눈여겨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끌어낸 결론은 신경쇠약이 완전히 예방 가능하고 또 완전히 치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142-3)
"이 대담한 시절에 프로이트가 치료한 히스테리 환자들은 다리의 통증에서부터 한기까지, 우울한 기분에서 간헐적인 환각까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전환성 히스테리 증상들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아직 자신의 진단에서 유전, 즉 〈신경병적 소질〉이라는 요소를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환자가 겪는 기묘한 장애의 그런 감추어진 원인보다는 유아기의 트라우마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는 쪽을 더 좋아했다." "에미 폰 N. 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최면이 사실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 깨달음은 브로이어에게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제약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조사 도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결함을 미덕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새로운 치료 방식을 채택하는 것과 다름없는 중요한 변화였다. '자유연상'이라는 기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157-9)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길 데 없는 의미심장한 사건에 관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고백적 언급─자서전과 과학이 뒤엉킨 양상을 보이는─은 그것이 말하는 만큼이나 생략하고 있는 것 때문에도 주목할 만하다. 즉,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죽음보다 조금이라도 아픔이 덜하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점이다. 침착하고 위풍당당한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가장 사랑하던 귀중한 장남을 포함하여 모든 자식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1930년, 95세까지 살았다. 그녀가 활달하게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신분석가 아들이 오이디푸스 전투의 온전한 함의를 피해 갈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프로이트가 아버지 쪽에 훨씬 가까운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꿈으로도 꾸고 걱정도 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양면적 감정의 일부는 분석을 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려고 무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중요하다."(193)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느냐(또는 그가 그것을 상상했느냐)가 아니라, 모두가 그런 콤플렉스를 거쳐 간다는 그의 주장이 독립적인 관찰이나 정교한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경험이 모든 인간에게 무조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환자들의 경험에 비추어, 나중에는 정신분석 문헌에 비추어 검증했다." "프로이트는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도 모든 사람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적절하게 조심하면서, 즉 각 개인을 바로 그런 개인으로 만드는 변수를 염두에 두면서, 같은 인간들의 경험을 잘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적 경험을 읽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례가 순전히 정신분석 증거로 영향력을 갖기를, 또한 그가 세운 공식의 설득력으로 뒷받침되기를 바랐다."(194-5)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에 사용한 방법은 자유연상이며, 그가 주로 얻은 재료는 자신의 꿈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표현하든, 1890년대 프로이트는 아주 철저하게 자기 탐사를 했다. 자신의 단편적인 기억들, 감추어진 소망과 감정들을 정교하고 깊이 있게, 쉴 새 없이 조사한 것이다. 그는 감질나는 작은 조각들로부터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했으며, 매우 개인적인 이런 재구성의 지원을 받고 여기에 임상 경험을 결합하여 인간 본성의 윤곽을 스케치하고자 했다. 이런 작업에는 선례가 없었고, 스승도 없었다. 따라서 작업을 해 나가면서 규칙을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의 자아를 탐헌한 프로이트와 비교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장-자크 루소에 이르기까지 가장 제약 없이 쓴 자서전 작가들마저, 그 통찰이 아무리 깊이 파고들고 자신을 아무리 솔직하게 드러낸다 해도, 어느 정도 유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208-9)
3장 정신분석의 탄생
"프로이트는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라는 운명적인 용어를 1896년에 처음 사용했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침착한 속도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1897년부터 자신에 대한 정밀 조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점차 속도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그 후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기 정신의 지도를 만지작거리고, 정신분석 기법들을 다듬고, 충동, 불안, 여성의 성욕 이론들을 수정하고, 예술사, 사변적 인류학, 종교심리학, 문화 비평 분야를 공략했다. 그러나 1899년 말 《꿈의 해석》을 출간할 무렵에 정신분석의 원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05년에 발표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이런 원리들을 상술한 두 번째로 중요한 텍스트다. 물론 첫번째는 '해몽 책'이며, 프로이트는 이것이 자신의 작업으로 진입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꿈의 해석은 정신적 삶의 무의식을 알 수 있는 왕도다.〉"(217-8)
