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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을 읽다 - 프로이트를 읽기 위한 첫걸음 ㅣ 유유 고전강의 4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3년 11월
평점 :
1장 세기말의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간과 인간 자신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프로이트 이전의 자아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하나의 주체로서 일체의 대상을 탐구하는 필연의 원점이었다. 데카르트의 논증에 따르면, 모든 것을 회의하더라도 최후까지 결코 회의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회의한다'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 이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지닌 본래 의미다. 여기서 '생각'은 'Cogito의 번역어로 강력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이르면 무엇을 회의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하나의 원점이 아니다. 회의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면의 동기를 내포한다. 우리는 뒤에서 이 동기를 조작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며, 우리가 이 사실을 잘 모를수록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중요하기에 비로소 억압된다. 인간과 자아 사이에는 이처럼 기괴하고 기묘한 관계가 설정된다."(30-1)
"프로이트는 유럽의 산물이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그 사조의 기복 및 유동은 프로이트라는 개인에게 매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다음으로 그는 '세기말 비엔나'의 표지 가운데 하나다. 낭만주의가 정점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며 빚어낸 문제 및 가치 의식은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의 바탕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했다. 『꿈의 해석』 및 그의 다른 저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개인주의다. 프로이트에게 개인은 지식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둘째는 욕망이다. 낭만주의는 이성과 추상에 반대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성과 추상이 인간의 욕망과 열정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열정은 개인이 가장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느끼는 무엇이지만 이성과 추상, 객관에 배제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사회와 유럽 문화에서 가장 억압받고 거부되었던 것은 욕망, 특히 개인이 느끼는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렬한 성욕이었다."(48-9)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은 하나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너무도 신사적이고 억압적이고 냉정한, 뿐만 아니라 아마도 허위적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환경과 시대를 가리킨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욕망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으며, 디코럼decorum이라 불리는 엄격한 예의범절 규정을 준수했다."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인정받고 남의 눈에 바람직하게 여겨지며 멋진 외양과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옳다고 생각해서 옳다고 말할 때도, 정해진 어휘를 사용해서 정해진 어감에 따라 정해진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평화는 일종의 대가를 요구한다. 모두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탓에 참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자아는 끊임없이 억압되고 은폐된다. 그리하여 이런 사회의 이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발산과 해소의 행위가 이루어진다."(50-4)
2장 꿈의 특수한 성질
"꿈은 병이 아니다. 이 점에서 꿈은 히스테리와 다르다. 그러나 자기 꿈을 제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꿈은 묘하게 히스테리와 동일하다. 프로이트 시대의 이론에 따르면, 히스테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작하는 질환이었다. 이제 곧 발작할 것 같다고 스스로 깨닫는다면 이미 히스테리가 아니다. '통제'가 바로 히스테리 치료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어떤 요소와 맞닥뜨리거나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스위치가 켜지듯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는지, 되짚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스위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스위치는 종종 기억 속 깊숙이 숨겨져 있다. 지나간 삶의 감추어진 기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불쾌한 기억들을 되새기며 경험 속에서 발작의 스위치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다면, 히스테리는 곧 약화된다. 꿈과 히스테리는 '통제 불능'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66-7)
"꿈은 평소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으며,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부분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적나라하고 비정하게 자기 자신을 폭로했다. 솔직히 이 점이야말로 프로이트의 대단한 일면이다. 당시 사회의 허위와 위선에서 벗어나 그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허위를 폭로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당시 사회가 허위적이고 위선적이었기에 그가 일부러 자신의 허위적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선뜻 밝히기 어려운 개인적인 일면을 먼저 드러냄으로써, 꿈이 전달하는 정보에 독자가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꿈에 나타나는 정보는 개인의 고귀하고 영예로운 일면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어조를 유지하며 꿈의 왜곡을 설명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서로 다른 몇 가지 꿈의 기제를 분석했다. 이 책은 전술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꿈의 해석』의 초판 판매량은 비록 300권에 불과했지만, 그 원인은 사회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73-6)
"프로이트와 인간의 심리를 탐색했던 프로이트 이후의 연구자들은 이원론에서 벗어나 경험에 대한 탐구와 인지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관이냐 객관이냐가 아니라, 주관이 어떻게 객관을 인식하느냐는 점이었다. 우리의 주관, 우리의 감각 기관은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객관 세계와 우리가 형성한 주관적 인상 또는 감상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 차이는 지대하다. 프로이트의 출발점은 우리가 받아들인 객관 세계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주관의 수정과 왜곡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의 경험으로 변화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중점은 주관이 어떻게 어떤 경험을 만들어 내느냐 또는 객관 세계가 도대체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요소, 어떤 힘에 의해 하나의 객관적 정보가 우리의 신체와 감각 기관 안으로 들어와 개개인 속에 각각 다른 경험으로 자리 잡느냐가 문제다."(90-1)