"꿈에는 메시지가 있다. 이 점에는 프로이트도 동의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의 각각의 세목에 하나의 분명한 상징적인 의미를 할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나, 단순한 열쇠를 이용하여 해독하면 되는 암호문처럼 꿈을 읽어내는 독법으로는 꿈의 의미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꿈을 꾼 사람은 반드시 자유연상을 이용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구불구불한 길에 대한 평소의 합리적 비판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꿈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증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꿈의 각 요소를 분리하여(과거의 암호 해독 방법에서처럼, 즉 과학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그 요소를 자유연상의 출발점으로 이용하면, 꿈을 꾼 사람 또는 그의 분석가는 결국 그 의미를 풀어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런 기법으로 자기 자신의 꿈과 분석 대상자의 꿈을 천 개 이상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이었다. 〈꿈은 소망의 충족이다.〉"(224-5)
"그러나 반대자는 소망 충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는 꿈이 많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다. 꿈들은 불안을 표현하거나 자극할 수도 있고, 중립적이고 매우 비감정적인 시나리오를 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답은 왜곡에 있다. 왜곡은 사람이 꿈을 꾸면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의 핵심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왜곡을 설명할 준비를 하면서 '나타난 꿈(manifest dream)'과 '잠재적 꿈 사고(latent dream thought)'라는 핵심적인 구분을 도입했다. 나타난 꿈이란 깨어나는 순간 대체로 흐릿하게 기억하는 꿈이다. 잠재적 꿈 사고는 감추어져 있으며, 나타난다 하더라도 보통 심하게 베일에 덮인 상태로 나타나 암호 해독이 필요하다. 예외가 되는 어린아이의 꿈은 따라서 역설적으로 지루한 동시에 정보가 풍부하다. 〈어린아이들의 꿈은 종종 순수한 소망 충족이다.〉 따라서 〈해결할 수수께끼가 없다.〉"(226)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분명하게 소망이 좌절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할 때, 이것을 〈소망에 반하는 꿈〉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꿈은 프로이트가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은 소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꿈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멋지게 반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안의 꿈도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생산되었지만 정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거부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꿈이다. 따라서 이때 나타나는 꿈에는 불안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어린 소년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소망을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억압하지만, 그 소망은 무의식 속에서 끈질기게 남아 어떤 식으로든 나타난다. 불안의 꿈에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이 지점에서 제안하는 것은 그의 원래의 정식화로부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꿈은 (억제된,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228)
"정신이라는 우주에 우연은 없다는 것, 이것이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우연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서 우리가 생겨난 것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모든 것이 사실 우연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또 그는 인간의 선택이 진짜라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정신분석 치료의 한 가지 목적이 바로 〈환자의 자아에게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을 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는, '우연'도 '자유'도 자발성의 자의적인 또는 무작위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신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건은 비록 겉으로는 아무리 우연처럼 보인다 해도, 사실은 서로 엉킨 인과 관계의 실들의 매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엄격하게 또 솔직하게 결정론적이다."(244-5)
"이것은 또한 분명하게 심리학적이며, 따라서 그 시대를 고려할 때 혁명적이다. 프로이트는 당대 심리학의 틀 안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인 지점을 넘어서자 그 틀을 깨고 나아갔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그의 가장 저명한 동료들은 본질적으로 신경학자들이었다." "크라프트-에빙은 '신경과민'을 〈중추 신경계의 후천적인 병리학적 변화라기보다는 타고난 병리학적 성향〉이라고 정의했다. 유전이 문제의 주된 원천이라는 것이다." "크라프트-에빙은 엄숙하게,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존경심으로 〈유전이라는 강력한 생물학적 법칙〉에 경의를 표했으며, 〈이것이 모든 유기체에 결정적으로 개입한다〉고 보았다." "19세기에 심리학이라는 과학은 인상적인 발걸음을 내디디며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위치는 역설적이었다. 그전에 신학으로부터 해방되었듯이 철학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생리학이라는 새로운 주인의 오만한 포옹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245-7)
"프로이트가 마침내 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 혁명은 신경학 이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에서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서열을 역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정신의 작용에서 독점적 지위가 아니라 우선적 지위를 심리적 영역에 할당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화의 유해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한 것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이 마지막 진단에 관해서는 프로이트도 이유는 달랐지만 다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의 시대의 다른 많은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도 자기 시대의 도시적, 부르주아적, 산업적 문명이 신경과민─그는 이 질환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고 생각했다─에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근대 문명의 성급함, 소란, 빠른 교통, 정신 기계가 떠안는 과도한 부담 등이 신경과민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반면, 프로이트는 근대 문명이 성적 행동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보았다."(250-2)
"정신분석은 〈극단적인 신경증과 건강 사이에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신경증들이 한 줄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장난스럽게 독일의 정신의학자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 말은 〈우리 모두가 약간은 히스테리를 갖고 있다〉는 취지다. 모든 인간은 성도착을 타고났다. 성도착의 일종의 부정적 대응물을 이루는 증상을 보이는 신경증 환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이런 보편적인 원시적 성향을 더 강하게 보여줄 뿐이다. 신경증 〈증상은 환자의 성적 활동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에게 신경증은 기이하고 이국적인 병이 아니라, 불완전한 발달, 즉 정복되지 않은 유년기 갈등의 아주 흔한 결과다. 신경증은 그 증상을 겪는 사람이 유년기의 대결로 퇴행한 상태다. 간단히 말해서 끝나지 않은 일을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을 가지고 프로이트는 가장 민감한 주제, 즉 유아의 성욕에 이르렀다."(291)
2부 정신의 정복자 1902~1915
4장 투사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그의 시대의 교육 받은 중간계급 시민이었다." "아름다움에 열려 있든 아니든, 프로이트의 취향은 대체로 관습적인 쪽이었다. 그가 함께 살기로 선택한 물건들은 그 보수성과 더불어 기존에 잘 확립된 전통을 기념한다는 면에서 타협이 없었다. 그는 19세기 부르주아 대부분이 자신들의 행복에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기념물들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의 사진, 찾아가 보았고 또 기억할 때마다 기쁨을 주는 곳의 기념품, 미술에서 말하자면 구체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에칭이나 조각품들─모두 아카데믹하고, 모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따위였다. 프로이트는 주변에서 폭발하는 회화, 시, 음악 혁명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드문 일이지만 그런 것들이 밀고 들어와 그의 눈길을 끌 때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표현주의와 마주했을 때, 프로이트는 오스카어 피스터에게 자신이 속물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321-2)
"문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도 이와 비슷한 갈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논문이나 글은 그의 폭넓은 독서, 뛰어난 기억력, 스타일에 대한 엄격한 요구 등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특히 괴테와 실러 등 그가 좋아하던 독일 고전과 셰익스피어를 자주 인용했다. 셰익스피어는 그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를 제시했으며, 그는 거의 완벽한 영어로 셰익스피어를 길게 암송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같은 재사, 빌헬름 부슈 같은 약간 상스러운 편인 유머 작가 등은 그에게 정통을 찌르는 예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작가를 선택할 때 그의 시대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무시했다." "이 시절에 전기 충격을 받은 듯이 저항할 수 없는 모더니즘적 충동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했던 빈 사람들 가운데 프로이트가 분명하게 찬사를 보냈던 사람은 아르투어 슈니츨러뿐이었다. 그것은 슈니츨러가 당시 빈 사회의 성에 관하여 통찰력 있는 심리학적 연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324)
5장 정신분석 정치학
"늘 확고한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이었던 융은 스스로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를 자임하고, 의학 학회나 글을 통해 정신분석의 혁신성을 힘차게 옹호했다. 또 자신의 전문분야로 명성의 발판이 되었던 정신분열증(당시에는 조발성 치매라고 불렀다)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효과를 보자 그 이론에 대한 괸심이 더 깊어졌다." "그들의 우정은 일단 시작되자 힘차게 피어났다. 두 사람은 정중한 편지로 신경증의 발생에서 성의 역할을 토론했고, 논문 발췌 인쇄물과 책을 교환했으며, 특별히 관심을 끄는 사례를 교환했다. 융은 절대 아첨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중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생각을 잘못 대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정신분석에 대해 약간 주저하는 마음은 자신의 미숙함과 주관성 때문이고, 프로이트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적으로 프로이트를 옹호할 때 신중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외교의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384-7)