3장 '억압'이라는 진화의 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생존, 곧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들에 대한 다윈주의의 기본 사유를 받아들였다." "다윈주의는 생물 종種이 유전을 통해 강성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하고 번식한다고 주장한다(다윈주의는 반드시 다윈 자신의 주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서 유리한 조건을 선택해 번식하는 것이야말로 생존과 진화의 기초다. 이런 주장에 의해 계발된 프로이트 체계의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생물의 한 종으로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욕망은 번식과 직결되는 성욕이다. 인간의 리비도와 다른 생물의 번식 및 생식 충동은 무엇이 다른가? 다윈주의에서 받은 영감과 암시에 따라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게 진화의 최첨단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한편으로 강렬한 성욕을 가졌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성욕을 억압하고, 나아가 성욕이 품고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다른 곳에 쓰도록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95-6)
"프로이트는 영유아의 성욕에서 그의 학문 체계의 핵심 개념인 '억압'을 도출했다. 인류는 어째서 서너 살부터 이성의 엉덩이에 열중하는 야수가 되지 않는가? 억압이 있기 때문이다. 억압이 있어 문명과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세밀한 기제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제들이 인간을 우월한 존재로 만들며, 인간이 너무 일찍부터 유한한 에너지를 성性에 소모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이것이 성을 억압하는 기제들이다. 성욕을 억압한 뒤에야 인간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갖게 된다. 억압은 인간이 거대한 생식 기관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 준다. 억압은 인간에게 성적 행위 이외의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주는 중요한 기제이다. 프로이트의 구상 속에서 문명은 억압이 출현한 후에야 비로소 존재했다. 성적 욕망에 대한 억압이 없다면, 인간은 문명화될 수 없을 것이다."(103-4)
"프로이트의 눈에 인생은 리비도와 억압의 대치, 상호 투쟁으로 점철된 드라마였다." "『꿈의 해석』 앞머리에서 프로이트는 모든 꿈이 잠재적인 원망충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왜 꿈에서조차 욕망은 직접 드러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꿈이 드러내는 것이 원래의 원망이 아니라 억압되어 왜곡된 원망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은 상식적이거나 보편적인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영유아의 성욕에서 출발해 인류를 근본적인 진화 과정으로 이끄는 억압, 리비도를 잠재의식 속에 욱여넣는 특정한 억압이다. 상식적이거나 보편적인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며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성욕은 번식의 기초이며 인간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가장 특수한 지점이지 보편적인 생물 종의 욕망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성 억압은 줄곧 핵시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06-7)
4장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둠
"사람의 주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는 무의식 내부의 무엇이 어떻게 의식으로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해석은 인격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엎는다. 가장 중요한 반전은 의식과 무의식의 중요성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의식은 중요하다. 의식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지 결정한다. 집단적인 문명이 구성한 가치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질이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이라고 믿고 '양다리'가 옳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이것이 의식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몰개성하고 무의미한 재현이다. 의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의식이 더 흥미롭고 개인의 개성에 가깝다. 의식에 차원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닮아 있다. 그래서 진정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 당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히 무의식에 속하는 무엇이다."(124-5)
"억압된 정보는 인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일단 억압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문지기인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언제 비로소 인격의 개성을 결정하는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는가? 문지기가 문을 잘 지키지 못했을 때뿐이다. 꿈은 왜 중요한가? 꿈은 문지기가 가장 허술한 시간이다. 꿈은 우리가 정신적 에너지를 배출할 수 있도록 돕는 특수한 상황이다. 꿈은 억압된 것들이 빠져나와 다리 쭉 뻗고 내달릴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억압된 정보들은 내달리면서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여전히 문지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식으로 우회하고 수정하며 스스로를 위장할 수밖에 없다." "꿈으로 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꿈의 정보는 모두 위장된 것이다. 깨어 있을 때의 경험 중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만이 꿈에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암시다. 암시라는 용어도 『꿈의 해석』의 핵심어다."(127-8)
5장 '정신경제학'의 논리
"프로이트의 정신경제학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외부 세계가 어떤 자극을 주든 전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면 인간은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런 체계는 곧 과부하 상태가 되어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이 순간, 내가 생각한 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 순간을 포함하는 모든 심리적 순간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한다." "『꿈의 해석』 5장에서 프로이트는 꿈의 재료가 바로 전날 겪었던 삶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우리가 꿈의 재료로 삼는 것은 전날의 삶의 경험 가운데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자투리 파편들이다." "그렇다면 꿈을 꾸면서 꿈을 만들 재료를 선택할 때에는 왜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가? 이는 정신경제학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여기에 해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142-4)
# 19세기의 '경제' 개념 : 유한한 사물로 무한한 목표를 만족시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분배의 방식을 고려하는 것, 나아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방법, 그 비결과 지혜를 가리킨다.
"인간은 성장 과정 가운데 심리적으로 먼저 두 가지 기본적인 억압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처음 배우는 일은 외부 세계를 처리하는 첫 번째 기제, 곧 모든 것에서 성욕을 제거하는 '중성화'다." "우리가 외부 세계와 대면하면서 어떤 것을 의식으로 받아들여 정신 구조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욕과 연관되는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거된 욕망은 잠재의식으로 침잠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은 단순하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일생을 통틀어 인간이 중성화에 온 힘을 다하고 거세가 정말 철저하게 성공해 문명이 욕망에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면 인간은 결국 멸종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성욕 없이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일정한 단계까지 성장한 뒤에는 이 과정을 역전시켜 재성화再性化해야 한다. 어릴 때 거세된 것, 욕망의 가능성을 배제당한 것이 다시 한 번 욕망의 대상이 된다. 재성화의 과정은 또다시 거대한 파란을 일으키며 우리의 의식을 뒤집는다."(158-9)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의식의 내용을 배치하는 일은 이성이나 이치로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의식의 내용은 이미 변조된 것, 여과되고 정제된 무엇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진입한 것은 모두 가짜이며 허위이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의식으로의 진입은 더욱 어려워진다. 문지기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므로 변조된 이후에야 의식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의식은 끊임없이 잠재의식과 전의식 또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이 일으키는 소란 속에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호트러진다. 우리의 의식은 매우 어지러운 체계를 형성하며, 끊어지고 갈라진 채 자주 연속성을 잃는다. 의식은 '연상 법칙'에 따르지 체계적인 논리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 이런 전제는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기억의 거대한 미로를 드러낸) 마르셀 프루스트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제임스 조이스를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162-3)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식 구조는 이렇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자극을 받으며, 이런 자극은 특별한 기제를 통한 뒤에야 의식으로의 진입이 결정된다.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은 억압되어 무의식 안에 갇힌다.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일방통행로다. 그러나 무의식과 잠재의식/전의식 사이에는 구멍이 존재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영원히 '잠재의식'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는 '무의식'이며 의식으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다. 잠재의식 또는 전의식이라는 애매한 영역은 사실 무의식의 내용이 뚫고 올라온 취약한 부분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뚫고 올라올 때는 원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무의식의 내용은 잠재의식이나 전의식이라는 애매한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의식과 서로 뒤섞인다. 뒤섞임의 가장 주요한 기제는 '변형'과 '전이'다.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추리에 의존하며 '변형'과 '전이' 등의 원칙을 이용해 역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165-7)
6장 정신병 및 치료
"프로이트를 이해하려면, 그의 자아론 또는 자아 구조라 불리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리비도를 지니고 태어난다. 리비도가 구성하는 자아를 프로이트는 이드id라 불렀다. 이드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나 그 성욕의 대상을 추구하거나 획득하고자 하며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남자아이가 타고나는 공격성은 이드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살고 있는 하나의 개체로서 우리는 이드를 통해 세계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이드 위에 에고라 불리는 것을 덧씌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 부를 수 있다." "셀프는 자아로서의 에고와 이드를 포함한다. 셀프 안에는 충동적이고 말을 듣지 않으며 하루 종일 번식에 대해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반을 빼앗는 일에 골몰하는 이드가 존재한다. 또 다른 자아인 에고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이드에 비해 복잡하다. 프로이트의 개념에서 사람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정신 활동은 모두 에고 속에서 일어난다."(178-9)
"에고란 무엇인가? 에고는 사실 이드에 쫓기는 신세이며 진정한 의미로는 이드에 저항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에고는 외부 세계를 대할 때나 내면의 이드를 대할 때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한다. 따라서 에고는 가장 대단한 기만이자 일종의 가장假裝이다. 에고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에고는 끊임없이 핑계를 대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말하면서 실제로는 통제받는 스스로의 처지를 은폐한다." "대부분 시간에 진정한 조종자는 이드다. 그러나 에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한다. '내가 바로 주인이다.' 에고는 이드를 포장하는 분장사이며 외부 세계와 이드 사이를 조율하는 협상자이다. 에고는 이드뿐 아니라 실제로는 이드와 상호 작용하는 외부 세계를 속이고자 하나의 자아로서 외부 세계와 마주한다. 에고는 세계와 마주하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드가 주는 것과 외부 세계의 자극을 조율하고자 한다."(179-80)