"융은 훗날 적대감을 가지고 돌아보면서, 자신과 프로이트의 결별의 뿌리가 1909년 여름 프로이트, 페렌치와 함께 미국에 갈 때 조지 워싱턴 호 선상에서 벌어진 에피소드에 있다고 생각했다. 융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프로이트의 사생활에 관해 더 자세히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프로이트의 꿈 하나를 최선을 다해 해석했다. 프로이트는 사생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면서 의심하는 눈으로 융을 보았고, 남에게 자신을 분석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권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융은 이런 거부가 자신을 지배하던 프로이트의 힘에 조종(弔鐘)이 울리는 소리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자칭 과학적 솔직함의 사도인 프로이트가 개인적 권위를 진리 위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무엇이든 융은 프로이트의 권위 밑에서 안달을 하고 있었으며, 융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을 오래 견디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431)
"융과 프로이트는 과학적 기획에 대한 기본적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과학적 방법론으로부터 떠나 신비주의에 빠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융은 이렇게 썼다. 〈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나타나는 편협성과 편견을 비판합니다. 또 '프로이트 학파'의 부자유스럽고 종파적인 불관용과 광신의 분위기를 비판합니다.〉 융은 프로이트가 정신과 관련된 사실들을 발견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비판적 이성과 상식〉이라는 견고한 기반을 떠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프로이트대로 융이 비교(秘敎)적 현상에 속기 쉬우며 동양 종교에 매혹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종교적인 감정을 정신 건강에서 뗄 수 없는 요소로 옹호하는 융의 태도를 가차 없이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보았다. 프로이트에게 종교란 문화에 투사된 심리적 요구, 어른들에게서 살아남은 아이의 무력감으로서, 존중되기보다는 분석되어야 할 것이었다."(453)
"돌이켜보면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는 그 이전의 운명적인 우정들─브로이어, 플리스, 아들러, 슈테켈 등과 맺었던─의 새로운 변형처럼 보인다. 프로이트 자신이 그런 독법의 실마리들을 제공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는 플리스를 비롯하여 다른 버려진 동맹자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한다. 융은 프로이트의 괴로운 암시에 감염된 듯 그 암시에 의미 있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 우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빠르게, 거의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애정을 투자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다가, 격분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소원한 관계로 끝을 맺었다. 모든 것이 끝난 1915년 프로이트는 경멸하듯이 융을 〈성스러운 개종자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했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융이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를 좋아했다." "프로이트가 이 맹렬한 동맹 관계에서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유일한 감정은 무관심이었다."(459-60)
6장 정신분석의 환자들
"프로이트는 1897년에 현실적 사건들─어린아이의 강간이나 유혹─만이 신경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을 버리고, 신경증적 갈등을 만드는 데 환상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택했다. 1910년 경, 늑대 인간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내적이고 대체로 무의식적인 정신적 과정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을 옹호했다." "요점은 어른의 신경증은 훗날 아무리 왜곡과 환상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어린 시절에 획득한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경증의 뿌리는 융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나중에 그냥 몰래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최대한 힘을 주어 말했다. 〈유년의 영향은 한 개인의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어떤 지점에서 해결하지 못하느냐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에서 신경증 형성 최초의 상황에서부터 벌써 자신을 드러낸다.〉"(540-1)
"신경증과 싸우는 전쟁에서 분석 대상자의 무기는 말이다. 분석가의 무기는 해석인데,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말이다." "정신분석의 해석은 전복적인 독해다. 이 해석은 분석 대상자 스스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표면적인 메시지에 놀랍고 또 종종 불편한 의심을 던진다. 간단히 말해서 분석가의 해석은 분석 대상자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늑대 인간의 꿈에 나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늑대들을 정력적인 성행위의 왜곡된 재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흥분되는 기억이 들어가 있는 퇴행의 굴에 연기를 들여보내 기억이 뛰쳐나오게 하는 것이다. 쥐 인간의 강박적인 제의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 증오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억압되었던 것을 빛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분석가의 해석이 늘 이런 화려한 결과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늘 자기 기만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는 것이다."(553-4)
7장 정신의 지도 그리기
"문화의 영역으로 진군하는 프로이트의 돌격대를 지배하는 원칙은 수도 많지 않고 정리하기도 쉬웠지만, 실제 적용은 어려웠다. 그 원칙이란 모든 것이 타당하고, 모든 것이 위장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정신분석은 〈개인과 사회 양쪽에 똑같은 역동적인 원천을 가정함으로써 양쪽의 심리적 성취〉 사이에 긴밀한 연관을 확립한다. 〈정신적 메커니즘의 주요한 기능〉은 〈한 개인의 욕구가 그의 내부에 만들어내는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에서 만족을 얻어내는 것〉 또는 〈충족되지 않은 충동을 처리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의해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 한다.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신경증 연구와 마찬가지로 충족되거나 좌절된 상태인 감추어진 소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모든 탐사에서 프로이트는 청원자라기보다는 정복자로서 낯선 영역에 진입해 들어갔다."(578-9)