"20세기에는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중대한 혁신이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물질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자주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사물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다. 컵을 가지고 100번쯤 실험을 하더라도 컵은 여전히 컵이다. 그러나 대상을 바꿔 어떤 사람을 두고 실험을 하면서 같은 실험을 다시 한다면 그는 아마 다른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응해 '분석'을 설계하고 제시했다. 사람을 연구하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인 피연구자 사이에도 상호 작용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 수는 없다. 사물을 연구하는 과학은 이런 상호 작용에 골몰할 필요가 없다. 프로이트가 연구자와 연구 대상의 상호 작용을 파악하는 데 모범을 보인 뒤, 20세기에는 철학, 사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등 모든 학과가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85-6)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정신분석과 정신이해는 스펙트럼 형태로 변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사람이 정신병 환자이고 다른 사람은 아닌지 명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심리 기제의 운용이 다소 극단적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쪽에 정상인이 있고 저쪽에 정신병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한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의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내재된 정신질환을 자각했다. 그래서 20세기 예술가들은 강렬한 광기의 경향을 지녔으며 극심한 고통을 받아들였다. 그런 광기나 고통이 없었다면, 이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예술은 기본적으로 광기의 예술이자 정신분열적 예술이다."(188)
7장 프로이트의 성공
"세기말 비엔나에서 프로이트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는 유대인이었다. 유대 문화는 고도로 내향적인 자기반성 경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농후한 신비주의 전통을 따랐으며 복잡한 종교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유럽의 보편적인 발전 경향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둘째, 유대인이란 신분은 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의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무던히 노력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그에게 커다란 장애였다." "유대인인 그로서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반유대주의'는 무척 미묘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아주 적나라한 '반유대주의'도 존재했다. 그러나 훨씬 더 만연하고 처치 곤란한 것은 은밀하고 말하기 어려운 '반유대주의'였다."(195-7)
8장 프로이트의 유행
"프로이트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건너가자마자 그토록 빨리 학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가? 전쟁이 몰고 온 비관적인 분위기와 불가피한 반성 작업 덕분이었을 것이다. 왜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도살해야 했는가? 왜 일찍이 휘황찬란하고 낙관적이며 진취적이었던 문명이 그 문명에 의해 창조된 새 시대의 인간을 이토록 황당한 방식으로 전멸시켜야 했는가?" "프로이트가 이해한 인간성의 전제는 리비도와 성욕, 공격성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성질이 문명의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개념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황당무계한 파괴에 꼭 들어맞았다. 이런 전쟁은 더 이상 과거의 현실 조건으로 해석할 수 없었으며, 그 내재적 인과 사이에는 방대하고 맹목적인 어둠이 자리했다. 그것은 이성으로 측량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파괴의 욕망이자 원초적인 공격성이었다."(219-20)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파헤칠 것인가? 가장 쉬운 방법은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자신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우며 명예와 이익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여기서 나아가 유행했던 또 다른 수단은 이성적인 삶과 이성의 존재 상황에서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대상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삶과 이성의 존재 상황에서 해석되지 않는 모든 대상에는 특수한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가치는 완전히 전도되었다.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을수록 더 중요한 것이었고, 더 파헤칠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프로이트 이론이 유입된 프랑스의 시대 흐름에서 우리는 비로소 당시를 풍미한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인류의 마음 속에 꿈처럼 해석되지 않는 것들을 새겨 넣었다."(225-7)
"프로이트의 이론과 관점은 우리에게 인류의 문명사를 다시 읽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를 즐겨 인용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꾸로 이용해 그리스 비극을 다시 해독하고 그리스 비극이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스 비극의 '비극성'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문명이란 욕망이 억압을 거쳐 승화된 결과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승화'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화'(카타르시스)는 다른 의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한편으로 문명은 변형되고 승화된 욕망의 창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발전을 거듭해 욕망을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순환을 반복한다. 욕망의 억압은 문명을 창조하고 문명은 욕망을 억압한다. 멈추지 않는 과정이다."(237-8)
9장 프로이트의 서사 혁명
# 19세기 소설의 5대 원칙(에드워드 사이드)
1. 보완의 원칙 : 소설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보완 서술한다.