"프로이트의 고급 문화에 대한 분석적 연구는 단편적이지만, 미적 경험의 주요한 세 영역, 즉 주인공들의 심리, 관객의 심리, 창조자의 심리를 건드린다. 이 영역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얽히며 서로를 비춘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햄릿》을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자신에 대한 분석을 권유하는 미학적 산물로 읽을 수도 있고, 햄릿의 비극에서 자신의 은밀한 역사를 인식하며 깊은 감동을 받는 많은 관객의 콤플렉스를 풀 실마리로 읽을 수도 있고, 저자 자신의 오이디푸스적인 드라마, 그가 아직도 씨름을 하고 있는 미완의 감정적인 문체로 읽을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훗날의 많은 연구자를 매혹시키는 동시에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허구적인 인물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그의 행동의 모호한 원천, 수백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그의 불가사의한 힘, 그를 만들어낸 사람의 통찰을 설명해줄 수도 있다."(589)
"프로이트가 자신의 발견을 조각과 소설과 그림에 적용한 것은 아주 대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의 가장 깊은 기초까지 파고들려는 시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질서 정연한 모든 사회에 꼭 필요한 터부들을 자신에게 명령하여 문명으로 도약한 시점을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1908년 11월 중순에는 빈 정신분석협회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죄책감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손쉽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죄책감이 성 충동의 폐허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두 주 뒤, 영웅 탄생의 둘레에 달라붙은 신화들에 관한 오토 랑크의 논문을 논평하면서, 프로이트는 허구의 진짜 주인공은 자아(ego)라고 말했다. 자아는 〈첫 번째 영웅적 행위, 즉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통하여 자신이 영웅이 되었던〉 때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을 재발견한다."(598-9)
"프로이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연결된 네 편의 에세이 《토템과 터부》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었다." "《토템과 터부》는 독자를 찾으려는 시도보다도 그것을 지배하는 주제라는 면에서 훨씬 야심만만했다. 완전한 독창성이라는 면에서는 장-자크 루소의 추측들마저 넘어선다. 루소가 18세기 중반에 인간 사회의 기원에 관하여 했던 유명한 이야기는 명백히 가설적이었다. 루소는 인류가 문명 이전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시점을 자신이 상상할 때 독자들에게 사실을 따지지 말아 달라고 길게 요청했다.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자신의 깜짝 놀랄 만한 추측이 오랫동안 묻혀 있던 획기적인 선사시대 사건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주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했다. 그는 임상적 추론이라는 친밀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위험할 정도로 멀리 떠나와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599-602)
"1915년 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유럽의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전쟁이 일으킨 환멸과 죽음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주제로 한 쌍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문명을 위한 만가였다. 우리는 다양한 경제와 문화 수준에 놓인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때 상상했던 전쟁은 영웅적인 행위로, 민간인은 끼지 않게 해주는 '기사도적인 싸움'이었다. 이것은 예리한 통찰이었다. 큰 전쟁의 정화하는 힘을 고대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오래전에 벌어졌던 위생적이고 낭만화된 전투를 떠올렸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전의 어느 전쟁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거의 상상도 못하던 현상〉, 즉 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쏟아내는 갈등으로 타락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인 프로이트도 전쟁에 나선 인간 본성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광경에는 놀라고 말았다."(651-2)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인간 충동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표현될 곳을 찾으려 하지만 사회적 통제와 내적인 억제에 가로막힌다. 이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충동을 길들이는 현대 문명의 압력은 지나치며, 인간 행동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다. 전쟁 덕분에 사람들은 적어도 인간이 원래부터 선하다는 착각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만큼 낮게 침몰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인간이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높이 올라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한 일은 문명화된 외피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전쟁은 〈우리에게서 나중에 문화적으로 부과된 것을 벗겨냈으며, 우리 안의 원시인을 드러냈다.〉 이런 드러냄에도 그 나름의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전보다 진실하게 자신을 보게 해주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 착각을 버리는 데 도움을 준다."(6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