2. 전진의 원칙 : 서술은 기본적으로 (시간상) 앞으로 나아간다.
3. 적합의 원칙 : 서술은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다.
4. 결말의 원칙 : 서술 배치는 선형적으로 결말을 향해 간다.
5. 완결의 원칙 : 소설의 서사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다.
# 5대 원칙에 반하는 양피지 서사(프로이트)
1. 꿈은 끊임없이 서술하고 해석할 뿐 사건이 선행하지 않는다.
2. 꿈은 전진한 후에 제자리를 맴돌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3. 꿈은 서술에 어떤 의미를 담은 정합성을 갖고 있지 않다.
4. 꿈은 모든 단락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반복 등장할 수 있다.
5. 꿈은 의미와 서술 사이에 주어진 주종 관계를 해체한다.
"프로이트 그리고 『꿈의 해석』이 보여준 글쓰기의 영향으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사와 서술의 모든 것이 전도되어 오히려 좋은 텍스트나 서술이란 본디 애매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좋은 텍스트나 서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이지, 또 다른 의미를 실어 나르기 위한 부수물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꿈의 해석』과 같은 작품을 계기로, 이런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는 수많은 상식, 예컨대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읽어 낸다는 사실조차 19세기 프로이트 이전에는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적어도 19세기 서술 주류에서는 이런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으며 아예 그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에는 작가만이 권위를 지녔다. 작가는 독자에게 텍스트의 모든 것을 수여한다고 간주되었으며,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하 질서는 너무도 확고했다."(270-1)
"(프로이트 이후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은 점점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이는 엄청난 해방이었다. 글을 짓거나 쓰면서 작가는 더 이상 무엇을 쓰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그 자체, 말하는 과정이 곧 문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말하면, 작가는 기존에 누리던 보호와 보장을 잃은 셈이다. 독서 행위에서 독자가 지니던 맹목적인 신앙은 사라지고 말았다. 19세기의 독자는 기본적으로 작가를 믿었고 그의 능력과 그가 쓴 것을 믿었다. 작가에게는 지고의 권위가 있었다. 20세기에 이르면, 작가의 권위를 독자의 권위가 대체한다. 나아가 독자는 작가의 권위를 위협하고 부정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더 이상 자기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나 그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작가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을 써낼 수 있기에, 독자는 작가보다 더 작품에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고, 나아가 작품 내부의 논리로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거부할 수도 있다."(273-4)
10장 프로이트와 더불어
"다윈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프로이트에 이르는 사상 조류는 점점 더 개인을 추구하며 개인화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개인주의의 기초 위에 성립한 것으로 언제나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개인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그의 이론에서 집단과 사회는 개인 억압의 근원일 뿐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종족 및 우생학과 관련한 새로운 집단주의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논제가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민족이나 종족 같은 집단에도 정신의 구조가 존재하는가? 프로이트가 개인의 차원에서 창안했던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 민족이나 종족과 같은 기타 집단 단위의 인식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가?" "나치 독일이 유대인 프로이트의 이론에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그때까지 프로이트 학설의 영향력은 잠재적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전쟁에 대한 반성, 특히 나치 독일의 집단 행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짐에 따라, 프로이트의 사유는 잠복기를 끝내고 발현되어 정신분석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282-3)
"정신분석은 상징에 매우 민감해 많은 곳에 적용할 수 있다." "가령, 영화는 1초에 24프레임으로 구성되지만 아무도 프레임 별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수많은 이미지 프레임이 연결된 허상이다. 영화와 꿈은 이 점에서 가장 닮아 있다. 중요하지 않은 자잘한 부스러기가 수없이 그 사이에 끼어 있다. 하나의 장면은 누군가의 연출에 의해 설정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장면에도 중요하지 않은 부스러기는 수없이 포함된다. 이 이미지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꿈에서 사용되는 일상생활의 파편과 유사하다. 프로이트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관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것들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행하는) 분석의 중요한 기능은 확실한 답안을 제출하는 데 있지 않고 더욱 풍부한 의미를 추구하는 길을 찾는 데 있다."(290-3)